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인테리어Home >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실시간뉴스
상가주택 외
-
-
도시 가로와 경계가 유연한 상가주택 서울 양재 보이드 라인 Void Line
- 보이드 라인은 버려지기 쉬운 도시 필지 간, 도시 가로와의 경계가 시각적, 공간적으로 경험되는 유연한 관계의 장으로 바꾸는 제안이다. 경계는 안과 밖을 구분하기보다는 그 사이의 매개체 interface로서 기능한다. 글 홍만식(리슈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사진 김재윤 작가※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인터뷰와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OUSE NOTEDATA위치 서울 서초구 양재동지역/지구 제2종일반주거지역, 제1종지구단위계획구역(양재택지)용도 제2종근린생활시설, 단독주택(다가구주택)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대지면적 253.60㎡(76.71평)건축면적 151.10㎡(45.71평)건폐율 59.58%연면적645.26㎡(195.19평)용적률산정용 507.06㎡(153.38평)지하 1층 138.20㎡(41.81평)1층 100.59㎡(30.43평)2층 96.41㎡(29.16평)3층 105.23㎡(31.83평)4층 101.60㎡(30.73평)5층 103.23㎡(31.23평)용적률 199.94%설계기간 2018년 11월~2019년 5월공사기간 2019년 5월~2020년 5월설계 리슈건축사사무소(홍만식, 임도영)시공 예지인종합건설(전문태, 이상웅) MATERIAL외부마감지붕 - 징크벽 - 시멘트벽돌(두라스텍)바닥 - 화강석(사비석)근생내부마감천장 - 콘크리트면처리벽 - 콘크리트면처리바닥 - 에폭시코팅주택내부마감천장 - 도장 + 벽지벽 - 도장 + 벽지바닥 - 대리석 복합타일계단실디딤판 자재 - 화강석(사비석)계단 난간 - 평철난간단열재 지붕 - 경질우레탄보드외단열 - 경질우레탄보드내단열 - 아이소핑크창호 알루미늄창호(LX하우시스) 북동 측에서 바라본 조감 뷰. 측면에서 보이는 보이드 라인. 근린 생활가로를 이루던 도시한옥 등 단층 건물 대부분은 1900년대 초중반에 지어져 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건폐율 60%, 용적률 150~250%의 건물들로 채워졌다. 그만큼 도시의 밀도는 높아졌고, 재료와 구법들은 빠르게 변화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법적 기준에 따라 쌓아 올린 건물들은 채광(남향)이나 환기, 조망 등 기본적인 내부 공간의 질적 수준을 갖추지 못했으며, 방치된 외부공간으로 인해 가로 환경은 점차 악화되어갔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건축의 유형들은 부분적으로 남아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가로와의 관계, 외부공간의 활용과 향의 문제 등 도시 상업가로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고민과 해법들은 지금까지 도시의 건축이 해결해야 했던 오래된 과제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보다 더 복합적인 조건 아래에서 수행될 뿐이다. .주 출입 계단부. 1층 근생내부에서 본 외부. 맥락과 조건북측이 전면도로인 대지이고, 저층부 상권이 잘 형성된 이면 가로에 접해 있다. 건축주 남매는 상층부 4,5개 층에 각각 거주하고자 했다. 지하와 1,2층은 근린생활시설로 3층은 임대 원룸으로 구성하기를 원했다. 디자인이 잘 되어 임대시장에서 경쟁력이 있고, 그와 동시에 거주환경이 좋은 건물이기를 원했다. 북측 가로에서 바라본 모습. 남측 배면부 전경 근생 계단실의 공간감. 근생 내부에서 보이는 도시의 풍경. Sliding Mass : 비틀어지는 도시의 좌향 坐向입체적인 관계의 서로 다른 프로그램의 매스는 도시 가로와의 관계를 만들면서 슬라이딩 되고, 이접된 형태를 만든다. 그 속에서 경험되는 주체의 위치는 외부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유동적으로 변화된다. 도심 속에서 건축의 좌향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각층은 지면과의 거리에 따라 서로 다른 정면을 갖는다. 아래에서는 길과 사람을, 위에서는 빛과 풍경을 우선으로 받아들인다. 위와 아래는 하나의 몸이지만, 허리를 비틀고 앉은 것처럼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도시에서 건축을 경험하는 주체의 위치는 유동적으로 설정된다. 남측의 자연채광과 열린 조망을 바라보는 거실. 안과 밖의 두터운 경계 공간. 주인세대의 중정과 공간감 Void Line : 소비 消費 되는 표층의 두터움수평적으로 구성된 보이드 라인은 다양한 깊이를 가진 경계들의 밴드로 구성되어 있다. 두터운 표층의 개념은 도시 필지들 사이와 도시가로 경계와 관계에 대한 건축적 제안이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건축은 다채로운 경계를 지니고, 그 사이에 위치한 공간들은 안과 밖을 오가며 둘의 거리감을 중재한다. 보이드 라인은 버려지기 쉬운 도시 필지 간, 도시 가로와의 경계가 시각적, 공간적으로 경험되는 유연한 관계의 장으로 바꾸는 제안이다. 경계는 이제 안과 밖을 구분하기보다는 그 사이의 매개체 interface로서 기능한다. 두 개층의 주거 영역이 서로 소통하는 중정. 수직적으로 소통되는 복층 거실과 다락. Vertical Void : 버려지지 않는 공동 共同의 여백흐트러진 형태와 적층 된 매스들은 계단을 비롯한 동선과 중정에 의해 관통되며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수직 보이드는 프로그램 간의 시각적, 공간적 소통의 장치로서 사용자들은 이를 통해 공동의 경험을 만들어 나간다. 건폐율로 채우고 남겨진 땅은 사용되지 않는 채로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 건축 내부로 끌어들여 가꿔질 때 비로소 남겨진 땅은 건축의 여백으로 빛과 바람이 통하는 누군가의 발길과 이야기가 머무는 자리로 쓰일 수 있다. 건폐율은 채우기 위한 법규 regulation가 아니라 여백을 만드는 규율 discipline이다. 시각적, 공간적 소통의 장치로서의 수직 보이드. 길과 보행자를 향해 열린 저층부 상업 임대공간. 홍만식(리슈건축사사무소 대표)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후 원도시건축과 구간건축, 에이텍건축에서 실무를 쌓았다. 2006년 디자인과 디벨럽(Design & Develop)이 합쳐진 리슈건축을 설립했다. 현재까지 ‘공존을 위한 병치’, ‘사이 존재로서의 건축’ 등의 질문을 던지며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에서 겸임교수(2012~2017)로도 역임했다. 2013년 대한민국 신인건축사 대상, 최우수상(국토교통부 장관상) 등 다수를 수상했다. 건축가임도영(Lim Do Young) 부소장임도영은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였고, 엑토건축에서 실무를 쌓았다. 2016년에 리슈에 합류하여 현재까지 함께 하고 있다.
-
-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
도시 가로와 경계가 유연한 상가주택 서울 양재 보이드 라인 Void Line
-
-
고택을 찾아서, 개방감과 폐쇄감을 한눈에 음성 김주태 가옥
- 약 300년 전에 이익이 세운 집이라고 전하지만, 안채는 19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건물에 적힌 상량문에 따르면 1901년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외부로 개방된 바깥마당에 一 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그 뒤편 담을 경계로 T자형 구조의 안채가 있다. 이 가옥은 공간의 짜임새가 인상적이며 아름답다. 특히 중문인 일각문을 통해 안마당에 이르고 부엌을 거쳐 뒷마당에 출입하는 공간 구성은 이 집만의 특색이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기자 사랑채는 6칸 전퇴집으로 서쪽부터 대문간, 사랑부엌, 아래, 위 사랑방, 대청, 건넌방 순서로 배열했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의 김주태 가옥(중요민속자료 141호)은 넓은 들을 바라보는 언덕배기에 자리한다. 사랑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집이다. 언덕에 집을 짓다 보니 사랑채가 높은 석축 위에 지어져 언뜻 권위적임을 느끼게 된다. 사랑채 상량대에 대한광무오년신축이월초칠일상량 大韓光武五年辛丑二月初七日上梁이라는 묵서명이 있어 1901년에 지은 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채와는 건립에 시차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사랑채보다는 일찍 지은 것 같다. 사랑채의 부재 대부분이 옛집의 것을 재사용한 것에 비해 안채는 넉넉한 부재로 튼실하게 지었다. 조선 말에는 목재의 수급 사정이 나빠지면서 집을 지을 때 새로 가공한 목재보다는 기존의 집을 해체해 짓는 경향이 증가한다. 따라서 튼실한 재료로 지은 안채는 상대적으로 목재를 쉽게 구했던 조선 말기 이전에 지은 것이고, 사랑채는 1901년 다시 지으면서 다른 곳에서 해체한 집의 부재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솟을대문보다 높은 사랑채는 사대부가의 권위를 나타낸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놓인 골목김주태 가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배치에 있다. 전면에 사랑채를 ‘ㅡ’ 자로 배치하고, 그 중앙 부분을 기준으로 안채를 ‘丁’자형으로 배치했다(김주태 선생은 전체 모습을 ‘工’자형 집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사랑채와 안채는 낮은 벽으로 다시 구분해 내외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다. 대부분의 집은 중문이 내외를 구분하는 시설로는 마지막이다. 그러나 이 집은 중문 안에 별도의 담을 쌓고 안채로 들어가는 문까지 설치했다. 결국 내외를 위한 구조가 2중인 셈으로 내외의 강도를 한층 높여 놓았다. 19세기 말부터 조선은 개화라는 필연적인 변화를 맞는다. 이러한 변화에는 남녀유별의 문제도 포함된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무렵에 지은 집들 중에는 조선 중기보다 내외 문제를 강화한 집들을 볼 수 있다. 조선조 중기 이후 성리학적 남녀 관계가 보다 더 경직되어 가는 과정이 집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김주태 가옥이다. 그렇다 보니 사랑채에서 바라다보는 시원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안채는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사랑채에서 안채를 들여다보는 것을 막고자 가리개 형식의 담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집은 담으로 완전히 구분해 버렸다. 그래서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좁은 골목이 만들어졌다. 이 골목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매우 폐쇄적이라는 느낌을 들게 한다. 폐쇄적인 구분은 안채의 구성에서도 볼 수 있다. 안채는 안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진 중앙의 몸체를 중심으로 두 영역으로 나뉜다. 