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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연못이 건물 전체를 망쳤다? 달성 도곡재
- 조선 정조 2년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사용하다 20여 년 후 박종우가 공부방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도곡재陶谷齋(시유형문화재 제32호/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692)로 불리고 있다. 용도와 주인이 바뀌면서 모습을 달리했는데 살림집이 재실로 그리고 다시 살림집으로 쓰인다. 연못을 지으면서 누마루를 달았는데 이것이 건물전체 외관을 해치고 있다.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문화재청 소개에 의하면 도곡재는 "처음에는 조선 정조 2년(1778)에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운 건물이나, 정조 24년(1800)경에 도곡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도곡재 근처에 사는 문중 사람 말에 의하면 "서정공西亭公박문현朴文鉉(1789~1875)이 살림집으로 지었다고 되어 있으나 정확히 언제 지었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고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부터 도곡공陶谷公박종우朴宗佑(1587~1654) 후손들이 공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도곡재로 불렸다"고 전했다. 여기서 문화재청 자료에 나타난 1778년이라는 건립 연대를 보면 박문현이 태어난 해보다 먼저이므로 박문현이 지었다는 것은 잘못됐거나 박문현이 지었다면 건립 연대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문중 사람의 말로 추정할 때 아마도 건립 연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도곡의 공부방으로 썼다는 것도 문중 사람의 증언과 다르므로 다시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도곡 박종우가 공부방으로 쓰면서 도곡재라 불렀다고 하는데 문중 사람 말은 다르다. 다시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우리 한옥에서 재실齋室은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제사를 위한 부속 시설이라는 것이고 다음으로 유생이 공부하는 방이라는 뜻이다. 공부하는 재실과 비슷한 뜻을 가진 건물로는 재사齋舍가 있는데 서원이나 향교에서 유생들이 기숙하던 곳 또는 공부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을 말한다. 재사의 대표적인 예가 영덕 화수루花樹樓(경북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안동 권씨 집안에서 집안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들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도곡 박종우는 한강寒岡정구鄭逑에게서 수학했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해 통곡하고, 평생 지은 글을 모두 태워 버렸다고 한다. 또한 자칭 숭정처사崇禎處士라 해 종신토록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달성 10현 중 한 사람이고 문음文蔭으로 부사과副司果(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종6품 관직)가 됐으며 사후 사헌부지평(조선시대 사헌부의 정오품正五品관직)에 추증됐다. 홍살을 설치하고 위에 엄나무를 올린 대문. 엄나무는 귀신을 쫓는다 하여 민간에서 자주 썼다고 한다. 용도와 주인이 바뀌면서 모습을 달리한 도곡재도곡재는 그간 용도와 주인이 바뀌면서 집의 구조도 일부 바뀐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살림집으로 지었던 것이 재실로 바뀌고 다시 주인이 바뀌면서 살림집으로 사용됐다. 앞선 문중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현재 집주인의 증조부 때 이 집을 구입했다고 하는데 이때 재실에서 다시 살림집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개조한 부분이 누마루다. 달성군청 자료를 보면 앞에 있는 누마루식 대청은 후대에 설치했다고 한다. 현재 가구의 짜임새로 볼 때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고 후대 덧붙여 지은 것이 맞는 것 같다. 도곡재와 뒤쪽으로 담을 같이 하고 있는 태고정에서도 덧대어 방을 늘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태고정의 부엌 쪽 한 칸은 후대에 늘린 것을 참고해 다시 늘린 것이 아닌가 한다. 대부분 건물이 남향으로 배치돼 있다. 도로가 서쪽에 있어 건물 진입은 사랑채 측면에서 이뤄지고 중문으로 가려면 사랑채 앞을 지나야 한다. 안채 배치는 ㄱ자형의 안채, 중문칸, 헛칸채가 안마당을 둘러싼 형상인데 일반적인 경상도 집과는 달리 전혀 폐쇄적이지 않다. ㄱ자형 안채는 몸채 다섯 칸 날개채 두 칸으로 구성했는데 전퇴가 없는 삼량집으로 소박하다. 안방은 두 칸이고 뒤쪽과 옆쪽에 개흘레(건물 기둥을 이용해 벽 위쪽 바깥에 조그맣게 달아낸 간살. 벽장이나 반침 등과 같이 방 안에서 사용하는 격납 시설)를 뒀다. 건넌방은 비록 한 칸이지만 간살을 넓게 잡아 살림살이를 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넉넉하게 계획했다. 안채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부엌과 건넌방 옆 아궁이를 설치한 칸이다. 아궁이를 설치한 칸 위는 건넌방에서 사용하는 다락이, 아래는 건넌방을 위한 함실아궁이가 설치됐다. 아궁이를 설치한 한 칸은 사랑채 누마루처럼 부섭지붕(벽이나 물림간에 기대어 만든 지붕)을 달았다. 다른 곳과 다른 점은 옆 기둥에 바짝 붙여 나지막한 담장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벽을 설치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마도 아궁이 쪽으로 직접 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앞쪽에서 바람이 세게 불면 아궁이에 불이 너무 잘 들기 때문이다. 내삼문과 붙어 있는 중문칸. 오른쪽이 부엌이다. 규모가 작아 부섭지붕을 달아 공간을 늘렸다. 전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인 사랑채. 중문을 가려면 사랑채 앞을 지나야 한다. 안사람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부엌도곡재 부엌은 이제까지 본 부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집 형태로 볼 때 부엌이 한 칸인 경우는 그야말로 초가삼간 집에서나 볼 수 있다. 한 칸 부엌이 집에 어울리지 않게 좁은 것은 분명하다. 부엌 날개채 쪽 지붕을 보면 맞배지붕으로 돼 있어 이를 봐도 처음부터 한 칸으로 계획됐던 것은 분명하다. 현재 지붕은 부엌 기둥에 보아지 형태의 부재를 붙이고 그 위에 도리를 얹고 그 도리와 앞에 있는 담에 걸쳐 서까래를 걸쳐 지붕을 얹었다. 현재 지붕 구조로 볼 때도 후대에 새롭게 늘린 것이다. 처음에는 한 칸 부엌으로 계획했던 것인데 실제 생활하면서 불편하자 초가로 부섭지붕을 설치하고 한 칸 늘린 것으로 보인다. 안채에 전퇴가 없고 부엌이 한 칸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아 이 집을 계획할 때 안사람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바깥주인 뜻대로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는 전퇴집이 일반적이었음에도 사랑채에는 퇴칸을 두고 안채에는 퇴칸을 두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부엌을 한 칸으로 지었다는 것에서 그렇다. 헛간채는 네 칸 초가다. 최근 고택을 수리하면서 원래 초가지붕이었던 광채나 헛간채를 기와집으로 고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곳은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 반가웠다. 헛칸채는 두 칸은 마루를 깐 광이고 두 칸은 아래는 헛간, 상부는 다락이다. 헛간채에 다락을 두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이렇게 다락방으로 완전히 구획하는 경우는 이곳이 처음이다. 건물 형태를 고려하면 아래쪽은 외양간으로 사용한 듯하다. 사랑채 옆으로 연못을 조망하고자 후대에 누마루를 늘려 달았다 안채는 다른 경상도 지역 고택처럼 폐쇄적이지 않다. ㄱ자형 안채는 몸채 다섯 칸 날개채 두 칸으로 구 성됐다 건물 전체 외관을 망친 누마루 아쉬워사랑채는 전면 다섯 칸 측면 두 칸 규모지만 누마루를 포함한 네 칸은 전퇴를 둔 구조이고 중문칸 쪽 한 칸은, 사랑방 쪽 한 칸 반 규모를 두 칸으로 나눠 앞쪽에는 수복방을, 뒤쪽에는 아궁이를 뒀다. 아궁이 상부는 사랑채를 위한 다락으로 꾸몄고 사랑방에는 게흘레를 설치해 편의를 도모한 것이 특징이다. 누마루는 사랑채 대청 기둥으로 삐져나온 장혀 뺄목 아래에서 도리를 걸어 앞에 세운 기둥과 연결하고 이 도리 위에 기존 처마를 받치는 부재를 놓은 후 그 앞으로 다시 별도 서까래를 추가로 설치해 부섭지붕을 만들었다. 이렇게 기존 지붕 처마 아래 다시 지붕을 덧대어 설치하다 보니 내부가 매우 낮고 답답하다. 그렇지만 앉아서 주변을 살펴보기에는 그런대로 쓸 만하다. 이렇게 마루를 덧댄 것은 앞에 있는 연못 때문이다. 연못을 조성했지만 그에 걸맞은 시설이 없었기에 후에 누마루를 덧대어 낸 것이다. 그러나 이 누마루로 인해 건물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아쉽다. 연못이 대청 앞쪽에 위치했다면 사랑채 어느 곳에서도 연못을 편하게 조망할 수 있어 누마루를 새로 설치할 필요가 없다. 연못을 서쪽 구석에 만들어 놓고 보니 누마루의 필요성이 강하게 느껴졌고 그로 인해 건물 전체 외관을 망쳐가면서 누마루를 지었던 것이다. 연못을 조성한 사람의 안목이 두고두고 아쉽다. 솟을대문에는 홍살을 설치하고 그 위에 엄나무를 올려놓았다. 엄나무의 정확한 명칭은 음나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엄나무라 부른다. 엄나무는 가지에 커다란 가시들이 있어 민간에서는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 믿어 집 안에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 위쪽에 걸어 두거나 무당이 굿을 할 때 귀신을 물리치는 도구로 쓰였다. 모든 나쁜 기운의 침입을 막으려 했던 소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서쪽에 조성한 작은 연못. 뒤로 보이는게 화장실이다. 네 칸 초가인 헛간채.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흔치 않은 건물이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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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연못이 건물 전체를 망쳤다? 달성 도곡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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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트플레이어를 닮은 중화동 니나노 상가주택
