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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은행나무 아래서 학문을 닦다 맹씨행단 孟氏杏壇
-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위치한 맹씨행단 孟氏杏壇(사적 제109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조선 세종 때 청백리 淸白吏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1360∼1438)이 살았다. 행단은'은행나무가 있는 곳'이란 뜻으로,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를 따라 공자와 같이 은행나무 아래서 학문을 닦고자 하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맹사성은 고려 말 장군인 최영 崔瑩의 손자사위로, 최영에게 맹씨행단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현재는 본채와 사당인 세덕사世德祠두 채만 있다. 1920년대만 해도 앞에 행랑채와 은행나무 가까이 사랑채가 있었다. 본채도 좌측 3칸과 우측 1칸이 더 튀어나와 지금처럼 완전한 H자 형태는 아니었다.글 최성호 사진 윤홍로 기자 맹씨행단은 최영이 1330년에 지었다고 전하나, 당시는 그가 15세였기에 부친인 최원직이 지었을 것이다. 어쨌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집이다. 현재까지 큰 변화를 보면 1482년 좌향 坐向이 손좌건향 巽坐乾向(북서향)에서 정좌계향 丁坐癸向(북북동)으로 바뀌고, 1642년 중수 重修하고, 1759년 서남쪽 기둥을 교체하고, 1964년 앞부분의 부엌을 철거했다. 맹씨행단은 현재 완벽한 대칭 구조로 가운데에 대청을, 그 좌우에 3칸 구들방을 배치했다. 대청은 전면 2칸에 깊이가 칸 반이고 전퇴가 반 칸이다. 부엌을 철거했기에 원래 대칭 구조였는지 예단하기 어렵다. 최근 발굴 결과 헐린 앞 부분에서 적심이 안 나왔기에 후대에 늘렸을 것이다. 2단 자연석 기단에 H형의 본채 건물이 서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중앙 2칸이 대청이고 양측 칸이 구들이다. 기둥에 설치한 익공과 비슷하게 만든 화공. 종도리를 받치는 소슬합장과 복화반 그리고 대들보에서 종보를 받치는 동자주에 장혀를 받치고자 설치한 첨차. 대청 전면에 문짝을 칸마다 셋으로 나누어 달았는데, 조선후기 일반적인 문양인 세살이 아닌 넉살이다. 동물 배설물을 땐 초기 구들맹씨행단이 당초 모습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 모습으로 바뀌었는지 주목할 만하다. 건물 자체는 특이한 형태 외에는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 없다. 그러나 이 집 하나에 우리나라 건축사가 고스란히 담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로 구들 도입에 따른 생활 양식(입식에서 좌식으로 바뀜)과 집의 구조 변화다. 조선 초기만 해도 구들이 보편화하지 않았다. 사대부가 士大夫家대부분은 구들을 설치하지 않았다. 세종 때 재상들에게 방전(네모 반듯한 벽돌)을 나눠줬다는 기록이 바로 그 증거다. 맹씨행단도 1482년 좌향을 바꾸면서 구들을 설치했을 것이다. 구들은 부넘기가 없는 초기 형태다. 부넘기가 있다면 방바닥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넘기가 없기에 아궁이에서 방바닥까지 그 높이가 다른 집보다 낮다. 부넘기를 설치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정연상은"옛날에는 난방재로 동물의 배설물을 말려 사용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부넘기와 개자리는 불을 넓게 들이고 재를 정리하기 위한 시설이다. 즉 동물의 배설물을 사용한 초기 구들은 부넘기와 개자리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맹씨행단은 북향집이지만 전망은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본채에서 안으로 높은 곳에 사당을 배치했다. 맹유·맹희도·맹사성 3대 위패를 봉안한 세덕사다. 한옥 변천사를 한눈에맹씨행단 여러 곳에서 옛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종도리를 받치는 소슬합장과 복화반이다. 소슬합장은 조선 초기까지 사용하다 곧 사라진 구조다. 복화반 역시 조선 초기 후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들보에서 종보를 받치는 동자주에 장혀를 받치고자 설치한 첨차도 조선 후기에는 드물다. 또한 여러 곳에서 우리가 아는 한옥 구조와 다른 점이 보인다. 머름과 문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모습이다. 대청 전면에 문짝을 칸마다 셋으로 나누어 달았다. 무늬도 조선 후기에 일반적인 세살이 아닌 넉살이다. 문의 머름도 상하로 설치했는데, 고려시대에 지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수덕사 대웅전의 것과 같은 형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서면서 머름은 하부에만 설치했다. 머름동자도 문설주를 내려 설치했다. 대청 전면 6개의 문짝은 좌측 칸 3짝 중 가운데만 여닫이고, 나머지 5짝은 들어열개다. 마루를 깔기 전 설치한 문짝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다음으로 눈여겨볼 곳이 기둥에 설치한 익공과 비슷하게 만든 화공花拱이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집 치장을 제한했기에 민가는 대부분 민도리집다. 민가에 화공을 설치한 예는 왕실 집안 외에는 없다. "대소 신민의 가옥이 정한 제도가 없어, 이로 말미암아 서민의 가옥은 참람하게도 공경公卿에 비기고 공경의 주택은 참람히 궁궐과도 같아서, 서로 다투어 사치와 화미 華美를 숭상하여, 상하가 그 등위 等位가 없으니 실로 온당하지 않은 일이다. 이제부터 친아들 친형제와 공주는 50칸으로 하고, 대군은 이에 10칸을 더하며,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으로 하고, 서민은 10칸을 넘지 못할지며, 주춧돌을 제외하고는 숙석 熟石을 쓰지 말 것이다. 또한 화공과 진채 眞彩· 단청 丹靑을 쓰지 말고 되도록 검소·간략한 기풍을 숭상하되, 사당 祠堂이나, 부모가 물려준 가옥이나, 사들인 가옥, 외방에 세운 가옥은 이 제한을 받지 않는다."-조선왕조실록 세종 13년 1월 12일/조선왕조실록사이트. 이러한 세종의 하교로, 조선시대에는 집을 모두 검박하게 지었다. 당시 색도 사용하지 못하고 포작으로 치장도 못했기에 화려하게 장식한 집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맹씨행단에는 두공 장식이 있다. 장식이 익공집과 닮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 다르다. 익공은 주두를 감싸고 올라가 주두가 흔들리는 것을 막아주지만, 맹씨행단의 기둥 장식은 주두를 익공처럼 완전히 감싸지 않았다. 전면의 쇠서는 주두 하부에서 튀어나왔지만 후면부는 익공처럼 주두를 감싸며 보를 받치고 있어 익공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당에는 600년 된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고, 뒷동산에는 느티나무·전나무·감나무 들이 숲을 이룬다. 맹씨행단에서 좌측에 있는 작은 문으로 나서면 언덕에 자리한 구괴정이 자리한다. 고불과 황희, 권진 등 세분의 정승이 함께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고 국사를 논했다는 유서 깊은 정자다. 맹씨행단에서는 시야가 넓게 펼쳐진다. 당시 생각하기 힘든 북향집이지만 전망은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집터는 이 집을 지은 사람의 기풍을 느끼게 한다. 이런 곳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매우 편안하고 포용력도 많았을 것이다. 맹사성을 처음 보는 사람은 그를 정승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꾸밈이 없는 데다 편안한 인품을 가졌기 때문이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전혀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환경은 어떠한가,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 후손의 심성은 어떠할까.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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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은행나무 아래서 학문을 닦다 맹씨행단 孟氏杏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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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조선 말 격동기, 시대상을 반영한 집 보은 선병국 가옥
- 보은 선병국(宣炳國) 가옥은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 한국전쟁과 수해로 규모가 많이 축소됐지만, 아직도 그 당당함을 느낄 수 있다. 선씨 가문은 전라도 고흥군 금산면이 본향(本鄕)이다. 전라도 토박이로 지금도 보성에는 선씨 가문 출신 충신의 위패를 모시는 오충사(五忠祠)가 있다. 고흥에서 가문을 거부(巨富)로 만든 사람은 현 종손의 증조부인 선영홍(宣永鴻) 공이다. 종부는 당시 소작료로만 벼 만 석을 거두어들일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거부가 집을 지었으니 당당하고 거대한 장원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솟을대문 밖에 있는 군부대도 이 집의 소유이고, 현재 담으로 둘러진 곳만도 3000여 평이 된다니, 예전의 집 규모를 감히 어림잡기조차 힘들다. 글 최성호 사진 윤홍로 기자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하개리에 위치한 보은 선병국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34호). 시냇물이 모이는 넓은 삼각주의 소나무 숲에 자리 잡은 집이다. 자연 경관과 집이 어울려 대단히 아름다운 환경을 이루는데, 건축 당시에 훌륭한 목수들을 가려 뽑아 지은 집이라고 한다. 선씨 가문은 단지 돈을 버는 데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증조부나 조부는 교육에 대한 투자가 남달랐다. 종부의 말로는 증조부가 이곳에 자리 잡은 후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한다. 집 앞에 관선정(觀善亭)이라는 건물을 짓고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 숙식을 제공하며 가르쳤단다. 그러한 교육에 대한 열의는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한학자로 유명한 임창순(任昌淳 1914∼1999)도 여기 출신이다. 그렇다고 선씨 가문에서는 인재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후에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동량지재(棟梁之材)로 크기만을 바라면서 공부시킨 것이다. 과연 현재의 부자들 중에서 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인재를 육성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하다.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사랑 마당 앞의 내대문(內大門). 안채 내대문과 연자방앗간으로 통하는 쪽문. 연화부수형 터에 ‘工’자형으로 앉혀집터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하는 명당으로, 증조부인 영흥 공이 터를 잡아 이주했다. 집은 1919년에서 1921년에 걸쳐 당대 최고의 목수를 초빙해 지었다. 종부는 증조부가 이곳으로 이주해 잠시 기거할 집을 주변에 마련해 놓고 한꺼번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나무 중에는 멀리 춘양에서 가져온 것도 있다. 춘양목(春陽木)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의 높은 산 지대에서 자라는 소나무로, 그 속이 붉고 단단하며 껍질이 얇아 건축재나 가구재로 많이 쓰인다. 이렇게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선씨 가문이 지금의 삼성가에 비견될 만큼 거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선병국 가옥의 구조는 매우 특이하다. 사랑채, 안채, 사당채가 각각 담으로 둘러진 독립된 영역인 데다, 다시 집 전체를 담으로 둘러놓았다. 아마도 외부로부터 집을 보전하고자 이중으로 담을 두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채와 사랑채가 완벽하게 독립된 구성을 한 것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외부 담만 없다면 두 채의 서로 다른 집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이러한 구성은 안채와 사랑채 간의 연결은 철저히 하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로 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좌향을 남향으로 튼 사랑채와 서향으로 튼 안채의 평면은 모두 ‘工’자 형태이다. 