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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외부공간이 주는 다채로운 생활 주택 예랑헌
- 주택은 프라이버시를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건축주의 의견으로 설계자의 독특한 아이디어가 적용됐다. 그 결과 두 외부공간이 마련됐고 최종적으로는 주어진 면적에서 더 다채로운 주택 생활을 이루게 됐다. 정리 남두진 기자글 차현호, 최준석(나우랩건축사사무소 소장)사진 최진보 작가자료 나우랩건축사사무소※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인터뷰와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OUSE NOTEDATA위치 경기 용인시용도 단독주택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대지면적 241.00㎡(72.90평)건축면적 118.51㎡(35.85평)연면적197.59㎡(59.77평)1층 88.59㎡(26.80평)2층 88.77㎡(26.85평)3층 20.23㎡(6.12평)건폐율 49.17%용적률 81.99%설계기간 2020년 7월 ~ 2021년 4월시공기간 2021년 7월 ~ 2022년 2월설계 나우랩건축사사무소 010-8360-8060 www.naau.kr시공 평안건설 010-3788-9303 MATERIAL외부마감지붕 - 징크패널외벽 - 스타코플렉스, 모노타일데크 - 합성목재, 고흥석내부마감천장 - 수성페인트내벽 - 수성페인트, 노출콘크리트바닥 - 원목마루단열재지붕 - 압출법보온판 1호 준불연외벽 - 비드법보온판 2종 3호 준불연계단실디딤판 - 오크 집성목난간 - 환봉 철제난간창호 알루미늄 삼중창호(아키페이스), 천창(벨룩스)도어 현관 - 리치도어내부 - 제작위생기구 아메리칸 스탠다드난방기구 경동 콘덴싱보일러 비를 피할 수 있는 주차장과 현관 진입부 모습 1층 현관 옆으로 신발장과 물건을 수납하는 창고를 두었다. 건축주는 이번 집 짓기에 장난꾸러기 두 아이를 위한 안전을 일 순위로 꼽으며 이외에는 많은 요구를 하지 않았다. 재택근무로 집 안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방해받지 않는 공간이 필요한 점, 마당은 크지 않아도 되며 혹시 정원을 계획하더라도 가드닝은 버거울 것 같아 식재를 많이 할 것 같지 않다는 점, 작지만 쓸모 있고 명확한 외부공간이 필요한 점 등 미팅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요약하면 요구사항은 대략 이 정도로 조율됐다. 주방을 중심으로 아이들 놀이공간과 계단실을 배치했다. 왼편 거실의 마당과 오른쪽 주방의 마당은 각기 다른 역할을 갖는다. 주방 너머로 테이블 세트가 마련된 작은 마당이 보인다. T자 평면의 돌출 공간은 현재 아이들 놀이공간으로 사용된다. 주방과 연계된 작은 마당 위로 자동 차양과 철제 프레임이 따뜻한 위요감을 만든다. 여느 주택과 차별된 두 개의 외부공간택지 개발 지구 단독주택 필지는 대게 비슷한 조건을 가진다. 평평한 레벨인 대지는 1면이 도로에 접하고 나머지 3면이 주변 집들에 둘러싸인다. 법적 제한사항도 비슷한 지구단위계획을 적용받는다. 이런 조건에서 보통 건축주의 첫 번째 요구사항은 외부 시선을 차단한 프라이버시의 확보, 두 번째 요구사항은 채광을 담은 환한 내부다. 이 두 조건을 중심으로 설계는 시작된다. 간혹 건축주가 프라이버시를 크게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좀 더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적용할 수 있다. 이번 용인 영덕동 주택 ‘예랑헌’이 그랬다. 예랑헌의 큰 특징은 1층 마당에 있다. 일반적으로 주택 마당은 가능한 넓게 하나로 계획하지만, 예랑헌은 마당이 있을 위치에 실내 공간이 돌출돼 그 공간을 좌우로 성격이 다른 외부공간 두 개가 생겼다. 두 외부공간 중 주방에 연계된 곳은 탁자와 의자를 둬 모임공간으로 계획했다. 위에는 비나 눈을 피할 수 있는 차양과 다시 그 위에 꺾인 철제 프레임을 설치해 고즈넉하면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로 조성했다. 이때 바닥은 흙이나 잔디가 아닌 하드페이빙으로 마감해 드나들기 편하도록 했다. 거실과 연계된 다른 한 곳은 잔디마당으로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모래 놀이터가 있다. 건축주가 시골집에서 직접 가져온 대추나무와 벚나무도 함께 식재해 외부 시선을 차단하면서 동시에 여름철엔 선선한 그림자를 형성한다. 계단실 상부 천창은 북쪽을 향하고 있어 직사광선 대신 은은한 빛이 떨어진다. ㅁ자 평면의 2층 복도 끝에는 창문이 있어 복도가 어둡지 않다. 복도. 부모 침실 마스터존에는 윈도우 시트 부모 침실에서 바라본 마스터존의 모습 욕실, 세탁건조실, 화장실, 드레스룸으로 이어진 공간이 좌우로 숨어있다. 실내는 노출콘크리트와 페인트도장 원목마루의 따뜻한 질감이 어우러진다. 안방 진입 전 작은 휴게공간을 마련해 완충 역할을 부여했다. 안방 헤드월은 히노끼 루버로 마감해 단조로운 느낌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안방에서 바라본 마스터존의 모습. 욕실, 세탁건조실, 화장실, 드레스룸으로 이어진 공간이 좌우로 숨어있다. 아이들 방에는 향후 수납장을 짜넣을 상부에 간접조명을 설치해 부드럽게 방을 밝히도록 했다. 요구사항 반영한 다양한 층별 평면1층은 거실-식당-주방을 일자로 둔 상태에서 식당과 가깝게 알파 공간을 배치해 T자형 구조가 됐다. 이곳은 현재 아이들의 놀이공간으로 사용되는데, 집안일을 하는 동안 어른의 시선이 닿아 안전 관리에 효율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훗날 아이들이 2층 각 방으로 옮겨갈 때가 오면 자연스럽게 식당이나 거실과 연계된 다실 혹은 아내의 개인 공간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날 좋은 계절에 두 마당을 바라보도록 창을 활짝 열어두면 시원한 바람이 통하는 여유 있는 힐링 공간이 될 것이다. 2층은 계단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개별 실들이 포진한 ㅁ자형 구조다. 건축주는 넓은 욕실에서 아이들과 목욕하고 싶은 ‘함께’와 부모 공간과 자녀공간이 명확한 ‘분리’의 개념이 공존하길 바랐는데, 이로 인해 복도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실들을 가장자리에 배치한 덕분에 채광과 환기라는 기능적인 부분을 놓치지는 않았다. 중심에 위치한 계단실 또한 가장 위의 천창을 통해 은은한 채광이 들어와 중심에서 부드럽게 빛이 스미는 효과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1층이 아내 공간이라면 3층은 재택근무가 잦은 남편 공간이다. 넓지는 않지만 중간중간 쉴 수 있는 옥상정원을 연계하거나 조망을 가질 수 있는 큰 창을 마련해 일의 효율성도 고려했다. 돌아보면 예랑헌은 ‘쓸모 있는 공간’이 무엇인지를 탐구한 과정이었다. 외부공간을 활용하는 법, 부모와 함께하는 자녀공간의 유의점, 복도 사용에 알맞은 채광의 조율, 재택근무에 효율을 더할 환경 및 분위기 조성 등 여러 질문들에 대한 답을 이번 설계를 통해 조금은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건축주가 함께 노력한 이곳 ‘예랑헌’에서 돈독한 주택 생활을 이루어가길 바란다. 3층은 천창과 옥상을 계획해 재택근무 공간으로써 업무 효율에 신경 썼다. 나우랩건축사사무소건축가 차현호(왼쪽), 최준석(오른쪽)은 2017년 나우랩건축사사무소(NAAULAB ARCHITECTS)을 개소해 단독주택 위주로 다수의 중소규모 건축설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건축설계는 결국 작은 단서로부터 시작된 실제 아이디어와 기술, 그리고 비용의 절충점을 찾는 작업이다. 그리고 작업의 결과물로써 좋은 디자인을 지닌 쓸모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건축의 본질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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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외부공간이 주는 다채로운 생활 주택 예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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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성이 집 안에 들어오다 '심온당'
- 심온당은 코로나19로 외부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집이다. 중정을 만들어 충분히 자연을 접할 수 있게 했고 주택 곳곳에 적삼목, 화강석 등을 적용했다. 2층에도 방 한가운데 실내 중정을 두어 하늘을 볼 수 있게 했다. 자연의 공기가 충분히 실내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창호 배치도 돋보인다. <전원주택라이프>가 심온당을 설계한 성종합건축사사무소로부터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편집부) 글 김성곤(성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진행 노철중 기자사진 성종합건축사사무소※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인터뷰와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OUSE NOTEDATA위치 경남 김해시지역/지구 제1종 일반주거지역, 지구단위계획구역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대지면적 279.20㎡(84.46평)건축면적 136.57㎡(41.31평)연면적 184.36㎡(55.77평)건폐율 48.91%용적률 66.03%설계기간 2021년 1월~6월시공기간 2021년 7월~2022년 1월설계 성종합건축사무소 051-506-0572 blog.naver.com/sg8883시공 미래건축 MATERIAL외부마감지붕 - 징크패널벽 - 고흥석 버너구이, 스타코, 적삼목데크 - 아비동내부마감천장 - 실크벽지, 자작나무 합판벽 - 실크벽지, 자작나무 합판바닥 - 원목 마루판계단실디딤판 - 말바우난간 - 목재손잡이단열재지붕 - 180㎜ 스티로폼외벽 - 100㎜ 스티로폼, 40㎜ 열반사단열재내벽 - 4㎜ 열반사단열재창호 3중 유리 시스템창호현관문 단열패션도아주요 조명 LED 마당 확보 고심한 대지대지는 도로에 면한 가로 길이가 세로 길이의 2배인 형상이다. 게다가 지구단위계획 지침에는 도로변에서 1m를 후퇴해 건축하도록 건축 한계선도 정해져 있다. 이는 각 필지가 인도를 확보하라는 얘기다. 이렇게 폭이 좁은 대지는 마당을 확보하는데 많은 제약이 따른다. 특히 건축주는 집 가운데 마당 있는 중정형을 원했는데, 적정한 마당 확보를 위해 많은 고심을 했다. 짙은 회색과 백색 그리고 적삼목으로 마감한 주출입구.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과 현관은 목재로 마감했다. 매입등과 목재루버의 벽, 목재바닥재로 마감한 실내 중정. 시대성 반영한 배치 및 평면코로나19 바이러스의 심각성은 삶의 패턴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거실 위주의 문화에서 주방 문화로 바뀐 점도 그중 하나다. 밖을 맘대로 나갈 수 없으니 자연을 접하는 마당이 필요하고, 주방은 먹거리 해결과 함께 차와 담소를 나누는 다목적 공간이 됐다. 음악이 흐르면 멋진 카페가 된다. 배치와 평면은 이런 시대성을 반영했다. 깊이가 필요한 주거공간은 ㄱ자형으로, 작은 부속 공간은 ㄴ자형으로 한다. 그러면 일정한 크기의 안마당이 확보돼 직사각형의 ㅁ자형 평면이 된다. 2층은 자녀들 공간인데, 방 가운데 있는 실내 중정은 하늘이 보이는 쉼터다. 2층 평면은 一 자형으로 계획해 전망 확보와 채광을 고려했다. 무늬 결이 고운 자작나무 합판과 백색의 벽지로 마감한 거실. 거실 천장과 벽이 만나는 자작나무 합판은 줄눈이 일치돼 심플하다. 거실에서 바라본 마당의 풍경. 긴 식탁 위 펜던트 조명과 간접조명이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모서리 공간을 활용해서 싱크대와 수납장을 길게 배치했다. 자연을 담은 입면외관은 산의 스카이라인을 닮았다. 도로 폭이 좁을 경우, 도로변은 1층으로, 2층과 다락은 셋백 set back 하면 개방감을 느낄 수 있다. 색상은 화강석의 짙은 회색과 스터코의 백색으로 대비시켰다. 주출입구는 적삼목 마감이다. 짙은 화강석과 적삼목은 자연소재라 시간 흐름에 따라 변해 갈 것이다. 인간이나 건축이나 변하는 것은 같다. 그래서인지 친근감이 간다. 2층의 긴 복도는 사생활을 보호하는 빛의 전위 공간이다. 2층의 데크마당, 프라이빗 한 공간은 벽으로 막았다. 안마당의 툇마루와 대문이 정겹다. 복도에서 외부로 돌출된 창은 걸터앉아 차를 마실 수 있게 했다. 단풍나무 한 그루만 식재하고 비운 좁고 긴 안마당. 환기 고려한 인테리어공용공간의 마감 재료는 무늬결이 고운 자작나무 합판과 백색의 도배지를 혼용했다. 조명은 간접조명과 직부조명으로 하고 간접등의 빛은 따뜻한 오렌지색으로 했다. 식탁의 펜던트를 제외하고 모두 매입형으로 돌출이 없다. 창호는 방마다 자연 환기를 위해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두 곳으로 계획했다. 창의 배치는 실내공기의 흐름이 고려된다. 특히, 주방의 창호 설치는 중요하다. 코로나로 인한 환기가 필요할 뿐 아니라, 자연 환기는 건강한 삶의 요소다. 심온당의 건축주는, 정확하고 합리적이다. 설계에서부터 감리 그리고 공사 관리까지 믿고 맡겨줬다. 책임감은 무거웠지만, 설계 의도대로 나름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에 감사드린다. 남측 외관. 목재로 마감한 주출입구. 백색과 회색의 무채색으로 대비한 심온당의 외관. 산세의 스카이라인을 닮았다. 김성곤 성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김성곤 건축사는 ‘행복한 삶을 위한 건축’을 화두로, 자연과 건축의 관계 맺기 그리고 전통건축의 정신을 현대건축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통해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2016년 ‘도원겸’ 2017년 ‘미연재’ 2018년 ‘인애당’2019년 ‘강안당’, ‘화백당’, ‘다옴재’, 2020년 ‘무송헌’, ‘하린재’, ‘임재’ 2021년 ‘소소담, ‘수서헌’, ‘금림재’를 설계해 6년 연속 「경상남도우수주택」에 선정됐으며, 창원시 건축상, 동래건축상 우수상, 사하건축상 금상, 부산건축대전 완공 건축부문 동상 등 다수의 건축상을 수상했다.051-506-0572 blog.naver.com/sg8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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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성이 집 안에 들어오다 '심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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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남녀유별의 관념을 무너뜨린 예산 이남규 고택
