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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도시공간의 지나친 과밀과 혼잡, 공해로 인한 주거환경의 질적 저하를 이유로 꼽는다. 시골에서 성장한 후, 도시에서 중·장년기를 보낸 사람들일수록 더하다.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으로 친구와 함께 나란히 황토집을 짓고 이주해 사는 정영순 씨(57세)가 그러하다.

정영순 씨는 음성의 평범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 학업을 마치고 출가해 가족들 뒷바라지를 하면서 여느 사람들처럼 살았다.

나이 쉰이 되던 해, 자꾸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시골에 내려가 살아야지 하고 맘먹었다. 몇 번이고 곱씹어 생각해도 병약한 다 큰 아들을 위해서라도 도시보다는 시골생활이 더 바람직했다. 그렇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남편에게는 차마 시골에 내려가 살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오랜 친구인 최금순 씨(57세)가 몇 년 전부터 전원주택을 지을 만한 땅을 찾아다닌다고 얘기했다. 고향이 강릉인 친구는 거주지인 서울하고 중간쯤에 전원주택을 지을 요량으로 주로 평창과 영월지역의 땅을 물색했다. 그는 친구에게 남편에게조차 드러내지 못한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친구도 그가 몸이 약한 아들이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고민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지냈다. 그런 터라 이왕 맘먹고 나선 길이면 함께 전원에서 살자고 했다.

평탄하고 원만한 삶을 바라는 모정(母情)
1998년 봄, 마침내 친구에게서 평창군 평창읍 대하리에 서로 이웃하며 살 만한 땅을 봐뒀다는 연락이 왔다. 며칠 후 친구와 함께 찾은 부지는 황토밭이었는데 뒤로는 야트막한 언덕이 감싸고, 앞으로는 폭 50미터의 평창강이 시원스레 흘렀다.

중앙고속도로 신림I.C에서 주천 방면 88번 국도와 평창 방면 82번 국도를 번갈아 탈 정도로 교통이 불편했지만 그만큼 때가 덜 탄 곳이라 맘에 와 닿았다.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터라 자칫 적적하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친구가 이웃에서 함께 산다니 위안이 됐다.

그렇게 해서 평당 10만 원에 350평의 땅을 매입했다. 건축을 시작한 것은 부지를 매입한 지 3년이 지난 2001년 말부터였다. 오랫 동안 남편을 설득하다 힘에 부쳐 포기했다가 정년퇴임을 하자, 아들을 위해 더 이상 전원행을 미룰 수 없어 단독으로 강행한 것이다.

정영순 씨는 부지를 매입하기 전부터 이미 맘속으로 황토집을 짓고 있었다.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전원행과 황토집은 동시에 진행됐다고 볼 수 있다. 그때부터 전원주택과 황토 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수백 장의 모눈종이에 황토집을 지었다 허물었다를 반복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 3월, 연건평 60평의 집을 지어 ‘동그라미 황토집’이라 명명한 이 집은 모정(母情)의 결정체인 셈이다. 동그라미 황토집 옆에는 친구 최금순 씨의 ‘황토사랑 후암’이 나란히 자리한다.

황토집 두 채가 앉혀진 부지 자체가 황토라 집을 짓는 데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땅이 젖으면 워낙 질퍽거려 기초공사를 할 때 트럭 20대 분량의 마사토를 깔았을 정도다. 두 집 모두 하나 하나 손으로 빚어 만든 황토벽돌을 쌓고 황토로 벽을 바른 전통 흙집이다.

설계는 친구하고 함께 했는데 흔한 직벽이 아닌 특이하게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직벽 구조인 본채와 원벽 구조인 별채가 좌우 대칭을 이루는 동그라미 황토집과 황토사랑 후암이 앉혀졌다. 모양세가 워낙 특이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활짝 열린 전원에서 평탄하고 원만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서까래 맞물려 기둥 없앤 별채
원벽의 별채는 거실을 겸해 사용하다가 친인척들이 찾아오면 맘껏 머물다 가라고 독립시킨 것이다. 정영순 씨는 “사실 본채도 별채처럼 특이하게 지으려고 했으나 그것만큼은 남편의 고정관념을 깨지 못해 아파트처럼 평범하게 지었다”고 귀띔한다.

