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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서울 운현궁 雲峴宮
- 운현궁은 고종의 잠저潛邸이자,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한국 근대사 유적 중 유서 깊은 곳이다. 이하응이 왕실 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 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 정치로의 개혁 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던 잠저이기에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 글 최성호<산솔도시건축연구소 소장/전주대 겸임 교수>사진 윤홍로 기자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사적 제257 호)은 흥선대원군이 살던 집으로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나고 자란 곳이다. 1910년 운현궁 뒤에 서양식 건물(현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을 짓기 위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과 영화루, 은신군 · 남연군의 사당을 모두 헐었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오늘날 기상청과 천문대 격인 관상감(서운관書雲觀은 관상감 별칭)이 있던 고개 이름으로, 그것을 궁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운현궁은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10여 년 섭정攝政하며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행한 곳이다.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던 1863∼1873년 사이 대폭 확장했다. 운현궁이란 이름은 흥선군이 대원군, 부인 민 씨가 부대부인이란 작호를 받은 1863년 12월 9일에 붙여졌다. 예전엔 궁궐과 운현궁이 하나로 이어졌다고 한다. 운현궁 구조는 서양식 건물 앞쪽에 남향한 일렬 배치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과 안채인 노락당老갪堂, 이로당二老堂, 영로당이 자리한다. 현재 영로당은 주인이 달라 운현궁과 담으로 막혔다. 운현궁 행랑마당 쪽은 훼손이 심해 최근에 다시 지었다. 운현궁은 서쪽에서 진입해 경비대인 수직사(현유물전시관)를 거쳐 안채와 사랑채로 들어간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남쪽을,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은 서쪽을 바라본다. 본래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 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에 해당한다. 정원 곳곳에 문인화에 자주 등장하는 괴석怪石이 많다. 개혁 정치를 논한 노안당사랑채인 노안당은 몸채가 정면 6칸에 측면 3칸이고 남쪽으로 4칸 누마루인 영화루迎和樓가, 북쪽으로 2칸 온 돌방과 1칸 누마루가 붙은 T자 형태다. 몸채는 서쪽 사랑채 중문부터 전면 2칸 대청과 전면 2칸 온돌방을, 그리고 돌출한 몸채 전면과 좌우에 퇴칸을 두었다. 잘 다듬은 장대석 3벌 기단 위에 앉히고 누마루쪽 하부는 전돌로 예쁘게 장식했다. 홑처마로 동서 양쪽 면과 남쪽 일부에 차양遮陽을 달았다. 일반집에서 보기 힘든 차양으로 집이 높다 보니 비가 들이치지 않게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차양은 각재로 틀을 짜고, 그 위에 판재를 깐 다음 함석을 덮었는데 버팀목을 설치한 방법이 흥미롭다. 서까래 5∼6개 간격으로 버팀목을 놓고 평고대를 설치하고 철물을 걸쳐놓았다. 이렇게 하면 앞으로 쳐지면서 뒷부분이 처마 상부에 걸린다. 또한 흘러내리는 것을 막고자 평고대 쪽에 별도의 걸고리를 달았다. 별 어려움 없이 간단하게 차양을 설치하도록 한 훌륭한 고안물이다. 노안당은 대원군의 사랑채이자 정사를 논하던 곳으로, 그에 걸맞게 당당함이 느껴진다. 기단은 3벌대지만 중문에서 보면 기가 질릴 정도로 높다. 기둥도 일반적으로 커야 8치 정도를 사용하는 데 비해 10치 정도로 굵다. 홑처마지만 서까래 부재도 매우 크다. 대원군의 집답게 권위를 한껏 높인 것이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공자가‘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라고 한《논어》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일상 시 거처하며 주요개혁 정책을 논의한 곳이다. 4다. 노안당 4칸 누마루인 영화루와 퇴칸. 5 하인방 하부 초석 사이에 전돌로 고막이를 설치했다.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린 노락당.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인 되는 건물이다.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은 노락당노안당 뒤쪽 협문으로 들어가면 안채인 노락당에 이른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쪽 중문칸과 남쪽 행랑채, 동쪽 누마루를 연결한 口자 형태다. 후원도 건물에 싸여 전체적으로 日 자를 옆으로 뉘인 형태다. 정면 10칸에 측면 3칸 규모고 동쪽 양측 1칸과 서쪽 2칸을 남쪽으로 내밀어 남행각과 연결했다.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2칸 온돌방과 1칸 부엌을 대칭으로 배치했다. 온돌방과 대청 앞은 퇴칸이다. 동쪽과 서쪽 방 구성은 조금 다른데 동쪽 방은 안주인이 거처하던 방으로 북쪽으로 1칸을 더 내밀고 반 칸짜리 퇴칸을 뽑았다. 서쪽 방은 4개로 구획해 필요에 따라 트도록 했다. 운현궁의 정침으로 겹처마인 데다 대청도 매우 크다. 육간대청六間大廳으로 칸살이 16척(약 5m, 운현궁 사이트 참조)으로 마치 대궐이란 느낌이 들 정도다. 규모가 크다 보니 지붕도 높아져 운현궁에서 가장 큰 집이 됐다. 후원 굴뚝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재밌는 형태다. 연가煙家를 구성하는 장식들이 눈길을 끈다. 벽돌이 끝나는 지점 둥그런 부재는 도리처럼 사괘마춤을 한 모습이고, 그 위에 부재는 공포貢包(처마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들)처럼 까치발 모양이다. 다시 그 위에 전돌 1장과 기와, 연가를 올렸다. 그 가운데 하나는 태극문양을 새겨 한껏 멋을 냈다. 이것은 경복궁 아미산 굴뚝의 구성 방식과 같아 궁의 품격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전면 전체와 배면 일부에 설치한 차양遮陽. 연가로 구성한 후원 굴뚝 장식들. 노락당은 대청을 중심으로 동서쪽 모두 2칸 온돌방과 1칸 부엌(상부 다락)을 대칭으로 배치했다. 동쪽 이로당과 노락당, 노안당 옆으로 길이 나있다. 이로당 초석은 정방형인데 상부를 하부보다 약간 줄여서 다듬었다. 기둥은 평주와 고주 모두 네모기둥이고 약간의 민흘림이 있다. 남성이 범접치 못한 이로당이로당은 앞의 두 건물과 달리 평면이 ㅁ자 형태다. 애초 정면 7칸에 측면 7칸이던 것을 서쪽 면 전체를 덧달아 정면 8칸이 됐다. 남쪽은 서쪽부터 온돌방과 3칸 대청 · 온돌방이고 동쪽 끝이 통로인 퇴칸이다. 이 퇴칸은 남측 복도각과 북행각을 거쳐 노락당으로 이어진다. 대청과 동쪽 온돌방 전면에 퇴칸을 뒀다. 동쪽은 온돌방과 부엌을 거쳐 북쪽으로 이어지고, 북쪽은 온돌방과 마루방이고, 안쪽 마당 쪽에 장마루를 깐 툇마루를 만들어 실 간 연결에 편리성을 도모했다. 이로당 남쪽 중앙 3칸 대청과 서쪽 온돌방. 이로당과 노락당을 잇는 복도각. 이로당에서 본 서양식 건물은 현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으로 쓰인다. 현재 서울에 한옥은 몇 채 안 남았지만 옛날엔 건물 대부분이 기와집이었다. 그중에는 잘 살던 큰 집도 한두 채가 아니었다. 현존하는 그런 집은 운현궁과 윤보선 전 대통령 집이던 공덕귀 가옥 정도다. 서울은 예나 지금이나 잘 사는 사람이 모여 산다. 권력 주변엔 늘 부자들이 모여 살기 마련이다. 지금은 대갓집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집들이 제대로 남았다면 과거 조선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로당 북쪽과 동쪽, 이로당 북쪽 영로당은 담으로 막혔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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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서울 운현궁 雲峴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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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 시설 만든 세컨드 하우스 포항 슬로우 스테이
- 8세와 11세 두 딸을 둔 김재완(47), 이인경(41) 부부가 포항의 작은 항구 마을에 수익형 전원주택 ‘슬로우 스테이’를 지었다. 귀여운 박공 형태의 집과 텐트로 구성된 슬로우 스테이는 편안한 공간과 재미로 가득하다. 경기도 동탄에 사는 부부는 애초에 시골집을 리모델링하려고 했다. 그러다 수익형 전원주택으로 급선회했다. 그 사연은 들으러 고요한 해변 마을에 있는 부부를 찾아갔다. 글 사진 백홍기 기자취재협조 흥원토건※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인터뷰와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OUSE NOTEDATA위치 경북 포항시 북구지역/지구 제2종 일반주거지역건축구조 철큰콘크리트조대지면적 258.89㎡(78.31평)건축면적 95.18㎡(28.79평)건폐율 36.76%연면적99.75㎡(30.17평)1층 66.76㎡(20.19평)2층 32.99㎡(9.98평)용적률 38.53%설계기간 2021년 2월~4월공사기간 2022년 1월~5월건축비용 3.3㎡당 600만 원설계 지온 건축사사무소 054-256-1104시공 흥원토건 010-3521-0081 https://blog.naver.com/yangpo0081 MATERIAL외부마감 지붕 - T0.7 알루미늄징크, 콘크리트 슬래브 벽 - 스타코플렉스 데크 - 화강석 버너구이 내부마감 천장 - 반무광 수성페인트 뿜칠, 실크 천장지 벽 - 반무광 수성페인트 뿜칠, 실크 벽지 바닥 - 강마루 단열재 지붕 - T215 EPS 준불연 판넬 외단열 - T105 EPS 준불연 판넬, T10 압출법 보온판 계단실 디딤판 - 목재 난간 - 평철 및 환봉 난간 창호 115㎜ 알루미늄 단열바, 35㎜ 로이 3중유리 현관 단열 현관문 위생기구 대림 바스 난방기구 기름보일러 주택은 칠포해수욕장 인근 작은 항구 마을에 있다. 부부는 관광지가 아니어서 휴가철에도 해변이 여유롭고 편안한 것이 좋아 예전부터 이곳을 자주 찾던 곳이라 했다. “시댁과 친정이 포항에 있는데, 여기서 차로 20분 거리에요. 이 마을 해변은 여름 휴가철에도 한가해서 집을 짓기 전부터 아이들하고 자주 놀러 왔었어요. 그런데 관광 해변이 아니라서 화장실이랑 샤워 시설이 없는 게 늘 불편했어요. 물놀이하고 나면, 씻으러 다시 친정이나 시댁으로 가야 했어요. 그래서 갑자기 집을 짓게 된 거예요.” 왼쪽 여닫이문은 1층 거실, 오른쪽 미닫이문은 2층에 연결된다. 손님이 2층에 머물 때 서로 겹치지 않도록 현관에서 동선을 나눴다. 세컨드 하우스이므로 공간을 나누기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주방-식당-거실을 한 공간에 구성해 공간 활용성을 높였다. 주방과 대면하는 곳엔 벤치형 책장을 마련해 아이들의 놀이 공간을 확보했다. 거실 중앙 상부를 가로지르는 계단은 다락에 연결된다. 현관 중문과 주방 사이에 방을 연결하는 복도가 있다. 복도 입구를 아치형으로 만들어 새로운 공간으로 진입하는 느낌을 냈다. 안방에서 나오면 바로 주방과 식당이 보인다. 왼쪽에 게스트룸이 있다. 아이들이 따로 자는 걸 싫어해 네 식구가 함께 잘 수 있도록 매트리스 두 개를 연결했다. 독특한 펜던트 조명으로 포인트를 준 점이 돋보인다. 반신욕을 즐길 수 있는 욕조를 설치하고 어두운 무채색 타일을 적용해 아늑하게 연출했다. 온돌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 몰릴 때 공간이 부족하지 않도록 침대 없는 온돌방을 계획하고, 전용 욕실을 마련해 편리성을 더했다. 1층 복도. 공용 욕실과 개수대. 사고 치는 아내, 수습하는 남편집 지을 곳을 찾기 위해 주변 바닷가에 있는 땅을 보러 많이 다녔다. 조망이 좋은 곳은 바다와 멀고, 바다와 가까운 곳은 땅값이 비쌌다. 아이들이 해변까지 가는데, 힘들지 않고 안전한 곳을 찾아다녔지만, 조건에 맞는 곳을 찾는 게 어려웠다. 그러다 이곳에 빈집이 매물로 나온 것을 알게 됐다 한다. “사실, 제가 사고를 쳤어요. 혼자 여기저기 집하고 땅을 보러 다니다가 계약하기로 한 날이 되어서야 남편에게 ‘오늘 집을 계약할 게 있어서 가야 하는데 같이 가자’고 한 거죠. 남편은 어이없어하죠. 그래도 수습을 잘 해줬어요(웃음)” 대지는 두 필지를 구매했다. 앞 대지는 멸실된 상태로 수풀이 우거져 있었고, 뒤 필지에 작은 농가주택이 있었다. 넓은 마당과 주차장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선 두 필지가 모두 필요했다. 바다와 다소 거리를 두고 있고 작은 항구 마을이라 땅값도 다른 곳과 비교해 절반 정도 했다. 주택은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축보다 고택을 수리해서 쓸 요량이었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땅을 사면서 놓친 게 있었어요. 리모델링해야 할 집이 무허가 건물이었던 거예요. 결국 새로 지어야 해서 간단하게 쉬고 씻을 수 있는 농막을 알아봤어요. 고민하던 남편이 ‘평일엔 빈집으로 놀려야 하는 날이 많은데, 시골에 몇억짜리 땅을 사 놀리는 게 현실적으로 우리 생활에 맞지 않다’고 했어요. 그러더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수익을 내는 민박형 주말주택으로 짓자’고 한 거죠.” 건축 방향이 바뀌면서 전체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우선 설계와 시공 업체를 찾았다. 특히, 시공은 공정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하지만, 사후 관리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해 포항에서 가깝고 믿을만한 업체를 소개받았다. 계단을 오르면 원룸처럼 구성한 2층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계단실 옆으로 또 다른 현관 입구가 보인다. 계단과 마주하는 곳에 작은 주방이 있다. 2층은 형태로 복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침실, 왼쪽에 주방을 배치해 공간을 구분했다. 2층 주방 옆에 있는 욕실. 아기자기하게 꾸민 2층은 커플이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선반과 의자를 배치하고 라탄 갓조명을 설치해 은은한 분위기를 냈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다락은 작은 시네마실로 꾸몄다.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건물 뒤편에 2층 진입 계단을 추가로 설치했다. 계단을 오르면, 휴게 공간으로 꾸민 2층 베란다와 루프탑으로 연결된다. 먼바다까지 내다보이는 옥상은 이 주택의 포인트 공간이다. 날 좋을 때면 이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쌓인 스트레스가 풀린다. 수익형 전원주택에 어울리는 공간 계획수익형 전원주택은 공간구성이 달라야 했다. “설계 전에 필요한 공간과 여러 상황을 고려했어요. 우리 가족만 머무는 경우, 커플만 대여하거나 단체가 대여하는 경우, 또는 친구들이 자주 찾아올 경우도 생각해 여러 가족이 머물 상황도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선 1, 2층을 상황에 따라 독립형으로 사용할 수 있게 분리했어요. 화장실도 불편하지 않게 방 개수에 맞춰 넉넉하게 하고 아이들을 위해 야외 수영장도 계획했어요.” 부정형의 대지는 남서향으로 마을 도로와 접한다. 대지 오른쪽 중간쯤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를 살리고자 주택을 부지 왼쪽에 직사각 형태로 길게 배치했다. 정면에서 본 건물은 박공을 얹어 날렵해 보인다. 외부를 금속 마감재로 감싸고 전면에는 주택 모양으로 창을 설치해 강렬하면서 귀여운 인상을 남긴다. 건물 옆 감나무 그늘이 드리운 곳은 야외 놀이 공간으로 꾸몄다. 감나무를 중심으로 뒤에는 물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한 야외 수영장을 설치하고, 앞에는 큰 텐트를 치고 휴식 장비와 야외 조리기구를 갖춰 어른들의 야외 놀이 공간을 마련했다. 해변에 지은 민박 겸용 주말주택이라 사용자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충분히 만족하도록 야외수영장과 테라스, 바다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루프탑을 계획해 휴식과 재미난 이벤트가 지속해서 이어지도록 공간을 연출했다. 외부에서 실내로 진입하는 입구는 모두 세 곳이다. 대로에서 바로 편리하게 거실로 진입하도록 정면에 출입구를 내고, 수영장과 접한 오른쪽 측면에 현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건물 뒤편에 외부 계단을 설치해 2층을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2층은 현관에서도 연결된다. 현관에 들어서면 양쪽에 설치한 중문이 있는데, 왼쪽 여닫이문은 1층 거실, 오른쪽 미닫이문은 2층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수직 수평으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동선은 더욱 풍성하고 입체적인 공간을 제공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인터뷰 내내 남편은 밖에서 분주했다.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루프탑 공사로 한창 바빴다. 낙엽이 쌓이지 않게 수영장에 텐트를 치고 야외 바비큐 공간을 준비한 것도 남편 솜씨다. ‘사고 치는 아내, 수습하는 남편’이라고 소개하는 부부의 긍정 에너지는 ‘불법건축물’ 매입에서 재미난 ‘슬로우 스테이’를 만들어냈다. 또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된다. 마당에 텐트를 치고 휴식 장비와 야외 조리기구를 갖춰 재미난 공간으로 꾸몄다. 바비큐 텐트 뒤에는 아이들을 위한 야외 수영장도 설치했다. 주택은 공간적인 차별성과 각각 다른 풍경을 갖도록 박공지붕을 정면에 올리고 뒤쪽에 베란다와 루프탑을 복합적으로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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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 시설 만든 세컨드 하우스 포항 슬로우 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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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 끌어들인 풍경 좋은 집 경산 통나무주택
- 건축주 부부는 편안한 노후를 보낼 목적으로 전원주택을 계획했다. 경산 일대를 둘러보고 시원한 조망을 갖춘 대지를 찾아내 풍경과 건강을 담은 통나무주택을 지었다. 글 사진 백홍기 기자취재협조 나무나라 HOUSE NOTEDATA위치 경북 경산시 평산동지역/지구 자연녹지지역건축구조 통나무주택(중목)대지면적 1200.00㎡(363평)건축면적 150.00㎡(45.40평)건폐율 12.50%연면적183.00㎡(55.36평)1층 150.00㎡(45.40평)2층 33.00㎡(10.00평)용적률 15.2%설계기간 2018년 12월~2019년 5월공사기간 2020년 10월~2021년 2월건축비용 4억 원(3.3㎡당 800만 원)토목비용 5천만 원설계 및 시공 ㈜나무나라 1855-1994 www.통나무황토주택.com MATERIAL외부마감지붕 - 평기와벽 - 황토벽돌, 시다베벨 사이딩데크 - 방부목내부마감천장 - 레드파인 루버벽 - 2×8구조목바닥 - 강마루단열재지붕 - R38 인슐레이션외단열 - R28 인슐레이션계단실디딤판 - 레드파인 집성목난간 - 레드파인 대동자, 소동자창호 독일식 시스템창호현관 캡스톤도어주요조명 대우조명주방가구 성신산업위생기구 대림난방기구 경동보일러 밋밋한 데크를 살려주는 점경물. 식당앞을 수놓은 아기자기한 화분들. 경산 시내에서 벗어나 시원하게 10여 분 달리자 주변이 시골의 한적한 풍경으로 변했다. 대지는 넓은 국도와 면하고 있어 수월하게 진입했다. 동서로 뻗은 국도 북쪽에 자리한 대지는 진입로와 채광을 고려해 남향으로 배치했다. 도로 건너 남쪽으로 펼쳐지는 백자산의 수려한 풍경과 접근성이 좋은 중앙고속도로, 주변에 높은 건물이나 혐오시설도 없으니 편안한 생활권을 갖춘 전원주택지로 안성맞춤이다. 입지도 좋지만, 정작 건축주가 이곳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는 북쪽으로 열린 시원한 조망이다. 대지 북쪽과 면한 마을과 자그마치 10m 정도 레벨 차이를 가지고 있어 저수지와 마을이 어우러진 넓고 깊은 원경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건축주는 이곳에 남으로는 채광을 북으로는 사적이면서 멋진 풍경을 담아낼 집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폴리싱 바닥 타일과 편백으로 마감한 현관에 온화한 느낌이 감돈다. 현관 앞 전실에 설치한 목재 엔티크 파티션이 방문객을 아늑하게 반겨준다. 거실은 통나무주택 감성을 담아내면서, 대리석 타일과 멀바우 목재로 아트월을 꾸며 중후하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만들었다. 주방은 블랙 & 화이트 콘셉트로 깔끔한 모던 스타일로 연출했다. 아일랜드 테이블을 중심에 두고 3면에 수납장과 주방가구 등을 설치해 조리 동선을 편리하게 구성했다. 시원하게 끌어들인 풍경이 식당을 더욱 풍성하게 꾸며준다. 안방은 힘차게 뻗은 통나무 부재로 무게감을 주고, 고가구와 소품을 배치해 고풍스러운 공간이 됐다. 주방과 같이 중앙에 아일랜드 수납장을 배치하고 옷장과 행거를 벽면에 설치해 사용하기 편리하게 만들었다. 폴리싱 타일과 황토벽돌, 편백으로 마감한 온돌방은 여름엔 시원한 휴식 공간으로, 겨울엔 뜨끈뜨끈한 찜질방으로 이용한다. 주방 옆에 데크와 연결되는 다용도실을 배치해 주방의 부족한 기능을 더하고 실내외를 연결하는 편리한 동선까지 확보했다. 로망을 이룬 통나무주택건축주의 로망은 통나무주택을 짓고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통나무주택을 짓는 업체가 많지 않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멋진 통나무주택을 짓는 업체를 찾기 위해 모든 건축박람회를 다니고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몇몇 업체를 찾아 세세히 알아보고 최종으로 선택한 곳이 나무나라에요. 땅을 사고 업체를 선정했는데, 중간에 허가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해 2년을 더 기다리다 3년 만에 집을 짓기 시작했어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아파트는 선택의 여지가 지극히 적다. 반면 단독주택은 디자인과 실내 공간 구성은 물론, 마감재와 인테리어 소품, 진입로, 건물 배치, 조망 확보 등을 어떻게 할 것인지 건축주가 직접 결정하고 세세하게 살펴야 한다. 그만큼 설계 단계부터 건축주의 의견이 중요하게 작용한다.건축주는 통나무주택의 멋을 잘 살리면서, 조망 확보와 건강하고 쾌적한 공간을 바랐다. 나무나라는 이러한 요구 조건에 따라 놓지 공법으로 통나무 기둥과 보를 연결해 견고하면서 중량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살렸다. 벽체는 경량 목구조로 단열 벽체를 세운 뒤 외부에 황토벽돌을 쌓아 단열성능을 강화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게 했다. 여기에 황토와 나무 색감과 어울리는 어두운 평기와를 얹어 무게감을 줬다. 다락과 현관을 덮은 지붕은 높이와 방향이 평범해 보일 수 있는 외형에 변화를 줌으로써 지루함을 덜었다. 다만,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해 온돌방 굴뚝을 어쩔 수 없이 데크 중앙에 배치한 점은 다소 아쉬운 부분으로 남았다. 격자창살과 선반으로 제작한 난간 사이로 스며든 빛이 계단을 은은하게 밝혀준다. 2층 위생 공간은 그러데이션 gradation 스타일로 타일을 조합해 독특한 분위기를 냈다. 2층 가족실은 통나무주택의 멋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앉은 눈높이에 가로 창을 설치해 멋진 풍경을 담아낸 2층 창가는 집 안의 명소를 손꼽힌다. 부부를 위한 부부의 공간건축주 부부는 이 주택을 자신들만의 공간으로 완성했다. 규모와 공간도 주로 이곳에서 생활하는 부부에게 맞춰 단출하게 구성했다. 1층에 안방과 거실, 주방, 온돌방을 배치하고 2층에 독서와 풍경을 감상하며 휴식하는 아담한 공간을 마련했다. 용도에 따라 층을 구분한 만큼 1층은 일상생활에 편리한 동선과 넓고 환한 분위기로 꾸미고, 2층은 아늑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연출했다. 건축주가 집 안의 명소로 꼽는 곳은 두 곳이다. 1층의 식당과 2층 창가다. 1층에 있는 식당은 거실과 주방이 교차하는 계단실 옆에 있는데, 단순히 공간만 본다면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북쪽에 낸 넓은 창 뒤로 펼쳐진 풍경과 더해져 집 안의 명소로 손꼽히는 공간이 됐다. 2층 창가 역시 앉은 높이에 가로창을 내고 선반을 설치한 게 전부지만, 시원하게 펼쳐지는 조망 덕에 부부가 자주 찾는 힐링 공간이 됐다. 또, 건축주는 식당의 넓은 창과 주방의 다용도실을 통해 연결되는 후면 데크를 또 다른 제3의 명소라고 소개했다. 실내에선 시각으로만 경험하던 것을 이곳에선 새소리와 시원한 바람까지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서다. 데크 앞에 그네 의자도 만들어 부부만 아니라 이곳을 찾는 자녀와 손주들도 좋아한다고 한다. 막연한 계획은 추진력이 부족하고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계획이 치밀해야 과정과 결과도 좋아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건축주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전문가와 함께 꼼꼼하게 집 짓기를 준비한 덕에 상상 속에 머물던 노후의 전원생활을 기분 좋은 나날로 보낼 수 있게 됐다. 멋진 풍경이 펼쳐진 북쪽에 데크와 야외 테이블을 설치해 가족만의 쉼터로 꾸몄다. 레벨 차가 심한 지형 특성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외부 시선을 차단하면서 멋진 풍경을 끌어들였다. 깔끔하게 잔디를 깔아 시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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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전원&단독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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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 끌어들인 풍경 좋은 집 경산 통나무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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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고택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운 부여 민칠식 가옥