이러한 평면 형태는 집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工’자 형태는 불길하다 하여 금기시하는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아산의 맹씨행단이 이러한 형태의 평면이지만 일반적으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工’자 형태의 평면 형식은 대칭성을 보여 주어 강한 권위를 드러낸다. 사랑채는 남향을, 안채는 서향을 한 이유가 명확치 않다. 사랑채의 남향은 당연하겠지만, 안채의 서향은 여러모로 불편하기에 잘 이해되지 않는다. 전체 배치를 보면 사랑채와의 연계를 생각한 것으로 추측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사랑채의 축에서 직각으로 꺾어서 서향으로 배치한 안채는‘工’자형 평면이다. 사랑채는 ‘工’자형 평면으로서 뼈대를 2고주 7량이고 몸채가 정면 4칸, 보간 2.5칸으로하고 날개채가 정면 2칸, 측면 5.5칸으로 앞으로 몸채보다 2칸을 내밀도록 계획했다. 3칸의 솟을 삼문을 전면으로 뒤로 3칸의 사당채가 놓였다. ‘ㄷ’자형 행랑채가 넓게 둘러싸서 안마당 공간을 형성한다. 사랑채, 안채, 사당채를 둘러싼 안담 바깥으로 널찍하게 외담을 둑담으로 두껍고 높게 둘러치고 있다. 집의 권위를 한껏 높여선병국 가옥은 일제시대에 지어졌다. 집을 지을 즈음에는 와해되기 시작한 조선시대의 규범과 신규범들이 혼재돼 새로운 사회 구조를 형성해 나가던 시대였다. 건축에서도 평면의 구성, 공법, 재료, 규모 등에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에 보여 주었던 건축 규제가 흐트러지고, 새롭게 등장한 공업화된 재료를 사용한 것이 가장 눈에 띈다.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건물의 규모를 규제했다. 그 방법은 칸수와 기둥 높이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분 사회가 와해되면서 규제는 무의미해졌다. 경제력만 있으면 크고 좋은 집을 짓게 된 것이다. 선병국 가옥에도 그러한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기단과 초석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했고, 당당하게 원기둥을 높이 세워 집의 권위를 한껏 높였다. 이렇듯 과거의 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났지만, 그 나름대로 자제를 하려는 노력이었는지 처마만은 홑처마로 처리했다. 선병국 가옥이 이전의 집과 다른 점은 격식보다는 실용적인 부분에 보다 많은 배려를 했다는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에 사용상의 편의를 위해 툇마루를 앞뒤로 다 깔았다. 전면과 측면은 퇴칸으로 툇마루를 처리했고,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뒷부분은 쪽마루를 깔았다. 그 때문에 안채나 사랑채 어느 곳이든 편하게 통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집을 실용적으로 꾸민 모습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안채의 대청이 안채 전체 규모에 비해 작다. 안방도 집의 규모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 반면 방을 많이 드렸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집을 다양하게 쓰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다락을 많이 드려 수납공간을 충분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실용성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이 집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가치가 공고해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가 별채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안채로 가려면 대문에서 돌아서 들어가야만 한다. 안채 입구에는 별도로 중문을 설치했다. 중문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다시 내외담을 돌아 들어가야 하기에 대문에서 안채까지의 여정은 지그재그의 궤적을 그린다. 그만큼 내외의 성격이 더 깊어졌다. 구조를 보면 20세기 초 지방의 상류층에서는 남녀유별에 대한 의식이 사회의 일반적인 추세와 달리 오히려 더 깊어졌던 것은 아닌가 싶다. 안채 안마당 앞 툇마루. 잘 다듬은 돌로 기단과 초석을 쌓았다. 짜임새 있는 홑처마 밑의 보아지. 행랑채의 남쪽 끝에 ‘ㄱ’자형으로 꺾어 솟을대문을 덧달고, 내대문을 만들어 외대문에서 ‘ㄹ’자로 꺾어 안채에 이르도록 계획했다. 자연적으로 휘어진 나무를 사용한 안채 대들보. 곳간의 광창(光窓). 안채 건넌방 앞의 툇마루. 도솔천 전통 찻집으로 쓰이는 사랑채. 3칸 대청과 상하 2칸의 작은사랑을 배치했는데 대청앞은 분합문(分閤門)을 달아 개방하도록 계획했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빛이나선병국 가옥의 여러 곳에서 솜씨 좋은 목수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안채 대들보는 자연적으로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려 사용했다. 이렇게 휘어진 나무를 다루는 목수는 그리 흔치 않다. 문짝을 보면 어느 한 곳도 소홀함이 없다. 안채의 곳간이나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 곳간의 광창(光窓)까지 비례가 잘 맞게 짜여졌다. 곳간 광창은 팔각형으로, 이러한 형식의 창문은 다른 집에서는 안채의 중요한 방에만 설치하지만 다락의 창문으로도 사용했다. 무엇보다 선병국 가옥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 규모에 있다. 사랑채나 안채의 규모가 너무 커 집의 구조가 한눈에 읽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채 마당이 웬만한 집의 부지 전체 크기다. 너무 넓어 축구장을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안채 대청에서 마당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사랑채도 마찬가지다. 워낙 대지가 넓어 집 주변을 돌아보는 데만도 한참 걸린다. 지금은 소나무가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운치가 있었다고. 이 집을 지은 증조부도 소나무에 애착이 많아서 큰 소나무에는 소나무마다 관리인을 두어 관리할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이 집의 사랑채에서는 전통 찻집을, 안채에서는 고시원을 운영하고 있다. 고시원은 16년 전 이 근처에서 고시원을 운영하던 사람의 권유로 시작했다고. 이제는 전국적으로 알려져 대기하는 사람이 줄을 섰단다. 개인적으로는 문화재로 지정 받은 고택은 어떻게든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전면 개조하지 않으면서도 찻집이나 고시원으로 고택을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안주인의 말로는 고시원을 하기 전에는 저녁 때 집에 들어오는 것이 매우 싫었다고. 깊은 밤 불꺼진 집에 들어올 때는 섬뜩하기까지 했단다. 이제는 늘 사람들이 있어 그러한 느낌은 없다고 한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빛이 난다. 예전에는 하인들이 있어 주인이 집을 비워도 사람 사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제 하인들도 없는 집에 단 두 내외가 산다고 하면 적막하고 쓸쓸하기가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선병국 가옥도 너무 넓어서 관리가 하기 힘든 집이다. 만일 이렇게 활용하지 않았다면 마당에는 잡초 우거지고, 불을 때지 않는 구들은 거북 등처럼 갈라지고, 마루와 나무는 갈라지고 터져서 그야말로 흉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종부의 말에 의하면 대청에 아무리 기름칠을 해도 사람이 밟고 지나지 않으면 윤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사람의 손길이 집을 만드는 것이다. 운치를 더하는 소나무. 현재 고시원으로 쓰이는 행랑채는 맞걸이 3량 맞배지붕인데 북동쪽 끝 부분만 작은 합각으로 처리했다. 안채 대문 앞에는 ‘ㄴ’자 담을 둘러 가로막았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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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조선 말 격동기, 시대상을 반영한 집 보은 선병국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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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집성촌 삶이 집 모습도 비슷하게 만든다 '남원 몽심재'
- 죽산 竹山 박 씨 집성촌인 홈실마을에 위치한 남원 몽심재 夢心齋(중요민속자료 제149호)는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진 경사지에 개울을 앞에 두고 배치됐다. 몽심재란 이름은 고려 시대 문인인 충현공 박문수의 시구절 '격동류안원량몽 隔洞柳眼元亮夢 등산미토백이심 登山薇吐伯夷心'에서 몽 夢 자와 심 心 자를 차자 借字 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글 최성호사진 홍정기 박문수는 고려 말 우정승을 지낸 사람으로 조선이 건국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충정을 지킨 두문동 72현 중 하나다. 죽산 박 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은 충현공 손자인 박자양이 전라도 관찰사로 내려왔을 때 숙부인 박포가 제2차 왕자의 난에 연루돼 화를 입게 될 처지에 놓이자 관직을 사직하고 근처 초리방에 은거한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몽심재는 경사지를 따라 행랑채, 사랑채, 안채의 3단 구조다. 이렇게 3단 구조로 집을 배치했지만 집터 경사가 급해 일반 한옥 배치와는 다른 느낌이다. 마치 경사지에 지어진 서원을 보는 듯하다. 동쪽 담에도 또 다른 행랑채가 있었으나 최근에 없어졌다고 한다. 죽산 박 씨 집성촌에 위치한 몽헌재는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인 박문수 손자 박자양이 초리방에 은거한 것에서 비롯됐다. 자연 바위 그대로를 끌어들여 정원 중심으로 삼다몽심재에 들어서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정원이다. 고저차가 심한 곳에 지어지다 보니 행랑채에서 사랑채까지 정원이 경사져 조성됐고 다른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큰 바위가 마당 가운데 놓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연못까지 조성했다. 우리나라 살림집에서 정원 계획이라는 것이 별서別墅(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가 아닌 이상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계획이라고 해봐야 마당에 나무 몇 그루 심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기존 바위를 그대로 살려 정원 중심으로 삼고 동쪽 하단에 연못을 조성하는 등 적극적인 계획이 이뤄졌다. 잘 다듬은 수석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커다란 바위가 이렇게 담장 안으로 들어온 경우는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마당 규모로 보아 집터 밖에 있어도 될 것을 오히려 집 안으로 끌어들여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정원 요소로 만들었다. 이러한 정원 배치 때문에 몽심재 행랑채는 다른 집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구조다. 원래 7칸이었던 행랑채는 서쪽 두 칸이 없어진 상태로 동쪽 연못 쪽 한 칸은 연못을 바라볼 수 있도록 누마루를 설치했다. 연못은 5.5m×5.0m의 약간 장방형으로 동쪽 담 아래 샘에서 물이 들어와 남쪽으로 자연스레 흘러나간다. 행랑채에서 2단 위에 놓인 사랑채로 정원과 앞산 경관을 막힘없이 받아들인다. 사랑채 옆 중문. 일반적으로 일각문으로 만드는데 이곳을 좌우로 광을 들인 3칸이다. 장인의 눈썰미가 돋보이는 사랑채행랑채에서 계단을 올라야 잡히는 사랑채는 2단 기단 위에 놓여 정원과 앞산 경관을 막힘없이 받아들인다. 전후퇴집인 사랑채는 후면 퇴칸이 거의 한 칸 규모에 버금갈 정도로 넓어 외관상 두 칸 집처럼 느껴진다. 사랑채는 전면 5칸인데 서쪽으로부터 4칸은 방이고 동쪽 한 칸은 대청이다. 그리고 후면 한 칸은 부엌이다. 방 규모와 배치로 볼 때 사랑채는 접객보다 생활 중심으로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전면에 설치된 팔각기둥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으로 대부분 사각기둥이고 간간이 원기둥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팔각기둥은 누마루 하부나 활주에 쓰일 뿐 일반 집에서는 사용한 예를 찾을 수 없다. 