이러한 구성은 안주인이 안채 양쪽 모두를 관리하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중문 쪽 안채는 보다 공적인 장소로 활용되고 안쪽은 보다 개인적인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는 지붕과 평면 구성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중문과 연결된 마당 쪽에 있는 지붕은 다른 안채 건물의 지붕보다 높다. 모든 안채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대청도 두 칸 크기로 만들어져 안쪽에 있는 한 칸 규모의 대청보다 넓어 집 안 모임의 중심임을 드러내고 있다. 뒤쪽의 안채도 매우 폐쇄적이다. 공식적인 통로는 부엌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 이곳에 기거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안채의 감시 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아마도 안쪽의 안채는 다른 집의 별당처럼 쓰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김주태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의 소실이 기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는 아닐 것이다. 이곳에는 주로 시집가기 전의 여자들이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식으로 볼 때 김주태 가옥은 내외의 규범을 보다 강조했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채 마당에서 바라본 중문. 그 안에 별도의 담을 쌓고 안채로 들어가는 문까지 설치해 내외 구조를 2중으로 해놓았다. 높은 석축 위에 앉혀 언뜻 권위적인 느낌이 든다. 안채와 달리 사랑채의 부재 대부분이 옛집의 것을 재사용했다. 솟을대문보다 높은 사랑채와 두 개의 문이 집의 또 다른 특징은 대문이 두 곳에 있다는 것이다. 아주 큰 집에서 안채 출입을 위해 별도의 문을 두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 이 집의 사랑채에서 안채로 출입하는 문도 두 곳이다. 하나는 왼쪽에 있는 중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채 오른쪽의 협문이다. 김주태 선생은 안채를 출입할 때는 대부분 중문보다 협문을 사용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만 해도 사랑채 앞을 감히 지나지 못했다고 한다. 솟을대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사랑채 앞을 지나치게 되어 집 안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더욱이 사랑채는 솟을대문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어 드나드는 사람들이 느끼는 위압감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불편을 덜기 위해 별도의 문을 설치하고 안채로 드나드는 문도 사랑채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협문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지어진 솟을대문과 문 그리고 담은 최근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김주태 가옥에서 가장 편안한 곳은 사랑채다. 사랑채에 앉아 바라다보는 경관은 왜 이곳에 사랑채를 지었는지 느끼게 한다. 경사지에 높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지어진 사랑채는 처음부터 경관을 의식하고 지은 집이다. 앞에 펼쳐진 논과 그리고 그 너머 보이는 산들이 어우러져 보이는 경관은 매우 시원하고 아름답다. 사랑채에서 경관을 즐기다 보니 조선조에 이 집보다 훨씬 먼저 지은 집보다 한층 더 폐쇄적인 구조를 보이는 안채가 자꾸 대비된다. 김주태 가옥은 철저하게 사랑채를 위한 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조 말 보수화되어 버린 사회가 집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 집은 잘 보여주고 있다. 오랜만에 이 집을 다시 찾았다. 솟을대문을 복원한 것이 6년 전쯤이라고 하니 아마 그 이전에 김주태 가옥을 찾은 것 같다. 10년쯤 되지 않았나 싶다. 그때만 해도 집이 조금은 어수선해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매우 잘 관리돼 있어 너무 반가웠다. 안채, 사랑채 어느 곳 할 것 없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고 마당도 잘 관리돼 주인이 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옛 주인처럼 사랑채 마루에 앉아 편안하게 주변을 바라보도록 관리되는 집은 고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숙식을 제공하는 집 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반 집으로 이렇게 잘 관리되는 집은 영덕의 서석지 외에는 보지 못했다. 집이 잘 관리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긍심과 애정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 아끼는 마음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김주태 선생은 안채에 쓰인 대들보는 엄나무라고 한다. 엄나무는 오가피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인데 가시가 돋아 있어 예전에는 액막이용으로 많이 쓰였다. 이 집의 대들보로 엄나무를 쓴 것은 같은 액막이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그래서 집을 수리할 때 다른 것은 교체하더라도 대들보는 교체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같은 영산리에는 중요민속자료 143호로 지정된 서정우 가옥이 있다. 이 가옥은 김주태 가옥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마을에 있다. 두 집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에 같이 둘러보고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놓인 골목. 정면 7칸에 중앙 칸에서 앞쪽으로 5칸이 달린 트깅한 평면의 안채. 안채 앞에 담을 쌓아 사랑채와 구분함으로써 마당이 답답해 보인다. 안채는 수리 시 액막이용 엄나무 목재만 제외하고 모두 교체했다. 안채와 뒤 안채는 부엌으로 서로 통한다. 시집가기 전 여자들이 기거했던 뒤 안채는 매우 폐쇄적인 구조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
-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
고택을 찾아서, 개방감과 폐쇄감을 한눈에 음성 김주태 가옥
-
-
고택을 찾아서, 소박한 안채 화려한 별당, 이유는? - 예천 권 씨 종택
-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예천 권 씨 종택(중요민속자료 제201호,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166)은 초간 草澗 권문해 權文海(1534~1591) 선생 조부인 권오상 權五常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임진란 전에 지어진 집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권문해 선생 조부가 지었다고 한다면 이 집 건립 연도는 1500년대 초반일 것이다. 여러 곳에서 보이는 고식古式구조를 통해서도 이때쯤 지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뒤편에서 본 권 씨 종택 전경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이 인상적이다. 집은 ㅁ자형 안채 앞쪽 우측(집을 바라보았을 때)에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누마루 형식 별당이, 그 우측 뒤에 사당이 배치됐다. 집 구조를 보면 안채와 안 사랑채 구조가 완결형이고 안 사랑채 대청에서 별당채와 연결된 것으로 보아 별당은 나중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별당 평면은 단순하다. 정면 4칸 측면 2칸 평면에서 좌측 2칸이 온돌이고 나머지 6칸이 대청이다. 안채와는 툇마루로 연결됐으며 대청 전면은 전체를 개방하고 측면과 후면은 판장벽으로 막은 후 칸마다 양개판장문을 설치했다. 후면 가운데 칸에는 외짝 출입문을 설치해 뒤편 안채와 연결한 점이 이채롭다. 권 씨 종택은 권문해 선생 조부인 권오상 선생이 지었다고 하는데 1500년 대초반으로 추정된다. 소박한 안채에 비해 사치스러운 별당을 지닌 특이한 곳이다. 별당은 현재 보물로 지정돼 있다 조선 초 건축양식 간직한 별당별당이 보물(제457호)로 지정된 것은 조선 초기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건물과 가장 다른 점은 익공집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주택 대부분은 민도리집으로 이 집 안채 역시 민도리집으로 지어졌다. 왕실 사람이 사는 집이나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에서 익공을 채택하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 사가 私家에서 이렇게 익공을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초익공집은 분명하나 익공에 화려한 초각 草刻이 없다. 기둥 뒤쪽 보아지 부분에 초각이 있기는 하지만 앞에 드러나는 부분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러한 익공을 직절익공 直切翼供이라 하며 하회마을 충효당도 이와 같은 형태다. 어쨌든 이러한 익공집은 건립 시기가 시대 상황이 불안한 조선 초였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측면 가운데 기둥에는 직절익공을 사용하지 않고 물익공 형식으로 만들었다. 나중에 고치면서 이것만 남겨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주인 증언으로는 원래부터 그랬다고 한다. 다른 곳은 직절익공으로 하고 이곳만 물익공 형식으로 한 것은 내부에 있는 충량(한쪽 끝은 기둥머리에 짜이고 다른 쪽 끝은 들보 중간에 걸친 보)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충량 부분 익공은 안과 밖 형태가 물익공으로 같다. 대들보와 도리는 설치되는 높이가 달라 일반적으로 충량은 자연스럽게 꺾인 나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별당 충량은 대들보에 걸리는 부분을 수평으로 가공했다. 벽에 근접해 직각으로 꺾어 내리고 주두에서 다시 직각으로 꺾어 놓다 보니 다른 대들보처럼 보아지 부분을 길게 늘일 수가 없어 보아지를 짧은 물익공 형식으로 처리한 것이다. 보이는 왼쪽이 안채고 오른쪽이 별당이다. 별당채가 안사랑채 대청에서 연결된 것으로 보아 별당은 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평평하지만 화려한 행공첨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인 맹 씨 행단 행공 첨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별당 보아지. 