- 이남규李南珪(1855∼1907, 철종 6∼순종 1) 선생은 1875년 과거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1894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등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후 의병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아들 충구忠求와 함께 일본군에게 피살된 애국지사다. 이 고택(충남유형문화재 제68호)은 1911년 현재 주인인 이문원 선생의 부친이 러시아로 잠시 들어간 동안 서울 부자에게 넘어갔지만 후에 다시 매입했다. 작은 동산을 배경으로 단아하게 앉혀진 이 고택은 이문원 선생의 10대조인 한림공翰林公 이구李久에 의해 1637년에 초창됐으나 현 건물은 상량문을 보면 1846년에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기자 이문원 선생은 이 땅은 지금도 ‘새 터’로 불린다고. 집을 처음 지을 때 ‘새로 터를 잡았다’는 뜻으로 지금까지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예는 많다. 서울의 신촌新村, 새문안, 은평구 신사동新寺洞 등이 그러하다.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는 한산 이씨 집안의 큰 어른으로 북인北人의 영수였던 이산해李山海(1539∼1609, 중종 34∼광해군 1) 선생의 묘소가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도 이곳에서 이산해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이문원 선생은 이 집은 한림공의 부인 완산 이씨의 주도로 지었기에 사랑채보다 안채가 더 튼실하다고 한다.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로만 이루어졌고 앞에 문간채가 없는 특이한 구조다. 이문원 선생은 자신이 어렸을 때도 문간채는 없었고 사랑채 앞에 연못만 있었다고. 이로 미루어 볼 때 문간채는 꽤 오래 전부터 없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점 외에도 집의 배치는 여느 곳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사랑채는 대부분의 집에서 안채 전면에 자리한다. 남녀유별의 관념으로 사랑채에서 안채의 출입을 제어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집은 사랑채보다 안채가 앞으로 돌출돼 있고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도 사랑채에서 제어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안채가 사랑채보다 우위에 있는 배치다. 이러한 배치로 볼 때 앞서 한림공의 부인인 완산 이씨의 주도로 집을 지었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일리 있어 보인다. 당시는 남녀 모두에게 상속이 균등하게 이루어져 출가한 여자의 권리도 신장됐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1846년 이 집을 다시 지을 때도 한림공의 부인이 지었다는 초창의 배치를 그대로 유지했던 것 같다.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로만 이루어졌고 앞에 문간채가 없는 특이한 구조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하인방과 상인방을 휘어진 부재로 만들어 마치 원형의 문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에 툇마루가 있는 一자형의 사랑채와 건넌방, 마루방, 툇마루 등이 있는 ㅁ자형의 안채로 되어 있다. 초각에서 권문세가의 위풍을 평원정平遠亭이라는 당호堂號가 걸린 사랑채는 전후퇴(집채의 앞뒤로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조그마한 칸살) 집으로 정면 6칸 규모다. 사랑채는 전후퇴 집의 성격을 잘 살려 방의 효용성을 높였다. 다른 집과 달리 사랑채 대청 후면 반 칸을 한 자 정도 높여 미서기문을 설치했다. 이렇게 퇴칸에 단을 준 예는 거창 정온 고택의 안채에서도 볼 수 있다. 정온 고택은 제사를 위해 단을 높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 목적이 불분명하다. 일단 벽장용으로 보이지만 생활에서는 다양하게 쓰였던 것 같다. 이문원 선생은 예전 사랑채를 서당으로 이용했을 때 선생님이 위에 앉아 가르쳤다고 한다. 이러한 목적이라면 미서기문을 설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벽장으로 쓰다가 나중에 그러한 목적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품격이 매우 높다. 초석도 방형초석을 사용했고 구조는 굴도리집이지만 보아지를 초각함으로써 마치 익공집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다. 초각을 한 솜씨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지만, 당시 민가에서 초각을 했다는 점만으로도 파격적인 구조다. 당시에는 매우 권문세가權門勢家였을 것이다. 품격이 매우 높은 사랑채. 초석도 방형초석을 사용했고 구조는 굴도리집이지만 보아지를 초각함으로써 마치 익공집 같은 느낌이 든다. 멋스런 기교를 부린 안채 중문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역시 멋들어진 모습이다. 지나다니기에 편하게 하인방을 휘어진 부재로 만든 경우가 있으나 상인방도 그렇게 한 예는 드물다. 마치 원형의 문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도록 멋을 부렸다. 중문은 꺾어 들게 되어 있어 내·외벽 구실을 한다. 안채 중문간을 ‘ㅡ’자 형으로 전면에 배치하고 안채를 ‘ㄷ’자 형태로 감쌈으로써 전체적으로 튼 ‘口’자 형태다. 안채의 방은 일반적인 배치와 다르다. 안방은 일반적으로 서쪽에 배치하는데 이곳에는 동쪽에 있다. 서쪽에 안방을 배치하는 것은 《주자가례》에서 정침正寢(거처하는 곳이 아니라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쓰는 몸채의 방)의 오른쪽에 사당을 배치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사당과 떨어뜨려 안방을 배치하다 보니 대부분 사당 반대쪽인 서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사당을 만들지 않고 사랑채를 서쪽에 배치했으며, 그 가까운 건넌방 쪽을 제실로 만들었기에 안방을 동쪽에 배치한 것이다. 안채 건넌방 쪽은 북쪽 한 칸을 제실로 사용하고, 그 앞에 제청으로 사용하는 마루를 두 칸 배치했다. 대청을 중심으로 제실과 마주한 건넌방이 있다. 제실 구조를 보면 그 북쪽 벽에 돌출된 벽장을 만들어 사대조의 위패를 모셨으며 서쪽 벽에 별도로 벽장을 만들어 이산해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지금은 이산해 선생의 제사가 종가로 넘어갔기에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도 이곳에서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안채. 중문간을 ‘ㅡ’자 형으로 전면에 배치하고, 안채를 ‘ㄷ’자 형태로 감쌈으로써 전체적으로 튼 ‘口’자 형태다. 안채 건넌방의 북쪽 한 칸을 제실로 사용했다. 대가의 상징인 육간대청 제실 앞 대청과 사랑채 전면 퇴칸을 직접 연결하기 위해 안채 외측 담에 일각문一角門을 설치했다. 일제시대 서울 부잣집의 별장으로 쓰였을 때는 회랑을 설치해 비를 맞지 않고 다녔다고. 그러나 이문원 선생의 부친이 다시 이 집을 사들여 과거 모습대로 회랑을 철거했다고 한다. 이 일각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제청과 건넌방으로 들어설 수 있다. 그러나 건넌방 이외의 곳으로 못 다니도록 다른 마당으로 통하는 곳은 모두 담으로 막아 놓았다. 제실이 신성한 곳이므로 아무나 출입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로 보인다. 안채 기둥의 보아지를 초각으로 장식했으며 대청 전면의 지붕을 겹처마로 만들었다. 일반 사가私家에서 초각이나 겹처마를 쓰는 것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용한 데에서 이 집의 권위를 엿볼 수 있다. 대청은 여섯 칸으로 그야말로 대가의 상징인 ‘육간대청六間大廳’집이다. 사랑채도 그러하지만 안채도 기단을 높여 권위를 더했다. 원기둥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당시에 할 수 있는 모든 사치를 다했다. 현재 비어 있는 안채 동쪽 마당에는 원래는 찬광과 나뭇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있었고 우물은 원래 없었다고. 저수지가 세워지기 전에는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끌어들여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문원 선생은 예전에 400석 정도를 했다고. 그러나 사랑채에는 공부를 핑계로 늘 식객이 많아 생활이 넉넉지 못했다고 한다. 과연 지금 우리의 부자들은 어떠한가. 한 신문의 조사에 의하면 월수입이 400만 원이 넘는 고소득자 중 일년 내내 한 푼도 기부하지 않는 사람이 반이 넘는다. 과거 양반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베풀었는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조차 남아 있지 않아 씁쓸할 뿐이다. 이 곳에서 저수지 너머로 조금만 가면 충남유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된 이광임 고택이 있다. 이남규 고택보다 34년 후에 지은 집으로 여러모로 이 집과 비교된다. 배치는 이 집과 완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주지만, 사랑채의 구성이나 구조 기법 등은 비슷하다. 또한 목재가 상대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여 품격은 떨어진다. 두 고택을 찬찬히 비교해 보면 집에 대한 안목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또한 이남규 고택에서 저수지 쪽 밭으로 조금 더 가면 제방 바로 아래쪽에 충남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예산 상항리 석불이 있다. 그야말로 지방의 촌부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민속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꼭 들러볼 가치가 있는 석불이다. 이 주택에서 5분 거리에 자리한 이광임 고택. 제실 앞 대청과 사랑채 전면 퇴칸을 직접 연결하기 위해 안채 외측 담에 일각문一角門을 설치했다. 저수지 쪽 밭에 자리한 예산 상항리 석불. 민속학적 가치가 높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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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남녀유별의 관념을 무너뜨린 예산 이남규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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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풍수와 지형을 잘 펴 지은 논산 이삼 장군 고택
- 이삼 장군 고택은 윤증 고택에서 승용차로 2∼3분 떨어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 있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윤증 고택의 명성에 눌려서인지 답사자 조차 근처에 이삼 장군 고택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삼 장군 고택은 남다른 특징이 있어 한 번쯤 찾아볼 만하다. 글 최성호<산솔도시건축연구소 소장>사진 윤홍로 기자 이인좌의 난 때 세운 공으로 영조에게 하사받은 이삼 장군 고택 이삼 장군(1677∼1735)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서 감역을 지낸 이사길李師吉의 아들이다. 윤증(1629∼1714)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지근거리至近距離에 유명한 선생이 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는 병조판서 김구의 천거로 1705년(숙종 31년) 무과에 급제한 후 1713년 정주목사로 임명됐다. 그 후 1717년 평안도병마절도사와 함경남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내면서 봉수제도의 개선을 건의하는 등 군제 개혁에 관심을 기울였다. 경종의 신임을 받아 수원부사, 우포도대장, 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724년 어영대장 등을 지냈다. 1727년(영조 3) 훈련대장이 되어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관문을 잘 지킨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함은군咸恩君에 봉해졌다. 1729년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기계의 제조 및 여러 무술에 두루 능통했다고 한다. 이삼 장군 고택은 이인좌의 난 때 세운 공으로 영조에게 하사받았다고 한다. 주변 집들을 압도할 만큼 완연히 구별되는 높은 곳에 자리한다. 집은 풍수를 고려한 듯하다. 산줄기의 흐름이 끝나는 곳에 앞의 나지막한 봉우리를 안산案山으로 삼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솟을대문은 다른 집하고 완연한 차이를 보인다. 대개 솟을대문과 행랑채는 사랑채 정면에 배치하는데 이 집은 사랑채 측면에 위치한다. 이러한 배치는 대지의 조건과 사랑채에서 바라본 풍광을 고려한 듯하다. 이 집은 경사가 급한 대지 앞자락에 위치하기에 사랑채 앞의 대지는 좁은 마당을 두고 바로 급경사를 이루며 내려간다. 이러한 대지 조건에서 앞에 행랑채를 두었다면 사랑마당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랑채 앞에 행랑채를 두는 일반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솟을대문을 옆으로 돌린 것이다. 대문채를 옆으로 돌렸지만 지형의 흐름에 맞추어 사선으로 배치하고 보니 전체적으로 정연한 맛은 사라지고 말았다. 사랑채 앞에 행랑채를 두는 일반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솟을대문을 옆으로 돌렸다. 지형을 살려 안채의 권위를 높인 집이삼 장군 고택은 고방 4칸과 사랑채 3칸이 한 몸을 이루는 ㅡ자형 사랑채에 ㄷ자형 안채가 붙어 튼 ㅁ자형으로 구성하려고 했지만, 좌우 튼 부분에 문간을 만들고 지붕을 사랑채와 연결함으로써 외견상 ㅁ자 형태로 집 전체가 한 몸을 이룬다. 따라서 집 전체가 매우 폐쇄적인 구성이라 마치 경상북도 ㅁ자형 양반가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안채는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했다. 안방 쪽 몸체의 폭은 2칸 간살로, 건넌방 쪽 몸체의 폭은 1칸 간살로 하여 두 몸체 사이의 격을 달리했다. 안방은 제일 위쪽에 윗방을, 그 아래에 2칸 안방과 2칸 부엌을 배치했다. 일반적인 배치이나 폭을 2칸 간살로 했기에 다른 집보다 안방과 부엌의 규모가 커졌다. 이러한 계획은 안방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안채 마당은 3칸×5칸으로 일반적인 규모다. 그러나 ㅁ자형 집에서는 조금 답답해 보일 듯도 한데 대청에서 보면 이러한 느낌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대지의 경사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경사지에 집을 짓다 보니 안채도 높이에 차이가 난다. 특히 중문과 대청 간의 고저 차는 거의 반 층 높이에 달한다. 이렇다 보니 평지에 지은 집에 비하여 대청이 높다. 대청에서 바라보면 하늘만 보이기에 공간적으로 개방감이 강하다. ㅁ자형 집임에도 그리 폐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또한 안채의 고저 차는 안채를 매우 권위적으로 보이게 한다. 중문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안채는 높게 우뚝 선 것처럼 느껴져 사람을 위압한다. 예전 안주인이 대청에 있었다면 아랫사람들은 감히 얼굴을 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안채의 목재는 넉넉하게 사용했다. 기둥 높이에 비해 그 크기가 커서 오히려 둔중하게 느껴질 정도다. 안채만 본다면 영조가 하사해 지은 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채는 부재가 매우 부실하다. 선자扇子를 짠 목수의 솜씨도 안채의 치목治木 솜씨와 차이가 많이 난다. 같은 집에서 치목 솜씨나 목재를 쓴 정도가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같은 시대에 지은 집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안채와 사랑채의 공사 시점에 대한 보다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안채는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했다. 솟을대문과 사랑채 옆 안채로 들어서는 중문을 비스듬하게 냈다. 중문과 대청 간의 고저 차는 거의 반 층 높이에 달해 ㅁ자형 집임에도 폐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안방은 제일 위쪽에 윗방을, 그 아래에 2칸 안방으로 짜여져 있다. 사당에서 내려다본 건넌방 툇마루. 시집살이의 답답함을 배려해 나지막한 담을 쌓아 안팎에서 서로 잘 보이도록 했다. 사대부가에서 보기 드문 며느리에 대한 배려이 집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 중에 하나는 건넌방이다. 그 주변 환경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우 개방적이다. 2칸 규모인데 모두 툇마루를 놓았다. 그것도 쪽마루 규모가 아닌 정식으로 기둥으로 반칸을 구획해 툇간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구성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앞에 담도 나지막하게 쌓아 안팎에서 서로 잘 보이도록 했다. 원래부터 그러한 것인지, 최근 개보수하면서 바뀐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의 사진을 보면 원래부터 그러했을 가성이 높다. 이러한 모습은 분명 며느리에 대한 배려로, 답답할 수 있는 시집살이를 조금이라도 해소해 주고자 건넌방 앞으로 넓은 시야를 확보해 준 것이다. 이러한 건물 구성은 내외를 엄격히 했던 조선 후기의 사대부가에서는 보기 드문 파격이다. 사랑채는 중문을 중심으로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로 나뉜다. 이러한 구성은 출입자에 대한 감시를 고려한 것 같다. 일반적인 구성이라면 현재 안채 앞쪽에 있는 곳간을 방으로 꾸며 사랑채를 ㅡ자형으로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만일 대문간채가 사랑채 앞으로 왔다면 당연히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문간채를 옆으로 돌아서도록 배치하고 보니 사랑채 모두를 한 몸으로 구성하면 문간채의 통제가 어려워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윗사랑채를 문간채에서 바로 바라다보고 중문의 출입자를 통제하는 위치에 배치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삼 장군 고택은 시도민속자료 제7호(논산시)로 지정돼 있다. 현재 집의 규모나 내용으로 보면 지금보다 상위 수준의 국가지정문화재로도 지정될 수 있는 건물이다. 그러나 문화재 지정 당시의 모습은 지금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또한 건물이 원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됐기에 보존 가치가 낮다고 판단돼 시도민속자료로 지정된 것이다. 지정 당시 사진과 현재를 비교하면 건물의 구조나 주변 상황 등 여러 곳에서 변형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삼 장군 고택의 현 모습이 과거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옛집을 볼 때는 과연 얼마나 많이 변형됐는가에 늘 주의해야 한다. 옛집의 본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이 옛집을 보는 눈을 한 단계 더 높이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삼 장군 고택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입자에 대한 감시를 고려해 사랑채는 중문을 중심으로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로 구분했다. 안채 뒤에서 바라본 전경. 산줄기의 흐름이 끝나는 곳에 앞의 나지막한 봉우리를 안산案山으로 삼아 집을 배치했다. 안채에서 좌측 마당으로는 툇마루로 이어진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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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풍수와 지형을 잘 펴 지은 논산 이삼 장군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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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북으로 창을 낸 까닭은, 아산 성준경 가옥