이렇게 기둥을 팔각형으로 한 것은 추측건대 바로 옆 죽산 박 씨 종가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차마 원기둥을 사용하지 않고 팔각기둥을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랑채 서쪽 끝 툇마루 한 칸을 한 자 정도 올려 누마루 형식으로 만들고 계자난간을 둘렀는데 솜씨가 범상치 않다. 매끈한 계자난간과 한 자 반 정도 앞으로 돌출된 툇마루를 받치는 까치발을 보면 날렵하게 휘어진 부재를 적절하게 이용해 사랑채 품위를 높여주고 있다. 이 사랑채를 조성한 장인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다. 사랑채 동쪽 중문도 다른 집과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중문은 일각문으로 만드는데 이곳은 좌우를 광으로 꾸민 3칸 중문채다. 중문으로 들어서면 사랑채 뒤편에 ㄷ자 형 정면 6칸인 안채가 위치한다. 사랑채와 안채 역시 높이 차이가 있어 안채 기단이 3단 높다. 5칸 규모인 사랑채 전면에는 팔각기둥이 쓰였다. 대부분이 사각기둥이고 가끔 원기둥을 사용하기는 하나 이렇게 팔각인 곳은 특이하다. 바로 옆 박 씨 종가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심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정원 연못. 7칸이었던 행랑채 서쪽 2칸이 연못으로 없어졌다. 연못을 감상하도록 행랑채에 누마루를 설치했다. 부엌 확보하고자 한 칸 늘린 서쪽ㄷ자형 안채는 동쪽 폭이 한 칸, 서쪽 폭이 두 칸 돌출해 있는데 서쪽과 동쪽의 구성이 전혀 다르다. 우선 동쪽으로 돌출된 부분은 고저 차를 이용해 2층으로 지어졌고 상부는 다락으로 하부는 부엌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전면에는 까치발로 받쳐 상부 다락에는 활용이 가능한 선반을 만들었다. 서쪽은 동쪽보다 반칸 더 앞으로 돌출됐는데 돌출된 반 칸을 거적 지붕으로 덮고 마루를 깔아 몸체 다락에서 출입이 가능토록 했다. 또 난간을 둘러 다목적 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다락하부 1층은 나뭇광으로 쓰였다고 한다. 안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서쪽이다. 서쪽 측면을 반 칸 정도 내달아 퇴로 쓰거나 반침으로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곳에서는 규모를 늘린 한 칸이다. 이렇게 한 칸으로 한 것은 부엌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처음부터 지금처럼 지어졌던 것이 아닌 것 같다. 전면에서 보면 박공널이 연속된 것이 아니라 덧대어 달았고 서까래도 본채 서까래를 거쳐 앞으로 빼낸 것으로 보아 서쪽 한 칸은 후대에 내달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앞으로 달아낸 거적 지붕도 같은 시기 설치했을 것이다. 이는 거적 지붕 앞 아궁이를 봐도 알 수 있다. 전면 기단 위에 아궁이를 설치했는데 나뭇간 안을 보면 아궁이는 부엌방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원래는 돌출된 모습이 동쪽과 같았는데 서쪽을 확장하면서 아궁이가 따라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부엌 두 칸, 안방 한 칸, 대청 두 칸 그리고 도장방 한 칸으로 구성했다. 안방이 건넌방보다 작은 일반적 한옥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과 사랑채가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지어진 반면 안채는 모든 것이 궁색해 보인다는 점에서 다른 집 안채와 비교해 볼 때 안채가 홀대받았다는 느낌이다. 사랑채가 후대에 지어졌다고 하니 다시 지으면서 사랑채를 예전보다 규모를 늘렸던 것으로 추측한다. 안채는 서쪽 측면을 한 칸 내달아 부엌으로 쓴다. 박공널을 덧대어 달고 서까래를 본채 서까래를 거쳐 빼낸 것으로 보아 후대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부엌 두 칸, 안방 한 칸, 대청 두 칸으로 구성된 안채. 이곳 홈실마을은 죽산 박 씨 집들이 연이어 들어섰다. 마을 입구로부터 몽심재, 죽산 박 씨 종가(유형문화재 180호), 박형기 가옥이 담을 같이하며 나란히 붙어 있으면서 홈실마을의 중심을 이룬다. 이 세 건물 건축연대를 보면 종택 사랑채와 안채가 비슷한 시기에, 몽심재 사랑채는 이후에, 종택의 안채는 1841년에 지어졌다. 그리고 한참 후 박형기 가옥이 건축됐다. 박형기 가옥의 사랑채 건축 기법은 1900년대에 들어서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같은 마을에 같은 산을 배경으로 담을 연이어 짓고 보니 대지 조건이 거의 비슷해 건물 배치도 흡사하다. 무엇보다 비슷한 것은 안채다. 규모에는 차이가 있으나 세 집 모두 ㄷ자 형태며 특히 동쪽에 돌출된 부분은 하부를 부엌으로 상부를 다락으로 만들어 쓴다는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박형기 가옥은 현재 부엌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몽심재 사랑채와 비슷한 모양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집성촌이 형성되면서 서로 참고해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집성촌의 삶이 집의 모습까지도 비슷하게 만든 좋은 예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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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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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집성촌 삶이 집 모습도 비슷하게 만든다 '남원 몽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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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검박함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고창 인촌선생 생가
- 인촌 仁村 김성수는 1891년 김경중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3살 되던 해 큰아버지인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가 일제강점기에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집안 재산으로 중앙학원 및 경성방직을 인수하고 동아일보를 설립해 근대사 교육, 산업, 문화 전반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인촌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인촌 생가(시도기념물 제39호/전북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는 1907년 가족이 줄포로 이사한 후 위탁 관리해 오다 1977년 복원돼 현재에 이른다. 글 최성호사진 홍정기 인촌 생가는 1907년 가족이 줄포로 이사한 후 1977년 복원돼 지금에 이른다. 안내문에 화적으로 고창 생가를 떠났다고 나와있지만 실상은 다른 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넓은 들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언덕을 등지고 앉아있는 인촌 생가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배치다. 각각 독립된 두 집이 앞뒤로 연이어 자리 잡은 것은 처음 집을 지은 후 인촌 아버지 형제가 같은 곳에서 살려 했기 때문이다. 뒤에 배치된 큰집이 먼저, 아랫집이 나중에 지어졌다. 이렇게 앞에 집을 증축하다 보니 동쪽 옆에 세워진 큰집 솟을대문은 출입이 불편할 정도로 옹색해졌다. 바로 앞이 작은집 안채고 뒤로 보이는 게 안문간채다. 북향집이다 보니 전면보다 후면에 더욱 신경 쓴 모습. 지어진 시기별로 부 축적 과정 한눈에 다른 고택과는 달리 집을 지은 시기가 건물별로 정확히 밝혀져 있다. 맨 뒤로부터 큰집 안채가 1861년, 큰집 사랑채가 1879년, 작은집 안채가 1881년, 큰집 사랑채 · 문간채가 1893년, 작은집 사랑채가 1903년에 지어졌다. 이를 따라가면 집안의 부 축적 과정을 알게 된다. 지은 솜씨들이 제각각이라 한 목수가 순차로 집을 지은 것이 아닌 그때그때 다른 목수를 고용해 지었는데 당시 재력에 따라 자재와 목수 솜씨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1903년 올린 작은집 사랑채는 난간을 두른 누마루도 보이고 목재도 넉넉하게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제일 크다. 또 다른 집들이 민도리집인데 비해 이 사랑채는 직절익공집으로 집을 지은 목수 솜씨도 다른 건물보다 뛰어나다. 한눈에 봐도 다른 건물과는 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제일 나중에 지어진 작은집 사랑채가 다른 건물에 비해 품위와 권위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집을 지을 당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했기에 그렇다. 오른쪽이 큰집 사랑채고 왼쪽이 큰집 안문간채다. 인촌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큰집 사랑채 후면. 큰집 안채. 인촌 생가 안채 정면은 돌려 앉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면이라는 느낌이 강하지 않다. 북향집 영향 때문이다. 작은집 안채 측면. 부엌 살강 부분은 45도 꺾어 처리했는데 깔끔하진 않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큰집을 연결하는 중문이 나온다. 뒤로 보이는 기둥에 비해 바로 앞 기둥은 동그란 모양으로 보수 중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 소박하게 지으려 했던 노력이 곳곳에특징을 살펴보면 첫 번째는 안채와 사랑채 등과 같이 중요한 건물과 부속 건물 사이에 여러 면에서 수준 차가 난다는 점이다. 안채와 사랑채 같은 중요 건물에는 그런대로 좋은 부재를 사용하려는 흔적이 보이는데 부속 건물은 부재가 튼실하지 못하고 다른 집에 사용했던 부재들을 다시 사용한 경우도 많다. 또한 현재는 행랑채나 곳간채 지붕이 모두 기와지만 이전에는 억새로 덮었다. 이는 목재가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되도록 적은 비용으로 집을 지으려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집 전체가 조선 후기에 발전한 전후퇴집 형식으로 지어졌으며 집 안 구석구석 알뜰하게 활용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부속 건물을 포함한 모든 건물이 전후퇴집이어서 평면이 복잡하다. 이런 복잡한 평면 형태는 외관에도 반영돼 매우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부잣집이다 보니 수장 공간을 되도록 많이 확보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천장 속 더그매 공간을 적극 활용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보이는데 이런 수장 공간의 환기창을 입면에 반영한 결과 일반 한옥과 같은 차분한 느낌은 없지만 다채롭고 재밌는 입면이 나타나게 됐다.세 번째 특징은 안채 정면이 다른 집에 비해 정면이라는 느낌이 강하지 않다. 오히려 돌아앉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일반적으로 후면에 놓는 벽장을 전면에 배치했기 때문으로 이러한 벽장들 때문에 안채의 정면성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벽장을 북쪽 전면을 향하도록 한 것은 남쪽인 후면에 창을 내 빛을 많이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전반적으로 집은 큰 창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청 창호도 이 정도 규모 집에서 보기 힘든 작은 크기다. 추운 겨울 찬바람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왼쪽 큰집 안채가 놓였고 오른쪽으로 곳간채, 안문간채, 사랑채가 차례대로 보인다. 인촌 생가는 집뿐만 아니라 정원도 관리가 잘 돼 있는 편이다. 뒤편에서 본 큰집 안채와 사랑채. 북향집이 만들어 낸 여러 특이한 모습집은 북쪽을 보고 앉았다. 북향집은 여러 면에서 단점을 보이는데 이를 극복하려 했던 노력은 큰집 안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큰집 안채 대청 창호는 일반 방에 설치하는 창호 크기 정도로 소박하다. 이 정도 규모 집 대청 창호는 들어열개로 해 여름에 시원하게 개방하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곳에서는 일반 창호와 같은 크기로 만들어 옆에 붙어있는 판장벽이 아니었다면 일반 방이라고 착각할 만하다. 이 역시 더운 여름보다는 추운 겨울 찬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이외에도 각 건물별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이 더 있다.