다른 곳과 비교해 짧은 물익공으로 처리했다. 매우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충량 초각. 충량에서 보는 목수의 놀라운 눈썰미 이곳에 설치된 충량을 처음 보았을 때 나무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과 달라 놀랐다. 충량 위에는 팔작지붕 추녀 부분을 받치고자 외기도리를 설치하기에 상부에 걸리는 하중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곳에 설치된 충량 형태는 구조 개념으로 볼 때 합리적이지 않다. 가공된 형태가 목재 특성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목재는 목질 방향으로 강한 힘을 발휘한다. 목질에 직각 방향으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기에 충량을 직각으로 꺾어 가공한 것은 나무 특성을 무시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가 가공된 모습이 목질 방향을 거스르지 않고 있다. 충량으로 사용된 나무는 원래부터 거의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던 것이다. 나무를 선택해 가공한 목수 눈썰미가 놀랍다. 별당 대공과 종보를 받치는 동자주 또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다. 대공은 화반 형태로 아랫부분은 연꽃 하엽이 조각돼 있고 상부는 화반대공과 비슷한 모양이다. 또한 장혀를 첨차로 받치고 있는데 이것도 초각이 돼 있어 매우 화려하다. 종보를 받치는 동자주에서도 같은 양식이 보인다. 종보를 받치는 동자주는 포형 동자주로 행공첨차에는 초각을 놓고 보 방향으로는 기둥머리에 물익공 장식을 해놓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이라는 맹 씨 행단 행공첨차와 비교해 보면 맹 씨 행단 행공은 상부를 약간 오목하게 가공했지만 이곳 행공첨차는 평평하지만 더 화려하다. 종보에 쓰인 글은 계회 契會를 마치고 써놓은 명단이라고 한다. 화려한 별당에 비해 안채는 매우 검박하게 느껴진다. 안채는 경북지역 전형적 형태라고 할 수 있는 ㅁ자형 집으로 높게 만든 단 위에 지었다. 앞마당과 중문과의 높이차가 사람 키 정도고 안사랑채 바닥까지는 더 높아 상대적으로 집이 높게 보여 위압감을 준다. 별당채가 앞을 가리고 있어 다소 감소했지만 별당채가 없었을 때는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안방이 있는 쪽은 두 칸으로 겹집구조이고 중문이 있는 쪽은 한 칸 규모다. 안방 옆에는 도장방이고 아래쪽은 세 칸 부엌이다. 판장벽 외벽에서 반빗간(집에서 반찬을 만드는 곳, 찬간 饌間이라고도 한다)의 잔형을 볼 수 있다. 부엌 판장벽 판재는 자귀로 다듬었는데 이는 쉽게 볼 수 없는 경우다. 건넌방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면에는 한 칸 반으로 돼 있는데 최근 반 칸을 줄여 한 칸 규모로 만들었다. 안채는 경북지역 전형적 형태라 할 수 있는 ㅁ자형 집이다. 단을 높게 만들어 위압감이 느껴진다. 화반 형태로 아랫부분은 연꽃 하엽이 조각돼 있고 상부는 화반대공과 비슷한 모양을 한 대공. 거의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던 나무를 사용한 충량으로 목수 눈썰미가 대단하다. 조선 초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한 별당 내부. 권문세가에 이르러 지은 별당전체적으로 안채는 퇴칸이 없는 북방형 겹집이다. 안채에 퇴칸이 없다 보니 집 구조가 고주가 없는 삼평주 오량집이 됐다(후대에 지어지는 한옥 대부분은 전퇴를 두기 때문에 일고주 오량집이다). 삼평주이므로 가운데 기둥을 중심으로 맞보를 설치하고 그 위에 종보를 걸었다. 안채에서 발견되는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면 우선 퇴칸 또는 툇마루가 없다는 점이다. 조선 후대로 갈수록 집에 대한 쓰임새가 늘면서 퇴칸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곳은 퇴칸 또는 툇마루가 전혀 없다. 건넌방 뒤편에 쪽마루를 두었을 뿐이다. 현재 안방 앞에도 쪽마루가 설치돼 있으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면에는 없는 것으로 최근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안채 보아지를 보면 초각이 돼 있다. 후대에 지어진 집에는 보아지를 순수하게 기능적인 면만 따져 놓기에 형태가 매우 단순하다. 세 번째는 대청 뒤편 판장문 가운데 문설주가 서 있다는 점이다. 쌍여닫이문 가운데 문설주가 있으면 임진란 전에 지어진 집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런 몇 가지가 이 집이 지어진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별당 우측 뒤에 놓인 사당. 규모가 크지 않은 안채 전경. 살림규모가 늘자 안채도 늘렸다. 지금은 별당이 앞을 가리고 있어 다소 감소했지만 별당채가 없었을 시에는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부엌 옆에 마련된 장독대. 5 진입로에서 본 안채 입구. 안채는 규모가 크지 않다. 그렇기에 살림 규모가 늘면서 사랑채를 늘렸다. 권 씨 종택 별당과 안채는 여러모로 비교가 된다. 특히 별당이 장식성이 강한 것은 고려 시대 유풍 流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안채가 1500년대에 지어졌다면 개인적으로 이 별당을 지은 사람은 권문해 선생이 아닌가 생각한다. 별당은 권문해 선생이 낙향해 이곳에 다시 자리 잡은 때인 임진란 직전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집을 지었을 당시는 권문세가 權門勢家 수준에 달하지 않아 검소하게 안채를 마련했지만 후손인 권문해 선생이 종 2품 관찰사까지 역임하면서 권문세가 반열에 들어서자 그것을 배경으로 당대 일반인은 생각할 수 없는 사치스러운 별당이 들어선 것이다. 고려 유풍이 남아 장식성이 강한 별당으로 권문해 선생이 종 2품 관찰사까지 지내는 권문세가에 들어서자 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는 툇마루로 연결됐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
-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
고택을 찾아서, 소박한 안채 화려한 별당, 이유는? - 예천 권 씨 종택
-
-
2021 한국건축문화대상 수상작 공유 주택 숭인공간
- 숭인공간은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자리하는 공유 주택이다. 부지는 23평으로 작지만, 건축가는 지상 5층 규모에 사용 면적 50여 평의 주택을 계획했고, 이 공간을 집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누릴 수 있는 공용주택으로 완공했다. 글 스페이스매터 건축사사무소진행 이수민 기자사진 최진보 HOUSE NOTEDATA위치 서울 종로구 숭인동지역/지구 도시지역, 제2종일반주거지역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건축규모 지상 5층용도 공유 공간+공유 주택 (단독주택+근린생활시설)대지면적 76.7㎡(23.20평)건축면적 45.34㎡(13.71평)건폐율 58.57%연면적 153.90㎡(46.55평)용적률 199.78%주차대수 1대설계기간 2018년 10월~2019년 4월시공기간 2019년 5월~12월설계 스페이스매터 건축사사무소 전상현 010-8677-0816 www.spacematter.co.kr시공 리원건축 MATERIAL외부마감 외단열 마감내부마감 노출콘크리트, 석고보드 위 도장마감창호 T35 로이3중 유리 1층은 소정의 이용료만 부담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유 공간이다. 1층 공유 공간에 선 스터디 모임부터 친목 모임까지 다양한 모임을 할 수 있다. 공유 공간은 외지인과 동네 주민 그리고 공유 주택 입주민 모두의 사용을 염두에 두고 조성한 공간이다. 오래된 소외, 숭인1동숭인1동은 신축 아파트 대단지에 연접한 낙후한 동네다. 그래서 아파트 담장을 경계로 생활환경과 그 풍경이 큰 대조를 이룬다. 실제 아파트 입주민들은 울타리 안에서 쾌적하게 생활한다. 아파트와 함께 생활 인프라에 해당하는 부대 복리시설을 분양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아파트 담장 밖 동네 주민들은 그렇지 못하다. 생활 인프라를 구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민간사업자가 아파트 단지로 묶어 공급하는 경로당과 도서관, 커뮤니티 시설 같은 부대 복리시설은 공공이 제공해야 하는 생활 인프라다. 하지만 민간이 단지 단위로 주택 공급을 주도해온 한국에서는 생활 인프라마저 상품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들은 소득수준에 맞는 생활 인프라를 갖는다. 숭인1동 주민들의 생활 인프라가 빈약한 이유다.(최근 5년간 진행된 도시재생으로 상황이 나아지고 있지만, 피부로 느끼는 인프라 불균형은 여전하다) 숭인1동은 토박이 주민이 많은 편이다. 상대적으로 지가가 낮아 이주가 쉽지 않은 데다 오래전 가내수공업 규모의 봉제공장이 구석구석 자리 잡은 탓이다. 그 결과 주민 평균 연령도 높다. 바꾸어 말하면 젊은 인구의 유입이 적다는 얘기다. 이러한 이유로 동네 분위기는 다소 침체되어 있다. 1층의 미니 중정, 키가 큰 대나무를 식재했다. 주택으로 올라가는 계단. 2층부터 5층까지는 1층의 공유 공간과 더불어 젊은 인구의 유입을 유도할 청년 공유 주택이다. 작은 개입, 공유 공간기울어진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동네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숭인1동 한편에 공유 공간(이하 숭인공간)을 조성했다. 숭인공간은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뉜다. 1층은 소정의 이용료만 부담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유 공간이다. 이곳에선 스터디 모임부터 친목 모임까지 다양한 모임을 할 수 있다. 참고로 공유 공간은 외지인과 동네 주민 그리고 공유 주택 입주민 모두의 사용을 염두에 두고 조성한 공간이다. 그리고 2층부터 5층까지는 1층의 공유 공간과 더불어 젊은 인구의 유입을 유도할 청년 공유 주택이다. 개인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방은 1인실과 2인실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뉜다. 각 방에는 조리시설을 갖추지 않고 공유 주방을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주방은 모든 입주민이 함께 공유하며 건물의 4층에 자리한다. 협소 부지와 매스 분할의 조합으로 모든 방과 거실 그리고 주방은 수직과 수평으로 분리된다. 협소주택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매스를 분할, 방을 독립된 공간처럼 만들었다. 방들은 방문을 열지 않고도 각 실별 통풍이 가능하다. 5층에 위치하는 테라스와 미니 거실. 뉴 프로토타입공유 주거는 경제적 이유로 탄생한 주거 유형이다. 물론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주거 유형은 아니다. 공유 주거의 모태는 과거의 셋방살이다. 현재의 공유 주거 역시 과거의 셋방살이처럼 최소 주거단위인 방을 임차한다.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공유 주거는 과거의 셋방살이와 달리 삶의 최소면적을 확보하는 것 이상의 질적 배려를 요구한다. 