- 작은 면적의 대지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수익 구조는 매우 한정적이다. 중화동 니나노 상가주택은 1층은 카페(동네카페 니나노), 2층은 임차세대(2가구), 3층 일부는 임차세대(1가구), 그리고 3층 일부와 4층 전층은 주인세대로 계획했다. 3, 4층 주인세대는 내부에 오르내리는 수직 동선이 있다. 이 과정에서 대지가 33.88평으로 협소한 데다 삼각형이라 최대한 많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게 코어 계획과 공간구상을 위해 노력했다. 건물을 관통하는 붉은색 매스는 카세트플레이어의 버튼에서 착안한 것으로, 부피가 큰 다가구 및 다세대주택에 둘러싸인 상가주택의 인지도를 높이고자 한 요소다.글 김동희 소장(건축사사무소 KDDH) | 사진 백홍기 기자※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인터뷰와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OUSE NOTEDATA위치 서울 중랑구 중화동 봉화산로지역/지구 도시지역, 제2종일반주거지역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대지면적 112.00㎡(33.88평)건축면적 65.16㎡(19.71평)건폐율 58.18%연면적 218.88㎡(66.21평) 1층 29.48㎡(8.91평) 2층 65.15㎡(19.70평) 3층 65.16㎡(19.71평) 4층 59.09㎡(17.87평)용적률 195.43%설계기간 2017년 5월~10월공사기간 2017년 11월~2018년 7월설계 건축사사무소 KDDH 02-2051-1677 www.kddh.co.kr시공 ㈜디스인 02-2291-2182 www.thisin.co.kr 어느 가족이든 행복한 삶을 위해 대지를 구입하고 건축을 꿈꾼다. 중화동에 있는 30평 남짓한 대지를 구입한 건축주 부부는 작은 땅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면서 사무실을 찾아왔다. 주택이 밀집한 동네에서 효과적으로 수익을 내려면, 좋은 설계와 특색 있는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지한 듯했다.건축주는 “가족이 살아갈 공간을 포함한 다가구주택을 만들고, 1층에 직접 운영할 근린생활시설을 구상하고 있다”면서, “합리적인 비용과 효율적인 공간으로 수익성이 좋은 디자인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밖에 특별한 요구사항은 없었고, 다만 “1층에 직접 운영할 근린생활시설은 영업이 잘되는 디자인이면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따라서 톡톡 튀는 디자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편이었다. 건축주가 운영하는 ‘동네카페 니나노’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성화를 받치어 무엇하나 속상한 일도 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세 닐리리야 닐리리야 <니나노>」 카페 옆 주차 공간 여러 종류의 클라이언트가 있지만, 중화동 프로젝트의 건축주는 대부분의 고민을 전문가에게 맡긴다는 태도로 임하는 듯했다. 건축사를 믿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태도였기 때문에 요구사항을 반영해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자 노력했다.작은 대지를 구매하고 건축을 결정하기까지 건축주의 수많은 고민을 떠올리며, 작아도 탄탄한 공간을 가진 재미있는 건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물론 건축주 부부의 ‘재미있는 건축’에 대한 높은 관심과 적극적인 성향이 더해져 가능한 일이었다. 다양한 것을 수용할 마음을 가진 건축주를 만난 덕분에 재미있는 건축에 집중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201호 세입자 공간 202호 세입자 공간의 주방 겸 거실과 방 3층 세입자 공간. 모든 마감재와 주방 가구 및 욕실 도기 등은 건축주 공간에 사용한 것들과 같은 제품이다. 삼각형 협소 대지에 수익성을 업한 공간 배치삼각형의 대지는 약 3m의 좁은 도로에 면하기에 면적 중 3.32평을 도로에 편입시켜야 했다. 이렇게 제척된 면적을 제외한 대지는 33.88평으로, 오래된 주택이나 부피가 큰 다가구 및 다세대주택에 둘러싸여 있어 신축하기엔 환경이 다소 열악했다. 더욱이 협소한 대지는 일조 확보를 위한 높이 제한을 받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코어 계획과 공간 구상이 필요했다. 또 좁은 골목에 부피가 큰 다가구 및 다세대주택들이 늘어서 있기에 개성을 가진 디자인도 필요했다. 건축주의 주거 공간인 3층 현관이다. 현관 정면에 건식과 습식으로 나눈 위생 공간이 보인다. MATERIAL외부마감 지붕 - T6 징크 돌출이음(㈜서진산업) 벽 - 스타코 플렉스(엘라스로매직) 데크 - 무수축 모르타르내부마감 천장 - 석고 2겹(KCC), T12 자작나무 판재 벽 - 석고 2겹(KCC), T12 자작나무 판재 바닥 - 강마루(LG하우시스 친환경 강그린 수퍼)계단실 디딤판 - 무수축 모르타르 난간 - T9 평철 가공단열재 지붕 - T150 우레탄 단열(케이에스텍), T220 압출법 보온판(대원수지공업㈜) 외단열 - T125 압출법 보온판 가등급(대원수지공업㈜) 내단열 - T30 열반사 단열재(금성 EPS)창호 독일식 시스템 창호 1등급(엔썸 케멀링)현관문 대원금속조명 KS주방가구(싱크대) 이케아 외위생기구 대림바스난방기구 콘덴싱 가스보일러(린나이) 3층엔 2개의 자녀 방이 있다. 자녀 방은 침대 헤드에 여닫는 개폐문을 설치해 방을 나서지 않고 소통할 수 있다. 현관에서 본 3층 복도 계단에서 본 4층 전경. 높은 층고를 활용해 아기자기한 다락을 설치했다. 박공 지붕 면이 실내에서 다채로운 변화를 준다. 작은 면적에 주택을 계획할 땐, ‘대지를 어떻게 활용할까’하는 고민이 앞선다. 주차 구획 하나도 큰 비율로 작용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된 계획은 건축주에게 불리한 여건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경제적인 규모의 실을 계획하기 위해 고민했다. 협소한 공간은 주방과 거실을 일체형으로 계획해 효율성을 높였다. 오른쪽으로 살짝 보이는 창은 바비큐 공간을 마련한 테라스와의 연계를 고려해 낸 개구부다. 안방 화이트 톤으로 깔끔하게 구성한 4층 세탁실 4층 중앙계단에서 본 모습과 베란다 먼저 코어 계획과 주차장, 건물 배치가 서로 잘 맞물리도록 하고, 코어를 사이에 두고 실들을 좌우로 배치했다. 1층은 주차장과 코어를 제외한 공간에 카페를 넣고 2층은 두 가구(임차세대), 3층의 일부는 한 가구(임차세대)를 위한 공간으로 계획했다. 남은 3층의 일부와 4층은 주인세대를 위한 공간으로, 내부에서 오르내릴 수 있게 마무리했다. 이 과정에서 베란다의 경우 일조사선제한으로 생기는 사선들이 어색하지 않게 하기 위한 동선을 고민했다. 경사 지붕으로 마무리한 덕분에 4층의 거실은 풍부한 공간감을 가지고 다락을 크게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높은 층고를 활용한 다락은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다. 문과 창은 코너에 부드러운 곡선을 가미해 더욱 아기자기한 느낌을 강조했다. 아이들 다락 입구에서 본 건축주 부부의 공간인 다락이다. 공간에 개방감이 들도록 다락을 분리한 뒤 부모와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입면 디자인에 있어 건물을 관통하는 붉은색 매스는 정지됐다가 작동되는 카세트테이프의 버튼들처럼 건강하고 즐거운 놀이로 가득한 생활이 끊임없이 반복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착안한 요소다. 특별히 비싼 마감재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흔히 사용하는 재료들로 독특하고 조화로운 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인테리어 디자인은 초감각적인 색감을 활용해 효과적으로 공간감을 표현하고 시선을 끌 수 있도록 했다.단독주택과 다가구주택의 주안점에는 차이가 있다. 단독주택이 삶의 가치를 높이는 데 중점을 둔다면 다가구나 다세대주택을 설계할 땐 주인 세대의 편의를 고려해야 한다. 집은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모쪼록 니나노집이 가족에게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편안한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 건물은 동남쪽이 넓고 북서쪽이 좁은 삼각형 대지에 앉혔다. 동남쪽 주차장에서 바라본 모습 추가 [스틸하우스, 펜션, 상가주택, 기타] 카세트플레이어를 닮은 중화동 니나노 상가주택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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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트플레이어를 닮은 중화동 니나노 상가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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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대한민국한옥공모전 대상
한옥의 현대적 해석 돋보인
수원 장안사랑채
- 국토교통부는 ‘2018 대한민국한옥공모전’ 수상작으로 경기도 수원시의 ‘장안사랑채’를 올해의 한옥 대상으로 선정했다. 올해 8회째를 맞는 한옥공모전은 우리 전통 건축인 한옥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현대적으로 발전 계승시키기 위해 우수 사례를 발굴하고, 이를 공유하는 행사로 국토교통부가 주최하고 있다.장안사랑채는 수원 화성의 한옥 집단 조성 지역 내 기존 한옥과 번잡한 중심 가로라는 상반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순화하는 디자인을 통해 도시건축으로 한옥이 나아가야할 덕목을 충분히 살렸다는 점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자료제공 이소건축사사무소㈜ HOUSE NOTE위치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용도 제1종 근린생활시설건축구조 목조주택대지면적 6,232㎡(1,885.18평)건축면적 1,703.53㎡(515.32평)건폐율 27.33%연면적 1,968.76(595.55평)용적률 29.77%규모 지상 2층설계 이소건축사사무소㈜ 031-267-2490 http://이소건축.kr/homepage 대지 위치 상징성 수원의 신한옥 / 첫인상 / 21c 새로운 전통 / 변화공공성 소통 / 가로와 문화시설을 매개하는 공간역사성 대지 / 정조대로와 수원 옛길상업성 편의성 / 사용자 중심의 현대적 건축요소디자인 대응 / 기존 한옥시설물에 대한 양보와 조화 도시적 맥락 _ 대응· 주변의 대형 한옥군을 고려한 정갈한 매쓰· 흐르듯 구성한 스카이라인· 목구조의 보칸을 고려한 매쓰분절 대지 계획안 배치도 첫인상_신한옥· 현대적 디자인과 재료의 적극적 사용· 전통건축 요소의 생략 기단의 생략_패턴화 유리의 적극적 사용· 수원의 신한옥, 그 첫인상 현대화된 한옥과 공공문화거리 홍보효과 소통 _ 시각적 개방· 가로와 마당을 시각적으로 연결· 경계로써가 아닌 공간을 매개하는 한옥 • 들어열개 창호의 현대식 해석• 개구부를 통한 시각적 확장 사용자 중심· 현대적 생활방식에 따른 건축요소 적용 무장애 진입, 노약자 리프트설치, 가변벽체를 활용한 공간의 확장성 확보· 쾌적한 상업환경 조성 체계적인 전기 및 설비 시스템 매립, 신한옥공법 도입으로 기밀성 확보 가로 뷰 상가 모습 실내 모습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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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대한민국한옥공모전 대상
