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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임꺽정》을 집필한 벽초 홍명희가 새롭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독립운동가지만 월북하여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냈기에 한때 그에 대한 이야기를 금기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남북 화해 무드를 타고 그의 문학을 편하게 이야기하고, 괴산군에서는 매년 가을 홍명희 문학축제를 개최할 정도다.
이러한 것을 모든 사람이 환영하지는 않는다. 홍명희 생가는 문화재청 문화재명은 '괴산 동부리 가옥'으로, 괴산군청 홈페이지에는 그의 아버지인 '홍범식洪範植가옥'으로 나온다. 괴산군청 관계자는 주민 중 일부가 월북한 공산주의자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를 반대하기에 일제에 항거하여 자결한 홍범식 가옥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 집도 홍명희만큼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4년 중요민속자료 146호(이복기굃馥基가옥)로 지정됐으나, 그후 소유주의 요구로 1990년 문화재 지정에서 해제됐다가 홍명희가 다시 세상에 주목을 받으면서 괴산군에서 매입하여 복원한 것이다.
1730년(옹정雍正8년)경 건축한 집이지만, 현재 모습은 1860년대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 순국한 홍명희의 부친인 홍범식의 고택이자, 홍명희가 괴산 3·19 만세 시위를 준비한 역사적 장소다. 집안은 홍명희가 만세 시위로 옥고를 겪는 동안 가세가 기울어 인근 제월리로 옮겼다가, 출옥한 후 서울로 옮겼다. 그후 홍명희는 가끔 이곳을 찾아 지친 심신을 달랬다고 한다.

 

 

 

월북 문인 생가 … 문화재적 가치는 어디로

 

이 집은 많이 고쳐져 사랑채와 안채 부재 중 남은 것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1984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할 당시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사랑채에 딸린 아랫사랑채와 사랑채로 통하는 문, 뒤뜰의 광채가 전부였다. 대문간채와 담 등은 새로 지은 것이고 안채 구성도 지정 당시 평면과 비교하면 차이가 많다.
전반적으로 고택보다 영화 촬영 세트를 보는 느낌이 강하다. 중요민속자료 지정에서 해제된 후 방치되는 동안 원형 보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됐기 때문이다. 괴산군에서 이 집을 매입하여 복원하기 직전 필자가 찾았을 때도 이미 폐가에 가까웠다. 그렇다 보니 이 집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보다 이 집의 특성과 문학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홍명희 생가 그리고 독립운동의 산실이라는 역사적 가치를 찾는 것이 더 낫다.
현재는 집터도 훨씬 더 넓게 잡아 복원했다. 대지가 1200여 평으로 한때 50여 명이 살던 대갓집이었으니 그럴 법하다. 또한 홍명희 집안을 보면 증조부인 홍우길이 이조판서를, 할아버지 홍순목은 영의정을, 아버지 홍범식이 금산군수를 역임했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따라서 현재 복원 모습은 원래 모습과 비슷했을 것이다.

 

 

복원 - 고택인가, 영화 세트인가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보기 드문 병렬 배치다. 이러한 배치는 안채에 대한 감시 내지 보호 기능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지 규모만 보아도 사랑채가 뒤로 들어갈 이유가 없는데 왜, 이렇게 배치했는지 궁금하다.

 

 

안채는 'ㄷ'자 안채 앞에 '一'자 곳간채가 맞물린 '口'자 형태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은 측면에 자리한 데다 그곳에 딸린 곳간채 때문에 정면에서 찾기 힘들다. 자연스럽게 내외하는 구조다. 안채는 3칸 대청을 중심으로 한 안방과 건넌방이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이러한 형식은 전북 정읍 김동수 가옥 외에는 흔하지 않다. 대청은 전면 3칸, 깊이가 1칸 반 규모로 넓다. 복원하기 전 안채는 완벽한 '口'자로 건넌방은 동쪽이 반 칸 규모 툇간이었으나 현재는 툇마루다. 고증을 거쳤다지만 그래도 최근 형태로 복원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사랑채는 잘 다듬은 2벌대 기단 위에 앉힌 전면 5칸에 측면 2칸 규모다. 반 칸이 전퇴인 방의 깊이는 1칸 반 규모로 조금 넓게 느껴진다. 5칸 규모 중 4칸은 툇마루를 가졌지만 맨 우측은 전후 각각 1칸으로 나누어 방과 부엌으로 꾸몄다. 사랑마당 남쪽에는 다른 집에서 보기 드문 아랫사랑채가 위치한다. 4칸 규모로 부엌 1칸, 방 2칸, 대청 1칸이다. 낮은 외벌대 기단으로 사랑채보다 덜하지만 대문 쪽으로 낮은 담을 둘러 마당을 형성하여 그런 대로 격식을 갖췄다. 이곳은 주로 손님들이 묵던 방으로 보인다.
안채 뒤 동쪽에 3칸 규모 사당이, 서쪽에 6칸 규모 'ㄱ'자형 광이 자리한다. 또한 건넌방 동쪽 마당에 각각 1칸짜리 쌀 뒤주와 김치광이 자리한다. 광의 규모에서 과거 이 집의
살림살이가 만만치 않았음을 느낀다.
이 집은 바로 뒷산과 면하고 도로보다 낮아 지금의 모습은 조금 옹색하게 보인다. 앞으로 흐르는 개울 바닥이 높아지자 범람을 막기 위해 둑을 쌓으면서 집이 도로보다 낮아졌기 때문이다. 둑이 없었을 때 이 집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참으로 시원하고 풍요로웠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으로 집 분위기가 변한 것인데, 이처럼 집을 볼때는 세월의 흐름까지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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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 생가를 보면서 문화재적 가치 이전에 질곡의 근현대사를 다시 보았다. 일제 강점에 온몸을 던져 항거한 홍씨 가문은 결국 이 집을 떠났고, 해방 후 복잡했던 정세로 월북했다. 일제에 항거한 사실을 뒤로하고 월북했다는 이유로 이 집의 보전 가치에 대한 논란이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이 집은《임꺽정》의 문학사적 가치는 차치하더라도 보전 가치가 충분했다. 만일 홍명희가 월북하지 않았다면 이 집은 그 어떤 고택 못지 않게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집에까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 최성호 사진 윤홍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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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근대 역사소설의 이정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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