- 노송, 느티나무, 대나무가 울창한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남쪽으로 확 트인 널찍한 터에 남향으로 자리 잡은 부여 민칠식 가옥 扶餘閔七植家屋(중요민속자료 192호)은 전망이 시원하다. 마을 앞으로는 왕포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멀리 바라보이는 금강과 만나고 넓은 벌판이 장관을 이루며 펼쳐져 바라만 봐도 풍요롭게 느껴진다.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마당에서 한 단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랑채. 전면 세 칸으로 두 칸은 온돌방이고 한 칸은 마루다.( 민칠식 가옥이 위치한 중정리는 여흥 민씨와 용인 이 씨 집성촌이라고 한다. 여흥 민씨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민칠식 고조부 때라고 하며 이 집도 그때 용인 이 씨 집안으로부터 사들인 것이다. 사랑채에서 '숭정 87년'(1705년)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돼 이때 집을 지은 것으로 여겨지나 상량문에 쓰여 있는 숭정기원후사을축 崇禎紀元後四乙丑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829년에 거의 새롭게 짓는 정도의 대규모 개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건축문화재/충남>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다. 민칠식 가옥은 현재 한옥생활 체험 관인 <백제관>이란 이름으로 운영 중이다. 사랑채 전경. 사랑채에서 보는 전망이 매우 훌륭한데 주변 건물보다 높아 시야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남녀유별을 구현한 경상도 집 구조 가옥은 앞에 최근 복원한 9칸 행랑채가 있고 중문칸과 사랑채가 한 몸을 이루며 이들이 뒤편 안채와 합쳐 ㅁ자 형태를 이룬다. 몸체는 전면 6칸 측면 7칸 반인데 전면과 후면 몸체 우측 부분이 돌출돼 전체적으로 누워있는 ㅂ자 형태로 이렇게 건물 일부가 돌출된 집을 '날개집'이라 한다. 이런 집은 경상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충청도나 경상도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집을 짓게 된 것은 개축한 민치준의 경력 때문이 아닌가 한다. 민치준은 여러 고을의 원을 지냈는데 경상도 수령을 지낸 경험이 이런 집을 짓게 한 것이다. 개축할 때인 1829년은 조선 성리학이 수구적인 행태를 보인 시기다. 따라서 남녀유별 개념이 더욱 심화됐을 것이므로 민치준도 남녀유별을 확실하게 구현할 수 있는 경상도 집 구조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을 마주하게 된다. 사랑채는 마당에서 한 단 높은 곳에 위치하고 서쪽에는 우물이 있다. 현재는 석축이 설치됐는데 과거에는 자연 경사로 돼 있었다고 한다. 사랑채는 동쪽에 배치됐다. 두 칸이 몸체에서 튀어나온 형식으로 이는 앞서 언급했듯 주로 경상도에서 볼 수 있는 구성이다.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세운 사랑채는 전면 세 칸으로 두 칸은 전퇴를 가진 온돌방이고 마지막 한 칸은 마루다. 일부 부재가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뒷마당에 집을 고치면서 발굴된 석재를 가져다 놓았다. 이와 함께 백제시대 초석도 있다고 한다. 사랑채에서 보는 전망은 매우 훌륭하다. 건물이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전망을 충분히 확보한다. 따라서 멀리 금강까지 바라보이는 조망은 상당한 매력이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보이는 곳 많은 부분이 여흥 민씨의 땅이지 않았을까. 안채 건넌방 옆으로 돌출된 마루 두 칸. 구조도 벽 처리도 지붕도 일반 마루 모습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보인다. 이곳은 집을 개수한 민치준이 죽자 그를 위한 제청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3 4 안방과 마루방. 지금은 객실로 사용한다. 사랑채 서쪽 담으로 안채와 이어지는 문을 달았다. 원형과 다르게 진행된 개보수의 아쉬움사랑채 좌측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간 中門間이 놓였다. 한 칸 꺾여 안채로 들어가는 구조로 이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다.보통 중문간은 밖에만 문이 설치된다. 그런데 안쪽에도 문이 달렸고 문에는 홍살이 설치돼 있다. 이러한 경우는 이곳이 처음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 말로는 원래 그랬다고 하는데 과연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안채는 모를 죽인 민도리집으로 전후퇴를 가진 1고주 오량집이다. 안채에 현재 남아 있는 모습과 예전 평면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예전 안채 여덟 칸이 왼쪽부터 부엌, 안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1칸, 안마루 2칸으로 구성되나 현재는 건넌방을 없애고 5칸 대청으로 개조됐다. 현재 안채 서쪽 날개 부분은 안쪽으로부터 뒷마당과 연결하는 문간 반 칸, 마루방 한 칸, 온돌방 두 칸으로 구성돼 있고 반대편은 방 두 칸, 문 한 칸, 부엌 한 칸(상부 다락), 사랑채와 연결된 책방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좌측에 있는 방에는 안사랑채와 책방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현재 민칠식 가옥은 여러 곳이 많이 고쳐진 상태다. 특히 안방 옆 부엌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개조됐는데 지금은 솥을 걸지 못하는 아궁이뿐이다. 사랑채에 연결된 부엌은 한 칸 규모로 상부가 다락이어서 매우 낮으며 바로 옆 한 칸은 마당으로 나가는 문이 달렸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평면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예전 평면을 보면 안방 옆에 있는 부엌에는 솥을 세 개 걸 수 있는 부뚜막이 있었고 뒷마당 쪽으로 1/4 칸 정도 더 나아가 살강을 드렸다. 사랑채 쪽에는 문이 없었고 문이 설치된 곳까지 포함하여 두 칸이 부엌으로 쓰였으며 안방 쪽 부엌처럼 1/4칸 정도 더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이것이 제대로 된 안채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 집 규모로 보아 지금 개조된 부엌 규모로는 살림살이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가옥은 안채와 복원한 9칸 행랑채와 중문칸, 사랑채가 한 몸을 이루는 ㅁ자 구조다. 전면 6칸 측면 7칸 반으로 전면과 후면 몸체 우측이 돌출돼 전체적으로는 누운 ㅂ자 구조다. 장독대로 수리된 독이 많다. 당시 부잣집에서도 보기 힘든 큰 독이 많은데 보수 과정에서 넣은 듯하다. 사소한 것에도 신경 쓰지 않은 아쉬움이 남는다. 집은 생활, 문화의 결과물… 보전에 신경 써야이 외에도 현재 안사랑채 위치가 민속문화대백과사전과 다르며 담이 많이 변화됐다. 예전 담은 사랑채 누마루부터 바깥으로 나가다 북쪽 산 쪽으로 둘러져 있다. 그리고 문화재청 사진자료를 보면 현재 뒷산과 안채 사이에 설치된 담도 예전에는 없었고 장독대도 현재 위치가 아닌 뒷산과 안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사진 장독대 위치가 실제 생활과 맞는 것이다. 지금 설치된 장독대는 부엌과 너무 떨어져 있어 가사 생활과 유리돼 전혀 기능적이지 못하다. 민칠식 가옥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안채 건넌방 옆으로 돌출된 마루 두 칸이다. 이곳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안마루라고 했는데 구조가 대청 부분과 차이를 보인다. 우선 안채가 1고주 오량구조인 반면에 안마루는 평오량구조다. 일반적으로 대청은 후면이나 측면에 통풍을 위한 창을 설치한다. 그러나 이곳은 모두 심벽으로 처리했다. 또한 지붕도 맞배지붕으로 다른 안채 지붕과 격이 맞지 않는다. 처음부터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최소한 우진각 지붕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안마루 모습은 일반적인 마루 성격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날개를 달아 별도로 구성한 것은 이곳이 제청祭廳으로 사용하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집을 개수한 민치준은 이곳으로 입향한 민칠식 고조부 넷째 아들이다. 민씨 집안 종가는 가옥 옆집이라는데 지금은 사랑채만 남았다. 따라서 처음 집을 개축할 때는 별도 사당을 만들 필요가 없었으나 민치준이 죽고 나서 자손들이 제사를 드릴 공간이 필요하다 보니 제청으로 다시 증축한 것은 아닌가 한다. 사랑채와 대문 사이 공간. 행사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사랑채 좌측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보통 밖에만 놓이는데 이 가옥은 안쪽에도 달렸다. 거기다 홍살까지 설치됐다. 원래 그랬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의문이다. 이 집은 2004년 군청에서 매입하여 개수한 후 한옥생활 체험관인 <백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개수한 모습이 과거와 많이 다르다. 본인도 기본적으로 한옥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 활용하는 것이 집을 보존하는데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재는 활용 이전에 보전이 우선이다. 활용을 한다는 핑계로 원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개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것은 문화를 전승한다는 차원에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한옥 체험관을 운영하는 것은 단순히 숙박만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며 선조의 생활을 체험함으로써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아궁이에 불을 피워보고 가마솥에 밥을 해보며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그 배설물이 거름으로 활용되면서 어떻게 자연에 순환되는가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도 훌륭한 삶의 체험이다. 장독대 독을 보면 수리된 것이 많다. 민칠식 가옥 정도 부잣집에서도 큰 독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지금은 큰 독이 보인다. 문화 체험은 사소한 부분까지 보여주고 느끼게 해야 한다. 집은 당시 생활과 문화의 결과물이다. 그런 것을 어떻게 제대로 보여줄 것인가 고민했다면 집을 이렇게 개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사랑채와 몸체 우측이다. 안채와 이어지는 문을 달았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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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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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고택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운 부여 민칠식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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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풍수 인테리어 - 소문난 명당을 찾아서
- 많은 사람이 살기 좋은 아늑한 집을 소망하면서도 주먹구구식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고 있다. 환경·풍토·습관·생활 양식이 전혀 다른 외국 것을 모방하여 이식하기도 하고, 혹은 일시적 유행을 좇고 있다. 심지어 사람이 집의 주인이 아니라, 물량적으로 획일화·규격화되어 가는 집이라는 구조물의 부속품처럼 타율적으로 집에 눌려서 지내는 비극적이랄까 희극적인 양상마저 생기는 실정이다. 예전에 한 풍류인(風流人)은 "봄을 찾아서 들로 산으로 진종일 헤매다가 허탕을 치고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희한하게도 집 울타리에 핀 매화나무가지 끝에 봄은 이미 무르익었더라"고 했다. 이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자기 집을 소원하면서 이제라도 집터를 물색하는 사람, 집을 지으려는 사람, 집을 사려는 사람, 집을 소개하려는 사람, 집을 수리하거나 혹은 남의 집을 임대하려는 모든 뜻 있는 사람들에게 울타리에 핀 흰 매화꽃처럼 풍수지리가 기대 이상의 기준과 지침이 되고, 실용적으로 유익한 도움이 됐으면 한다. 이처럼 자연 속에서 편안한 삶을 추구하고, 그 속에서 자연을 닮은 집을 짓고 산 우리네 조상들의 지혜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 중에서 명당으로 소문난 유명 고택(古宅) 두 군데를 순례해 보자. 구례 운조루-금환낙지에 자리한 99칸 집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雲鳥樓)'는 조선 중기의 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제8호다. 1776년(영조 52)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가 건립했다고 전한다. 이 집터는 풍수설에 따르면 '금환낙지형(金環落地形)'이라 하여, 예로부터 명당으로 불렸다. 산자락이라 사태의 위험이 있고 고인돌마저 널려 있어 이곳 사람들은 개간을 꺼리던 자리였다. 1776년 이곳에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중 거북처럼 생긴 돌이 나왔다. 길이 25센티미터, 높이 12센티미터, 머리 3.5센티미터의 이 돌은 집을 짓고 1782년 함을 만들어 가보(家寶)로 전해 왔으나 1989년 도둑이 들어 훔쳐갔다. 이 집은 1776년 9월 16일 상량식을 가졌고, 6년 만인 1782년 유이주가 용천(龍川)부사로 있을 때 완공됐다. 운조루의 사랑채는 큰사랑·아래사랑채로 나뉜다. 주인은 큰사랑채에 거처하면서 손님을 맞거나 손님을 재웠다. 큰사랑채 서쪽에는 세 방향이 탁 트인 누마루(운조루)가 있어서 여름 거처로 쓰였다. 안채는 사랑채 사이의 중문을 통해 들어간다. 안주인이 거처하며 자식들과 며느리가 산다. 부엌, 찬칸, 곳간, 대청 들이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남쪽 행랑채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담 대신 18칸이 일직선(줄행랑)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헛간과 창고, 마구간 등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노복들이 살았다. 솟을대문 동쪽으로 작은 문이 있어서 옛날에는 안주인이 출입했다. 유이주는 이곳 집터를 닦을 때 거북처럼 생긴 돌이 나와 금귀몰니(金龜沒泥)가 분명하다고 여겼다. 이 집에서는 금거북이가 부엌자리에 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절대로 부엌바닥을 밖으로 쓸어내지 않으며, 바닥이 울퉁불퉁해도 그대로 두고 몇 년에 걸쳐 한 번씩 흙으로 메워 줄뿐이다. 집을 앉힐 때 부엌자리에 안방을 배치해야 할 구조였다. 하지만 거북자리에 안방을 두어 불을 때면 거북이가 말라죽는다 하여 안방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거북자리를 맨 땅 부엌으로 만들어 늘 습기가 있도록 했다. 운조루 사랑채 전경. 이 집에서는 금거북이가 부엌자리에 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절대로 부엌바닥을 밖으로 쓸어내지 않으며 바닥이 울퉁불퉁해도 그대로 두고 몇 년 걸쳐 한번씩 흙으로 메워 줄뿐이다. 운조루에서 찾아본 풍수 지혜를 살펴보자. 집 뒤의 산에 기대는 집터를 잡는데(배산임수), 산기슭에 바짝 붙여 집을 지었다. 뒤에는 산이 있되 경사가 완만하며 일조와 함께 배수가 양호하고, 또한 산에는 수목이 무성하다. 수목은 물과 흙을 보호·유지하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여 쾌적한 미기후를 조성한다.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집터를 풍수에서는 '진토(晉土)'라 하여 길하게 여긴다. 중국 진나라는 황하지역에 도읍을 정했는데 그곳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번성했으나, 양쯔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초나라는 북쪽이 낮고 남쪽이 높아 미개한 나라로 끝났다. 운조루는 대문에 호랑이뼈(현재는 도둑을 맞아 말머리뼈)를 걸어두어, 잡귀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운조루는 대문 앞으로 계곡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즉, 외당의 섬진강은 서류동출(西流東出)하는데 반해 운조루 앞의 물은 동류서출(東流西出)한다. 물의 흐름이 역행함으로써 지기(地氣)의 응집이 더 강하다. 또한 좌향은 남향으로, 남향집은 햇볕이 많이 들어 집에 양명한 기운을 북돋운다. 한국에서 남향집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바람이 막혀 아늑한 집이 된다. 뒷산은 활처럼 굽었는데, 운조루는 휜 안쪽 중심부에 위치한다. 따라서 작지만 좌우로 청룡과 백호가 감싸안아 장풍이 용이하다. 운조루 대문에는 호랑이뼈(현재는 도둑을 맞아 말머리뼈)를 걸어 두어, 잡귀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풍수에서 잡귀를 막기 위해 엄나무를 대문 위에 걸치거나, 또는 문패를 밤나무로 하면 도둑이 들지 못한다고 한다. 조산이 화산임으로 화기(火氣)를 제압하기 위해 물을 가둬 놓은 풍수적 비보책이다. 대문 밖에는 200평의 네모진 연못을 파놓고, 그 가운데에 섬을 두었다. 이것은 조산인 관악산이 화산이므로 화기(火氣)를 제압하기 위해 물을 가두어 놓은 풍수적 비보책(裨補策)이다.운조루는 내청룡이 짧아 수구가 허하다고 여겼던지 수구 가까이에 조탑(造塔)을 만들어 비보했다. 돌무더기로 수구막이를 한 것은 한국의 오랜 풍습이다. 운조루는 중문 칸에 안채의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을 두었고, 그 북쪽으로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쪽문을 따로 두었다. 또한 집의 규모에 비해 장식적 의장이 적어서 길하다. 풍수에서 집을 화려하게 꾸미면 마치 촛불이 마지막에 더 밝은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곧 쇠락할 징조로 여긴다. 운조루의 대문 앞과 집 안에는 큰 나무가 없어 길하다. 나무는 흙에 함유된 물기를 빨아들여 집 안의 흙이 건조해지고 윤기를 없어지게 만든다. 또 사람이 가사(假死)상태로 잠을 자는 밤 동안 산소를 빨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내 보내 집 안에 산소의 부족을 초래한다. 집 안에 큰 나무가 있으면 '곤궁할 곤(困)'으로 가난해지고, 대문 앞에 큰 나무가 있으면 '막을 한(閑)'이 되어 집 안으로 좋은 기가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 대문과 중문, 중문과 안방의 문이 서로 일직선상에 놓이지 않아서 길하다. 문들을 일직선상에 두면 대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곧장 방으로 들이닥친다. 따라서 기온 차에 의해 방 안의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또 직접 바라보이면 사생활이 침해되어 방 안에서도 불안을 느낀다. 지기는 흙에 따라 흐르고 흙에 머물므로 집을 지을 때에는 흙을 파내고 땅을 평평하게 고르는 것을 꺼린다. 땅의 생긴 경사도에 맞추되, 경사면에는 돌계단이나 대를 높여서 자연스럽게 집을 층차감 있게 사랑채와 안채를 짓는다. 운조루는 자연적 지형을 그대로 살려 건물을 층차감 있게 지었다. 운조루는 내청룡이 짧아 수구가 허하다고 여겼던지 수구 가까이에 조탑(造塔)을 만들어 비보(裨補)했다. 안동 의성 김씨 종택-육부자가 과거에 급제한 명당경북 안동의 천전(川前) 마을에는 자손이 크게 번창하고 6부자가 나란히 과거에 급제했다는 명가(名家)가 있다. 바로 의성 김씨(義城 金氏)의 종가댁(宗家宅)이다. 김진(金璡, 1500∼1580)이 처음으로 집을 지어 살았는데, 터의 기운이 영험하여 아들 다섯 명이 모두 대과나 소과에 급제했고, 자기도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됐다. 그래서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소문이 났다. 이 종가댁은 조선 중기의 주택으로 총 55칸의 단층 기와집이다. 하지만 마당에 서서 보면 배산임수의 부지 축대 위에 자리해 마치 이층집처럼 높아 보인다. 이 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생기(生氣)가 응집된 방이 따로 있어 그곳에서만 아이를 출산한다는 점이다. '태실(胎室)' 혹은 '산방(産房)'이라 부르며, 대소과에 급제한 다섯 아들이 모두 그 방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김진의 11대 후손인 김방렬(金邦烈)이 그 방을 헐어 버리고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만들었다. 영천의 영일(迎日) 정씨네로 시집 간 딸이 첫째와 둘째아들을 이 방에서 낳자, 집의 정기가 쇠약해진다고 여긴 탓이다. 그 딸은 할 수 없이 셋째아들은 다른 방에서 낳았는데, 예상대로 첫째와 둘째는 대과에 급제했으나 셋째아들만큼은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의 주인되는 김시우(金時雨, 김진의 15대 손)도 태실의 발복을 믿고 있다. 맏며느리가 대구의 친정에서 딸을 낳은 뒤로는 후사가 없었다. 그러자 없앴던 태실을 다시 온돌방으로 꾸미고, 해외에 근무하는 아들이 휴가를 얻어 돌아오면 그 방에서 아들 내외를 지내게 했다. 그 결과 손자를 얻어 대를 잇게 됐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주택으로 마당에 서서 보면 배산임수의 부지 축대 위에 자리해 마치 이층집처럼 높아 보인다. 안동 의성 김씨 종택이 입지한 천전 마을은 대현산을 등진 채, 앞에는 강물이 흘러 인접한 농토가 넓은 남향의 땅이다. 풍수적으로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이라 불리며 경주의 양동, 안동의 하회, 봉화의 유곡과 더불어 삼남(三南 ;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4대 길지의 하나로 꼽힌다. 비단은 고귀한 사람이 입는 옷이며, 그것을 밝은 달빛 아래에 깔아 놓았으니 세상에 이름을 날릴 인물이 나온다는 설명이다. 김진은 여기에서 '갓 꼭지가 보이면 이사하라'고 했는데, 그 말은 집을 처음에 지을 때는 행인의 갓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대가 낮았고, 따라서 앞쪽의 강물도 보이진 않았음을 내포한 말이다. 그렇지만 '갓 꼭지가 보인다'라는 말은 사람의 왕래가 많아진다는 뜻이 아니고, 앞쪽의 지대가 자연적 혹은 인위적으로 낮아져 대청에서 강물이 넘겨다 보이는 경우를 경계한 말이다. 강물이 풍수 상으로 보아 흉수(胸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대청 마루에서 강물이 바라다 보이지 않는다. 의성 김씨 종가댁은 구례 운조루와 마찬가지로 가상적인 공통점이 있다. 대문 앞과 집 안에 거목이 없어 길하고, 부지가 방정하고 전저후고(前低後高)의 택지라 길하다. 또 수로나 냇물의 유입이 없으며 집 안에 우물이 없는 것도 길하고, 솟을대문과 중문 그리고 중문과 안방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은 점도 풍수적으로 길하다. 정원수가 적고 가운데뜰에 연못이나 우물이 없으니 가상적으로 흉함을 발견하지 못했다. 의성 김씨 종가댁은 생기 왕성한 용맥에 자리잡고, 천전 마을 중에서 양기 흐름이 가장 양호한 곳에 해당되어 학자와 고관대작이 배출될 터다. 또 사랑방과 안방은 풍수적으로 매우 길한 방위적 배치를 보인다. 이처럼 길한 기운이 많아 복지로 손색이 없다. 대문 앞과 집 안에 거목이 없어 길하고, 부지가 방정하고 전저후고(前低後高)의 택지라 길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산 조상들의 지혜를 낡았다고 치부해 버리지 말고, 잠깐씩 빌려쓰는 여유를 가져보자. 글쓴이 고제희 님은고려대학교 생명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과 생태환경공학부 박사과정을 마치고, 2003년 대통령정책실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에서 풍수지리 자문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매일경제 및 한국경제 TV, SBS, EBS 등의 방송사를 통해 생활 속의 풍수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풍수전문포털사이트 www.21fengshui.com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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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풍수 인테리어 - 소문난 명당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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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영조의 자식 사랑 그윽한 남양주 '궁집'