한옥의 현대적 해석 돋보인
수원 장안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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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 대한민국 신진건축사대상 '서림연가'
-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무주 구천동의 아름다운 풍광에 우리가 만든 건축물이 방해되지 않았으면 했다. 중정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고, 주변의 아름다운 산세山勢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글 강우현, 강영진 건축가(아키후드 건축사사무소) 사진 노경 작가, 신현석 작가(드론) HOUSE NOTEDATA위치 전북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282 서림연가 지역/지구 계획관리지역, 관광특구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대지면적 2275.00㎡(688.18평)건축면적 583.08㎡(176.38평)건폐율 25.63%연면적 583.08㎡(176.38평)용적률 25.63%설계기간 2016년 4월~2017년 3월공사기간 2017년 4월~2018년 2월설계 아키후드 건축사사무소 강우현, 강영진 02-6093-2253 www.archihood.com시공 ㈜이에스 건설 010-9291-7780MATERIAL외부마감 지붕 - 노출콘크리트 벽 - 노출콘크리트 데크 - 방부목내부마감 천장 - 석고보드 위 수성 페인트 벽 - 석고보드 위 수성 페인트 바닥 - 콘크리트 위 침투성 하드너단열재 지붕 - 비드법 보온판 2종 2호 내단열 - 글라스울창호 다담창호현관문 제작주요 조명 T5 LED주방가구 제작위생기구 아메리칸 스탠다드난방기구 귀뚜라미 보일러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서림연가 펜션(드론 사진_신현석 작가) ‘숨김.’이 프로젝트를 설계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고 진행했던 화두는 ‘숨기기’였다. 객실로 들어가는 입구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만 보여 색다른 느낌을 준다. “각각의 마당을 가지는 객실로 구성했으면 해요.” 우리를 처음 찾아온 건축주가 가장 먼저 이야기한 요구사항이었다. 간단한 미팅을 마친 후 방문한 대지에 섰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대지 주변의 모습이 너무나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북쪽은 울창하고 키가 큰 나무들, 수량이 풍부한 계곡, 그 뒤로 보이는 산까지 너무나 완벽했다. 하지만 그 외의 삼면은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그리 내세울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 대신 멀리 바라보이는 산세와 하늘만은 이곳에 머물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 보였다. 자신들만의 독립된 공간이 필요한 객실과 그리 아름답지 않은 근경의 조합을 고려해 보니, 이 공간의 해답은 ‘숨기기’와 ‘보여주기’의 절묘한 줄타기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넓은 창에 의해 야외 느낌을 담은 침실은 높은 벽으로 외부 시선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서림연가는 어디에나 자연을 품은 중정을 뒀다. 하늘이 열린 객실 중정에서 본 식당과 거실 풍경은 끌어들이고 외부 시선은 차단한 욕실 이곳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하나의 거대한 콘크리트 벽만 보일 뿐 어느 곳이 입구인지 한눈에 알기는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초조함과 불안감은 벽을 돌아 수정원 앞에 선 순간, 깊은 감동으로 돌아올 거라고 예상한다.대지의 형상을 따라 배치된 객실들도 자연이 그려낸 풍경 앞에 배경이 되는 벽들만 보일 뿐 어디가 방인지 겉에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나마 그 벽들도 일부는 땅속에 묻혀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객실로 들어가는 길마저도 최대한 좁고 길게 만들어 손님들은 객실에 들어가서야 그들만의 공간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중정 입구 벽만 보여 폐쇄적인 느낌으로 가득한 진입로를 지나 객실 내부로 들어선 순간 새로운 세상이 반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땅의 높낮이, 벽들의 높이차와 틈새, 공간의 각도를 각각의 상황에 맞게 변화시켜 각 방에서 모두 다른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특히 조그만 중정을 통해 들어오는 계곡의 물소리와 산새의 지저귐, 떨어지는 빗물 등은 이곳에 머물게 될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서림연가는 대지 형상에 따라 배치해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룬다. 서림연가의 중심에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정원이 있다. 무주 구천동은 예로부터 첩첩산중에 세상과 멀리 동떨어진 오지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도시에서 떠나와 이곳 서림연가에 도착한 이들은 자연 속에 숨겨진 그들만의 공간에 들어가, 잠시나마 복잡한 세상으로부터 숨어서 진정한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외부 객실 진입로 위에서 본 객실 전경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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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 대한민국 신진건축사대상 '서림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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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知 · 仁 · 勇을 품은 달성 삼가헌
-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위치한 삼가헌三可軒(중요민속문화재 제104호/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800)은 박팽년의 11대손인 성수聖洙가 1769년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 뒤 그의 둘째아들 광석光錫이 벼슬에 물러난 후 1826년 초가를 허물고 현재와 같은 정침과 사랑채를 지었다. 누마루와 연못이 일품인 별당 하엽정은 광석의 손자인 규현奎鉉(호:荷亭)이 파산서당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1874년 건축했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하빈면 묘리에는 사육신 중 한 명인 충정공 박팽년(1417∼1456) 후손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 형성돼 있으며, 1769년 박팽년의 11대손인 성수聖洙가 지은 삼가헌은 박씨 집성촌과는 낮은 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삼가헌三可軒이라는 이름은 중용에서 나왔다. 중용 제9장에는 '子曰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자왈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도가답야, 중요불가능야)'라는 문구가 있다.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라는 뜻이다. 천하를 다스림은 지知이고, 작록을 거부하는 것은 인仁이며, 칼날을 밟는 것은 용勇에 해당하는데 삼가三可는세가지를 말한다. 즉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모두 지녔다는 뜻이다. 현관 역할을 하는 문간채 너머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 몸채는 전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이다. 사랑채 옆으로 놓인 것이 방앗간이다. 빼어난 경관을 지닌 '연꽃잎 정자'하엽정삼가헌은 별서를 가진 구조다. 별서를 구성하는 방식은 집 안에 있느냐 조금 떨어져 있느냐로 구분하며, 연못이 있는가, 없는가로 나뉜다. 이곳은 본채와 같이 붙어 있으면서 연못을 앞에 두고 있다. 별서의 이름은 하엽정荷葉亭으로 하荷는 연꽃을 의미한다. 즉 하엽정은 '연꽃잎 정자'라는 뜻으로 경관이 훌륭해 주손은 "사진가들이 연꽃을 찍기 위해 많이 찾는다"고한다. '종손宗孫'이란 명칭 대신 '주손이라 쓴 것은 집주인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 집주인은 '종손'은 장자長子로 계속 이어 왔거나, 불천위 등과 같은 분을 모시어 파를 새롭게 만들어 내려오는 경우에만 붙일 수 있다고 하면서 요사이 제대로 호칭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자신 가문은 종손 집안이 아니므로 '주손'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했다. 하엽정은 원래 일자형 네 칸 건물이었는데 앞에 누마루를 한 칸을 늘여 붙였다고 한다. 연못은 앞쪽으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이고 가운데 원형 섬이 있으나 지금은 연엽이 우거져 가운데 섬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원래 서당으로 쓰던 곳이어서 앞에는 '하엽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파산서당巴山書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하엽정은 집안에 혼사가 있을 때는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한다고 한다. 주손의 말에 의하면 처음 이 집에 온 며느리는 바로 안채로 들어가지 않고 시댁의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 이곳에서 얼마간 머물렀다고 한다. 본채와 붙어 있으면서 연못을 지닌 별서, 하엽정. 연꽃 피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사진 애호가들이 자주 찾는다. 