- ‘집이 고즈넉하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러나 실제로 고즈넉한 집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충남 아산시 도고면 시전리에 자리한 성준경 가옥(중요민속자료 194호)은 고즈넉하다는 표현이 잘 들어맞는 집이다. 완만한 경사지에 깊은 숲을 배경으로 사뿐히 앉은 아담한 한옥이다. 글 최성호<산솔도시건축연구소 소장/전주대 겸임 교수>사진 윤홍로 기자 성준경 가옥은 안내판이 없다면 마을 어귀에서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옛 마을에서 지배 계층 가문의 집은 대부분 멀리서도 눈에 띄는데 그 까닭은 권위를 마음껏 드러내는 위치에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옥은 마치 산속에 있는 별장을 찾아가는 기분이다. 예전에 주로 드나들던 입구에서 사랑채에 이르는 길은 숲이 우거져 좀처럼 집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집을 지을 때부터 숲이 어느 정도 형성됐던 것 같다. 입구 좌우에 나란히 서서 대문 역할을 하는 은행나무 두 그루 중 하나는 수령이 400년이 넘어 예산시 보호수로 지정받았고 주변의 소나무들도 꽤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풍광이 집터를 잡게 된 연유가 아닌가 한다. 이 가옥은 현 주인의 8대조가 부친을 모시고자 지은 집이라고 한다. 1989년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는 1825년에 건립했다고 적혀 있다. 풍광과 풍수를 따져 북향으로 앉혀진 아담한 고택. ㄷ자형 안채와 一 자형 고방채, ㄴ자형 사랑채로 배치돼 있다. 서쪽 바깥채에서 바라본 전경(右)과 안채 뒤뜰의 장독대(上). 사랑채. 一 자형으로 배치한 사랑채는 전면 4칸 규모의 전퇴집이다. 풍수를 살펴 지은 북향집성준경 가옥은 일반적으로 꺼리는 북향을 하고 있다. 지형을 따르다 보면 집을 북향으로 앉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에 대해 창령 성씨 27대 손인 종손은 임금이 사는 쪽을 향함으로써 임금을 생각한다는 마음을 바탕으로 풍수를 고려해 집을 배치한 듯하다고 한다. 어쨌든 풍수의 영향은 확실한 것 같다. 뒤의 도고산을 배산하고 앞에 조그마한 동산을 안산으로 삼아 집터를 잡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앞에서 언급한 은행나무를 고려한 듯하다. 이 집에 솟을대문이 없는 것은 집을 지을 당시 가문의 위세가 그리 크지 않아 자제한 듯하다. 이는 다른 대가에 비해 아담한 집의 규모와도 상관이 있다. 사랑채는 4칸 규모고 안채도 마당이 3칸 규모여서 좁게 느껴진다. 여기에 대해 종손은 중시조인 우계 성혼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집안의 가훈인 ‘근검소이’의 이행과 집 지을 당시 8대조가 높은 직책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산이 많아도 마음대로 큰 집을 지을 수 없는 사회 여건상 자신의 분수에 맞는 소박한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샛마당과 중문. 안채로 들어가려면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 폐쇄적인 구조다. 一 자로 길게 놓인 사랑채 툇마루. 사랑채 대청에서 바라본 모습. 남녀유별에 따른 폐쇄적인 구조성준경 가옥은 전면에 사랑채를 일자형으로 배치하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샛마당을 설치한 후, 그 뒤에 안채를 두었다. 사랑채는 전면 4칸 규모로 좌측에서부터 방 2칸, 대청 1칸, 방으로 구성돼 있다. 사랑채는 전퇴집으로 맨 왼쪽 방은 뒤로 1칸을 더 늘여 2칸 규모로 꾸몄는데 이러한 구성 때문에 사랑채는 ㄴ자 형태다. 안채는 중부지방에서 보기 드문 폐쇄형 구조다.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은 사랑채 우측에 숨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중문을 지나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 샛마당에 있는 또 하나의 문을 지나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시 사랑채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안채로 가는 문조차 2중이고 집 전체가 담으로 둘려 있어 쉽게 안채로 드나들 수 없다. 폐쇄형의 집은 충청도 지역에서 몇 곳 찾아볼 수 있으나 이처럼 사랑채를 독립시키면서 안채를 ㅁ자 형으로 만든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이러한 형태로 집을 지은 것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이 집을 지은 8대 조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내외법이 더 심화돼 집의 폐쇄성을 예전보다 강하게 요구했는데, 마침 9대 조부와 집을 지은 8대 조부는 모두 경상도 지방에서 현감을 지냈기에 폐쇄성이 강조된 경상도의 집을 참고했을 것이다. 안채는 ㄷ자형 몸체에 일자형 문간채를 붙인 ㅁ자 형태다. 경상북도 지방에서 주로 보이는 전체가 한 몸체인 ㅁ자형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튼 ㅁ자 집인데 건물 간의 간격을 좁게 만들고 담으로 막아 ㅁ자 형태로 느껴지는 것뿐이다. 안채는 가운데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건물을 붙여 ㄷ자형으로 구성했다. 아쉬운 점은 대지가 매우 넓은 편이므로 1칸만 더 양옆으로 넓혔더라면 안채가 넓고 시원하게 구성됐을 터인데 마당을 3칸 폭으로 한정해 안마당을 좁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안채는 중문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측 즉, 동쪽은 아래로부터 부엌 2칸, 안방 2칸, 머릿방 2칸으로 구성돼 있다. 윗방의 1칸은 마루 쪽으로 돌출돼 있다. 따라서 마루는 6칸 통이 아닌 5칸으로 되어 있고 대청의 측면 간살이 안방이나 건넌방의 측면 간살보다 작게 잡혀 대청이 조금 협소해 보인다. 서쪽 부분은 조금 더 길어서 방과 부엌 1칸 그리고 건넌방 2칸 마지막으로 사당으로 쓰던 마루 2칸이 배치돼 있다. 이 집도 별도로 사당을 두지 않고 안채 대청을 확장시켜 사당으로 사용했다. 사당은 남쪽 즉, 뒷마당 쪽이 아닌 서쪽 방향 벽에 나란히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현재 복원해 놓은 바깥채와 같이 하인이 거처하거나 곳간으로 쓰이던 초가가 주변에 6~7채 더 있었다고 한다. 건물이 많았던 것은 이 집안의 재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현 종손의 부친 때 이르러서는 5000석의 큰 부를 쌓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주변에 많은 가랍집(외거 노비가 살던 집)이 있었을 것이다. 큰 부를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준경 선생의 생활은 매우 검박했다고 한다. 이렇듯 검박함이 몸에 뱄기에 5000석의 큰 부를 이루었으면서도 집을 새로 늘려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안채 대청. 측면 간살이 안방이나 건넌방의 측면 간살보다 작게 잡혀 대청이 조금 협소해 보인다. 안채. 가운데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건물을 붙여 ㄷ자형으로 구성했다. 안채 대청에서 바라본 뒤뜰. 굴뚝 밑을 터서 물이 흐르도록 했다. 고택,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현 바깥채는 예전 집의 모습을 따라 원형기둥으로 복원했다. 그러나 복원 상태를 보면 아쉽기만 하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예전 바깥채는 현재와 같이 완전한 원형이 아닌 자연 상태의 나무를 적당히 다듬어 기둥으로 사용했다. 또한 가공한 원형기둥이 건물의 규모에 비해 너무 가늘고 길게 느껴진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지금의 집은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복원의 핵심은 옛 모습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므로 바깥채는 엄밀히 말해 복원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집주인과의 대화에서 고택의 관리가 만만치 않음을 새삼 느꼈다. 집주인은 대기업의 임원이기에 다른 고택을 관리하는 사람에 비해 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다. 또한 고택을 남다른 애착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가장 큰 불만은 자신의 소유임에도 개보수할 때 어느 정도 재량권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고, 또한 국가에서 해주는 것은 건물을 최소한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보수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수준의 지원으로는 건물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과거 최소한 대여섯 명이 관리하던 집을 한 사람에게 그 의무를 지운다는 것은 집의 관리를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집이란 사람이 살면서 생활해야 제대로 관리가 된다. 그러한 수준의 관리가 되도록 문화재청은 적극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간 문화재청이 집을 현 수준에서 유지만 하는 정도로 관리했다면 이제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을 만든다는 차원에서 문화재를 관리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화재청은 적극적인 발상의 전환으로 문화재 관리에 나서야 할 것이다. 동쪽에서 본 사랑채. 집 전체가 담으로 둘려 있어 안채는 사랑채를 거쳐야만 드나들 수 있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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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북으로 창을 낸 까닭은, 아산 성준경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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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물고기가 하늘로 뛰고 학이 날아다니는 괴산 김기응 가옥
- 김기응 가옥(중요민속자료 136호)은 현재 살고 있는 종부의 시할아버지인 김항연 金恒然이 1910년 지은 집이다. 고종 때 공조참판을 지낸 김향연은 경술국치 庚戌國恥로 조선이 무너지자 이곳으로 낙향했다. 고향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소수면이다. 낙향 이전부터 이곳 땅을 많이 소유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면 땅 때문에 이곳에 정착한 것 같지는 않다. 괴산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집터 앞에 넓은 들이 펼쳐져 조망이 시원스럽다. 이러한 풍광 때문에 고향이 아닌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집은 원래 관리인이 살던 안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을 다시 지었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기자 충북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의 김기응 가옥. 김기응 가옥의 뒷산에는 수백 년 된 장송 長松이 우거져 있다. 종부 宗婦(종가의 맏며느리)는 “이전에는 나무가 더 많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목재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으로 변했다. 1915년에 촬영한 해인사 전경 사진에서도 주변에는 나무가 울창하지만 조금 떨어진 뒷산은 민둥산에 가깝다. 그만큼 전국의 산이 헐벗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많은 양반 집안 [班家]에서 뒷산의 나무를 잘 보존한 것은 풍수적 의미가 강하다. 집의 풍수적 환경을 보전하고자 뒷산이나 비보 裨補(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움) 적 의미가 있는 곳의 나무를 잘 가꾸고 보존한 것이다. 이 집은 이러한 뒷동산을 배경으로 배치돼 있다. 대지가 급하지는 않지만 뒷동산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이 완만한 경사 때문에 집 안 가득 햇볕이 골고루 들어온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으로 공간 구성이 독특하다. 솟을대문 양쪽으로 늘어선 행랑채는 좌우가 ㄱ자로 꺾여 바깥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궁궐에서나 봄직한 꽃담김기응 가옥은 여느 고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안채에 이르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대문으로 들어서면 사랑채가 나오고, 그 옆의 중문을 통해 곧바로 안채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 가옥은 다층 구조라 사랑채 옆의 중문과 안행랑채에 있는 문을 지나야만 안채로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복잡한 이유는 조선 후기 들어 심화된 남녀유별의 관념을 반영한 것이다. 개화기 서구 문물이 물밀듯 밀어닥치자, 이를 적극 받아들이려는 흐름과 보수화 경향이 함께 나타났다. 보수화 경향은 그 정도를 넘어 수구화 守舊化 됐는데, 그 경향이 이 집에서는 더욱 심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둘째는 목재 수급이 원활치 않던 당시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 점이다. 새로 지은 건물 중 중요한 사랑채를 제외하고 행랑채의 재목은 그리 넉넉지 못하다. 행랑채의 서까래는 너무 가늘어 보기에도 불안할 정도다. 종부는 “재산 분배와 사업 실패로 가세 家勢가 기울긴 했지만 집 지을 당시에는 1500석을 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서는 꽤 알아주던 부자였다. 그럼에도 목재를 넉넉하게 쓰지 못할 정도로 그 사정이 열악했던 것이다. 