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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한 두 자매 가족의 상가주택 407 Crew
- 동탄신도시의 상가주택 ‘407 Crew’는 발랄한 자매의 두 가정이 한 건물 내에 각각 독립된 공간을 가지면서 동시에 거실 등 공용 부분을 쉐어하도록 디자인했다. 지구단위계획에 따른 박공지붕 적용이란 제한 요소를 전체 매스에서 박공 모양의 매스를 빼내는 색다른 타입의 디자인으로 해결책을 제시했다.글 이재성 건축가(제이투오 디자인 대표) 사진 김정회 작가 HOUSE NOTEDATA위치 경기 화성시 영천동 766-5지역/지구 제1종 일반주거지역, 지구단위계획구역용도 제2종 근린생활시설, 다가구주택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대지면적 233.58㎡(70.65평)건축면적 139.56㎡(42.21평)건폐율 59.75%연면적 362.04㎡(109.51평) 1층 93.92㎡(28.41평) 2층 134.50㎡(40.68평) 3층 133.62㎡(40.42평)용적률 154.94%설계기간 2017년 3월~6월공사기간 2017년 7월~2018년 6월설계 제이투오 디자인[J2o Architecture] 02-2277-2501 www.j2odesign.com시공 수건축 031-8003-9067 사이좋고 밝은 두 자매 가정이 동탄신도시 ‘407 Crew’ 프로젝트의 공동 클라이언트이다.한동네 다른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주중 저녁이나 주말에 여가를 함께 보내며 지내던 두 자매가 의기투합했다. 잘 알고 있는 지역인 동탄에 부지를 매입해 상가주택을 짓고 함께 살기로 한 것이다. 부지는 남쪽으로 상가 입지에 적합한 대로와 산책로, 낮은 산이 있고, 북쪽으로 상가주택단지를 마주하며, 동쪽과 서쪽으로 상가주택과 접해 있다. 407 Crew의 프로젝트는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을 바탕으로 두 가정이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지만, 각 가정이 분리된 사적 공간을 가지는 동시에 거실, 다이닝룸 등 친교 공간을 쉐어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전체 디자인은 매스를 공용 공간과 내부 정원을 중심으로 2개로 분절하고, 다시 분절 매스를 하나로 이어주는 개념적 박스를 영롱[비워]쌓기로 형상화했다. 이를 통해 두 공간은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분절되고 때로 연결된다. 또한, 2개의 분절 매스는 남측과 북측을 주 파사드façade로 하며, 한쪽은 돌출돼 있고 한쪽은 후퇴돼 있어 각각 출입구의 캐노피 역할을 한다. 동시에 2개의 성격이 다른 가정이 하나의 가족으로 즐겁게 살아가듯이 성격이 다른 2개의 매스가 개념적 박스 안에서 조화롭게 어울려 있다. MATERIAL외부마감 지붕 - T0.7 아연도강판(KalZinc) 벽 - 스타코(대림우드), 벽돌(명신세라믹(MK)) 데크 - 에폭시코팅(익스코트)내부마감 천장 - 친환경 페인트(Benjamin Moore) 벽 - 석고보드, 벽지(대우) 바닥 - 강화마루(동신)계단실 디딤판 - 인조현무암(중흥) 난간 - 스테인리스스틸(금일금속)단열재 지붕 - T220 가등급 단열재(세경산업) 외단열 - T125 가등급 단열재(세경산업)창호 이중창250(LG하우시스)현관문 스테인리스스틸(제작)조명 LED 40W(KM라이팅)주방가구 한샘위생기구 대림바스난방기구 시스템냉온풍기(삼성) 301호 남측 주방. 3층은 두 자매가 생활하는 공간으로 현관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좌우로 공간을 나눴다. 301호 남측 주방에서 바라본 거실 박공지붕 규정, 영롱쌓기 디자인으로 풀어407 Crew 프로젝트는 계단 코어와 내부 정원을 중심으로 분절된 2개의 매스로 구성했다. 1층에 남측과 북측을 각각 주출입구로 하는 2개의 근생시설이 있고, 2층에 각기 다른 스타일의 2주택 그리고 3층에 두 자매 부부가 함께 사는 1주택이 있다.2개의 매스는 영롱쌓기의 중간적 매개 공간에 의해 서로 연결되고 분절된다. 영롱쌓기 박스를 기준으로 돌출된 매스와 후퇴된 매스는 중간 매개 공간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내부이자 외부, 사적이면서 공적인 공간을 형성한다. 301호 북측 주방. 좌측 복도로 안방, 우측 계단으로 다락과 이어진다. 301호 남측 안방 프로젝트 사이트의 지구단위계획상 의무화돼 있는 박공지붕이 디자인적 제한 요소이자, 프로젝트의 기본 개념 중 하나가 됐다. 박공지붕이라는 제한을 그대로 수용하되 수많은 박공지붕의 주변 건물과 다르게 영롱쌓기를 한 개념적 박스에서 2개의 박공지붕 매스가 하나는 차집합돼 있고, 하나는 합집합돼 있는 방식으로 디자인했다.시공할 때 벽돌 중간을 비워 쌓는 영롱쌓기 방식을 이용해 주변 환경과 단절된 공간이 아닌 연속성을 갖도록 했다. 또한 검은 벽돌의 중간 매개 공간은 2개의 분절된 매스를 어우르며 전체 프로젝트를 하나의 건축 오브제로 인식되도록 했다.공간은 박공지붕의 장점을 살려 가족들이 쉬는 거실과 북측 안방은 천장을 높여 답답함을 없애고, 아이들이 놀이방으로 사용하는 옥탑에서 거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로 디자인했다. 계단 밑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아일랜드 주방을 배치함으로써 복도와 공간을 분할하면서 안정적인 느낌을 줬다. 1층, 2층, 3층으로 가는 계단 코어는 분절된 두 매스의 중심에 위치하고, 옥탑 중앙에 위치한 야외 데크는 소통의 공간이자 친교 공간으로 사용된다. 옥상 데크는 영롱쌓기 가벽 안에서 가족만의 시간을 가지는 바비큐 장소이기도 하다. 주방 위 계단을 오르면 박공지붕으로 한껏 아늑해진 다락이 펼쳐진다. 맞은편 다락도 동일하게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밀 예정이다. 전체적 인테리어는 화이트 톤으로 통일해 깨끗하고 모던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우드와 골드의 따뜻한 색감을 더해줬다. 화장실은 화이트 톤의 모던 자기 타일과 구리색의 수전을 사용해 심플하고 깨끗한 분위기로 인테리어를 연출했다. 데드스페이스를 줄이고자 자투리 공간에 미디어실을 계획했다. 301호 남측 공용 욕실 *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고 우리는 삶과 공간을 디자인하는 건축가다. 주택은 가족의 삶을 담는 공간이다. 407 Crew가 두 자매 가정의 꿈과 행복을 닮을 수 있는 그릇이길 바란다. 클라이언트의 바람과 건축가의 의도대로 두 자매 가족 구성원이 다함께 즐겁게 소통하고 대화하며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벽돌 중간을 비워 쌓는 영롱 쌓기 방식으로 시공해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면서도 답답하지 않다. 지구단위계획상 의무인 박공지붕을 색다르게 디자인해 여러 주택 가운데서도 돋보인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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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한 두 자매 가족의 상가주택 407 C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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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북으로 문을 낸 북비고택北扉故宅
- 북비고택北扉故宅(도지정 민속문화재 제44호/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421)은 한개마을에서 충절의 표상이라 일컫는다. 사도세자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북으로 문을 내고 매일 그를 기렸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 여러 집들이 들어서면서 어느새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이 되고 말았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기자 북비고택은 한자 그대로 북쪽에 문이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던 훈련원 주부 이석문이 사도세자가 죽은 뒤 조선 영조 50년(1774)에 이곳으로 내려와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사도세자를 기리며 이곳에 은거하며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북비댁과 한주종택은 매우 인연이 깊다. 두 집안은 양자관계로 얽혀 있는데 한주종택에 거주하는 이석문의 동생인 석유가 동생이 후사가 없자 석문은 둘째아들을 석유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그 양자마저 후손이 없자 석문은 작은손자마저 양자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그런데 4대째에서는 석문가문에 후손이 없어 석유가문에서 석문가문으로 양자를 보냈다고 한다. 따라서 한주종택과 북비댁은 모두 석문의 후손인 것이다. 세를 과시하고자 원기둥과 주두를 사용하고 첨차까지 쓴 안채. 1866년 이원조가 중수한 사랑채. 큰 사랑방은 주인이 쓰고 작은 사랑방은 서재 겸 손님방으로 사용했다. 두 번에 걸친 큰 변화로 지금의 모습 갖춰한주종택에서 양자로 온 응와凝窩 이원조는 공조판서에 이를 정도로 크게 성공해 북비고택을 크게 번성시켰다. 이원조는 북비댁뿐만아니라 한주종택이라는 당호가 붙게 한 한주寒洲이진상을 키우기도 했다. 이원조가 이진상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두 가문이 양자관계로 종법宗法으로 본다면 다른 집안이었지만 실제로는 같은 뿌리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북비고택은 이석문이 이곳에 자리 잡은 후 두 번 크게 변화된다. 첫번째 변화는 석문의 손자인 규진奎鎭이 안채와 사랑채를 새로 지어 현재의 기틀을 만든 것으로 순조 21년인 1821년이다. 이는 안채 대청 묵서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변화는 1866년에 원조가 이 집을 중수重修한 것으로 이때 모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866년에 지어진 집 배치는 지금과 달랐다. 우선 안채 앞에 다섯 칸 중 문채가 안채와 같은 방향으로 남쪽에 배치됐고 안채 동쪽에는 세 칸광이 있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튼 ㅁ자 형태를 했는데 중문채와 광채는 한국전쟁 때 소실돼 지금의 배치가 됐다. 또한 안쪽에도 건물 외에 동쪽 담장 쪽으로 세 칸 규모 장판각이 있었으나 삼일운동이 있었던 1919년 즈음에 멸실됐다고 한다. 또한 1866년에 단칸이었던 사당을 현재와 같이 세 칸으로 고쳐 지었다. 솟을대문에 들어서서 바로 오른쪽에 북비라는 자그마한 현판이 걸린 문으로 향하면 방 두 칸 대청 두 칸인 네 칸짜리 남향의 맞배지붕 기와집을 볼 수 있다. 이석문이 낙향해 자리 잡으면서 문을 북쪽으로 돌려 놓았다고 한다(원래 이곳에는 이석문 아버지와 자신이 머물던 대초당大草堂이라는 재실이 있었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예전에는 북향집이었던 것을 남향집으로 개조한 것이라 한다. 한남대학교 한필원 교수가 규진이 이곳을 서재로 썼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때 북향집이었던 살림집을 남향집으로 바꾸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동쪽 담에 있던 건물도 장판각으로 개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채 앞에 놓인 장독대와 작은 연못. 대문 밖과 안에서 본 모습으로 북비고택은 정갈하게 관리가 잘 되고 있다. 우월함을 드러내려 한 안채안채는 다섯 칸 전후퇴집으로 동쪽으로부터 부엌 한 칸, 안방 두 칸, 대청 두 칸, 건넌방 한 칸으로 이뤄졌다. 안채는 1821년 규진이 지은 것으로 높은 기단 위에 놓여 한주종택이나 교리댁 안채보다 한층 권위가 있어 보인다. 이렇게 높게 지은 것은 대지에 경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후대에 건립한 이 집이 앞서 지은 마을 내 다른 집보다 우월하게 보이려 한 의도가 짙다고 봐야 한다. 