사랑채 대청. 오량집이나 삼량집에서 쓰는 서까리를 걸다보니 지붕이 낮아 졌다. 원기둥에 익공으로 지은 당당한 모습의 사랑채. 편안한 느낌이 드는 기품있는 건물이다. 영의정을 지낸 허목이 쓴 현판. / 벽체를 돌과 흙으로 쌓은 곳간. 삼면이 막혔고 전면에 출입을 위한 판장문을 뒀다. 밖에서 보기와 달리 위압감이 상당한 사랑채평대문인 문간채를 지나면 사랑채가 바로 눈앞에 맞닥뜨린다. 사랑채는 여태까지 보아온 다른 사랑채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사랑채 몸채는 전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이고 뒤쪽으로 두 칸 날개채가 있는 ㄴ자형으로, 원기둥에 익공으로 지은 당당하면서도 품위가 있는 건물이지만 대문칸에서 보면 지붕이 높지 않아 편안한 인상이다.그러나 대청에 앉아 보는 모습은 밖에서 보는 모습과는 달리 위압감이 대단했다. 부재도 튼실하고 다루는 솜씨도 일품이다. 이유는 서까래 결구에 있었다. 사랑채는 오량집으로 오량집은 중도리를 중심으로 주심도리 쪽 즉, 바깥쪽으로는 장연長椽이라고 불리는 긴 서까래를 걸고 종도리 쪽으로는 단연短椽이라는 짧은 서까래를 건다. 일반적으로 장연은 경사가 완만하고 단연은 경사가 급해 지붕이 높아지지만 이 집은 삼량집과 같이 하나의 서까래로 지붕을 만들었다. 집은 오량집이지만 서까래는 삼량집이다 보니 지붕이 같은 오량집에 비해서 낮아진 것이다. 지붕 구조도 좌우가 다른데 대청 쪽은 팔작지붕이고 중문 쪽은 맞배지붕에 맨 끝 한 칸은 부섭지붕(한쪽으로 경사가 진 지붕)이다. 이는 옆 마을 태고정과 같은 구조로 이를 참고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뒤쪽으로 돌출된 두 칸 중 한 칸은 마루, 한 칸은 작은 사랑이다. 마루 한 칸은 벽감을 만들어 위패를 모시는 공간으로 쓰는데 사당이 없을 경우 안채 대청에 벽감을 만들어 신주를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신주를 모시는 경우는 이곳에서 처음 봤다. 주손에 의하면 장례가 있을 때는 시신을 모시는 제청으로 쓰였다고 한다. 작은 사랑으로 들어가는 문 위쪽에는 禮義廉恥孝悌忠信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영의정을 지낸 남인의 영수 허목(1595~1682)의 글이라 한다. 사랑채는 측면이 두 칸인 겹집으로 네 칸 대청이 널찍하다. 큰 사랑채는 전면 두 칸인데 앞쪽에 반 칸의 퇴칸이 있어 방 깊이는 한 칸 반으로 다른 집 사랑채 방보다 크다. 사랑채 뒤쪽으로는 처마 밑으로 반의반 칸 규모의 반침을 들였는데 지금은 막혀 있지만 예전에는 이쪽에 문이 설치돼 있어 안채와 왕래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전면 중문 쪽 한 칸은 앞쪽에 시봉하는 동자가 머무르던 상방이고 뒤쪽에는 부엌이 있는데 부엌에도 쪽문을 달아 사랑방과 직접 이어지게 했다. 배치도 단열을 위해 두꺼운 흙으로 마감한 부엌 뒷면. / 안채와 사랑채 사잇길로 곳간에 들어가는 길이 있다. / 방갓간에서 안채로 향하는 통로. 사랑채 뒤에 놓인 안채. 화재로 소실돼 2009년 다시 지었다. 기둥이 있는 특이한 곳간안채로 들어가는 세 칸 중문은 초가로 세 칸 중 중문 반대쪽 칸은 방앗간으로 쓰였는데 이렇게 초가로 된 중문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주손의 증언에 의하면 예전부터 초가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선비의 검소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안채는 ㄷ자 형태인데 안방에 면한 부엌 쪽이 두 칸 짧다. 안채는 전면 여섯 칸 전퇴집으로 삼평주 삼량집인데 안채는 2009년 4월 화재로 소실돼 다시 지었다. 다행히 건넌방 날개채 쪽으로는 불이 옮지 않아 과거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안채의 특징은 부엌 쪽 벽체다. 측면과 후면 방화장 벽체가 일반 집과는 달리 매우 두꺼운데 이유는 부엌을 외부 열기로부터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 추정되지만 다른 두 면이 일반 집과 같아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 의문이다.이 집에서 가장 특색 있는 부분은 곳간이다. 곳간 벽체는 돌과 흙으로 쌓았는데 아래쪽이 위쪽보다 두껍게 돼 있어 안정감을 준다. 이 곳간은 삼면이 막혔고 전면에만 출입을 위한 판장문이 있으며 위쪽 좌우 한 곳씩 그리고 가운데 두 곳에 조그마한 봉창을 뚫어 놓았다. 벽체는 단열을 위해 2자인 60㎝ 정도로 두껍게 했다. 이런 구조는 달성과 인접한 성주 한개마을의 곳간과 비슷해 이 지역의 특징으로 보인다.그러나 한개마을 하회댁 곳간과 다른 점은 기둥이 있다는 것이다. 하회댁 곳간은 안과 밖이 모두 같은 재료로 별도 기둥을 세우지 않았으나 이곳은 벽 안쪽에 기둥을 세웠으며 가운데 들보에도 이를 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지만 벽에 있는 기둥이 그리 크지 않고 서까래도 기와집으로서는 적당한 크기가 아닌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초가로 지었던 것을 나중에 기와를 얹고 단열을 위해 후에 벽체를 덧붙인 것으로 추측한다. 마을에서 본 삼가헌. 낮은 뒷산과 안겨 포근한 모습이다. 삼가헌 전경. 진입로에서 본 모습으로 길게 이어진 낮은 담이 한옥 운치를 더한다. 문간채에는 종도리를 받치는 장혀에 개국開國4244년에 상량했다는 명문이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단기檀紀연호로 서기西紀1911년에 해당한다. 즉 문간채가 지어진 때는 한일늑약이 이뤄진 다음 해였다.이렇게 상량문을 단기로 기록했다는 것은 일제에 대한 무언의 거부로 삼가헌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그해 12월 단기 연호를 폐지했다. 근대화라는 기치 아래 사라져 버린 단기 연호, 그와 함께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도 사라진 것이 아닌지 씁쓸하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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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知 · 仁 · 勇을 품은 달성 삼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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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일산 밤가시 초가
- 밤가시 초가는 지금으로 말하면 서민이 살던 집으로 이전에 소개했던 기와집이나 다른 초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다. 한 칸 대청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 건넌방 옆에 사랑방이 놓였다. 안방 앞에는 부엌이 있어 안채는 ㄱ자형을 이루고, 그 앞에 광과 대문으로 이뤄진 문간채가 한 자 정도 낮은 ㄴ자 형태로 붙어 집은 완벽한 ㅁ자 형태다. 우리나라에 몇 안남은 초가 중 하나로 평범했던 선조들의 삶을 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진정한 한옥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초가라고 이야기한다. 그간 소개한 수많은 한옥의 대부분은 기와집이었다. 그러나 기와집은 평민들이 살던 집과는 전혀 관계없는 부자들이 살던 집이다. 우리네 선조 대부분은 초가에 살았다. 당시 집의 90% 이상이 초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초가는 우리에게 가장 흔한 집이었으나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된 몇채와 민속마을 내 몇몇 초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져 오히려 초가는 기와집보다 더 귀한 집이 됐다. 모든 마을이 초가로 되어 있었던 것이 70년대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구태舊態로 치부돼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이다. 90% 이상이 초가였을 정도로 선조들 대부분은 초가에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오히려 사대부 들이 살던 기와집보다 더 귀한 집이 됐다. 흔히 구할 수 있고 훌륭한 건축 재료인 볏짚태백산맥 자락에서 살던 사람들은 너와나 굴피와 같은 나무를 활용해 지붕을 얹었고 천연슬레이트가 나오는 곳에서는 돌 너와로 지붕을 만들기도 했다. 태백산 중에 있는 집 지붕이 나무로 된 것은 나무가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 외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에 초가가 많은 것은 볏짚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벼농사를 짓는 곳이라면 가장 흔한 재료가 바로 볏짚이다.볏짚은 단순한 땔감에서 시작해 퇴비로도 활용하지만 각종 생활도구를 만드는 데도 유용한 재료였다. 멍석, 새끼줄도 볏짚을 활용한 생활도구이며 공예품도 만들었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재료였기에 건축 재료로 활용하는 것은 당연했다. 볏짚의 장점은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 외에 파이프 같은 구조여서 보온성도 탁월해 지붕재료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볏짚은 건축 재료로 지붕에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초가집이나 기와집 기둥을 세워 도리를 얹고 나면 그 사이를 흙벽으로 채운다. 이때 흙벽은 수숫대 같은 것으로 기본 구조를 만들고 앞뒤로 진흙으로 발라 메우는데 그때 볏짚을 잘게 썰어 넣어 진흙이 트거나 갈라지는 것을 막는 보강재로 사용했다. 볏짚은 한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재료인 것이다.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초가라 하면 볏짚만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볏짚 외에도 억새 등도 사용됐다. 경남 창녕 술정리 하씨 고가에는 억새가 지붕 재료로 쓰였다. 억새는 볏짚과 같이 1, 2년마다 갈아주지 않아도 돼 번거로움을 덜어준다. 그리고 초가는 감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초가의 부드러운 곡선에는 다른 나라 건축물에서 느낄 수 없는 안온함이 있는데 이는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지붕 선은 산세와 잘 어울려 집이 자연과 합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초가는 자연과 인간과 호흡하는 건축물이다. 경기 고양시 정발산동에 위치한 밤가시 초가는 완벽한 ㅁ자 형태 평사량집이다. 안마당이라고 해야 한 뼘 크기다. 좁은 안마당 위로 구멍이 뚫려 있다.. 작은 규모 대청으로 보이는 문을 열면 안방이다. 모든 공간이 훤히 보이는 구조다. 집이 작아 내외를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다. 대청 뒤 벽면으로 지붕 선에서 내려온 경사가 완만하다. 초가는 용마루가 높지 않고 경사가 완만해 종도리를 올리지 않는 평사량집이 많 다. 밤가시 초가가 문화재로 지정받은 이유는 보존이 잘 돼 있기 때문이다. 