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이 작은집 사랑채 서쪽 퇴칸에 사용된 퇴보다. 언급했듯이 사랑채가 직절익공으로 된 것도 그렇지만 퇴보가 굴도리도 민도리도 아닌 팔각형 도리라는 것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경우다. 큰집 사랑채 퇴보도 재밌다. 일반 집에서 퇴보는 부재가 곧아 고주 중간에 걸리는데 큰집 사랑채 퇴보는 우미량식으로 뒷부분이 고주 대들보 바로 밑에서 연결돼 있다. 작은집 안채 부엌 형태 또한 특이하다. 부엌 전면 모서리 부분을 45˚로 모를 죽였는데 이런 모습을 한 것도 이곳뿐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부엌 밖으로 살강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꺾어짐 없이 직선으로 처리하기 위해 이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깔끔하지는 않다. 또 다른 특징은 큰집 바깥 문간채가 이중문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 집에서 대문을 이중문으로 한 경우는 거의 없다. 이중문으로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솟을대문, 행랑채, 중문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문을 거쳐 들어가므로 굳이 이중으로 대문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특히 안채로 들어가는 문도 아닌 사랑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을 이중으로 설치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대문이 원래 그런 모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문에는 국화정 등과 같은 쇠장석을 붙여 화려하게 꾸미고 뒷문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처음 지었을 때 솟을대문 없이 이 문을 대문으로 썼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바깥에 대문이 없기 때문에 안전을 고려해 이중문으로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동쪽 옆 큰집 솟을대문. 후에 작은 집이 들어서면서 쓸모 없어지게 돼 옹색하게 됐다. 큰집과 작은집 사잇길. 멀리 큰집 솟을대문이 보인다. 큰집 안채에서 바라본 곳간채. 인촌이 고창 생가를 떠난 이유는인촌이 이 집 고창 생가를 떠나 부안 줄포로 이사한 것은 1907년이다. 안내문에서 이유를 화적 횡포와 도깨비불이 출몰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종가를 보면 최근에는 직장 등의 이유로 종손이 옮겨 살기는 하지만 근세까지도 집을 옮긴 적은 거의 없다. 근세가 격변기였음에도 종가를 옮기지 않은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가로서 베푸는 삶을 살았기에 주변이 어지러울 때마다 마을 사람이 종가를 지켜준 경우가 많았다. 인촌이 이사한 줄포는 군산항이 개항하기 전까지는 전라북도에서 제일 큰 포구였다. 따라서 일본은 항구를 보호하고자 군인을 주둔시켰다. 적어도 줄포 읍내만큼은 치안이 확보됐을 것이다. 즉 치안이 불안한 이곳 고창을 떠나 줄포로 이사한 것이다. 안내판에는 화적이라 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여서 화적은 의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집을 버리고 줄포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면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그들은 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덕목을 실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창 인촌 생가와 줄포에서 인촌이 살았다는 김상만 가옥, 두 집이 많은 차이를 보이는 이유를 당시 시대상과 연관 지어 살펴보면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행간을 읽을 수 있다. 1903년 올린 작은집 사랑채로 목재를 넉넉히 쓰고 난간을 두른 누마루로 설치해 다른 건물보다 웅장하다. 재산이 넉넉했던 시기, 제일 나중에 지어져 품위와 권위를 느낄 수 있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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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검박함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고창 인촌선생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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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재 고유의 특성을 살린 단정함 목동 상가주택 리모델링
- 목동역 교차로와 만나는 오목로 8차선 도로에서 주택가로 향하는 2차선 도로에 들어서면 여느 도시의 한적한 주택가 풍경과 만난다. 다소 오래돼 보이는 빨간색 건물들이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고, 풍성한 가지를 뻗은 가로수는 이 마을의 내력을 짐작게 한다. 그런데 학교와 교회가 있는 맞은편에 뽀얀 아이보리 톤의 세련된 건물 한 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른 봄의 개나리처럼 이 건물은 마을에 생동감을 더한다. 글 강창대 기자사진 민영기 작가취재협조 ㈜유니브원 HOUSE NOTEDATA위치 서울 양천구 목동용도 주택, 근린생활시설대지면적 129.00㎡(39.02평)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건축면적 59.34㎡(17.9평)건폐율 46%연면적301.47㎡(91.19평)1층 35.91㎡(10.86평)2층 59.34㎡(17.95평)3층 59.34㎡(17.95평)4층 41.85㎡(12.66평)지하 82.35㎡(24.91평)주차장 22.68㎡(6.86평)용적률 233.69%건축비용 3.3㎡당 116만 원설계 및 시공 ㈜유니브원 02-447-0415 www.univone.com MATERIAL외부마감 지붕 - 갈바절곡, 도장 / 벽 - 라임스톤 / 데크 - LG 합성목재 내부마감 천장 - 석고 위 페인트(던에드워드) / 벽 - 석고 위 페인트(던에드워드) / 바닥 - 나투스진 그란데 사하라 라이트(동화자연마루) / 계단실 디딤판 - 미송집성목 / 난간 - 이중 접합유리 / 손스침 - 미송집성목 단열재 지붕 - 연질우레탄폼 / 외단열 - 나노 열반사 단열재 40T / 내단열 - e-board 23T 조명 라인조명 다운라이트 대문/현관 제작도어 난방기구 5A X.L 난방 위생기구 아메리칸 스탠다드 주방기구 한샘 창호 이건 시스템창호 건물 입구의 묵직한 무채색 마감재와 프레임이 금빛 우편함이 대조를 이루며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목동에 자리한 지상 4층 규모의 이 상가주택은 애써 자신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존재감을 은근히 뽐내며 행인들의 시선을 끈다. 특히,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는 건물의 화사한 톤이 인상적이다. 이는 외부 마감재로 사용한 라임스톤 Lime stone이 만들어내는 빛깔이다. 라임스톤은 바닷가에 있는 조개류의 껍데기가 굳어서 된 암석이다. 따라서 주 성분인 석회암이 부드러우면서도 밝은 빛깔을 띠게 한다. 외부 마감재로 라임스톤을 사용하게 된 것은 오롯이 건축주 선택이었다고 한다. 리모델링 전 목동 상가주택은 마을의 주조를 이루는 붉은색 타일 벽돌로 마감된 낡은 건물이었다. 당시에는 1층 상가에서 달아놓은 간판과 에어컨 실외기 배관이 얼기설기 건물 벽면을 지나며 지저분한 인상을 주었다. 건물 전체에 임대를 놓고 타지에서 생활하던 건축주는 결혼 후 주거용인 3, 4층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계획하게 됐다고 한다. 낡은 설비를 개선하는 것과 더불어, 무엇보다 쾌적하고 편리한 공간으로 바꾸고자 했다. 건축주는 약 6개월가량 건물 리모델링 정보를 모으며 공간을 계획하면서 전문가에 준하는 식견을 갖췄다. 건축주의 꼼꼼한 계획은 실내건축 전문 기업인 ㈜유니브원과 만나며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건물 입구에서 이어지는 계단은 흰 톤을 바탕으로 라이트블루에 가까운 연한 색을 사용했다. 현관 중문 슬라이딩 도어. 건물 3층에 위치한 주택 현관 중문은 3중 슬라이딩 도어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거실과 주방 겸 다이닝룸, 계단실로 공간이 흐르도록 해 동선이 간결하다. 건물 미감과 실용 감안한 시공건물 외벽에 적용한 석재 마감은 철물 구조를 세우고 앵커볼트로 고정하는 건식 방식으로 시공됐다. 이러한 시공 방식에 대해 ㈜유니브원 노현상 대표는 “타일 벽돌 위에 습식으로 석재를 접착할 경우 자칫 탈락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며 “안전을 고려해 견고한 시공법을 택했다”고 설명한다. 라임스톤의 뽀얀 빛깔과 더불어 눈에 띄는 부분은 창호다. 좁아 보이기만 했던 창문을 크게 넓혀 탁 트인 느낌을 주었고, 흰색 플라스틱 프레임은 톤을 낮춘 창틀로 교체해 밝은 벽면과 대비되어 더욱 단정하고 모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건물 내부 구조는 기존 구조를 그대로 살리면서도 단정하고 쾌적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관건이었다고 한다. 건축주가 자신이 원하는 인테리어 스타일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만큼, 시공자들은 건물 본연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건축주가 실현하고자 하는 바를 적절하게 구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시공 전문가로서 ㈜유니브원이 고민한 부분은 무엇보다도 노후한 설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4층이 옥상과 면하기 때문에 더위와 추위를 막기 위해 연질 우레탄폼 단열재를 옥상에 시공했다. 리모델링을 마치고 첫 겨울을 보내면서 건축주는 단열에 큰 만족을 표했다고 한다. ㄱ자로 꺾인 주방가구는 건축주의 단출하면서 심플한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준다. 거실에서 주방 겸 다이닝룸을 바라본 모습. 라인 조명과 간접 조명 등이 공간 구석구석까지 은은하게 비춘다. 3층 주방에서 바라본 거실. 건너편 초등학교와 가로수가 넓은 창을 통해 한 폭의 풍경화처럼 3층 침실로 들어온다. 3층 서재는 말끔하고 심플한 건축주의 취향을 잘 보여준다. 3층 욕실 겸 화장실. 수납장 전면에 거울을 적용하고 유리 칸막이를 활용함으로써 협소한 공간이 넓고 쾌적해 보인다. 잔잔한 색상과 질감이 만드는 하모니건물 외관이 주는 단정하면서도 화사한 이미지는 그대로 집 안 분위기로 이어진다. 벽면과 바닥은 엷은 색조를 띠는 밝은 톤으로 마감해 내부는 빛으로 가득 찬 느낌이다. 톤의 변화보다는 마감재가 가진 독특한 질감으로 변화를 줌으로써 공간은 차분한 음조로 하모니를 이룬다. 계단실 디딤판과 손스침에 사용한 미송의 은은한 빛깔은 이러한 실내 분위기와 잘 어우러지면서 공간에 잔잔한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강한 색조의 가구들은 공간에 리듬감을 줌으로써 생기를 더한다. 또한, 계단 난간과 욕실 칸막이에 유리를 사용함으로써 좀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면서 더욱 간결한 느낌을 주었다. 3층과 4층을 잇는 계단참. 4층 홀. 주택 계단실 벽면에 매립 라인 조명을 설치해 계단을 밝힘과 동시에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했다. 4층 침실은 베란다 통창을 통해 보이는 시원한 뷰가 특징이다. 리모델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번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한 ㈜유니브원 노현상 대표에게 리모델링 프로젝트와 관련해 시공자와 건축주 입장에서 고려해야 할 점을 물어보았다. 우선, 전문가가 갖춰야 할 소양으로 소통 능력을 강조한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축주의 니즈를 통찰하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개 건축주는 공사를 의뢰하기 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구조와 디자인, 마감재 등 광범위한 정보를 습득하며 준비한다. 더구나 정보화 시대에 건축이나 리모델링과 관련한 정보는 넘쳐난다. 하지만 이는 전문적인 시공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막상 현장에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현장마다 특수성이 있고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때 갑을 관계에 치우쳐 건축주가 듣고 싶은 답만을 제공한다면 좋은 집을 지을 수 없다는 게 노 대표의 설명이다. 노 대표는 “오해가 발생하는 걸 두려워하면 말을 아끼게 된다”면서 “관계가 경직돼 있으면 좋은 제안을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공자는 어떻게 건축주와 소통을 이끌어가야 할까? 