먼저 지은 교리댁 안채가 방주에 민도리집이지만 이 집은 원기둥과 주두를 사용하고 장혀를 받치기 위해 첨차를 쓴 것을 보아 분명 교리댁보다는 한 단계 높은 화려함을 보여주고 한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세를 과시하려는 예는 후대에 지은 같은 마을 월곡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월곡댁은 1910년대에 지은 집이다. 당시 개화기에 돈을 많이 번 이전희는 한개마을 내 다른 곳과는 다른 차원의 집을 짓는다. 마을 전통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의 부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곳곳에 보인다. 북비댁도 이처럼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정 2품 공조판서, 지금으로 말하면 건설교통부장관이 됐다는 자부심을 표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진다. 먼저 지은 교리댁은 노론이었던 반면 북비댁은 남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파 색이 집을 짓는데도 작용한 것은 아닌가 한다. 안채 부엌은 교리댁과 같은 구조로 다락은 환기를 위해 2/3 정도만 설치했다. 안채 측면 벽체는 한주종택 사랑채와 같이 마치 담장처럼 방화벽 상부에 기와를 얹었다. 이것을 한주종택 소개에서도 언급했던 영역의 연속성을 위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사당 마당 쪽만이 아니라 부엌 쪽, 앞에 있는 안행랑채 벽체 양쪽 모두 같은 형식으로 한 것으로 보아 들이치는 비를 막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안채 평면은 전형적인 전후퇴집 모습이다. 그러나 부엌만은 뒤에 퇴가 없고 앞쪽은 전퇴까지 부엌으로 꾸몄으며 뒤퇴는 칸을 작게 해 벽장을 설치했다. 후면 벽장은 완전히 퇴칸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처마하부에 뒀다. 전후퇴집에서 후면에 있는 퇴칸 규모를 작게 해 지붕 밑에 설치하는 예를 많이 보는데 이는 완전한 퇴칸을 구성할 경우 간살이 길어져 공사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사랑채의 날개채로 뒤쪽은 칸 반의 작은 사랑방이고 앞쪽은 한 칸 누마루다. 한주종택 사 랑채와 유사하게 방화벽에 기와를 얹었다. 세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사당을 세 칸으로사랑채는 1866년 이원조가 중수했다. 현재 ㄱ자 형태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돌출된 누마루 뒤로 반 칸 뒷간이 있어 전체적으로 ㅏ자였다. 몸체가 전면 네 칸 측면 두 칸이고 앞으로 날개채가 두 칸 반 돌출돼 있다. 몸체는 동쪽에 대청 한 칸, 큰 사랑채 두 칸, 부엌 한 칸이며 날개채는 칸 반의 작은 사랑채와 한 칸의 누마루가 있다. 사랑채의 큰 사랑방은 주인이 사용하는 방이고 작은 사랑방은 서재로 사용하다 손님이 올 경우 숙소로 썼다고 한다. 사당은 앞서 말한 것처럼 원래 한 칸이었다. 그런데 이원조 때 세 칸으로 늘렸다. 한개마을에서 사당이 있는 집은 한주종택, 교리댁, 월곡댁 그리고 이곳 북비고택 4곳이다. 사당이 있는 집은 종택이거나 국가에 공을 세워 불천위를 제수받아 파종택을 만든 경우다. 그리고 사당을 여러 칸으로 만드는 것은 불천위가 있을 때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 가문에서 높은 직위에 오른 사람을 기리기 위해 스스로 불천위를 만들기도 하면서 그 뜻이 훼손됐다. 어쨌든 이곳 한개마을 어른 말에 의하면 2품 벼슬을 지낸 분이 있으면 불천위를 모시는 개념으로 세 칸 규모의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결국 북비댁도 이원조가 정 2품 벼슬에 오르면서 그 세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사당을 세 칸으로 늘린 것이다. 서재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집. 북비문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다. 집은 사람이 살기 위해 짓지만 단순히 사는 집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부와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서도 집을 짓는다. 즉 자기과시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과거 집을 짓는 사람 마음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한때 아니 지금도 충절의 표상이라고 자랑하는 북비고택, 그러나 그것은 이름뿐 집은 어느 순간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이 되고 말았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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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북으로 문을 낸 북비고택北扉故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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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연주의 부산 상가주택 잼잼잼
- 상가주택이기에 무엇보다 건물을 직접 이용하는 사람들의 니즈를 충실히 반영해 디자인했다. 건물 외관의 핵심은 독창성과 개성, 즉 ‘잼잼잼’만의 매력이다.글 윤경필 건축가(경피리건축발전소 건축사사무소 대표) 사진 백광현 작가※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인터뷰와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OUSE NOTEDATA위치 부산 강서구 명지동 3365-12지역/지구 제1종 일반주거지역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대지면적 259.10㎡(78.37평)건축면적 141.30㎡(42.74평)건폐율 54.53%연면적 368.92㎡(111.59평)1층 110.04㎡(33.28평)2층 129.44㎡(39.15평)3층 129.44㎡(39.15평)다락 80.00㎡(24.20평)용적률 142.39%설계기간 2017년 8월~12월공사기간 2018년 2월~10월건축비용 7억 2천만 원(3.3㎡당 580만 원)설계 경피리건축발전소 건축사사무소 010-4030-3700 https://blog.naver.com/ssendesign5설계스텝 윤경필. 이주남, 이상엽, 윤유리시공 ㈜대군종합건설 임일택 이사 010-3856-0086 임대형 건축을 의뢰하는 건축주 대부분은 높은 수익이 보장되길 바란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속성에 있어 접근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극대화된 수익을 어떤 이들은 건축의 원가절감에서 찾고, 또 어떤 이들은 최종 고객 봉사를 통해 보장받으려고 한다. ‘잼잼잼’의 건축주는 건물에 거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후자와 같이 세입자의 거주 환경을 어떻게 개선하면 상품성을 높일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더 많은 사회 구성원이 좋은 공간을 향유하기를 바라는 홍익인간(?)의 건축을 하고픈 나에겐 매우 고마운 건축주가 아닐 수 없었다.잼잼잼의 상가주택지는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의 배후 주거지인 신축 아파트단지와 상가주택으로 이뤄진 명지국제신도시(택지개발지구)에 자리한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신도시가 그러하듯 이곳 역시 지루함이라는 키워드를 한가득 지니고 있다. 하지만 명지초등학교를 바라보는 현장은 학생들의 통학과 학부모들의 방문이 잦다는 점 말고는 비교적 한가로운 편이다. 이러한 조건은 건축가인 나에겐 피폐한 현장에 깊은숨을 불어넣어 줄 귀한 기회였다. 입면은 벽돌 건물에 박공지붕으로 이뤄진 세 개의 매스로 구성해 경쾌하다. 건축주는 벽돌로 이뤄진 단정한 느낌의 건물에, 특히 중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중정을 둔 세입자들의 공간은 건축주의 따스한 배려로 이뤄졌다. 도시의 주택에 자연을 끌어들인 중정, 앙증맞은 다락, 옥상 텃밭 …, 세입자들을 위해 주택에서 누릴 수 있는 이상적인 생활을 담고자 했다. 마감재 역시 고급스럽고 친환경적인 것들을 선택했다. 1층 근린생활 공간 중심에 중정이 자리 잡고 있다. 세입자를 배려한 건축주의 마음이 담긴 공간이다. 거주 공간을 연결하는 계단은 벽면에 작을 창을 여러 개 내 밝은 공간을 제공하면서 조형미를 갖췄다. 한 쌍의 연인 같은 상가와 주택택지개발지구가 그렇듯 이곳도 지구단위계획에 따라 주차장과 출입구 등의 규정이 정해져 있다. 상가와 다가구주택의 출입구 모두 한 면에 작게 설치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새로운 욕심이 생겼다. 현장은 초등학교를 바라보는 남쪽 도로와 상가로의 유동인구가 많은 북쪽 도로에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조건을 이용해 상가의 출입구를 답답하고 비좁은 일부가 아닌 전체를 사용할 수 있게 북쪽으로 넓게 구성하고, 다가구주택의 출입구를 남쪽으로 계획해 상업 공간과 분리하고 싶었다. 이러한 발상과 계획의 실천으로 매우 만족스러운 상가주택을 완성했다.잼잼잼의 중심인 중정을 거주자들이 나름의 방법에 따라 누리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상가와 주거 동선을 분리하면서, 한편으로 두 개의 동선이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했다. 그 결과 하나의 건물 속에서 서로의 특징을 자유롭게 내세우지만,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인처럼 서로의 장점을 공유하면서 예쁘게 공존하게 됐다. 현관에 들어서면 바로 왼쪽으로 안방과 연결된다. 2층 거실이다. 왼쪽에 살짝 보이는 창은 바로 옆에서 중정을 감상할 수 있게 구성한 것이다. 천장고를 2.5m로 높여 넓어 보인다. 주거 공간을 보다 쾌적하게 만들고, 건물의 독특한 매력을 증진하게끔 층별로 개성 있게 계획했다. 2층은 1층의 중정 나무를 바로 곁에서 느끼도록 구성했다. 실내에서 맞이하는 나무의 향과 특유의 편안함을 불러오는 정서는 몹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층고를 높여 실내 천장고를 2.5m 이상 확보했다. 3층은 중정과 다락, 옥상 텃밭을 모두가 이용할 수 있게 계획했다. 특히 작은 다락은 잼잼잼의 유용한 공간이자, 매력 포인트다. 다락을 지나 지붕으로 나가면 데크의 정원과 텃밭이 나타난다. 이 모두 사소한 요소일 수 있지만, 주택에서 작은 자연이나마 행복하게 즐겼으면 하는 소망과 노력과 정성을 담은 공간이다. 건물 정면에 배치한 작은 방은 발코니와 연결된다. 주방에서 본 복도다. 정면에 있는 문은 발코니와 연결되고 발코니는 작은방과 공유한다. 왼쪽 슬라이드문은 위생공간이고, 오른쪽이 작은방이다. 낮고 폭이 좁은 불투명 유리블록 가벽을 설치해 공간이 한결 여유롭게 보인다. INTERIOR POINT! 프리미엄 천연 원목의 질감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이건 원목마루 카라 텍스쳐 카라 텍스쳐는 2㎜ 이상 두께의 최고급 원목 단판과 11㎜ 두께의 7겹 자작나무 합판으로 이루어진 고품질 천연 원목마루이다. 철저한 원자재 관리를 통해 엄선된 원목만을 사용해 수 개월 동안 건조하고, 변형이 최소화된 상태로 조합해 안정된 품질을 가졌다. 오크: 내추럴하고 은은하여 안정감 있는 분위기 연출, 프리미엄 광폭 사이즈 가능 골드 오크: 포근한 온기를 담는 코지cozy한 공간 연출 카라 텍스쳐의 표면층은 고급 원목을 3~7겹으로 붙여 만들어 충격흡수와 탄력성을 높이고 보행감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온도나 수분에 의한 수분 팽창, 뒤틀림이 적고 특히 열에 강해 우리나라 온돌난방에 적합하다. 또한 나무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수종을 선택할 수 있다. 