단이 낮은 마당에서 침목을 딛고 별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몇 차례 놀라게 된다. 먼저 30평의 넓은 원룸형임에도 7미터로 높은 천장에다 기둥 하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강원도 진부 삼판에서 구입한 목재를 이용, 서까래를 맞물려 노출시키고 경상남도 함안산 대나무로 마감했다.

원래는 한 가운데 큼지막한 기둥을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읍장이 외지인 그것도 여자 둘이서 집을 짓는다고 하자, 둘러보러 왔다가 기둥을 세우면 답답하고 공간 활용도가 떨어진다고 조언했다. 그리곤 설계사를 보냈는데 그가 맞물림공법을 이용해 기둥을 세우지 않고도 집을 짓는 방법을 일러준 것이다.

두 번째는 실내에 서구식 벽난로가 아닌 전통 아궁이를 마련해 불을 때게 한 점이다. 처음에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불길이 잘 빠져나간다고 한다. 아궁이는 보조난방 기능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이나 여름 장마철 고기를 구워 먹는데 안성맞춤이다.

세 번째는 철근콘크리트 기초 위에 한 뼘 정도 황토를 다진 후 그 위에 대나무 돗자리를 깐 점이다. 돗자리를 거둬내면 쩍쩍 갈라진 황토바닥이 드러나는데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여러 가지 바닥 마감재를 생각했지만 황토기운을 살리는 데는 대나무 돗자리만큼 좋은 게 없었다고 한다.

넓은 거실에 다락이 딸린 온돌방 2개와 샤워부스가 마련된 화장실 2개를 들인 별채라 모든 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낯설기만 한 평창 땅에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려고 현지인을 구하려고 했으나 흙집을 짓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렵사리 구한 사람들도 벽체가 원형이다 보니 쌓다가 허무는 시행착오를 수 차례 반복했다. 또한 집이 지어진 후에는 싱크대며 책상, 피아노, 가전제품 등이 모두 직선이라 살림살이 들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흙 냄새 속에 되찾은 행복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를 향해 난 창을 열면 그야말로 12폭 병풍이 펼쳐진다. 물안개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날의 풍경은 진경산수화 그 자체다. 정영순 씨는 이곳에서 주로 서예를 하며 보내는데 요즘은 방문객들에게 내주는 날이 더 많아졌다.

평창강을 찾은 여행객들이 집이 아름다워 들렀는데 어떻게 하룻밤 묵어갈 수 없냐는 성화 때문이다. 그럴 때면 책상 위에 늘어놓은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방문객에게 그대로 내준 채 몸만 빠져나온다.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은 전원행을 급구 반대했던 남편의 맘이 돌아선 것이다. 별채 창가에는 그가 빚은 도자기와 함께 남편이 수집한 수석(壽石) 몇 점이 놓여 있다. 미안한 마음을 씻지 못했는데 “이제 내 것도 진열해야지” 하는 남편의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고.

방문객들은 저마다 아름답고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마음의 평온을 찾으러 들렀다가 예쁜 추억을 하나 달고 간다고 말한다. 그는 야채며 과일 가꾼 것을 나눠 먹으면서 방문객들이 친정에 온 기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한다. 방문객이 하도 잦자 급기야 딸이 동그라미 황토집이란 홈페이지(http://ohwangto.com)를 만들었을 정도다.

정영순 씨는 얼마 전 650평의 밭을 구입했다. 상추며 고추, 마늘, 배추 등 가꿀 수 있는 것은 이것저것 다 심기 위해서다. 시골생활에 적응하면서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는 반증과도 같다. 1년 넘게 시골생활을 하다 보니 아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고 체력도 좋아졌다면서 행복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도 두통을 늘 달고 다녔는데 말끔히 사라졌다고 한다.

눈을 뜨면 하루가 다르게 자란 밭의 풀들을 뽑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른다는 정영순 씨. 진한 흙 냄새에 젖은 그에게서 모정과 함께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田

■ 글·사진 / 윤홍로 기자

■ 건축정보

·위 치 :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대하리
·부지면적 : 350평(밭 650평)
·건축형태 : 황토벽돌주택
·건축면적 : 60평(본채 30평, 별채 30평)
·내벽마감 : 황토벽돌 위 황토 모르타르
·외벽마감 : 황토벽돌 줄눈마감
·지붕마감 : 아스팔트슁글
·창 호 재 : 수공 목조창호
·건 축 비 : 평당 350만 원

■ 설계·시공 : 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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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母情)으로 지은, 평창 60평 단층 동그라미 황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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