그것은 건축주가 원하는 바를 찾아나가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건축주가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를 내밀며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할 때, 그 이면에 놓인 건축주의 니즈를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각도로 묻고 대안을 찾아 제시하며, 건축주가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니즈를 발견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4층 욕실 겸 화장실. 널찍한 공간에 외부 빛을 끌어들이는 창문이 있어 밝은 느낌을 준다. 4층 공간에도 매립 조명과 간접 조명, 라인 조명 등 다양한 형태의 빛을 사용해 밝고 화사한 공간을 연출했다. 접이식 어닝이 설치돼 있는 4층 베란다는 노천카페를 떠올리게 한다. 건물 성능은 감춰진 80%가 좌우한편, 건축주 역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리모델링은 노후한 건축물을 개선하기 위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노 대표는 “대개 시공에 대한 평가가 표면에 보이는 20%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나머지 80%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건물이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기능과 관련이 있다. 노 대표는 “난방이나 수도, 배관, 전기, 단열 등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영역이지만 리모델링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80%에 더욱 집중하고 인테리어나 외관과 같은 표면적인 20%는 이후에 고민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시공자와 건축주의 갈등은 대개 이러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되는 경향이 있다. 노 대표는 “해당 건물의 경우 이 부분에서 건축주와의 공감대가 컸기 때문에 겉과 속이 모두 건강하게 리모델링 할 수 있었다”라고 소회를 전했다. 정면에서 바라본 목동 상가건물. 기존 건물의 좁고 답답한 느낌을 주던 창을 넓게 계획해 탁 트인 개방감을 주었다. 목동 상가건물 외부 마감재로 사용한 라임스톤은 옅은 색조와 광택이 없는 은은한 질감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표현하는 석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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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재 고유의 특성을 살린 단정함 목동 상가주택 리모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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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높은 격조와 기품 있는 사당을 간직한 남양주 여경구 가옥
- 태묘산 자락 높은 언덕에 위치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 여경구 가옥 榛接겾卿九家屋(중요민속자료 제129호)은 여경구의 장인인 이덕승의 8대조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집은 18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산을 배경으로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놓였다. 서쪽으로 진입이 가능하며 전체적으로 누운 日 형 배치다. 글 최성호사진 홍정기 광채에서 본 대문채와 사랑채로 진접 여경구 가옥은 전체적으로 누운 日 형 배치다. 안채와 사랑채의 병렬 배치는 경기도 화성 정용채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24호)과 유사하다. 그러나 세부 배치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첫 번째는 출입 방향이다. 정용채 가옥은 동쪽, 여경구 가옥은 서쪽으로 진입한다. 또 여경구 가옥은 건물이 별동으로 이뤄져 안채가 열린 ㅁ자 구조인데 반해 정용채 가옥은 완벽하게 폐쇄된 ㅁ자 형태다. 가옥 동쪽 입구에서 본 모습으로 현재는 이곳으로도 출입이 가능하다. 경관을 위해 마을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마치 정자에 올라온 듯 전망 좋은 사랑채가옥은 사랑방과 안방을 마을을 향해 길게 배치하고 직각으로 문간채, 중문채, 부엌을 놓았다. 그 앞으로 광들이 안방과 사랑방과 같은 방향으로 배치됐다. 사랑채 앞 곳간채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사랑채와 안채가 앞뒤로 놓이는 일반적인 형태를 버리면서까지 이러한 집 자리를 고집한 것은 시원한 전망 때문이다.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아랫마을뿐만 아니라 마을 앞 왕숙천 너머 넓게 펼쳐진 들판까지 향한다. 꽉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이는 경관이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니 가히 명당이다. 이런 경관을 얻고자 오르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집을 배치한 것이리라.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측이 사랑채다. 높은 기단 위에 우뚝 선 사랑채는 전면 네 칸 반 측면 두 칸 규모인 일고주 오량집으로 반 칸 규모의 전퇴와 뒤로는 1/4칸 규모 광과 툇마루를 뒀다. 우측부터 건넌방, 대청 각 한 칸, 사랑방 두 칸, 벽장 반 칸으로 구성됐으며 대지 경사 때문에 사랑채 기단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사랑채에 올라서면 마치 정자에 올라온 듯한 느낌이다. 사랑채 건넌방과 대청을 가르는 툇마루 기둥에 문을 설치한 흔적이 보인다. 툇마루도 큰 사랑방과 건넌방 사이를 구분했던 것이다. 사랑채 건넌방과 며느리가 기거했을 안채 건넌방이 바로 연결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건넌방을 사용하는 사람을 배려해 문을 달았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랑채 앞에 초가로 된 헛간채가 있었는데 70년대에 헐렸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모습을 보이는 사랑채에서 꾸밈없이 집을 지으려 한 주인의 검소함을 전해 받는다. 관리가 잘 돼 깔끔한 건넌방 내부. 사랑방에 앉아 바라본 전경. 마을뿐만 아니라 마을 앞 왕숙천 너머 들판까지 시야에 잡힌다. 가옥의 볼거리, 사당사랑채 뒤쪽 언덕 위로 놓인 사당은 전면 2칸 측면 한 칸 반 규모의 맞배지붕 집이다. 가옥에서 눈여겨볼 곳이 바로 이 사당이다. 사당 평면은 다른 집과 별다를 것이 없지만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품이 있다. 사당은 위패를 모시는 공간 한 칸과 전퇴 반 칸으로 구성됐으며 삼면은 다른 사당처럼 벽이다. 그러나 다른 사당과 달리 측면 벽이 아름답다. 방화장에서 중방까지는 자연석을 쌓고 화장줄눈으로 마감했으며 그 위에 위아래로 뒤집어진 수키와를 엇갈려 쌓아 구분했다. 수키와 위에는 다시 기다란 방전을 엇갈려 쌓은 후 화장줄눈으로 마감한 것을 도리 밑까지 붙였다. 이 같은 지금 모습도 다른 곳과는 차별되지만 남아 있는 자료를 보면 더욱 아름답고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문화재청 사진에서 보이는 예전 모습은 중방까지 자연석을 쌓되 하부는 큰 자연석 막쌓기를 하다가 상부에 올라오면 작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변화를 줬고 수키와는 지금보다 더 가지런히 쌓았으며 그 위는 지금과는 달리 암키와를 비스듬히 올려 문양을 만들었다. 문양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격조가 있다. 또 암키와 문양을 넣은 곳은 위, 아래 및 좌, 우를 전돌로 사각형을 만들어 구분했다. 전돌로 구획된 직사각형 화면 때문에 암키와 문양은 더욱 안정된 형상을 갖추게 됐다. 이 암키와 문양 위로 다시 기와를 석 장 엎어 쌓고 그 위로 지붕 용마루 부고처럼 세워 마감해 벽면 전체에 변화를 줬다. 이와 똑같은 문양을 안채 동쪽 부분에 새로 만들어 놓았지만 격조가 사당과 비할 바 못된다. 형태뿐만 아니라 구조도 지금과 다르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반오량가 半五樑架(삼량집에 퇴칸을 붙여 전면은 오량집이고 후면은 삼량집인 구조)인 것은 같은데 보수 전 사당 종도리는 용마루와 위치가 빗겨나 맞지 않았고 앞뒤 지붕 물매도 다르다. 그러나 고쳐진 집은 일반 집처럼 종도리와 용마루 위치가 맞고 지붕 물매도 맞춰 놓았다. 예전 집이 왜 일반적인 구조 방식과 다른지 모르겠지만 고치면서 과거 모습을 무시해 버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솟을대문을 설치한 서쪽 대문채. 대지 경사로 기단이 높아진 사랑채. 사랑채 앞에 곳간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특이하게 T자 형태를 보이는 안채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대문간채와 마주하는 광채 아래 끝에 배치했다. T자형 안채와 ㄴ자형 광채가 엇갈린 형태를 이루는데 이렇게 안채가 T자 형태로 된 집은 그리 흔치 않다. 주로 충청도 북쪽 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형태지만 그렇다고 지역적 특성이라 보기 힘들 만큼 그 예가 많지 않다. 안채는 안방 앞으로 돌출된 부엌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나뉜다. 안방 몸채 깊이는 칸 반 규모고 일고주 오량집으로 대청은 고주 없이 대들보를 가로질러 놓아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대청 높이가 다른 집에 비해 낮아 조금 답답해 보이는 데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집을 검소하게 지으려 했던 의도로 보인다. 좌측으로부터 건넌방 두 칸, 대청 두 칸으로 구성됐다. 안방은 두 칸 규모이고 앞으로 두 칸 부엌이 돌출됐으며 뒤쪽으로는 골방과 뒷방, 광이 붙어 있다. 입구가 서쪽이다 보니 안방이 서쪽에 위치하는 전형에서 벗어나 동쪽에 위치한다. 광은 ㄴ자 형태로 사랑채 쪽은 사랑채에서, 아래쪽은 안채에서 사용하도록 계획됐다. 지금은 모두 광으로 개조된 광채는 원래 중문칸에서부터 외양간, 광 두 칸, 뒷간으로 구성됐다. 특이하게 T자형 구조를 보이는 안채. 건넌방, 대청, 안방, 골방, 뒷방, 광, 부엌으로 짜여졌다. 사랑채 툇마루 기둥에 문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큰 사랑방과 건넌방을 구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 한 것만 못한 보수, 이제라도 제대로 해야 여경구 가옥은 최근 전체적으로 보수작업을 진행해 기존 모습에서 많이 변형됐다. 앞서 말한 사당도 안채 마당 기단도 고쳐졌다. 원래 3단인 안채 기단은 마당에서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구조였는데 현재 한 단으로 고쳐져 적잖이 불편하다. 복원를 제대로 하지 않아 사당 외벽이 가지고 있던 품격이 사라졌고, 안채기단이 지니고 있던 기능성이 사라졌다. 문화재를 보전한다는 것은 예전 모습 그대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 모습을 살리는 것도 장인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능력이 없으며 원래 것에 훨씬 못 미치게 복구되고 만다. 현재 금속공예나 미술품 복원 부문에는 정성을 많이 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건축 부문 특히 한옥에 대해서는 장인 정신을 가지고 임하는 사례를 거의 보지 못했다. 때문에 최근 보수되는 한옥이 예전보다 수준이 더 떨어지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다. 능력이 되지 않으면 차라리 하지 말 것이지 솜씨가 부족한 사람이 손을 대 원래보다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보수하도록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줬으면 한다. 여경구 가옥은 오랜만에 보는 관리가 잘 돼 있는 집이다. 당장 사람이 살아도 될 만큼 집안 구석구석 정돈이 잘 됐고 정결하지 않는 곳이 없다. 방문한 당시 안방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다. 관리인 말로는 이틀에 한 번은 불을 땐다고 한다. 그러나 큰 사랑방은 이전에 온수보일러를 설치하면서 아궁이를 폐쇄 했다고 한다. 아쉬운 부분이다. 집을 잘 관리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집 생명은 길어진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문화재 보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두 번째 관리가 잘 된 집은 보는 즐거움도 있어 문화재를 활성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당대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관리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사당 원래 모습. 사당 벽면 암키와 문양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격조가 높다. 보수 후 현재의 사당 모습. 근래 전체적으로 보수 작업한 가옥. 제대로 보수하려는 노력이 아쉽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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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높은 격조와 기품 있는 사당을 간직한 남양주 여경구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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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위엄과 권위가 가세를 대변하는 군산 채원병 가옥