셋째는 특징이자,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사랑채 뒤뜰의 담이다. 사랑채 뒤편은 안채의 행랑채와 마주하는데 그 간격이 넓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사랑채에서 마주 보이는 행랑채 담을 꽃담으로 아름답게 치장했다. 규모가 작을 뿐이지, 그 품격은 마치 궁궐의 꽃 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양쪽은 卍 자 문양을, 가운데는 팔각의 무시무종 無始無終(시작도 끝도 없다) 문양을 채워 넣었는데 네 귀퉁이 두 군데는 박쥐 문양을, 두 군데에는 당초 문양이다. 이러한 꽃 담을 일반 집에서 설치한다는 것은 과거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다. 19세기 말 사회의 신분 질서가 와해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 가옥을 지은 계기도 조선이 망하자 낙향한 것 때문이니 신분의 상징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사랑채는 ㄱ자형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납도리집이다. 바깥마당에서 바라본 중문. 사랑 행랑채에서 바라본 사랑채와 안행랑채. 장독대 뒤 울타리 밖은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넉넉한 마음이 혼란기 때 집을 지켜사랑채 선자서까래의 짜임이 재밌다. 추녀 주위의 서까래 짜임은 세 종류다. 선자, 엇선자, 평연으로 구분되는데, 우리나라 기와집에서는 선자서까래가 주류를 이루고 수준이 떨어지는 집에서 엇선자를 사용했다. 평연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가옥의 사랑채 추녀 밖에서 보이는 앞쪽은 선자서까래로, 외부에서 안 보이는 뒤쪽은 엇선자다. 이렇게 두 가지 방식을 혼용한 경우는 이곳에서 처음 보았다. 이러한 모습은 외부에도 그대로 나타나 부연의 짜임이 낯설다. 19세기 초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안채는 튼 ㅁ자형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 지은 사랑채나 행랑채하고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부엌은 서쪽 4칸의 규모로 다른 집보다 크다. 부엌만으로도 이 집안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을 것이다. 안방은 2칸인데 모두 남쪽에 면해 햇볕이 잘 들어 분위기가 밝고 명랑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 혼란기에 집을 유지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종부는 “종손께서 손이 커서 주변에 베푸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며 “산에서 내려온 공비들도 많이 베푼 집이라 하여 옷가지와 먹을 것만을 갖고 갔다”고 한다. 그렇기에 해방 혼란기와 한국전쟁 통에도 집이 고스란히 남았던 것이다. 종부에게 “해방 후 토지개혁 때 많은 땅을 강제로 수용당해 가슴 아프지 않았는가” 했더니, “가난한 사람이 잘 살게 됐는데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닌가” 하고 되묻는다. 부부가 일심동체라더니 마음 씀씀이까지 한결같은 모습이다. 종부는 우리가 집을 돌아보는 내내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많은 가보 家寶를 도둑맞았다”면서 “이제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그만큼 불신이 깊어 보였다. 우리가 대문을 벗어난 후에도 한참을 문가에서 서성였다. 과연 누가 이러한 불신을 노종부에게 남겨 주었는가. 우리의 욕심이 순박한 노종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가 아쉽기만 하다. 김기응 가옥의 사랑채에는 어약해중 천魚躍海中天과 비학루 飛鶴樓라는 편액 扁額이 걸려 있다. 어약해중천은 물고기가 바다 가운데에서 뛰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그야말로 인재가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펴는 모습을 의미한다. 비학루는 학이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모습을 이야기한다. 이 집을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도 어약해중천이라는 문구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퇴락해 가는 집을 노종부와 차종부 단둘만이 지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인재가 나와 가문을 살릴 수는 없을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집을 짓고 있다. 과연 그 가운데서 어약해중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단지 돈만 있을 뿐 아담한 정취나 고고한 품격조차 찾을 수 없는데……. 안채로 들어서는 문간. 사랑채 후원은 좁은 공간으로 답답해 보여 내담 벽을 각종 문양과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ㄷ자형의 안채는 30여 평 규모로 정면에 부엌, 안방, 대청, 뒷방을 일렬로 배치하고 꺾어진 곳에 건넌방과 부엌을 두었다. 안채 뒤뜰.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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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물고기가 하늘로 뛰고 학이 날아다니는 괴산 김기응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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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소박한 안채 화려한 별당, 이유는? - 예천 권 씨 종택
-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예천 권 씨 종택(중요민속자료 제201호,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166)은 초간 草澗 권문해 權文海(1534~1591) 선생 조부인 권오상 權五常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도 임진란 전에 지어진 집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권문해 선생 조부가 지었다고 한다면 이 집 건립 연도는 1500년대 초반일 것이다. 여러 곳에서 보이는 고식古式구조를 통해서도 이때쯤 지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뒤편에서 본 권 씨 종택 전경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이 인상적이다. 집은 ㅁ자형 안채 앞쪽 우측(집을 바라보았을 때)에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누마루 형식 별당이, 그 우측 뒤에 사당이 배치됐다. 집 구조를 보면 안채와 안 사랑채 구조가 완결형이고 안 사랑채 대청에서 별당채와 연결된 것으로 보아 별당은 나중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별당 평면은 단순하다. 정면 4칸 측면 2칸 평면에서 좌측 2칸이 온돌이고 나머지 6칸이 대청이다. 안채와는 툇마루로 연결됐으며 대청 전면은 전체를 개방하고 측면과 후면은 판장벽으로 막은 후 칸마다 양개판장문을 설치했다. 후면 가운데 칸에는 외짝 출입문을 설치해 뒤편 안채와 연결한 점이 이채롭다. 권 씨 종택은 권문해 선생 조부인 권오상 선생이 지었다고 하는데 1500년 대초반으로 추정된다. 소박한 안채에 비해 사치스러운 별당을 지닌 특이한 곳이다. 별당은 현재 보물로 지정돼 있다 조선 초 건축양식 간직한 별당별당이 보물(제457호)로 지정된 것은 조선 초기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건물과 가장 다른 점은 익공집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주택 대부분은 민도리집으로 이 집 안채 역시 민도리집으로 지어졌다. 왕실 사람이 사는 집이나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물에서 익공을 채택하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 사가 私家에서 이렇게 익공을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초익공집은 분명하나 익공에 화려한 초각 草刻이 없다. 기둥 뒤쪽 보아지 부분에 초각이 있기는 하지만 앞에 드러나는 부분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러한 익공을 직절익공 直切翼供이라 하며 하회마을 충효당도 이와 같은 형태다. 어쨌든 이러한 익공집은 건립 시기가 시대 상황이 불안한 조선 초였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측면 가운데 기둥에는 직절익공을 사용하지 않고 물익공 형식으로 만들었다. 나중에 고치면서 이것만 남겨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주인 증언으로는 원래부터 그랬다고 한다. 다른 곳은 직절익공으로 하고 이곳만 물익공 형식으로 한 것은 내부에 있는 충량(한쪽 끝은 기둥머리에 짜이고 다른 쪽 끝은 들보 중간에 걸친 보)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충량 부분 익공은 안과 밖 형태가 물익공으로 같다. 대들보와 도리는 설치되는 높이가 달라 일반적으로 충량은 자연스럽게 꺾인 나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별당 충량은 대들보에 걸리는 부분을 수평으로 가공했다. 벽에 근접해 직각으로 꺾어 내리고 주두에서 다시 직각으로 꺾어 놓다 보니 다른 대들보처럼 보아지 부분을 길게 늘일 수가 없어 보아지를 짧은 물익공 형식으로 처리한 것이다. 보이는 왼쪽이 안채고 오른쪽이 별당이다. 별당채가 안사랑채 대청에서 연결된 것으로 보아 별당은 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평평하지만 화려한 행공첨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인 맹 씨 행단 행공 첨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별당 보아지. 다른 곳과 비교해 짧은 물익공으로 처리했다. 매우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충량 초각. 충량에서 보는 목수의 놀라운 눈썰미 이곳에 설치된 충량을 처음 보았을 때 나무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과 달라 놀랐다. 충량 위에는 팔작지붕 추녀 부분을 받치고자 외기도리를 설치하기에 상부에 걸리는 하중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곳에 설치된 충량 형태는 구조 개념으로 볼 때 합리적이지 않다. 가공된 형태가 목재 특성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목재는 목질 방향으로 강한 힘을 발휘한다. 목질에 직각 방향으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기에 충량을 직각으로 꺾어 가공한 것은 나무 특성을 무시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가 가공된 모습이 목질 방향을 거스르지 않고 있다. 충량으로 사용된 나무는 원래부터 거의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던 것이다. 나무를 선택해 가공한 목수 눈썰미가 놀랍다. 별당 대공과 종보를 받치는 동자주 또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다. 대공은 화반 형태로 아랫부분은 연꽃 하엽이 조각돼 있고 상부는 화반대공과 비슷한 모양이다. 또한 장혀를 첨차로 받치고 있는데 이것도 초각이 돼 있어 매우 화려하다. 종보를 받치는 동자주에서도 같은 양식이 보인다. 종보를 받치는 동자주는 포형 동자주로 행공첨차에는 초각을 놓고 보 방향으로는 기둥머리에 물익공 장식을 해놓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이라는 맹 씨 행단 행공첨차와 비교해 보면 맹 씨 행단 행공은 상부를 약간 오목하게 가공했지만 이곳 행공첨차는 평평하지만 더 화려하다. 종보에 쓰인 글은 계회 契會를 마치고 써놓은 명단이라고 한다. 화려한 별당에 비해 안채는 매우 검박하게 느껴진다. 안채는 경북지역 전형적 형태라고 할 수 있는 ㅁ자형 집으로 높게 만든 단 위에 지었다. 앞마당과 중문과의 높이차가 사람 키 정도고 안사랑채 바닥까지는 더 높아 상대적으로 집이 높게 보여 위압감을 준다. 별당채가 앞을 가리고 있어 다소 감소했지만 별당채가 없었을 때는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안방이 있는 쪽은 두 칸으로 겹집구조이고 중문이 있는 쪽은 한 칸 규모다. 안방 옆에는 도장방이고 아래쪽은 세 칸 부엌이다. 판장벽 외벽에서 반빗간(집에서 반찬을 만드는 곳, 찬간 饌間이라고도 한다)의 잔형을 볼 수 있다. 부엌 판장벽 판재는 자귀로 다듬었는데 이는 쉽게 볼 수 없는 경우다. 건넌방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면에는 한 칸 반으로 돼 있는데 최근 반 칸을 줄여 한 칸 규모로 만들었다. 안채는 경북지역 전형적 형태라 할 수 있는 ㅁ자형 집이다. 단을 높게 만들어 위압감이 느껴진다. 화반 형태로 아랫부분은 연꽃 하엽이 조각돼 있고 상부는 화반대공과 비슷한 모양을 한 대공. 거의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던 나무를 사용한 충량으로 목수 눈썰미가 대단하다. 조선 초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한 별당 내부. 권문세가에 이르러 지은 별당전체적으로 안채는 퇴칸이 없는 북방형 겹집이다. 안채에 퇴칸이 없다 보니 집 구조가 고주가 없는 삼평주 오량집이 됐다(후대에 지어지는 한옥 대부분은 전퇴를 두기 때문에 일고주 오량집이다). 삼평주이므로 가운데 기둥을 중심으로 맞보를 설치하고 그 위에 종보를 걸었다. 안채에서 발견되는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면 우선 퇴칸 또는 툇마루가 없다는 점이다. 조선 후대로 갈수록 집에 대한 쓰임새가 늘면서 퇴칸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곳은 퇴칸 또는 툇마루가 전혀 없다. 건넌방 뒤편에 쪽마루를 두었을 뿐이다. 현재 안방 앞에도 쪽마루가 설치돼 있으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면에는 없는 것으로 최근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안채 보아지를 보면 초각이 돼 있다. 후대에 지어진 집에는 보아지를 순수하게 기능적인 면만 따져 놓기에 형태가 매우 단순하다. 세 번째는 대청 뒤편 판장문 가운데 문설주가 서 있다는 점이다. 쌍여닫이문 가운데 문설주가 있으면 임진란 전에 지어진 집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런 몇 가지가 이 집이 지어진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별당 우측 뒤에 놓인 사당. 규모가 크지 않은 안채 전경. 살림규모가 늘자 안채도 늘렸다. 지금은 별당이 앞을 가리고 있어 다소 감소했지만 별당채가 없었을 시에는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부엌 옆에 마련된 장독대. 5 진입로에서 본 안채 입구. 안채는 규모가 크지 않다. 그렇기에 살림 규모가 늘면서 사랑채를 늘렸다. 권 씨 종택 별당과 안채는 여러모로 비교가 된다. 특히 별당이 장식성이 강한 것은 고려 시대 유풍 流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안채가 1500년대에 지어졌다면 개인적으로 이 별당을 지은 사람은 권문해 선생이 아닌가 생각한다. 별당은 권문해 선생이 낙향해 이곳에 다시 자리 잡은 때인 임진란 직전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집을 지었을 당시는 권문세가 權門勢家 수준에 달하지 않아 검소하게 안채를 마련했지만 후손인 권문해 선생이 종 2품 관찰사까지 역임하면서 권문세가 반열에 들어서자 그것을 배경으로 당대 일반인은 생각할 수 없는 사치스러운 별당이 들어선 것이다. 고려 유풍이 남아 장식성이 강한 별당으로 권문해 선생이 종 2품 관찰사까지 지내는 권문세가에 들어서자 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는 툇마루로 연결됐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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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소박한 안채 화려한 별당, 이유는? - 예천 권 씨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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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풍수와 풍광이 훌륭한 영주 괴헌고택