이건마루만의 다양한 표면 처리 공법으로 균일한 그레인(grain), 입체적인 천연목재의 질감, 원목의 자연 색상이 부드럽게 강조되어 공간을 한 차원 더 고급스럽게 연출할 수 있다. 그레이 워시 오크: 세련된 공간 연출에 어울리는 컬러 3층 작은방. 발코니는 조망과 빛은 확보하면서 외부 시선은 차단하기 위해 격자무늬의 불투명 유리로 벽을 세운 뒤 시선 높이에 작은 가로 창을 냈다. 개방감을 위해 거실과 일체형으로 계획한 주방은 작은 공간에 어울리게 아일랜드 형태로 꾸미고, 수납을 위한 작은 공간을 사이사이에 배치했다. 3층 안방 정면에서 본 3층 위생 공간. 세련된 개수대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샤워 공간, 왼쪽은 변기를 설치했다. 재미를 더하는 벽돌과 유리블록의 조화 모든 공간은 거주자의 입장에서 사용하기에 편리해야 한다. 거실은 개방감과 일조, 통풍을 고려해 배치하고, 분위기가 편안하고 포근하며 자유로운 느낌이 들도록 구성했다. 주방은 비교적 작은 공간에 어울리게 아일랜드 형태로 꾸미고, 수납을 위한 작은 공간들을 사이사이에 알맞게 배치했다.인테리어는 거주자가 편안한 안식을 취하도록 전반적으로 모던하고 심플하게 연출했다. LED 조명, 인덕션 설치, 친환경 규조토 페인트 마감 등 외부 환경과 주거 환경의 보존을 모두 심도 있게 고려해 디자인했다. 주거공간을 연결하는 계단참 중간에 설치한 창으로 중정에 있는 나무가 살짝 보인다. 3층은 복층으로 거실에서 다락과 연결된다. 작은 다락은 ‘잼잼잼’ 건축물의 유용한 공간이자 매력 포인트다. 입면 계획은 벽돌 건물에 박공지붕으로 이뤄진, 즉 고루하고 심심한 외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 문제를 개성 있는 세 개의 매스로 구성하고, 중앙 세대 벽 경계를 유리블록으로 구성해 유쾌하게 풀어냈다. 벽돌과 유리블록의 조화는 아름답다. 벽돌의 색상과 외곽의 띠가 건물의 중심을 튼실하게 잡아주고, 그 속에 단단히 묶여있는 건물은 명쾌한 즐거움으로 입면에 재미를 더한다. 주변의 어두운 화강석 건물들 속에서 이러한 외부 전경이 세입자들의 행복한 모습과 함께 빛나기를 희망한다. 길을 가다가 퍼니Funny하고 상냥한 인상의 아가씨를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건물은 흔치 않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붙여넣기를 한 것 같은 건물들의 품 아귀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건축가로서 상당히 참담한 현실이자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우리가 보고 느껴야 하는 거리는 뻔하고 루즈Loose해지고 있다. 그래서 도시의 건물이 지닐 수 있는 차별점이 무엇일까 하고 많이 고민했다. 그 결과 자연을 건물에 인입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잼잼잼의 중정은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핵심 요소이며 내세울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상가 손님과 상부 입주자들이 공동의 중정을 관조하며 함께 영위하는 것은 이상적인 공동체 의식이다. 또한 앞으로 건축이 가져야 할 사회적 순기능의 역할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3층은 중정과 다락, 옥상 텃밭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옥상은 다락을 통해 연결된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중정 정면은 중앙에 벽돌과 유리블록 조화로 인해 재미를 더하고 뒷면은 벽돌과 외곽의 흰 띠가 건물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듯한 느낌이다. 추가 [철근콘크리트, ALC주택] 행복한 자연주의 상가주택 잼잼잼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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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고려 후기 화려한 장식미를 그대로 간직한 안동 소호헌蘇湖軒
- 안동 소호헌安東蘇湖軒(보물 제475호/경북 안동시 일직면 소호헌길 2)은 조선 시대 지어진 건물이지만 고려 후기의 장식미를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재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일찍이 1968년 보물로 지정됐다. 소슬합장을 간직한 마지막 건축물이자 민가로는 유일하다. 막새와 망와에 새긴 봉황과 용 문양은 당시 소호헌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기자 대구서씨 종중에서 관리하는 소호헌은 살림집이 아닌 별서別墅다. 17세에 고성이씨 가문으로 장가간 함재涵齋서해(1537~1559)가 이곳에 자리 잡았는데 그의 장인은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다섯째아들인 이고이다. 고성이씨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안동 임청각과 그 옆 탑동종택으로 잘 알려진 가문으로 함재는 당대 안동 최고 가문에 장가간 것이다. 이러한 혼인이 가능했던 것은 대구서씨 또한 명문이었기 때문이다. 서거정徐居正과 같은 가문으로 함재의 아버지인 서고는 정삼품 예조 참의를 역임했고 함재를 위해 소호헌 동쪽 언덕에 집을 마련해 줬다고 한다. 그러나 고성이씨 안동종친회에서 발간한 고성이씨 안동문화유산 가계도는 함재 장인에게는 외동딸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집을 지어줬다는 것보다는 당시 풍습에 따라 처가 재산을 상속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소호헌은 이때를 즈음해 지어진 것으로 민가로는 보기 드문 임진란 전에 지어진 집이다. 임진란 전에 지어진 민가는 그리 많지 않다. 익히 알려진 강릉 오죽헌(보물 제165호/15세기 초), 강릉 해운정(보물 제183호/1530년), 예천권씨 초간종택 별당(보물 제457호/1500년경)과 향단(보물 제412호), 경주양동마을 서백당(중요민속문화재 제23호/1484년)과 관가정(보물 제442호), 안동 하회마을 양진당(보물 제306호), 안동 예안이씨 충효당(보물 제553호/1551년) 등이 있다. 이런 집들의 특징은 후기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장식 요소들이 많다는 것이다. 원기둥과 익공 등과 같은 두공斗拱을 사용하는 등 임진란 이후 집에서 볼 수 없는 특징들이 있다. 민가로는 보기 드물게 임란 전에 지은 소호헌. 살림집이 아닌 별서인 이곳은 대구서씨 종중에서 관리하며 보물 제475호다. 소호헌과 같은 담을 쓰는 약봉 태실 대문. / 소호헌 대문으로 팔작지붕이 위엄을 드러낸다. 파련대공에 소슬합장을 한 소호헌 대청소호헌은 정면 두 칸 측면 네 칸인 대청에 옆으로 두 칸 방이 붙은 구조다. 대청 전면 두 칸은 누마루고 뒤쪽 여섯 칸은 일반적인 대청 형식인데 대청 좌측으로 두 칸 온돌방이 있다. 대청과 누마루 사이는 들어 열개로 된 띠살창을 설치해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소호헌은 임진란 전에 지어진 건물이 보여주는 특징이 있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 첫 번째는 대공이다. 대공을 파련대공으로 했는데 이것은 대공을 만드는 방법 중 가장 고급스러운 것으로 살림집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파련대공은 사찰의 대웅전이나 궁궐에서도 중요한 건물에서나 사용했다. 소호헌은 집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성종 때까지만 해도 건물에 치장을 많이 해서 문제라는 내용을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고려 시대에 건물을 화려하게 짓던 관습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 조선의 힘이 아직 전국에 미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의 파련대공 모습을 보면 조금 아쉽다. 파련대공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화려함과 정치함이 부족하다. 목수 조각 솜씨가 집의 화려함에 비해 조금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파련대공뿐만이 아니다. 기둥에 상부 익공 초각 솜씨도 세련됨이 부족하다. 전체적으로 멋은 부렸으되 그 정치한 솜씨가 전반적으로 부족한 건물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이런 파련대공을 썼다는 것보다 건축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소슬합장을 했다는 것이다. 人자 형태의 부재를 이용해 종도리를 받치는 구조를 일컫는 소슬합장은 조선 초까지 많이 사용했던 기법인데 후대에 들어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소슬합장을 사용한 조선 시대 건물은 건축연도가 정확히 밝혀진 것으로는 제일 늦은 1473년(성종 4년)에 지은 도갑사 해탈문이다. 이 이후로 소슬합장을 사용한 건물은 없다. 따라서 이 소호헌이 소슬합장을 사용한 마지막 건물이자 민가로는 유일한 건물이 아닐까 한다. 이런 이유로 일찍이 1968년 보물로 지정됐다. 소호헌 대청에 파련대공. 궁궐이나 대웅전에서 쓰는 파련대공을 한 것으로 보아 당대 최고의 사치를 누렸다 할 수 있다. 대공 옆 人자 형태가 소슬합장이다. / 소호헌 대청과 마찬가지로 파련대공을 한 약봉 태실 대청. 소호헌 대청 파련대공에 비하면 많이 약화된 형태다. 종중에서 관리하기에 소호헌은 깔끔한 모습이다. 약봉 태실 전경. 용 문양 새긴 망와… 장인 솜씨 돋보여또 다른 특징은 기와에 있다. 기와를 보면 막새와 망와에 문양이 들어가있다. 망와와 누마루 암막새에는 용 문양이 새겨져 있고 숫막새에는 봉황 문양이 있다. 일반 건물에 이런 문양이 있는 예를 보지 못했다. 만일 조선 후기 일반 여염집에서 용 문양이 그려져 있는 막새를 사용했다면 아마도 그는 역심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용 문양과 봉황 문양을 사용하였다는 것 자체가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함이다. 그 문양 자체도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솜씨가 매우 뛰어난 장인의 작품이 분명하다. 이 정도면 궁궐 기와를 만들어도 손색없다. 소호헌 목구조에서도 남다른 부분이 있다. 보통 기둥은 초석 위에 올려 놓는다. 그러나 소호헌은 동귀틀을 상부 창방처럼 뺄목을 내 十자로 결구하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렸는데 흔한 사례는 아니다. 이는 아주 드문 경우로 본인도 한두 번 본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대청과 누마루의 하부구조가 다르다. 대청은 귀틀 위에 기둥을 올렸고 누마루는 누하주에 창방을 돌리고 그 위에 평방을 돌린 후 다시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이렇게 기둥을 분리한 것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울 때 하는 그랭이질(두 부재가 만날 때 어느 한 부재의 모양에 따라 다른부재의 면을 가공해 주는 작업)을 하는 것보다 편해서인지, 또는 수평을 맞추기가 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기법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보통 기둥은 초석 위에 올리는데 소호헌은 동귀틀 뺄목을 내 +자로 결구하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 망와에 용 문양을 새긴 일반 건물은 소호헌이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대청 전면 두 칸 누마루. 전망이 일품이다. 가문을 일군 서성이 태어난 약봉 태실소호헌 울타리에는 소호헌 말고도 약봉 태실이라는 건물 한 채가 더 있다. 태실은 함재의 아들인 약봉藥峰서성(1556~1631)이 태어난 곳이다. 