- 주변이 나지막한 언덕으로 둘러싸는 채원병 가옥 蔡元秉家屋(도민속자료 24호/전북 군산시 성산면 고봉3길 41-37)은 다른 집과 달리 북향이다. 집을 포위하는 고봉산이 지네를 닮아 오공혈 蜈蚣穴이라고 불리는데 그중 지네 어금니 위치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터가 명당이라 향의 불리함을 감수하고 집을 올린 것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안채는 1860년에 사당은 1901년에 지었다. 시기상으로 볼 때 집주인인 채원병의 5대조인 채동승(蔡東升1829~1875)이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안채에 비해 사랑채는 부재 사용이나 목수 솜씨가 달라 후대에 건축된 것이 아닌가 한다. 글 최성호사진 홍정기 집주인은 대단히 부자였을 것이다. 관리자 증언에 의하면 "천석지기, 만석지기로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상당히 부자였던 것 같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증조부가 금강산 별장에 유람하러 갈 때 자기 땅을 밟지 않는 곳이 딱 두 곳이라고 했다"고 할 정도로 소유한 땅이 많았다. 이런 부에 걸맞게 예전에는 집 규모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집주인에 의하면 많은 건물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우선 행랑채가 사라졌고 바깥사랑채, 놀이청 그리고 행랑채 밖에도 친척들이 살던 집이 몇 채 더 있었으나 그것도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1977년 이곳을 조사했던 김광언 <옥구 채원병씨 집/전북사학 1집>을 보면 현 사랑채 밖으로 2중 담장이 쳐지고 그 밖에 연못이 있었다. 대지가 지금의 3배 정도라고 하는데 이만한 규모를 갖춘 집은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왼쪽이 안채 정면과 오른쪽이 사랑채다. ㄷ자인 사랑채가 안채를 품은 모습으로 이는 정읍 김동수 가옥과 비슷한 배치다. 일반 집에서는 보기 힘든 두리기둥을 썼다. 아마 당시 재력이 대단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누마루에서 본 마당으로 정원 쪽으로 평난간만을 설치해 사시사철 감상토록 했다. 위엄과 권위 뽐내는 사랑채현재 채원병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만이 남아 있다. 배치를 보면 ㄷ자 형태인 사랑채가 안채를 감싸고 보호하는 듯하다. 정읍 김동수 가옥 안채와 흡사한 배치다. 따라서 이 집을 지을 때 김동수 가옥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전면 14칸 측면 6칸으로 된 ㄷ자 형태다. 동쪽 날개 부분은 안채 쪽으로 2×2칸이 더 돌출해 있었는데 조부가 철거해 현재 모습이 됐다. 철거 전에는 이 날개 부분에 우물과 연결하는 문이 있었다. 튀어나간 부분을 없애면서 우물로 가는 동선이 짧아져 문을 들어내고 광으로 개조했다. 그러나 현재 광을 다시 방으로 고쳐 관리인 거처로 활용한다. 사랑채는 14칸에 마당보다 2m 정도 높아 건물을 올려다봐야 한다. 긴 정면이 주는 위압감이 끝에 있는 누마루와 앞에 있는 구부러진 노송 老松으로 경감되긴 했어도 워낙 긴 정면과 높이로 상당히 권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랑채는 정면 중문을 중심으로 좌우 기능이 나뉜다. 동쪽은 안채에 부속된 방과 광 등이 배치된 안행랑채로 사용되고 서쪽은 손님을 위한 여러 방으로 구성됐다. 사랑채 핵심은 누마루다. 누마루가 다른 집처럼 권위적으로 높지는 않지만 주변을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누마루는 정면과 서 측면은 세살 분합문을 들어 열어 개방할 수 있도록 했지만 동쪽은 장식 없이 간략하게 만든 평난간만을 설치해 사시사철 안마당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동 측면 바로 앞에는 수석 壽石이 있고 옆에는 흐드러지게 휘어진 노송들이 배치돼 누마루에 앉아 보는 정원 풍광이 사뭇 정겹고 운치가 있다. 이러한 것을 의도해 정원을 구성하고 누마루 위치를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누마루에서 바라보는 풍광 역시 시원하다. 정면으로 국도가 높게 신설돼 시야를 가려 느낌이 많이 감소됐지만 과거에는 멀리 있는 전답 田畓과 산들이 바라보여 아주 시원한 시야를 제공했을 것이다. 김광언의 글을 보면 앞에 있는 오성산을 안산으로 했다는데 이제는 도로에 가려 그런 풍수적인 느낌을 받을 수 없어 아쉽다. 정면 7칸 반 측면 2칸 규모 안채. 서쪽으로부터 부엌 두 칸, 안방 두 칸, 대청 두 칸, 건넌방 한 칸, 퇴칸 한 칸으로 구성했다. 격식대로 정침 오른쪽인 안채 서쪽 언덕 뒤에 놓인 사당으로 상량문에는 1901년에 지었다고 한다. 마당에서 본 사랑채 입구. 마당보다 2m 가량 높아 위압감을 준다. 가세와 밀접 家勢 한 안채 방마다 들인 다락안채는 정면 7칸 반 측면 2칸 규모로 서쪽으로부터 부엌 두 칸, 안방 두 칸, 대청 두 칸, 건넌방 한 칸, 퇴칸 한 칸으로 구성됐다. 일반 집에서는 보기 힘든 두리기둥을 썼다. 아마도 당시 재력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이런 정도 편법은 가능했을 것이다. 구조를 보면 일반적으로 부엌이 좌측에 있는데 여기는 우측에 부엌을 뒀다. 가끔 우측에 부엌을 두는 경우가 있지만 그리 흔치 않다. 우물이 동쪽에 있었고 예전에는 장독대도 그 근처에 놓였다고 하는데 이런 관계로 볼 때 부엌 위치가 기능적이지 않다. 안채는 전면과 동 측면에 퇴칸을 뒀지만 후면은 툇마루만 배치했다. 또한 건넌방 측면에 퇴칸을 설치하고 앞쪽에는 퇴칸을 올려 누마루 형식으로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건넌방의 격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구조가 된 이유를 집주인은 안주인이 객실로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안채는 대청을 제외한 모든 방에 다락을 설치했다. 이렇게 다락이 많은 것은 가세家勢와 관계가 있다. 워낙 거부巨富였기 때문에 물품을 쟁여놓을 곳도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당은 격식대로 정침 오른쪽인 안채 서쪽 언덕 위에 놓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면에 퇴칸을 가진 전형적인 사당 구조를 지녔다. 상량문에는 1901년에 지었다고 하는데 목구조 형식에서 다른 사당들과는 다른 점이 보인다. 민도리집으로 사당 전면에 돌출된 보아지를 익공처럼 조각해 만들었다. 보편적인 익공은 날렵하고 끝이 뾰족한 반면 이곳은 마치 닭 볏을 거꾸로 놓은 듯 그리 섬세하거나 세련된 모습이 아니다. 지붕은 양쪽으로 꽤나 돌출시킨 맞배지붕이다. 그러나 도리를 돌출 길이에 맞게 큰 부재로 만들지 못해 도리에 활주를 세워 처짐을 방지토록 했다. 또한 안쪽 사당 칸 도리 부재를 자연 그대로 휘어진 것을 사용했는데 휘어진 상태가 너무 심해 이 역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다. 상인방을 뜬창방 형식으로 도리에서 떨어트려 설치하고 그 사이를 휘어진 높이에 맞춰 머름동자와 비슷한 동자기둥을 세운 후 청판을 휘어진 형태대로 잘라 끼워 넣었다. 만일 상방을 도리와 붙여 만들었다면 마감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일부러 더 떨어트려 설치함으로써 보다 고급스러운 마감이 탄생했다. 사랑채 핵심인 누마루. 다른 집처럼 권위적으로 높진 않지만 조망하기에 충분한 높이다. 과거에는 저 멀리 전답이 보여 시원한 조망을 자랑했을 것이다. 집 뒤편 전경으로 울창한 대나무 숲이 포위하듯 집을 감싼다. 현재는 집 입구가 된 사랑채는 전면 14칸 측면 6칸으로 ㄷ자 형태다. 동쪽 날개 부분인 안채 쪽으로 2×2칸이 더 돌출돼 있었는데 조부가 철거해 현재 모습이 됐다. 사랑채 동쪽으로 안채에 부속된 방과 광 등이 배치된 안 사랑채로 쓰인다. 안채 뒤 장독대와 그 건너에 위치한 사당. 하루빨리 제거해야 할 마당 이끼집을 돌아보며 아쉬운 것은 현재 마당에 잔뜩 껴있는 이끼다. 안채에서 전반적으로 습한 기운이 심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북향집이라 해도 이렇게 마당에 이끼가 끼어있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집주인 말로는 예전에도 이끼가 끼긴 했어도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은 건물을 수리하면서 수로가 변경돼 일어난 현상이라고 한다. 덧붙이자면 앞에 새로 생긴 도로도 공기 순환을 방해하는 데 일조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도로를 직선화하고 경사를 최소화하기 위해 도로가 예전 지반 높이보다 10m 이상 높아졌다. 커다란 장벽이 생긴 것이다. 이 장벽이 바람길을 막아 공기의 자연스러운 순환을 막았을 수도 있다. 바람이 통하지 않아 공기가 정체되면서 집의 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자 마당에 이끼가 낀 것이다. 아무리 북향집이라고 해도 그 나름 집을 짓는 지혜가 있다. 그 지혜 때문에 북향집이 현재까지 존속돼 왔다. 그러던 집이 최근 급격한 변화가 온 것은 분명히 주변 환경 변화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잘 살펴 하루빨리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이 집은 급속히 퇴락하고 말 것이다. 사랑채 뒤편.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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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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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위엄과 권위가 가세를 대변하는 군산 채원병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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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육아, 놀이 한 번에 해결한 평창동 방주 주택