- 경상북도 영주 괴헌고택槐軒古궀(중요민속자료 제262호/경북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877번지)은 두월산 끝자락 경사진 대지에 내성천을 앞에 두고 서남서향으로 배치됐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현 주인 7대조인 괴헌槐軒 김영金榮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집으로서 광무 8년(1904년)에 김영의 손자인 김복연이 일부 고쳤다고 한다. 외풍을 막아주고 낙엽 등이 모인다 하여 잘 산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삼태기형 명형국지名形局地 한가운데 지은 집이다.글 최성호 사진 전원주택라이프 편집부 집은 1972년 수해로 앞에 있던 정자인 월은정月隱亭(정면 3칸 측면 2칸)과 행랑채가 완전 붕괴돼 최근 행랑채를 복원했다(월은정 현판은 현재 사랑채 앞에 달려있다). ㄷ자형 안채와 뒤집힌 ㄴ자형 사랑채가 이어진 형태로 경상북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폐쇄구조와는 다른 모습이다. 대문에서 정면을 본 모습으로 사란채 오른편으로 난 작은 문 뒤에 사당이 놓였다. 마을 도로와 인접한 괴헌 고택은 내성천을 앞에 두고 서남향으로 배치됐다. 사랑채 옆문을 통해 본 사당은 동쪽 언덕 위에 위치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공유하고 있어 안채를 보호하기 위해 벽장벽을 뒀다. 익공구조가 특이한 사랑채새로 복원한 행랑채 바로 앞이 사랑채다. 사랑채가 중문이 있는 안행랑채와 붙어 있어 평면상으로는 둘이 한몸을 이루지만 실제로는 이벌대 정도 높이에 누마루처럼 높게 지어진 사랑채(지붕도 팔작지붕이다)로 말미암아 별동 건물처럼 느껴진다. 사랑채는 전면 3칸 측면 4칸 반 규모다. 사랑채는 김영에 의해 1904년에 중수된 것이라고 한다. 흔치 않은 직절익공집인데 아마 중수할 당시가 구한말이어서 사회적으로 기강이 와해된 때라, 일반 사가에서 지을 수 없었던 익공집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사랑채 익공구조가 일반 익공집과 많이 다르다. 일반 익공집은 주두 바로 위에 보가 얹혀지고 그 위에 도리가 올라탄다. 따라서 보는 보아지가 받게 된다. 그러나 괴헌고택 사랑채는 보를 주두에 얹힌 것이 아니라 별도 설치된 장혀 위에 놓았다. 그렇다 보니 보 위에 도리가 얹혀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와 보가 같은 위치에서 만나고 오히려 도리에 보가 타는 것과 같은 형식이 된 것이다. 구조상 특별한 장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구조를 선택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구조임에 틀림없다. 사랑채 전면은 좌측으로부터 두 칸이 방이고 우측 모서리 한 칸이 대청이다. 대청은 전면 한 칸 측면 두 칸 규모로 대가 대청으로는 소박하다. 그 뒤로 방이 두 칸 붙었다. 사랑채 앞으로는 반 칸 규모 퇴칸을 뒀는데 계자난간으로 멋을 내 누마루 같은 분위기가 난다. 한편 퇴칸은 기둥 밖으로 반의반 칸 정도 돌출시켜 일반적인 퇴칸보다 넓게 한 것이 특징. 이렇게 퇴칸을 넓게 했기에 대청을 두 칸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한다. 사랑채 중앙 칸인 어칸에는 월은정이라는 현판이, 우측에는 관수헌觀水軒, 좌측에는 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월은정은 앞서 말한 정자의 것이고 관수헌은 사랑채 당호다. 이런 당호를 붙인 것은 아마도 집 앞 내성천을 바라다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관수헌은 산과 물이 잘 어우러진 주변 경관에 딱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다. 두 칸 방과 대청으로 구성된 사랑채는 도리와 보가 같은 위치에서 만나는 특이한 익공구조를 지녔다. 정면 3칸 측면 칸 반인 사당은 단순하게 보이지 않도록 양대문과 편개문을 사용해 입면의 변화를 줬다. 수해로 붕괴됐던 행랑채를 최근에 복원했다. 안행랑채에서 안채로 연결된 문으로 괴헌 고택 현판이 붙어있다. 사랑채와 안채 연결 문제를 풀어준 벽장벽사랑채를 제외한 안채는 ㄷ자형에서 건넌방 쪽이 앞으로 두 칸 돌출된 형태다. 돌출된 두 칸에는 창고를 놓았다. 안채는 민도리집으로 전면 5칸 측면 2칸인 삼평주 오량집이다. 또 부엌, 안방 두 칸, 대청 두 칸, 건넌방 한 칸으로 구성된 전퇴집이다. 안채에 가내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제일 높은 신인 성주신을 모시는 성주단지가 놓였다. 이제는 옛날 집에 가도 성주단지를 거의 볼 수 없는데 이는 집에 사람이 살지 않거나 미신이라 생각해 모두 치워버렸기 때문이다. 안주인 말로는 이 집은 한 번도 비운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 때문에 성주단지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안채 안방 앞 퇴칸에는 다른 곳과 달리 고미반자가 설치돼 있다. 일반적으로 안채 전퇴는 대부분 연등천장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이렇게 고미반자를 설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집안 구석구석을 알뜰하게 쓰려는 노력으로 이렇게 고미반자까지 놓은 것이다. 이로 인해 만들어진 고물 출입구는 쉽게 위장할 수 있어 일제나 해방 후 격변기에 비밀 피신처로 활용됐다. 그리고 안채 안방 뒤쪽으로 돌출 된 2칸은 찬방으로 쓰였던 곳으로 집주인 말로는 80년 전쯤 달아낸 것이라고 한다. 이 집에서 눈여겨볼 부분 중 하나는 사랑채와 안채 연결 방식이다. 사랑채와 안채는 안채 마당을 공유하고 있어 사랑채에서 안채가 쉽게 들여다보이는 구조다. 고택은 벽장 공간 일부를 활용해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안채로 출입하는 문에 벽장벽을 연장해 설치함으로써 문을 열더라도 안채가 직접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사랑채에서 안채 출입구는 두 곳인데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각각에 같은 모양의 벽장벽을 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칸 반 규모로 동쪽 언덕 위에 배치했다. 맞배지붕으로 전면에 퇴칸을 둔 직절익공집이다. 전체적인 느낌으로 볼 때 사랑채를 중수한 시점에 다시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만 익공은 사랑채와 달리 보아지가 보를 받는 일반적인 모양새다. 원기둥을 사용해 격을 달리했으며 작은 집이지만 단순하게 보이지 않도록 중앙 어칸 문은 양개문으로 하고 좌 · 우측 협칸 문은 편개문으로 달아 입면의 변화를 준 것이 돋보인다. ㄷ자형에서 건너방 쪽이 앞으로 두칸 돌출된 안채로 민도리집, 삼평주 오량집이다. 정부 4대 강 사업으로 괴헌 고택을 포함해 지역 13개 지정문화재가 수몰 위기에 놓였다. 정부 4대 강 사업으로 이건 유감정부 4대 강 사업으로 괴헌 고택은 수몰위기에 몰려 이건移建하여 복원하는 사업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 이곳을 포함해 주변 13개 지정문화재가 같은 이유로 옮겨간다.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에게 문화재라는 것이 하찮은 것일 수 있으나 문화재를 함부로 옮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집은 불상 등과 같은 유물과 다르다. 집은 제 위치에 있을 때 가치를 갖는다. 특히 우리나라는 풍수와 주변 풍광을 고려해 집을 짓기에 원래 장소에 있어야만 본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집도 풍수형국을 따져 집을 앉혔다. 풍수형국은 그 집이 원래 위치한 곳에서만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다른 곳으로 이건한다면 어떻게 풍수형국을 따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풍광도 집의 일부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집에서는 풍광이 특히 중요하다. 일예로 병산서원 핵심은 누각인 만대루다. 만대루 자체는 건축적 관점에서 볼 때 수준 높은 건축물이라 할 수 없으나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병산은 병산서원을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건축물로 만들고 있다. 괴헌고택과 같은 살림집도 마찬가지다. 제자리에 있어야 참 맛을 알 수 있다. 괴헌고택 사랑채와 사당이 제공하는 풍광이 매우 수려하다는 것은 처음 이 집을 지은 사람이 집터를 잡을 때 이를 고려했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집을 이건하면 앞으로는 결코 이와 같은 풍광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보고 생활하는가에 따라 집에 사는 사람의 인격이 결정된다. 만일 풍광을 없애버린다면 집은 죽은 집이 된다. 박제된 동물이 동물이 아닌 것처럼 전시된 집도 집이 아니다. 사람이 살지 않고 풍광도 잃어버린 집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사태를 볼 때마다 우리나라 위정자들이 언제쯤 문화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문화에 대한 단견이 문화재 홀대를 가져온다.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긴 문화재지표조사조차 몇 개월 만에 뚝딱 해치우는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배치도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택 시리즈 더 보기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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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풍수와 풍광이 훌륭한 영주 괴헌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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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시대 흐름에 따른 집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 성주 한개마을 한주종택
- 한개마을 가장 위쪽 산기슭에 위치한 한주종택(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5호)은 영조 43년(1767)에 이민검이 지었으며 성리학자인 한주寒洲 이진상이 고종 3년(1866)에 고쳤다고 한다. 이 집은 경상 감사를 지낸 문방동 소재 권 감사 집을 해체한 후 옮겨 와 지었다. 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기자 한주종택은 한주정사라는 별서를 두고 있어 한개마을에서 가장 격식을 갖춘 집이라 할 수 있다. 한개마을에서 별서를 가진 곳은 한주종택이 유일하다(그러나 하회댁 사랑채 담장 아래에 연못과 함께 정원의 흔적이 있는데, 이곳을 하회댁 또는 교리댁의 별서로 이용했을가 능성이 있어 한개마을에는 한주종택 말고도 한 곳 더 별서를 가진 집이 있었던 듯하다). 한주정사 동쪽에 위치한 연못. 직사각형으로 위아래로 나뉘고 凹형태로 연결된다. 방화장을 담장과 기와로 대신한 이유는대문에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나오고 그 우측에 안채에 딸린 행랑채와 사랑채가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다. 안채 쪽으로 점점 높아지는 사랑마당에 맞춰 사랑채 기단을 놓다 보니 사랑채 기단이 매우 높아져 권위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사랑채는 전면 네 칸 반, 측면 두 칸 반 규모로 방은 원래 깊이가 한 칸이고 뒤쪽에 반 칸 고방이 있고 그 밖에 다시 툇마루가 있었으나 최근 툇마루까지 방을 늘려 두 칸 깊이로 만들었다. 안채쪽 반 칸에는 안채로 통하는 통로가 설치돼 사랑채에서 바로 안채로 연결된다. 사랑채 측면은 다른 곳과 다른 모습이다. 측면 하부는 대부분 흙벽으로 마감하거나 화재 예방을 위한 방화장防火墻으로 처리하는데 이곳은 담장처럼 쌓았다. 북비고택 안채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한필원(한림대 교수, 건축학 박사)은 사랑채 옆 마당이 사당과 같은 공간임을 암시하려고 벽체 대신 담으로 쌓았다고 설명했다. 일면 일리 있는 말이나 이런 상징적인 해석보다는 전후툇집으로 깊이가 깊어지면서 맞배지붕으로는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는 것이 힘들어 아예 하부를 기와를 얹은 벽체 형식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안채는 튼 ㅁ자형이다. 일곱 칸 안행랑채를 앞에 두고 좌우에 찬광채와 아래채가 마당을 ㄷ자형으로 감싸면서 ㅁ자를 만들었다. 안채는 정면 다섯 칸 반인 전후툇집이다. 전퇴는 툇마루로 각방을 연결하고 후퇴는 고방이나 툇마루로 구성했는데 최근 반 칸을 늘려 크기를 키웠다.삼량집 안채는 기둥에 첨차를 설치한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집임을 알수 있다. 한주종택이 다른 집을 옮겨와 지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아닐까 한다. 안채는 얼마 전 화재로 지금은 방문객 관람이 불가능한상태다. 사랑채에서 한주정사로 통하는 문. 한주정사. 한개마을에서 별서를 지닌 곳은 한주종택이 유일하다. 한주 정사에서 본 전경으로 누마루에 앉으면 이보다 더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사랑채 뒤에 위치한 사당. 한주종택의 자랑거리, 한주정사종택 옆에는 별서인 한주정사가 있다. 한주정사는 별도로 드나드는 문이 있지만 사랑채 쪽에서도 일각문으로 통하게 했다. 한주정사 동쪽에는 산에서 흐르는 개울물을 이용해 연못을 파 놓았다. 연못은 직사각형으로 위아래 둘로 나뉘고 凹형태로 연결된다. 연결 부위에는 돌다리를 놓아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데 작은 섬이 있는 위쪽이 크고 상대적으로 아래쪽이 작다. 아래 연못보다 위 연못을 먼저 만들었다고 한다. 한주정사는 연못을 잘 볼 수 있는 쪽에 두 칸 방과 그 앞으로 한 칸 반 누마루를 배치했으며 연이어 두 칸 대청과 방 하나를 놓음으로써 전체적으로 T자형 평면이다. 큰방 문을 열면 연못을 포함한 정원 경관을 볼 수 있으며 누마루는 방보다 한 자 높게 만들어 바깥 경치를 앉아서도 잘 조망할 수 있다. 한주정사에는 '조운헌도제祖雲憲陶齊'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祖雲은 호가 운곡雲谷인 주자를 조종으로 모신다는 뜻이고 憲陶는호가 도웅陶翁또는 퇴계退溪인 이황의 학문을 받든다는 뜻이다. 집을 지은 한주 이진상의 학문세계를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한 것이다. 사랑채 측면으로 하부를 담장을 쌓고 기와를 얹은 특이한 모습이다. 대문에서 본 내부로 오른쪽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놓였다. 정면이 사랑채, 우측이 문간채다. 변화를 거듭한 한주종택한주종택에는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한주가 이 집을 중수할 때는 현재 사랑마당 앞에 바깥행랑채가 대문채와 나란히 배치돼 사랑마당을 위,아래로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대문도 문과 마방으로 구성한 두 칸이었고 지붕도 초가였으며 현재 한주정사 뒤편 언덕에는 별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배치에서 가장 큰 변화가 온 때는 1910년이다. 한주정사를 짓고 연못을 조성한 시기로 한주정사를 지을 당시는 ㄱ자 형태로 네 칸 규모인 재지기(재실을 관리하는 사람) 집이 지금과 같이 한주정사 아래 위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었다. 재지기 집 자리에 연못이 들어서면서 아래로 이동한 것이다. 이후 20년이 지나 다시 변화가 있었다. 아래쪽 연못을 더 파고 재지기 집을 현재 위치로 옮긴 후 대문을 설치하고 담을 쌓아 한주정사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집을 돌아보고 나니 담을 쌓고 앞에 대문간을 설치한 게 오히려 조망을 많이 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 한주정사를 지을 때처럼 대문간이 없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시원한 조망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의 변화는 바깥행랑채 철거와 대문간채 증축이다. 말을 관리하는 하인의 거처로 썼던 바깥사랑채를 1920년대 들어 말을 사용하지 않자 헛간으로 바꿨는데 이후 건물이 퇴락해 헐어버렸다. 또한 하인이 거처하는 방이 필요하게 돼 문간채를 한 칸 늘려 지으면서 초가를 기와로 바꿨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묘(종묘에 들어갈 수 없는 신주를 모시기 위해 따로 지은 사당)는 한주정사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지막 변화는 사회구조가 변화됨에 따른 것이다. 