함재는 23살에 요절했지만 그의 아들 약봉은 1586년(선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여러 곳의 관찰사를 지내고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됐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후 6대에 걸쳐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해 가문을 새롭게 했으니 그를 기릴 만했을 것이다. 약봉 태실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 전후퇴집이다. 대청에 걸린 현판대로 약봉이 태어난 곳이라면 꽤 오래된 집이겠지만 지금의 모습은 그렇지만은 않다. 현재 집은 원래 약봉 태실을 후대에 중건한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 어쨌든 이 집도 재미있는 특징들이 있다. 우선 오량집이고 앞에 전퇴가 있음에도 모두 평주로 처리했다. 일반적으로 평주를 쓸 때는 가운데 기둥을 둬 삼평주 오량집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은 전후퇴집으로 계획하기 위해 기둥을 4개 세웠다. 또 다른 특징은 대들보 위에 올라간 종보를 받치는 동자기둥과 종도리를 받치는 대공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구조다. 파련대공인 대공은 많이 약화된 모습이고 종도리를 받치는 동자도 판형으로 했는데 각 판의 한쪽만 초각을 하다 말았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고치는 과정에서의 일어난 실수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대청 두 칸 가운데 있는 기둥에 눈이 간다. 약봉 태실 모든 기둥은 민도리집 기둥인 데 비해 유독 이 기둥 하나에만 주두를 사용하고 좌우에 뜬창방을 둬 소로 치장했다. 가운데 중심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은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치장이 아닌가 한다. 약봉 태실 대청. 민도리집 기둥인데 대청 두 칸 가운데 기둥만 주두를 사용하고 좌우에 뜬창방을 뒀다. 소호헌대청. 정면 두 칸 측면 네 칸 규모다. 소호헌蘇湖軒이란 이름에서 蘇가 '향할 소'이니 호수를 바라보는 집이란 뜻이다. 지금 소호헌 앞은 아무것도 없는 널찍한 마당이 있으나 예전에는 앞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과 함께 있는 소호헌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단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또한 바로 앞으로 지나가는 5번 국도가 시야를 가리지만 예전에는 넓은 들을 바라보는 시원함이 있었을 것이다.집은 주변 환경과 같이 존재할 때 그 빛을 발한다. 지금 소호헌은 앞을 지나가는 도로 때문에 경관을 바라보는 집의 가치를 잃고 말았다. 참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민족문화대백과사전/소호헌, 고성이씨 안동문화유산/고성이씨 안동종친회소호헌안내팜플렛, 문화재청 사이트/소호헌약봉 서성의 가문家門, 대구 서씨의 발흥지 안동 소호리디지털 안동문화대전/소호헌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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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고려 후기 화려한 장식미를 그대로 간직한 안동 소호헌蘇湖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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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한개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 - 교리댁, 마을표준이 되다
- 교리댁(도민속문화재 제43호)은 조선 영조 때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등을 지낸 이석구李碩九선생이 1760년에 지은 집이다. 교리댁이라 한 것은 이석구의 현손玄孫인 이귀상이 정5품 벼슬인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기 때문으로 이 집은 한개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기자 교리댁을 통해 우리는 한개마을에 있는 다른 집 구조의 기원을 엿볼 수 있다.(연세대학교 건축역사 이론 연구실에서 발간한 ≪한개마을≫에는 교리댁 안채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라고 하고 있으나 한필원(한남대 건축학부) 교수는 하회댁 망와에 1745년(영조 21년) 명문이 있음을 근거로 하회댁이 제일 오래됐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집 내용과 형식으로 보아 하회댁은 교리댁 보다 나중에 중수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교리댁은 마을 서쪽으로 난 길 중간 오른쪽 언덕에 있다. 언덕배기에 있기에 대문이 높아 상당한 위압감을 준다. 평면상 특징을 보면 대지가 동서로 긴 장방형이어서 건물을 앞뒤로 배치하지 않고 옆으로 길게 늘어놓았다. 한개마을 내 다른 곳에는 없는 세 칸 서당이 맨 앞쪽에서 대문과 나란히 위치하고 사랑채, 중문채, ㄱ자형 안채가 순차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사당은 안채 좌측에 놓이는 것이 일반적이나 교리댁 사당은 안채와 사랑채 중간에 위치한다. 한개마을 서쪽 집이 보이는 여러 특징들먼저 사당이 동쪽이 아닌 안채와 사랑채 중간에 위치한 점이 특이하다. 이는 우리나라 일반적인 사당 배치와는 다른 모습으로 대개 사당은 안채 좌측에 놓기 마련이다. 정침(제사를 지내는 건축물의 방)은 동쪽에 두라는 ≪주자가례≫의 원칙에 따라 남향을 기준으로 동쪽이 좌측이므로 대부분 안채 좌측에 두는 것이다. 마을 서쪽에 있는 북비고택이나 월곡댁의 사당도 교리댁과 같은 위치다. 이렇게 된 이유는 대지 형태와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서쪽 집들은 교리댁처럼 장방형으로 길쭉하고 입구도 서쪽으로 들어가게 돼 있다. 가장 깊은 곳에 안채가 놓여야 하기에 사당 위치를 옮긴 것인데 만약 ≪주자가례≫대로 안채 좌측에 사당을 배치할 경우 사랑채에서 너무 멀어져, 지금과는 달리 자주 참배했던 사당까지 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참배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사당을 사랑채와 안채의 중간에 둔 것이다. 마을 내 동쪽에 있는 한주종택은 일반적인 대지 형상을 하고 있어 교리댁이나 북비고택, 월곡댁과 달리 동쪽에 사당이 놓였다. 서쪽에 위치한 집의 또 다른 특징은 대문에 있다. 교리댁을 포함한 서쪽 집들은 대문이 진입로보다는 높은 곳에 있는 반면 동쪽 한주종택이나 하회댁 대문은 길에 바로 면하고 있다. 따라서 같은 솟을대문을 설치했다 하더라도 받는 느낌은 크게 다르다. 서쪽에 위치한 집은 길에서 위에 올라 서 있어 교리댁과 같이 평대문이라고 해도 위압감이 상당하다. 집을 드나드는 아랫사람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대문 앞에 놓인 서당. 기단을 높여 경관을 맘껏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안채. 몸채와 날개채가 합쳐 ㄱ자 형태를 이룬다. 교리댁처럼 한개마을 서쪽에 위치한 집들은 부지가 높아 대문에서 위압감이 전해진다. 마을 표준이 된 교리댁, 다른 집에 영향 끼쳐교리댁의 또 다른 특징은 부엌 상부에 있는 다락이다. 당시 집들은 취사와 난방을 겸했기에 부엌에는 이를 위한 아궁이가 필수였다. 구들로 인해 방바닥보다 아궁이 위치가 낮을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해서 높이차가 생긴 부분을 다락으로 활용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다락은 부엌 전체 혹은 안방 벽에서 돌출한 부분을 반침(물건을 보관하는 작은 방)으로 썼다. 그러나 이 집 다락은 부엌 전체를 덮은 것도 아니고 반침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다. 정면에서 보면 ¾칸 정도가 다락이고 나머지 부분은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된 모습이다. 그리고 다락에는 서까래 굵기만큼의 통나무를 살대로 쓴 창을 놓았다. 창을 통해 아궁이 연기를 원활하게 배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이런 모양의 다락은 한개마을이 유일할 정도로 매우 드문 경우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다락이 북비고택과 월곡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늦게 지은 집들이 교리댁을 보고 이렇게 한 게 아닌가 한다. 또 다른 특징은 대문 앞에 있는 서당이다. 한개마을은 교육을 중시해 재실이나 서당을 여럿 운영했다. 재실은 마을 외곽에 배치했고 집은 저마다 방 하나를 서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리댁은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제법 큰 규모의 서당을 뒀는데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대성학원大成學園이라는 신식 교육기관으로 운영하기도 했다(한필원/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97쪽). 서당은 남향이 아닌 서향으로 대문과 병렬로 서 있다. 누구나 편하게 들어오게 하려 한 것으로 앞에는 조그만 마당이 있고 그 너머로 낮은 담장을 세웠다. 개방된 곳이지만 나름 독자적인 영역을 갖추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리고 사당은 기단을 높여 경관을 훤히 볼 수 있게 했다. 유교에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강조한다. 호연지기란 맹자 ≪공손추상편≫에 나오는 말로, 사람의 마음에 차 있는 너르고 크고 올바른 기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울 만큼 넓고 커서 어떠한 일에도 굴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당당한 기상을 의미한다. 유교는 자연을 통해 호연지기를 키우는 것을 장려해 좋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정사精舍나 서원書院을 지었다. 이런 뜻이 서당에 반영됐다. 교리댁이 주변보다 높은 언덕에 위치해 조금만 높이 건물을 세우면 주변을 내다볼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기단을 높인 것이다. 사랑채로 향하는 중문에서 본 모습. 1870년 가묘와 함께 중수한 사랑채 뒤로는 두 칸 골 방이 있다. 부엌 측면 하부는 흙으로 마감해 화재에 대비했다. 크고 작은 변화를 거듭한 교리댁 안채는 앞면 일곱 칸 옆면 한 칸인 전후퇴집으로 서쪽 날개채가 세 칸 반 돌출돼 전체는 ㄱ자 형태를 이룬다. 원래는 안마당 남쪽 담장으로 다섯 칸 규모의 건물이 있었고 동쪽 담장 쪽으로도 한 칸 찻칸과 세 칸 헛간이 있어 전체적으로 튼 ㅁ자 형태였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고 한다. 날개채는 세 칸 반으로 중문 쪽 한 칸이 대청인 홑집 구조다. 몸채와 연결 부위는 반 칸이고 하부에는 날개채를 방에서 사용하는 다락을 놓았다. 사랑채는 1870년경 가묘家廟(조선 시대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집안의 사당)와 함께 중수했다고 한다.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으로 사랑방이 두 칸, 대청 두 칸이고 사랑방 앞에는 전퇴가 있으며 뒤로는 두 칸 골방이 있다. 골방에는 안채로 연결되는 문이 있어 편의를 도모한 점이 이채롭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에는 큰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으로 구성되는데 이 사랑채는 큰 사랑방만 있을 뿐이다. 