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메뉴보기
 

문화재청 자료에는 김 주가 태어난 곳이라고 하지만 그 시점이 1606년인 점과 기와의 명문을 고려해 본다면 오히려 이 집을 지은 사람이 아닌가 한다. 누가 지었든 간에 1640년경에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면 남악종택도 현재 남아있는 고택 중 꽤 나이 먹은 축에 속한다. 나이가 먹었다는 증거는 안채 대청판장문에 설치된 중간 문설주다. 창문 중간에 문설주가 있으면 최소한 임진란 전후에 지어진 집으로 봐도 무방하므로 1640년대 지어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보기 드문 사가 악공 사랑채

국사봉을 배경으로 동남향으로 배치된 이 고택은 정면 9칸, 측면 7칸의 ㅁ자형으로 안채에서 사랑채가 돌출된 형태다. 안채는 전면 5칸 측면 7칸으로 초가인 6칸 규모 행랑채가 안채 바로 앞에 위치한다. 행랑채를 전면에 내세워 짓지 않은 것은 사랑채 조망을 위함이다. 그러다 보니 행랑채와 안채 사이가 좁아 마당이라고 하기에는 옹색한 규모가 됐다. 단지 안채를 감싸 보호한다는 정도라고 할까.
사랑채는 전면 3칸 측면 3칸 규모인 겹처마에 익공집이다. 사랑채가 익공인 것은 일반 집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다. 사가는 대부분 민도리집이다. 조선시대 말기 이전까지 익공집을 지었던 사람은 모두 왕실 사람뿐이다. 이곳에서 익공집이 가능했던 것은 서울과 많이 떨어져 중앙 권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두를 감싸 뒤틀림을 방지하는 새 날개와 같은 부재가 있다 하여 익공이라 불린다.
익공 부재는 장식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 기능적인 요소들만 남겨 놓았다. 그러나 후면 보아지를 초각해 장식성을 높였다. 이렇게 장식이 약화된 익공을 직절익공이라 한다.
이런 직절익공은 바로 근처에 있는 예천 권씨 종택 별당(보물 제 457호)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예천 권씨 종택(중요민속자료 제201호) 안채 보아지를 보면 이 집 사랑채 보아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연관성을 주목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예천 권씨 종택이 임진란(1592년) 전에 지어진 집으로 추정되고 권씨 종택 안채 보아지와 이 곳 사랑채 보아지 형태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분명 권씨 종택을 참고해 지은 집이다.


설계부터 고민 흔적 역력한 사랑채

사랑채는 누마루처럼 지었다. 밖에서 보면 경치 좋은 곳에 지어진 누각처럼 보일 정도로 높고 당당하다. 사랑채에는 <가학루駕鶴걹>라는 당호가 붙어 있는데 학을 타고 노니는 곳이라는 뜻에 걸맞을 만큼 전망이 좋다. 집 터를 잡을 때도 이러한 점이 우선적으로 고려된 듯하다. 사랑채는 좋은 전망을 잘 볼 수 있도록 구조가 매우 개방적인데 사랑채 전면 한 칸은 모두 마루로 깔아 언제든지 방에서 나와 경치를 즐기며 편히 쉴 수 있게 했다. 사랑채 난간은 계자난간으로 만들어 품격을 높였다.
사랑채 평면을 보면 설계에서부터 많은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 측면은 세 칸인데 가운데 칸인 어칸은 측면 칸보다 훨씬 넓게 만들었다. 공간을 다양하게 분할해 활용키 위한 의도 때문이다. 사랑채는 후면부 두 칸이 생활공간인데 방 구획이 다양하다. 개인공간과 손님 등을 맞이하는 공용공간으로 나눠 계획하고 개인공간은 작지만 기능적으로 계획된 점이 돋보인다. 반면 공용공간은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도록 넓혀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공용공간인 사랑웃방을 보면 안쪽으로 반 칸을 시종이 거처하는 방으로 만들었는데 이 방은 바로 안채와 통해 신속하게 주인 지시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 넓은 어칸은 손님을 접대하는 방이다. 한 칸은 구들로 한 칸은 마루로 만들어 계절에 따라 적절히 터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손님 접대 공간인 사랑웃방은 문을 모두 들어 열 수 있게 함으로써 개방성을 높였다. 이러한 세세한 부분까지 배려한 집주인 안목을 높게 사고 싶다.


젊은 며느리와 신랑의 사생활을 보호하다.

익공집인 사랑채가 매우 개방적인 반면 안채는 평범한 민도리집으로 경상북도 전형적인 집 구조인 ㅁ자 구조다. 안채는 중문 쪽 두 칸이 부엌이고 그 위에 세 칸이 안방 그리고 맨 위쪽에 끝방을 배치했다. 안방 세 칸은 다른 집에 비해 규모가 큰 편으로 이렇게 세 칸 규모 방을 모두 측면에 배치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안방 옆 대청 쪽에 있는 방은 안방에 부속된 모방이었을 것이다.
건넌방 부분을 보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재미있는 구성이다. 건넌방은 한 칸 규모 마루를 가지고 있으며 건넌방으로 들어가려면 이 마루방을 통하도록 해 건넌방의 독립성을 보장해준다. 또한 건넌방 앞에 놓인 안사랑채는 건넌방 마루에서 직접 들어갈 수는 없지만 뒤쪽 툇마루를 통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구조다. 이러한 평면 구성은 젊은 며느리와 신랑의 은밀한 생활을 시부모 간섭 없이 보장해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젊은 부부 생활을 철저하게 보장해주는 평면을 조선시대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데 이곳에서 보게 돼 매우 흥미롭다.







심한 고저를 이겨낸 목수의 지혜

경사지에 위치한 집은 고저 차가 심한 편이다. 그러나 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높이 차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첫 번째로 집이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집이 단순한 ㅁ자 형태가 아니고 좌우가 돌출돼 공간을 분할해 한눈에 집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집에 고저차가 심함에도 그것을 느낄 수 없게 한다.
두 번째로는 목수가 고저 차를 적절히 이용했다. 예를 들어 안행랑채 기단을 보면 뛰어난 목수 재치를 엿볼 수 있다. 안행랑채 모방을 옆에서 보면 심하게 경사졌는데 기단을 뒷부분에 맞춰 높일 경우 전면 기단이 높아져 출입이 불편해질 것을 우려해 이를 완화하고자 기단을 경사지게 설치하고 기둥으로 높이를 조절한 것이다.
반면 이 집 구조를 보면 조금은 세련되지 못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대청 건넌방 쪽 벽체에서 건넌방 쪽 지붕을 구성하는 서까래 마구리가 보인다. 이는 안채 대청 지붕을 높게 만들려다 보니 건넌방 지붕에 올라타는 형식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목수 능력이 출중했다면 이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같은 지붕 형식을 한 예천 권씨 종택에는 치고 나온 마구리가 없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예천 권씨 종택 건물을 참고해 만든 것으로 보이나 권씨 종택을 지은 목수보다는 솜씨가 떨어진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으로 안채 후면에 도리와 장혀가 돌출돼 있다.
구조 안정성을 위해 뺄목 정도의 길이(약 30cm) 이하로 해도 상관이 없기에 굳이 이렇게 길게 뺄 필요는 없다. 도리와 장혀를 돌출시킨 것은 권씨 종택도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미스터리다.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기자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고택을 찾아서] 젊은 부부 은밀한 사랑을 보호한 의성김씨義城金氏 남악종택南嶽宗宅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