이전까지 한주종택은 성산 이씨 종가로 별묘와 사당이 함께 존재했다. 그러나 친족들이 멀리 떨어져 살게 되면서 한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게 되자 1955년을 마지막으로 별묘 제사가 사라졌다. 이때를 즈음해 별묘를 철거했고 1970년 지관(묘지나 택지를 선정할 때 지질과 길흉을 판단하는 사람)의 충고에 따라 사당을 지금 위치에서 북쪽 담장 쪽으로 옮겼다. 이런 모습은1990년대 초까지 이어졌으나 이후 사당을 원래 위치인 현재의 위치에 옮겨 지었다.이렇게 집의 변화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연세대학교 건축 역사·이론 연구실의 연구결과이다. 배치도 집은 시대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다 집을 돌아보면서 집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변화를 알기란 쉽지 않다. 배치나 구조의 변화로 대강 추정하거나 운이 좋을 경우 집주인 면담을 통해 개략의 변화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집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집이 변화한다는 것은 생활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늘어나거나, 종교가 바뀌거나, 사회 환경이 변하면 집도 변화한다. 처음 한주가 이 집을 지었을 당시 바깥행랑채는 문하생이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후에는 앞서 언급한 말을 돌보는 하인의 거처였다. 그리고 말이 교통수단으로서의 역할이 사라지자 광으로 변경됐고 그 후 쇠락해 철거됐다. 문간채도 바깥행랑채가 없어지자 하인이 거처할 방이 필요해 한 칸 더 늘린 것이고 초가에서 기와지붕으로 변한 것도 검약을 강조하던 선비정신이 쇠퇴하면서 가문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별묘도 사회 변화에 따라 제사 개념이 변화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특히 문간채가 초가에서 기와지붕으로 변화한 것은 바로 담을 면하고 있는 월곡댁 신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11년 건축한 월곡댁은 1930년에 사당을, 1940년에 별당을 지었다. 근대에 들어 부를 쌓은 월곡댁은 당시 사회 규범을 파괴한 건축형태를 보였다. 농업을 기반으로 했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상업활동으로 부를 축척한 월곡댁은 종택이 아님에도 사당을 세 칸으로 짓고 첩을 위한 별당까지 뒀다. 이는 당시 한개마을의 질서를 깨는 행위이다. 이런 모습에 자극받은 한주종택이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문을 초가에서 기와로 바꿨고 한주정사 영역도 확대한 것이다. 이처럼 집은 시대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집에 대한 연구를보면이와관련한심도있는분석을본적이별로없다. 이런 점에서 연세대학교 건축역사·이론 연구실의 시대 흐름에 따른 한개마을의 대표적인 집의 변천을 연구한 자료는 매우 귀중한 것이 아닌가 한다. 대문 밖으로 난 길,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한주정사 출입구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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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시대 흐름에 따른 집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 성주 한개마을 한주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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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 건축주 취향을 고스란히 담은 집
- 보통 집을 지으려면 건축가에게 일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건축주는 건축가 대신 호흡이 잘 맞는 시공사를 선택했다. 천연 대리석에 프렌치, 클래식, 모던 스타일을 우아하게 믹스 매치한 맞춤형 집 중정에는 아내를 위한 정원이 있다. 꽃과 식물을 잘 키워보려고 만든 곳에서 오히려 평온을 얻었고, 인천광역시에서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집’이 됐다. 영종도 바다를 배경으로 150여 평 대지 위에 완벽한 내진 설계로 잘 지은 집, 허재원 김영희 씨 부부의 집 이야기를 담았다.글 | 이종수 사진 | 백홍기 취재협조 | TG건설 ※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OUSE NOTE위치 인천 중구 운서동대지면적 500.71㎡ (151.73평)건축면적 346.43㎡(104.98평)연면적 346.43㎡(104.98평)지하 82.50㎡ (25평)1층 263.93㎡ (79.98평)건폐율 48.92% 용적률 48.28% 지역지구 제2종 전용 주거지역건축구조 철근 콘크리트설계기간 7개월공사기간 9개월외부마감 지붕 - 리얼징크 티타늄 외벽 - 천연 대리석내부마감 내벽 - 실크 벽지, 천연 페인트, 석고보드 위 도장 바닥 - 홍송 15mm 대리석 위 홍송 마루천장 - 질석 벽지, 일본 다이 껜 화산재 아트월창호 - 로이유리 창호 및 LG 시스템 창호단열재 지붕 - 징크, 아연도 징크 강판 스트로폼 150mm 내단열 방식외벽 - 대리석 30mm, 열반사 벌크형 단열재 40mm 내벽 - 아연 스트로폼 150mm주방기구 시스템 주방위생기구 대림, 로얄토토조명기구 침실 - 이태리 상들리에 주방 및 거실 - 100W LED 5구 조명설계 및 시공 TG건설 031-434-1825, 010-8768-7769 단독 주택에 살기로 마음먹었다면, 사람들은 땅부터 물색한다. 풍광 좋고, 지리적으로 접근하기 편리한 곳. 적당한 땅을 발견하면 과연 어떤 집이 좋을까 고민하며 건축가와 시공사를 알아본다. 건축가에게 설계 도면을 받고 시공사를 선정해 집을 짓기까지 몇 달의 과정을 거쳐 골조를 마감한 뒤에는 가구·벽지·조명등·패브릭·스위치 커버 등 집을 집답게 만들어주는 세부 선택 사항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집주인의 취향을 가장 많이 드러낼 수 있는 바로 이 과정에서 집주인 대부분은 지치고 힘이 빠진다. 트인 ㅁ자형 단층 집이지만, 집의 규모만큼 복도가 유난히 길다. 왼쪽으론 중정이 있고, 그 안에는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있다. TV 오른쪽 공간은 건축주 부부의 침실이다. 거실 옆으로는 바와 주방 그리고 다이닝룸을 마련했다. 후드를 150%로 설계해 음식 냄새가 배지 않도록 했다. 주방 양 옆에는 중정과 회의용 거실이 있어 동선이 탁 트인 느낌이다. 건축가가 설계한 후 시공사와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대부분 집주인의 몫이요, 야심 차게 스크랩해둔 특정 스타일을 요구해봤자 한정된 예산으로는 어림없다는 볼멘소리만 되돌아오기 일쑤다. 건축가가 설계한 구조적이며 심플한 마감은 살릴 수 있지만 스타일이 보이지 않는 집, 이는 바로 건축가와 시공사 사이에 건축주의 공감이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천시 중구 영종도 바다와 근접한 허재원, 김영희 씨 부부는 공사 기간 내내 오히려 즐거웠다고 했다.“전에 살던 집을 맡은 시공사 김태규 대표에게 자문을 얻기 위해 전화를 걸었죠. 급하게 서두를 일이 아니라서 공사 기간도 넉넉하게 두고 이거 저것 많이 알아보고 준비했어요. 김태규 대표는 이미 몇 번 집을 지으면서 제가 뭘 원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줄뿐더러 설계부터 시공, 인테리어 취향까지 완벽하게 구현해주니까요.” 지하까지 총 2개 층으로 이뤄진 이 집은 1층에 거실과 주방 등 공용 공간과 접견실과 침실 등 개인 공간이 중정을 중심으로 ㅁ 자를 따라 질서있게 배치돼 있다. 거실 벽체와 벽난로가 일체를 이루며 벽면 그 자체로 연출한 디자인이 세련된 분위기를 내는 회의용 거실은 이 집의 접견실로 이어진다. 건축주와 시공사가 한마음으로 짓다 통상적으로 건축가가 건축물의 종합 설계를 담당한다면 시공사는 인테리어 담당자를 참여시켜 설계상 좀 더 세밀한 부분, 즉 각 공간의 미학과 기능, 개성까지 책임진다. 허재원, 김영희 씨 부부의 주택은 집을 설계할 때부터 함께 상의하고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을 함께 맞추면서 완성도를 높였다. 외주 건축팀과 내진 설계부터 함께 조율하고 시공, 내부 데커레이션까지 진행한 맞춤형 케이스인 셈이다.영종도 바닷가 근처에 모던하게 들어선 건축주의 집은 지하 1층, 지상 1층 건물로 건물 후면과 연결되는 1층 현관이 건물 전면부에서 보면 2층인 구조다. 현관을 기준으로 내실로 들어서면 거실과 다이닝 공간이 펼쳐지고, 정원이 있는 중정을 중심으로 ㅁ자로 부부 침실과 프라이빗한 접견실 그리고 회의용 거실이 자리한다. 대리석 통로를 지나 내려가는 지하 공간은 부부의 건강을 위한 체력단련실이 갖춰져 있다.“외국에는 뒤쪽에서 보면 지층인데 앞으로는 시원한 전망이 펼쳐지는 이런 구조의 집이 많아요. 마당과 연결되는 지층 같은 경우 거실부터 마당까지 확 트인 개방감을 살리는 것이 포인트죠. 벽으로 공간을 막는 대신 큰 가구나 가벽만으로 공간을 분리해 유기적 느낌을 냈어요.” 천연 대리석과 곡선 라인의 헤드보드, 화려한 문양의 침장까지 세미 클래식 스타일로 완성한 침실.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완성한 홍송 바닥이 인상적이다. 안방 욕실과 다이닝룸. 앤티크 오브제를 활용해 여성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우아한 세면대를 연출했다. 욕실은 절제된 선과 색, 군더더기 없는 미니멀 디자인으로 여백의 멋을 살렸다. 실내 정원을 배치한 중정을 중심으로 주방과 조리대, 공용 공간인 거실과 독립 공간인 침실과 접견실 등으로 이어지도록 배치하고, 건축주의 바이어를 위해 소파와 커다란 다이닝 테이블을 병렬식으로 구성했다. 소파와 마주하는 가벽 앞면에는 TV를 설치하고, 뒷면에는 주방 수납장을 짜 넣은 공간 활용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또한, 아내에게 주택에 사는 묘미를 제대로 만끽하게 해주고 싶었다는 남편의 바람으로 3m 이상의 높은 중정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실내 정원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예상대로 실내 정원은 하루 중 건축주 부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됐다.“처음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은 모두 거실보다는 정원을 더 좋아해요. 위로 트인 실내 정원이 있어 폭포의 시원함과 화려한 꽃들이 어우러져 아름답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 정원이 참 마음에 들어요. 주방에서부터 정원까지 동선도 편하고, 손님이 와도 야외에서 대접하는 기분이 나거든요.” 집을 찾은 손님들을 위해 마련한 접견실은 박물관처럼 진열장을 짜서 지난 20여 년 동안 수집해온 수집품을 넣어두었다. 갖가지 수집품과 다양한 술병이름의 질서에 따라 자유롭게 정리돼 있다. 공간과 가구로 취향을 반영하다 그만큼 이 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튼 ㅁ자 구조의 중정中庭과 프라이빗한 접견실이 있는 곳이다. 집 자체가 조그만 마을과 같은 다양한 공간이 나오도록 의도한 중정은 실내 정원을 사이에 두고 이쪽 공간에서 길 건너 저쪽 공간을 쳐다보는 구조다. 이게 묘한 기분을 준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선은 바라볼 수 있는데서 오는 감정이다. 같이 있는 듯하면서도 떨어져 있고, 떨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붙어 있는 느낌이다.손님용 거실과 정원으로 이어지는 접견실은 건축주가 직접 장식장부터 맞추고 수년 동안 모은 고가의 수집품을 하나하나 정성 들여 배치한 곳이다. 다소 비현실적으로 생각할 정도로 느껴지는 접견실은 누구나 한 번쯤 누리고 싶은 호사스러운 공간이다. 각기 다른 느낌의 대리석 벽과 홍송 바닥에 맞춰 커버링을 다시 해 색상 톤을 맞추고, 장식장과 의자는 프레임을 홍송 톤으로 도장함으로써 고급스러운 오브제로 재탄생했다. 지하로 내려가면 체력단련실이 있다. 이곳에서 허재원, 김영희 씨 부부는 이트 트레이닝을 한다. 탁구대를 들여 전신운동은 물론 에어로빅이나 근력 운동을 할 수 있는 각종 운동기구로 매일 체력관리를 한다. 지하 계단과 지하 모습 할 수 있는 각종 운동기구로 매일 체력관리를 한다. 이렇게 완성하기까지 설계하는 데만 7개월이 걸렸고, 집을 짓는 데도 9개월이 흘렀다. 가구와 패브릭 세팅, 메뉴 준비 등으로 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콘셉트와 크기가 모두 다른 방은 모두 건축주 부부가 직접 연출한 것. 공간 구성은 물론 마감재, 가구와 욕실 수전 하나까지 모두 직접 골랐다. “건축 단계부터 서로 조율해나가 디자인 면에서 좀 더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어요. 시공사와는 이미 여러 차례 작업을 진행하면서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웬만큼 파악하고 있었기에 한결 수월했고, 무엇보다 무조건 신뢰하고 지원해 주니 더 열심히 해줘서 완성도가 높아진 것 같아요.” 중정은 실내 정원을 사이에 두고 이쪽 공간에서 길 건너 저쪽 공간을 쳐다보는 구조다. ㅁ자 형의 집으로 창밖으로 중정을 거쳐 반대편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 집 안 어디에서도 자연을 바라보고 감상할 수 있게 해놓았다. 주택 마당 모습 좋은 집이란 건축주의 취향이 제대로 반영된 공간이다. 하지만 취향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취향이 어떠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아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집 짓기에서 전제되어야 할 건축주와 시공사 간의 궁합, ‘척 하면 척’ 알아듣는 호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또한, 까다로운 취향을 고려한 인상적인 공간은 평소 상대방에게 얼마나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취향에 꼭 맞는 ‘집’을 선물 받은 허재원, 김영희 씨 부부는 매일매일 근사한 호텔 스위트룸에서 하루를 맞이하는 기분이란다. 건축주 부부와 TG건설은 벌써 세 번째 인연이다. 이처럼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진행하는 경우 설계 당시부터 건축주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고려해 구조, 마감재는 물론 가구, 패브릭 등 세세한 부분까지 테마를 잡고 진행해 만족도가 높다. 주택 좌측 모습 추가 [철근콘크리트주택] 건축주 취향을 고스란히 담은 집 영상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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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 건축주 취향을 고스란히 담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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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02월호 특집 2]한옥의 위기, 잃어버린 10년인가
