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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1리 한개마을은 성산星山이씨가 600년 가까이 살아온 집성촌으로 안동 하회마을, 안강 양동마을, 함양 개평마을과 함께 영남 4대 전통 마을로 꼽힌다. 배산임수형 지세로 뒷산인 영취산 줄기가 마을을 감싸듯 좌청룡 우백호로 뻗고 앞에 백천이 흐른다. 이러한 풍수에 따라 마을 어귀에 평민 가옥을, 마을 안쪽과 뒷산 쪽에 양반 가옥을 배치했다. 가옥과 가옥을 잇는 고샅 길이자, 가옥을 둘러싼 돌담은 향토색이 짙은 서정성을 느끼게 한다. 마을 안 교리댁 · 북비고택 · 한주종택 · 월곡댁 · 진사댁 · 도동댁이 경북민속자료고, 하회댁 · 극와고택 · 첨경재 · 삼봉서당이 경북문화재자료고, 3.3㎞에 달하는 돌담길은 국가등록문화재다. 초가을 조선시대 중 · 상류층의 생활상을 잘 간직한 한개마을을 찾아 전통의 향기에 흠뻑 취해 보자.

참고 문화재청, 성주군청 글 · 사진 윤홍로 기자



한개마을은 크다는 뜻의 '한'과 나루라는 뜻의 '개'가 합쳐진 순 우리말로, 그 이름은 옛날 마을 앞 낙동강 지류인 백천에 있던 한개나루에서 유래한다. 한개나루는 조선시대 대구와 칠곡을 거쳐 월항과 초전, 김천, 서울로 올라가는 물목이었다.
영남 제일의 길지라 불릴 만큼 한개마을은 주산과 안산, 좌청룡과 우백호가 뚜렷하다. 주산인 북쪽 영취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청룡과 서남쪽으로 뻗은 백호가 마을을 감싸고, 서남쪽으로 백천과 이천이 합수해 동으로 흐르며, 앞쪽에 안산이 자리한다.
조선 세종 때(1440년대) 진주목사를 지낸 이 우가 한개마을에 처음 정착했는데,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 정상에 있는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과 무관하지 않다. 구전에는 "이 우가 세종에게 사직 인사를 올릴 때, 세종이 그의 고향을 묻고 왕자들의 태장이 있는 서진산 밑으로 이주하도록 이르셨다"고 한다.

 

 




성산 이씨는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한 이정현에 와서 한개마을에 자리를 잡는다. 그의 외아들 이수성은 달천, 달우, 달한, 달운 네 아들을 두었다. 이들이 마을에 정착해 백파佰派, 중파仲派, 숙파叔派, 계파季派의 파시조가 되고, 각 파의 자손이 집성촌을 이룬다. 옛날에는 마을 한복판과 뒷부분을 한개 또는 윗마〔上村〕, 아랫부분을 아랫마〔下村〕, 길거리 부분을 도촌道村이라 불렀다. 중파는 마을에 많지 않고 윗마와 중앙 안길 서쪽에 백파와 숙파의 자손이, 아랫마에 계파의 자손이 모여 산다. 예안댁이 계파에, 교리택과 북비고택 · 한주종택 · 하회댁이 숙파에 속한다. 이러한 혈연 관계를 말해주듯 한주종택을 제외한 숙파에 속하는 세 채의 가옥이 담을 공유한다.


고샅길에 풍기는 한옥의 향기
토석담이 빚어낸 한개마을 고샅길은 남부지역 특색에 맞게 전통 가옥과 조화를 이룬다. 담은 크게 외곽 담과 내곽 담으로 나눈다. 외곽 담은 가옥들이 대체로 경사지에 있어 산지에 접한 담과 동쪽의 측면 담은 높지만, 앞뒤 가옥을 구분한 담은 낮은 편이다. 내곽 담은 가옥의 처마보다 낮아 담 양측의 영역을 시각적으로 차단 또는 연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을 큰길은 'Y'자 형태로 갈림길에 진사댁이, 왼쪽 길에 교리댁 · 북비고택 · 월곡댁이, 오른쪽길에 하회댁 · 극와고택 · 한주종택이 있다. 가옥 배치는 대부분 튼 'ㄷ'자와 튼 '口'자 형태로 북부지역의 폐쇄적인 '口'자형과 달리 개방적이다.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 등 대지 형태에 따른 구조가 다양하고 가재도구나 유교적 생활 공간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세종대왕자태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에 자리한 이 태실은 세종 때 1438년부터 1442년에 걸쳐 조성했다. 태실은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그 태를 넣어두는 곳이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세종의 적서嫡庶인 18왕자와 세손인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룬다. 전체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 모습을 유지하지만 세조(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하고 석물이 파괴됐다. 세조 태실은 즉위 후 귀부를 특별히 마련해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웠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교리댁
1760년대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석구가 지은 집이다. 마을 안 길로 올라가면 토석담 사이로 서향한 대문채가 언덕길을 따라 높이 보인다. 대문채, 사랑채, 서재, 중문채, 안채, 사당 등 6채를 튼 '口'자형으로 독립 배치했다. 사랑채 앞 하마석은 현존하는 전국 유일의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중문채를 두었는데, 중문과 사랑채 사이에 담을 쌓아 내외담을 만든 것이 흥미롭다.

 

 


북쪽으로 문을 낸 북비고택
1774년에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던 훈련원 주부 이석문이 지은 집이다. 그는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를 애도하고자 북쪽으로 사립문〔北扉〕을 낸 집을 짓고 평생을 은거했다. 1821년에 그의 손자인 사헌부 장령 이규진이 정침과 사랑채를 짓고 북비문 안 맞배집을 서재로 고쳤다. 안채를 비롯해 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북비댁 등 5채가 있다. 북비댁은 담을 별도로 쌓아 집 속의 집처럼 느껴진다.

 

 


남부와 북부 가옥의 만남 하회댁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고 현 소유자의 부인이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에서 시집왔다고 해서 하회댁이라 부른다. 배치는 'ㄷ'자형 안채와 전면 '一'자형 중문채가 더해진 튼 '口'자형으로, 남부형과 북부형의 중간 형태다. 안채 정침 우측으로 독립된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와 정침을 토석담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협문을 내어 안팎을 연결했다. 대가족을 위한 공간 구성과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면서 상호 연결한 구조가 독특하다.

 

 


마을 내 중심인 한주종택
1767년에 이민검이 문방동에 있던 각감사택을 이건하고, 1866년 성리학자인 한주寒洲이진상이 중수한 집이다. 이진상의 호를 따 한주종택 또는 안주인이 상주 동곽에서 시집왔다 하여 동곽댁이라 부른다. 이 집은 크게 정자가 있는 한주정사 구역,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구역으로 구분한다. 한주정사로 들어가는 대문은 남향이고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은 동향이다. 정사와 안채 사이에 담을 쌓고 작은 협문과 일각문을 내어 출입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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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 성주 한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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