안채 날개채가 방 두칸에 아래쪽 대청 한 칸으로 돼 있는 것으로 볼 때 날개채가 작은 사랑채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교리댁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앞서 언급한 한국전쟁 때 안채 건물이 소실된 것이다. 그리고 사당 주변에는 담장이 있었으나 담장이 무너지면서 보기 흉해지자 일제 강점기 말에 완전히 철거했다. 중문과 사랑채 사이에도 벽이 있어 외부로부터 안채를 완벽하게 차단했다고 한다. 이 담은 60~70년 전쯤 철거했다. 이유는 안채에 있는 광에서 쌀을 운반할 때 소 달구지가 중문을 넘어가는 것이 불편해 달구지가 중문채를 돌아 들어 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는 일제 강점기 때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남녀유별에 대한 개념이 약화됐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남녀유별이 분명했던 과거에는 힘들어도 쌀을 지어 날랐을 것이다. 이렇게 집도 사회 변화에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이다. 안채 정면. 현재 교리댁에는 후손이 거주하면서 직접 관리하고 있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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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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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한개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 - 교리댁, 마을표준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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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페의 낭만을 담은 산자락 카페, 남양주 ‘미가담味佳談’
- 수락산 진입로를 따라 입구에 이르니 산세를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될까 낮게 엎드린 카페가 나타난다. 담쟁이덩굴이 외벽을 뒤덮어 운치를 더하고 서까래를 드러낸 내부는 빈티지한 소품으로 꾸며 편안하다. 미가담은 미국 남서부 사막 가운데 자리 잡은 마을로, 여러 사람이 드나들며 다채로운 문화를 이룬 산타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누구나 편히 들러 시간을 보내도록 커피는 물론, 샐러드 바와 와인, 도토리묵과 막걸리 등 다양한 메뉴를 갖췄다.글. 사진 전원주택라이프 취재협조 미가담 031-821-0474 산타페는 미국 남서부 사막에 있는 마을이다. 미국 원주민과 라틴아메리카인, 사막을 오가는 상인이 모여 특색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산타페의 주택은 짙은 흙빛 또는 모래빛깔을 띤다. 강수량이 적은 지역이기에 지붕은 편편하게 만들고 외벽, 창문, 담벼락 등 모서리는 둥글게 처리한다. 종종 서까래가 외벽 밖으로 빠져나오기도 하는데 자르지 않고 투박한 채로 둔다. 내부도 흙으로 마감하고 우리 붙박이장처럼 벽 안에 수납공간을 만든다. "토속적이면서도 건물 자체에서 곡선이 풍기는 부드러움도 있고 자연스럽기도 하고…. 전원의 자유를 표현하는데 이만한 게 없어요. 조용한 시골에 오두막처럼, 사막 한 가운데 선술집처럼 만들었어요." 카페지기 김영동 씨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농협을 거처 농약 · 종묘회사에서 일했다. 회사가 중국 진출을 앞두고 바빠질 무렵,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전원으로 보금자리를 옮기려 했다. 이대로 회사에 남으면 정말 일에만 매달려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 좋겠다는 아내와 의견을 모아 수락산 자락에서 카페를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지붕을 지탱하는 나무 서까래를 벽 밖으로 돌출시킨 것은 산타페 지역 주택의 특징 중 하나다. 미가담 입구. 아치 창호 역시 산타페 주택 모습을 반영했다. / 야외 공연장 울타리에 자전거 바퀴와 기타를 걸어 빈티지한 분위기를 냈다. 카페는 수락산 입구에 있던 가게를 사들여 리모델링했는데 워낙 오래된 가게인 터라 골조만 남기고 모두 뜯었다. 빗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산타페 지역의 건축물과 달리 경사 지붕을 만들었지만 외벽과 창문, 실내는 모두 산타페 풍으로 만들었다. " 공사하는 데 6개월이나 걸렸어요. 실내 공간은 두 개로 나눴는데 한쪽엔 벽난로도 놨어요. 간판이나 테이블은 틈나는 대로 만들어놨지요. 아직도 할 게 많아요." 야외는 화려한 색을 가미해 산타페 원주민 마을 포크빌리지의 느낌으로 경쾌하다. 바 테이블을 놓고 야외 바를 만들었다. 투박스러운 통나무 선반을 만들어 필요한 것들을 올려 두었으며 벽면을 붉게 칠해 원주민 그림을 그려둔 것이 인상적이다. 야외 테이블을 지나면 제법 넓은 무대도 있다. 봄여름에는 재즈 공연과 함께 바비큐, 맥주, 막걸리 파티를 주최한다. 야외 바. 산타페 원주민 마을 그림과 강렬한 색상으로 표현해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하다. 점심시간에 운영하는 샐러드 바. 취향 따라 입맛 따라… 틀을 깨다음악을 좋아하는 카페지기는 지인들과 주말마다 공연을 열었다."최근엔 쉬고 있지만 카페를 오픈하고서 주말마다 공연을 했어요. 주로 재즈 밴드 공연이었어요. 바비큐 파티도 하고 맥주 파티도 했지요. 공연을 보던 외국 손님들이 즉석에서 노래를 하기도 하고 재미있어요. 공연이 끝나면 술잔을 기울이며 지난 시절 음악 얘기도 나누고…." 일자리에서 물러나 한적한 곳에 카페를 지어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카페 운영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메뉴개발과 홍보도 해야 한다. 카페지기는 "단순히 도시가 싫고 시골이 좋아서 카페나 펜션을 시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만약 시작한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삶과 현실과 타협이 필요하다"고 충고한다. 카페 내부. 좌석 입구에 적힌 'Have A Good Time'이라는 문구가 손님들에게 행복한 미소를 준다. 카페지기가 수집한 골동품들이 눈을 심심치 않게 한다. 산타페 지역 주택은 벽을 활용해 수납공간을 만든다. 부드러운 곡선과 나무 판자가 정감있다. 미가담에 다양한 메뉴가 있는 것도 현실 타협의 결과다. 손님들은 커피도 마시지만, 보통 점심시간엔 샐러드 바를 이용하고 저녁엔 술도 즐긴다. 커피도 좋지만 등산 후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이 풀어주는 삶의 피로를 알기에 카페지기는 막걸리와 파전도 만든다. "어떤 손님은 오픈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여기가 레스토랑 겸 술집인 줄 알아요. 카페로서 입지를 굳히는 것도 좋지만 손님들이 와서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면서 편안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겨울 운치를 더하는 벽난로가 있다. 파리 몽마르트 광장을 중심으로 카페가 생겼을 때 카페에 모인 사람들은 정치적 논쟁을 하고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애연가들이 내뿜는 담배연기와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카페문화를 만들었다. 카페지기는 이런 공간을 만들고 싶다. 막걸리를 마셔도 좋으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맛, 멋, 이야기가 있는 카페로.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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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페의 낭만을 담은 산자락 카페, 남양주 ‘미가담味佳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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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시대 흐름에 따른 집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 성주 한개마을 한주종택
- 한개마을 가장 위쪽 산기슭에 위치한 한주종택(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5호)은 영조 43년(1767)에 이민검이 지었으며 성리학자인 한주寒洲 이진상이 고종 3년(1866)에 고쳤다고 한다. 이 집은 경상 감사를 지낸 문방동 소재 권 감사 집을 해체한 후 옮겨 와 지었다. 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기자 한주종택은 한주정사라는 별서를 두고 있어 한개마을에서 가장 격식을 갖춘 집이라 할 수 있다. 한개마을에서 별서를 가진 곳은 한주종택이 유일하다(그러나 하회댁 사랑채 담장 아래에 연못과 함께 정원의 흔적이 있는데, 이곳을 하회댁 또는 교리댁의 별서로 이용했을가 능성이 있어 한개마을에는 한주종택 말고도 한 곳 더 별서를 가진 집이 있었던 듯하다). 한주정사 동쪽에 위치한 연못. 직사각형으로 위아래로 나뉘고 凹형태로 연결된다. 방화장을 담장과 기와로 대신한 이유는대문에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나오고 그 우측에 안채에 딸린 행랑채와 사랑채가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다. 안채 쪽으로 점점 높아지는 사랑마당에 맞춰 사랑채 기단을 놓다 보니 사랑채 기단이 매우 높아져 권위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사랑채는 전면 네 칸 반, 측면 두 칸 반 규모로 방은 원래 깊이가 한 칸이고 뒤쪽에 반 칸 고방이 있고 그 밖에 다시 툇마루가 있었으나 최근 툇마루까지 방을 늘려 두 칸 깊이로 만들었다. 안채쪽 반 칸에는 안채로 통하는 통로가 설치돼 사랑채에서 바로 안채로 연결된다. 사랑채 측면은 다른 곳과 다른 모습이다. 측면 하부는 대부분 흙벽으로 마감하거나 화재 예방을 위한 방화장防火墻으로 처리하는데 이곳은 담장처럼 쌓았다. 북비고택 안채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한필원(한림대 교수, 건축학 박사)은 사랑채 옆 마당이 사당과 같은 공간임을 암시하려고 벽체 대신 담으로 쌓았다고 설명했다. 일면 일리 있는 말이나 이런 상징적인 해석보다는 전후툇집으로 깊이가 깊어지면서 맞배지붕으로는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는 것이 힘들어 아예 하부를 기와를 얹은 벽체 형식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안채는 튼 ㅁ자형이다. 일곱 칸 안행랑채를 앞에 두고 좌우에 찬광채와 아래채가 마당을 ㄷ자형으로 감싸면서 ㅁ자를 만들었다. 안채는 정면 다섯 칸 반인 전후툇집이다. 전퇴는 툇마루로 각방을 연결하고 후퇴는 고방이나 툇마루로 구성했는데 최근 반 칸을 늘려 크기를 키웠다.삼량집 안채는 기둥에 첨차를 설치한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집임을 알수 있다. 한주종택이 다른 집을 옮겨와 지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아닐까 한다. 안채는 얼마 전 화재로 지금은 방문객 관람이 불가능한상태다. 사랑채에서 한주정사로 통하는 문. 한주정사. 한개마을에서 별서를 지닌 곳은 한주종택이 유일하다. 한주 정사에서 본 전경으로 누마루에 앉으면 이보다 더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사랑채 뒤에 위치한 사당. 한주종택의 자랑거리, 한주정사종택 옆에는 별서인 한주정사가 있다. 한주정사는 별도로 드나드는 문이 있지만 사랑채 쪽에서도 일각문으로 통하게 했다. 한주정사 동쪽에는 산에서 흐르는 개울물을 이용해 연못을 파 놓았다. 연못은 직사각형으로 위아래 둘로 나뉘고 凹형태로 연결된다. 연결 부위에는 돌다리를 놓아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데 작은 섬이 있는 위쪽이 크고 상대적으로 아래쪽이 작다. 