삶의 질에 대한 의식이 상향 평준화된 결과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유 주거는 아파트나 다세대주택 같은 기존의 주거 공간에 담겨 그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숭인공간은 이에 대한 고민의 결과를 담은 공유 주택이다. 공유 주택은 공유 영역을 외부(도시)에서 내부(주거)로 확장한다. 다시 말해 주택과 광장의 관계가 방과 거실의 관계로 고스란히 치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유 주택의 방은 최대한 사적인 성격을 지녀야 한다. 내밀한 쉼터(방)가 있어야 광장(거실)에서 어울릴 여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협소주택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매스를 분할, 방을 독립된 공간처럼 만든 이유다. 덕분에 각 방은 방문의 개폐 없이 효과적인 개별 통풍이 가능하며 풍경과 채광도 두 배로 늘어난다. 그리고 협소 부지와 매스 분할의 조합으로 모든 방과 거실 그리고 주방은 수직과 수평으로 분리된다. 바꾸어 말하면 선택적 참여가 가능한 공동의 주거 공간이 되는 것이다. 반면 1층의 공유 공간은 분할된 공간을 시각적으로 투명하게 연결했다. 그리고 접이문과 대형 창호를 활용해 분할된 공간을 통합, 온전히 거리에 개방했다. 거리에 활기찬 풍경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결과적으로 이는 공유 주택 입주민과 지역주민의 시각적, 공간적 교류를 가능케 해 서로가 이웃임을 인지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숭인공간의 주차 공간. 기울어진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동네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숭인1동 한편에 공유 공간(이하 숭인공간)을 조성했다. 1층의 공유 공간은 분할된 공간을 시각적으로 투명하게 연결했다. 숭인공간은 젊은 인구의 유입을 유도할 청년 공유 주택이다. 인프라 불균형이 여전한 숭인1동의 주민들에게 생활 인프라를 제공하는 숭인공간. 전상현(스페이스 매터 대표, 건축사)서울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베를린에서 도시를 공부했다. 지난 20년간 건축사사무소와 인테리어디자인 사무소 그리고 건설사를 거쳤다. 현재 건축사사무소 스페이스 매터의 대표이며 국민대학교 건축학부 겸임교수로 출강 중이다.?저서로 ‘도시유감’과 ‘서울, 도시의 품격’(2017년 세종도서 선정 우수도서)이 있다.spacematter2020@gmail.com 010-8677-0816
-
-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
2021 한국건축문화대상 수상작 공유 주택 숭인공간
-
-
고택을 찾아서, 고택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운 부여 민칠식 가옥
- 노송, 느티나무, 대나무가 울창한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남쪽으로 확 트인 널찍한 터에 남향으로 자리 잡은 부여 민칠식 가옥 扶餘閔七植家屋(중요민속자료 192호)은 전망이 시원하다. 마을 앞으로는 왕포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멀리 바라보이는 금강과 만나고 넓은 벌판이 장관을 이루며 펼쳐져 바라만 봐도 풍요롭게 느껴진다.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마당에서 한 단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랑채. 전면 세 칸으로 두 칸은 온돌방이고 한 칸은 마루다.( 민칠식 가옥이 위치한 중정리는 여흥 민씨와 용인 이 씨 집성촌이라고 한다. 여흥 민씨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민칠식 고조부 때라고 하며 이 집도 그때 용인 이 씨 집안으로부터 사들인 것이다. 사랑채에서 '숭정 87년'(1705년)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돼 이때 집을 지은 것으로 여겨지나 상량문에 쓰여 있는 숭정기원후사을축 崇禎紀元後四乙丑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829년에 거의 새롭게 짓는 정도의 대규모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건축문화재/충남>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다. 민칠식 가옥은 현재 한옥생활 체험 관인 <백제관>이란 이름으로 운영 중이다. 사랑채 전경. 사랑채에서 보는 전망이 매우 훌륭한데 주변 건물보다 높아 시야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남녀유별을 구현한 경상도 집 구조 가옥은 앞에 최근 복원한 9칸 행랑채가 있고 중문칸과 사랑채가 한 몸을 이루며 이들이 뒤편 안채와 합쳐 ㅁ자 형태를 이룬다. 몸체는 전면 6칸 측면 7칸 반인데 전면과 후면 몸체 우측 부분이 돌출돼 전체적으로 누워있는 ㅂ자 형태로 이렇게 건물 일부가 돌출된 집을 '날개집'이라 한다. 이런 집은 경상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충청도나 경상도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집을 짓게 된 것은 개축한 민치준의 경력 때문이 아닌가 한다. 민치준은 여러 고을의 원을 지냈는데 경상도 수령을 지낸 경험이 이런 집을 짓게 한 것이다. 개축할 때인 1829년은 조선 성리학이 수구적인 행태를 보인 시기다. 따라서 남녀유별 개념이 더욱 심화됐을 것이므로 민치준도 남녀유별을 확실하게 구현할 수 있는 경상도 집 구조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을 마주하게 된다. 사랑채는 마당에서 한 단 높은 곳에 위치하고 서쪽에는 우물이 있다. 현재는 석축이 설치됐는데 과거에는 자연 경사로 돼 있었다고 한다. 사랑채는 동쪽에 배치됐다. 두 칸이 몸체에서 튀어나온 형식으로 이는 앞서 언급했듯 주로 경상도에서 볼 수 있는 구성이다.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세운 사랑채는 전면 세 칸으로 두 칸은 전퇴를 가진 온돌방이고 마지막 한 칸은 마루다. 일부 부재가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뒷마당에 집을 고치면서 발굴된 석재를 가져다 놓았다. 이와 함께 백제시대 초석도 있다고 한다. 사랑채에서 보는 전망은 매우 훌륭하다. 건물이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전망을 충분히 확보한다. 따라서 멀리 금강까지 바라보이는 조망은 상당한 매력이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보이는 곳 많은 부분이 여흥 민씨의 땅이지 않았을까. 안채 건넌방 옆으로 돌출된 마루 두 칸. 구조도 벽 처리도 지붕도 일반 마루 모습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보인다. 이곳은 집을 개수한 민치준이 죽자 그를 위한 제청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3 4 안방과 마루방. 지금은 객실로 사용한다. 사랑채 서쪽 담으로 안채와 이어지는 문을 달았다. 원형과 다르게 진행된 개보수의 아쉬움사랑채 좌측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간 中門間이 놓였다. 한 칸 꺾여 안채로 들어가는 구조로 이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다.보통 중문간은 밖에만 문이 설치된다. 그런데 안쪽에도 문이 달렸고 문에는 홍살이 설치돼 있다. 이러한 경우는 이곳이 처음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 말로는 원래 그랬다고 하는데 과연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안채는 모를 죽인 민도리집으로 전후퇴를 가진 1고주 오량집이다. 안채에 현재 남아 있는 모습과 예전 평면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예전 안채 여덟 칸이 왼쪽부터 부엌, 안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1칸, 안마루 2칸으로 구성되나 현재는 건넌방을 없애고 5칸 대청으로 개조됐다. 현재 안채 서쪽 날개 부분은 안쪽으로부터 뒷마당과 연결하는 문간 반 칸, 마루방 한 칸, 온돌방 두 칸으로 구성돼 있고 반대편은 방 두 칸, 문 한 칸, 부엌 한 칸(상부 다락), 사랑채와 연결된 책방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좌측에 있는 방에는 안사랑채와 책방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현재 민칠식 가옥은 여러 곳이 많이 고쳐진 상태다. 특히 안방 옆 부엌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개조됐는데 지금은 솥을 걸지 못하는 아궁이뿐이다. 사랑채에 연결된 부엌은 한 칸 규모로 상부가 다락이어서 매우 낮으며 바로 옆 한 칸은 마당으로 나가는 문이 달렸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평면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예전 평면을 보면 안방 옆에 있는 부엌에는 솥을 세 개 걸 수 있는 부뚜막이 있었고 뒷마당 쪽으로 1/4 칸 정도 더 나아가 살강을 드렸다. 사랑채 쪽에는 문이 없었고 문이 설치된 곳까지 포함하여 두 칸이 부엌으로 쓰였으며 안방 쪽 부엌처럼 1/4칸 정도 더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이것이 제대로 된 안채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 집 규모로 보아 지금 개조된 부엌 규모로는 살림살이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가옥은 안채와 복원한 9칸 행랑채와 중문칸, 사랑채가 한 몸을 이루는 ㅁ자 구조다. 전면 6칸 측면 7칸 반으로 전면과 후면 몸체 우측이 돌출돼 전체적으로는 누운 ㅂ자 구조다. 장독대로 수리된 독이 많다. 당시 부잣집에서도 보기 힘든 큰 독이 많은데 보수 과정에서 넣은 듯하다. 사소한 것에도 신경 쓰지 않은 아쉬움이 남는다. 집은 생활, 문화의 결과물… 보전에 신경 써야이 외에도 현재 안사랑채 위치가 민속문화대백과사전과 다르며 담이 많이 변화됐다. 예전 담은 사랑채 누마루부터 바깥으로 나가다 북쪽 산 쪽으로 둘러져 있다. 그리고 문화재청 사진자료를 보면 현재 뒷산과 안채 사이에 설치된 담도 예전에는 없었고 장독대도 현재 위치가 아닌 뒷산과 안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사진 장독대 위치가 실제 생활과 맞는 것이다. 지금 설치된 장독대는 부엌과 너무 떨어져 있어 가사 생활과 유리돼 전혀 기능적이지 못하다. 민칠식 가옥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안채 건넌방 옆으로 돌출된 마루 두 칸이다. 이곳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안마루라고 했는데 구조가 대청 부분과 차이를 보인다. 우선 안채가 1고주 오량구조인 반면에 안마루는 평오량구조다. 일반적으로 대청은 후면이나 측면에 통풍을 위한 창을 설치한다. 그러나 이곳은 모두 심벽으로 처리했다. 또한 지붕도 맞배지붕으로 다른 안채 지붕과 격이 맞지 않는다. 처음부터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최소한 우진각 지붕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안마루 모습은 일반적인 마루 성격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날개를 달아 별도로 구성한 것은 이곳이 제청祭廳으로 사용하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집을 개수한 민치준은 이곳으로 입향한 민칠식 고조부 넷째 아들이다. 