- 서울-춘천 간 46번 국도를 따라 남양주 시청을 지나 언덕을 넘어서면 우측에 고즈넉하게 앉아 있는 고택을 만날 수 있다. ‘궁집’이라 불리는 고택이다. 궁집은 ‘궁(宮)’ 즉 ‘왕족이 살던 집’이라는 뜻이다. 남양주 궁집(중요민속자료 130호)은 52년간 조선을 이끌었던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和吉翁主)가 구민화(具敏和)와 결혼해 살던 집이다. 옹주가 혼인할 때 영조가 장인(匠人)을 보내지어 준 집이라고 전한다.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영조가 시집간 막내딸 화길옹주에게 지어 준 남양주 궁집. 바깥마당에서 바라보면 사랑채와 안채의 개방성과 폐쇄성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궁집은 개인 소유로 외지에서 이건(移建) 한 대여섯 채의 한옥과 전통 민속품으로 가득하다. 궁집에서는 대군(大君 : 임금의 적자), 군(君 : 왕의 종친·외척 및 공신에게 내린 작위), 공주(公主 : 정실 왕비가 낳은 딸), 옹주(翁主 : 후궁이 낳은 딸) 같은 왕족만이 살 수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세자를 제외한 다른 자녀들이 혼례를 치르면 궁 밖으로 나와 생활하도록 했는데, 그들이 살던 살림집을 바로 ‘궁집’이라고 불렀다.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그에 따라 집의 규모를 제한했다. 이것을 ‘가사규제(家舍規制)’라고 한다. 《경국대전》에는 “대군과 공주는 30부(약 1200평)의 땅을 하사받았고, 군과 옹주는 25부(약 980평)의 땅을 하사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창고가 즐비했을 법한 뒷마당에서 바라본 안채와 사랑채. 잘 다듬은 돌로 만든 기단과 계단이며 장인(匠人)이 한껏 기교를 부린 기둥들이 예사롭지 않다. 안방 앞 툇마루. 세월의 흔적(?),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은 퇴락하기 마련이다. 안방 대청에서 바라본 맞은편 광과 방. 그 사이에 조심스럽게 안채와 사랑채를 잇는 문이 있다. 4 처마보다 높이 봅은 안채 굴뚝. 검박함이 묻어나는 왕족의 집집의 규모로 살펴보면, 대군이 60칸, 군과 공주는 50칸, 옹주가 40칸을 짓도록 규정했다. 이 외에도 관아와 사찰을 제외한 일반 집 역시 규모나 장식에 있어서 제한을 두었다. 일반 여염집에서는 화공(꽃무늬를 새긴 두공)과 다듬은 돌을 사용하지 못했고, 단청을 올리지 못하게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집을 꾸미는 장식에 대한 규제는 왕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규제는 그리 잘 지켜지지 않았다. 단청을 올리지 못하게 한 것은 대부분 잘 지켜졌지만, 화공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자주 보인다. 지금까지 두공을 설치한 집이 남아 있는 것만 보아도 이 같은 규제가 잘 지켜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분사회에서 집을 짓고 꾸미는데 가해졌던 제한 중 가장 지켜지지 않은 것은 ‘다듬은 돌의 사용’이다. 이날 찾은 ‘궁집’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목격됐다. 집의 규모와 형식을 보면 ‘왕족의 집’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특별히 사치한 집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 다른 명문가의 집과 견주더라도 현재 남아 있는 안채와 사랑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또한 다듬어진 돌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화길옹주가 살던 집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검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채의 대청도 4칸 규모로 다른 집보다 크다고 할 수 없다. 대신 재료를 다듬는 솜씨만큼은 뛰어나다. 가사 규제를 했던 당시에도 다듬은 돌로 기단을 쌓고 디딤돌을 놓았다. 내외법에 따른 답답한 ‘ㅁ’자 구조의 안채안채는 완전한 폐쇄형인 ‘ㅁ’자 구조이다. 16세기 이후 ‘주자학’이 공고화되면서 양반가에서는 내외법을 더욱 강화했다. 그에 따라 안채의 구조도 더욱 폐쇄적인 구조로 변모했다. 그 시대를 반영하는 정신이 집의 구조에 명확히 반영된 것이다. 폐쇄적인 구조 때문에 안채에 발을 디디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진다. 대신 안방은 전면에 위치해 햇빛이 잘 들도록 설계됐다. 이렇게 안방을 전면에 위치시킨 예가 없지는 않지만, 안방의 모든 면을 드러내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이 때문에 중문을 지나 안채에 들어서면 개방된 부분을 찾아볼 수 없어 매우 답답하게 느껴진다. 안채의 마루에 서서 보더라도 마당의 규모가 작아 멀리 산조차 보이지 않고 지붕 너머 하늘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다. 안방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른 집에 비해 매우 넓게 계획된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안방의 규모는 한 칸의 배수로 구성되는데, 이곳 궁집은 안방의 폭이 한 칸 반으로 잡혀 있다. 보통 집의 안방에 비해 1.5배나 크다. 그래서 안방에 들어서면 매우 넓게 느껴진다. 또한 남면을 바라보도록 간살도 넓게 잡았다. 시집온 화길옹주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부분이다. 넓고 밝은 궁에서 살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살려 주고 싶은 배려는 아니었을지……. 하지만 화길옹주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열아홉에 세상을 떠났다. 12세에 시집와서 약 7년(1765∼1772) 간 이곳 궁집에서 생활하다 별세한 것이다. 참 일찍도 돌아가셨다. 왜 이리도 일찍 세상을 하직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조선시대 조혼 풍습과 연관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조선시대에는 일찍 결혼하는 풍습이 있었다. 만일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면,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그리 넓지 않은 안채에서 답답한 생활을 하다 보니 몸이 쇠약해져서 쉽게 병을 얻지 않았나 싶다. 안채를 돌아보면서 이러한 생각은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삶을 살아가는 토대가 되는 집이 미치는 영향이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궁집에서 마주 보이는 언덕에 ‘옹주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집이 바라보이는 곳에 옹주의 묘를 쓴 것은, 왕족인 화길옹주를 가문에서도 잘 모시려고 마음을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길옹주의 묘는 문중에 의해 용인으로 이장됐다고 한다. 지붕 선을 통해‘ㅁ’자 형태의 안채와‘ㄱ’자 형태의 사랑채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사랑채로 들어서는 일각문. 사랑채는 방과 대청, 누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방 뒤쪽에 숨겨진 내외 통로‘ㅁ’형태의 안채 남서쪽에는 ‘ㄱ’자 형태의 사랑채가 붙어 있다. 사랑채도 안채와 마찬가지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이 사랑채는 전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구성돼 있다. 누마루는 서쪽에 돌출되어 있고, 누마루 바닥은 사랑 대청보다 두 자 정도 높아 주변 경관을 살펴보기에 용이하다. 이 사랑채는 안채와 붙은 쪽에 두 칸짜리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 서쪽 네 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두 칸은 방으로 구획되어 있기에 실제 대청은 두 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서쪽 마루방은 여름에 생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의 연결은 사랑방 뒤쪽 안채와 맞닿아 있는 마루를 통해 이루어진다. 바깥주인이 안채로 은밀히 다니고, 손님이 왔을 때 기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안채 앞쪽의 마당에는 원래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또한 사랑채 뒤쪽에는 광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터에 있는 건물은 서울에서 옮겨와 과거에 건물이 있던 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궁집에서는 한옥의 다양한 형태와 정원을 만날 수 있다. 퇴락하는 고택,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현재 궁집은 개인 소유로 되어 있다. 이곳에는 궁집 말고도 대여섯 채의 한옥이 있다. 이것들은 한옥에 관심이 많은 집주인이 다른 곳에서 이건(移建) 했다. 즉 전국에 산재한 한옥을 구입해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작은 민속촌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지금은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고즈넉한 분위기가 많이 훼손됐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옛 마을에 들어선 것과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집주인의 한옥 사랑이 남다르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집을 모아만 놓았지 전혀 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궁집과 한옥들은 필자가 이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보다 더 퇴락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로 조금 더 방치한다면 곧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이내 퇴락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관리하고는 있지만, 관리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선 것 같았다. 따라서 궁집과 이를 둘러싼 한옥들이 퇴락해 사라지기 전에 개인이 아닌 여러 사람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볼 시점이 된 것 같다. 난방 형태 및 연료의 발달, 그리고 한옥 부엌의 개량화로 이제는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는 광경은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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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영조의 자식 사랑 그윽한 남양주 '궁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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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명문 사대부가의 진수, 동춘고택 동춘당
- 동춘 고택(同春古宅)은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선생의 집이다. 그는 우암 송시열과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으로 둘은 친척간이다. 문묘에 배향된 분으로서 조선을 대표하는 대유학자다. 같은 집안에서 문묘에 배향된 경우는 광산 김씨인 김장생, 김집 부자와 은진 송 씨 집안인 송시열, 송준길뿐이다. 이렇듯 조선의 명문가인 동춘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본채와 그 앞에 세워진 동춘당(同春堂)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춘 고택 앞의 동춘당은 별당으로 송준길이 낙향해 지은 것이다.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송시열과 국사를 논의했다. 현판의 동춘당이라는 글씨는 송시열의 친필로 유명하며 동춘 고택은 대전지방유형문화재 제3호로, 동춘당은 보물 209호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대전 대덕구 회덕은 송 씨 집안의 집성촌과 같은 곳이다. 바로 옆에는 송준길 선생의 둘째 손자인 송병하가 분가해 지은 송용억 가옥(대전 민속자료 2호)이,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송유가 지은 쌍청당(대전 유형문화재 2호)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송규렴이 지은 옥오재(대전 유형문화재 9호)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송시열의 남간정사가 있다. 또한 같은 송 씨 집안은 아니지만 송준길과 학문이나 정치의 길을 같이 했던 김경여가 지은 별당인 송애당(대전 유형문화재 8호)이 있다. 한마디로 고택의 보고다. 이 일대는 예전에 응봉산을 배경으로 몇 채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모여 고즈넉한 마을을 형성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오래전 이곳을 찾은 분의 말씀으로는 옛날 동춘 고택으로 가던 길은 완전한 시골길이어서 내를 건넛마을로 들어갔다고 했다. 이제는 그 내도 없어지고, 고택 주변은 인위로 조성한 공원과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신도시로 변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단어를 실감하게 했다. 고택이라고 하여 예전의 한적한 풍광을 생각하고 찾아간다면 꽤 실망할 것이다. 동춘 고택으로 들어서는 고샅.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一’자 모양의 사랑채와 ‘ㄷ’자 모양의 안채가, 그 오른쪽에는 두 채의 가묘가 배치되어 있다. 가묘 앞에는 조선시대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이 관직을 물러난 후 거처하던 동춘당이 있다. 위 작은 사진은 우암 송시열의 친필로 유명한 현판. 동춘당 궁판에서 입식 생활을…동춘당은 다른 집보다 매우 높게 지어졌다. 신영훈 선생은 동춘당은 백제식 가옥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이라고 한다. 백제의 주거는 고상식이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낮아져 지금과 같은 높이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동춘당은 매우 단순한 구조로 두 칸의 온돌방과 네 칸의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마루의 측면 칸 사이가 넓기에 같은 네 칸이라도 더 넓다. 이것은 많은 손님을 고려했음인데, 당대의 석학으로 정권을 좌지우지하던 서인의 거두였으니 손님도 매우 많았을 법하다. 동춘당은 작지만 정성을 들여 지은 집이다. 보아 지나 내부의 대공에도 초각을 화려하게 했다. 선자로 잘 짜여 있으며 대들보도 넉넉한 부재를 곧게 다듬어 썼다. 작지만 잘 다듬어진 집이다. 동춘당의 마루문을 보면 창문의 하부에 설치한 궁판이 매우 높다. 동측의 궁판은 더 높다. 이러한 궁판의 높이는 앉아서 생활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답답하다. 그 높이로만 본다면 집을 지은 초기에는 좌식생활보다는 입식 생활은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동춘당의 담은 낮다. 사람이 서면 밖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높이다. 쪽마루에 걸터앉아도 밖의 경치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조선 효종 때의 사람인 이유태는 이상적인 집을 말하면서 “담의 높이는 방이나 툇마루에 앉아 말의 등이 보이고 목노의 행동거지를 살필 수 있을 만하면 된다”고 했다. 동춘당의 담도 이러한 사정과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도록 한 배려라고 본다. 그러나 동춘당에서 앞을 바라다보면 허전하기만 하다. 마당에도 별다른 조경을 하지 않아 황량하기까지 하다. 더욱이 길 건너 세워진 고층 빌딩들 때문에 무엇을 보려고 이렇게 집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깊게 든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당시에는 이러한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앞으로 펼쳐진 논밭과 부드럽게 넘실대는 나지막한 언덕들이 눈을 즐겁게 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러한 경관을 볼 수 없으니 이렇게 황량할 수밖에 없다. 근처에 있는 남간정사의 소개 때에도 언급했지만, 이곳 동춘당에서도 무엇을 생각하고 지었는지 찾아볼 길이 없다. 집의 보존이란 단순히 집을 남겨 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집은 위치한 곳의 풍광과 집에서 바라본 풍광이 같이 살아 있을 때 가치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남간정사나 동춘당의 보존은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이곳을 찾을 분들은 현재를 보지만 말고 적극적으로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정신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기 바란다. 그렇게 해야만 동춘당의 가치를 알게 된다. 동춘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다. 총 6칸 중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삼면에는 열개문을 달아 문만 떼면 별당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대들보 위에 세워서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인 대공의 초각이 화려하다. 박공을 비롯하여 부챗살 모양의 선자 서까래, 우물반자 등 천장의 형태가 다양하다. 동춘 고택에서 소박한 영조법식을…동춘 고택은 앞에 사랑채를 배치하고 뒤의 안채를 ‘ㄷ’자 형태로 배치한 튼 ‘ㅁ’자 형태의 집이다. 안채는 사랑채 끝의 중문을 통해 들어간다. 중문을 열면 바로 안채 부엌의 벽면과 맞닥뜨려 자연스럽게 내외를 구분했다. 그러나 사랑채가 별도로 떨어져 있지 않아, 사랑 대청에서 안채를 들여다보는 구조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안채 마당에 내외 담을 별도로 설치했다. 그러나 내에 담이 그리 높지 않다. 높이는 사랑채에 앉으면 안채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아마도 서 있는 사람의 시야까지 가렸다면 안채는 매우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한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심리적으로만 내외를 하도록 하고, 또한 안채에서 사랑채의 동향을 파악해 손님 수발을 들도록 배려한 것이다. 안채는 부잣집의 대명사인 6간 대청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배치했다. 이 집이 여타 집과 다른 점은 안방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안방의 규모가 뒤쪽에 마루로 만들어진 고방까지 고려한다면 6칸이다. 안방만 4칸 규모다. 이러한 규모의 안방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은진 송 씨 집안에서 안방마님의 권위를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동춘 고택은 당대 송준길의 지위로 보아 그리 크지 않다. 세도했다는 집이 이보다는 훨씬 컸던 것에 비하면 소박하게 느껴진다. 신영훈 선생의 견해로는 영조법식에 맞추어 잘 지은 집이라고 한다. 또한 법에 따라 규모를 맞게 지어 집이 크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집을 지었던 송준길의 인품을 느끼게 한다. 동춘당에서 바라본 가묘. 앞면 6칸, 옆면 6칸인 사랑채. 부엌 위는 다락으로 꾸몄고, 앞에는 1칸 살림집을 달아 집 안의 여러 가지 일을 맡아보던 청지기가 사는 방을 두었다. 곳곳에 스며 있는 명문가의 정취동춘 고택에는 가묘가 두 채다. 하나는 송 씨 집안의 가묘이고 또 하나는 송준길의 가묘다. 가묘가 둘인 이유는 송준길 선생이 불천위(不遷位)이기 때문이다. 불천위란 사대봉사 이후에도 폐위되지 않고 계속 제사를 모시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불천위로 모시는 분이 있을 경우 가묘는 두 채가 된다. 이러한 집이 여기 말고도 몇 곳 있다. 불천위는 나라에서 지정하거나 문중의 결정에 의해 모시거나 두 가지인데 이곳의 경우는 송준길이 문묘에 배향됐기 때문에 아마도 국가에서 불천위로 모시도록 했을 것이다. 동춘 고택의 정취는 고샅에서 느낄 수 있다. 고샅이란 큰길에서 대문으로 들어가는 깊은 골목을 말한다. 고샅에는 잔자갈을 깔아 두어 사람의 왕래를 느끼게 한다. 이는 사람의 인기척을 느껴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고샅은 이러한 주인의 입장뿐만 아니라 손님의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손님으로서의 옷매무새를 다시 할 수 있는 준비공간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집에 대한 품위를 높여준다는 점이다. 집으로 은근하게 끌어들이는 공간 분위기는 찾는 이로 하여금 차분하게 만들어 주며 집에 대한 기대를 은연중에 높여 준다. 동춘 고택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문화재로 지정됐는데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송시열의 학문을 깊이 흠모했기에 그와 관련된 자료들은 일찍 발굴해 문화재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적으로 과거만큼 주목을 받지 못한다. 아마도 주변이 너무 변화돼 옛 맛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풍광을 머릿속에 상상하며 찾아본다면 다른 어떤 고택 못지않은 깊은 맛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동춘당과 동춘 고택이다. 현재를 넘어선 과거를 찾아보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도 꼭 한 번은 찾아보아야 할 집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쌓은 내외담. 안채 옆에는 사당인 가묘와 별묘가 배치되어 있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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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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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명문 사대부가의 진수, 동춘고택 동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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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원림(園林)의 백미 우암 송시열 선생의 남간정사
- 남간정사(南澗精舍 : 대전시 유형문화재 4호)는 우암 송시열(1607-1689년) 선생이 말년(숙종 9년 : 1683년)에 학문을 닦고 연구할 목적으로 세운 별당이다. 정사는 원래 불자의 수행지를 뜻했는데,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이 공부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는 곳으로 바뀌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동국 18 현-조선시대에 유학의 대가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된 18분-의 한 분으로 조선 주자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노론의 영수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689년 기사환국-숙종 15년(1689)에 소의 장 씨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로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때 세자 책봉 문제로 제주도로 유배를 간 후, 그해 유월 다시 서울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남간정사는 원래 송시열 선생의 개인 정사로 지어졌지만, 후대에 그를 배향하기 위해 남간정사를 세우면서 일종의 서원 성격을 띠었다. 생활하고자 지은 한옥도 아닌 남간정사를 소개하는 까닭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원림(園林)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변이 우암사적공원으로 조성되고 집이 많이 들어섰기에 한적한 원림의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도청 소재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한적하고 수려한 공간을 자랑했다. 주변 환경이 제대로 보전됐더라면, 담양의 소쇄원 못지않은 원림으로 각광받을 만한 곳이다. 남간정사는 연못을 조원(造園)의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러한 곳은 많이 있지만, 남간정사만큼 여러 요소가 어우러진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과 돌과 그리고 폭포와 수목까지 잘 어우러진 곳은 찾기 힘들다. 원림 전체가 잘 어우러진 곳이 소쇄원이라면, 연못이라는 주제로 잘 어우러진 곳이 남간정사이다. 연못으로는 두 줄기의 물이 들어온다. 하나는 계곡에서 물길의 일부를 틀어 끌어들이고, 하나는 남간정사 뒤에 있는 샘물에서 누마루 하부를 통해 들어온다. 이렇듯 집이 물을 가로질러 세워진 남간정사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원래 수맥이 있는 곳에는 집을 짓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곳에서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 이유는 기골이 장대한 송시열 선생이 수맥을 이길 만한 힘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이러한 발상이 가능했다고 한다. 어쨌든 상식을 벗어난 배치로 집을 보는 흥취를 돋운다. 남간정사는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계곡에 있는 샘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건물의 대청 밑을 지나서 연못으로 흘러가게 했는데, 이는 한국 정원 조경사에 새로운 조경 방법이다. 남간정사 2칸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면 기국정 옆에 있는 바위들과 폭포 그리고 방장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3 계곡 밑과 측면에서 두 줄기의 물이 연못으로 흘러든다. 집은 주인의 입장에서 감상해야남간정사에서 바라보는 집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전면 4칸, 측면 2칸의 가운데 2칸은 대청인 집의 수준은 높지 않다. 남간정사의 가치는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나 집의 수준에 있지 않다. 남간정사의 풍광을 제대로 즐기려면 집 안에서 바라다보아야 한다. 이러한 개념이 잘 살아 있는 건물의 대표적인 예가 안동의 병산서원이다. 그곳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관은 자연을 정원으로 삼는 호연지기를 깊이 느끼게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주인의 입장에서 집을 짓는다. 