아래 연못보다 위 연못을 먼저 만들었다고 한다. 한주정사는 연못을 잘 볼 수 있는 쪽에 두 칸 방과 그 앞으로 한 칸 반 누마루를 배치했으며 연이어 두 칸 대청과 방 하나를 놓음으로써 전체적으로 T자형 평면이다. 큰방 문을 열면 연못을 포함한 정원 경관을 볼 수 있으며 누마루는 방보다 한 자 높게 만들어 바깥 경치를 앉아서도 잘 조망할 수 있다. 한주정사에는 '조운헌도제祖雲憲陶齊'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祖雲은 호가 운곡雲谷인 주자를 조종으로 모신다는 뜻이고 憲陶는호가 도웅陶翁또는 퇴계退溪인 이황의 학문을 받든다는 뜻이다. 집을 지은 한주 이진상의 학문세계를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한 것이다. 사랑채 측면으로 하부를 담장을 쌓고 기와를 얹은 특이한 모습이다. 대문에서 본 내부로 오른쪽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놓였다. 정면이 사랑채, 우측이 문간채다. 변화를 거듭한 한주종택한주종택에는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한주가 이 집을 중수할 때는 현재 사랑마당 앞에 바깥행랑채가 대문채와 나란히 배치돼 사랑마당을 위,아래로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대문도 문과 마방으로 구성한 두 칸이었고 지붕도 초가였으며 현재 한주정사 뒤편 언덕에는 별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배치에서 가장 큰 변화가 온 때는 1910년이다. 한주정사를 짓고 연못을 조성한 시기로 한주정사를 지을 당시는 ㄱ자 형태로 네 칸 규모인 재지기(재실을 관리하는 사람) 집이 지금과 같이 한주정사 아래 위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었다. 재지기 집 자리에 연못이 들어서면서 아래로 이동한 것이다. 이후 20년이 지나 다시 변화가 있었다. 아래쪽 연못을 더 파고 재지기 집을 현재 위치로 옮긴 후 대문을 설치하고 담을 쌓아 한주정사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집을 돌아보고 나니 담을 쌓고 앞에 대문간을 설치한 게 오히려 조망을 많이 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 한주정사를 지을 때처럼 대문간이 없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시원한 조망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의 변화는 바깥행랑채 철거와 대문간채 증축이다. 말을 관리하는 하인의 거처로 썼던 바깥사랑채를 1920년대 들어 말을 사용하지 않자 헛간으로 바꿨는데 이후 건물이 퇴락해 헐어버렸다. 또한 하인이 거처하는 방이 필요하게 돼 문간채를 한 칸 늘려 지으면서 초가를 기와로 바꿨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묘(종묘에 들어갈 수 없는 신주를 모시기 위해 따로 지은 사당)는 한주정사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지막 변화는 사회구조가 변화됨에 따른 것이다. 이전까지 한주종택은 성산 이씨 종가로 별묘와 사당이 함께 존재했다. 그러나 친족들이 멀리 떨어져 살게 되면서 한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게 되자 1955년을 마지막으로 별묘 제사가 사라졌다. 이때를 즈음해 별묘를 철거했고 1970년 지관(묘지나 택지를 선정할 때 지질과 길흉을 판단하는 사람)의 충고에 따라 사당을 지금 위치에서 북쪽 담장 쪽으로 옮겼다. 이런 모습은1990년대 초까지 이어졌으나 이후 사당을 원래 위치인 현재의 위치에 옮겨 지었다.이렇게 집의 변화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연세대학교 건축 역사·이론 연구실의 연구결과이다. 배치도 집은 시대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다 집을 돌아보면서 집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변화를 알기란 쉽지 않다. 배치나 구조의 변화로 대강 추정하거나 운이 좋을 경우 집주인 면담을 통해 개략의 변화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집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집이 변화한다는 것은 생활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늘어나거나, 종교가 바뀌거나, 사회 환경이 변하면 집도 변화한다. 처음 한주가 이 집을 지었을 당시 바깥행랑채는 문하생이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후에는 앞서 언급한 말을 돌보는 하인의 거처였다. 그리고 말이 교통수단으로서의 역할이 사라지자 광으로 변경됐고 그 후 쇠락해 철거됐다. 문간채도 바깥행랑채가 없어지자 하인이 거처할 방이 필요해 한 칸 더 늘린 것이고 초가에서 기와지붕으로 변한 것도 검약을 강조하던 선비정신이 쇠퇴하면서 가문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별묘도 사회 변화에 따라 제사 개념이 변화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특히 문간채가 초가에서 기와지붕으로 변화한 것은 바로 담을 면하고 있는 월곡댁 신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11년 건축한 월곡댁은 1930년에 사당을, 1940년에 별당을 지었다. 근대에 들어 부를 쌓은 월곡댁은 당시 사회 규범을 파괴한 건축형태를 보였다. 농업을 기반으로 했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상업활동으로 부를 축척한 월곡댁은 종택이 아님에도 사당을 세 칸으로 짓고 첩을 위한 별당까지 뒀다. 이는 당시 한개마을의 질서를 깨는 행위이다. 이런 모습에 자극받은 한주종택이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문을 초가에서 기와로 바꿨고 한주정사 영역도 확대한 것이다. 이처럼 집은 시대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집에 대한 연구를보면이와관련한심도있는분석을본적이별로없다. 이런 점에서 연세대학교 건축역사·이론 연구실의 시대 흐름에 따른 한개마을의 대표적인 집의 변천을 연구한 자료는 매우 귀중한 것이 아닌가 한다. 대문 밖으로 난 길,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한주정사 출입구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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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시대 흐름에 따른 집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 성주 한개마을 한주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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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로 도심 주택의 한계 극복한 대구 어반 테라스Urban Terrace
- 어반 테라스는 대구 수성구 범어동에 위치한 연면적 484.06㎡(146.42평), 3층 규모 상가주택이다. 1층은 부설 주차장과 임대 상가로, 2∼3층은 클라이언트 가족을 위한 다가구주택으로 구성했다. 과밀한 도심 속 주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군데군데 틈을 내어 내·외부 공간을 잇는 테라스를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글 김건철 건축가 | 사진 윤동규 작가※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인터뷰와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OUSE NOTEDATA위치 대구 수성구 범어동지역/지구 일반상업지역, 방화지구용도 다가구주택, 근린생활시설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대지면적 331.20㎡(100.18평)건축면적 251.22㎡(75.99평)건폐율 75.85%연면적 484.06㎡(146.42평) 1층 238.28㎡(72.07평) 2층 189.41㎡(57.29평) 3층 56.37㎡(17.05평)용적률 146.15%규모 지상 3층설계기간 2016년 12월~2017년 6월공사기간 2017년 7월~2018년 3월설계 스마트건축사사무소 010-3502-7818 www.smart-architecture.kr책임 건축가 김건철시공 건축주 직영 어반 테라스는 대구 수성구 범어동 대구MBC 인근에 있는 3층 규모 상가주택이다. 대지는 대구의 중요한 대로 중 하나인 동대구로 이면도로에 위치하며, 주변은 기존 낡은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이 주상복합건물과 오피스로 바뀌는 과도기적 상황이다. 클라이언트도 이곳에 있는 낡은 주택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상가주택을 신축하기로 했다. 어반 테라스의 출입구 어반 테라스는 대구 수성구 범어동 대구MBC 인근에 있는 3층 규모 상가주택이다. 대지는 대구의 중요한 대로 중 하나인 동대구로 이면도로에 위치하며, 주변은 기존 낡은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이 주상복합건물과 오피스로 바뀌는 과도기적 상황이다. 클라이언트도 이곳에 있는 낡은 주택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상가주택을 신축하기로 했다.애초 임대용 상가와 다가구주택으로 이뤄진 지하 1층~지상 7층 규모로 계획했으나, 예산상의 문제로 지상 3층으로 재설계했다. 1층은 고정적 임대 수익을 위한 상가로, 2층과 3층은 클라이언트인 사남매 중 막내아들 가족의 복층형 1가구와 부모님의 1가구(2층 일부)로 구성했다. 1층 근린생활시설 1층은 근린생활시설로 좌측에 차량 4대를 주차할 공간을 계획했다. 상가 위 테라스로 세대를 구분한 다가구주택도시에 들어설 주택을 계획할 때 프라이버시와 개방감 확보라는 공존하기 쉽지 않은 두 가지 조건 충족에 중점을 둔다. 또한 크기가 작더라도 다양한 외부 공간과 실내가 접하도록 노력한다. 어반 테라스도 과밀한 도심에서 살아가는 클라이언트 가족을 위한 대안적 건축물이 되길 바라며 설계했다. 고층 빌딩에 둘러싸인 대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무엇보다 중간적 성격을 갖는 외부 공간의 가능성을 그 대안으로 검토했다. 평면 사이사이에 틈을 내어 계획한 중정, 베란다, 테라스 등 내·외부를 잇는 외부 공간을 실내 공간에 최대한 인접 배치했다. 이러한 외부 공간은 계획 방식에 따라 주거 공간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며, 처마를 통해 계절에 맞는 일사량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내부가 외부로 확장되는 시지각적 공간감으로 개방감이 들게 한다. 어반 테라스의 계단실 1층은 남녀 화장실을 갖춘 임대 상가를 ‘T’자로 구성하고, 그 좌·우측에 4대분의 주차장과 2∼3층 다가구주택 전용 계단실을 배치했다. 상가주택임을 고려해 이면 도로에서의 시인성과 접근성을 높이고, 상가와 주택 간 동선의 중첩을 방지했다. 그리고 2∼3층은 클라이언트 가족의 다가구주택으로 2층 전면(남향)에 부모님 가구를, 2층 후면 일부와 3층 전 층에 막내아들 가족의 가구를 배치했다. 막내아들 가구는 공용 계단실과 별도로 2, 3층을 잇는 계단실을 설치해 복층형으로 구성했다. 부모님 가구 현관 부모님 가구의 거실과 주방/식당 부모님 가구는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현관 전면의 테라스를 중심으로 우측에 침실과 소장품을 전시할 갤러리를, 좌측에 거실과 주방/식당, 욕실을 갖춘 침실을 배치했다. 복층형 막내아들 가구는 층으로 부부와 자녀의 영역을 구분했다. 부부의 영역인 2층은 중정형 테라스가 바라보이는 전면에 거실과 주방/식당을, 그리고 후면에 욕실이 딸린 침실과 계단실을 배치했다. 거실은 수평적 개방감을 들게 한 테라스와 별도로 복층형의 이점을 살려 수직적 개방감을 주고자 보이드Void로 처리했다. 자녀의 영역인 3층에 2개의 침실을 두고, 별도로 테라스로 나갈 수 있게 문을 냈다. 