민씨 집안 종가는 가옥 옆집이라는데 지금은 사랑채만 남았다. 따라서 처음 집을 개축할 때는 별도 사당을 만들 필요가 없었으나 민치준이 죽고 나서 자손들이 제사를 드릴 공간이 필요하다 보니 제청으로 다시 증축한 것은 아닌가 한다. 사랑채와 대문 사이 공간. 행사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사랑채 좌측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보통 밖에만 놓이는데 이 가옥은 안쪽에도 달렸다. 거기다 홍살까지 설치됐다. 원래 그랬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의문이다. 이 집은 2004년 군청에서 매입하여 개수한 후 한옥생활 체험관인 <백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개수한 모습이 과거와 많이 다르다. 본인도 기본적으로 한옥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 활용하는 것이 집을 보존하는데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재는 활용 이전에 보전이 우선이다. 활용을 한다는 핑계로 원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개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것은 문화를 전승한다는 차원에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한옥 체험관을 운영하는 것은 단순히 숙박만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며 선조의 생활을 체험함으로써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아궁이에 불을 피워보고 가마솥에 밥을 해보며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그 배설물이 거름으로 활용되면서 어떻게 자연에 순환되는가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도 훌륭한 삶의 체험이다. 장독대 독을 보면 수리된 것이 많다. 민칠식 가옥 정도 부잣집에서도 큰 독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지금은 큰 독이 보인다. 문화 체험은 사소한 부분까지 보여주고 느끼게 해야 한다. 집은 당시 생활과 문화의 결과물이다. 그런 것을 어떻게 제대로 보여줄 것인가 고민했다면 집을 이렇게 개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사랑채와 몸체 우측이다. 안채와 이어지는 문을 달았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
-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
고택을 찾아서, 고택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운 부여 민칠식 가옥
-
-
2021한국건축문화대상 수상작 임대주택 모아 쌓은 집 ‘Stack Together’
- 임대를 위한 주택이지만 ‘좋은 집’을 짓고자 하는 건축주가 건축가를 찾아왔다. 재래시장의 현대화를 위해 급변하는 주변 환경 속에서, 건축주 가족들은 주상복합시설의 일부로 대지를 편입시켜 달라는 끊임없는 권유에 시달려 왔었다. 거대한 자본과 보편성의 힘을 뿌리치고 가족만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건축주 가족에게 건축가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조력은 그들의 바람대로 ‘작지만 좋은 집’을 계획하는 일이었다. 글 황정현, 현창용(건축사사무소 H2L)진행 이수민 기자사진 김성철 작가 HOUSE NOTEDATA위치 서울 중구 신당동구조 철근콘크리트조지역지구 준주거지역, 지구단위계획구역건축용도 공동주택건축규모 지하 1층, 지상 9층대지면적 290.04㎡(87.73평)건축면적 159.88㎡(48.36평)연면적 1,109.74㎡(335.6평)건폐율 55.12%용적률 331.92%설계기간 2018년 2월~2019년 4월공사기간 2019년 6월~2021년 4월설계 건축사사무소H2L 황정현 + 공주대학교 현창용 https://architectsh2l.com/시공 씨앤오건설㈜ www.cnoenc.com 2018년 겨울, 오래도록 소유하고 있었던 두 개의 필지를 모아 임대를 위한 공동주택과 거주를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던 한 가족이 건축가를 찾았다. 들여다보니, 가족의 땅은 한 재래시장 재정비 촉진지구에 면하여 수백 세대 규모의 주상복합시설 계획부지에 인접해 있었다. 이는 공동 개발을 통해 대형 재건축 프로젝트의 일부로 편입시킬 수 있었음을 의미했고, 자연스레 왜 별도의 주택을 기획하게 되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돌아온 답은 건축가가 이 프로젝트에 깊은 애정을 갖게 하는 힘이 있었다. “비록 임대를 위한 주택이지만, ‘좋은 집’으로 존재하고 싶습니다.” 공동주택과 거주를 위함 보금자리를 한 데 모아 지은 ‘모아 쌓은 집’의 주 출입구. 주차장. 엘리베이터 홀과 계단실.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9층 규모로 엘리베이터를 갖췄다. 콘크리트와 철제 난간으로 심플하게 계획한 계단실. 작지만 좋은 집재래시장의 현대화를 위해 급변하는 주변 환경 속에서, 가족 역시 인접한 주상복합시설의 일부로 대지를 편입시켜 달라는 끊임없는 권유에 시달려 왔었다. 거대한 자본과 보편성의 힘을 뿌리치고 가족만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건축주 가족에게 건축가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조력은 그들의 바람대로 ‘작지만 좋은 집’을 계획하는 일이었다. 대지의 조건은 1인 주거공간 약 12세대, 2인 이상이 거주할 수 있는 소형 주거공간 6세대, 그리고 근린생활시설 일부와 가족의 보금자리를 허락하고 있었다. 단일 공간으로 구성된 1인 주거공간과 침실이 분리되어 제공되는 소형 주택을 각각 4개 유닛, 3개 유닛으로 모아 중층에 쌓아올렸다. 지상층과 가장 가까운 곳에 근린생활시설을 배치해 임대 효율을 높이고, 가족의 보금자리는 최상층에 자리하게 했다. 이러한 공간의 구성까지는 여느 소규모 공동주택과 다르지 않으나, 건축가는 그 과정에서 두 가지 차별화된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는 소형 주택이라 하여 동일하게 복제, 병치되는 구성은 피할 것, 둘째는 사용자와 구성원 모두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의 모든 건축적 수준을 높일 것. 6층에 자리하는 주거 D 타입 공간. 8층은 건축주가 사는 공간이다. 고층에서 누릴 수 있는 전경을 만끽하기 위해 창을 크게 냈다. 섬세한 건축적 계획과 대응첫 번째 원칙을 위해 중층의 임대용 주거 유닛들은 제각기 다른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테라스가 있는 유닛, 다양하게 절개된 입면을 가진 유닛, 여유 있는 내부 수납공간을 가진 유닛, 알파 룸이 제공되는 유닛, 노출콘크리트 벽면이 연출되는 유닛 등으로 임차인의 선택의 폭을 고려했다. 또한 이러한 다양한 조건들은 임대시장에서 다양한 관점의 가격 책정 근거로 작용함으로써 작지만 획일화되지 않은 공간구성이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두 번째 원칙을 위해 공용으로 사용되는 아주 사소한 부분부터 중요한 부분까지 섬세한 건축적 대응을 시도했다. 각 층별로 보일러실과 실외기 실 등 가구 내부로 편입될 시 공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소음과 관리 수요의 원인이 되는 공간을 공용부로 빼 내어 각 가구의 효용과 쾌적을 도모했다. 또한 자칫 버려질 수 있는 옥상 부를 실내화, 공용화, 정원화 하였는데, 사용성을 위해 승강기가 최상층에 마련된 옥상정원과 공동 세탁공간, 공용 테라스까지 운행되도록 하여 공용공간의 활성화를 꾀했다. 무엇보다 도심형 소규모 공동주거 건축물에서 늘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던 주차 부족 문제의 실질적 해결을 위해, 지상에서 편리하게 관리, 사용할 수 있는 리프트식 기계식 주차를 도입해 주차면의 확보와 활용성 모두를 충족시키도록 계획하였다. 이 밖에도 화물의 보관, 우편함의 관리 및 사용, 쓰레기의 배출 등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건축적, 공간적 대응을 위해 다양한 계획을 실천했다. 8층 테라스. 데크로 마감해 맨발로 테라스를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건축주와 임대인이 공유하는 9층 공용 공간. 옥상도 공유하는 공간 중 하나다. 벽돌로 단순하게 쌓아올린 주택이러한 ‘거주민-프랜들리’의 공간계획 개념을 외관의 정체성으로 풀어내기 위해, 가장 친숙하고 담백한 디자인과 재료를 선정했다. 다양한 구성으로 모아진 주택들은 각 유닛의 최적의 환경을 위한 자리에 배치되고, 이를 단순하게 쌓아 올렸다. 그 과정에서 크게 3개의 다발로 나누어진 볼륨을 그들이 각자 향하고 있는 주변 환경에 알맞게 열고 닫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외관의 콘셉트를 보강할 수 있는 소소하지만 재미있는 디자인이 입면에 골고루 적용되어 단순하지만 지루하지 않는 얼굴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건축의 모습에 어울릴 만한 재료로서, 주택에 가장 친숙한 재료인 적벽돌과 콘크리트 노출을 조합하였는데, 태생적으로 ‘쌓아’구축하는 벽돌의 성질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연스럽게 구현하기 위해 각 층별로 얇은 콘크리트 띠를 내밀어 벽돌을 받쳐 쌓았다. 건물에 서쪽에 위치하는 주차공간. 모아 쌓은 집은 임대를 위한 주택이지만,‘좋은 집’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건축주의 바람으로 지은 집이다. 서로를 의지하는 우리네 모습벽돌을 쌓기 위해 건축의 구체가 내민 손이 마치 서로 손 내밀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주거 공동체의 모습과도 닮았고, 그 위에 한켜 한켜 쌓아 올려지면서도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는 적벽돌의 모습이 켜켜이 쌓여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과도 닮았기에, 또 그러한 삶을 응원하려는 건축가의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공간 안에 그득 차 있기에, 어쩌면 이 집을 태어나게끔 했던 ‘작지만 좋은 집’이라는 한 문장은 꽤 그럴듯한 건축으로 완성되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북서 측에서 바라본 야경. 적벽돌의 켜켜이 쌓여있는 모습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주거 공동체의 모습과 닮았다. 황정현(건축사사무소H2L) + 현창용(공주대학교 건축학부)황정현과 현창용은 중앙대학교에서 건축을 함께 수학하고, 이후 황정현은 정일건축과 정림건축을 거쳐 동대학원 도시건축연구실에서 다양한 스케일의 실무와 연구를 수행했고, 현창용은 간삼건축을 거쳐 동 대학원 건축공간이론연구실에서 공공건축물의 공간구조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5년에 건축사사무소 H2L을 함께 설립했다. 주요 작업으로는 모아 쌓은 집(공동주거), 두 마당집(단독주택), 마장동 협소주택 등이 있다.