- 일과 육아.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 감독인 남편과 한의사인 아내가 올해 10살, 8살, 4살 된 아이들을 일하면서 함께 돌보기 위해 집을 짓기로 했다. 위치는 여러 여건을 고려해 서울 평창동으로 결정했다. 주택은 경사면과 부정형인 대지의 단점을 역으로 이용해 수직 공간을 확보하고 입체적인 형태로 만들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글 사진 백홍기 기자취재협조 건축주 부부※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인터뷰와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OUSE NOTEDATA위치 서울 종로구 평창동지역/지구 자연경관지구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대지면적 170.35㎡(51.53평)건축면적 67.59㎡(20.45평)건폐율 39.44%연면적260.60㎡(78.83평)지하 74.77㎡(22.62평)1층 57.61㎡(17.43평)2층 63.69㎡(19.27평)3층 64.53㎡(19.52평)다락 8.34㎡(2.52평)용적률 109.09%설계기간 2020년 2월~6월공사기간 2020년 10월~2021년 7월건축비용 6억 원(3.3㎡당 760만 원)토목비용 1억 원(지하 굴토 등)설계 핵건축사사무소 010-5229-8715시공 호보종합건설 MATERIAL외부마감지붕 - 티타늄징크벽 - 라임스톤내부마감천장 -페인트벽 - 페인트바닥 - 온돌마루단열재지붕 - 압출법 단열재 T200외단열 - 열 반사 단열재계단실디딤판 - 포천석난간 - 철제난간창호 시스템창호현관 갑종 방화문주방가구 한샘위생기구 대림바스난방기구 가스보일러(경동) 지하 1층에 있는 한의원은 정원으로 꾸민 선큰과 연결된다. 백혜기 원장은 “일하면서 감상하는 정원 풍경이 일품”이라고 자랑한다. 한의원이 쉬는 날엔 1층 대기실이 가족의 공간으로 변한다. 고가구와 100년이 넘은 조명은 부부가 오래전부터 하나하나 모은 것들이다. 선큰 정원은 남편이 공들여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몄다. 벽에 그려진 산수화도 남편의 작품이다. 평일엔 한의원 방문객의 쉼터가 되는 선큰 정원은 한의원이 쉬는 날엔 가족의 휴식과 놀이 공간이 된다. 날렵하게 돌출된 상층부는 2층 거실이다. 아이들 정서에 좋은 환경. 이것이 부부가 집을 짓겠다고 마음먹은 동기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게 힘들어졌어요. 집 안에 아이들 놀이 공간을 만들기도 어렵고, 요즘 시기에 밖에 나가 노는 것도 마음에 걸렸어요. 아이들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니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이들을 위한 집짓기 프로젝트인 만큼 입지 조건에서 교육 환경이 중요했다. 그다음 조건으로 여행을 좋아해 교통이 편리한 지역과 공항하고 접근성이 좋을 것을 꼽았다. 이러한 기준을 세우고 경기도 신도시 일대와 서울을 둘러보다 평창동에 자리 잡게 됐다. “아무래도 경기도보다 서울이 교통이 편리하고 일하기도 좋을 거 같았어요. 평창동은 특히 박물관과 미술관이 주변에 많아 문화생활을 즐기기에 좋고 북한산도 가깝다는 게 마음에 들었어요.” 주변 환경과 입지가 마음에 들어 매입한 대지는 오거리 코너에 삼각형 모양이며 남저북고로 고저 차가 2m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집 짓기에 불리한 조건이지만, 부부는 오히려 삼각형 부지를 보고 배 모양의 재미난 집을 떠올렸다고 한다. 설계 의뢰에 앞서 아내가 직접 3D 도면을 준비할 정도로 기대도 컸다. 거실은 빛과 풍경을 끌어들이기 위해 벽면마다 넓은 창을 냈다. 인테리어는 밝게 연출하고 기존에 사용해오던 고가구와 소품을 배치했다. 거실과 일체형으로 구성한 주방은 팬트리 수납공간과 마주하듯이 배치해 공간을 효율적으로 계획했다. 100년이 넘은 식탁 조명 아래 식탁은 없다. 아이들이 넓은 거실에서 놀 수 있게 설치하지 않았다. 책장으로 활용한 계단실. 주거 공간에 일터 더하기처음부터 주거 공간에 한의원을 개업할 생각은 없었다. 집 근처에 알아보려 했지만, 적당한 위치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 새로운 대안을 떠올린 것이다 “아이들이 어려 일터와 주거 공간이 같이 있으면 아이들 정서에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환자 내원이 적은 평일 낮에는 틈틈이 아이들을 돌볼 시간도 있을 거 같았어요. 막상 개원하고 보니 당시 예상이 맞았고 선택을 잘한 거 같아요.” 건물 규모는 부지가 넓지 않아 건폐율과 용적률을 최대한 활용해 3층으로 계획했었다. 그래도 다섯 가족이 생활하기엔 공간이 부족할 거 같아 지하를 더했다. 이때만 해도 도면에 한의원은 없었다. 설계를 마치고 건물이 제 모습을 갖춰 갈 즈음 계획이 변경되면서 주택 용도변경을 거쳐 이곳에 한의원을 개업하기로 한 것이다. 한의원 개업에 따라 일부 공간 수정이 필요했다. 2층과 3층은 예정대로 거실과 침실로 사용하고, 다목적실과 가족실로 계획한 지하 1층과 지상 1층을 한의원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지하 1층이 가장 넓어 한의원 메인 공간으로 꾸미고, 1층을 손님 대기실로 만들었어요. 손님 대기실은 휴일엔 가족실 겸 응접실로 사용해요. 이 건물의 얼굴이기도 하고 가족 모임 공간이기도 해서 편안하면서 이국적인 분위기로 가장 공들여 꾸몄어요. 종종 이곳에서 차를 마시는데 카페나 레스토랑에 온 듯한 기분이 들어요. 코로나 시대에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집 안에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매우 뿌듯하고 즐거워요.” 안방 정면은 뱃머리처럼 날렵하게 디자인하고 넓은 창을 양쪽에 설치해 먼 북악산 풍경까지 끌어들였다. 개방감을 주기 위해 천장을 높이고 내부도 흰색을 사용했다. 2층 복도에서 본 안방. 안방 입구에 공용 화장실이 있다. 안방과 면하고 있는 자녀 방. 안방 뒤쪽에 있는 아들 방은 폭이 좁아 2층 침대를 설치하고 하부에 책상을 마련했다. 욕실은 편안하고 깔끔한 느낌으로 만들었다. 즐거운 추억이 쌓여가는 공간주택 입면은 배를 형상화해 날렵하다. 매스를 부정형으로 쌓아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띠기도 한다. “평범한 형태보다 디자인적으로 예쁘고 건축학적으로도 멋있는 건물을 원했어요. 특히, 3층 정면에 뱃머리 모양으로 배치한 안방은 넓은 창을 내 평창동과 북악산 그리고 하늘을 조망할 수 있게 만들고 시원한 공간감을 주기 위해 천장을 높였어요.” 디자인만큼 정원을 꾸미는 데도 많은 애정을 쏟았다. “정원은 가장 마지막에 남편이 완성한 곳이에요. 집을 예쁘게 만들어 주는 정원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힐링을 주는 공간이에요. 가족과 이곳에서 아침 식사나 티타임을 즐기고 꽃도 가꾸면서 우리만의 추억을 쌓고 있어요.” ‘준공’이 집의 완성은 아니다. 주거 공간의 완성은 입주 후부터 시작된다. 가족의 삶에 맞춰 가구를 배치하고 공간을 꾸미고, 생활 리듬에 맞춰 공간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서서히 한 가족의 삶에 맞는 집으로 완성된다. 이 주택은 식탁 자리는 있으나 식당이 없다. 가족을 위한 침실은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이 머무는 공간이 됐다. “아이들하고 주로 2층 거실에서 생활하고 거실에서 다 같이 자요. 식당은 그때그때 달라져요. 한의원이 쉬는 날에는 1층이나 정원이 식당이 돼요. 남편 작업실이 있는 다락 옆에 작은 옥상을 마련했는데, 날 좋을 땐 그곳이 우리의 식당이에요.” 주말의 행복을 여행지에서 찾았던 부부는 집을 짓고부터 집 안에서 찾았다고 한다. 집에서 텐트 치고 야영하고, 재미난 파티를 열고, 천장이 높은 방에서 드론 날리고, 정원에서 난로 켜놓고 별을 감상하고, 넓은 욕조에 물 받아 물놀이하다 보면 하루하루가 지루할 틈이 없다고 한다. “우리만의 집을 짓고, 꿈을 품고 살고 있습니다.” 각 층을 엇갈리게 적층하고 햇빛에 의한 음영까지 더해져 시점에 따라 더욱 다양한 표정을 보여준다. 현관 진입로에 본 주택 모습. 주택 정면에는 지하 선큰으로 진입하는 작은 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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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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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육아, 놀이 한 번에 해결한 평창동 방주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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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북동향으로 문을 낸 까닭은 서산 김기현 가옥
- 서산은 충청도 서해안 지역의 중심 도시로 《택리지》에 좋은 터전으로 소개할 만큼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이다. 김기현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99호)은 서산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경주 김씨 집성촌인 음암면 유계리에 위치한다. 마을 입구에 “한다리 경주 김씨 세거지 慶州金氏世勢居地”라고 쓰여있듯이 15대 조인 김연이 이곳에 입향 入鄕 한 후 누대로 살고 있다. 이곳에서 13대 조 단구자 丹丘子 김적 때부터 가세를 일으킨 후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를 비롯해 37명의 정승을 배출한 명문 집안이 되었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기자 김기현 가옥의 구조는 매우 흥미롭다. 집의 좌향 坐向은 남동동향이고 대문은 북북동향이다. 대문은 담의 모서리에 위치하고 행랑채가 없는 한 칸이며, 대문 지붕은 우진각으로 다른 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다. 속설에 ‘대문을 북쪽으로 내면 집안에 액운이 낀다’고 하여 북쪽에 대문을 두는 예는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문을 북쪽으로 낸 것은 풍수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주인은 물길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기에 그 기운을 받고자 함이 아닌가 하고 추정했다. 또한 행랑채 중 가운데 한 칸의 초석이 다른 곳보다 높다면서 아마도 그곳이 문의 원래 위치였던 것 같다고 했다. 북쪽에 낸 대문으로 들어서면 사랑채의 뒷면이 나오기에 마치 뒷문으로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든다. 평지 마을에 자리 잡은 고택으로 ‘巳’자형 평면에 ‘一’자 행랑채를 곁들여 전체적으로 ‘口’자형을 이룬다. 건축관이 남녀유별에서 편리성으로사랑채는 안채의 좌향과 달리 남쪽을 향한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와 안채를 평행으로 배치하는 방식하고 차이가 나는데, 이는 향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사랑채 전면에는 차양칸이 있는데, 이것은 창덕궁 연경당, 강릉 선교장의 사랑채인 열화당 그리고 전남 녹우당의 사랑채 등 모두 4곳에 설치돼 있다. 4곳 모두 차양칸을 설치한 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차양칸 설치 시기에 집에 많은 변화가 있은 듯하다. 차양칸도 그렇지만 사랑채나 안채를 보면 툇마루에 비가 들이치는 불편을 해소하고자 지붕 끝에 함석으로 부연(며느리서까래)과 홈통을 설치했다. 그로 인해 늘어난 길이만큼 기단을 늘여 놓았다. 안채는 충청도 지역에서는 흔치 않은 완전한 ‘口’자 구조다. 이러한 구조는 자연환경으로 생긴 경상도 지역과 달리 유교적 남녀유별 때문인 듯하다. 안채 중문에 이르는 길은 대문에서 사랑채 뒤를 거쳐야 하므로 다른 집의 중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옆에 중문과 직각으로 뒷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주인은 원래 담만 있었는데 후에 생겼다고 한다. 생활이 변화면서 남녀유별의 관념보다는 편리성을 우선했던 것이다. 안채는 매우 튼실해 보인다. 건축 시기를 19세기로 추정하는데 당시 목재 사정을 감안할 때 잘 지은 집이다. 목재를 넉넉하게 사용했기에 시각적으로도 매우 안정적이다. 사랑채도 마찬가지다. 정읍 김동수 가옥(1784년)보다 늦게 지었음에도 나무를 넉넉하게 사용한 것으로 보아 집 지을 당시 재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안채의 기둥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다른 집의 대들보로 쓰일 목재라고 할 만하다. 사랑채의 기둥도 안채보다 작지만 다른 집에 비하면 넉넉하게 사용한 편이다. 사랑마당 동쪽에는 안채 축에 맞춰 광채를 배치하고 사랑채 북쪽에는 사랑채 축에 맞춰 세로로 여러 가지 시설물을 배열했다. 사랑채 구조는 안채보다 간결하게 처리했는데 사랑 남쪽에 만들어진 차양遮陽은 반대로 화려하다. 사랑마당에 면한 행랑채는 맞걸이 모임지붕으로서 7칸 ‘一’자 집이다. 가운데에 부엌을 두고 남쪽에 행랑방, 북쪽에 광을 두었으며 대문간은 단칸이고 모임지붕이다. 안채의 대청과 안방이 바뀌어김기현 가옥은 건축 시기와 그리고 개조 시기에 의문이 많이 든다. 안채는 한 번 개조했음이 분명한데, 가장 큰 변화는 안방과 대청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안방과 대청의 종도리(마룻대)를 구성하는 방법에서 그 차이가 현격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종도리는 장혀(도리를 받는 부재)를 이중으로 설치하고 아래 장혀를 행공(주심포에 있어 외목도리와 장혀를 받치는 첨차)으로 받쳤는데 매우 화려하다. 반면 현재 대청으로 사용하는 부분의 종도리는 단지 장혀로만 받치고 있다. 일반적인 사례와는 달리 구조체의 격이 반자를 하여 볼 수 없는 안방 쪽이 높다는 것이다. 대들보의 구성 방식도 차이를 보인다. 안채는 두 칸 규모로 앞에 반 칸의 퇴가 있는 전퇴집이다. 현 대청의 대들보는 고주 高柱(높은기둥)까지만 있고 퇴칸 부분은 퇴보로 처리했다. 그러나 현 안방은 퇴보까지 한 개의 부재로 처리했다. 또한 안방의 대들보는 잘 다듬어진 반면 대청의 대들보는 상대적으로 덜 다듬어져 있다. 이러한 사실로 유추할 때 안방의 천장 가구는 보이기 위해 만들었음을 뜻한다. 또한 대들보를 퇴칸까지 내는 방법은 대개 대청을 넓게 사용하기 위함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어느 시기인가 안채의 대청과 안방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안채의 부엌도 개조한 흔적이 있다. 부엌은 6칸으로 다른 집에 비해 두세 배 큰 규모다. 그러나 밖에서 부엌을 보면 3칸은 기존 지붕 밑에 눈썹지붕을 설치해 내어 달았음을 알 수 있다. 평면을 보아도 돌출된 부엌 부분이 기단을 잠식하고 있다. 원래의 기단을 그대로 두고 부엌만 증설했기에 이러한 모습으로 변형된 것이다. 개조 시기는 문양 등을 고려할 때 집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한 1900년 전후라고 본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산 윤보선 생가는 1904년에 지었는데 사랑채에 예전 왕족의 집에서만 보이던 물익공(익공은 첨차 위에 소로와 함께 얹는 짧게 아로새긴 나무로, 끝이 새 날개 모양처럼 뾰족하지 않고 둥그스름하면 물익공이라 한다)을 사용했다. 