아들 가구의 현관아들 가구의 현관 MATERIAL외부마감 옥상 - 철근콘크리트, 잔디 식재, 데크 벽 - 그래뉼(테라코트), 외단열 공법 피니쉬 도장, 아연도금 강판 데크 - 카풀 데크내부마감 천장 - 수성 페인트 벽 - 수성 페인트 바닥 - 강마루계단실 디딤판 - 나왕 집성목 난간 - 스틸단열재 지붕 - T180 비드법 보온판 2종(네오폴) 외단열 - T100, T170 비드법 보온판 2종(네오폴) 내단열 - T30 비드법 보온판 ‘나’등급창호 남선알미늄, 방화창현관문 일반 방화문주요 조명 T5 LED주방가구(싱크대) 한샘 키친바흐위생기구 대림바스난방기구 가스보일러 아들 가구의 주방/식당. 식당 윗 부분을 오픈시켜 한결 더 넓어보인다. 아들 가구의 안방 클라이언트는 내·외부 모두 화이트 톤으로 마감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전체적으로 외단열 공법을 적용하고 피니쉬 도장, 아연도 강판, 알루미늄 루버 세 가지 마감재로 구성해 화이트 톤으로 통일시켰다. 또한 창문의 위치와 크기는 평면을 기준으로 결정했다. 인테리어도 벽, 바닥, 천장 모두 화이트 톤으로 심플하게 디자인했다. 이 과정에서 평면 사이사이에 배치한 테라스와 화이트 톤 색채가 어우러지도록 해 실내 분위기를 밝고 쾌적하게 만들어냈다. 아들 가구는 2층 일부와 3층에 복층으로 계획하고 계단실 하단에 수납공간을 만들었다. 복층 복도 곳곳에 테라스를 만들어 주택의 묘미를 살렸다. 과밀한 도심 속에 들어선 어반 테라스는 1층 임대 수익용 상가에 맞춰 시인성과 근접성을 높이고, 2층과 3층에서 클라이언트 가족이 생활하기 편하도록 프라이버시 및 개방감 확보에 중점을 둔 프로젝트였다. 클라이언트에게 어반 테라스가 만족도 높은 도심 속 주거 공간으로 자리하기를 바란다. 마당을 옥상에 마련한 어반 테라스 추가 [철근콘크리트, ALC주택] 테라스로 도심 주택의 한계 극복한 대구 어반 테라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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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로 도심 주택의 한계 극복한 대구 어반 테라스Urban Ter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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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모든 걸 내려놓고 천천히 걸으니 마을이 조근조근 말을 건네더라
- 성주 한개마을 첫 번째 이야기 -선조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마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성주 한개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은 그중 하나다. 2007년이 되어서야 문화재로 지정됐지만 마을 안에 있는 많은 고택들로 예전부터 주목을 받아왔던 곳이다. 한개마을을 총 3회에 걸쳐 싣는다. 이번 호에서는 한개마을에 대해 소개하고 이후 2회에 걸쳐 마을 속 여러 고택을 지면에 담는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새마을 운동과 산업화의 광풍으로 농촌이 붕괴되면서 과거 우리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마을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라면 문화재로 지정된 마을 몇 곳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마을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지정된 낙안읍성(사적 제302호/1983)을 비롯해 잘 알려진 하회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122호/1984), 양동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1984), 제주 성읍민속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188호/1984), 고성 왕곡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235호/2000), 외암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236호/2000), 남평문씨본리세거지(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제3호/1995) 등이다. 이 외에도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옛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경상북도에는 봉화 닭실마을, 김천 원터마을, 대구 옻골마을 등이 있고 전라남도에는 나주 도래마을, 보성 강골마을, 전남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등이 있으며 경상남도에는 산청 남사마을 등이 있다. 이런 마을들도 이제는 집이 많이 개조돼 옛 정취를 온전히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아쉬운 대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한개마을 주차장에서 바라 본 마을 전경. 2007년 문화재로 지정됐지만 이전부터 문화재 답사를 하려는 사람으로 붐비던 곳이다. 오래전부터 문화재 답사 발길 이어져한개마을은 2007년에서야 문화재로 지정됐지만 마을 안에 있는 많은 고택들로 예전부터 주목을 받아왔던 곳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모두 8채다. 교리댁校理宅(민속문화재 제43호), 북비고택北扉故宅(민속문화재 제44호), 한주종택寒洲宗宅(민속문화재 제 45호), 월곡댁月谷宅(민속문화재 제46호), 진사댁進士宅(민속문화재 제124호), 도동댁道東宅(민속문화재 제132호), 하회댁河回宅(문화재자료 제326호), 극와고택極窩古宅(문화재자료 제354호)이다. 그중에서 교리댁, 북비고택, 한주종택, 월곡댁은 1983년에 이미 문화재로 지정됐고 이후 하회댁(1996), 극와고택(1998), 진사댁(2000), 도동댁(2004)이 차례로 지정됐다. 한 마을에서 이렇게 많은 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흔치 않다. 한국전쟁 통에 많은 가옥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예스러운 분위기가 살았을 것이다. 어쨌든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곳이겠지만 문화재 답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오래전부터 고택이 많은 마을로 잘 알려진 곳이다. 어쩌면 옛 모습이 잘 남아 있는 마을로,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시기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지금보다 이른 시간에 문화재로 지정됐더라면 옛 모습이 보다 잘 남아 있어 많은 일반인의 발길을 모으지 않았을까 한다. 대부분 건물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됐다고 한다. 연대 순으로 살펴보면 교리댁이 1760년, 한주종택은 1767년, 북비고택 1821년이고 기타 가옥들은 대부분 19세기 후반에 지어졌다. 월곡댁은 한참 후대, 일제 강점기인 1911년에 들어섰다. 하회댁 건립 연대에 대해 한필원은 망와望瓦(용마루에 세우는 암막새)에서 1745년의 명문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하회댁이 가장 오래된 집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근세 집 구조를 하고 있어 후대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북비고택 입구로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그리는 마음으로 북쪽에 문을 내고 살았다 하여 북비고택이 됐다. 북비고택 내부. 잘 다듬은 잔디와 품격 높은건물이 당시 위세를 보여준다. 마을 안에 위치한 '돈재이공 신도비'로 돈재이공은 사도세자의 부당함을 고한 이석문을 일컫는다. 1450년 진주목사 이우가 입향해 마을 조성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1450년경에 입향入鄕해 자리 잡으면서 한개마을이 생겼다. 560여 년간 성주 이씨가 마을을 이루고 산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성주 이씨는 모두 이우의 6대손인 정현李廷賢의 후손이다. 정현은 광해군 4년(1612)에 급제했으나 그 해 요절하고 만다. 수성壽星이라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네아들을 두었고 그들은 각각 백파伯派, 중파仲派, 숙파叔派, 계파季派의 파시조가 돼 모두 이곳에 정착해 가문을 일궜다. 따라서 이곳이 성산 이씨의 집성촌으로 발전하는 것은 수성 때부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한필원/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정현이 대과에 급제한 이후로 마을에서는 모두 9명의 대과 급제자와 24명의 소과 급제자가 나와 성산 이씨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석구李碩九, 이석문李碩文(1713~1773), 이원조李源祚(1792~1882), 이진상李震相(1818~1886)이다. 교리댁을 지은 이석구는 영해부사를 거쳐 정3품인 사헌부 집의執義에 이르렀고 이석문은 북비댁의 주인으로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으며 사도세자가 들어가 있는 뒤주에 돌을 올려놓으라는 어명을 거절해 곤장을 맞고 파직됐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사도세자를 기리는 마음으로 북쪽에 문을 내고 살았다고해 집 이름이 북쪽 문이라는 뜻의 북비北扉고택이 됐다.이원조는 호가 응와로 이형진의 아들이었으나 북비댁 양자로 입양됐다. 1809년 18세에 대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정언, 경주부윤, 한성판윤,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가문의 교육에 관심을 가져 자신의 조카인 이진상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고 한다. 이진상의 호는 한주寒州다. 32세인 1849년에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었지만 대과를 포기하고 학문의 길로 나섰다. 초기에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했으나 이원조의 교훈으로 성리학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했으며 조선 후기 기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과 함께 근세 3대 유학자로 꼽힌다(한필원 상기서/민족문화대백과사전/인터넷 조선왕조실록). 이진상이 중수한 한주종택은 한개마을 제일 안쪽 동쪽 산 위에 위치한다. 주위 풍광과 조화가 일품인 종택 내 한주정자 영해부사를 거처 사헌부 집의까지 이른 이석구의 교리댁 좌청룡 우백호 명당이 따로 없다한개마을의 한개는 우리말로 큰 나루라는 뜻이다. 마을 조금 앞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지류인 백천에는 예전에 나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그 흔적은 없어지고 이름만이 남아 옛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조선 시대 한개마을 앞은 칠곡과 김천을 잇는 중요 길목으로 역驛이 있어 매우 번창했던 곳이라고 한다(연세대학교/성주 한 개마을). 마을은 풍수적 명당이다. 뒤쪽 영취산을 주산主山으로 영취산 줄기가 좌청룡, 우백호로 감싸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앞으로는 낮은 언덕이 안산을, 뒤로는 성산星山이 조산朝山을 이루며 명당수에 해당하는 백천이 우백호에서 들어와 마을 앞에서는 직선으로 지나지만 마을을 지나서는 유연하게 휘돌아 나가는 것이 명당의 조건을 충분히 갖췄다. 입향조인 이우가 이곳에 정착할 때도 이런 지리적 여건을 어느 정도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한다(한필원, 연세대학교). 