-
-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
2021한국건축문화대상 수상작 임대주택 모아 쌓은 집 ‘Stack Together’
-
-
도자예술마을에 들어선 붉은 요새 이천 상가주택
-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닮아간다고들 말한다. 가족, 연인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반려동물 역시 주인의 모습을 닮는다. 그런 점에서 이천 상가주택은 건축주인 도예가 라기환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만, 어딘가 남다른 점이 눈길을 끄는 곳. 그의 자취가 느껴지는 이천 상가주택을 방문했다. 글 홍예지 기자사진 박창배 기자취재협조 ㈜서경종합건설※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인터뷰와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OUSE NOTEDATA위치 경기 이천시 신둔면 도자예술로지역/지구 계획관리지역, 지구단위계획구역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구조대지면적 661.40㎡(200.07평)건축면적 250.91㎡(75.90평)건폐율 37.94%연면적 497.21㎡(150.41평)용적률 75.18%설계 ㈜건축사사무소신도시21 02-536-8813시공 ㈜서경종합건설 031-281-4541 MATERIAL외부마감외벽 - 적고벽돌 스무스(경기 우성세라믹)데크(바닥) - 포천석 버너((주)미래석건)내부마감천장 - 수성페인트(삼화페인트)내벽 - 수성페인트(삼화페인트)바닥 - 포쉐린타일(바스디포)단열재외단열 - 준불연 비드 2종((주)동일수지)내단열 - 비드법 1종((주)동일수지)창호 알루미늄 시스템창호(E플러스윈도우)현관문 LSFD 모데스티 다크(성우 스타게이트)주요조명 LED조명(소노조명)주방가구 주문 제작위생기구 플랫 비데, 플랫 세면기(아메리칸스탠다드)난방기구 콘덴싱 가스보일러(경동보일러) 길에서 바라본 이천 상가주택의 외관. 길 쪽으로는 최소한의 좁고 긴 창을 설치해 프라이버시를 확보했다. 라기환 작가의 작품처럼 정갈함이 느껴지는 1층 쇼룸. 경기도 이천시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순수함’이다. ‘쌀밥’과 ‘도자기’ 등 흰색의 순수함이 떠오르는 이천의 각종 명물 덕분에 이천은 경기도의 대표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이를 홍보하듯, 이천시는 신둔면에 도자기를 비롯한 미술, 공예 등 300여 개의 현대식 건물 공방이 자리한 도자예술마을 ‘예스파크’를 조성했다. 도예가 라기환 작가의 주택 또한 이곳에 터를 잡았다. 강렬한 첫인상 속 순백의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그의 주택은,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낸다. 다양한 수납공간을 설치해 정돈된 분위기로 완성한 2층 현관. 조명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현관에서 거실 방향으로 바라본 복도 모습. 거실 창에서 중정 조망. 복도에서 본 거실. 작업실과 쇼룸, 주거 공간을 한데 모으다쇼룸과 작업실, 주거 공간의 일체화가 필요했던 라기환 작가는 어느 날 집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기존에는 이러한 장소들이 한데 모여 있지 않아 작업하는 데 흐름이 끊기기도 했다고. “아무래도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하다 보면, 집과 작업실, 쇼룸 세 군데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뤄야 할 때가 많았어요. 예전에는 지금처럼 다 함께 모여 있던 구조가 아니다 보니, 일의 끊김이 많이 발생하더라고요.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함께 모여 있어 온전히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이곳 예스파크 단지 내에 집을 짓기 전까지는 많은 고민이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단지 특성상 프라이버시 확보 및 동종업계 작가들을 지척에 두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서였다. “처음에는 제 공간을 노출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함께 여러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동종업계에 계시는 분들이다 보니, 생각이 같았나 보더라고요. 그 덕분에 서로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잘 어우러지는 방향을 잡았죠. 특히 저희 집의 설계 콘셉트 중 하나가 프라이버시 확보를 위한 차단된 구조였는데,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어도 괜찮았겠다,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웃음)” 아담하게 꾸민 거실과 주방 공간. 특히 주방 공간은 싱크대를 거실 쪽으로 설치해, 설거지나 요리를 하면서도 가족들의 모습을 살필 수 있도록 했다. 이천 상가주택의 외관은 붉은 벽돌이 주는 압도감으로 인해 얼핏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찬찬히 감상하다 보면 라기환 작가의 도자기처럼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 금세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특히 무심하게 툭 던져진 매스는 마치 하나의 큰 덩어리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창문의 위치와 중정을 통해 포인트를 줘 이천 상가주택만의 아이덴티티를 완성했다. 밖으로는 닫혀 있지만, 안쪽으로는 열려 있는 ㅁ자 구조의 주택은 1층의 경우 쇼룸과 스튜디오 공간만을, 거주자의 생활공간은 2층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는 단지 내의 조건을 조화롭게 만족시켰다. 이에 더해 외관의 경우, 적고벽돌을 색다르게 사용해 독특함을 더했다. 시공을 담당한 (주)서경종합건설의 최종빈 대표는 “적고벽돌을 랜덤으로 깨서 울퉁불퉁한 면을 자연스럽게 보여준 외벽이 포인트 중 하나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의 ‘포토 존’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루프탑도 신경 쓴 부분 중 하나다. 보통 옥상 공간은 바깥이 보이도록 난간을 낮게 두는데, 이곳은 3m 정도의 벽 난간을 세워서 바깥의 시선을 차단한 채로 가족끼리 오붓한 공간을 즐길 수 있도록 연출했다. 외부에서 보면 여기가 건물의 한 층인지 아니면 루프탑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든 점 또한 재미난 요소 중 하나다”고 설명했다. 안방의 경우 드레스룸과 파우더룸을 한데 구성해 생활의 편의성을 더했다. 가늘고 긴 창을 통해 적절한 채광과 프라이버시를 확보한 방. 단출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 가족들의 평온한 생활을 가늠케 한다. 세면대를 따로 구성해 안쪽 욕실과의 동선을 구분한 세면실. 일의 효율과 주거 공간의 편의성을 극대화하다이천 상가주택 내부는 1층의 경우 쇼룸과 작업실, 2층은 거주 공간과 작업 공간, 3층은 멀티 룸으로 구성했다. 이 중에서도 3층 멀티 룸은 전시 공간이나 미팅 룸 등 무궁무진한 활용이 가능하도록 개성 있게 꾸몄다. 전체적인 내부 콘셉트는 작업 특성상 밤낮이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에 이를 고려한 설계를 중점으로 이뤄졌다. “처음 결혼하고 나서 얻은 집은 안방이 북쪽을 향해 있었고, 두 번째 집은 정남향에 위치해 있었어요. 지내면서 느꼈던 점이, 거실 공간은 볕이 잘 들어오는 게 좋지만, 방의 경우에는 평소에는 낮잠을 자거나 밤낮이 바뀌었을 경우를 대비해 낮에도 통잠을 잘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으면 좋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방과 거실의 경우 중정 위주로 창을 내 많이 어둡지 않으면서도 빛이 직사광선으로 들어오지 않게끔 유도했어요.” 중정에 키가 2층 이상 올라오는 소나무를 두어 싱그러움을 더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덕분에 가족들은 중정 쪽만 바라보더라도, 답답했던 마음이 싹 사라진다고. “예전에 살던 집은 마당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고, 집을 둘러싼 나무가 굉장히 많은 곳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서 오래 살던 분들이 그러잖아요. 결국에는 관리상의 이유로 마당을 콘크리트로 덮는다고요. 저희 역시 지난 집에서 풀과의 전쟁을 겪으면서 이번 집에서는 최대한 편하게 관리를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주차장이나 중정 등을 최소한의 공간만 두고 다 돌과 콘크리트로 덮었는데, 막상 살다 보니 약간의 아쉬움이 들더군요. 요새는 화초 키우는 재미가 얼마나 큰지 몰라요.(웃음)” 뿐만 아니라,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대형견을 위해 자재 하나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중정 바닥, 계단과 타일 재료, 벽 마감 같은 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시공을 시작할 때 서경종합건설에서 많은 자문을 받았다”며 “개가 40kg가 넘다 보니, 관절이 좋지 않아 쉽게 미끄러지지 않으면서도 관리가 편한 자재들을 선택하게 됐다”고 전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인상 깊은 계단실. 3층에 위치한 멀티 룸은 전시 공간이나 미팅 등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도록 연출했다. 3층 멀티 룸에서 바라본 중정 모습. 멀티 룸 옆에 자리한 옥상 공간. 가족들만의 프라이빗한 일상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주택의 상부. ㅁ자 구조의 이천 상가주택은 옥상에도 3m 정도의 벽 난간을 세워 바깥의 시선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자신과 가족의 삶을 다각적으로 고려한 집을 지은 라기환 작가. 그가 예비 건축주들에게 조언해 주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설계는 가능한 무조건 기간을 길게 하는 편을 추천해요. 단순히 대면 미팅만 중요한 것이 아닌, 건축주 스스로가 자료 조사를 많이 하고, 그것을 얼마큼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집의 완성도가 달라지죠.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이 ‘다음에 한 번 더 집을 짓게 되면 어떤 부분을 더 고려 해야겠다’라는 답이 나오는 것 같고요. 이렇듯 설계 진행 시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는 편이 좋을 것 같고, 시공 면에서는 처음 시작부터 마무리할 때까지 서로 신뢰를 잘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정에는 키가 2층 이상 올라오는 소나무를 두어 포인트를 주었다. 위에서 바라본 이천 상가주택의 모습. 밖으로는 닫혀 있지만, 안쪽으로는 열려 있는 ㅁ자 구조가 돋보인다. 적고벽돌을 랜덤으로 깨 울퉁불퉁한 면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좌측면이 눈길을 끈다.