집에서 바라보는 모든 경관은 주인이 즐기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집은 주인의 관점에서 집을 짓기에,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개념에서 설계되는 서양의 집과는 다르다. 정원도 마찬가지다. 주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계획의 중요한 요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한옥이나 정원을 찾아갈 때는, 먼저 주인의 입장에서 돌아보아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풍수지리상으로 집터를 잡을 때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좌향이다. 집이 앉혀져서 어떠한 안대를 바라볼 것인가를 찾는 것이다. 곧 집주인이 바라보아야 할 방향을 정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집에 사는 주인이 좋은 기(氣)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경관도 마찬가지다. 좋은 경관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집을 짓고, 주인의 위치에서 가장 좋은 경관을 보도록 만드는 것이 조경의 원칙이다. 그러한 원칙은 이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청에서 바라보면 기국정(杞菊亭) 옆에 있는 바위들과 폭포 그리고 방장산(方丈山)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경의 핵심 요소들을 한곳에서 모두 살피도록 계획한 것이다. 남간정사 대청에 앉아서 바라보는 경관은 편안하면서도 잔잔한 흥취를 돋운다. 대청에 앉아 좋은 술을 한 잔 걸치고 나면 절로 시 한 수를 읊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못과 연못 안에 있는 방장산, 그곳에 심어진 오래된 버드나무와 기암괴석 그리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자그마한 폭포의 낙수 소리… 이러한 모든 정원의 요소들이 어울려 남간정사를 만들고 있다. 남간정사 좌측에는 누마루가 놓여 있다. 더 높은 곳에서 경관을 감상하라는 배려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기국정과 새로 지은 집들에 가려 제맛을 느낄 수 없게 됐다. 기국정은 예전 소재동 고택 옆에 방죽을 쌓고 세웠던 별당이다. 일제강점기 때 도시계획으로 헐리게 되자, 이곳에다 옮겨 온 것이다. 송 씨 집안에서는 이 건물을 옮길 것을 주장하고 있다. 누마루에서 보는 경관을 가로막고 있는 기국정이 사라지면 원래의 맛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른편 뒤 1칸 방에서 바라본 누마루. 왼편에는 앞뒤 통칸의 온돌방을 들였다 오른 편에는 1칸 방과 마루보다 높은 누를 만들어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했다. 개발과 고택 보존의 의미는…남간정사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벚꽃이 피는 봄이라고 한다. 하얀 벚꽃과 꽃그늘이 진 연못 그리고 신록이 가득한 나무들이 어우러지는 남간정사의 풍광은 마치 선경에 온 듯할 것이다. 초여름에 찾은 남간정사도 아름다웠다. 푸르름이 깊어진 나무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한 남간정사의 모습은 수줍은 처녀를 보는 듯했다. 이처럼 남간정사는 사시사철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남간정사를 찾을 때마다 역사의 보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현재의 남간정사 주변을 우암공원이라고 만들어 놓았지만, 사실 오히려 더 어수선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지금 남간정사 담 밖에 인공으로 조성한 하천도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흘렀던 하천이고, 연못 바로 앞쪽에는 폭포가 있었다고 한다. 송 씨 집안에서는 현재 외삼문 앞에 복개한 부분을 제거해 달라고 요청 중이라고 한다. 현재 남간정사를 둘러싸고 있는 담도 원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담도 최근 다시 높게 쌓아서 남간정사에서 내다보는 시야를 가리고 있다. 또한 주변 개발로 높은 집들이 들어서 남간정사의 경관을 막고 있다. 이러한 집들이 없다면 앞은 시원하게 트여 멀리 계룡산까지 바라보여 마음까지도 맑게 했을 것이다. 최근 무분별한 개발이 남간정사를 만든 송시열 선생이 의도했던 경관들을 다 가리고 있다. 주변 경관이 자연스럽게 살아 있던 옛 모습을 떠올리면서 보전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곳이 바로 남간정사이다. 산자락을 타고 남간사(南澗祠), 남간정사, 기국정, 솟을 삼문의 지붕 선이 이어져 흐른다. 가운데 문이 높고 양쪽의 문이 낮은 ‘솟을 삼문’. 가운데 문을 정문, 양쪽 문을 동협문· 서협문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 초, 소제동에서 옮겨온 기국정. 물과 돌과 그리고 폭포와 수목까지 잘 어우러진 남간정사.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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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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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원림(園林)의 백미 우암 송시열 선생의 남간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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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서 배우는 풍수 지혜
- 한옥은 주변의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맞추어 사람들이 가장 안전하게 살도록 지은 건축 형태이다. 현대 주택과 비교하면, 자재나 구조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오랜 시간 지내온 조상들의 경험과 지혜가 가득한 곳이다. 생활 양식에 맞게 공간별로 다른 특징들을 갖고 있는 한옥의 장점들을 현대 주택에도 응용해 보자. 자연을 소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면서 자연을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옥은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사람이 가장 안전하게 살도록 지었다. 사상적 배경에는 배산임수, 풍수사상, 도교 같은 사회 통념적 개념뿐만 아니라, 신분에 따라 규모와 건축물 그리고 정원의 구조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즉 한옥에는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려는 의식이 반영되고, 나아가 자연에 동화 내지 순응하려는 의도까지 보인다. 유교의 근본은 효인데, 조상 숭배의 가치인 효를 충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그 결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집 안에 두어 집을 지을 때에는 사당이 들어설 터를 가장 먼저 잡았다. 사당은 보통 집 안의 동북쪽에 자리 잡는데, 집 안의 건물보다 높은 곳에 짓거나 건물 자체를 높게 짓되, 사랑채나 안채보다 치장을 더 많이 했다. 유교에 의해 주택 내에 남녀의 공간은 방뿐만 아니라 건물 채와 마당의 단위로까지 구분되었고, 그 사이에도 내외담과 벽을 친 뒤 작은 문을 통해 상호 출입을 통제하였다. 또 어른과 아랫사람이 쓰는 공간의 크기와 위치를 달리해서 장유(長幼)를 표현했는데, 사랑채도 큰 사랑방을 쓰는 아버지를 작은 사랑방을 쓰는 아들이 모시고 생활하도록 배려하였다. 그 외에도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과의 조화에 바탕을 두고 최소한의 토지를 이용해 환경을 조성한 점, 자연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차경(借景)의 방식을 택한 것 등이다. 한옥 건축의 근간인 '풍수' 속에는 어떤 한 것에도 우연은 없고, 터를 잡을 때도, 창문을 낼 때도 자연과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였다.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농축된 한옥한옥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온돌과 마루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한옥은 북방 문화의 구들을 드린 온돌방과 남방 문화의 마루를 깐 대청이 한 건물 내에 함께 있는 살림집으로, 북방과 남방 문화의 연합이란 점에서 문화사적 의의가 크다. 한옥은 기단인 댓돌을 여러 겹으로 쌓아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니 자연스럽게 땅에서 높이 떨어진다. 이것은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줄여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방책이다. 하지(夏至)에 태양은 70도 각도로 높이 뜨고, 동지(冬至)에는 35도 정도로 낮게 비춘다. 이때 깊은 처마는 여름날의 뜨거운 뙤약볕을 가리는 차양막 역할을 하고, 마당에서 반사된 빛은 건물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간접 조명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한옥은 신체적 특성을 고려한 맞춤 설계를 했다. 한옥에서 마당의 지표면과 머름대 상단의 높이는 대략 옛사람의 평균 키인 150센티미터 정도이다. 천장의 높이는 앉아서 생활하는 방과 서서 움직이는 대청의 천장 높이를 달리했고, 천장의 빈 공간은 수납공간으로 삼아 실용성을 추구했다. 현대의 아파트는 방, 거실, 주방의 천장 높이가 모두 똑같이 건축된다. 한옥의 난방 구조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환경 보호가 훌륭한 구조이다. 한옥의 아랫목은 뜨끈뜨끈해 윗사람이 앉고, 상대적으로 차가운 윗목은 아랫사람이 앉는 공간이다. 자연스럽게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위계질서가 형성된다. 또 한옥의 아궁이는 훌륭한 소각장으로 생활 쓰레기를 자체적으로 처리하고, 연기는 방고래에 설치된 개자리에 그을음이 떨어져 쌓이고 맑은 연기만 굴뚝을 통해 배출된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축적된 한옥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천연 건축자재를 사용해 공해가 없다는 점이다. 한옥을 짓는 건축 자재는 나무와 흙이 주된 재료이다. 수명이 다한 집을 헐어낼 때도 이들 폐자재는 흙이나 땔나무로 재활용되니 환경 공해가 없다. 하지만 현대 건축의 시멘트는 몸에 해로운 독성을 가지고 있다. 그 부작용으로 '새집증후군'까지 등장했다. 둘째, 천연 건축자재를 사용함으로써 화재 시 독가스의 배출이 적다. 한옥은 화재에 취약하나 현대 건축도 화재에 취약하긴 마찬가지이다. 화재 시에 현대 건축은 화학 섬유가 불타며 독가스를 내뿜어 사람을 질식시키지만, 한옥은 독가스를 배출하지 않아 인명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다. 셋째, 한옥은 목재를 짜 맞추어 지은 집으로 내진력(耐震力)이 뛰어나다는 점 등이다. 한옥은 기단인 댓돌을 여러 겹으로 쌓아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니 자연스럽게 땅에서 높이 떨어진다. 이것은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줄여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방책이다. 소유하지 않고 바라보는 자연한옥에서 살펴볼 점은 건축뿐만 아니라 정원에도 있다. 한국 전통 조경은 공간 구성이 수평보다는 수직적 구분이 강하다는 면에서 일본이나 중국과 차이를 보인다. 이 특징은 궁궐의 후원과 별정에서 나타나는데, 후원 양식은 한국의 전통 정원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후원에는 화계(花階)를 설치해 좁은 공간에서 공간의 수직적 변화를 느끼도록 배려하고, 수목과 석물을 이용하여 수직 공간을 장식했다. 한옥 조경의 원리는 차경인데, 가장 적게 인공을 가하고도 가장 쉽게 경치를 즐기는 방법이다. 이것은 경관을 빌려 쓰는 것이니 집 밖에 있는 경관을 직접 찾아가 즐기거나 집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집 안에서 조망으로 즐기는 것이다. 이러한 차경 수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정원 자체를 자연 경관 속에 끼워 넣는 식으로 정원 주위의 자연 경관을 정원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전통 정원의 담 높이를 낮게 하여 정원 내의 정자나 건물에서 주위 경관을 충분히 감상하도록 배치한 방법이다. 또한 한옥은 산천의 기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 땅의 경사도에 맞추되, 경사면에는 돌계단이나 대(臺)를 높여서 자연스럽게 층차감 있는 집을 지었다. 그 결과 마당에서 머름대까지의 높이가 보통 150센티미터 이상 된다. 따라서 방이나 마루에서 보면 담으로 인해 집 가까운 전경은 가려져 버리고, 집 멀리에 떨어진 자연 경관만 조용히 조망할 수 있다. 또 누마루는 한옥에 붙어 있는 누정의 공간이라 난간을 걸치고 내려다보는 관경의 운치가 매우 좋다. 사랑채 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대개 중문채에 설치하는데 크기는 대문보다 작으며, 내외 벽을 쌓아 입구와 출구를 엇갈려 배치한다.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는 공간앞에서 살펴본 한옥 풍수의 특징을 거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배산임수의 집터는 자연친화적인 삶의 공간을 연출한다. 한옥은 뒤로 산에 기대어 집터를 잡고[背山], 산기슭에 바짝 붙여 집을 지었다. 집터의 뒤가 높고 앞이 낮으면 일조량이 풍부해 겨울이 따뜻하고, 뒷산의 무성한 나무는 물과 흙을 보호·유지하며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쾌적한 미기후를 조성한다. 집 앞에 넓은 들과 개천이 있으면[臨水], 문전옥답을 경작하기 유리하고 여름에는 남동풍이 불어와 시원하다. 다음은 천장의 높이를 달리해 기의 흐름을 원활히 한 점이다. 방의 크기는 기가 고루 순환할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로 설정하고, 천장의 높낮이를 달리해 가면서 앉거나 서서 움직일 때 기가 위축되지 않게 배려하였다. 또 천장 높낮이에 따른 낙차를 이용해 수장 공간을 만들고 요긴한 장소에 벽장과 다락을 두어 물건을 보관하는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후원을 두어 주산에서 집으로 뻗어온 지맥을 보호한다. 한옥은 뒤쪽의 산에 기대어 터를 잡는데[背山], 산기슭에 바짝 붙여서 집을 짓는다. 후원은 뒷산에서 집으로 뻗어온 지맥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그 지기를 받아 훌륭한 인물이 태어날 것을 기대하는 풍수적 목적이 담겨있다. 따라서 후원에 대를 설치한 화계에는 수목과 석물을 이용해 수직 공간을 장식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설계된다. 중문은 내외벽을 쌓아 입구와 출구를 엇갈리게 배치한다. 사랑채 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대개 중문채에 설치하는데 크기는 대문보다 작으며, 내외 벽을 쌓아 입구와 출구를 엇갈려 배치한다. 이것은 사랑 마당의 바람이 안채로 직접 쏘아 들어오는 것을 막고, 또 외부인이 안채를 쉽게 들여다보는 것이 차단되어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 한옥은 뒤쪽의 산에 기대어 터를 잡는데, 산기슭에 바짝 붙여서 집을 짓는다. 정원의 나무는 상징성을 살려 한옥 정원에 나무를 식재할 때는 수종뿐만 아니라 식재할 장소까지 제한을 두었다. 식물의 선정에는 풍수와 민속 그리고 유교 규범에 의거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렸다. 이러한 점에서 매우 의도적으로 식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나무가 가진 상징성을 매우 중요하게 나무와 관련된 많은 주의 사항이 내려오고 있다. ·대추나무가 집의 서쪽에 있으면 소가 살찐다. ·수양버들을 동쪽에 심으면 소와 말에 이롭다. ·느릅나무는 미방(未方 : 정남(正南)에서 서쪽으로 30도의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 안의 방향)이나 집 뒤가 좋은데, 귀신이 감히 넘지 못한다. ·복숭아는 우물가를 피한다. ·자두나무는 동쪽이 좋으나 남서쪽은 꺼린다. ·살구나무는 북쪽이 좋고 진방(辰方 : 정동(正東)에서 남으로 30도의 방위를 중심으로 한 15도 각도 안의 방향)을 꺼린다. ·오동나무는 뜰 앞은 꺼린다. ·느티나무는 중문에 세 그루를 심으면 대대로 부귀를 누리고, 신방(申方 : 서남서 방향)에 심으면 도적을 피한다. ·능금나무는 진방(辰方)이 마땅하고 집 안에는 꺼린다. ·매화나무는 남쪽이 좋다. ·무궁화 나무는 집 안에 심지 않는다. ·석류나무를 뜰 앞에 심으면 똑똑한 자식이 태어나고 또 후손이 많아 대길한다. ·집 안에 수명이 긴 나무를 심으면, 나중에 제거할 때에 애를 먹는다. ·백 년이 넘는 노거수를 함부로 베면 반드시 재앙이 뒤따른다. ·집 가까운 곳의 나무에는 귀신이 산다. 따라서 가운데 뜰에는 나무를 심지 말 것이고, 그늘을 얻고 싶으면 꽃을 재배한다. 이와 같은 주의 사항을 염두에 두고, 집을 지을 때는 나무의 가운데가 비어있는 것은 베어버리고, 죽은 나무로 등나무가 기어 올라가는 것, 나무에 눈이 뚫리거나 혹은 오그라지고 굽은 나무도 불길한 기운이므로 빨리 없애야 한다고 주의시키고 있다. 후원은 뒷산에서 집으로 뻗어온 지맥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그 지기를 받아 훌륭한 인물이 태어날 것을 기대하는 풍수적 목적이 담겨 있다. 그리고 장독대는 바람이 잘 통하고 양지바른 뒤뜰에 자리 잡았다. 돌을 이용한 수경 기법물이 담긴 연못의 형태가 중국과 일본의 경우, 곡선을 취하는 모양인 반면 한국의 전통 수경 기법은 직선적인 방지(方池)가 많다. 연못의 중앙에 원형의 섬을 조성해 음양오행의 원리를 상징화하였다. 또한 암석을 장식적인 요소로 활용하고, 형태가 특이한 암석 즉 괴석을 화분에 꽃을 심듯이 석분, 석대 등에 배치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연못을 팔 수 없는 장소에는 석조에 물을 담아두었다. 이러한 물확은 크지 않은 돌덩이에 큰 홈을 판 뒤 물을 담아 마당에 놓아두는 석물로, 대개 사랑채 앞뜰에 두었다. 석연지(石蓮池)는 직육면체의 돌을 파 그 속에 물을 담으며 때로는 연꽃을 키우는 석물이다. 물확과 석연지는 모두 연못을 팔 수 없는 마당에 놓아두는 조경시설물로 집 안의 습기와 같은 미기후를 조절해 쾌적한 생활공간을 가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는 발효식품인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등의 식품이 매우 발달하였고, 이것들은 집안 식구들의 입맛과 건강에 직결됨으로 그들의 저장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장독대를 소중히 여기고 정갈하면서 아름답게 간직하였다. 장독대는 대부분 한가하고 바람이 잘 통하고 양지바른 뒤뜰에 자리 잡았다. 담이 없는 집이면 바로 뒷동산 자락이 있어 산과 이어지고, 담이 있는 경우에는 토담이나 사괴적 담, 돌담 등으로 높이도 나지막해 자연과 어울리는 모습이다. 뒤뜰이 마땅치 않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는 우물이나 수돗가 가까이에 장독대를 놓았다. 이처럼 한옥에서 배운 조상의 지혜를 바로 독자 여러분의 전원주택에도 적용해 보면 자연이 우리 집으로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글쓴이 고제희 님은고려대학교 생명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과 생태환경공학부 박사과정을 마치고, 2003년 대통령정책실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에서 풍수지리 자문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매일경제 및 한국경제 TV, SBS, EBS 등의 방송사를 통해 생활 속의 풍수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풍수전문포털사이트 www.21fengshui.com 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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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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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서 배우는 풍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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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피로 고생하는 자녀를 위해 지은 청도 건강주택
- 포근한 기운이 감도는 청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겉과 속이 다른 집을 만났다. 단단하고 모던한 외형에 부드럽고 따듯함을 품은 주택이다. 건축주 부부가 아토피로 고생하는 자녀를 위해 지은 건강한 주택이다. 글 사진 백홍기 기자 취재협조 ㈜채세움 HOUSE NOTEDATA위치 경남 청도군 화양읍지역/지구 계획관리지역건축구조 중량 목구조, 숯단열벽체대지면적 215.00㎡(65.04평)건축면적 69.10㎡(20.90평)건폐율 32.14%연면적 111.34㎡(33.68평)1층 69.10㎡(20.90평)2층 42.24㎡(12.78평)용적률 51.78%설계기간 2020년 2월~5월공사기간 2020년 6월~10월설계 및 시공 ㈜채세움 033-733-0353 www.chaeseum.com MATERIAL외부마감 지붕 - 리얼징크벽 - 벽돌데크 - 석재내부마감 천장 - 서까래 노출벽 - 황토미장, 한지바닥 - 강마루단열재 지붕 - 숯단열지붕판외벽 - 숯단열벽체내벽 - 숯단열벽체창호 LG하우시스주방가구 한샘 현관 내부는 흰색 신발장과 어두운 바닥타일을 조합해 깔끔하게 연출하고 중문에 블루 색을 사용해 산뜻한 느낌을 냈다. 아토피 발병의 가장 큰 이유는 환경과 정신적 요소라고 한다. 최근 심화되고 있는 대기오염도 문제지만, 하루에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집 안이다 보니 면역력이 약한 어린아이에겐 새집증후군이 가장 큰 적이라 할 수 있다. 건축주 부부의 작은 아이도 어려서부터 심한 아토피에 시달렸다. 아토피 치료에 좋다는 식이요법과 치료도 다 해봤다. 잠시 더뎌지긴 해도 나아지진 않았다. 가려움증에 밤잠 이루지 못하고 이부자리는 늘 피로 얼룩졌다.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긁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고, 긁게 놔둘 수도 없고. 좋다는 건 다 해봤는데, 나아지지 않았어요. 그러다 혼자 사시는 장인어른을 모셔야 하는 상황이 돼서 청도에 내려오게 됐어요. 시골 환경이 깨끗해서 그런지 아이 몸이 조금 나아지는 거 같았어요.” 처음부터 집 지을 계획은 없었다. 작은 시골집에 다섯 가족이 살다 보니 공간이 부족하고 살림도 불편했다. 집이 낡아 한두 해 지내다 보니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것도 지내기 어렵게 했다. 결국 부부는 가족 모두가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새 집을 짓기로 했다. 구조재와 마감재 등 모두 자연 소재를 사용해 친환경 주거공간을 만들었다. 작년 겨울에 입주하고부터 작은 딸이 앓던 아토피가 눈에 띄게 좋아져 건강한 주택임을 입증했다. 주방은 실내가 넓어 보이도록 거실과 일체형으로 연결하고, 아내가 원하던 모던한 스타일로 연출해 영역을 구분했다. 조리대와 식탁을 ‘ㄷ’ 자로 연결해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조리대 상판과 의자 톤을 어둡게 맞춰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을 냈다. 온돌방식으로 넓고 깔끔하게 사용하는 부부의 방. 모든 방은 황토 색감이 은은하게 배어나도록 얇은 한지로 도배하고 천장에 서까래 노출 디자인을 적용해 공간에 따듯한 느낌이 감돈다. 좀 더 밝은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노부의 방을 배치했다. 아이 건강을 위한 선택건축주는 어떤 집을 지어야 할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처음엔 현대식으로 모던한 주택을 생각했어요. 막연하게 목조주택이면 몸에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그러다 일하면서 우연히 청도에 채세움이 지은 집을 방문하게 됐죠. 그 집을 둘러보고 주인과 얘기하면서 집 선택에 따라 몸도 좋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거다 싶었죠.” 건축주는 다른 구조로 지은 주택과 비교해보고 최종으로 시공사를 선택했다. 오로지 건강한 주거 환경 때문이다. 수면시간을 포함해 집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실내 환경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지는 낡은 주택을 허물고 그 자리에 신축하기로 했다. 기존 주거 환경은 좁은 대지에 본채와 별채, 창고가 각각 나뉘어 있었고, 마당도 농촌 일상이 배여 있던 터라 좁고 어수선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든 건물을 철거하고 나자 제법 넓은 동서로 긴 사각형 대지가 드러났다. 대지는 서쪽이 넓고 동쪽이 좁은 사다리꼴 모양에 삼면이 이웃과 면하고 북쪽에 마을 도로가 지나는 환경이다. 대지 형태와 주변 환경을 고려해 주택은 자연스럽게 기존 본체가 있던 동쪽에 배치하고 서쪽에 넓은 앞마당을 확보했다. 입면 디자인은 시골 마을 정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무난한 형태로 설계했다. 외벽과 마당은 관리하기 쉽도록 벽돌과 석재로 마감해 편리한 시골 생활을 도모했다. 2층 벽도 얇은 한지를 사용해 1층과 통일감을 줬다. 벽과 거실 천장 등 요소요소에 드러난 통나무 구조재가 편안한 느낌을 준다. 2층 거실 안쪽. 양옆으로 두 아이의 방이 자리 잡고 있다. 자녀의 방도 전체 인테리어 방향에 맞게 통일하고 가구와 블라인드, 침대를 각자 취향에 맞춰 꾸몄다. 초등학생인 두 자매는 이곳에서 색다른 행복을 느끼며 지내고 있다. 집 안 곳곳에서 밝게 생활하는 자녀의 흔적을 볼 수 있다. 2층 화장실. 단순한 구성, 쾌적한 환경평면은 다섯 가족이 머물 공간을 폭이 좁은 대지에 구성하기 위해 효율적인 사각형으로 단순하게 구성했다. 1층은 공유 공간을 중심으로 왼쪽에 노부와 부부의 방, 도로와 면한 오른쪽에 부속실을 배치했다. 공유 공간은 다섯 가족이 다 모여도 넉넉하도록 주방 영역을 다소 작게 하고, 거실을 넓혀 일체형으로 구성했다. 주방이 좁아진 만큼 가사에 편리하도록 식탁과 조리대, 개수대를 하나로 연결한 ‘ㄷ’ 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밝고 깔끔하게 모던 스타일로 연출해 아내 요구를 만족시켰다. 부부와 노부의 방 사이에는 욕실을 배치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주방과 가까운 곳에 부부의 방을, 거실과 편히 오가며 쉴 수 있는 곳에 노부의 방을 배치했다. 두 딸이 생활하는 2층은 중앙에 작은 거실을 두고 양쪽에 침 실을 배치했다. 2층 난간은 천장을 높인 거실 상부와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공간감을 주면서 두 공간의 소통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2층 거실에선 기둥과 보, 서까래를 드러낸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와 주택의 특징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나무의 온화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주택은 모든 벽을 얇은 한지로 마감해 황톳빛이 은은하게 번지면서 더욱 포근한 느낌을 전한다. 단열재로 사용한 숯단열벽체는 단열성능을 높여주면서 공기 정화 기능까지 더해 늘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이처럼 흙과 나무 등 천연재료만 사용해 건강한 기운이 감돌아 작은 아이의 아토피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이 사실이 부부에겐 가장 좋은 소식이라고 한다. 작은 아이가 좋아진 만큼 이 주택이 가족 모두의 건강을 지켜주길 바란다. 건축주가 즐겨 이용하는 데크. 도심에 살 때는 누릴 수 없던 여유가 이곳에선 일상이 됐다. 채세움은 외벽에 벽돌 타일로 마감해 풍화에 취약한 흙집의 단점을 개선하면서 현대식 모던한 스타일로 완성했다. 데크와 마당은 관리하기 편하게 석재로 마감했다. 마을은 작은 동산이 감싸 포근하다. 동산으로 이어지는 마을길에서 본 건축주와 이웃 주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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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피로 고생하는 자녀를 위해 지은 청도 건강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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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ERIALS GUIDE]편리하고 사용하기 쉬운 똑똑한 벽난로