마을 뒷산인 영취산 감응사感應寺에서 바라보면 정확하게 볼 수 있다. 감응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바라보면 안산과 멀리 조산까지 한눈에 보인다. 감응사에 대해서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 전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40대 애장왕이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불공을 드려 낳은 왕자가 태어날 때부터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느 날 왕의 꿈에 내일 아침 나타나는 독수리를 쫓아가면 샘물을 찾을 것인데 그 샘물로 눈을 씻으면 눈이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날 독수리를 쫓아 도착한 곳이 감응사 자리이고 꿈에서 말한 샘물이 감응사 뒤쪽에서 나는 샘물이었다는 것이다. 그 샘물로 왕자의 눈이 보이게 되자 절을 지어 감응사라고 했고 이 산을 독수리 산이라는 뜻으로 영취산으로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전설까지 있는 것은 이렇게 영험한 산의 기를 받은 곳이 이 한개마을이고 풍수적으로도 더없이 좋은 명당이니 한개마을이 번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연세대학교). 건너편 고택 지붕이 담에 걸렸다. 꼬불꼬불 나지막한 담길을 걷는 것만으로 옛 마을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교리댁 입구에 알리는 큰 나무가 서 있다. 담에서 전통 문양 그림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어 또 다른 재미를준다. / 마을 입구 갈림길, 갈림길 사이에 주요 건물들이 위치해 있다. 한개마을은 현재 주차장으로 조성된 곳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좌우로 갈라지는 갈림길 사이에 중요한 건물들이 모두 위치해 있다. 특히 마을 중심이 되는 건물들은 바로 제일 안쪽에 위치해 위상을 달리한다. 그러나 이런 위상도 따지고 보면 그 집을 지을 당대에 얼마나 사회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일 늦게 지은 월곡댁을 보면 당대의 이룬 부를 가지고 마을을 지배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집을 지은 위치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집의 내력을 보면 크게 중수한 때가 당시 그 집안의 위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저런 마을의 내력을 모르고 이곳을 찾아도 한개마을은 우리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시간을 잠시 묶어 두고 천천히 마을을 걷다보면 꼬불꼬불한 나지막한 담길만으로도 옛 마을의 정취에 빠지고 만다. 이곳에서는 마음도 잠시 내려놓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걸어보길 바란다. 그러면 한개마을이 조근조근 말을 걸어올 것이다. 지금도 한개마을에는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다. 참고서적성주 한개마을/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건축역사 · 이론연구실/연세대학교출판부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한필원/휴머니스트답사여행의 길잡이 8 (팔공산자락)/돌베개성주 한개민속마을/성주군문화재청 사이트인터넷 조선왕조실록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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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모든 걸 내려놓고 천천히 걸으니 마을이 조근조근 말을 건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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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싸리기둥에 칠기봇장 달성 조길방 가옥
- 대구 달성 조길방 가옥達城趙吉芳家屋(중요민속문화재 제200호, 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 350)은 가화를 당한 조광국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안채를 지었고 나머지 건축물은 그의 아들, 손자 대에 올렸다. 싸리 기둥에 칠기봇장(칠기나무로 된 집)인 특이한 곳으로 소박한 안채와 사랑채, 방앗간채, 헛간채로 이뤄졌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조길방 가옥은 이런 깊은 산골에 집이 있나 할 정도로 산골에 위치한다. 가화를 당한 조길방의 9대조 조광국이 홀로 들어와 정착하고자 집을 지었다. 민속문화대백과사전(이하 백과사전)에 의하면 대구 동촌비행장 근처에 살던 조광국匡國(조길방의 9대조)이 가화家禍를 당해 홀로 이곳,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에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이곳은 매우 깊은 산골이다. 마을에서 계곡으로 한참 들어와서도 또 산을 타고 올라야 한다. 이런 곳에 집이 있나 할 정도다. 이렇게 깊은 산골에 정착한 것으로 보아 가화 때문에 도망쳐 정착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현재 초가 4채가 있는데 안채와 사랑채는 예전에 지은 것이고 아래채와 입구에 있는 집은 최근 복원했다. 달성군이 제공한 배치도와 한국의 전통가옥 기록화보고서(달성 조길방 가옥/이하 보고서)에는 입구 건물을 헛간채로 표기하고 있으나 지금은 일반 살림집으로 쓴다.원래 인근에 15가구가 모여 있었다고 하는데 1984년 조사에는 6가구만이 파악됐고, 지금은 주변에 얼마나 사는지 모르겠으나 아래 음식점 외에는 사람이 산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능선과 어우러져 아담하게 놓인 아래채. 대청 기둥을 소나무가 아닌 싸리나무로상량문에는 '聖上在位九年甲굪二月十九日卯時竪柱未時上樑'라고 쓰여 있다. 갑진년은 정조 재위 8년인 1784년으로 실제 건축연도는 1784년 또는 1785년으로 추정된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사랑채는 60년 전에 확장했고 아래채는 30여 년 전 무너진 것을 개조했다. 백과사전이 1984년 작성된 문헌을 참고했으므로 사랑채는 1925년 무렵, 아래채는 1955년 무렵 확장·개조한 것으로 보인다.조길방 가옥 안채는 높은 축대 위에 남서향으로 놓였다. 전면 다섯 칸 측면 한 칸의 一자형이다. 대청은 두 칸으로 간 살이 다른 칸보다 좁아 두 칸이지만 한 칸인 안방과 건넌방보다 조금 더 클 뿐이다. 대청 기둥은 원기둥으로 소나무가 아닌 싸리나무를 썼는데 백과사전에 의하면 조길방의 부친이"싸리 기둥에 칠기봇장(칠기나무로 된 집)"이라고 늘 자랑했다고 한다.현재 원기둥 하부는 다른 나무로 이었다. 백과사전에서도 이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오래전에 이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안채는 삼량집으로 소박하다. 안방 전면에는 작은 창을, 건넌방 전면에는 문을 설치했는데 예전에는 건넌방 앞쪽도 안방과 같았다고 한다. 부엌 측면과 후면은 1/4칸 정도 늘여 넓게 했으며 후면으로 늘린 부분은 선반을 달아 식기 등을 놓았을 것이다.사랑채는 아래 두 칸은 방, 안채 쪽 한 칸은 헛간이다. 입구 쪽에 쪽마루를 둬 드나들기 편하게 한 것으로 보아 출입은 주로 안마당 반대편 쪽에서 이뤄진 것 같다. 바깥 한칸에 위치한 아궁이는 안마당 쪽에 둬 불을 땔 때 연기가 사랑채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으며 같은 이유로 아궁이가 설치된 방향이 아닌 측면과 입구 두 곳에 문을 설치했다. 한편 우측 기둥에 상방과 하방을 걸었던 흔적이 있어 사랑채 옆에 대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 앞으로 넓게 자리한 안마당. 안채에서 본 전경으로 얼마나 높은 곳에 위치한지 짐작이 간다 좌측 안채와 정면 사랑채. 사랑채는 1925년 무렵 확장, 개조했다. 걸터앉을 수 있도록 낮은 툇마루를 둔 헛간채. / 새로 지은 건물로 기존 건축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채와 헛간채 사이공간. 변소를 건물에 붙여 지은 특이한 사례조길방 가옥에서 눈길을 끄는 곳은 아래채다. 현재 백과사전의 평면, 달성군청에서 제공한 평면, 보고서의 평면 그리고 지금 건물 모습을 비교해 보면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선 보고서의 평면과 현재 평면은 비슷하다. 기본 구성은 가운데 방을 중심으로 안채 쪽에는 외양간을, 반대쪽에는 곳간을 배치했다. 보고서 평면과 실제 평면의 차이는 외양간 뒤편을 1/4칸 정도 더 내달았고 화장실 부분을 보고서보다 창고 쪽으로 1/4칸 정도 더 키웠다. 그리고 예전에는 곳간 옆 처마 밑에 디딜방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어떤 것이 원형인지 판단할 길이 없다. 그리고 2005년 발간한 보고서 사진은 문화재청 사진과 같으므로 현재 아래채는 2005년 이전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아래채는 세 칸 규모밖에 안 되는 작은 집이지만 다양한 구성을 보여 흥미를 끈다. 변소에는 별도로 문을 만들지 않고 뒤쪽에서 돌아 들어가게 했는데 이렇게 변소를 건물에 붙여 짓는 경우는 강원도 산간에 있는 집 외에는 보지 못했다. 조길방 가옥에서 아쉬운 부분은 옛 헛간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예전에 찍은 문화재청 사진에서도 지금과 같은 건물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보고서에 있었던 헛간이 예전 시골 농촌 살림살이로 보아 더 어울린다. 한옥 체험이나 농촌 체험을 위해 새로 집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전혀 환경에 맞지 않는 건물임은 분명하다. 현재 조길방 가옥 대청에는 6장의 교지를 전시해 놓았다. 초가집이지만 자기 집안이 양반이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용을 보면 위 3장은 조시번과 조중기가 받은 교지로, 두 장은 벼슬을 내린다는 내용이고 한 장은 품계를 올린다는 내용이다. 아래 3장은 부인에 대한 것으로, 남자가 일정한 품계를 받으면 부인도 그에 상응하는 내명부 품계를 받기에 같이 내린 것이다. 교지 중 제일 빠른 것이 건륭 21년이다. 건륭 1년이 1736년이니 건륭 21년은 1756년이다. 이때는 조시번이 종2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했고 17년 뒤인 건륭38년(1773년)에는 조중기가 정삼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가자加資(조선 시대 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경우 품계를 올려 주던 일. 또는 그 올린 품계)돼 종2품 품계인 가선대부로 올랐다. 이 정도면 명망 높은 집안이라 할 수 있다. 아래채 후면으로 좌측이 외양간이고 우측이 곳간이다 축대 위에 남서향으로 앉은 안채. 대청 기둥을 소나무가 아닌 싸리나무를 쓴 특이한 경우다. 삼량집으로 안방 정면으로 작은 창을 냈다. 초가와 빼곡한 숲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문화재청자료에는 조광국이 가화를 당해 총각의 몸으로 이곳에 들어와 안채를 건립했다고 나오는데, 상량문에 쓰인 1784년은 조광국 사후이므로 이 집은 아마도 조광국의 아들 또는 손자 대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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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싸리기둥에 칠기봇장 달성 조길방 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