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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자료에 의하면 예천 권씨 종택(중요민속자료 제201호,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166)은 초간草澗권문해權文海(1534~1591) 선생 조부祖父인 권오상權五常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임진란 전에 지어진 집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권문해 선생 조부가 지었다고 한다면 이 집 건립 연도는 1500년대 초반일 것이다. 여러 곳에서 보이는 고식古式구조를 통해서도 이때쯤 지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집은 ㅁ자형 안채 앞쪽 우측(집을 바라보았을 때)에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누마루 형식 별당이, 그 우측 뒤에 사당이 배치됐다. 집 구조를 보면 안채와 안 사랑채 구조가 완결형이고 안 사랑채 대청에서 별당채와 연결된 것으로 보아 별당은 나중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별당 평면은 단순하다. 정면 4칸 측면 2칸 평면에서 좌측 2칸이 온돌이고 나머지 6칸이 대청이다. 안채와는 툇마루로 연결됐으며 대청 전면은 전체를 개방하고 측면과 후면은 판장벽으로 막은 후 칸마다 양개판장문을 설치했다. 후면 가운데 칸에는 외짝 출입문을 설치해 뒤편 안채와 연결한 점이 이채롭다.

 

조선 초 건축양식 간직한 별당

별당이 보물(제457호)로 지정된 것은 조선 초기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건물과 가장 다른 점은 익공집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주택 대부분은 민도리집으로 이 집 안채 역시 민도리집으로 지어졌다. 왕실 사람이 사는 집이나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에서 익공을 채택하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 사가私家에서 이렇게 익공을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초익공집은 분명하나 익공에 화려한 초각草刻이 없다. 기둥 뒤쪽 보아지 부분에 초각이 있기는 하지만 앞에 드러나는 부분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러한 익공을 직절익공直切翼供이라 하며 하회마을 충효당도 이와 같은 형태다. 어쨌든 이러한 익공집은 건립 시기가 시대 상황이 불안한 조선 초였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측면 가운데 기둥에는 직절익공을 사용하지 않고 물익공 형식으로 만들었다. 나중에 고치면서 이것만 남겨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주인 증언으로는 원래부터 그랬다고 한다.
다른 곳은 직절익공으로 하고 이곳만 물익공 형식으로 한 것은 내부에 있는 충량(한쪽 끝은 기둥머리에 짜이고 다른 쪽 끝은 들보 중간에 걸친 보)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충량 부분 익공은 안과 밖 형태가 물익공으로 같다. 대들보와 도리는 설치되는 높이가 달라 일반적으로 충량은 자연스럽게 꺾인 나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별당 충량은 대들보에 걸리는 부분을 수평으로 가공했다. 벽에 근접해 직각으로 꺾어 내리고 주두에서 다시 직각으로 꺾어 놓다 보니 다른 대들보처럼 보아지 부분을 길게 늘일 수가 없어 보아지를 짧은 물익공 형식으로 처리한 것이다.

 



 

충량에서 보는 목수의 놀라운 눈썰미

이곳에 설치된 충량을 처음 보았을 때 나무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과 달라 놀랐다. 충량 위에는 팔작지붕 추녀 부분을 받치고자 외기도리를 설치하기에 상부에 걸리는 하중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곳에 설치된 충량 형태는 구조 개념으로 볼 때 합리적이지 않다. 가공된 형태가 목재 특성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목재는 목질 방향으로 강한 힘을 발휘한다. 목질에 직각 방향으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기에 충량을 직각으로 꺾어 가공한 것은 나무 특성을 무시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가 가공된 모습이 목질 방향을 거스르지 않고 있다. 충량으로 사용된 나무는 원래부터 거의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던 것이다. 나무를 선택해 가공한 목수 눈썰미가 놀랍다.
별당 대공과 종보를 받치는 동자주 또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다. 대공은 화반 형태로 아랫부분은 연꽃 하엽이 조각돼 있고 상부는 화반대공과 비슷한 모양이다. 또한 장혀를 첨차로 받치고 있는데 이것도 초각이 돼 있어 매우 화려하다. 종보를 받치는 동자주에서도 같은 양식이 보인다.
종보를 받치는 동자주는 포형 동자주로 행공첨차에는 초각을 놓고 보 방향으로는 기둥머리에 물익공 장식을 해놓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이라는 맹씨 행단 행공첨차와 비교해보면 맹씨 행단 행공은 상부를 약간 오목하게 가공했지만 이곳 행공첨차는 평평하지만 더 화려하다. 종보에 쓰인 글은 계회契會를 마치고 써놓은 명단이라고 한다.