- 한옥의 위기, 잃어버린 10년인가 국가 차원에서 한옥에 관심을 갖고 보급·확산을 위해 노력해온지 10년. 아쉽게도 그 결과는 너무 미미하게 나타났다. 그 이유는 뭘까. 집은 시대에 따라, 생활의 변화에 따라, 기능의 변화에 따라 진화하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우리의 한옥과 인식도 진화하고 있는가. 한옥의 수요 현황과 과제, 앞으로 방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글 박창배 기자 사진 전원주택라이프 DB, 조신형 작가 (강릉 한참봉 고택), 박영채(은평한옥마을 월문가) <참고 문헌> △ 「한옥 활성화 정책 추진 현황 및 과제」, 건축공간연구원, 2019 △ 『한국건축사』, 윤장섭, 동명사, 1975 △ 『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 고산, 북스타, 2020 △ 『한국주거의 공간사』, 전남 일, 돌베개, 2010 △ 노진선, 오피니언뉴스, 2020, 이 외 국가한옥센터(www.hanokdb.kr), 서울한옥포털(http://hanok.seoul.go.kr) 자료를 참조했습니다. 한옥 활성화 정책의 실패 건축도시공간연구소 국가한옥센터에서 2013년, 2016년, 2018년에 시 행한 ‘대국민 한옥 인식 및 수요특성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옥에 대한 거주 수요는 2013년 57.5%, 2016년 56.7%, 2018년 29.9%로 지속적으로 감소해왔다. 이러한 경향은 한옥의 인허가 추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2011년~2018년 한옥 인허가 수는 2011년 1,589채, 2012년 1,326채, 2013년 1,067채, 2014년 1,066채, 2015년 773채, 2016년 718채, 2017년 612채, 2018년 474채로 지속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2007년 한스타일 육성 종합계획을 통해 한옥이 국가 차원의 정책 대상으로 다루어진 이후 2010년 신한옥플랜 대통령 보고를 계기로 한옥 활성화 정책 추진이 본격화 되었으며, 그로부터 10년이 경과했다. 그동안 정부는 한옥 보급과 확산을 위해 한옥에 대한 재산세 등 세제감면 추진(지자체), 농어촌 주택개량사업 운영지침 개정(농림부), 농어촌 뉴타운 내 시범한옥마을 조성(농림부), 농어촌 한옥설계도서 보급(국토부) 등을 시행해왔다. 기술 개발 및 산업화를 위해, 한옥 기술 R&D(국토부), 개발 기술 검증 목업 테스트(국토부), 목재산업 육성 인프라 구축 및 R&D(산림청), 국가한옥센터 설립(국토부) 등을 추진했다. 이 외 한옥 보전·관리와 한옥의 적극적 활용을 위한 노력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이렇듯 10년에 걸쳐 국가 차원의 한옥 활성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옥에 대한 국민적 수요가 감소해왔다는 것은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구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2000년대 후반, 한옥의 겨울철 추위 등 물리적 불편사항 개선, 건축비 절감 등이 한옥에 대한 국민적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부상했다. 그에 부응하고자, 정부는 2009년부터 2019년까지 약 10년간 300억 가까이 국고를 지원하여 한옥 기술 R&D 사업을 추진해 왔다. 이는 다름 아닌 ‘저렴하면서도 성능 좋은 현대의 한옥’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물리적으로 해결 가능한 궤도에 올라와 있음을 여러 차례의 시범 한옥 건립을 통해 실증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옥 거주 수 및 인허가 동향은 이에 반비례 해온 것이다. 한옥 수요 감소, 그 이유는 뭘까 양평에 전원주택 지을 준비를 하고 있는 박해원·김지원 부부. 그들은 분당에 살면서 양평에 부지를 마련해놓고 15년 만에 집짓기 준비에 나섰다. 남편은 한옥을 짓고 싶은데, 아내와 자녀들의 반대로 결국 모던주택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반대한 이유는 한옥은 건축비도 비싸고 관리가 어렵고 벌레가 많다는 게 주된 이유다. 그렇다. 한옥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불편하다’ ‘비싸다’ ‘고리타분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옥이 다른 구조의 주택보다 건축비가 높은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불편하다’와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에서 저자(고산)은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나는 이것을 문화에 대한 자부심 부족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자부심의 부족은 왜곡된 역사 교육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세계 어느 전통 건축에서나 이런 불편함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 불편한 고민들은 해결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문명이 생겨났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자연환경과의 조화, 인간관계와 소통의 문제, 시간에 따른 노후화 등을 고민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단점은 장점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런데 일본에 의한 왜곡된 식민교육이 해방 이후까지 이 어지면서 전통은 구차함을 넘어 혐오스러운 것으로 남았다.” 한옥은 겉보기에는 생활하기 불편해보이지만 집안 곳곳에 거주하기 좋도록 만든 조상의 지혜가 숨겨져 있다. 습기를 막을 수 있는 기단, 직사광선을 막아주는 처마 등등……. 그리고 최근에는 전통한옥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한 현대식 한옥, 공장에서 제작한 부자재를 현장으로 옮겨 조립하는 모듈러 한옥까지 다양한 형태의 한옥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현대식 한옥은 얼핏 보기에는 전통한옥과 똑같아 보이지만, 내부는 살기 편하게 현대식으로 꾸미고 있다. 특히 칸을 나눠짓던 예전과는 달리 내부공간을 시원하게 만들고 있다. 거실을 넓게 만들고 주방 역시 편리하게 인테리어 하고 있다. 그리고 나뭇결이 느껴지는 한옥의 멋과 전통문양의 창호로 은은함을 살리고, 이중창호를 덧대 단열문제를 해 소하고 있다. 한옥이 ‘비싸다’는 의견에는 납득할 수 있지만 ‘불편하다’ ‘고리타분하다’는 인식은 잘못됐다고 봐야 한다. 아니 한옥에 대해 잘못알고 있다고 봐야한다. 한옥의 정의와 변화된 모습 우리의 향기와 문화가 배어 있는 ‘한옥’. 과연 우리는 한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옥은 한국인의 삶의 모습과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자연에 대한 존중도 담고 있다. 기와를 얹은 집이든 볏짚을 얹은 초가집이든 자연을 거스르는 집은 없다. 자연과 어울리며 나무와 흙과 물, 바람이 만나 이루는 조화는 절정의 창의성을 보여준다. 공기가 자연스럽게 흐르는 이곳은 일상에 지친 마음의 치유 공간이 되기도 한다. ‘한옥’이란 용어는 오래된 말이 아니다. 개항 이후 서양의 근대건축양식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건축양식과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조어였다. 서양건축이 들어오기 전에는 일반적인 집이 모두 한옥 이었으므로, ‘한옥’이라는 말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국어사전에 ‘한옥 ’ 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5년경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양 식으로 지은 집을 양식 건물에 상대하여 부르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법률적으로는 <건축법 시행령> 제2조에서 <한옥 등 건축 자산의 진흥 에 관한 법률> 제2조로 옮겨오면서 “기둥 및 보가 목구조 방식이고 한식 지붕틀로 된 구조로서 한식기와 볏짚, 목재, 흙 등 자연재료로 마감된 우리나라 전통 양식이 반영된 건축물 및 부속 건축물”에서 “주요 구조가 기둥·보 및 한식 지붕틀로 된 목구조로서 우리나라 전통 양식이 반영된 건축물 및 그 부속 건축물”로 바뀌었다. 국가한옥센터는 “한옥의 기원은 기원전 6,000년경 신석기시대 전기의 움집이며, 조선시대 후기에 전통 한옥이 완성된 것으로 본다”고 밝히고 있다. 한옥은 지어진 시대에 따라 전통 한옥, 근대 한옥, 현대 한옥으로 구분한다. 전통 한옥은 서양 건축 양식이 유입되기 이전의 한옥이고, 근대 한옥은 근·현대에 도시화 과정 속에서 도시 내 필지 분할과 함께 규모가 축소된 전통 한옥 형태의 한옥(도시형 한옥) 그리고 전통 한옥 형태에서 변형이 이뤄진 개량 한옥이며, 현대 한옥은 현대 <건축법> 규정에 의해 건축된 전통 양식의 한옥이다. 한편, 신한옥도 있는데 국토해양 부는 “주요 구조부가 한국 고유의 목구조 방식으로 건축된 건축물로서, 건축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현대적 기술 및 재료를 사용한 건 축물 및 그 부속 시설”로 정의하고 있다. 장인의 고집으로 완성되는 한옥 조상의 지혜가 살아 있는 전통 한옥은 세월이 지나도 특유의 멋스러움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통 한옥이 지어지기까지는 기간이 오래 걸리고 도편수와 와공(기와 기능인)을 비롯한 많은 전문가들의 손길이 필요하다. 건축비가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인 셈이다. 한옥을 세우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특수성과 우수성이 잘 드러난다. 한옥은 먼저 돌과 흙을 이용해 평지보다 약간 높게 단을 쌓는다. 그런 다음 기초석을 놓고 나무 기둥을 세우면서 시작한다. 여기에 황토를 활용해 벽체를 만든 다음 창을 내고, 이후 지붕을 얹는 순서로 진행된다. 지붕은 서까래와 계판이라 불리는 반듯한 널빤지를 깐 다음, 무게를 분산시키고 균형을 잡아주는 적심목을 차례로 놓는다. 그 사이에 흙을 채워가며 기와를 얹게 된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정성으로 완성한 집이 바로 한옥이다. 한옥의 구조 과정을 살펴보면 한옥은 나무를 다듬어서 기둥을 세우고 보를 걸고, 그 위에 소로와 첨차, 도리와 서까래를 짜 맞추는 구조체제를 갖는다. 한옥 건축의 시작점은 초석이다. 이 초석 위에 300kg이 넘는 기둥을 정확하게 세우면서 목조 뼈대를 만드는 일이 시작된다. 목재와 목재를 연결할 때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부재를 서로 끼워 맞추는 사괘맞춤 형식을 사용한다. 기둥과 보, 기둥과 도리가 빈틈없이 결구되도록 하기 위해선 메질(나무망치로 두들기는 작업)이 필요하다. 기둥의 위쪽에 앞뒤로 연결하는 보와 좌우로 연결하는 도리를 얹는다. 이렇게 되면 계절변화로 인한 목재의 수축 이완에도 뒤틀리지 않고 단단하게 결합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동에도 강하다. 임진왜란 때 나무못을 사용한 조선의 판옥선이 못을 사용한 왜(일본)의 가옥선보다 강했던 것처럼……. 그뿐만 아니라 4m가 넘는 지붕에 올라 1만 여 개 이상의 기와를 쌓아야 하는 와공의 작업 또한 만만치 않다. 이런 과정 끝에 비로소 고풍스러운 한옥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 복잡함과 섬세함 속에는 우리 장인들의 기술이 담겨 있다. 무엇하나 특별할 것 없는 재료들이지만 집 짓는 과정에서 특별함을 갖게 하는 것이다. 못이나 화학적 접착제 하나 없이 완벽한 구조물을 만드는 것부터, 재료들의 특성을 유지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 장인의 손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다. 장인들은 주변 자연에서 얻어진 것들만으로 수백 년 세월을 버티는 집을 짓는다. 기둥은 한국의 산하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나무를 다듬어 세우고, 기와는 집터의 흙을 구워 만들며, 이를 고정하는 것 또한 황토다. 황토로 지어진 집은 습도 조절에서 다른 어떤 집보다 뛰어나다. 그리고 자연에서 가장 가까운 재료이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적응하고 받아들인다. 한옥의 구조와 과학 한옥은 모양에서뿐만 아니라 구조면에서도 유럽이나 현대식 집들과 차이가 있다. 한옥의 구조로는 ㄷ자, ㅁ자, ㄱ자, 一자를 들 수 있다. 튼 ㅁ자형 한옥이나 ‘ㄷ ’자형 한옥은 집의 중심에 안마당을 가지고 있다. ㄷ자 한옥은 건물의 중심부에 거실(마루)과 부엌을 두고, 양 날개부분에 각 방을 배치함으로써 밸런스를 추구하는 한편, 정면으로 보이는 양 날개 부분 끝을 박공 혹은 팔작지붕으로 마감하는 것이 특징이다. ㅁ자 한옥은 추운 바람을 막고 집안의 온기를 간직할 수 있는 형태로, 겨울이 춥고 긴 북부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는 형태이다. 서울 북촌의 튼 ‘ㅁ’자형 한옥은 근대 이전부터 북촌에 있던 주거유형으로 ㄱ자형 안채와 ‘ㄴ ’자형 바깥채가 마주보면서 모서리가 열린 ‘ㅁ ’자형을 이룬다. ㄱ자 한옥은 두 채의 ㅡ자 한옥을 수직으로 연결해 놓은 듯 간결하고 깔끔하며, 이에 따라 넓은 마당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ㅁ자 한옥의 절반 크기에 해당하는 형태인 만큼, ㅁ자 한옥에 비해 내부 공간을 많이 활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ㄱ자의 각 끝부분에 방을 두고 두 一자가 만나는 공간에 거실(마루)과 부엌을 두어 동선을 최소화하는 것이 일반적인 배치라 할 수 있다. 一자 한옥의 경우, 방들과 거실(마루), 부엌이 一자 한 채에 둔 구조이므로 거실 공간은 상당히 한정적이며, 부엌과 일체화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대신 벽면에는 창문과 방문을 무수히 냄으로써, 햇빛을 보다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경우가 많다. 사방이 트여 모든 방향에서 햇빛 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방향성(남향, 북향 등의 여부)의 제약을 크게 받지 않는다. 『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에서 저자(고산)는 “한옥을 사색의 공 간”이라고 말하고 싶다며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방문객들에게 한옥이 가진 멋의 깊이를 천천히 발견하게 해주는 인간 친화적인 디자인은 이전까지 내가 느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것이다. 한옥은 대문과 현관, 거실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구조를 피한다. 대신 자연 속을 산책하게 하고 그러면서 사색하는 철학자가 되게 한다. 담장을 따라 걷다 어느 순간 작은 식물들과 만날 수 있다. 처마를 돌다 보면 시원한 바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 길은 계절에 따라 다르고 아침과 늦은 오후의 모습이 다르다.” 한옥에서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절묘한 과학은 난방에 있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부엌은 취사를 위한 공간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한옥의 부엌은 취사 기능 외에 한가지 역할을 더 한다. 가장 열효율이 높고 기능성이 좋은 난방이 그것이다. 한옥의 독특한 구들 시스템은 불의 열기를 내부에서 모두 소진하고 굴뚝으로 빠져나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한옥의 구들은 작은 열만으로도 최대한 효과적으로 난방이 가능하게 만든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한옥은 창의적이면서 철학적인 특성을 모두 가진 한국의 소중한 보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함은 얼마든지 현대적인 방식을 도치되고 어떤 식으로든 응용이 가능하다. 과거건축기술과 현재건축기술을 접목하는 단계에서 완성된 목록은 없다. 애정과 자긍심, 노력만이 숨겨놓은 과거 엔지니어들의 보물을 찾을 수 있다. 한옥의 변신, 전통과 현대의 만남 시간이 흐르면서 한옥도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다. 한옥은 1990년대 들어 삶의 질이 나아지면서 가족의 건강을 위한 자연과 어우러진 생태적인 주거 공간으로 황토집, 개량 한옥, 현대 한옥 등 다양한 이름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생태 건축이라 하여 구조체(뼈대) 없이 황토벽돌로만 지은 집, 또 귀틀집이나 목심집 등도 지어졌다. 한옥의 내부 공간도 변화했다. 가장 뚜렷하게 변화된 부분을 꼽자면 마루다. 마루는 한옥에서 구들과 더불어 가장 큰 특징으로 집안과 밖의 구별이 모호한 개방적 구조의 한옥 특성을 보여준다.『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에서 저자(고산)는 조선 중기 세도 가문인 파평 윤씨 종택인 논산 ‘명제 고택(윤증 고택)’을 둘러보면서 마당과 마루에 대한 특이점을 발견하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택에서 특이했던 것은 시선이 가장 많이 머무는 마당이었다. 이 마당엔 어떠한 조경 시설도 없었다. 중국이나 일본의 정원 문화에 익숙해 있던 나에겐 낯선 충격이었다. 여기엔 오랜 세월 이어온 사람들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한여름 앞마당이 태양 빛으로 뜨겁게 달궈지면 그곳에 있던 공기는 상승한다. 이때 숲과 연결된 뒷마당의 서늘한 공기와 온도 차이로 대류 현상이 일어난다. 뜨거운 마당의 공기가 상승하고 나면 뒷마당의 차가운 공기가 앞뒤로 뚫려 있는 대청마루를 통과해 마당으로 들어온다. 이 때문에 뜨거운 여름에도 대청마루는 시원함을 유지한다.” 과거 대청마루는 집안의 행사가 있을 땐 손님 접대 공간으로 다양하게 쓰이던 곳이었지만, 현재는 겨울철 난방까지 가능한 거실의 형태로 변화했다. 마루뿐 아니라 마당도 내향적 구조로 바뀌었다. 개인의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현대 건축의 특징을 더한 것인데, 담을 높여 외부 시선은 막으면서, 마당을 넓혀 전원에서의 삶을 사는 듯한 자유로움을 느끼도록 디자인하는 추세다. 이처럼 기존의 한옥 공간에 현대적 디자인을 가미한 공간이 있는가 하면, 현대식 생활 패턴에 따라 새롭게 생겨난 공간도 있다. 