뒷간 모습이다. 내외 구분은 사치였던 당시 서민들의 삶밤가시 초가(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정발산동,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8호)는 지금으로 말하면 서민들이 살던 집이다. 서민들이 살던 초가를 보기가 결코 쉽지 않은데, 우선 밤가시라는 이름은 예전 이 마을에 많았던 밤나무를 주요 생활용품과 건물의 재료로 사용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집은 이전에 소개했던 기와집이나 다른 초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다.우리가 늘 쓰는 작은 집이라는 뜻의 '초가삼간'이라는 말이 있다. 신영훈 선생은 초가삼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과거 세 칸 집은 방과 대청과 같이 사람이 거주하는 방을 기준으로 했기에 세 칸이라는 의미에서 부엌과 헛간 등은 제외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집의 몸체는 네 칸으로 세 칸 집은넘어섰지만 규모로 본다면 '초가삼간'이라 해도 무리가 없는 집이다.몸채를 보면 한 칸 대청좌우에 안방과 건넌방, 건넌방 옆에 사랑방이 있다. 안방 앞에는 부엌이 있어 안채는 ㄱ자형을 이루고, 그 앞에 광과 대문으로 이뤄진 문간채가 한자정도 낮춰 ㄴ자 형태로 붙어 집은 완벽한 ㅁ자 형태다.일단 집이 작아 안채, 사랑채를 구분할 의미가 없다. 사대부 집에서는 내외를 한다고 해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경우도 어떤 방법으로든 사랑방과 안방의 출입을 구분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큰 집을 마련할 수 없었던 서민들에게는 이런 구분은 의미가 없다. 한 식구가 다 들어가 자기도 힘든 규모에서 내외를 한다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남녀를 구분해 생활공간을 마련했다는 개념은 부자나 일정한 재산을 가진 사대부들에게나 적용되는 기준일 뿐이라는 것을 이런 집 구조를 통해 알 수 있다. 정면으로 좌측부터 사랑방, 대문, 창고 순으로 놓였다. 사랑방 앞. 출입구를 뒤로 밀고 앞에는 나무 기둥을 세워 햇빛을 막아주고 있다. 집 후면 장독대. 한 뼘 크기의 안마당, 원초적 집 구조 읽을 수 있어작은 규모에 ㅁ자 집을 짓고 보니 안마당이라고 해야 그야말로 한 뼘 크기다. 대문을 통과해 집을 들어서면 좁은 안마당 위로 구멍이 뚫려 있다. 큰 집이라면 넓은 안마당이 있었을 것이다. 빠끔히 뚫어진 구멍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위에서 보면 지붕 형태가 마치 머리에 짐을 올릴 때 얹는 똬리 같이 생겼다. ㅁ자 집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깔끔함은 없다. 이런 집을 지을 때 목수도 고급 목수를 쓸 수도 없을 형편이어서 아마도 동네 주변에서 솜씨 좋은 사람에게 맡겨 집을 지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문간채를 처리하는 방식도 직각으로 깨끗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빗변으로 대충 마감했다. 문간채와 본채가 연결되는 부분도 나무를 적당히 걸어 결구했다. 집은 평사량집이다. 평사량집은 도리가 네 개인 집으로 종도리가 없다. 오량집에서 종도리를 빼버린 구조라고 생각하면 된다. 주심도리와 중도리 사이는 일반 서까래와 같이 걸고, 중도리와 중도리 사이는 수평으로 서까래를 건 다음 그 위 잡목 등을 이용해 높이고 용마루를 거는 구조다. 초가는 용마루가 높지 않고 경사가 완만하기에 굳이 종도리를 올리지 않고 평사량으로 지었다. 우측면으로 창고와 화장실이 위치한다. 초가는 볏짚의 보온성을 살려 지은 생활에서 체득한 지혜가 들어간 집이다. 이제 몇 안 남은 초가, 잘 보전해야주변에 수없이 많았던 초가는 이제 몇몇 민속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건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는 예전에는 그리 많지 않았던 기와집을 한옥이라고 열심히 돌아보고 있다. 기와집은 일부 부유층이 살았던 집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많은 사람의 희노애락이 담긴 우리의 한옥이라고 할 수 없다.선조들 대부분은 초가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많던 초가가 새마을운동의 광풍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과연 초가가 그렇게 형편없었던 집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 글을 쓰면서 김제 오영순 가옥을 답사했을 당시 집주인이 건넸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새마을사업을 한다면서 집을 고치려 덤비길래 문화재로 신청해 보전할 수 있었다"면서 "초가집가 오히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고 했다.초가는 오랫동안 생활에서 체득한 지혜가 들어가 있는 집이고 볏짚의 보온성을 잘 살려 지은 집이다. 그리고 주변에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하고 다시 걷어 퇴비 등으로 재활용이 가능한 그야말로 현대인이 추구하는 자연 친화적인 집이다. 그런 집을 산업화의 잣대로 형편없는 퇴물로 취급해 초가의 장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우리 손으로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 그 집에 붉게, 퍼렇게 칠한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놓았다. 얻은 것은 공해뿐이고 나아가 강산의 풍광을 망쳐버렸다.기와집에 대한 연구는 많아도 초가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가를 연구하려 해도 남아있는 초가가 없어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남겨지지 않은 것은 역사가 아니다.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초가까지 사라지고 나면 역사에서 초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과거가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나 꾸준히 지켜야 할 것은 분명 있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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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일산 밤가시 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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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수몰 지역 문화재를 이전 복원한 제천 청풍문화재 단지 내 한옥
- 청풍문화재단지(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20)는 1978년 6월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시작되면서 수몰 지역에 있었던 문화유산을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1만 6천 평 부지 위에 원형대로 이전 복원한 곳이다. 보물 546호 청풍석조여래입상 등 다수의 문화재와 영화 촬영 세트장이 있어 평일에도 관람객이 상당하다. 여기에서는 청풍 도화리 고가등 살림집 4채를 소개한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제천 청풍문화재단지는 충주다목적댐 공사로 수몰된 문화유산을 1만 6천 평 부지에 이전 복원한 곳이다. 사진제공 제천시청. 우리나라에는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를 모아둔 데가 두 곳 있다. 하나는 청풍문화재단지고 다른 한 곳은 문의문화재단지다. 청풍문화재단지는 1978년 6월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시작되면서 수몰 지역에 있던 문화유산을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1만 6천 평 부지 위에 원형대로 이전 복원한 곳으로 1985년 12월 개장했다. 한편 문의문화재단지는 1980년 대청댐 건설과 더불어 1992년 계획해 1997년 완공했는데 총 4만여 평의 대지에 민가 5동, 관아 건물 1동, 성곽 및 성문 1개소, 유물전시관 1개소등이 있다. 사실 이런 문화재단지의 효시는 용인 한국민속촌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개장한 한국민속촌은 민족 문화자원을 보존하고, 자라나는 2세들의 교육을 위한 학습장 및 내외국인을 위한 전통문화 소개 등을 위해 세워진 시설이다. 한국민속촌 건물 대부분 다른 곳에서 이전해온 것이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 아마도 집이나 옷, 가구 같은 민속품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 1980대 초부터이니 문화재 지정에서 소외된 것이 아닌가 한다. 후문에는 단지를 지키는 성곽이 우뚝 솟아 있다. 지방유형문화재 90호 청풍 응청각. 상방이 사랑방을 대신한 청풍 도화리 고가청풍문화재단지에는 보물 546호 청풍석조여래입상淸風石造如來立像/보물 528호 청풍 한벽루淸風寒碧樓/지방유형문화재 20호 청풍 금남루淸風錦南樓/유형문화재 34호 청풍 금병헌淸風錦屛軒/유형문화재 35호 청풍 팔영루淸風八詠樓/유형문화재 64호 청풍향교淸風鄕校/유형문화재 83호 청풍 도화리 고가淸風桃花里古家/유형문화재 84호 청풍 황석리 고가淸風黃石里古家/유형문화재 85호 청풍 후산리 고가淸風後山里古家/지방유형문화재 89호 수산 지곡리 고가水山池谷里古家/지방유형문화재 90호 청풍 응청각 淸風凝淸閣등이 있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의 정자 한벽루와 관아 건물인 금남루나 금병헌 등도 매우 가치 있는 건축 문화재지만 여기서는 살림집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소개하려 한다.첫 번째 소개할 건물은 청풍 도화리 고가다. 도화리에 있었던 옛집으로 ㄷ자형이다. 문화재청 자료는 이전하기 전, 집 앞에 건물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 도화리 고가는 없어진 살림채 앞으로 —자형 바깥채와 함께 전체적으로 ㅁ자형 배치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면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일반적인 배치와 달리 우측에 안방을 뒀다. 안방 앞날개채에는 두 칸 규모의 부엌을, 건넌방 앞 날개채에는 부엌과 상방 각 한 칸을 놓았다. 안방과 웃방 사이는 장지문(연이어 있는 방 또는 방과 마루 사이의 미세기문으로 한옥에서는 주로 큰 방을 다양하게 쓰기 위해 둘로 나눌 때 많이 설치한다)으로 막는 게 보통이나 이곳은 벽을 설치했다. 이는 오래된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방식인데, 대청에 전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전체적으로 집이 고식古式인 것은 분명하다. 대청은 깊이가 한 칸으로 삼량집이다.