-
-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
도자예술마을에 들어선 붉은 요새 이천 상가주택
-
-
고택을 찾아서, 조선 중기 살림집을 엿보게 하는 여주 명성황후 생가
- 명성황후는 최근 들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명성황후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많아진 데에는 ‘명성황후’라는 국내 창작 오페라의 성공과 TV 드라마가 한몫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명성황후가 과연 어떠한 생을 살았고, 어떻게 평가를 받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그 문제는 사학자의 몫이고,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건축과는 관련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생가(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제46호)’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지금부터 소개할 특징들 때문이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기자 명성황후 생가는 지어진 이유부터 전혀 다르다. 모든 집은 계속해서 살아갈 목적으로 지어진다. 그러나 명성황후 생가는 처음에는 시묘(侍墓) 살이를 위한 여막(廬幕 : 무덤 가까이에 지어 놓고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으로 지어졌다. 이렇게 잘 지은 기와집이 여막이라니… 시묘살이는 으레 조그마한 초막에서 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던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혼란은 시묘살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옛날의 시묘살이는 지금의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났다.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일상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손님도 맞이했고, 농사일도 관리했고, 먼 곳이 아니면 조문과 같은 외출도 했고, 약간의 음주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시묘살이 동안 거처하는 묘막에도 온돌을 설치했고 시종도 거느렸다. 시묘살이를 하는 사람은 대부분 한 집안을 이끌어 가는 가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일에 소홀할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수년간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생계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때문에 생계와 관련한 일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생활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면 시묘살이에 대한 오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집의 규모가 여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다. 신영훈 선생은 “여막이라기보다는 시봉청(侍奉廳)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여막이든 시봉청이든 과거에는 집안 형편에 따라 그 규모도 달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민유중(1630/인조 8년∼1687/숙종 13년)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이러한 집안의 위세는 대단했을 것이다. 여막 뒤편 나지막한 동산 위에 있는 묘와 신도비를 보면,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일반인은 영의정을 지냈더라도 묘에 호석(護石)을 두른 경우는 없는데, 이 묘에는 호석이 둘려 있다.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의 글이 숙종의 친필인 것만 보아도 그 집안의 위세를 알 만하다. 그러한 집안의 묘막을 거적때기로 가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집안의 위세에 걸맞게 묘막도 크고 화려하게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성황후 생가 안채는 고종황제의 황후로 개화기 국정에 참여했으나 을미사변으로 일인에 의해 시해되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던 명성황후가 출생해 8세까지 살던 집이다. 이 집은 1687년(숙종 13년)에 왕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됐는데, 당시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27평뿐이다. 사랑채 옆 곳간에서 바라본 안채. 14칸 규모의 민도리집인데, 8칸 규모의 팔작지붕 본채 한쪽에 6칸 규모의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 평면을 이룬다. 행랑채와 사랑채 마당에는 초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유교 사회에서 안채와 사랑채를 개방해명성황후 생가는 주변 정비 사업을 하면서 복원한 것이다. 여흥 민씨 집안사람이 살았던 여주군에서 매입하여 문화재로 지정했다. 1976년 안채를 중수(重修) 하고, 1995년에 사랑채와 행랑채 등을 중건하고, 주변을 정비하여 공원으로 만들었다. 나머지 건물들은 최근에 신축했기에 과거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것은 안채뿐이다. 6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관리인 이야기로는, “50년 전만 해도 밖의 행랑채까지 완형(完形)을 갖추고 있었다”고 했다. “가세(家勢)가 기울어 집을 관리하기 힘들자, 집주인이 조금씩 헐어 화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행랑채와 사랑채가 사라졌다”고 한다. 어쨌든 복원한 집과 원래의 집은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안내문에는 “비가 서있는 곳까지 집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기에 과거의 모습을 정확하게 복원한 것은 아니다. ‘원래의 모습대로 집을 복원했을까’ 하는 문제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가 서로 너무 개방적이라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집에서 안채와 사랑채가 이렇게 개방적 구조를 가진 예를 보지 못했다. ‘복원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개방형 구조로 만든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어쨌든 건물만 바라본다면 그리 가치가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집이 왜 지어져서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살펴본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면 한 번쯤은 찾아볼 만한 집이다. 오량 구조인 4칸 대청. 안채에서 바라본 사랑채 옆 중문과 행랑채 옆 대 문이 대각선으로 나 있다. 조선시대 사랑채 내부(재현). 고택을 보존하는 이유는여막 용도로 지었기 때문에 집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안채의 대청도 그리 높게 만들지 않아 권위적인 풍취를 찾기 힘들다. 권위를 내세우는 것을 자제하려는 의지마저 느끼게 한다.어쨌든 여막의 기능에 충실하려고 했던 모습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집은 민유중이 세상을 떠난(1687년) 그 무렵에 지었을 것이다. 이 집이 오래됐다는 것은 창문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양 여닫이 창문 가운데 문을 닫기 위해 설치한 수직부재는 옛날 방식이다. 이러한 점이 집의 연륜을 말해 주고 있다. 집은 사람이 살고 있을 때라야 가치를 지닌다. 마치 보여 주기 위한 모형처럼 잘 다듬어진 집을 볼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느끼기 위해 찾아가는가?’ 하는 회의감마저 든다. 이 집을 찾는 관광객은 대부분 단체 관람객이다. 그중에는 한류 열풍을 타고 찾아온 대만 관광객도 있다. 요사이 명성황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부쩍 사람이 늘어났다. 예전에는 이 집에 들어가려면, 관리인을 찾아서 문을 열어 달라고 했을 정도였는데, 그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실감한다. 그러나 이제 ‘명성황후 생가’는 집에 대한 가치가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깨끗한 환경과 잘 닦인 도로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던 집들이 사라졌으니 박제(剝製)화된 허상만 남았을 뿐이다. 건물 안에 진열한 인형들 그리고 영어 번역기에서 흘러나오는 생경한 소리가 어색하기만 하다. 집이란 사람이 숨 쉬고 생활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을 느끼지 못한다면, 집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집을 보존한다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깨끗함이 아니라 생활이 담겨 있는 보전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안채 대청의 들어열개창과 퇴칸. 안채 대청마루와 사랑채.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서 ‘ㅁ’자형 배치를 이룬다. 안채 후정. 바닥에 납작 깔린 굴뚝이 이채롭다. 묘를 향해 머리를 돌린 신도비의 귀부이곳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신도비(神道碑)이다. 돌아간 분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비석으로, 한(漢) 나라 양진(楊震)의 ‘고대위양공지신도비(故大尉楊公之神道碑)’에서 비롯하여 종 2품 이상의 품계를 받은 사람에 한하여 세웠던 것이다. 민유중이 사망한 뒤 30년이 지난 1707년에 세워진 이 신도비는, 현재 민유중의 무덤과 함께 향토유적 5호로 지정돼 있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매우 뛰어난 솜씨를 자랑한다. 단순히 조각의 솜씨가 좋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신도비에는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힘이 있다. 거북 형상의 귀부가 갖춰져 있는 신도비는 고려 시대나 통일신라시대 많이 만들어졌던 부도비에 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의 부도비나 신도비는 고려 말부터 간략화되어 형식적으로 변화하고 힘도 약해진다. 그러나 이 신도비는 매우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조각 솜씨를 보여 준다. 머리가 민유중의 무덤을 향하고 있는 거북을 보면, 지금이라도 달려갈 것 같은 힘이 느껴진다. 비신(碑身 :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위에 올려져 있는 이수(비석의 머리) 하부에는 용 문양이 조각돼 있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전 시대를 통해서도 보기 힘든 양식이다. 어쨌든 이 신도비는 보물 제584호로 지정된 구례의 윤문효공신도비나 보물 제1395호로 지정된 도갑사 도선·수미비에 비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왜 이 신도비가 국가지정문화재로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一’자형 초당에서 바라본 안채. 초당 툇마루의 들어열개창. 민유중의 묘에서 본 전경. 민유중의 묘와 신도비. 귀부의 머리는 묘소 쪽을 향해 우향으로 틀고 있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
-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
고택을 찾아서, 조선 중기 살림집을 엿보게 하는 여주 명성황후 생가
-
-
2021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최우수상,
나무로 틀과 안을 채운 파주 수오서재
