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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군 청천면의 청천리 고가(중요민속자료 제147호)는 충북양로원으로 더 알려졌다. 현재 양로원 건물을 신축하여 고가는 그 사무실로 사용한다. 현존하는 건물은 사랑채·안채·안채의 광채 그리고 후원의 사당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문간채 앞에 마당과 행랑채가 자리하여 그 규모가 상당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송시열의 7대 손인 송근수(1818∼1903)는 좌의정을, 8대 손인 송병서(1839∼?)는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 기록만으로도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가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가세가 바로 집의 규모로 나타난 것이다.



산을 등지고 차분하게 앉은 청천리 고가는 풍수가가 집터를 잡은 듯하다. 집 좌우로 늘어선 산세山勢며 앞으로 바라보이는 산들로 포근한 데다 양지도 바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터다. 배치는 다른 집과 차이가 완연하다. 병렬로 배치한 안채와 사랑채는 규모가 비슷한 ㄷ자 형태다. 사당도 안채와 사랑채 중간 산밑에 위치하여 전체 배치는 대칭 구조다.

이렇듯 정형화된 배치로 아기자기한 맛은 없다.

한편 사랑채의 위압적인 규모로 볼 때, 이 집을 계획한 사람은 권위를 내세웠던 것 같다. 충북양로원 원장은 이 집을 지은 사람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의 8대 손이라고 한다. 괴산군청 자료에는 7대 손인 송병일이 지었다는데 앞서 언급한 자료를 보면 의심스럽다. 이 집은 뒷산에 우암의 묘와 신도비 그리고 인근에 우암이 노년에 머물렀다는 화양계곡이 있으니 송씨 집안의 종가宗家임은 분명하다. 구전대로 송시열의 8대손이 지은 집이라면, 그 시기는 19세기 중반쯤으로 보인다.

사랑채의 건립 시기는 1900년 이후다. 그 근거는 사랑채에 초각된 보아지 및 종도리와 뜬창방 사이의 화반 때문이다. 집의 층고가 매우 높은 것은 갑오경장 이후 신분 질서가 무너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특히 초각된 부재들은 대군 등과 같이 왕실 집안이 아니면 지체 높은 사대부가라도 쓰지 못했다.



명문 사대부가의 위엄을 드러낸 사랑채

사랑채는 전면 6칸에 측면 4칸인데 양측면이 1칸씩 돌출된 ㄷ자 형태다. 몸채는 팔작지붕이고 돌출부분은 우진각지붕인 2고주 5량 전후퇴 집이다. 일반적인 전후퇴 집의 몸채는 가운데 1칸 앞과 뒤에 반 칸을 설치한 측면 2칸인데, 이 집은 몸채가 2칸 반으로 다른 집보다 크다. 또한 칸살도 넓게 잡아 상대적으로 더 크게 보인다.

잘 다듬은 2벌대 기단 위에 우뚝 솟은 사랑채 4칸 중 좌측 2칸이 대청이고 우측 2칸이 방이다. 큰사랑이 4칸임에도 가운데 기둥을 빼고 지어 대청보다 더 큰 게 재밌다. 활동이 많이 일어나는 큰사랑을 넓게 쓰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송씨 집안 종가이기에 많은 사람이 모일 장소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사랑채 북쪽 모퉁이에 1칸 방과 그 남쪽 하부에 아궁이를 설치한 다락을 드렸다. 이 방은 큰사랑의 주인을 위한 내실로 보인다. 사랑채 건넌방은 북쪽에서부터 방 2칸·마루·누마루순으로 배열했다.

사랑채답게 누마루를 당당하게 앞에 배치했다. 건넌방에는 뒤쪽으로 1/4칸을 기둥 밖 처마 밑으로 내밀고 다락을 드렸다.

사랑채 구조가 매우 특이하다. 대들보 위에 종보를 들보가 아닌 고주 위에 걸쳤다. 또한 대들보도 같은 고주에 걸침으로써 그 높이가 툇보와 같은 맞보 형식이다. 종보가 굳이 필요없는데 왜 어렵게 지었는지 궁금하다. 보통은 현재 종보 자리에 대들보를 걸고 전후퇴에 툇보를 거는 게 일반적이다. 또 그것이 부재를 절약하는 방법이다.