건넌방 앞쪽 상방이 특이하다. 별도의 사랑채를 두지 않고 상방을 사랑방으로 이용했다. 상방전면과 안마당 바깥에 퇴칸처럼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덧내 달은 툇마루를 놓아 툇마루를 여러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실생활에서 툇마루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기둥과 지붕을 놓은 것이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태백산맥 산중에 있는 집처럼 통나무로 굴뚝을 만들었고 부엌 창 옆에 관솔(송진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 예전에는 송진이 많은 관솔에 불을 붙여 촛불이나 등불 대신으로 썼다)을 지펴 방을 밝힌 코쿨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ㄷ자형 도화리 고가는 별도 사랑채를 두지 않고 상방으로 대신 한 것이 특이하다. 자료에는 코쿨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황석리 고가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부엌이다. 전면으로 별도 지붕을 단 광을 설치했다. 황석리 고가는 -자 전퇴집으로 앞면 4칸 측면 칸 반 규모다. 안채에서 본 행랑채. 전면 퇴칸까지 활용한 황석리 고가두 번째로 소개할 건물은 황석리 고가다. 앞면 네 칸 측면 칸 반 규모로 —자 형태의 전퇴집이다. 부엌, 안방, 웃방을 나란히 배치하고 끝에 사랑방을 뒀다. 모든 방에 천장이 쳐 있어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퇴칸 구조로 짐작건대 일고주 오량 집이다. 안방과 웃방 앞에만 마루가 있었고 사랑방 앞에는 마루 없이 옥외 취사 공간인 한뎃부엌(방고래와 상관없는 한데에 따로 솥을 걸고 쓰는 부엌)을 두고 머리퇴에 툇마루를 뒀다는데 지금은 방 앞 전체에 툇마루가 설치돼 있다. 눈여겨볼 부분은 부엌이다. 부엌은 전면 퇴칸까지 포함해 한 칸 반 규모다. 이렇게 해도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는지 처마 밑으로 살강을 들여 수납공간을 확보했고, 전면에는 별도로 지붕을 빼고 그 아래 광을 놓았다. 광 벽은 널빤지를 층층이 쌓아 만들어 위로부터 한 칸씩 빼낸 후 보관한 물건을 들어낼 수 있게 했다. 이런 형식의 광은 도난에 효율적이기 때문에 많은 고택에서 사용했다. 건넌방 앞으로 한 칸 돌출한 차양칸이 인상적인 후산리 고가. / 뒤편 정원을 잘 다듬어 놓아 걷는 맛이 있다. 후산리 고가는 ㄱ자 형 안채만 전해진다. 건넌방은 팔작지붕이고 날개채는 맞배지붕이다. 다음은 후산리 고가다. 현재 ㄱ자 안채만이 남아있다. 건넌방은 팔작지붕이고, 날개채인 부엌은 맞배지붕이다. 중부지방에서 흔히 보는 ㄱ자 집이지만 후산리 고가는 여러 면에서 특이하다. 우선 대청이 놓인 몸체가 여러 구조 시스템을 갖췄다. 삼평주 겹집 구조와 전후퇴집의 구조적 특징이 모두 나타나 있고, 부엌이 있는 날개채가 두 칸으로 한 칸 또는 칸 반으로 된 다른 곳보다 규모가 크다. 규모가 제법 되는 부엌을 지탱하려다 보니 중간에 큰 보를 가로로 질러 놓았으며 상부 맞배지붕 때문에 생기는 삼각형 면에는 환기를 위한 살창을 뒀다. 다른 특징은 대청 한구석에 위패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해 놓은 점이다. 대청에 위패를 모시는 경우 주로 감실로 꾸미는데 이곳은 한 칸 규모 방으로 계획했다. 또한 종도리를 받치는 구조가 첨차 위에 소로를 얹어 받치는 형식으로 제천 박도수 가옥과 같다. 이런 방식으로 종도리를 받치는 게 제천 지방의 특징인 것으로 보인다. 지곡리 고가는 사랑마당, 안마당은 폐쇄적 구조를 보이지만 뒷마당은 매우 넓다. 청풍문화재 단지 내 집들 중 원형을 잘 간직한 지곡리 고가는 다른 집과 달리 중문 벽체가 판장벽이다. 원형을 잘 간직한 수산 지곡리 고가또 눈에 띄는 특징은 건넌방 쪽 전면으로 한 칸 돌출한 차양칸이다. 건넌방 측면으로 3/4칸 규모로 내 기둥을 세우고 본채와는 별도로 지붕을 달아냈는데 건넌방 바깥으로 확장한 공간 규모가 상당하다. 이렇게 차양칸을 건물에 설치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뿐더러 안방이 아닌 건넌방 앞 부속 시설로 쓰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다. 건넌방도 전면 두 칸에 측면 칸 반으로 안방보다 크다. 이런 점을 고려해본다면 단순한 건넌방이 아니라 집안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 사람이 사용한 방이 아닌가 한다. 안채 앞에 있던 사랑채가 없어지면서 일제 강점기 이후 사랑방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집은 수산 지곡리 고가다. 청풍문화재 단지 내집들 중 원형을 잘 간직한 곳으로 ㄱ자 안채와 —자 문간채 그리고 중문 앞 사랑채와 헛간채로 구성됐다. 사랑채와 문간채, 헛간채는 초가이고, 중문과 안채는 기와집이다. 중문 벽체는 다른 곳과는 달리 판장벽이다. 안채는 전면 세 칸 반, 측면 칸 반이고 안방 앞으로 두 칸 반 돌출한 날개채가 있다. 안방 쪽은 안방이 칸 반, 부엌이 두 칸 반이다. 한 칸 대청을 두고 건넌방이 위치하는데, 건넌방은 전면에서 볼 때 처마 쪽으로 조금 내어 달아 한 칸 규모보다 크게 간살을 잡았다. 또 건넌방 후면 처마 밑으로 1/4칸 정도 빼 수납공간으로 만들었다. 이 수납공간의 환기를 위해 뒷벽 하부에는 살창을 두기도 했다. 부엌은 폭이 칸 반이고 길이가 두 칸 반인데, 안방 쪽 반 칸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장벽이다. 두 칸 반 중 칸 반이 부엌이고 앞쪽 한 칸은 바닥이 마루로 된 고방이다. 현재 이 집 사랑마당, 안마당은 폐쇄적인 구조로 매우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뒷마당이 넓어 시원하다. 원래 집 분위기도 이랬는지 궁금하다. 보물 528호 청풍 한벽루. 뛰어난 조형미로 이곳을 찾는 이들이 꽤나 많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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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수몰 지역 문화재를 이전 복원한 제천 청풍문화재 단지 내 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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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지어진 북촌 한옥 리모델링
- 전통에 현대의 편리성을 덧입힌 게스트하우스 북촌 한옥조선시대 한양 주거의 중심지인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악과 응봉을 잇는 산줄기의 남사면에 위치한다. 1930년대 주택경영회사들이 대규모 필지와 임야를 매입해 중소 규모의 한옥을 대거 건설함으로써 한옥마을로 변모했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북촌 한옥은 구조재가 낡아서 보수가 필요하며, 또 공간구성이나 시설 면에서 현대인이 생활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다. 이에 따라 곳곳에서 리모델링에 해당하는 대수선부터 개축이 이뤄지고 있다. 그중 기존 한옥을 대수선해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자 하는 한옥을 둘러보았다.글 사진 이상현 기자취재협조 한옥협동조합, 국가한옥센터 HOUSE STORYDATA위치 서울 종로구 가회동지역/지구 도시지역, 제1종 지구단위계획(북촌)한옥형태 ㄷ자형(팔짝지붕+맞배지붕)리모델링 분류 대수선대지면적 125.60㎡(37.99평)건축면적 63.88㎡(19.32평)건폐율 50.85%연면적 63.88㎡(19.32평)용적률 50.85%설계 참우리건축사사무소 탁충석 이주리 이서경시공 한옥협동조합 02-742-9272 www.hanokcoop.comMATERIAL외부마감 지붕 - 한식 토기와(고기와) 벽 - 회벽 데크(바닥) - 판석 + 마사토내부마감 천장 - 한식 도배 및 편백 루버 벽 - 한식 도배 바닥 - 한식 장판지, 원목마루(아키), 타일디딤판 집성목단열재 지붕 - 이이씬폼 외단열 - 열 반사 단열재 중단열 - 압출 단열재창호 한식 창호현관문 한식 창호조명 이케아주방가구 한샘위생가구 도로시 원목 하부장, 대림바스난방기구 가스보일러(린나이) 리모델링을 한 이 한옥은 상량문이 없어서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변 한옥과 마찬가지로 1950년대 지은 것으로 보인다(참고로 1960년대까지 북촌에 한옥이 지어졌음). 현재의 건축주는 “한옥을 처음 찾았을 때 오랫동안 방치돼 기둥 곳곳이 썩었고, 또 거실(라디에이터)을 제외한 각 방은 전통 구들 난방이라 현대인의 생활과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건축주는 개축과 대수선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대수선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개축할 경우 인접 대지와 법정 거리를 띄어야 하기에 마당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대수선은 마당 한쪽에 있던 화장실을 실내에 넣고, 각 방을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할 수 있게 공간 배치를 대폭 변경하는 과정으로 이뤄졌다. 물론 각 방의 전통 구들과 거실의 공기 난방 라디에이터도 가스보일러 배관 난방으로 교체했다. 이 한옥은 재사용률이 약 40%로 기둥과 기와 일부분을 빼고 전부 교체하는 대수술(?)을 진행했다. BEFORE AFTER 평대문 오래돼 빛이 바래고 썩은 부분을 모두 교체했다. 초석과 맞닿는 기둥 하단은 모두 교체해 그 색이 다르다. 문인방도 대부분 교체했으나, 소로와 장여, 도리, 서까래는 그대로 재활용했다. 또 지대도 기단석을 제외하고 모두 새로 교체했다. TIP 대수선 건축물의 기둥, 보, 내력벽, 주 계단 등의 구조나 외부 형태를 수선·변경하거나 증설하는 것을 말하며, 다음의 사항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로 증축·개축 또는 재축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① 내력벽을 증설 또는 해체하거나 그 벽면적을 30㎡ 이상 수선 또는 변경하는 것 ② 기둥을 증설 또는 해체하거나 3개 이상 수선 또는 변경하는 것 ③ 보를 증설 또는 해체하거나 3개 이상 수선 또는 변경하는 것 ④ 지붕틀(한옥의 경우 지붕틀의 범위에서 서까래 제외)을 증설 또는 해체하거나 3개 이상 수선 또는 변경하는 것 ⑤ 방화벽 또는 방화구획을 위한 바닥 또는 벽을 증설 또는 해체하거나 수선 또는 변경하는 것 ⑥ 주 계단·피난계단 또는 특별피난계단을 증설 또는 해체하거나 수선 또는 변경하는 것 ⑦ 미관지구에서 건축물의 외부 형태(담장 포함)를 변경하는 것 ⑧ 다가구주택의 가구 간 경계벽 또는 다세대주택의 세대 간 경계벽을 증설 또는 해체하거나 수선 또는 변경하는 것 ⑨ 건축물의 외벽에 사용하는 마감 재료를 증설 또는 해체하거나 벽 면적 30㎡ 이상 수선 또는 변경하는 것 BEFORE FTER 마당 평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화장실과 보일러실(사진상 우측)이 있고, 문간을 포함한 한옥이 ‘ㄷ’자 모양으로 마당을 감싸고 있었다. 외부에 있던 화장실을 현대생활에 맞게 실내에 넣고 마당을 넓혔다. 마당에 깐 디딤돌은 전통 구들 난방에서 배관 난방으로 교체할 때 나온 구들장이다. 지붕에 이은 기와는 부서진 것 이외에 대부분 그대로 사용했다. 