 

 

화려한 별당에 비해 안채는 매우 검박하게 느껴진다. 안채는 경북지역 전형적 형태라고 할 수 있는 ㅁ자형 집으로 높게 만든 단 위에 지었다. 앞마당과 중문과의 높이 차가 사람 키 정도고 안사랑채 바닥까지는 더 높아 상대적으로 집이 높게 보여 위압감을 준다. 별당채가 앞을 가리고 있어 다소 감소했지만 별당채가 없었을 때는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안방이 있는 쪽은 두 칸으로 겹집구조이고 중문이 있는 쪽은 한 칸 규모다. 안방 옆에는 도장방이고 아래쪽은 세 칸 부엌이다. 판장벽 외벽에서 반빗간(집에서 반찬을 만드는 곳, 찬간饌間이라고도 한다)의 잔형을 볼 수 있다. 부엌 판장벽 판재는 자귀로 다듬었는데 이는 쉽게 볼 수 없는 경우다. 건넌방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면에는 한 칸 반으로 돼 있는데 최근 반 칸을 줄여 한 칸 규모로 만들었다.

 

권문세가에 이르러 지은 별당

전체적으로 안채는 퇴칸이 없는 북방형 겹집이다. 안채에 퇴칸이 없다보니 집 구조가 고주가 없는 삼평주 오량집이 됐다(후대에 지어지는 한옥 대부분은 전퇴를 두기 때문에 일고주 오량집이다). 삼평주이므로 가운데 기둥을 중심으로 맞보를 설치하고 그 위에 종보를 걸었다.

 





 

안채에서 발견되는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면 우선 퇴칸 또는 툇마루가 없다는 점이다. 조선 후대로 갈수록 집에 대한 쓰임새가 늘면서 퇴칸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곳은 퇴칸 또는 툇마루가 전혀 없다. 건넌방 뒤편에 쪽마루를 두었을 뿐이다. 현재 안방 앞에도 쪽마루가 설치돼 있으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면에는 없는 것으로 최근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안채 보아지를 보면 초각이 돼 있다. 후대에 지어진 집에는 보아지를 순수하게 기능적인 면만 따져 놓기에 형태가 매우 단순하다. 세 번째는 대청 뒤편 판장문 가운데 문설주가 서 있다는 점이다. 쌍여닫이문 가운데 문설주가 있으면 임진란 전에 지어진 집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런 몇 가지가 이 집이 지어진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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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는 규모가 크지 않다. 그렇기에 살림 규모가 늘면서 사랑채를 늘렸다. 권씨 종택 별당과 안채는 여러모로 비교가 된다. 특히 별당이 장식성이 강한 것은 고려시대 유풍流
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안채가 1500년대에 지어졌다면 개인적으로 이 별당을 지은 사람은 권문해 선생이 아닌가 생각한다. 별당은 권문해 선생이 낙향해 이곳에 다시 자리잡은 때인 임진란 직전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집을 지었을 당시는 권문세가權門勢家수준에 달하지 않아 검소하게 안채를 마련했지만 후손인 권문해 선생이 종 2품 관찰사까지 역임하면서 권문세가 반열에 들어서자 그것을 배경으로 당대 일반인은 생각할 수 없는 사치스러운 별당이 들어선 것이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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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소박한 안채 화려한 별당, 이유는? - 예천 권씨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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