- 가문비나무로 구조와 인테리어를 이루는 수오서재는 파주에 위치하는 출판사 사무실 용도로 지은 건축물이다. 이곳을 설계한 건축가 최삼영 소장은 책을 만드는 종이와 동일한 유전자인 나무를 이용해 건축물의 구조와 실내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이곳에서 근무하는 직원과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직원의 아이들을 배려한 융합 공간을 계획해 넣었다.글 사진 최삼영(가와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 진행 이수민 기자사진 석정민 작가 HOUSE NOTE DATA 위치 경기 파주시 서패동 구조 목구조 지역지구 계획관리지역, 생산관리지역 건축규모 지상 2층 건축용도 제2종 근린생활시설 대지면적 482.00㎡(145.80평) 건축면적 98.57㎡(29.81평) 연면적 180.61㎡(54.63평) 건폐율 20.45% 용적율 37.47% 설계 ㈜가와종합건축사사무소 최삼영 02-3143-0057 www.kawadesign.net 시공 ㈜수피아건축 MATERIAL외부마감지붕 - 알루징크 거멀접기벽 - 시멘트벽돌, 루나우드 사이딩내부마감천장 - 노출목구조, 아라우코 합판벽 - 아라우코합판, 석고보드 2겹 위 친환경수성페인트바닥 - 원목마루 마당에서 본 사이 공간. 반 층씩 물리는 스킵 형 단면을 가지며 중앙에 위치한 사이 공간으로 순회하는 동선을 가진다. 종이와 나무 그리고 1.8m의 경사이곳은 책을 만드는 회사다. 책은 종이로 만들어지며 종이와 나무는 동일한 유전자다. 이 건물의 구조는 가문비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실내마감도 동일한 색상과 질감의 원목과 합판으로 구성하였다. 1.8m의 고저차를 가진 기다란 대지에 지어지는 건물은 대지의 형상에 순응하여 반 층씩 물리는 스킵 형 단면을 가지며 중앙에 위치한 사이 공간의 빛과 산딸나무를 중심으로 순회하는 동선을 가진다. 연결되고 분리되는 가변적 공간. 외부로 열린 복도. 휴식이 되는 창. 직사광선을 막아주는 처마 밑의 창은 직원들이 외부 풍경을 바라보며 걸터앉아 책을 볼 수 있는 휴식공간이 된다. 아이들과의 업무직원들의 가족 중 또래의 어린아이들이 몇 있다. 아이와 같이 출근한 엄마 아빠를 배려해 숲을 배경으로 외부 놀이 공간을 두었다. 마당에서 뛰어놀고 들어온 아이들을 위해 샤워 가능한 화장실과 작은 부엌도 고려해 주었다. 적당한 개방감의 칸막이는 근무 중인 부모를 안심하게 할 것이다. 공간을 통합하는 스킵플로어. 구조와 일체화된 책장. 공간을 통합하는 반 층씩 걸친 계단. 담장 너머의 사이 공간야트막한 담장으로 켜를 두고 오목한 사이 공간을 통해 출입하며 내부의 이동은 늘 사이 공간을 중심으로 순회하게 만들었다. 사이 공간에는 다간의 산딸나무를 심었다. 외부 색상의 통일감 또한 시선을 모은다. 직사광선을 막아주는 깊은 처마의 지붕과 외벽은 시멘트 벽돌의 회색 느낌으로 통일 시켰다. 구조재 책장메인이 되는 사무공간은 4.8m 높이의 책장이 구조로 사용되며 평균 층고가 3.6m 넘는 개방감에 초점을 둔 공간이다. 89×265 구조용 공학 목재를 반으로 켜낸 수직재와 38×265 수평재는 구조인 동시에 내부 책장으로 사용하여 구조와 인테리어로 일체 시켰다. 평균 층고가 3.6m를 넘는 메인이 되는 사무공간은 4.8m 높이의 책장이 구조로 사용된다. 목구조를 그대로 드러낸 목재 커튼월. 따뜻하고 차분한 목재 마루. 봄여름에 하얀 꽃조경은 건축의 마무리 단계다. 수오서재의 조경은 봄, 여름에 하얀색 꽃이 피는 나무로 전체 개념을 잡았다. 하얀색 꽃들의 합창과 가을이 되면 각자의 색으로 맺는 열매와 낙엽의 독창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무와 지피뷰의 조화로운 동산이 해를 거듭하며 마당을 풍성하게 채워줄 것을 기대한다. 1층과 2층 사무공간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이 공간과 산딸나무. 수오서재는 1.8m의 고저차를 가진 기다란 대지에 지어졌다. 건물은 대지의 형상에 순응하여 반 층씩 풀리는 스킵 형 단면을 가진다. 정적임 속 작은 역동감을 표현한다. 벽돌과 루나우드 사이딩 외장 마감재가 내유외강의 차분한 느낌을 표현한다. 스프러스 글루램과 팀버재로 만든 책장수오서재는 출판사 사옥이라는 특성을 살려 종이와 동일한 유전자인 나무로 집을 지었다. 건물 구조는 가문비나무를 이용했고, 실내마감도 동일한 색상의 질감의 원목과 합판으로 구성하였다. SIP : 구조용 단열 패널단열은, 지붕과 층간 슬라브는 SIPStructural Insulate Pannels로 시공하였다. SIP 구조는 EPS 단열재를 사이에 끼고 구조용 합판을 양면에 접착시킨, 단열과 구조를 동시에 해결하는 경제적 구법이다. 목재 커튼 월 시공보와 기둥을 포함해 창문틀 또한 구조용 집성재를 사용했다. 구조적 역할과 더불어 인테리어로 활용하여 실내는 온통 나무의 향기와 색으로 통일되었다.직사광선을 막아주는 처마 밑의 창은 직원들의 외부 풍경을 바라보며 걸터앉아 책을 볼 수 있는 휴식공간이 된다. (턱 높이 450㎜ 창 깊이 600㎜) 최삼영(가와건축사사무소/건축사)가와종합건축사무소를 개소하고 운영 중인 대표 건축사다. 자연과 삶, 건축과 지역의 관계를 고민하며 소규모 단독주택부터 타운하우스, 대규모 현상 설계까지 영역을 두지 않고 작업을 진행한다. 대한민국 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 4회, 아시아건축상(ARCASIA AWARD) 금상 2회, 대한민국 토목건축대상 최우수상, 서울시 건축상, 한국건축가협회 특별상 등 다수의 건축상을 수상했다.02-3143-0057 www.kawadesign.net
-
-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
2021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최우수상,
나무로 틀과 안을 채운 파주 수오서재
-
-
고택을 찾아서, 집에 품위를 입힌 목수의 솜씨를 한눈에 여주 김영구 가옥
- 쌀과 도자기로 유명한 여주는 문화재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의 영릉과 신륵사가 있고, 부도(浮屠)로 유명한 고달사지가 있다. 그 외에도 보물로 지정된 탑도 몇 있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좋은 집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명성황후 생가(경기도 유형문화재 46호)와 김영구 가옥(중요민속자료 126호)이 그것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옛집을 보는 맛이 없으나, 김영구 가옥은 마을 안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어 옛집을 보는 맛이 그대로 살아 있다. 김영구 가옥은 경기도 지역에서 보기 드문 폐쇄된 ‘ㅁ’자 형태의 집이다. 학자들이 ‘서울에서 내려온 장인이 지었을 것’으로 추정할 만큼 잘 지은 집이다. 품위를 느끼게 하는 집이 그리 많지 않는데, 그러한 솜씨 때문인지 이 집에서는 다른 곳에서 느끼지 못했던 품위를 엿볼 수 있다. 집 지은 솜씨가 대단하여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다. 목수의 솜씨는 잘 짜진 선자(扇子) 서까래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누마루의 안쪽 천장에 드러나 있는 선자서까래의 뒤 뿌리 부분을 보면,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가지런하면서도 아름답게 짜여져 있다. 추녀 곡선도 부드러우면서 아름답게 넘어간다. 누마루는 장초석(높은주춧돌)으로 받치고 있다. 사랑채의 기단도 잘 다듬은 돌로 2벌대로 쌓았다. 안채의 기단도 잘 다듬은 돌을 외벌대로 돌렸다. 이것만으로도 건물의 품위를 느낄 법한데 기둥에서 문짝까지도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다. 문짝을 짠 소목의 솜씨도 매우 뛰어나 문짝의 비례가 잘 맞고 세부 처리에서도 섬세함이 돋보인다. 그래서인지 집주인은 도둑이 와서 문짝까지도 뜯어간 적이 있다고 했다. 과연 그러할 만한 솜씨를 보여 주는 집이다. 경기도 지역에서 보기 드문 폐쇄된 ‘ㅁ’ 자 형태의 집. 집터를 잡은 빼어난 안목김영구 가옥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주인은 18세기경에 지어졌다고 주장한다. 집 앞에 있는 안내판에도 영조 29년(1753년)에 지어졌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 자료에는 186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집주인의 말로는 대들보에 상량문이 두 곳에 기록돼 있는데 한쪽만 보고 그렇게 추정한 것이라고 한다. 김영구 가옥 사랑채에서 밖을 바라다보면 자리를 참 잘 잡았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좌우의 나지막한 언덕이 집터를 감싸고, 그 너머 앞으로 작은 언덕이 집을 가려준다. 막힌 듯하면서 잘 트인 지형은 풍수를 모르더라도 찬탄이 절로 나온다. 참 안온하면서도 시야가 적당히 트인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집터를 잡는 안목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원래는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사랑채 앞, 밭으로 쓰는 부분이 행랑채 터라고 한다. 대문은 사랑채에서 바라볼 때 좌측에 있었다고 하니, 현재 진입로가 난 곳일 것이다. 그쪽이라야 대문에서 들어와 중문이 바로 바라보이지 않기에 집의 배치와 어울리는 위치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징 중 하나는 작은 사랑채가 건넌방 쪽에서 밖으로 돌출돼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식의 집을 필자는 보지 못했다. 작은 사랑채의 뒤쪽에도 툇마루가 있고 건넌방 뒤쪽에도 툇마루가 있다. 작은 사랑채가 안채 바깥쪽에 있어 사랑채와 안채를 엄격히 구분한 것 같지만, 며느리가 사는 건넌방과 새신랑이 머무는 작은 사랑채는 바로 통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안채를 거치지 않고도 은밀히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사랑채를 이렇게 배치한 것은 새신랑에 대한 보이지 않는 배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장치가 있다. 중문이 사랑채 누마루를 지나 돌아 들어가게 돼 있어 내외문 역할을 충분히 하지만, 중문 바로 앞에 서면 안채 일부가 들여다보인다. 이러한 점이 집주인의 눈에는 거슬렸나 보다. 그래서 중문 안 안채가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반쪽짜리 문을 덧달았다. 조선 후기 내외에 대한 엄격함을 다시 느끼게 하는 장치다. 집의 품위를 엿보게 하는 잘 짜진 선자(扇子) 서까래. 장초석으로 받친 누마루의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추녀 곡선과 2벌대 기단의 사랑채. 잘 다듬은 돌을 외벌대로 돌린 안채. 비례가 잘 맞고 세부 처리에서도 섬세함이 돋보이는 문짝. 찬모는 어데 가고 종부만 남아안채는 남쪽으로 길게 늘어진 ‘ㅁ’자 형으로 배치돼 있다. 지세가 동서로 길게 배치할 수도 있었지만 작은 사랑채 때문에 남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것 같다. 이러한 배치로 남쪽에 자리한 사랑채의 그림자가 지는 부분을 줄여 안채 마당을 늘 밝게 한다. 안채의 규모도 작은 편이 아니다. 부엌 상부에 설치된 다락도 넉넉하고, 특히 안방도 대청과 같은 규모다. 이렇게 넓게 계획한 안방도 보기가 쉽지 않은데, 거의 두 칸 규모의 간살임에도 불구하고 기둥을 과감히 빼어 버린 것은 안방에 대한 배려를 느끼게 한다. 이 집 안방마님의 권위는 대단했을 것이다. 부엌 아래쪽으로는 찬방과 찬모방을 배치했다. 집의 규모에 걸맞은 시설들이다. 지금은 종부(宗婦)가 직접 음식을 만들지만, 예전에는 집주인의 지휘 하에 찬모가 음식을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변화되어 종부가 직접 음식을 만들다 보니 종가댁 며느리로 들어가는 것이 기피 대상 1호로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조 종부의 권위는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이 집에도 별도의 사당이 없이 대청 한구석을 사당으로 이용했다. 원주인이었던 창녕 조씨도 상당한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사당을 짓지 않은 것을 보면, 사당은 그렇게 일반적이라고 볼 수 없는 것 같다. 현재는 사당 자리를 화장실로 개조해 쓰고 있다. 집주인의 말로는 자신들은 제사를 모시지 않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 개조했다고 한다. 아마도 집주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제사를 모시지 않았을 것이다. 대청의 구조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구조다. 언뜻 보면 퇴가 있는 대청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퇴칸이 아니다. 원래는 두 칸 간살의 대청인데 안방의 벽체와 맞추어 들어열개창을 설치했기 때문에 앞에 퇴칸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대들보가 걸린 부분을 자세히 보면, 대들보 하부에 기둥이 설치돼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든 것은 제사와 같은 대규모 집안 행사가 있을 때, 모든 문을 들어 열어 더 넓게 쓰기 위함일 것이다. 안마당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해시계(경기도 민속자료 2호)가 놓여 있다. 해시계는 원래 사랑채 앞에 있던 것인데 누가 훔쳐 가려 한 후 안채로 옮겼다고 한다. 덩그렇게 놓인 돌이 무슨 해시계냐고 하겠지만 돌 위에 별도의 장치가 있었을 것이다. 이 집은 원래 창녕 조씨의 집이었다. 김영구 가옥이라는 명칭은, 현재 집주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집의 경우 문화재 명칭을 정할 때, 대부분 지정 당시 살고 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집의 내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현재 문화재청에서 명칭을 다시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지형에서 빼어난 풍수를 알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문. 중문 안 안채가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반쪽짜리 문을 덧달았다. 내외에 대한 엄격함을 느끼게 한다. 집주인은 37년 전 조씨 집안에서 이 집을 구입했다고 한다. 전 주인이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가산을 탕진해 집을 넘긴 것이라고 한다. 앞의 행랑채도 전 집주인이 팔아넘긴 것이라고 한다. 집주인의 말로는 행랑채를 옮겨다 지은 집이 마을 어귀에 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대대로 물려 살아온 집을 남의 손에 넘길 수밖에 없었을까. 창녕 조씨 집안도 위세가 대단했다. 이 집을 지었다고 알려진 조석우는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그의 고조부였던 조하망은 강릉부사와 승문원부제조를 역임했을 정도다. 그러나 후손의 욕심 때문에 조상과 가문에 커다란 누를 끼치게 했다. 집주인이 문득 한 ‘집은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집을 자신들이 구입했다는 자부심 때문일까. 사랑채의 그림자가 지는 부분을 줄여 안채 마당을 늘 밝다. 안방에서 바라본 건넌방과 부엌, 곳간. 안채 대청은 두 칸 간살인데 안방의 벽체와 맞추어 들어열개창을 설치했다. 해시계. 후정에서 바라본 안채의 툇마루와 굴뚝.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
-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
고택을 찾아서, 집에 품위를 입힌 목수의 솜씨를 한눈에 여주 김영구 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