사랑채를 으리으리하게 보이고자 몸채 지붕을 크게 만들었다. 방의 규모를 늘리려고 깊이를 2칸 반 규모로 만들었기에 자연스럽게 지붕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지붕의 물매까지 급하게 잡아 지붕이 매우 커졌다. 그렇다 보니 내부 대공도 커져 종도리 밑에 뜬 창방을 별도로 설치했다. 판대공이 너무 커서 괴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러한 지붕 구조는 옥에 티랄까, 안정감보다 중압감을 느끼게 한다.



양로원 개조한 안채와 사당

안채는 전면 7칸에 측면 4칸인 전후퇴 집이다. 몸채의 칸살 크기는 사랑채보다 작다. 몸채는 팔작지붕이고 날개는 삼량집으로 맞배 지붕이다. 7칸 중 가운데 5칸은 안방 3칸에 대청 2칸이다. 안방에 붙은 2칸 반 부엌은 양로원 노인들을 수용하는 방으로 개조했다. 특이하게도 건넌방은 대부분 구들방인데, 이 집은 칸 반 광을 배치하고 툇간 툇마루를 연장하여 광과 날개채의 방을 복도로 연결했다.

전면 4칸에 측면 칸 반 전퇴 집인 사당은 안채와 사랑채 뒤쪽에 자리한다. 전퇴에 툇마루를 깔고 내부에도 마루를 깔았다. 여기에서도 한때 노인들이 거주했다. 사당은 대부분 칸이 홀수인데 짝수인 경우는 이곳에서 처음 본다. 좌우 각 1칸은 고창을 설치하고 가운데 2칸은 문을 달았다. 평면으로 보아 가운데 2칸에 2대조씩 모시고 나머지 칸을 제기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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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1990년대 건물을 신축하기 전까지 충북양로원으로 사용했다. 1944년 현 원장의 시아버지께서 불우한 노인을 돌보는 양로원으로 사용한 것이다. 차재윤이라는 분이 이 집과 전답을 매입하여 원장의 시아버지에게 운영을 맡기면서 충북양로원이 문을 열었다. 당시 양로원이 전국에 4곳밖에 없었으니 이곳 양로원이 우리나라 시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집에 대한 자료를 찾으면서 종가까지 남에게 넘긴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우암 송시열이라는 이름 석자가 갖는 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로 동국18현에까지 배향된 그가 마지막 노년을 보낸 이곳에는 가문의 재산도 많고 그 영향력도 대단했을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1894년까지 판서를 배출한 집안인데 일제강점기 때 갑자기 가세가 기운 이유가 무엇일까. 얼마나 어려웠으면 조상의 묘를 모신 이곳을 떠나야만 했던 것일까. 이 집에서는 다른 집과 비교할 수 없는 당당함이 풍겨 나온다. 그러한 느낌 때문에 한 가문의 몰락이 더욱 궁금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택 용어 사전

· 대공 : 들보 위에 세운,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

· 대들보 : 작은 보에서 전달되는 하중을 받기 위해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지른 보.

· 동국18현 : 문묘에서 배향하는 한국의 유학자들.

· 들보 : 칸과 칸 사이 두 기둥을 건너질러서 도리와는'ㄱ'자, 마룻대와는'十'자 모양을 이루는 나무.

· 맞배(박공)지붕 : 옆면이'ㅅ'자 모양으로 된 지붕.

· 맞보 : 건물 중심에 세운 기둥에 두 개의 보가 마주 끼어 걸린 들보.

· 보아지甫兒只 : 기둥머리에 끼워 보의 짜임새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

· 우진각지붕 : 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

· 종도리(마룻대) : 용마루 밑에 서까래가 걸리게 된 도리.

· 종보(마룻보) : 대들보 위의 동자기둥 또는 고주高柱에 얹혀 있는, 중도리와 마룻대를 받치는 들보.

· 창방 : 도리를 받치는 모진 나무인 장여 밑에 다는 넓적한 도리.

· 칸살 : 집의 도리 네 개로 둘러막은 면적.

· 툇간 : 원칸살 밖에다 딴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

· 툇마루 : 원칸살 밖에 달아 낸 마루.

· 툇보 : 툇기둥과 안기둥에 얹힌 짧은 보.

· 툇집 : 전후 면에 툇기둥을 세우고 원채에 붙여서 지은 집.

· 팔작지붕 :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아 지은 집.

· 화반 : 기둥을 세운 뒤에 처음으로 끼우는 중방인 초방 위에 장여를 받치기 위해 화분·연꽃·사자 등을 그려 끼우는 널조각.




글 최성호 사진 윤홍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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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송씨 종가가 양로원으로 바뀐 까닭은 괴산 청천리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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