대문을 열면 정면에 보이는 예전 화장실과 보일러실이 있던 자리, 인접 대지의 경계벽을 꽃담으로 꾸몄다. BEFORE AFTER 대청 대청을 현대식 거실로 꾸몄다. 기존 마루를 뜯어내고 안전을 위해 장선을 모두 교체한 후 가스보일러 배관과 마루를 새로 깔았다. 이 과정에서 낡고 썩은 기둥들을 보수했다. BEFORE AFTER 주방 주방은 기존 현관이 아닌 도로를 바라보도록 위치를 전면 수정했다. 또한 다락과 대청 왼쪽의 방과 이어지던 문과 다락으로 향하던 계단의 좌우를 바꾸고 계단을 새로 설치했다. BEFORE AFTER BEFORE AFTER BEFORE AFTER 대청 왼쪽 방 주방 윗부분의 다락으로 통하는 기다란 방으로 대수선을 진행하며 제일 많이 바뀌었다. 이동이 편리하도록 주방과 통하는 작은 복도를 내고, 그 좌우에 다락이 딸린 작은 방과 욕실을 배치했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수납할 수 있도록 서랍으로 제작했다. 마당 쪽으로만 나 있던 창문을 도로 쪽에도 내어 한층 더 밝은 분위기로 꾸몄다. 실외 화장실을 실내에 넣고 현대식으로 디자인했다. BEFORE AFTER 안방 대청마루 안쪽의 안방으로 사용하던 공간 좌측에 붙박이장을 없애고 벽을 다시 세웠다. 창문은 인방을 만들고 네 짝 미세기를 달아 한식 창과 유리를 함께 사용했다. BEFORE AFTER BEFORE AFTER 문간 오른쪽 방1 대청 왼쪽 방과 마찬가지로 기다란 방이던 곳으로 가운데에 복도를 만들고 앞뒤로 욕실과 침실을 배치했다. 복도를 통해 한번 꺾어 들어가도록 동선을 바꿨다. 뒤쪽 방과 이어지던 쪽문을 없애고, 뒤에 배치한 방과 위·아래로 나눠 수납공간을 제작했다. 마당을 향한 창엔 인방과 인방 사이에 교창을 달아 풍부한 채광을 끌어들였다. BEFORE AFTER 문간 오른쪽 방2 불법으로 증축해 창고로 사용하던 곳이다. 벽체를 기둥 안쪽으로 후퇴시키고 서까래를 밖으로 살렸다. 좁지만 지붕 모양 그대로 서까래를 드러내 답답함을 줄이고 오른쪽에 수납공간을 배치했다. INTERVIEW_북촌한옥마을과 리모델링(한옥협동조합 문문주 과장) Q. 북촌 한옥마을에서 한옥을 리모델링하는 주요 이유는A.북촌 일대 한옥은 일제 강점기 대규모 토지가 소규모 택지로 분할되면서 도시형 근대한옥이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해방 이후 1960년대 초까지 계속해서 지어졌다. 최근 신축 한옥이 꾸준히 들어서지만, 여전히 40~50년이 넘은 한옥들이 많다. 따라서 목구조재의 부식부터 지붕의 누수 등 노후화된 곳이 많아 보수가 필요한 한옥의 비중이 높다. 또한 생활환경도 많이 변화해 현대적인 설비나 가구들을 구조상 배치할 수 없는 한옥도 많기에 리모델링하는 것 같다. Q. 한옥을 리모델링할 때 주로 어떤 부분을 하나A. 대수선의 경우 목구조를 제외한 전체를 해체하는 경우가 많다. 해체 후 부식된 목조를 수선하고, 지붕 누수로 인한 기와뿐만 아니라 단열, 설비, 창호를 새로 설치하며, 미장하는 것이 주요 공사다.Q. 리모델링할 때 고려할 점A. 한옥은 역사적 맥락을 존중해야 한다. 특히 북촌한옥마을은 근대기에 형성된 한옥으로, 그 특성을 가급적 유지하면서 단열성을 높이고 현대적인 설비와 가구를 접목해 생활의 편리함을 향상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Q. 부분별 한옥 리모델링 비용A. 공사 범위 및 내용, 자재 종류에 따라 편차가 크기 때문에 일괄적인 금액을 산정하기 어렵다. 북촌도 경우에 따라 차이가 크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평당 약 1,100만 원에서 1,500만 원 정도인 듯하다.Q. 한옥 리모델링 시 지차체 지원금엔 무엇이 있나A. 서울의 경우 무상지원과 융자지원이 있다. 그 외 소규모 수선의 경우 비교적 간단한 절차만으로 일부 수선비용을 지원받을 수도 있다.Q. 한옥협동조합이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A. 전통건축과 관련한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전통건축 전문 시공회사로 한옥 신축 및 대수선 공사를 한다. 또한 종합문화재수리업 등록업체로 문화재 보수도 하고 있으며, 최근 목조 주택 및 단열재 사업까지 운영 중이다. 한옥 리모델링 지원금 서울_공사비 2/3범위 내 한옥보전구역 최대 1억 8천만 원(보조 9천만 원, 융자 9천만 원), 기타 지역 최대 1억 2천만 원(보조 6천만 원, 융자 6천만 원)경기 수원_공사비 1/2범위 내 최대 6천만 원 보조, 최대 4천만 원 융자(20년 경과 후 재신청 가능)대구_한옥보호지역 최대 4천만 원, 기타 지역 최대 2천만 원경북 안동_공사비 1/2범위 내 최대 3천만 원경남 거제_공사비 1/2범위 내 최대 1천만 원전남 해남_공사비 1/2범위 내 최대 2천 5백만 원전남 순천_공사비 1/2범위 내 최대 1천 5백만 원※ 자세한 내용은 국가한옥센터(www.hanokdb.kr)나 지자체별 건축과로 문의하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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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지어진 북촌 한옥 리모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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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리에와 주택을 브릿지로 연결한
이천 붉은 벽돌집
- 건축주는 본가에서 도자 작업을 해오던 중 제2의 작업 공간과 독립적인 주거 환경을 위해 이천 도자예술촌에 대지를 마련했다. 건축주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대지 가운데에 새로운 보행 도로를 만들어 북측의 2차선 도로와 남측의 보행 도로가 지나는 좌·우측 매스 전면과 후면에 4개 숍 모두 2면 이상 도로에 면하게 ‘자기소의 봄’을 계획했다. 이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한 작업 중 소규모 건축물에서 가장 많은 레벨에 대한 실험이었다.글 박성준 ㈜애스크 건축사사무소 소장 사진 윤홍로·이상현 기자※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인터뷰와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OUSE NOTEDATA위치 경기 이천시 신둔면 고척리 596-1지역/지구 계획관리지역, 지구단위계획구역(지역특화발전특구(이천도자예술촌)), 문화시설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대지면적 485.70㎡(146.92평)건축면적 190.20㎡(57.53평)건폐율 39.16%(법정 40%)연면적 364.19㎡(110.16평) 1층 180.90㎡(54.72평) 2층 159.97㎡(48.39평) 3층 23.32㎡(7.05평)용적률 74.98%(법정 100%)설계기간 2015년 1월~12월공사기간 2016년 1월~8월건축비용 약 4억 원(3.3㎡당 약 400만 원)설계 ㈜애스크 건축사사무소 02-6671-0229 askarchi.com시공 인터플랜(권태훈) 010-3242-2782 2015년 겨울, 이천 도자예술촌(예스파크)에 대지를 마련한 젊은 부부 도예가를 만나 ‘자기소의 봄’의 주택 및 아틀리에를 계획했다. 고향인 이천에서 줄곧 도예 작업을 해온 건축주의 요구 사항은 4개의 숍과 작업실, 주택을 갖춘 건물이었다. ‘좁고 긴 대지에 4개의 숍을 어떻게 도로에 면하도록 배치할까’, 이것이 고민의 시작이었다. 그 결과 대지 가운데에 새로운 보행자 통로를 만들어 4개 숍의 2면 이상을 모두 도로에 면하게 디자인했다. 단순한 매스를 지향한 이천 붉은 벽돌집. 전·후면에 4개의 숍을 배치하면서도 단순한 동선을 만들었다. 우측 전면 1층 자기소의 봄의 숍과 2층 아틀리에는 대공간 안의 다양한 레벨의 변화로 계획했다. 부부가 작업하면서 숍을 관리하고, 또 숍에서 작업실 상황을 파악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작업실에서 브릿지를 통해 좌측 2층의 주택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주택 또한 다양한 레벨의 실험이었다. 주방/식당 → 거실 → 침실 순으로 레벨의 변화를 주어 각각의 공간을 독립적으로 배치했다.자기소의 봄은 지금까지 한 작업 중 소규모 건축물에서 가장 많은 레벨에 대한 실험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던 대각對角 공간을 비롯해 작업실과 숍의 공간적 연결, 작업실과 주택의 연결 방법 등 많은 실험을 한 프로젝트였다. 건축주가 운영하는 도자기숍 ‘자기소의 봄’전경. 오픈 난간과 높은 천장이 숍을 더욱 넓어 보이게 한다. 상단에 작업실이 보인다. 2층에 마련한 작업실. 작업실과 숍 간 시야가 열려 있어 작업하면서 숍을 관리하거나, 숍을 보며 작업할 수 있다. 숍의 접근성 높인 보행자 통로대지 조건은 좌·우측에 건물이 들어서 있고, 북측인 전면에 2차선 도로가 지나며, 남측인 후면에 보행자 전용 도로가 있다. 자기소의 봄은 건축주의 요구로 일반적인 아틀리에 배치와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일반적으로 전면 또는 후면에 독립적인 마당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숍으로의 접근성과 시인성을 높이고자 매스를 좌우로 분할하고, 그 중간에 골목길 느낌의 보행자 통로를 계획했다. 건축주의 주 영역인 숍과 아틀리에가 있는 우측 매스와 좌측 매스 2층의 주택은 브릿지로 연결했다. 건물 전면엔 천장 높이와 맞먹는 높은 폴딩 도어를 설치해 앞마당과 일체된 느낌을 준다. 작업실에서 본 갤러리. 향후에 방문한 사람들을 위해 쉬는 공간이자 갤러리로 꾸밀 예정이다. MATERIAL외부마감 지붕 - 리얼징크 벽 - 고벽돌내부마감 천장 - 수성 페인트 벽 - 수성 페인트 바닥 - 강마루, 에폭시계단실 디딤판 - 고무나무 난간 - 평철단열재 지붕 - T220(네오폴) 외단열 - T110(네오폴)창호 시스템창호(LG하우시스 유로시스템9)현관문 현장 제작주방가구 제작위생기구 아메리칸 스탠다드난방기구 가스보일러(귀뚜라미) 작업실과 이어진 주택 입구. 기다란 복도를 지나면 주방/식당과 거실이 나타난다. 거실에서 본 주방/식당 거실 자기소의 봄의 숍 전면에 도로와 인도에서 분리되고 중앙의 보행자 통로에서도 방해를 받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작은 마당을 계획했다. 또 이천 도자기축제 시 다양한 행사를 하도록 가변형 벽체를 보행자 통로 측으로 설치했다. 입면은 외부에서 보이는 개구부를 최소화해 프라이버시를 극대화하고, 대부분의 창을 대지 중간 보행자 통로 쪽으로 내어 채광을 확보했다. 주택 욕실은 타일의 색상과 크기로 샤워 공간과 세면 공간을 구분했고, 천창을 달아 낮에 불을 켜지 않아도 은은한 빛이 욕실을 비춘다. 외부에서 직접 주택과 연결한 계단. 주방/식당과 연결된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건물을 계획하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공간과 재료의 본질에 충실하도록 노력했으나, 준공 후 다시 보니 아직도 어설픈 구석이 나의 눈에는 많이 보인다. 3층 방 바닥 일부분에 개구부를 둬 2층까지 채광이 들어서도록 계획했다. 이천 붉은 벽돌집의 실내 포인트다. 주택 디자인은 건축가가 건축주의 니즈를 충족시켜 주는 작업이다. 결코 과하게 또는 소홀하게 다뤄서는 안 된다. 그래서 주택은 늘 어려운 작업이다. 자기소의 봄은 오랜 시간 계획한 프로젝트였다. 많은 부분에 걸쳐 실험하게 해준 건축주 부부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새로운 공간에서 행복한 도예 작업을 펼쳐나가길 바란다. 이천 도자기축제 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가변형 벽체를 보행자 통로 쪽으로 냈다. 아틀리에와 주택을 연결한 브릿지 아래엔 지나가는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휴식공간을 만들었다.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주택 스케치 추가 [철근콘크리트, ALC주택] 브릿지로 연결한 아틀리에와 주택, 이천 붉은 벽돌집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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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리에와 주택을 브릿지로 연결한