- 편리하고 사용하기 쉬운 똑똑한 벽난로 하늘거리는 벽난로 불꽃이 시선을 붙잡아 아무 생각없이 ‘불멍’에 시달리게 한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와 함께 붉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뜨거운 열기는 포근함을 준다. 그렇게 벽난로는 단독주택에서 감성 아이템으로 굳게 자리 잡으며, 한편으론 난방기구 역할도 충실히 해왔다. 온돌방식의 단점을 해소하면서 감성을 자극하는 벽난로. 왐코리아가 벽난로 문화를 적극적으로 넓히는데 노력하는 이유다. 글 백홍기 취재협조 ㈜왐코리아 031-322-9902 www.hwam.kr 전시장 주소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대지로 407 영국 환경식품농무부 ‘DEFRA Approved 인증’ 한국의 전통 방식인 온돌은 좌식문화에 최적화된 난방 시스템이다. 축열蓄熱 방식인 온돌은 실내 산소를 소비하지 않으면서 오랜 시간 열을 방출해 따뜻하고 쾌적한 실내를 유지한다. 단점은 열을 저장하고 방출하는데 시간이 걸려 실내 공기를 데우는데 2~3시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반면 대류난방 방식인 벽난로는 화로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복사열을 방출해 실내 공기를 빠르게 데우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따라서 초기에 실내 온도를 데우는 벽난로와 서서히 바닥을 데우는 온돌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냉기로 가득한 집도 빠르고 편안하게 쾌적한 온도로 높일 수 있다. 하지만, 벽난로는 장작을 연소하는 데 실내 공기를 소모하기 때문에 일정 시간마다 환기가 필요하고, 수시로 장작을 넣거나 재를 치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 때문에 벽난로를 꺼려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왐코리아는 기존 벽난로의 단점을 개선하고 다루기 편한 제품을 선보여 사그라들었던 국내 벽난로 시장을 다시 달구고 있다. 벽난로는 ‘가구’다 덴마크는 유럽에서도 벽난로 제조 기술이 뛰어나기로 손꼽히며, 수많은 기업이 유럽 및 전 세계에 벽난로를 수출하는 벽난로 강국이다. 왐코리아는 덴마크 내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는 왐HWAM사 벽난로 브랜드인 바이킹 Wiking(덴마크어식 표기), 단스칸 Danskn 제품 등을 한국에 독점 판매하는 업체다. 왐은 1973년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Design and Made in Denmark” 원칙을 세워 덴마크 내에서도 OEM이 아닌 자국에서 장인들이 직접 생산하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또, 난로를 가구의 일부로 생각하는 “A Stove is a furniture piece”라는 철학으로 토비아스 야곱센Tobias Jacobsen(아르네 야곱센 Arne Jacobsen 손자), 소리그 Sorig 등 유명 디자이너와 협업해 벽난로에 세련된 감각을 입혔다. 화실 온도에 따라 금속 코일 부품이 수축과 팽창하면서 댐퍼 3곳을 자동으로 조절해 일정한 화실 온도를 유지하고 완전 연소를 유도한다. 댐퍼 입구 넓이도 조절할 수 있어 연소시간과 화실 온도를 설정할 수 있다. 왐코리아 서성민 대표는 “유럽의 수많은 벽난로 브랜드 가운데 왐을 선택한 이유는 성능과 디자인에 있다”고 한다. 특히, 서 대표의 관심을 끈 부분은 자동연소조절장치(오토파일럿Autopilot)다. 자동연소조절장치는 화실 온도에 따라 공기주입구 댐퍼 3개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장치다. 이 기능에 대해 서 대표는 “벽난로에서 가장 중요한 게 완전 연소지만, 벽난로 초보자가 화실 환경에 따라 댐퍼를 미세하게 조절해 산소를 일정하게 공급하는 건 어렵다”며 “왐 벽난로는 장작만 넣으면, 자동연소장치가 늘 완전 연소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벽난로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제품이다”고 선택 이유를 들었다. 덧붙여 서 대표는 한국에만 있는 ‘버닝 타임’ 개념에 대해 쓴 소리 했다. “버닝 타임이란 ‘연소 시간’을 말하는데, 보통 벽난로 업체에서 ‘버닝 타임이 8~10시간 된다’며 제품 성능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유럽에는 버닝 타임을 ‘수치화한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장작을 쪼갠 상태(장작의 전체 면적)와 개수, 화실 온도, 댐퍼 개방 정도에 따라 버닝타임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복사열이 미미한 불씨 상태까지 버닝 타임에 포함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유럽은 버닝 타임이 ‘짧다’, ‘길다’, ‘아주 길다’로 설명합니다. 중요한건 얼마나 안전하고 완전연소 시킬 수 있느냐 입니다.” 투명한 가격 바다만 건너면 가격이 달라진다. 그래서 ‘가격 헬조선화’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러다 보니 고객을 ‘호갱’으로 생각하는 기업도 있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선 경제 규모에 따라 가격을 설정하기 때문에 모든 제품 가격이 불합리하다고 보긴 어렵다. 가령 유럽에선 거의 모든 가정에서 벽난로를 사용하지만, 국내에선 극히 일부 가정에서만 사용한다. 판매량이 다르니 유럽 현지와 국내 제품 가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 대표는 “어느 일정 부분 이해하지만, 일부 업체에서 과도하게 제품 가격을 높게 책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인거 같아요. 많이 안 팔린다고 비싸게 받을 게 아니라 문화를 바꾸려고 노력해야죠. 벽난로를 사용하면 난방비용을 줄일 수 있고 환경에도 좋은 기능을 해요. 아파트에 설치하는 건 어렵지만, 단독주택만이라도 모두 벽난로를 사용하게 되면 분명 더욱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합리적인 제품 가격이 형성돼야 합니다.” 서 대표가 자사 홈페이지에 유럽 벽난로 판매 사이트를 공유하는 이유다. 이 사이트를 통해 왐 벽난로는 물론 국내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벽난로의 유럽 판매 가격을 확인할 수 있다. 왐코리아가 국내에 판매하는 왐 벽난로 가격과 유럽 판매 가격이 거의 차이 없는 건 중간 딜러 없이 독점권을 가진 것과 FTA 체결에 따라 관세가 붙지 않아서라고 설명한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고 비교해보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주요 벽난로 거래 사이트를 홈페이지에 올렸어요. 겉만 예뻐 보이는 100만 원 미만의 저가형 벽난로도 많지만, 프리미엄급 벽난로를 소개하고 싶었어요. 한번 사면 평생 쓰는 건데, 사용하기 편리하고 손님이 왔을 때 보기 좋아야 하잖아요.”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 왐 벽난로에서 눈여겨 볼 점이 또 하나 있다. 영국 환경식품농무부(DEFRA)에서 승인한 ‘DEFRA Approved 인증’이다. 벽난로 사용 인구가 많은 영국은 환경문제로 대도시 등을 연기 통제구역으로 설정해 엄격하게 벽난로 연기를 통제한다. DEFRA Approved 인증받은 제품은 연기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도시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또, 영국은 2022년 1월 1일부터 ‘Eco Design 2022 인증’이 없는 벽난로 판매를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Eco Design 2022는 영국환경식품농무부가 대기질 개선과 대기오염 감소를 목표로 한 ‘Clean Air Strategy(깨끗한 대기질 유지 정책)’에 따라 가스 및 고체 연료 사용 제품의 성능 및 효율성을 정한 기준이다. 덴마크 왐은 가장 엄격한 대기오염 배출 기준을 적용해 미립자 물질 배출에 관한 EU 기준도 이미 충족시켜 영국 환경식품농무부의 기준도 만족시켰다. 그리고 벽난로를 사용할 때 산소를 소비하므로 실내 환기가 중요하다. 특히, 최근 짓는 주택은 기밀성이 뛰어나 열 회수 환기장치를 설치하지 않았다면 환기가 더욱 중요하다. 기껏 실내를 데우고 나서 환기를 해야하니 상당히 불편하다. 그래서 왐 벽난로는 모든 제품에 외부공기 유입 시스템을 설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실내에서 사용할 때 외부공기 유입 시스템을 설치하면 벽난로 사용에 의한 환기가 필요 없는 것이다. 단열과 기밀이 뛰어난 현대 주택에 꼭 필요한 기능이다. 벽난로만큼 연통도 중요한 부분이다. 연통을 잘 못 사용하면 화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왐코리아는 국제 기준의 안전인증을 받은 독일 제러마이어스 연통을 사용한다. 해수 설비용 스테인리스를 사용하는 연통은 오랜 기간 사용해도 녹이 슬지 않아 수명을 25년 보증한다. 주요 특징을 살펴보면 ▲자성이 없고 ▲내부식성이 뛰어나며 ▲충격에 강하고 성형성이 좋다. ▲열전도율이 보통강의 1/3이고 ▲미네랄 울(암면) 단열재를 사용해 화상 위험이 낮다. ▲열경화성이 없어 높은 온도에도 강도를 유지하며 ▲단열재 직결 체결 방식이라 효율성도 높다. 왐코리아 벽난로 HWAM 3110M 블랙 제품사양 난방면적 10~30평 열출력 2~7㎾ 열효율 78% 크기(㎜) 479(W)×1055(H)×414(D) 유럽 판매가 340만 원(2525유로) 국내 판매가 420만 원(VAT별도) HWAM 4530M 블랙 제품사양 난방면적 10~30평 열출력 3~7㎾ 열효율 82% 크기(㎜) 500(W)×1143(H)×406(D) 유럽 판매가 417만 원(3095유로) 국내 판매가 497만 원(VAT별도) WIKING Thor 제품사양 난방면적 10~30평 열출력 3~7㎾ 열효율 83% 크기(㎜) 513(W)×832(H)×371(D) 유럽 판매가 216만 원(1595유로) 국내 판매가 250만 원(VAT별도) HWAM 7150M 솝스톤 제품사양 난방면적 10~30평 열출력 2~7㎾ 열효율 81% 크기(㎜) 560(W)×1513(H)×560(D) 유럽 판매가 736만 원(5455유로) 국내 판매가 890만 원(VAT별도) HWAM Oven Stove 클래식4 제품사양 난방면적 10~50평 열출력 3~8㎾ 열효율 79% 크기(㎜) 600(W)×1319(H)×400(D) 유럽 판매가 586만 원(4335유로) 국내 판매가 686만 원(VAT별도) HWAM 5530M 2020 NEW STOVE 비스포크 벽난로 제품사양 난방면적 10~50평 열출력 4~8㎾ 열효율 80% 난로 크기(㎜) 900(W)×1685(H)×450(D) 유럽 판매가 신제품 국내 판매가(와이드 오크 기준) 1200만 원(VAT별도) ※인테리어에 맞춰 모듈 형태의 옵션을 선택해 구조를 변경할 수 있다. NEW HWAM 4120 SMART STOVE 똑똑한 loT 벽난로(스마트 컨트롤 옵션). AI시대에 맞춰 벽난로도 똑똑해졌다. 세계 최초로 지능형 스마트 벽난로를 선보인 HWAM 4120 제품은 화실 온도와 공급 산소량을 측정해 최적의 완전 연소를 위한 공기량을 조절함으로써 장작 소모량을 최대 50% 절감할 수 있다. 장작을 추가해야 하거나 장작 위치가 안 좋아 불완전연소 될 거 같으면 알람으로 알려준다. 심야모드를 설정하면 수면 시 장작을 투입하지 않도록 버닝타임을 늘리고, 실내 온도를 실시간으로 측정해 벽난로 운영을 돕는다. 제품사양 난방면적 10~30평 열출력 2~7㎾ 열효율 82% 크기(㎜) 510(W)×1027(H)×510(D) 유럽 판매가 신제품 국내 판매가 480만 원(VAT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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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ERIALS GUIDE]편리하고 사용하기 쉬운 똑똑한 벽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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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 구들을 전기로 편백구들
-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전기만 사용해 편리하게 난방이 가능한 시공 방법이 있다. 황토의 복사열로 단열재인 편백나무를 데워 적은 난방 에너지로 공간까지 덥히는 방식으로 아궁이 구들장 특유의 열 맛까지 살린 시공 방법이다. 단독주택은 물론 아파트, 이동주택 어디에나 시공할 수 있고 하루 만에 설치가 가능해 리모델링하는 이들이 주목하는 아이템이다. 글 이수민 기자 자료제공 온돌라이프 062-223-3621 www.ondollife.co.kr 편백구들이란? 첨단 히트파이프로 증기열을 만들어 황토를 데우는 난방시스템. 아궁이 장작불의 연기가 고래를 데워서 구들을 뜨겁게 덥히는 원리처럼 전기는 아궁이 역할을 하는 히터까지만 들어가고, 스팀 발열로 뜨거워진 황토가 구들의 열 맛을 그대로 재현한다. 보통 구들 위에 한지를 사용하지만, 단열재인 편백나무를 사용해 건강성과 내구성까지 높인 것이 매력 포인트다. 편백구들 인기 포인트 08 01 하루 만에 설치가 가능하다 아파트나 주택공사 시 별도의 보일러나 XL 파이프가 필요 없다. 기포콘크리트, 방통, 미장, 마감 바닥재 시공 등이 필요 없다. 바닥만 평평하면 어느 곳이나 바로 설치가 가능하다. 따라서 방 1개당 1~2일이면 시공이 가능하다. 기존 주택이나 아파트에는 철거 없이 바로 설치 가능하다. 02 친환경 난방이다 전기만 사용해 이산화탄소, 오염물질 없는 친환경 난방이다. 특히 국내산 편백나무만 사용해 라돈과 방사능이 발생하지 않는다. 내부에 황토를 감싸는 알루미늄과 금속열확산판이 들어 있어 수맥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다. 03 전자파 걱정이 없다 편백구들은 자체 기술 개발인 히트파이프 스팀가열 난방방식을 사용해 인체에 유해한 자기장 전자파가 아예 발생하지 않는다. 04 난방비 절감 효과가 있다 16.2㎡(약 5평) 기준으로 시간당 0.74㎾ 전력으로 바닥 온도 43℃, 공간 온도 32℃로 따뜻하게 만드는 난방기술로 전력 절감 효과를 볼 수 있다. 05 정화작용으로 쉽게 오염되지 않는다 원목인 편백나무를 마감재로 사용해 오염에 대한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커피를 쏟거나 김치를 떨어뜨려도 바로 닦기만 하면 말끔히 사라진다. 피톤치드의 강력한 정화작용으로 쉽게 오염되지 않는 것. 06 관리가 쉽다 편백구들의 표면에는 정전기가 생기지 않아 먼지가 달라붙지 않는다. 섬유나 가죽, PVC 장판, 온돌마루 등은 늘 청소를 해야 할 정도로 먼지가 쌓이지만 편백구들은 먼지가 쉽게 쌓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가볍게 물걸레질이면 쉽게 청결을 유지할 수 있다. 07 층간 소음을 완화한다 편백 구들 밑에 설치되는 탄화코르크보드는 불연, 흡음, 단열, 방습에 탁월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 재질의 쿠션감으로 층간 소음도 크게 발생하지 않는다. 08 A/S가 쉽고, 이사가 가능하다 편백구들은 분해조립 방식으로 이사 갈 때 분리해 재설치가 가능하다. 또한 분해 조립이 용이해 해당 부품만 교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니 A/S가 용이하다. 편백구들 활용 사례 06 01 난방 걱정 없는 한옥으로 한옥의 불편한 점 중 하나는 바로 난방이다. 그동안의 기술로 2층 이상 한옥은 난방이 어려운 문제라고 여겨졌다. 이 문제를 편백 구들을 사용해 해결했다. 온돌라이프의 ‘히트파이프 스팀 발열 축열식 황토복사’ 난방기술은 보일러실이 필요 없고 오직 전기만 있으면 따듯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편백 구들을 이용하면 100층 높이의 한옥 시공도 가능하다. 02 장작 필요 없는 황토방으로 황토방을 설치하면 장작을 쌓아놓고, 매일 아궁이에 넣어 지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특히, 열기가 식으면 한 밤중에 나가서 장작을 넣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자칫 젖은 나무를 넣게 되면 일산화탄소가 발생되어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다. 이런 번거로움이 가득한 황토방에 편백구들을 설치하면 기존 황토방의 열감은 그대로 즐기고, 장작으로 인한 번거로움은 덜 수 있다. 03 피톤치드 가득한 침실로 라돈이나 화공 물질이 없는 국내산 편백나무를 사용해 만든 편백구들은 강력한 피톤치드를 뿜어낸다. 피톤치드는 내성이 생기지 않는 천연 항균 및 항생제이며, 아토피, 비염, 천식의 원인이 되는 집 먼지 진드기 번식을 막는 작용도 한다. 또한 편백구들의 표면에 정전기가 생기지 않아 먼지가 쉽게 쌓이지 않는다. 04 성장호르몬 촉진시키는 아이 방으로 편백구들은 공간 전체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불연, 흡음, 단열, 방음에 탁월한 성능을 지녔다. 편백구들 밑에 설치하는 탄화코르크보드는 재질의 쿠션감으로 층간 소음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또한 아이의 건강을 생각해 편백나무 소재를 사용하는 경우에 나무가 쉽게 오염될까 염려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도 피톤치드의 강력한 정화작용으로 바로 닦으면 흔적 없이 깨끗하다. 조립 방식의 편백구들 05 면역성 살리는 방으로 피톤치드는 뇌의 알파파를 증가시킨다. 알파파란 의식이 가장 높은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룰 때 발생되는 뇌파로서, 명상파라고도 한다. 알파파로 편안해질 때 따뜻한 열감이 전달되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 숙면을 유도하게 된다. 특히 편백구들의 황토복사열은 우리 몸 깊숙이 침투해 혈액 순환을 돕는다. 특히 체온이 올라가면 면역력도 증가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06 물광피부 만드는 찜질방으로 주말마다 피로를 풀기 위해 찜질방을 찾는 이에게 찜질방이 달린 집은 드림하우스다. 전원주택 작은방 하나를 편백구들을 이용해 미니 찜질방을 쉽게 만들 수 있다. 여러 사람이 다니는 찜질방이 아닌 우리 가족만을 위한 가족 전용이라 위생적이며 서로 유대감도 높일 수 있다. 시공 스타일과 가격 info 온돌라이프첨단 온돌난방기술을 이용해 가정용 온돌방이나 찜질방, 편백 웰빙 침대를 만들어 제공하는 기업. 히트파이프를 이용한 스팀발열기술로 황토와 편백나무를 데워 적은 전력으로 공간을 따뜻하게 한다. 첨단 온돌난방기술에 편백나무와 황토를 결합해 실내 전체 난방은 물론 침대로 제작해 판매한다. 겨울에는 온돌로 따뜻하게, 여름에는 편백나무 바닥으로 시원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문의 온돌라이프 062-223-3621 www.ondollife.co.kr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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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 구들을 전기로 편백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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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02월호 특집]리모델링 A to Z_아궁이 구들을 전기로 편백구들
- 아궁이 구들을 전기로 편백구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전기만 사용해 편리하게 난방이 가능한 시공 방법이 있다. 황토의 복사열로 단열재인 편백나무를 데워 적은 난방에너지로 공간까지 덥히는 방식으로 아궁이 구들장 특유의 열 맛까지 살린 시공 방법이다. 단독주택은 물론 아파트, 이동주택 어디에나 시공할 수 있고 하루 만에 설치가 가능해 리모델링하는 이들이 주목하는 아이템이다. 글 이수민 기자 | 자료제공 온돌라이프 편백구들이란? 첨단 히트파이프로 증기열을 만들어 황토를 데우는 난방시스템. 아궁이 장작불의 연기가 고래를 데워서 구들을 뜨겁게 덥히는 원리처럼 전기는 아궁이 역할을 하는 히터까지만 들어가고, 스팀 발열로 뜨거워진 황토가 구들의 열 맛을 그대로 재현한다. 보통 구들 위에 한지를 사용하지만, 단열재인 편백나무를 사용해 건강성과 내구성까지 높인 것이 매력 포인트다. 편백구들 인기 포인트 08 01 하루만에 설치가 가능하다 아파트나 주택공사시 별도의 보일러나 XL파이프가 필요 없다. 기포콘크리트, 방통, 미장, 마감 바닥재 시공 등이 필요 없다. 바닥만 평평하면 어느곳이나 바로 설치가 가능하다. 따라서 방 1개당 1~2일이면 시공이 가능하다. 기존 주택이나 아파트에는 철거 없이 바로 설치 가능하다. 조립방식 편백구들 02 친환경 난방이다 전기만 사용해 이산화탄소, 오염물질 없는 친환경 난방이다. 특히 국내산 편백나무만 사용해 라돈과 방사능이 발생하지 않는다. 내부에 황토를 감싸는 알루미늄과 금속열확산판이 들어있어 수맥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다. 03 전자파 걱정이 없다 편백구들은 자체기술 개발인 히트파이프 스팀가열 난방방식을 사용해 인체에 유해한 자기장전자파가 아예 발생하지 않는다. 히트파이프 원리 히트파이프 이용한 난방 시스템 04 난방비 절감 효과가 있다 16.2㎡(약 5평) 기준으로 시간당 0.74㎾ 전력으로 바닥온도 43℃, 공간 온도 32℃로 따뜻하게 만드는 난방기술로 전력 절감 효과를 볼 수 있다. 05 정화작용으로 쉽게 오염되지 않는다 원목인 편백나무를 마감재로 사용해 오염에 대한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커피를 쏟거나 김치를 떨어뜨려도 바로 닦기만 하면 말끔히 사라진다. 피톤치드의 강력한 정화작용으로 쉽게 오염되지 않는 것. 06 관리가 쉽다 편백구들의 표면에는 정전기가 생기지 않아 먼지가 달라붙지 않는다. 섬유나 가죽, PVC장판, 온돌마루 등은 늘 청소를 해야할 정도로 먼지가 쌓이지만 편백구들은 먼지가 쉽게 쌓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가볍게 물걸레질이면 쉽게 청결을 유지할 수 있다. 07 층간소음을 완화한다 편백 구들 밑에 설치되는 탄화코르크보드는 불연, 흡음, 단열, 방습에 탁월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 재질의 쿠션감으로 층간 소음도 크게 발생하지 않는다. 08 A/S가 쉽고, 이사가 가능하다 편백구들은 분해조립방식으로 이사갈 때 분리해 재설치가 가능하다. 또한 분해 조립이 용이해 해당 부품만 교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니 A/S가 용이하다. 편백구들 활용 사례 06 01 난방 걱정 없는 한옥으로 한옥의 불편한 점 중 하나는 바로 난방이다. 그동안의 기술로 2층 이상 한옥은 난방이 어려운 문제라고 여겨졌다. 이 문제를 편백 구들을 사용해 해결했다. 온돌라이프의 ‘히트파이프 스팀 발열 축열식 황토복사’ 난방기술은 보일러실이 필요 없고 오직 전기만 있으면 따듯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편백 구들을 이용하면 100층 높이의 한옥 시공도 가능하다. 02 장작 필요 없는 황토방으로 황토방을 설치하면 장작을 쌓아놓고, 매일 아궁이에 넣어 지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특히, 열기가 식으면 한 밤 중에 나가서 장작을 넣어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자칫 젖은 나무를 넣게 되면 일산화탄소가 발생되어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다. 이런 번거로움이 가득한 황토방에 편백구들을 설치하면 기존 황토방의 열감은 그대로 즐기고, 장작으로 인한 번거로움은 덜 수 있다. 03 피톤치드 가득한 침실로 라돈이나 화공물질이 없는 국내산 편백나무를 사용해 만든 편백구들은 강력한 피톤치드를 뿜어낸다. 피톤치드는 내성이 생기지 않는 천연 항균 및 항생제이며, 아토피, 비염, 천식의 원인이 되는 집 먼지 진드기 번식을 막는 작용도 한다. 또한 편백구들의 표면에 정전기가 생기지 않아 먼지가 쉽게 쌓이지 않는다. 04 성장호르몬 촉진시키는 아이방으로 편백구들은 공간 전체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불연, 흡음, 단열, 방음에 탁월한 성능을 지녔다. 편백구들 밑에 설치하는 탄화코르크보드는 재질의 쿠션감으로 층간 소음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또한아이의 건강을 생각해 편백나무 소재를 사용하는 경우에 나무가 쉽게 오염될까 염려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도 피톤치드의 강력한 정화작용으로 바로 닦으면 흔적 없이 깨끗하다. 05 면역성 살리는 방으로 피톤치드는 뇌의 알파파를 증가시킨다. 알파파란 의식이 가장 높은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룰 때 발생되는 뇌파로서, 명상파라고도 한다. 알파파로 편안해질 때 따뜻한 열감이 전달되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 숙면을 유도하게 된다. 특히 편백구들의 황토복사열은 우리 몸 깊숙이 침투해 혈앨순환을 돕는다. 특히 체온이 올라가면 면역력도 증가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06 물광피부 만드는 찜질방으로 주말마다 피로를 풀기 위해 찜질방을 찾는 이에게 찜질방이 달린 집은 드림하우스다. 전원주택 작은 방 하나를 편백구들을 이용해 미니 찜질방을 쉽게 만들 수 있다. 여러 사람이 다니는 찜질방이 아닌 우리 가족만을 위한 가족 전용이라 위생적이며 서로 유대감도 높일 수 있다. info 온돌라이프 첨단 온돌난방기술을 이용해 가정용 온돌방이나 찜질방, 편백 웰빙 침대를 만들어 제공하는 기업. 히트파이프를 이용한 스팀발열기술로 황토와 편백나무를 데워 적은 전력으로 공간을 따뜻하게 한다. 첨단 온돌난방기술에 편백나무와 황토를 결합해 실내 전체 난방은 물론 침대로 제작해 판매한다. 겨울에는 온돌로 따뜻하게, 여름에는 편백나무 바닥으로 시원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문의 온돌라이프 062-223-3621 www.ondol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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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02월호 특집]리모델링 A to Z_아궁이 구들을 전기로 편백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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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의 얼굴, 기능에 멋과 여유를 더한 조상의 지혜 굴뚝