개인 주차장이 딸린 한옥은 물론, 조선 중기 이후 온돌이 보편화되며 사라졌던 2층 한옥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반면, 내부 인테리어는 기존에 한옥이 가진 유려한 선의 아름다움은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달했다. 특히 서까래를 노출하고, 간접 조명을 다는 방식으로 천장에 포인트를 둔다. 현대 건축에서는 인테리어적으로 활용도가 낮은 천장이지만, 한옥에서는 충분히 포인트가 될 수 있다. 목재가 주는 자연스러움과 따스함이 가미되어 멋스러운 인테리어가 완성된다. 한편 한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인 ‘집과 자연 의 관계’는 모던 주택에서도 여전한 가치로 이어져 자연을 수용하고 함께 어울리려는 태도가 꾸준히 반영되고 있다. 주변의 산이나 경치뿐만 아니라 마당의 경관까지 집의 내부로 끌어들이도록 개구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자연을 접할 기회가 줄어든 현대사회에서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된 것이다. 한옥의 미래와 나아갈 방향 건축도시공간연구소 국가한옥센터(2019), “2013·2016·2018년 대국민 한옥인식 및 수요특성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옥 거주 수요는 지속적인 감소 추세에 놓여 있으며, 2018년에 특히 큰 폭으로 수요가 하락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옥에 거주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2013년, 2016년, 2018년 조사 결과를 종합해본 결과, 겨울철 추위(16.7%) 및 생활의 편의성 부족(14.2%), 유지관리의 어려움(12.8%)이라는 응답이 차례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한옥이 겨울에 춥고 생활의 편의성이 부족하며 유지관리가 번거로울 것이라는 우려를 어떻게 바꾸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에 향후 한옥 거주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실제 한옥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옥의 거주 가치를 실증하고 이를 일반 국민에게 널리 알려 이해와 인식을 제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아울러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한옥 건축비용에 대한 문제 또한 연구해야 할 과제다. 나아가 한옥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에서 저자(고산)는 한옥의 우수성을 세계 속으로 전파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한다. “이미 많은 코리아타운이 세계 곳곳에 있지만, 그것은 한국인을 위한 공간이었다. 설령 외국인들이 그곳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국 음식을 체험하거나 한국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사기 위해 가는 것이다. 한국을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은 지금까지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한옥을 다시 이해할 수 있도록 문화를 담은 공간을 수출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미래 건축가들, 미래의 디자이너들, 미래의 도시 공학자들에게 한옥의 가치를 다시 심어주는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세계 어디에 자신들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든 그곳은 한국만의 특성이 잘 녹아 있는 공간으로 자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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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02월호 특집 2]한옥의 위기, 잃어버린 10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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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 무상 설계 ⑭】 경북 맞춤형 한옥 도면 3 (31~42평형)
- 한옥을 지어 살고 싶은 예비 귀농귀촌인들은 주목하자. 경북 도청이 경상북도 건축사회와 손잡고 경북형 한옥 모델을 만들어 시민에게 공개했다. 가장 기본이 되는 一자형부터 활용하기 좋은 ㅁ자형 한옥까지 총 28개 모델로 실속형과 고급형으로 나뉘어 설계됐다. 먼저, 가장 기본이 되는 평형별로 4차례 걸쳐 소개한다. 단, “한옥 표준설계도가 아니므로 주택 계획과 설계 시 참고용으로만 활용할 수 있다” 자료협조.이용방법 문의 경북도청 건설도시국 054-880-4038 www.gb.go.kr 15. ㄱ자 31평형 설계 개요 1세대 2인 가구 각 실 공간의 특성을 살린 평면계획 실구성 방 1, 거실 1, 주방 1, 화장실 1, 누마루 1 연면적 103.74㎡(31.43평) 16. ㄱ자 33평형 설계 개요 1세대 2인 가구 거실을 중심으로 한 평면계획 실구성 방 3, 거실 1, 주방 1, 화장실 2 연면적 107.42㎡(32.56평) 17. ㄱ자 38평형 설계 개요 1세대 2인 가구 각 실 공간적 특성을 살린 평면계획 실구성 방 2, 거실 1, 주방 1, 화장실 2연면적 111.58㎡(33.81평) 18. ㄷ자 39평형 설계 개요 1세대 4인 가구 4인 가족 생활에 독립성 및 접근성을 둔 평면계획 실구성 방 3, 거실 1, 주방 1, 화장실 2 연면적 130.00㎡(39.39평) 19. ㄱ자 41평형 설계 개요 1세대 2인 가구 각 실 공간적 특성을 살린 평면계획 실구성 방 3, 거실 1, 주방 1, 화장실 3, 대청마루 1 연면적 137.07㎡(41.53평) 20. ㅁ자 41평형 설계 개요 1세대 2인 가구 각 실 공간의 특성을 살린 평면계획 실구성 방 4, 거실 1, 주방 1, 화장실 2 연면적 135.54㎡(41.07평) 21. ㄱ자 42평형 설계 개요 1세대 3인 가구 거실과 주방을 중심으로 한 평면계획 실구성 방 3, 거실 1, 주방 1, 화장실 2, 누마루 1 연면적 139.68㎡(42.32평)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 www.countryhome.co.kr잡지구독 신청 www.countryhome.co.kr:454/shop/subscription.asp (스마트폰은 현재 무통장 입금 신청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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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 무상 설계 ⑭】 경북 맞춤형 한옥 도면 3 (31~42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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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TRICT REPORT] 경북 맞춤형 설계도면도 보고, 귀농도 하이소!02
- ‘경북 맞춤형 한옥’ 무료로 한번 살펴보세요~ 한옥을 지어 살고 싶은 예비 귀농귀촌인들은 주목하자. 경북이 경상북도 건축사회와 손잡고 경북형 한옥 모델을 만들어 시민에게 공개했다. 가장 기본이 되는 一자형부터 활용하기 좋은 ㅁ자형 한옥까지 총 32개 모델로 실속형과 고급형으로 나뉘어 설계됐다. 먼저, 가장 기본이 되는 ㅡ자형 도면부터 소개한다. 글 김수진 자료협조 경상북도청 054-880-3324 www.gb.go.kr ㅡ자 12평형 설계개요 1세대 2인 가구 2인 생활에 적합한 짧은 동선 계획 실구성 방 1, 거실 1, 주방 1, 화장실 1 연면적 38.40㎡(11.63평) ㅡ자 13평형 설계개요 1세대 2인 가구 가변성 있는 평면계획 실구성 거실 1, 주방 1, 화장실 2 연면적 43.56㎡(13.20평) ㅡ자 13평형(2) 설계개요 1세대 3인 가구 거실과 툇마루를 둔 독립된 평면계획 실구성 방 2, 거실 1, 주방 1, 화장실 1 연면적 43.32㎡(13.12평) ㅡ자 22평형 설계개요 1세대 3인 가구 거실을 중심으로 확장성과 개방성 있는 평면계획 실구성 방 2, 거실 1, 주방 1, 화장실 1, 누마루 1 연면적 73.53㎡(22.28평) ㅡ자 26평형 설계개요 1세대 3인 가구 거실을 중심으로 한 독립된 공간구성 실구성 방 3, 거실 1, 주방 1, 화장실 2 연면적 85.32㎡(25.85평) ㅡ자 28평형 설계개요 1세대 3인 가구 각 실 공간의 특성을 살린 평면계획 실구성 방 2, 거실 1, 주방 1, 화장실 2, 툇마루 2 연면적 91.49㎡(27.72평) ㅡ자 28평형(2) 설계개요 1세대 3인 가구 전면에 툇마루를 둔 독립된 평면계획 실구성 방 3, 거실 1, 주방 1, 화장실 2 연면적 92.45㎡(28.01평) ㅡ자 30평형 설계개요 1세대 2인 가구 거실과 서재를 중심으로 한 평면계획 실구성 방 2, 거실 1, 주방 1, 화장실 2 연면적 98.84㎡(29.95평) ㅡ자 30평형(2) 설계개요 1세대 4인 가구 거실을 중심으로 한 독립된 평면계획 실구성 방 3, 거실 1, 주방 1, 화장실 2 연면적 99.45㎡(30.13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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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던 道具도구를 깨우다 - 한국건축도구박물관 세운 이왕기 교수
- 이왕기 교수(목원대학교 건축학부)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시선이 남다르다. 그의 마당에는 지금쯤 사라졌을지도 모를 경계석이 마당의 주요 임무를 맡았고 깨어져 산산조각 났을 사발이 얕은 담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건축사학자 주변에 맴도는 사물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은 한국건축도구박물관 부지를 구舊와 신新이 유기적으로 흐르는 공간으로 탄생시켰다.글 박지혜 기자 사진 송제민 기자 취재협조 한국건축도구박물관 041-735-1052 정작 건축을 하는 사람도 우리나라에 한국건축도구박물관이 있는지 잘 모른다. 이왕기교수는 2008년 12월 박물관 건물을 완공해 놓고도 정식 개관을 뒤로 미루고 있다. 현판과 이정표도 달지 않은 데다 구체적인 사업계획도 잡히지 않은 모양이다. 때 이르긴 하나 과연 박물관 모습과 내용이 궁금해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로 찾아갔다.후백제 신검을 무찌르고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이 개국 사찰로 지었다는 개태사 뒤로 훤칠한 위용의 박물관 건물이 머리를 내민다. 전통미를 간직한 개태사 돌담과 기와와 대조를 이루는 박스형 노출콘크리트의 외형이다. 이곳은 동측으로 천호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데 간간이 찾아드는 천호산 등산객들이 이미 박물관 건물에 눈도장을 여러 차례 찍었다 한다. 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그 분위기가 독특해 궁금해 하는 이들이 담 너머 기웃거리기 일쑤라고.박물관 2층 수장고에는 1000여 점의 자료들이 있다. 이 교수는 대략 세어 보아서 그 정도이고 세세하게 구분하면 더 될 것이라고 한다. 과거 한옥 목수들이 사용했던 톱, 대패, 먹통, 벽돌 찍는 틀, 끌 등이 종별로 보관돼 있고 한옥 해체 시 나온 상량과 망와도 보인다. 먹통만 100여 점이라는데 대목은 자신이 쓸 먹통을 손수 만들었으므로 그 생김새가 같기도 힘들다. 개중에 조선후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 통도 보인다. 목수가 만드는 것이 흔치 않을뿐더러 망가지기 쉬우므로 도자 먹통은 그만큼 희귀하다. 여기서도 딱 한점 볼 수 있었다.이 교수가 소장한 건축 도구들은 대체로 조선시대와 근대에 사용된 것들이다. 몇몇 자료는 사용한 목수 이름이 기록돼 구체적인 사용 연도를 알 수 있으나 대체로 주인을 모르는 것들이라 시기를 대략 추측할 뿐이다. 이 교수가 아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왕기 교수는 서쪽과 북쪽으로기울어진 완만한 경사를 그대로 살려 터를 다듬었다.자연히 박물관과 주택 간에 바닥 레벨이 다르고 마당안에도 단이 생겼다. 그렇게 만들어 놓으니 집에는 서고로쓰는 지하공간이 생기고 연못과 화단이 생기고 너른 마당에는 율동감이 생겼다. 30년 수집벽이 박물관으로이왕기 교수가 도처에 흩어져 있는 건축 도구들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우연한 계기로 시작됐어요. 대학원 재학 시절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를 걷던 중 시골에서 올라온 한 상인이 벽에 민화를 걸어놓고 판매하는 걸 구경했어요. 보다가 구석에 먹통이 하나 놓였는데 내가 알던 먹통과 모양이 달라 보였어요. 그래서 저걸사야겠다 마음먹고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털어 그걸 사들고 집으로 왔지요. 서가 한 칸에 놓으니 보기에 좋았어요."그 후로 이 교수는 골동품 찾는 것이 마치 사명처럼 됐다고 한다. 건축 자료들은 골동품 가게에서 사 들이기도 하고 운 좋을 땐 집터나 공사현장에서도 얻는다고 한다. 수년간 모았더니 집과 연구실에 차고 넘쳐 15년 전부터 박물관을 계획하게 됐다고. 한옥 문화 재현한 마당이곳에는 박물관과 주택, 두 동의 건물이 앉혀졌다. 좌향을 서쪽으로 잡고 좌우로 길게 앉혀진 박물관은 연면적 339.3㎡(102평)의 복층 철근콘크리트건물이고 박물관보다 낮은 단에 남향으로 앉혀진 주택은 157.9㎡(53평) 단층철근콘크리트건물이다.이 교수는 2018년 그의 은퇴를 내다보고 박물관과 주택을 지었는데 '최저의 인원으로 관리되는 건축물'에 초점을 두고 설계했다 한다. 그렇기에 벽에는 대형 유리창이 많이 걸렸다. 수장고나 침실 등 기능상 폐쇄적 공간을 제외하고는 어느 공간에서나 전 방위가 관망된다. 전면창을 설치한 주택 거실에서 박물관 우측 외부 덱Deck까지 관찰된다. 이는 박물관 전면과 측면이 투명 유리창으로 시공됐기에 가능하다.또한 박물관 우측 마당에서 작업을 하면서 박물관 좌측 주차장이 관통되는데 역시 박물관 양 측면과 내부 칸막이벽 투명 유리 설치로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박물관 연구실에 앉아서 아래쪽 주택과 진입로를 훤히 볼 수 있도록 설계됐다. 마당에는 값나가 보이는 물건들이 몇 가지 보이는데이왕기 교수는 "주워왔어요"한다. 마당을 이색적으로 만든화강석은 인근 석재공장에서 버리는 것을 주워왔고담이 너무 낮아 넘으려는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주기 위해 엎어놓은사발도 누가 버리려던 것을 업어 왔다.고풍스런 담을 연출하는 와편 역시 구옥 해체로 나온 폐자재다.모두 헌 것이나 새롭고 아름다워 보인다. 한국건축도구박물관의 볼거리는 꼭꼭 숨겨둔 수장고에도 있지만 마당에도 있다. 마당과 진입로를 가름하는 담은 아이들도 뛰어올라 앉을 수 있는 높이로 와편 쌓기를 했고 담을 따라 최기영 대목장이 깎은 흘림기둥이 세 개 섰다. '도회적 노출 콘크리트 건물마당에 웬한옥 기둥?'이라는 의문이 나겠는데 그 의미를 들어보니 이렇다. 이 교수는 이곳 마당을 옛 한옥 마당으로 풀이했다. 건축사를 연구해온 이 교수의 우리 전통 건축물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대목이다."ㄷ자, ㅁ자형 한옥에서 대청과 쪽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에서 벌어지는 푸닥거리를 구경하던 한옥 문화를 이곳에 그렸어요. 세 개의 기둥 주두 쪽으로 가락지를 끼우고 고리를 만들었는데 이 고리는 건물 캐노피 끝에 걸린 고리와 수평 되도록 설치했고 행사 시에 천막을 씌워 뙤약볕과 눈비를 피하도록 하지요. 박물관과 주택을 잇는 덱은 무대로 활용하고 주택 정면에 쪽마루를 이동 가능하게 만들어 넓은 무대가 필요할 땐 덱에 연장 해 쓸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에요."마당에 세워진 한옥 기둥은 박스형 건물의 수평적 이미지에 수직적 이미지를 보완해 비례 미를 살리면서 박물관 컨텐츠와 일맥상통하는 전통문화 계승의 오브제로 풀이된다. * 마당에 순풍順風이 불었다. 도심 마천루 사이 불규칙하게 헤집고 다니는 바람과 다른 바람이었다.이 순풍은 부지 특징을 잘 이용해 건물을 올린 덕분에 얻은 듯 했다. 순풍은 말 그대로 순하게 부는 바람이기도 하거니와 건물이 앉혀진 모습이 자연과 어우러져 순한 양상을 띤다는 비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기적 공간. 산과 들이 집의 창으로 들고 나고 해와 달이 집 안으로 기웃기웃 하는 공간. 하늘이 내려준 물방울이 처마에 내려앉고 이윽고 돌확에 닿아 목마른 흙밭을 윤택케 하는 공간. 이왕기 교수의 공간에서 그러한 유기적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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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던 道具도구를 깨우다 - 한국건축도구박물관 세운 이왕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