이천 붉은 벽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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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근검한 생활이 곳곳에 묻어나는 제천 박도수 가옥
- 제원 박도수 가옥提原朴道秀家屋(중요민속자료 제137호, 충북 제천시 금성면 구룡리 305)은 안채 상랑채에 쓰여 있는 同治三年甲子五月初三日寅時立柱五日未時上樑(동치삼년갑자오월초삼일인시입주오일미시상량)이라는 묵서명에서 보이듯 1864년에 지은 집이다. 그러나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의하면 사랑채와 아래채를 20세기 초에 지었다고 한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안채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모두 초가다. 박도수 가옥은 소박하게 지내려 했던 모습이 여러 곳에서 묻어난다. 박도수 가옥은 중부지방의 전형인 ㄱ자 형태를 보이는 안채에 사랑채와 아래채가 둘러져 안마당을 형성하고 사랑채 바깥에 담을 둘러 바깥마당을 이루고 있다. 80년대 초 조사해 작성한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배치도를 보면 대문간채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안채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모두 초가다. 한때는 사랑채에 시멘트 양기와를 얹은 적도 있었으나 원래 초가였다는 증언으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채는 전면 다섯 칸의 몸채 좌측에 세 칸 날개채가 붙어 ㄱ자 형태를 이룬다. 날개채는 부엌 두 칸과 안방 한 칸으로 구성했는데 안방은 몸채 쪽 퇴칸까지 뻗어 한 칸 반규모다. 안방 위로 윗방이 있다. 형태로만 따지면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구조지만 안채는 다른 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여러 특징이 있다. 안쪽으로부터 광 두 칸, 방 두 칸, 부엌 한 칸으로 구성된 아래채. 가옥 오른 편에 있는 출입문으로 원래는 외양간으로 썼던 곳이다. 고방, 대공에서 보는 특이한 모습에 눈길우선 눈에 띄는 것이 독특한 평면이다. 대청 건너편에는 건넌방이 위치하는 게 보통이나 이곳에는 고방을 뒀다. 귀중한 것을 건사하고자 대청에 붙여둔 것인데 ㄱ자 평면집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모습이다. 대청에 붙여 고방을 두는 경우는 안채 평면이 ㄷ자 형태일 때이며, 이때에도 건넌방 윗방에 고방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고방문은 현재는 합판으로 돼 있지만 예전에는 널빤지로 된 판장문이었다. 툇마루 쪽으로 창날 끝 날이 몇 가닥으로 갈라진 살창을 설치했고 지금은 화장실로 개조해 사용한다. 다음은 마룻대를 받는 짧은 기둥인 대공이다. 기와집은 판대공이 일반적이고 그렇지 않다면 동자주로 대공을 받친다. 그러나 이곳에는 첨차를 사용했다. 대들보 위에 소로를 올려놓고, 그 위에 첨차를 설치하고 다시 소로 5개를 놓아 장혀를 받치고 있다. 한편 중도리를 인장혀 한가운데에는 다시 이를 받치는 소로를 설치했는데, 이것은 도리가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보강책으로 판단된다. 목수가 기존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했으나 구조적으로 판대공 형식보다 유리할 것은 없어 보인다. 어쨌든 이렇게 첨차로 도리를 받치는 형식은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 보지 못했다. 유일하게 기와를 얹은 안채는 삼량집임에도 팔작지붕을 한 특이한 모습이다. 안채에서 본 사랑채 후면. 내외를 두고자 설치한 판장벽. 낮고 짧아 엄격한 의미의 내외벽 역할을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량집임에도 팔작지붕을 얹은 안채안채 구조 역시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삼평주 삼량집이다. 이 집처럼 퇴칸이 있는 경우 대부분 가운데 기둥을 고주로 올리고 오량집으로 계획한다. 또한 삼평주집이라고 해도 대부분 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도리를 걸고 오량집으로 만든다. 그러나 여기는 모든 기둥을 평주로 하면서 삼량집으로 만들었다. 칸 반 규모의 집에서 삼량집으로 할 경우 서까래가 길어져 하중 부담이 커져 부재를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삼량집을 고집한 이유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삼량집은 맞배지붕 또는 우진각지붕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나 집은 오량집에서나 볼 수 있는 팔작지붕을 이고 있다. 오량집은 중도리에서 외기를 낸 곳에 박공을 올려 팔작지붕을 구성하지만, 이곳은 삼량집에 팔작지붕을 만들고자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지붕 구조를 만들었다. 어떻게 팔작지붕을 올렸는지 연등천장인 부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엌 지붕 구조를 보면 우선 휜 부재를 종도리로 사용하고 외부 마구리는 외벽에 설치된 도리에 얹었다. 도리 위에 추녀를 걸도록 짧은 부재를 얹고 마족연(서까래 뒷부분을 잘라 추녀에 차례로 붙이는 것)으로 지붕 면을 구성한 후 그 위에 박공 면을 만들 부재를 얹어 팔작지붕을 만든 것이다. 정상적인 팔작지붕 구조는 아니지만 나름의 기술로 오량집의 전유물인 팔작지붕을 삼량집에 적용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집을 지은 목수 솜씨가 대단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재주 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한 노력은 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외부에 설치한 초가를 얹은 창고. 방으로 개조해 쓰는 아래채는 측면 칸 반 정면 다섯 칸 규모다. 박도수 가옥 입구. 성주를 모신 보기 드문 집박도수 가옥은 사당을 세우지 않고 안채 대청 뒤쪽에 감실(신위를 모셔둔 곳)을 만들어 신주를 모신다. 그리고 안방 대공에는 한지를 접어 만든 성주(집에서 모시는 신으로 건물을 수호하며 가신家神가운데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를 모시고 있다. 성주를 모시는 방법은 이렇게 한지를 접어 대들보나 대공에 묶어두거나 독에다 쌀을 넣어 집 한 귀퉁이에 두기도 한다. 여러 집을 돌아다녔지만 성주를 모시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은데 아직 나름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안채 부엌 중문 기둥 바깥에는 내외를 나누고자 판장벽을 설치했다. 내외 구분을 위해 중문을 두칸으로 만들어 돌아들어 가게 하거나 내외벽을 만들어 시야를 차단하곤 했는데 이 집에서는 후자를 택해 내외벽으로 판장벽을 이용했다. 그러나 벽이 시야를 차단하기에는 짧고 낮아 엄격한 의미의 내외벽이라 하기에 힘들다. 심리적 안정감을 주려는 의도 정도로 보인다. 이것만을 놓고 봤을 때 안팎구분이 엄격한 가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래채는 측면 칸 반 전면 다섯 칸이다. 안쪽으로부터 광 두 칸, 방 두 칸, 부엌 한 칸으로 과거에는 두 칸 방 뒤에 툇마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툇마루까지 방으로 개조해 사용한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아래채 구조가 보기 드문 도리가 4개인 평사량집라고 하는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굴뚝 위 지붕 모양을 목재 맞배지붕 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모습으로 제법 운치가 있다. 안채 측면과 담 사이로 길게 항아리가 늘어섰다. 평면도 권위를 벗고 소박하게 꾸민 사랑채또하나재미있는부분은나무판재로만든굴뚝이다. 주인말로는원래부터 그랬다고 하나 강원도 산 중에 위치한 집에서 굴뚝을 나무로 만들지 이처럼 평지에 있는 집에서는 흔한 것이 아니다. 연가(굴뚝위에꾸밈으로 얹는 지붕모양의 물건)를 나무로 맞배 지붕형식으로 한 것이 나름 운치가 있다. 세련된 맛은 없지만 푸근한 느낌을 주는 굴뚝이다. 박도수 가옥은 집 배치나 구성에서 권위를 내세우는 종가宗家나 사대부 집이 아니라 살림집으로 지어진, 전형적인 농가의 체취가 느껴지는 집이다. 이런 모습은 사랑채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우선 사랑채가 사대부 사랑채와는 달리 매우 소략하게 지어졌다. 중문과 동시에 지은 사랑채는 전체 규모가 다섯 칸이다. 광, 중문, 외양간으로 사용하는 세 칸을 제외하고 나면 사랑채는 고작 두 칸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두 칸 모두 방이고 대청은 한 칸도 없다. 따라서 박도수 가옥의 사랑채는 사대부가에 반드시 필요했던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제사와 차례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 양반집에서 지켜야 했던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순수하게 바깥주인의 생활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런 실용적인 모습은 중문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문칸에는 사랑방을 위한 아궁이가 설치돼 있는데 대부분 부엌 공간 확보를 위해 중문을 칸 반 규모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사랑채를 초가로 꾸민 점도 근검한 생활을 하려했던 의도로 보인다. 좌측 아래채와 우측 사랑채 사이에 예전에는 외양간이 있었다고 한다. 부엌과 가까운 곳에 뗄감이 높게 쌓였다. 연등천장인 부엌은 마족연으로 지붕면을 구성한 후 그 위에 박공면을 만들 부재를 얹었다. / 대들보 위에 소로를 올려놓고 그 위에 첨차를 설치하고 다시 소로 5개를 놓아 장혀를 받치고 있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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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근검한 생활이 곳곳에 묻어나는 제천 박도수 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