- 각 나라의 전통 건축물이 그러하듯 한옥은 우리나라 기후와 자연 및 인문 환경을 반영한다. 북방계와 남방계를 상징하는 건축 요소인 구들과 마루가 공존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굴뚝은 구들과 불가분의 관계로 아궁이에서 발생한 연기를 집 밖으로 배출하고 새 공기를 흡입한다. 굴뚝은 이러한 목적 외에도 여러 가지 부속물과 함께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룬 한옥의 멋스러움과 여유로움을 한껏 끌어올린다.글 전원주택라이프 편집부사진자료 전원주택라이프 DB자료 추사 김정희 고택 사랑채 뒷마당 굴뚝 살림집 안마당은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한 채 차경기법을 사용하여 주변의 자연 경관을 담은 시원스러운 공간이다. 또한 햇볕을 받아들이는 공간이자 작업 공간 그리고 집안 대소사를 치르는 공간이다. 반면 뒷마당은 통풍과 채광이 필요한 농기구와 곡물, 식료품을 보관하는 수장 공간이다. 배산임수에 따라 입지를 정한 반가班家의 경우 뒷마당은 대개 산기슭을 정리하면서 화강석을 다듬은 장대석으로 화계花階를 쌓고 나무를 심고 괴석을 놓고 굴뚝을 시설한다. 특히 건물에서 거리를 두고 연도를 뽑아 만든 굴뚝은 밋밋하고 단조로운 공간을 미적으로 승화시킨 조형물로 손색이 없다. 경복궁 교태전 아미산 굴뚝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온돌방 밑을 통과한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고종 2년 (1865)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 4개가 서 있는데 6각형 굴뚝 벽에는 당초, 학, 박쥐, 봉황, 나티, 소나무, 매화, 대나무,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나비, 해태, 불가사리 등이 무늬를 배치했다. 각 무늬는 조형전을 구워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화면을 구성했다. 십장생과 사군자, 장수와 부귀 등 길상무늬 및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로 표현했다. 굴뚝 상부 역시 조형전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했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연가를 설치했다. 굴뚝 기능에 충실하면서 각종 문양의 형태와 구성이 아름다워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 훌륭한 작품이다. 한옥의 건축미를 끌어올린 굴뚝 경복궁 자경전 후원의 십장생 굴뚝 구들 문화는 지역과 신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의 굴뚝을 발달시켰다. 아궁이와 구들 형태는 어느 지역이나 거의 비슷하지만 굴뚝은 다르다. 추운 북쪽에서 따듯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그 높이가 점점 낮아지다가 제주도에 이르면 사라진다. 북쪽 지역일수록 불을 강하게 빨아들이고자 굴뚝을 높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열기를 가두면서 북서풍에 역류하지 않도록 개자리를 파고 여러 가지 재료로 굴뚝을 두껍게 감쌌다. 이 과정에서 굴뚝을 치장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보물인 경복궁 자경전 후원 십장생 굴뚝과 아미산 굴뚝이다. 또한 굴뚝 맨 위에 설치한 연가煙家는 치장적 성격도 강하지만 비가 들어가지 않도록 방지하고, 연기 배출을 원활하게 돕는다. 굴뚝 연기는 천연 방충제 굴뚝 연기는 역하기보다 오히려 나무 타는 냄새로 향긋하다. 구들과 굴뚝 중간에 판 개자리에서 불길에 휩싸여 온 재와 찌꺼기들을 걸러내기에 굴뚝으로 맑은 연기만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반면 굴뚝 연기는 천연 방충제로, 그 주변에는 벌레들이 꾀지 않기에 거미가 줄을 치지 않는다. 난방보다 취사가 위주인 남쪽 지역에서는 낮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이용하여 해충을 쫓기도 했다. 한옥에 담긴 굴뚝 미학 간이형 굴뚝 간이형 굴뚝 처마 밑에 간단한 구멍을 뚫거나 툇마루 밑에 구멍을 내어 배기하는 형태로 민가 굴뚝의 주류를 이룬다. 독립형 굴뚝 독립형 굴뚝 건물 외벽에서 떨어진 곳에 연도를 땅속에 묻고 세운 굴뚝으로 벽돌을 쌓아올려 기와를 덮고 연가를 얹어 완성한다. 복잡형 굴뚝 복합형 굴뚝 담의 일부에 굴뚝을 설치하여 밋밋하고 단조로운 담을 보완하는 형태다. 굴뚝의 재료와 문양 궁궐 및 상류 주택의 굴뚝. 검은 벽돌로 쌓은 후 상부에 기와로 지붕을 만들고 연기 나오는 부분에 토기를 얹는다. 회와 황토로 기와 조각을 쌓고 연가를 만든 굴뚝 산간 지역인 울릉도 나리분지 우데기집은 주위에서 구하기 쉬운 통나무를 뚫어서 굴뚝을 세웠다. 오지 굴뚝은 흙으로 빚어 구운 오지 토관 여러 개를 이어서 처마나 지붕 높이만큼 쌓아올린다. 작은 굴뚝 하나에도 바람을 담은 무늬로 장식했다. 연가. 꼭 집처럼 생긴 토기로 벽에 창호처럼 네모로 구멍을 내어 연기를 내뿜게 한다. 흙과 돌을 쌓아 만든 굴뚝은 민가에서, 검은 벽돌을 쌓고 기와로 연가煙家를 만든 반가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궁궐에서는 붉은 벽돌과 기와, 연화로 굴뚝을 만들었다. 굴뚝에는 황토와 기와를 켜켜이 쌓은 직선 무늬와 기와와 흙을 이용한 기하학적 문양 그리고 단순하게 표현한 꽃문양이 나타난다. 이 문양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닌 바람적 성격이 강하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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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의 얼굴, 기능에 멋과 여유를 더한 조상의 지혜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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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온돌을 계승한 온수 순환식 보일러 바닥난방
- 실내 온도를 높이는 난방의 기원은 인류의 불 사용과 주거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우리 민족은 불을 발견하고 불씨를 보존해 취사와 난방을 하면서 고유하고 독특한 주거 문화유산인 온돌[구들]을 발명했다. 예전 장작, 검불, 말똥 등을 때는 전통 아궁이 온돌이나, 요즘 연탄과 등유, 가스 등을 연료로 한 보일러 온수 순환 온돌이나 모두 바닥난방이란 점에서 변함이 없다. 우리의 바닥난방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살펴보자. 글 사진 윤홍로 기자전통 온돌은 고래를 켜고 구들장을 덮어 흙을 발라서 방바닥을 만들고 불을 때서 난방하는 것으로, 열전달 메커니즘인 전도, 복사, 대류의 원리를 모두 적절히 활용한 과학적인 난방 방식이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불기운이 고래를 통과하면서[대류] 방바닥에 전달되고[전도], 방바닥의 열기[축열]는 방 전체[복사] 및 거주자의 신체에 전달되며[전도], 방 안에서 따듯한 온기가 하부에 머물 수 있게 저온 방열을 통해 공기의 흐름[대류] 속도를 제어한다.우리 민족과 온돌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온돌의 발명으로 주거가 땅 위로 올라오면서 정착생활이 이뤄졌고, 그로 인해 가족제도가 성립되고 부족, 민족국가를 형성했다.“우리 한민족은 구들방의 아랫목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공부하거나 자거나 식사하거나 병들거나 간에 구들에 밀착된 생활을 한다. 또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에도 구들에서 죽고, 죽은 뒤에까지 구들에 와서 제사상을 받는다. 구들에서 죽지 아니한 경우를 가장 흉하게 여겨 시신을 구들 위에 들여오지 아니할 만큼, 구들을 아끼고 신성시한다. 그래서 구들에 밀착하여 생활하다 보니 좌식생활 방식이 되고, 이 생활에 적합한 옷으로 품이 넉넉한 한복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_ 리신호 교수(충북대학교 농업생명환경대학 지역건설공학과), <한민족의 난방문화> 중에서 전통 온돌문화와 서구 보일러의 합리적인 결합1940년대 후반부터 토탄, 유연탄, 무연탄가루 같은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1950년대 이전까지 장작이나 숯을 때는 전통 온돌 바닥 난방이 주류를 이뤘다. 전통 온돌은 아궁이의 용도에 따라 난방과 취사를 겸한 ‘부뚜막식’과 난방 전용 ‘함실식’이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 때 상류층을 중심으로 한 문화주택에서 전통주택의 재래식 온돌과 개량 온돌, 라디에이터, 스토브, 페치카 등을 혼용했지만, 상당수가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온돌로 회귀하기도 했다.1952년 정부(당시 상공부)에서 산이 황폐해지고 연료 부족 현상이 심각해지자, 가정용 연료로 장작이나 숯에 비해 발열량이 많고 운반과 사용이 편한 구멍탄(19공탄) 사용과 아궁이 개량을 장려했다. 이때부터 부뚜막식 아궁이는 ‘두꺼비집 부뚜막식 연탄 온돌(화덕 고정형)’로, 함실식 아궁이는 ‘레일식 연탄 온돌(화덕 이동형)’로 바뀌기 시작했다.하지만 ‘밤새 무사하셨어요.’ 라는 말이 인사가 됐듯이, 연탄을 사용하면서 연탄가스 중독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연탄가스 중독의 원인은 연탄 온돌이 전통 온돌의 아궁이 후렁이(땔감이 들여지고 연소 불길이 이는 부분) 부분만 바꿨기 때문이다. 전통 온돌은 역류 현상이 많아 구들장 밑의 고래 내부와 부엌에 미처 빠지지 못한 연탄가스가 남고, 그것이 바닥과 벽이 갈라지면 그 틈새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궁여지책으로 개발한 것이 굴뚝 끝에 매다는 가스 배출기였다.1960년대 연탄가스 중독을 막고 열 손실을 줄이기 위해 연탄 온돌을 개량한 연탄보일러 온수 바닥난방 방식이 등장했다. “보일러 상부 중앙에 연탄을 넣어 물을 40∼60℃ 온수로 만들고 각 방의 패널 코일과 라디에이터에 공급하여 난방을 했다. 냉각된 물은 다시 보일러로 환수, 재가열하여 순환시켰다. 이 보일러는 샤워용 온수도 공급했고, 보일러 덮개를 만들어 취사도 할 수 있었다.”_ 전남일·양세화·홍형옥,《한국 주거의 미시사》, 돌베개김준봉(국제온돌학회 회장, 북경공업대학 건축성시학원) 교수는 연탄보일러에 대해 우리의 전통 온돌문화와 서구 보일러의 합리적인 결합이라고 설명한다.“온수관이 바닥 고래의 기능을 대신하고 직접 가열 방식에서 온수를 이용한 간접 가열 방식으로 전통 온돌의 직접 가열 방식과 차이가 있었으나, 효율적인 바닥난방을 계승한 일종의 절충 방식이었다. 온수 순환식 바닥난방의 도입과 함께 비로소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가정용 보일러가 등장하기 시작하기 시작했으며, 온수를 순환시키는 파이프 또한 강관에서 동관, 그리고 각종 비닐계 온수 전용 파이프 등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이는 우리의 전통적 온돌문화와 서구에서 유입된 보일러가 합리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_Daum 블로그, 김준봉 교수의 온돌이야기 구들과학이야기하지만 연탄보일러는 번개탄으로 통하는 착화탄이 등장할 정도로 불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고, 시간에 맞춰 연탄을 갈아줘야 했으며, 연탄재와 가루로 부엌이 지저분해졌다. 또한 1967년 이후 매년 겨울철을 앞두고 연탄 파동이 발생하다시피 했다. 정부에서 연탄 수급이 어려워지자 월동 연료 대책으로 연탄의 가수요 억제와 원활한 공급을 위해 연탄 구매 카드제를 실시할 정도였다. 예전엔 취사와 난방을 겸한 부뚜막 온돌이 주를 이뤘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지역에선 대부분 등유보일러를 선택한다. 1975년 이후 석유가 보일러의 연료로 도입되면서, 기름보일러 시장이 급신장하기 시작했다. 기름보일러는 연탄가스 사고의 완전한 예방과 연탄을 갈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으므로 1980년대 들어서 중산층의 난방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1978∼1981년 2차 석유파동으로 기름값이 크게 오르자, 연탄보일러가 다시 인기를 끌기도 했다. 당시 정부에서 에너지 다원화 정책의 일환으로 가스 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취사 및 난방 연료로 가스가 빠르게 보급됐다.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인 가스보일러는 1982년 ㈜공영토건(현 대성셀틱)에서 수입한 프랑스 샤포토에모리사 제품이다. 그 후 1984년부터 ㈜롯데기공이 처음 가스온수보일러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 가스의 안정적인 수급을 위해 천연가스 전국 공급 환상형 주요 배관망이 완공된 이후 가스보일러가 난방 방식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무엇보다 공해가 거의 없고 고장이 적을 뿐만 아니라 조작이 간편하기 때문이다. 직접 가열식 전통 온돌이나 외부의 별도 보일러를 이용해 온수를 순환시키는 간접 가열식 현대 온돌이나 모두 바닥난방 방식이다. 그래서 요즘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도 온돌방에서 생활한다고 말한다. 바닥난방의 경우 그곳에 접한 신체 부위로부터 열전도에 따라 열이 직접 전달된다. 서 있을 때는 발바닥에서부터, 앉아 있으면 엉덩이나 다리 부위에서부터 따듯함을 느끼게 된다. 동양의학에 두한족열頭寒足熱, 즉 ‘머리는 시원하게 발은 따듯하게’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발밑이 따듯하고 온몸이 쾌적한 온도가 되면 기분이 좋아져 슬슬 잠이 오고 건강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바닥 온도가 낮으면 다리의 혈관이 수축돼 혈액순환이 나빠지고 심한 경우 냉증이 발생한다. 또 발의 냉증은 손 온도에 전달돼 손의 혈액순환 및 피부 온도를 떨어트리기도 한다. 우리 고유의 바닥난방이 실내에서 신발을 신어야만 생활할 수 있는 서구식 대류 난방 방식과 따듯한 느낌이 전혀 다른 이유다. 건강하고 쾌적한 겨울나기 주택 만들기01Ⅰ전통 온돌을 계승한 온수 순환식 보일러 바닥난방02Ⅰ따듯한 겨울나기의 중심, 보일러03Ⅰ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데우는 난로04Ⅰ결로 곰팡이에서 안전한 주택, 패시브하우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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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온돌을 계승한 온수 순환식 보일러 바닥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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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구들 놓기 ③ 구들은 동서양 막론 효과적인 난방설비
- 동서양의 난방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오늘날까지 지켜오고 있는 구들 난방설비가 얼마나 발달돼 있고 독보적인지 알 수 있다. 중국에도 우리나라 구들과 유사한 형태가 유지돼 왔으나, 방 전체를 데우지 않은 형태인 데다 화재와 건강문제 등 불편함이 따른다. 이번호에는 구들재료부터 알아보며 구들시공 실제에 들어가보자. 글 오홍식 <(사)한구전통구들협회 구들문화원 원장> 010-3044-8396 http://blog.daum.net/guwdle 서구인들이 기록한 구들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한다. 네델란드 출신의 니콜라스 비첸Nicolaas Witsen(1641~1717)은 1667년 모스코바에서 타르타리아誌에 '방을 만들 때 마루 밑으로 1/2피트 정도 구멍을 뚫고 문 밖에 설치한 아궁이에서 불을 피워 넣어 방 안을 따뜻하게 하였다'고 구들을 소개했다《(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주강현 지음). 프랑스의 천주교 선교사 달레Dallet가 1593년부터 1871년까지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정리하면서 그의 책 《Histoire de I'Englise de Coree;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구들에 대해 쓰고 있으며, 그리피스W. E. Griffis는 1882년 《COREA, The Hermit Nation;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구들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했다. '동북아시아 지방에 있는 주택에는 고래가 있다. 고래는 관으로 된 일종의 화덕으로 감자를 굽듯 사람을 굽는다. 서양 사람들이 벽돌로 침대를 만들고 그 아래 발을 따듯하게 하는 난로를 설치한 것과 같다. 집의 한쪽 끝에 있는 아궁이로부터 다른 쪽 끝의 굴뚝에 이르기까지 연기관(내굴길) 위를 벽돌이나 구들돌로 덮는다.' 로만 하이포코스트 시스템의 모형도 David Dobson(영국) 서양의 난방 역사중세 서구에서 왕비가 추위를 이기려고 애완견들을 껴안고 잔다든지, 숯불을 담은 용기를 침대 밑이나 심지어 귀부인의 치마 밑에 놓고 난방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서양의 난방법인 벽난로는 10세기 정도부터 등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난로라고 생각하는 형태의 난로 난방법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400년대였고, 연통 있는 기구는 18세기 들어서야 보게 됐다. 연기를 연통으로 처리하기보다 창문으로 내보내려 했기에 건물의 구조도 연기를 빨리 내보내는 기능을 중시했다. 창문(Window)은 바람(Wind)의 소통을 우선적으로 의미하는 단어라고 한다.서구에서는 고통스러운 연기와의 싸움이 치열했던 반면, 구들 난방에서는 연기 자체도 쓸모 있게 다룬다. 추녀 밑을 감돌아 마당에까지 깔리는 연기로 해충과 병원균의 침입을 상당 부분 막아 위생은 물론 건물의 수명에도 도움이 됐다. 목구조인 한옥에서는 연기의 그을음 성분은 방부재 역할을 해 건물의 수명을 오래 가게 하는 효과도 있다. 서양 유적으로 남아 있는 하이포코스트(Hypocaustum; Hypocaust)는 로마시대 바닥 가열 방법으로, 프레푸르니움이라 불리는 아궁이에 불을 피워 바닥 아래를 순환해 바닥을 덥히고, 그 뜨거운 열기가 테라코타 튜브나 속이 비어 있는 판석 벽을 타고 올라가는 시설을 말한다. 기원전 약 200년경부터 생겨서 주로 테르메(Thermae, 공중목욕탕)의 난방으로 사용됐던 제정로마시대의 서양식 구들 문화를 보면, 놀이를 하거나 몸을 씻기 위해 테르메에 가곤 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의 170여 개 대중탕이 기원후 300년에는 900여 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경에 세워진 폼페이 스타비안 하이포코스트가 최초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규모와 시설에서 대형화 고급화되며 부유한 황실에서 모종某種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백성들에게 접근하려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료로 사용케 했다. 212년 잔인한 황제로 악명 높았던 카라칼라 황제는 로마의 어려운 재정 상황도 아랑곳없이 무려 2800여 평 크기의 목욕탕을 건설해 열탕, 냉탕 등에 사용한 물이 하루에 8000톤에 달했고 50군데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기 위해 2000톤의 장작을 재워 놓았다고 한다. 284~305년에 있었던 디오클레시안 목욕탕은 그 규모가 무려 27만 평방피트에 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는 권투나 레슬링 같은 경기장, 도서관 또는 레스토랑, 스낵바, 심지어 극장 같은 시설들이 있었다. 아예 동네하나를 다용도 목욕장으로 만든 셈이다. 대개 가난한 사람과 노예들은 사용할 수 없었으며, 오전 10시 반경에 개장해 저녁시간 전에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지고, 모든 욕조에 물만 공급했던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와인이나 우유가 채워지기도 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시설이었다. 서양의 난방 설비는 철제 기구가 나오기 전까지 오스트리아의 라우흐하우스Rauchhaus로 대표되는 실내 화덕의 형태가 주종을 이루다가 1400년대 벽난로의 시효로 보는 독일의 슈비프보겐헤르트Schuwifwogenhert까지 실내에서 직접 불을 피우는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실내 연기 문제는 여전했다. 이후 독일에서 나타난 철제 벽난로에 연통이 생기고 미국으로 건너가 열효율을 더욱 높인 프랭클린 벽난로로 발전돼 나중에 나타난 라디에이터와 함께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한편, 러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쓰인 페치카는 벽난로가 열효율 면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뤄 지금도 애용되고 있으며 이 구조에 대한 연구가치가 크다고 본다. Philip Nixon(Durham County Council)의 빈체스터 로만 하이포코스트 형태. 제작된 고임돌용 석재와 그 높이로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동양의 난방 역사중국의 '캉', '장갱長坑'이라는 쪽구들은 현재도 쓰고 있다. 2005년까지 북경 시내 한복판인 사합원四合院동네에도 캉이 남아 있었으나 이후 모두 철거됐다. 중국의 주거문화 특성상 방 한구석에 침상과 같은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 쓰고 아궁이가 집 안에 있는 구조로, 고구려 초기 유적에서 보이는 구들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와 같은 발달된 구들을 갖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침상 외에서는 난로와 같은 설비로 난방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참고로 갱坑이란 말은 중국에서 형벌 중 하나인 생매장을 뜻하기도 하는 데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사건을 연상시키는 단어기도 하다. 지금도 중국 투르판에 사는 위구르인들의 주거형태에서는 만주 일부지역의 집들과 같이 집 안에 아궁이를 만들고 한쪽에 걸터앉을 수 있게 쪽구들 놓은 것을 볼 수 있다.만주, 우리의 옛 강역인 간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곳에서는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과 조선족의 양식들이 섞여 있는데,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전면 구들(통구들)은 조선족만이 쓰고 있고 만주족과 한족들은 아직도 쪽구들이나 ㄷ자 형태의 변형 구들방을 만들어 쓰고 있다《( 온돌, 그 찬란한 구들문화》 김준봉 지음). 캉은 구들과 달리 방 일부분에만 고래를 만들고, 고래 윗부분을 제외한 다른 부위에서는 신발을 신은 채 생활해 먼지 등 오염원을 처리하기 어려우며 아궁이에 해당하는 화구가 방 안에 있음으로써 화재에 약할뿐 아니라 실내에서 연기 문제 또한 해결하기 어렵다. 1940년대 만주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현규환(오하라 신지)은 캉에 관한 자신의 논문에서 우리의 구들 용어를 한자화했는데 화구(아궁이), 화호로(구들개자리), 화동火洞(고래), 항단(고임돌), 구동狗洞(회굴), 항면자(구들장), 순와자(굴뚝개자리) 등 왜 우리말을 굳이 한자화하려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연암의《열하일기》에서는 굴뚝개자리를 연문견좌烟門犬座로 적고 있다. 일본을 보자. 우리나라 춘천 중도 유적지에서 나타난 1~2세기 움집형태에서 쓰였던 난방법을 일본의 북해도 모요로 유적인 움집에서 볼 수 있으며 구다라(くだら, 큰 나라) 즉, 백제인들이 지었거나 그들에게 배워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시대 대벽건물(땅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우고 벽을 만든 건물)과 같은 건물의 5세기경 유적에서 구들의 형태가 오사카 나라현 가시하라市와 시가현 오츠市에서도 발굴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700년대 정조 때 '일본도 온돌이 일반화돼 너무 많은 나무가 없어진다고 국법으로 온돌을 못 만들게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아 임진란 이후 일본에서도 중세에는 온돌방이 일반화돼 많은 이가 사용했다고 보겠다(정조 31권, 14년(1790년 경술 : 왜국처럼 온돌 만드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내린 뒤에야 논의할 수 있는 일이다. 왜국의 풍토도 지금은 옛날과 달라서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집을 온돌로 꾸민다고 하는데'). 임진란 이후 성행하기 시작한 일본의 온돌은 1700년대 초부터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중국의 캉 일본의 이로리 난방 형태. 방 안에 사각형 구덩이나 테를 두르고 불을 피워 난방을 한다. 독보적인 우리나라의 구들 문화고구려 패망 때까지 수천 년간, 우리 민족은 큰 변란이나 이동 없이 전통적인 문화를 꾸준히 이어 오면서 문명의 발달과 기술의 진보를 가져온 결과 구들과 같이 정착된 문화의 과학화를 이뤘다. 이는 음식문화에서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저장용 발효식품들의 발달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우리가 훨씬 앞서 있음을 봐도 짐작이 간다.