그리고 문화재청 사이트의 사랑채 사진을 보면, 누마루 하부와 굴뚝에 붉은 벽돌을 썼는데 이는 1892년 최초의 성당인 약현성당이 지어진 이후다. 윤보선 생가도 벽체와 굴뚝에 붉은 벽돌을 사용했다. 재료나 양식을 아산 윤보선 생가와 비교하면 김기현 가옥은 비슷한 시기에 고쳐 지은 것으로 보인다. ‘口’자인 안채는 몸채인 가로칸만 6칸 전퇴로하고 나머지는 맞걸이 집이다. 안채 가로간과 사랑채는 1고주 5량이며 나머지는 모두 3량 구조다. 안채는 납도리로 모를 굴렸으며 장혀로 받치고 있다. 집주인의 한옥 사랑과 자부심지금도 이 집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주인은 당신의 손으로 집을 조금씩 고쳐 나가는데 한편으로 혹시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게 아닌지 하고 걱정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집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편해서 살지 못하는 집보다는 약간 변형해 사람이 살게 한 집이 보존하는데 훨씬 더 유용하다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이 집을 둘러보고 돌아와 문화재청의 사진과 기타 수리 전에 찍은 사진과 비교하면서 집 수리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다. 여러 곳에서 원형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흔적이 보였다. 이 집을 수리할 때 찾아온 몇몇 설계자도 집주인과 대화가 없었다고 한다. 설계에서 집주인과의 대화는 모든 것을 결정하므로 제일 중요하다. 특히 문화재 복원 수리에 있어 집주인 더욱이 나이 많은 집주인의 증언은 가장 중요한 단초가 된다. 이것을 하지 않은 설계자는 그 원칙을 저버린 셈이다. 현재 집주인은 이곳에서 일주일에 5일 정도를 지내는데, 이 집을 왜 더 일찍 돌아보지 못했는가 후회한다고. 최근 한옥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조금 더 일찍 관심을 가졌다면 지금처럼 집이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자신의 집에 대해 깊은 자부심을 가졌다. 당신의 자식들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 집을 관리하기 힘들 것 같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집은 한옥을 사랑하고 관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넘기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오죽하면 안주인이 한옥과 연애하고 있다고 했을까. 안채 뒷마당에서 바라본 큰 집으로 정순왕후 생가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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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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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북동향으로 문을 낸 까닭은 서산 김기현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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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물고기가 하늘로 뛰고 학이 날아다니는 괴산 김기응 가옥
- 김기응 가옥(중요민속자료 136호)은 현재 살고 있는 종부의 시할아버지인 김항연 金恒然이 1910년 지은 집이다. 고종 때 공조참판을 지낸 김향연은 경술국치 庚戌國恥로 조선이 무너지자 이곳으로 낙향했다. 고향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소수면이다. 낙향 이전부터 이곳 땅을 많이 소유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면 땅 때문에 이곳에 정착한 것 같지는 않다. 괴산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집터 앞에 넓은 들이 펼쳐져 조망이 시원스럽다. 이러한 풍광 때문에 고향이 아닌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집은 원래 관리인이 살던 안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을 다시 지었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기자 충북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의 김기응 가옥. 김기응 가옥의 뒷산에는 수백 년 된 장송 長松이 우거져 있다. 종부 宗婦(종가의 맏며느리)는 “이전에는 나무가 더 많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목재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으로 변했다. 1915년에 촬영한 해인사 전경 사진에서도 주변에는 나무가 울창하지만 조금 떨어진 뒷산은 민둥산에 가깝다. 그만큼 전국의 산이 헐벗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많은 양반 집안 [班家]에서 뒷산의 나무를 잘 보존한 것은 풍수적 의미가 강하다. 집의 풍수적 환경을 보전하고자 뒷산이나 비보 裨補(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움) 적 의미가 있는 곳의 나무를 잘 가꾸고 보존한 것이다. 이 집은 이러한 뒷동산을 배경으로 배치돼 있다. 대지가 급하지는 않지만 뒷동산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이 완만한 경사 때문에 집 안 가득 햇볕이 골고루 들어온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으로 공간 구성이 독특하다. 솟을대문 양쪽으로 늘어선 행랑채는 좌우가 ㄱ자로 꺾여 바깥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궁궐에서나 봄직한 꽃담김기응 가옥은 여느 고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안채에 이르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대문으로 들어서면 사랑채가 나오고, 그 옆의 중문을 통해 곧바로 안채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 가옥은 다층 구조라 사랑채 옆의 중문과 안행랑채에 있는 문을 지나야만 안채로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복잡한 이유는 조선 후기 들어 심화된 남녀유별의 관념을 반영한 것이다. 개화기 서구 문물이 물밀듯 밀어닥치자, 이를 적극 받아들이려는 흐름과 보수화 경향이 함께 나타났다. 보수화 경향은 그 정도를 넘어 수구화 守舊化 됐는데, 그 경향이 이 집에서는 더욱 심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둘째는 목재 수급이 원활치 않던 당시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 점이다. 새로 지은 건물 중 중요한 사랑채를 제외하고 행랑채의 재목은 그리 넉넉지 못하다. 행랑채의 서까래는 너무 가늘어 보기에도 불안할 정도다. 종부는 “재산 분배와 사업 실패로 가세 家勢가 기울긴 했지만 집 지을 당시에는 1500석을 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서는 꽤 알아주던 부자였다. 그럼에도 목재를 넉넉하게 쓰지 못할 정도로 그 사정이 열악했던 것이다. 셋째는 특징이자,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사랑채 뒤뜰의 담이다. 사랑채 뒤편은 안채의 행랑채와 마주하는데 그 간격이 넓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사랑채에서 마주 보이는 행랑채 담을 꽃담으로 아름답게 치장했다. 규모가 작을 뿐이지, 그 품격은 마치 궁궐의 꽃 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양쪽은 卍 자 문양을, 가운데는 팔각의 무시무종 無始無終(시작도 끝도 없다) 문양을 채워 넣었는데 네 귀퉁이 두 군데는 박쥐 문양을, 두 군데에는 당초 문양이다. 이러한 꽃 담을 일반 집에서 설치한다는 것은 과거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다. 19세기 말 사회의 신분 질서가 와해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 가옥을 지은 계기도 조선이 망하자 낙향한 것 때문이니 신분의 상징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사랑채는 ㄱ자형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납도리집이다. 바깥마당에서 바라본 중문. 사랑 행랑채에서 바라본 사랑채와 안행랑채. 장독대 뒤 울타리 밖은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넉넉한 마음이 혼란기 때 집을 지켜사랑채 선자서까래의 짜임이 재밌다. 추녀 주위의 서까래 짜임은 세 종류다. 선자, 엇선자, 평연으로 구분되는데, 우리나라 기와집에서는 선자서까래가 주류를 이루고 수준이 떨어지는 집에서 엇선자를 사용했다. 평연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가옥의 사랑채 추녀 밖에서 보이는 앞쪽은 선자서까래로, 외부에서 안 보이는 뒤쪽은 엇선자다. 이렇게 두 가지 방식을 혼용한 경우는 이곳에서 처음 보았다. 이러한 모습은 외부에도 그대로 나타나 부연의 짜임이 낯설다. 19세기 초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안채는 튼 ㅁ자형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 지은 사랑채나 행랑채하고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부엌은 서쪽 4칸의 규모로 다른 집보다 크다. 부엌만으로도 이 집안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을 것이다. 안방은 2칸인데 모두 남쪽에 면해 햇볕이 잘 들어 분위기가 밝고 명랑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 혼란기에 집을 유지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종부는 “종손께서 손이 커서 주변에 베푸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며 “산에서 내려온 공비들도 많이 베푼 집이라 하여 옷가지와 먹을 것만을 갖고 갔다”고 한다. 그렇기에 해방 혼란기와 한국전쟁 통에도 집이 고스란히 남았던 것이다. 종부에게 “해방 후 토지개혁 때 많은 땅을 강제로 수용당해 가슴 아프지 않았는가” 했더니, “가난한 사람이 잘 살게 됐는데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닌가” 하고 되묻는다. 부부가 일심동체라더니 마음 씀씀이까지 한결같은 모습이다. 종부는 우리가 집을 돌아보는 내내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많은 가보 家寶를 도둑맞았다”면서 “이제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그만큼 불신이 깊어 보였다. 우리가 대문을 벗어난 후에도 한참을 문가에서 서성였다. 과연 누가 이러한 불신을 노종부에게 남겨 주었는가. 우리의 욕심이 순박한 노종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가 아쉽기만 하다. 김기응 가옥의 사랑채에는 어약해중 천魚躍海中天과 비학루 飛鶴樓라는 편액 扁額이 걸려 있다. 어약해중천은 물고기가 바다 가운데에서 뛰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그야말로 인재가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펴는 모습을 의미한다. 비학루는 학이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모습을 이야기한다. 이 집을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도 어약해중천이라는 문구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퇴락해 가는 집을 노종부와 차종부 단둘만이 지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인재가 나와 가문을 살릴 수는 없을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집을 짓고 있다. 과연 그 가운데서 어약해중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단지 돈만 있을 뿐 아담한 정취나 고고한 품격조차 찾을 수 없는데……. 안채로 들어서는 문간. 사랑채 후원은 좁은 공간으로 답답해 보여 내담 벽을 각종 문양과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ㄷ자형의 안채는 30여 평 규모로 정면에 부엌, 안방, 대청, 뒷방을 일렬로 배치하고 꺾어진 곳에 건넌방과 부엌을 두었다. 안채 뒤뜰.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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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물고기가 하늘로 뛰고 학이 날아다니는 괴산 김기응 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