어떠한 문화 또는 과학적 발견이 수천 년간 이어지며 발전, 계승됐다는 것은 반드시 그 속에 들어있는 어떤 요소가 인류문명 발달에 기여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구들은 그 독보적인 우수성으로 우리가 세계에 자랑스레 알리고 연구, 발전시킬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며, 실용성에 있어서도 앞으로 더욱 각광받을 수 있는 에너지 과학 분야다. 구들골을 주로 사용하는 돌 종류 구들 시공의 첫 걸음… 구들 재료구들 설비는 모두 자연물만 사용한다. 구들 바닥부터 방바닥까지, 시멘트나 철근 등 인공물은 일절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간혹 유리병을 거꾸로 박아 넣는 경우도 보는데 이는 바람직한 재료의 사용이라고 보기 어렵다. 3×4m 정도의 일반적인 넓이의 구들방을 기준으로 아래와 같은 재료가 들어간다. • 구들돌 : 불에 타거나 깨지지 않는 넓적한 돌이면 된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활용 구들돌이 없다면 요즈음 흔하게 들여오는 현무암 중에서 중국 흑룡강성이나 길림성 돌이 여러 가지 면에서 좋다. 크기가 60×60㎝, 60×40㎝, 60×30㎝, 50×50㎝, 40×40㎝ 등으로 규격화돼 있고 두께는 3㎝, 4㎝, 5㎝가 일반적이다. 5㎝ 두께의 돌이 축열 성능과 견고성에서 적절하다고 본다.예상 소요량보다 20~30% 더 준비해야 이맛돌까지 작업이 된다. 바닥을 두 겹, 세 겹으로 하고자 한다면 거기에 맞춰 소요량을 계산한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지 않았던가! 욕심이 과하지 않은지도 유념할 일이다. 구옥에서 해체된 화강암 구들돌은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은 것으로 준비하되, 예상 소요량보다 50% 이상 준비해 두는 것이 안전하다. 남는 것이 생기면 담장에 쓰거나 바닥에 깔아 써도 좋다. 구들 시공 중에 구들돌이 부족해서 애를 먹은 일이 적지 않다. 넓적한 구들돌 중에서 편마암도 사용되며, 충북 옥천이나 미원 같은 곳의 채석장에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편마암은 부정형의 돌이라 구들장을 만들 때 더욱 수고로운 단점이 있다. 점차 올라가는 인건비를 생각한다면 고려해볼 일이다. 기타 잡석도 있는데 시험으로 불을 피워 보아 터지거나 깨지지 않는 것을 써야 한다. 인터넷에서 '구들돌'을 검색해 적절한 재료를 수습할 수 있으며, 건자재 취급소에서도 정보를 구할 수 있다. • 적벽돌 : 고래의 높이를 30㎝로 할 경우 약 1800장(한 팔레트 반).• 내화벽돌 : 특별히 꼭 써야 하는 재료는 아니지만, 있어서 나쁠 것은 없다. 30~40장 정도 함실, 불목용.• 모래 : 6W 굴삭기 기준 두 바가지. 황토와 섞어 반죽용 모르타르를 만들고, 마감처리(새침) 때도 쓴다.• 황토 : 체로 친 것으로 1톤짜리 두 포. 모르타르용으로 쓰고 구들돌 위 마감작업때도 쓴다.• 마감 미장용 황토 모르타르 : 20㎏짜리 30포 정도. 마감 두께에 따라 조정.• 시멘트 : 3포 정도. 방 밖의 내굴길과 굴뚝개자리 등의 방수.• 마사 황토 : 마사 황토는 새침 후에 올리는 흙(부토)과 고래 바닥 정리할 때 필요하다. 구들장 위에 올리는 흙으로 평균 10㎝ 정도 예정한다면 1톤 조금 넘게 준비한다. 가장 오랜 시간을 몸 가까이에서 접촉하는 바닥이므로 제일 중요한 자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이 구할 수 있는 흙 중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준비하는 세심함이 중요하다. 행여, 밭이나 논 또는 불결한 곳에서 가져온 것으로 시공한다면 두고두고 야릇한 향기에 시달릴 것은 물론, 결코 건강에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할 일이다. 흙마다 맛이나 냄새가 다르다는 것은 대체로 예상할 수 있지만, 비린 맛이나 구린 맛이 나는 것은 독성 성분 때문임은 중요한 체크 포인트가 된다. 구들 시공에 고임돌용 적벽돌과 체로 친 황토가 들어간다. 바닥 부토용으로 준비된 흙에 맥반석, 게르마늄 등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첨가할 수 있다. 혹, 형편이 되어 금붙이건 보석이건 바닥에 묻어 두고 그 위에 눕는다면 도난, 분실의 걱정 없이 보석들이 주는 기氣를 고스란히 받고 살 수 있겠다. 첨가제로 숯을 쓰려면 식용食用도 되는 소나무 숯이 좋겠으나, 한의사들 의견은 마른 체형은 삼가는 게 좋다고 한다. 소금을 쓰려면 천일염을 일단 한 번 볶거나 구워서 써야 좋다. 소금 구울 때 나는 냄새를 맡아 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그리고 아궁이 주물 불문 20호짜리 하나(철물점이나 대형 주방기구 취급점에서 구입 가능), 내굴길용 300㎜ 함석관 또는 이중 주름관 하나, 굴뚝용 200㎜ 함석관 또는 이중 주름관 하나, 굴뚝개자리용으로 100㎜ 정도의 항아리 또는 600㎜ 주름관 하나가 필요하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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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구들 놓기 ③ 구들은 동서양 막론 효과적인 난방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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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11월호 특집 1] 전통 온돌을 계승한 온수 순환식 보일러 바닥난방
- SPECIAL FEATURE 건강하고 쾌적한 겨울나기 주택 만들기 전통 온돌을 계승한 온수 순환식 보일러 바닥난방 두한족열頭寒足熱 원리 반영한 건강성 주거 실내 온도를 높이는 난방의 기원은 인류의 불 사용과 주거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우리 민족은 불을 발견하고 불씨를 보존해 취사와 난방을 하면서 고유하고 독특한 주거 문화유산인 온돌[구들]을 발명했다. 예전 장작, 검불, 말똥 등을 때는 전통 아궁이 온돌이나, 요즘 연탄과 등유, 가스 등을 연료로 한 보일러 온수 순환 온돌이나 모두 바닥난방이란 점에서 변함이 없다. 우리의 바닥난방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살펴보자. 글 사진 윤홍로 기자 전통 온돌은 고래를 켜고 구들장을 덮어 흙을 발라서 방바닥을 만들고 불을 때서 난방하는 것으로, 열전달 메커니즘인 전도, 복사, 대류의 원리를 모두 적절히 활용한 과학적인 난방 방식이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불기운이 고래를 통과하면서[대류] 방바닥에 전달되고[전도], 방바닥의 열기[축열]는 방 전체[복사] 및 거주자의 신체에 전달되며[전도], 방 안에서 따듯한 온기가 하부에 머물 수 있게 저온 방열을 통해 공기의 흐름[대류] 속도를 제어한다. 우리 민족과 온돌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온돌의 발명으로 주거가 땅 위로 올라오면서 정착생활이 이뤄졌고, 그로 인해 가족제도가 성립되고 부족, 민족국가를 형성했다. “우리 한민족은 구들방의 아랫목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공부하거나 자거나 식사하거나 병들거나 간에 구들에 밀착된 생활을 한다. 또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에도 구들에서 죽고, 죽은 뒤에까지 구들에 와서 제사상을 받는다. 구들에서 죽지 아니한 경우를 가장 흉하게 여겨 시신을 구들 위에 들여오지 아니할 만큼, 구들을 아끼고 신성시한다. 그래서 구들에 밀착하여 생활하다 보니 좌식생활 방식이 되고, 이 생활에 적합한 옷으로 품이 넉넉한 한복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_ 리신호 교수(충북대학교 농업생명환경대학 지역건설공학과), <한민족의 난방문화> 중에서 전통 온돌문화와 서구 보일러의 합리적인 결합 1940년대 후반부터 토탄, 유연탄, 무연탄가루 같은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1950년대 이전까지 장작이나 숯을 때는 전통 온돌 바닥 난방이 주류를 이뤘다. 전통 온돌은 아궁이의 용도에 따라 난방과 취사를 겸한 ‘부뚜막식’과 난방 전용 ‘함실식’이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 때 상류층을 중심으로 한 문화주택에서 전통주택의 재래식 온돌과 개량 온돌, 라디에이터, 스토브, 페치카 등을 혼용했지만, 상당수가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온돌로 회귀하기도 했다. 1952년 정부(당시 상공부)에서 산이 황폐해지고 연료 부족 현상이 심각해지자, 가정용 연료로 장작이나 숯에 비해 발열량이 많고 운반과 사용이 편한 구멍탄(19공탄) 사용과 아궁이 개량을 장려했다. 이때부터 부뚜막식 아궁이는 ‘두꺼비집 부뚜막식 연탄 온돌(화덕 고정형)’로, 함실식 아궁이는 ‘레일식 연탄 온돌(화덕 이동형)’로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밤새 무사하셨어요.’ 라는 말이 인사가 됐듯이, 연탄을 사용하면서 연탄가스 중독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연탄가스 중독의 원인은 연탄 온돌이 전통 온돌의 아궁이 후렁이(땔감이 들여지고 연소 불길이 이는 부분) 부분만 바꿨기 때문이다. 전통 온돌은 역류 현상이 많아 구들장 밑의 고래 내부와 부엌에 미처 빠지지 못한 연탄가스가 남고, 그것이 바닥과 벽이 갈라지면 그 틈새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궁여지책으로 개발한 것이 굴뚝 끝에 매다는 가스 배출기였다. 1960년대 연탄가스 중독을 막고 열 손실을 줄이기 위해 연탄 온돌을 개량한 연탄보일러 온수 바닥난방 방식이 등장했다. “보일러 상부 중앙에 연탄을 넣어 물을 40∼60℃ 온수로 만들고 각 방의 패널 코일과 라디에이터에 공급하여 난방을 했다. 냉각된 물은 다시 보일러로 환수, 재가열하여 순환시켰다. 이 보일러는 샤워용 온수도 공급했고, 보일러 덮개를 만들어 취사도 할 수 있었다.”_ 전남일·양세화·홍형옥,《한국 주거의 미시사》, 돌베개 김준봉(국제온돌학회 회장, 북경공업대학 건축성시학원) 교수는 연탄보일러에 대해 우리의 전통 온돌문화와 서구 보일러의 합리적인 결합이라고 설명한다. “온수관이 바닥 고래의 기능을 대신하고 직접 가열 방식에서 온수를 이용한 간접 가열 방식으로 전통 온돌의 직접 가열 방식과 차이가 있었으나, 효율적인 바닥난방을 계승한 일종의 절충 방식이었다. 온수 순환식 바닥난방의 도입과 함께 비로소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가정용 보일러가 등장하기 시작하기 시작했으며, 온수를 순환시키는 파이프 또한 강관에서 동관, 그리고 각종 비닐계 온수 전용 파이프 등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이는 우리의 전통적 온돌문화와 서구에서 유입된 보일러가 합리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_Daum 블로그, 김준봉 교수의 온돌이야기 구들과학이야기 하지만 연탄보일러는 번개탄으로 통하는 착화탄이 등장할 정도로 불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고, 시간에 맞춰 연탄을 갈아줘야 했으며, 연탄재와 가루로 부엌이 지저분해졌다. 또한 1967년 이후 매년 겨울철을 앞두고 연탄 파동이 발생하다시피 했다. 정부에서 연탄 수급이 어려워지자 월동 연료 대책으로 연탄의 가수요 억제와 원활한 공급을 위해 연탄 구매 카드제를 실시할 정도였다. 예전엔 취사와 난방을 겸한 부뚜막 온돌이 주를 이뤘다(左).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지역에선 대부분 등유보일러를 선택한다(右). 1975년 이후 석유가 보일러의 연료로 도입되면서, 기름보일러 시장이 급신장하기 시작했다. 기름보일러는 연탄가스 사고의 완전한 예방과 연탄을 갈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으므로 1980년대 들어서 중산층의 난방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1978∼1981년 2차 석유파동으로 기름값이 크게 오르자, 연탄보일러가 다시 인기를 끌기도 했다. 당시 정부에서 에너지 다원화 정책의 일환으로 가스 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취사 및 난방 연료로 가스가 빠르게 보급됐다.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인 가스보일러는 1982년 ㈜공영토건(현 대성셀틱)에서 수입한 프랑스 샤포토에모리사 제품이다. 그 후 1984년부터 ㈜롯데기공이 처음 가스온수보일러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 가스의 안정적인 수급을 위해 천연가스 전국 공급 환상형 주요 배관망이 완공된 이후 가스보일러가 난방 방식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무엇보다 공해가 거의 없고 고장이 적을 뿐만 아니라 조작이 간편하기 때문이다. 직접 가열식 전통 온돌이나 외부의 별도 보일러를 이용해 온수를 순환시키는 간접 가열식 현대 온돌이나 모두 바닥난방 방식이다. 그래서 요즘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도 온돌방에서 생활한다고 말한다. 바닥난방의 경우 그곳에 접한 신체 부위로부터 열전도에 따라 열이 직접 전달된다. 서 있을 때는 발바닥에서부터, 앉아 있으면 엉덩이나 다리 부위에서부터 따듯함을 느끼게 된다. 동양의학에 두한족열頭寒足熱, 즉 ‘머리는 시원하게 발은 따듯하게’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발밑이 따듯하고 온몸이 쾌적한 온도가 되면 기분이 좋아져 슬슬 잠이 오고 건강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바닥 온도가 낮으면 다리의 혈관이 수축돼 혈액순환이 나빠지고 심한 경우 냉증이 발생한다. 또 발의 냉증은 손 온도에 전달돼 손의 혈액순환 및 피부 온도를 떨어트리기도 한다. 우리 고유의 바닥난방이 실내에서 신발을 신어야만 생활할 수 있는 서구식 대류 난방 방식과 따듯한 느낌이 전혀 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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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11월호 특집 1] 전통 온돌을 계승한 온수 순환식 보일러 바닥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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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구들 놓기 ② 사찰 전당을 4개 아궁이로 데운 사실 놀라워
- 역사서로 배우는 구들 자그마치 천 명의 승려가 들어갈 만큼 큰 건물을 아궁이 네 개로 난방을 했다는 기록에서 전율을 느꼈다. 약 1500년 전에 만든 구들이, 100평이 넘는 큰 방을 네 군데 아궁이에서 불을 넣어 난방을 했다는 말이다. 중국에는 없는 고구려의 독특한 난방 형태에 대해 분명하게 말함으로써 구들의 오리진Origin을 확인시키는 중요한 대목이다. 글쓴이 오홍식 님은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구들 놓는 장인으로 반평생 구들 설치와 연구를 거듭하며 우리 주거문화의 백미白眉구들 문화 보존 및 전파에 힘쓰고 있습니다. 한 번 불을 때면 100일 따듯했다는 '칠불사 아자방亞字房'에 감동받아 구들 문화에 대한 사명감을 갖게 됐으며, 현재 구들문화원 원장이자 평창 황토 구들마을, 전국흙집 짓기 운동 본부 전담 구들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글 오홍식 <(사)한구전통구들협회 구들문화원 원장> 010-3044-8396 http://blog.daum.net/guwdle 지금의 구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전해져 왔으며, 그 실상은 어땠는지 알아보는 것이 제대로 된 구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순서라고 생각한다. 문헌으로 남아 있는 구들 관련 자료는 서유구의《임원경제지》나 《금화 경 독기》, 《산림경제지》, 《거가필용》 등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대표적인 것으로 《열하일기》를 들 수 있다. 조선왕조 중조시대 《열하일기》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은 구들에 관해서 중국식 '캉'이 우리나라 온돌보다 뛰어나다 했으며, 급기야 '서둘러 캉의 제도에 의거해 바꾸는 것이 옳다'고 언급했다.2000년 전에 이미, 한 번 불을 때서 100일 난방을 했다는 우리의 찬란한 구들 문화와 과학은 그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제도적 장치가 없어지면서 고작 방 한쪽에 침상 대신으로 만드는 중국의 캉을 본받아야 한다는 참담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전통문화의 황폐화가 나라의 패망으로 다다른 모습을 보는 듯하다. 해가 갈수록 구들 놓는 법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많다. 전구 각지에서 배우어 온다. 그런데 급한 마음에 속성으로 익히는 것도 좋겠지만 구들의 역사와 과학적 원리를 공부해 자기 것으로 만들면, 열효율을 더욱 높이는 방법도 터득할 수 있다. 역사에 나오는 구들 형태도 다종다양했으니 우리라고 한 가지만 고수하라는 법은 없다. 열하일기를 통해 보는 조선의 구들《열하일기》에 묘사된 우리 구들의 결점 여섯 가지를 보자.1. 구들돌을 올려놓는 고임돌의 진흙 재료가 약하고 부정형의 구들돌을 올려놓기 위해 받치는 작은 돌들 이 부실해 방고래가 꺼지기 쉽다.2. 구들장의 두께가 일정치 않아 고루 따뜻하지 않다.3. 고임돌이 높고 고래가 넓어서 불꽃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4. 담과 벽이 성기고 엷어서 생긴 틈으로 바람이 뚫고 들어와 방 안에 연기가 차고 아궁이로 불길이 거꾸 로 나온다.5. 불목火頂 아래에 불목구멍이 연달아 있지 않기에 불이 멀리까지 넘어가지 못하고 땔나무 끄트머리에 서 맴돈다.6. 방을 말리는 데 땔나무 100단을 쓰고도 열흘 안으로 방에 들어가 살지 못한다. 게다가 굴뚝 만드는 법은 더 허술하다. 굴뚝에 틈이 생기면 한 오라기의 바람도 아궁이의 불을 꺼버릴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 온돌에서는 불이 부엌으로 되나오고 골고루 따뜻하지 못한 것을 염려 하는데 그 잘못은 굴뚝에 있다. 연암은 여기에 덧붙여 여섯 가지 해독을 말한다.1. 잘못된 온돌 때문에 땔감 낭비가 심하다. 땔감과 재물의 태반이 부엌 아궁이 속으로 사라져버린다.2. 땔감이 귀해 한 아름 되는 나무는 100리를 가도 찾지 못한다. 따라서 재목이나 관재로 쓸 나무가 적다.3. 땔감이 귀한 까닭에 산은 헐벗고 황폐해 한 번 큰물이 나면 모래와 진흙이 씻겨 내려가 도랑과 시내에 쌓이고, 논밭을 덮어버린다.4. 땔감이 귀한 까닭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방에 거처하게 되며 남자가 내실에 머물게 되어 《예기禮 記 》의 경계를 어기게 되므로 예의에 어긋난다.5. 여러 날 불을 때지 않으면 온갖 벌레와 쥐가 벽에 구멍을 뚫고, 어느 날 갑자기 불을 때면 하인방까지 불이 달라붙어 집 전체를 잿더미로 만든다.6. 구들을 깔고 방바닥에 장판지를 바르는 데 돈이 많이 들기에 부유한 집이 아니면 쓰지 못한다. 그리고 굴뚝 가까운 부분은 불길이 닿지 못해 얼룩덜룩 썩는다. 사방 한 길 정도를 바꾸고자 장판지 한 장 걷 어울리면 구들장 위에 흙손질한 것이 들고일어나 구들장 전체를 다시 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3년 동안 바꾸지 않으면 재가 고래 속을 메워 구들장이 차갑다. 여러 해 만에 장판을 다시 하면 귀한 물 건을 마구 버리게 된다. 강화도 선원사지 유적 중 동쪽 건물 터의 구들 구조. 선원사는 1245년 몽골 항쟁에 대한 상징의 의미와 함께 지어진 고려시대 사찰로 지금의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맨 처음 만들어져 보관했던 곳으로 알려진다. 2001년 동국대 박물관에서 발굴했다. 연암의 지적을 현대 구들에 비춰보면연암의 시대와 다르지 않게 지금도 많은 곳에서 퇴락한 구들 설비로 비슷한 고통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연암의 지적을 기준으로 현대 구들 속을 들여다보자.1. 구들의 재료와 구조 문제는 현재 올바른 시공으로 고임돌이 무너지거나 구들장이 꺼지게 되는 일은 생 기지 않는다. 과거 일부 가난과 무지의 소산으로 보아야 옳다.2. 구들장 두께의 균일성과 난방의 균등성은 별개의 문제다. 구들돌의 두께가 일정치 않아도 고래의 구조 등으로 고르게 따뜻한 방을 만든다.3. 고임돌 높이 등으로 불꽃이 연결되지 못한다는 말은 잘못된 발상이다. 고임돌이 높고 고래가 넓으면 일반적으로 열효율을 높이기 쉬우며 구들의 수명도 오래가는 등 좋은 점이 많다. 고래의 구조로 해결 되는 문제다.4. 하방 쌓기의 문제인데, 고막이라고도 하는 부위의 시공이 부실해 열기의 유통이 안 되는 문제지만 지 금의 건축에서는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어려운 이야기다. 기초공사에서 간단히 해결된다.5. 부뚜막 아궁이에서 불목 배치가 적절치 못하면 불이 들지 않고 연기를 거꾸로 내뱉는 것은 당연한 일 이다. '바보가 만들어도 아랫목은 따스하다'는 식으로 비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이지 못한 구조의 구들이 대부분이었다는 말이다. 부넘기 또는 불목 조절뿐 아니라 고래의 구조와 개자리 등의 적절한 설비는 이러한 문제를 간단히 해결한다.6. 5번 조항에 해당하는데, 전통 구들의 원칙에 따라 시공하면 문제 되지 않으며 방바닥 마감은 장판지 외에도 좋은 재료들이 얼마든지 개발돼 있다. 굴뚝의 중요성을 지적한 연암의 안목에는 탄복을 금할 수 없다. 더구나 중국의 캉 제도를 칭찬하면서 중국 캉의 구조 중에 굴뚝 개자리[烟門犬座]를 언급한 것은 대단한 식견이다.그런데 자금성은 캉에 불을 피워 난방을 했지만 굴뚝은 없다. 굴뚝을 타고 자객이 들어올 것을 막기 위해 굴뚝 없이 배연했다고 하니 중국에서 굴뚝은 궁궐에서 배척된 반면, 우리는 굴뚝을 국가 문화재로 지정한 유일한 나라가 됐다.여섯 가지 해독에 대한 내용은 기초공사의 부실로 인한 문제와 뒤떨어진 구들 구조의 방고래로 인해 생기는 연료 낭비와 열효율을 지적하는데, 정통 구들방 시공법으로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들이다.땔감으로는 지천에 널린 게 나무고 풀이다. 산속의 나무들은 너무나 빡빡해서 육림育林사업으로 솎아 주는 일이 필요하다. 육림도 하고 화석 연료를 덜 쓰게 하는 땔감 모으기가 권장돼야 한다. 간벌을 한다고 베어 놓은 나무나 자연적으로 썩어 넘어진 것 들이 큰비가 오면 쓸려 내려가 개울을 메우고 다리에 걸려 물길을 막는 통에 해마다 물난리를 겪고 있다. 나라에서 땔감 모으기에 관심을 가진다면 이런 문제는 큰돈 안 들이고 해결된다.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다.2000여 년 전 100일간 난방이 되는 아자방亞字方구들을 만들었고, 1500여 년 전 고구려의 관계사觀鷄寺에는 천여 명의 승려가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을 아궁이 네 개로 덥힐 수 있었던 구들이 어쩌다가 조선왕조 후반기에는 내다 버려야 할 만큼 한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구들의 역사적인 면면을 잠시 짚어보면서 다른 나라에서의 난방 역사를 일별一瞥하는 짬을 내어 보자. 경복궁 집경당 발굴도. 경복궁 구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거의 훼손돼 그 원형을 알 수 없으며 굴뚝만 문화재로 지정됐다. 구들의 역사와 다른 나라의 구들구들 관련 이름에 대해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항방, 갱, 돌 , 난돌, 온방, 온돌, 구돌, 흙구들 등의 표현이 있다. 이외에도 몽고캉, 북지항, 만주캉, 여진캉, 유해캉, 토촹, 창 등 다양한 명칭으로 쓰였다. 한편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묻을 캉', ' 말릴 캉'을 '구들캉'으로 토를 달아 놓았으며, 고려시대에 온돌방을 오실墺室이라고 기록했음을 볼 수 있다. 자칫하면 캉의 종류가 더 많고 더 오래된 것으로 오해할 소지까지 있어 더욱 우리의 구들(온돌)에 대한 위상 정립이 중요하다. 구들에 대해 그 역사적 기원을 찾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로, 언제부터 '집'이라는 말이 있었는지 모르듯 구들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구운 돌'에서 구들이 유래됐다는 설도 있지만, 글쎄다. 구들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AD 500~513년 북위北緯의 력도원麗道元이 쓴 중국의 옛 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제 14권 <포구수조鮑丘水條>의 주석에서 찾을 수 있는데, 중국 북경 동북부 고구려 접경에 위치한 관계사의 구들 형태와 기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찰 안 전당은 높고 넓어서 승려 천 명이 들어갈 수 있다. …바닥은 모두 석판으로 깔았고 지붕은 전부 흙으로 메웠으며 안에는 많은 통로가 있어 마치 경맥이 사방으로 뻗쳐 있는 것 같다. 바깥의 방 옆 네 면에 불을 지펴서 열기가 안으로 들어가 전당 전체를 따뜻하게 한다.' 자그마치 천 명의 승려가 들어갈 만큼 큰 건물을 아궁이 네 개로 난방을 했다는 기록에 전율을 느꼈다. 약 1500년 전에 만든 구들이다. 한 평 넓이에 아홉 사람을 수용한다고 가정했을 때, 100평이 넘는 큰 방을 네 군데 아궁이에서 불을 넣어 난방을 했다는 말이다. 중국에는 없는 고구려의 독특한 난방 형태에 대해 분명하게 말함으로써 구들의 오리진Origin을 확인시키는 중요한 대목이다. 온돌문화의 원조가 어디인지는 역사를 포함한 강역江域의 구분을 주장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외에 《수경주》보다 100여 년 지난 중국 당나라 시대 역사서인 《구당서舊唐書》에도 구들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고려시대 최자崔滋(1181~1260)가 《보한집補閑集》 하권에 '급히 땔나무로 불을 피워 구들을 따듯하게 하고 … 작은 돌을 주워 아궁이를 막고 회를 이겨서 틈을 메우고'라고 기록했다. 아궁이 불문을 막아 방고래 속의 열기가 빠져 나가지 못하게 했다는 내용을 당연한 것으로 써 놓았다. 아궁이를 막아 자연적인 기류의 이동을 차단함으로써 열효율을 극대화한다는 과학적인 표현이다. 열역학을 생활에서 일상화했다는 말이겠다. 《삼국유사》제 1권에서 발해 구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기단 위 중앙 3개의 방 툇간에 구들이 있는데 북쪽 툇간의 것은 한 줄이고 나머지는 두 줄 고래다. 구들 바닥은 방바닥 면적의 1/3 정도로, 고래는 한 자 두께고 세 치 두께의 구들장을 놓았다. 또 서측 방과 툇간의 구들 고래도 마찬가지로 합쳐져 북쪽 방 밖의 굴뚝과 닿아 있다. 굴뚝은 사방 27자 크기다.' 단기 2452년(서기 119년) 신라 지마왕 때 만들어진 아자방 구들은 그 역사가 2000년이며 1931년 일본인 후지타 료사크의 《청구학총》 기고문 <유적으로 보는 구들이야기>(p.233)에 이렇게 기록됐다. ' 신석기시대 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함경북도 웅기 송평동의 구들 유적 발굴 결과 그 구조가 오늘날과 같은 전면구들이다.' 집경당 구들의 ㄹ부. 전면구들의 역사가 2000년이 넘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지금까지 발견된 긴 고래구들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초기철기시대(BC 300년경)로 추정되는 수원시 서둔동 유적에서 볼 수 있는 터널식 구들로 알려졌다. 고구려의 문화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는 발해의 유적 중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에 있는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궁성 침전터에서 발굴된 구들은 고구려 구들과 같이 방안에 아궁이를 두고 아궁이의 방향이 고래와 거의 직각을 이루며, 굴뚝까지 연결된 내굴길이 두 줄로 이뤄져 있다.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고려시대 창건한 선원사禪源寺는 원래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던 절로, 이 사찰 터에서 지금까지 알려졌던 서너 줄 고래와는 달리 열다섯 줄 고래의 형태가 발견됐다. 독특한 형태의 구들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건물은 고임돌의 폭이 35~60㎝, 고임돌 간격은 25~35㎝, 깊이는 40㎝ 정도로 보고됐다《( 동국대박물관 발굴조사 보고서Ⅰ》 p.233, 2003년). 결복굴 교태전 아궁이 궁궐의 구들궁궐 중 ○○당堂과 ○○전殿 등으로 현재 남아 있는 궁전 건축물의 구들 중 연경당 본채의 부뚜막 아궁이를 제외하면 모두 난방만을 위한 함실아궁이고 구들 개자리가 없다. 숯을 연료로 사용했으며 구들장으로는 다듬은 화강암을 썼고, 고임돌은 장대석 등으로 쌓았다. 재료로 일반 석재 외에 전塼 등도 사용됐다. 궁궐의 구들 중에 숯불을 담는 탕이라는 용기를 함실 속에 넣어 난방을 한 탕방구들 양식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이곳에 일본인들이 살면서 그 원형을 훼손해 실제 남아 있는 구들은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는 거의 없고 대부분 창덕궁에서나 볼 수 있다. 경복궁은 지상 건축물만 다시 만들고 구들은 거의 복원하지 않고 굴뚝만 문화재로 지정했다. 기초 바닥에서 이맛돌까지 높이가 100~150㎝, 고임돌은 화강암 다듬은 것이나 전塼 또는 강회벽돌로 만들었으며 함실 바닥은 강회다짐을 했고 3~5개의 굽은 고래가 대표적이다. 구들돌은 주로 다듬은 화강암을 썼고 간혹 운모석이 섞여 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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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구들 놓기 ② 사찰 전당을 4개 아궁이로 데운 사실 놀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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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살림집, 한옥의 뿌리를 찾아서
- 최근 한옥韓屋, 즉 우리 집의 뿌리 찾기에 한창이다. 조선이 근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해방 후엔 미국 중심의 서구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잃어버린 우리 집인 ‘한옥의 정체성 회복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동안 한옥이 널리 보급되지 않는 이유는 춥고 불편하며 비싸다는 인식 때문이다. 따라서 보존해야 할 문화재 전통 한옥과 달리 한옥 고유의 아름다움과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접목한 고성능 저비용 보급형 한옥 개발이 필요하다.글 윤홍로 기자 한옥과 양옥은 이란성 쌍둥이“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으로 지은 집을 양식 건물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조선집·한식집)”_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일제 강점기 이후 양식과 일본식 건축과 구별하여 전래된 전통적인 집을 한옥이라 부르기도 한다.”_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사전적 정의를 보면 한옥은 양옥洋屋이나 일본식 주택과 상대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옥이란 용어가 언제 어떻게 등장했는지 알려면, 먼저 한옥과 상대되는 양옥과 일본식 주택이 이 땅에 지어지게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옥과 양옥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이기 때문이다. 콜로니얼Colonial 양식_17~18세기에 영국, 에스파냐, 네덜란드 등이 정복한 식민지에서 유행한 건축 양식. 본국의 양식을 반영하면서 각지의 풍토에 맞는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했다. 1873년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강력하게 표방해온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1875년 이 틈을 타서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해협에 불법 침입함으로써 조선과 일본 간 포격 사건이 발생(운요호 사건)한다. 1876년 일본은 이 사건을 트집 잡아 조선에 군대를 보내 조선 정부를 무력으로 압박해 부산항과 원산항, 제물포항을 개항해 통상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한다. 그 후 개항장에 외국인의 거류지가 정비되고 서양풍의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바로 한옥과 상대되는 양옥이다. 당시 조선에 지어진 양옥은 서양 본토의 건축물과는 모양이나 형식이 달랐다. 바로 식민지 콜로니얼Colonial 양식이었기 때문이다.개항 초기에 제물포를 중심으로 양옥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후 서양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 또한 조선과의 마찰을 고려해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개화 초기에 ‘서양풍’ 주택을 건립했는데, 이를 ‘양옥’이라 할 수 있다. 서양식주택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조적식 구조이다. 따라서 전통 가구식架構式 목구조와는 크게 달랐다. 양옥은 대부분 벽돌조 건물로 식민지 양식 주택의 일반적인 특징인 중복도 형식을 취했으며, 접객 공간, 홀, 계단의 위치 등에서 건물 주인이나 기술공의 출신국별로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었다. 형태상으로 전면의 베란다, 회랑과 포치, 아르누보식 실내장식, 권위를 상징하는 화려한 장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양옥은 이후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나라 주택의 기능·구조·재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데크, 베란다, 포치, 퍼걸러, 뾰족지붕과, 뻐꾸기창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양옥의 특징은 엄밀히 말해 18세기 식민지 양식이자, 조선에 지어진 양옥의 모습이다. 당시 이 땅에 많은 양옥이 지어지면서 이것과 우리 고유의 전통 가옥과 구별하기 위해 한옥이란 용어가 등장한다.한옥이라는 단어는 융희2년(1907)년에 작성된「가사家舍에 관한 소복문서照覆文書」에도 등장하는 꽤 오래된 이름이다. 돈의문에서 배재학당에 이르는 정동길 주변을 기록한 약도에 영관領館 교당敎堂 학당學堂 등의 용어와 함께 한옥韓屋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영관이나 학당이나 교당이라는 용어는 개항 이후 새롭게 등장한 건물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건물들은 외국인들에 의하여 설립된 기관으로, 그 이름에 건물의 주체와 용도와 성격이 함축되어 있다. 당시에는 ‘주가住家’나 ‘제택第宅’등과 같은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한옥이라는 단어는 정동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새롭게 등장한 건축물을 가리키는 용어들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대한제국의 ‘한韓’과 집을 뜻하는 ‘옥屋’으로 이루어진, ‘대한사람의 살림집’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뜻에서 사용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2)그러면 당시 누가, 왜 양옥을 지은 것일까.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은 조선 왕실을 회유하기 위해 종친과 측근들에게 귀족 작위를 부여했다. 새로운 작위를 받은 사람들은 유럽이나 일본의 귀족과 마찬가지로 머리도 단발을 하고 옷도 양복을 입었다. 그렇게 겉모습은 서양식으로 꾸몄는데 온돌방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생활하려니 아무래도 어색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선 사랑방만 양식으로 바꾸었다가 나중에는 아예 양옥을 지었는데 신분이 귀족이었으니 주택도 유럽의 귀족 주택을 모방하여 지었다. 3) 조선사회가 해체되고 일제 치하에 들어가면서 일반 사가에서도 왕족이 누렸던 호사를 누리게 된 사회상을 반영한 충남 예산의 개량 한옥 문화주택의 또 다른 이름 개량 한옥양옥이 확산되면서 한옥은 비위생적이고 불편한 건축 양식으로 전락한다. 1921년 제중원 의사인 홍석후 씨가 동아일보에 쓴 글이다.조선 사람이 고칠 것은 조선의 가옥 제도이다. 제일로 폐지할 것은 조선의 행랑방이니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그 불결한 행랑방이 있는 것이 비상히 불쾌할 것이며, 행랑방을 지나서 들어서면 안마당에서 안부엌이 보이고, 또는 수채가 보이며 뒷간도 보인다. 이것도 위생에 좋지 못하고, 또 조선 부엌은 매양 안방에 달려있음으로써 안방 뒷문 밖이 부엌이 된다. 그래서 내버린 더러운 것이 그곳에서 썩어 악취를 발할뿐 아니라 겨울이면 그것이 얼어붙었다가 봄이 되면 풀리어 그 습기는 전부 방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이 습기로 인하여 류머티즘 같은 병에 걸리는 일이 많다. 4)일제 강점기에 건강한 삶에 대한 사회적 욕구 해결을 위해 등장한 위생을 매개로 문화주택이 한인 지식인과 일인 중심으로 보급된다. 문화주택은 화양절충和洋折衷 주택이었다. 즉, 일본식 화和와 서양식 양洋을 절충했다는 뜻으로, 1층은 거실과 서재, 식당으로 구성해 소파와 테이블, 식탁을 놓아 서양식으로 꾸미고 2층에는 침실을 두어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꾸몄다. 그런데 메이지시대의 일본 역시 서양의 제국주의를 모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식이라기보다 식민지 양식, 즉 콜로니얼 양식에 가까웠다. 5)당시 건강하고 편리한 삶은 한옥의 개량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인식한 한인 주택업자에 의해 개량 한옥이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도시 한옥이 일제 강점기에 문화주택의 한 유형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서울에서는 주택개발업자들이 개발한 한옥을 일반적으로 ‘개량 한옥’이라 불렀다. 개량 한옥은 전통 한옥과 비슷하지만, 도시의 새로운 주거 생활에 맞도록 개량됐다. 개량 한옥에는 벽돌, 유리, 함석 같은 외국의 건축 자재들을 활용하고, 철근콘크리트 기초를 도입하거나 지붕 아래 현대식 단열재를 넣고 공조 설비를 매립하기도 했다. 당시 유행한 개량 한옥의 설계도 해설이다. 일제 강점기 개량 한옥인 문화주택 설계도 가족 수가 많은 중류 주택이다. 건평 26평 6홉, 가족은 부부 2명, 노인 1명, 아동 1명, 학생 2명, 식모 1명이다. 구조는 기초 콘크리트, 요대부腰帶部는 기와로 하고 주요부는 나무로 한 기와집이다. 서재 겸 응접실은 양풍으로 취급하여 벽과 천장은 양회로 칠한다. 그 외 각 방은 온돌, 내부는 순조선식 현관, 주방, 목욕실엔 콘크리트로 바른다. 중요한 각 방은 남향으로 하여 일광을 충분히 들어오게 하고 노인실은 아동실을 겸한다. 주방은 선반과 음식을 만드는 선반을 설치한다. 6) 콘크리트 숲에 둘러싸인 한옥 문화주택은 해방 후 점점 더 대중화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 많은 주택이 손실됐고, 1960년대부터 재건의 바람이 급격히 불었다.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농촌을 떠나 서울로 몰려드는 이촌향도의 물결이 치던 시기였다. 갑자기 인구가 불어나자 주택 부족이 심각해지면서 문화주택을 지어 파는 집장사가 생겨났다. 이렇게 새로 지어진 문화주택은 대부분 고유의 한옥이 아니라 한옥과 양옥의 절충식 주택이다. 해방 후 서구 물결과 함께 달라진 생활양식은 실용적이면서 심플한 주택 구조를 요구했다. 그 때문에 일부에서 고유의 한옥을 극히 귀족적이며, 유교의 도덕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비과학적이고 비기능적이라고 보았다. 절충식 주택은 서양식에다 로컬 컬러라 하여 고유 한옥의 아름다움을 가미한 형태였다. 한 지붕 밑에 응접실과 거실, 화장실, 목욕탕 등을 함께 설계해 동선을 단축하고, 벽돌과 완자창, 흰돌 등을 사용하고 마루와 온돌을 놓았던 것이다. 토담만 쌓아 그 위에 지붕을 덮은 토담집 1970년대 전국적으로 불어 닥친 새마을운동의 각종 사업 가운데서 주거 문화 개선의 일환인 주택 개량 사업은, 우리 고유의 살림집인 한옥을 허물어 사라지게 하고, 대신 정체불명의 철근콘크리트 아파트로 뒤덮어 버렸다. 또 인구의 도시 집중과 주택난으로 아파트 신축 경향이 부쩍 늘어났다. 이러한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과 복부인의 투기에 힘입어 아파트 붐이 일면서 아파트 공화국이니 아파트 문화니 하는 말이 생겨났다. 당시 한옥이 콘크리트 숲에 밀려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건축가도 적잖았다.우리의 주생활은 수천 년 동안 이어 내려온 조상의 혈통과 맥박을 느낄 수 있는 민족의 슬기와 마음가짐의 표상이다. 비록 벽촌의 모옥삼간茅屋三間이라도 소박하고 자연과 합일되는 민간 건축의 아름다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근래에 서구 기계문명의 무비판적인 애용과 경제발전의 세찬 물결 때문에 한옥의 가치가 경시되고 있고 심지어 멀지 않아 자취마저 찾아보기 어렵게 될 것이라는 기우마저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_윤장섭 건축가, 경향신문, 1978 한민족이 알뜰히 가꾸어온 주생활 양식엔 민족의 얼이 간직돼 있다. 더욱이 온돌문화란 세계에 유례없는 주생활 방식이어서 시간에 따라 공간의 성격을 달리하고 계절감에 민감한 삶의 즐거움을 안겨다 준다. 대청의 대들보와 서까래가 연출하는 공간 구성은 우리만이 간직한 격조 높은 예술의 극치이며 민화와 사군자 등을 문틀에 배접하여 완자창과 겹창으로 흘러내리는 곡면을 사뿐히 받힌 초가지붕의 운치는 그 위에 올린 박이나 고추의 색을 빼고도 전 세계에 으뜸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의 보존 내지는 복원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민족 숙원사업이라 하겠다. _김중업 건축가, 동아일보, 1981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얹고 귀를 맞추어 층층이 얹고, 그 틈을 흙으로 메운 귀틀집 일정 간격으로 자른 원목과 흙으로 쌓아 올린 목심집 한옥 당대 새 지평을 열다한옥은 1990년대 들어 삶의 질이 나아지면서 가족의 건강을 위한 자연과 어우러진 생태적인 주거 공간으로 황토집, 개량 한옥, 현대 한옥 등 다양한 이름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생태 건축이라 하여 구조체(뼈대) 없이 황토벽돌로만 지은 집, 또 귀틀집이나 목심집 등도 지어졌다. 이러한 구조의 집은 나무와 흙이 수축하면서 틈새가 발생해 단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현대 한옥, 즉 황토집은 으레 그런 것이거니 하는 편견이 자리했다. 민간 중심으로 현대인의 생활양식에 맞춰 지어진 현대 한옥 2000년대 들어서 한스타일韓Style 바람이 불면서 전통 한옥을 고집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 한옥은 전통 한옥이라기보다 한식韓式과 양식洋式을 접목한 개량 또는 절충 한옥에 가까웠다. 이들 한옥은 뼈대와 지붕을 짜는 방식은 전통에 근접하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서 현대인의 삶을 담기엔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무거운 지붕으로 인해 부담스러워 보이는 외양, 기능성과 실용성이 떨어지는 공간구성, 나무기둥과 흙벽 사이의 틈, 전망 및 단열과 관계된 창호, 난방 방식, 주방과 화장실의 기능적인 마감 문제 등 현대인의 요구를 담아내기엔 부적합한 요소들이 많았다. 7) 2010년대 들어 한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한옥을 살림집으로 선호했다. 하지만, 한옥은 춥고 불편하다는 인식으로 보급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정부는 국가한옥센터를 중심으로 한옥 활성화를 위한 신한옥 모델을 연구하고, 한옥 등 건축 자산을 보전·활용하거나 미래의 건축 자산을 조성하기 위한「한옥 등 건축 자산의 진흥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국가한옥센터는 “신한옥을 한국의 전통적인 목구조 방식과 외관을 기본으로 하되, 복합적인 구조 방식과 혁신적인 시공 방식, 성능 향상된 재료 등으로 구축된 건물”로 정의한다. 그리고 신한옥의 필수 조건으로 “현재 한옥이 널리 사용되지 않는 이유로 설비로 인한 생활의 불편, 유지 관리의 어려움, 신축에 필요한 높은 비용으로 조사됐다”면서 “현대의 새로운 한옥은 이를 반영해 한옥의 설계 및 시공을 현대화, 산업화, 대중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한다.최근 신도시와 뉴타운에도 한옥마을을 건립하는 등 신한옥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신한옥이 기존의 한옥이 가진 장점을 살리면서 현대 생활에 필요한 요구를 계속 수용해 간다면, 신한옥에 대한 높은 관심과 좋은 반응은 더욱 증대될 전망이다. 정부 주도로 전통적인 목구조 방식과 외관을 기본으로 하되, 복합적인 구조 방식과 혁신적인 시공 방식, 성능 향상된 재료 등으로 구축된 신한옥 참고문헌: 1)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2) 임창복, 돌베개. 〈한옥의 정의와 개념 정립〉, 송인호.) 3) 5)《집에 들어온 인문학》, 서운영, 들녘. 4) 홍석후, 동아일보 1921. 6) 김윤기, 동아일보, 1930. 7) 《황토집 바로 짓기》, 이동일, 전우문화사 [살아 숨쉬는 건강 주택, 한옥]01 우리의 살림집, 한옥의 뿌리를 찾아서02 옛 전통 마을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은평한옥마을03 법규로 살펴본 한옥 건축 기준04 단아한 멋과 품위를 즐기다! 강릉오죽한옥마을05 북촌 근대한옥과 사랑에 빠진 데이비드 킬번06 한옥 대중화를 위해 앞서가는‘기라성한옥’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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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살림집, 한옥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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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9월호 특집1 살아 숨쉬는 건강 주택 한옥] 우리의 살림집, 한옥의 뿌리를 찾아서
- 우리의 살림집, 한옥의 뿌리를 찾아서 최근 한옥韓屋, 즉 우리 집의 뿌리 찾기에 한창이다. 조선이 근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해방 후엔 미국 중심의 서구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잃어버린 우리 집인 ‘한옥의 정체성 회복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동안 한옥이 널리 보급되지 않는 이유는 춥고 불편하며 비싸다는 인식 때문이다. 따라서 보존해야 할 문화재 전통 한옥과 달리 한옥 고유의 아름다움과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접목한 고성능 저비용 보급형 한옥 개발이 필요하다. 글 윤홍로 기자 한옥과 양옥은 이란성 쌍둥이 “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으로 지은 집을 양식 건물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조선집·한식집)”_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일제 강점기 이후 양식과 일본식 건축과 구별하여 전래된 전통적인 집을 한옥이라 부르기도 한다.”_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전적 정의를 보면 한옥은 양옥洋屋이나 일본식 주택과 상대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옥이란 용어가 언제 어떻게 등장했는지 알려면, 먼저 한옥과 상대되는 양옥과 일본식 주택이 이 땅에 지어지게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옥과 양옥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이기 때문이다. 1873년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강력하게 표방해온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1875년 이 틈을 타서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해협에 불법 침입함으로써 조선과 일본 간 포격 사건이 발생(운요호 사건)한다. 1876년 일본은 이 사건을 트집 잡아 조선에 군대를 보내 조선 정부를 무력으로 압박해 부산항과 원산항, 제물포항을 개항해 통상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한다. 그 후 개항장에 외국인의 거류지가 정비되고 서양풍의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바로 한옥과 상대되는 양옥이다. 당시 조선에 지어진 양옥은 서양 본토의 건축물과는 모양이나 형식이 달랐다. 바로 식민지 콜로니얼Colonial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개항 초기에 제물포를 중심으로 양옥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후 서양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 또한 조선과의 마찰을 고려해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개화 초기에 ‘서양풍’ 주택을 건립했는데, 이를 ‘양옥’이라 할 수 있다. 서양식주택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조적식 구조이다. 따라서 전통 가구식架構式 목구조와는 크게 달랐다. 양옥은 대부분 벽돌조 건물로 식민지 양식 주택의 일반적인 특징인 중복도 형식을 취했으며, 접객 공간, 홀, 계단의 위치 등에서 건물 주인이나 기술공의 출신국별로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었다. 형태상으로 전면의 베란다, 회랑과 포치, 아르누보식 실내장식, 권위를 상징하는 화려한 장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양옥은 이후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나라 주택의 기능·구조·재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 콜로니얼Colonial 양식_17~18세기에 영국, 에스파냐, 네덜란드 등이 정복한 식민지에서 유행한 건축 양식. 본국의 양식을 반영하면서 각지의 풍토에 맞는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했다. 데크, 베란다, 포치, 퍼걸러, 뾰족지붕과, 뻐꾸기창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양옥의 특징은 엄밀히 말해 18세기 식민지 양식이자, 조선에 지어진 양옥의 모습이다. 당시 이 땅에 많은 양옥이 지어지면서 이것과 우리 고유의 전통 가옥과 구별하기 위해 한옥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한옥이라는 단어는 융희2년(1907)년에 작성된「가사家舍에 관한 소복문서照覆文書」에도 등장하는 꽤 오래된 이름이다. 돈의문에서 배재학당에 이르는 정동길 주변을 기록한 약도에 영관領館 교당敎堂 학당學堂 등의 용어와 함께 한옥韓屋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영관이나 학당이나 교당이라는 용어는 개항 이후 새롭게 등장한 건물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건물들은 외국인들에 의하여 설립된 기관으로, 그 이름에 건물의 주체와 용도와 성격이 함축되어 있다. 당시에는 ‘주가住家’나 ‘제택第宅’등과 같은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한옥이라는 단어는 정동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새롭게 등장한 건축물을 가리키는 용어들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대한제국의 ‘한韓’과 집을 뜻하는 ‘옥屋’으로 이루어진, ‘대한사람의 살림집’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뜻에서 사용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2) 그러면 당시 누가, 왜 양옥을 지은 것일까.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은 조선 왕실을 회유하기 위해 종친과 측근들에게 귀족 작위를 부여했다. 새로운 작위를 받은 사람들은 유럽이나 일본의 귀족과 마찬가지로 머리도 단발을 하고 옷도 양복을 입었다. 그렇게 겉모습은 서양식으로 꾸몄는데 온돌방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생활하려니 아무래도 어색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선 사랑방만 양식으로 바꾸었다가 나중에는 아예 양옥을 지었는데 신분이 귀족이었으니 주택도 유럽의 귀족 주택을 모방하여 지었다. 3) 문화주택의 또 다른 이름 개량 한옥 양옥이 확산되면서 한옥은 비위생적이고 불편한 건축 양식으로 전락한다. 1921년 제중원 의사인 홍석후 씨가 동아일보에 쓴 글이다. 조선 사람이 고칠 것은 조선의 가옥 제도이다. 제일로 폐지할 것은 조선의 행랑방이니 손님이 찾아오더라도 그 불결한 행랑방이 있는 것이 비상히 불쾌할 것이며, 행랑방을 지나서 들어서면 안마당에서 안부엌이 보이고, 또는 수채가 보이며 뒷간도 보인다. 이것도 위생에 좋지 못하고, 또 조선 부엌은 매양 안방에 달려있음으로써 안방 뒷문 밖이 부엌이 된다. 그래서 내버린 더러운 것이 그곳에서 썩어 악취를 발할뿐 아니라 겨울이면 그것이 얼어붙었다가 봄이 되면 풀리어 그 습기는 전부 방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이 습기로 인하여 류머티즘 같은 병에 걸리는 일이 많다. 4) 일제 강점기에 건강한 삶에 대한 사회적 욕구 해결을 위해 등장한 위생을 매개로 문화주택이 한인 지식인과 일인 중심으로 보급된다. 조선사회가 해체되고 일제 치하에 들어가면서 일반 사가에서도 왕족이 누렸던 호사를 누리게 된 사회상을 반영한 충남 예산의 개량 한옥 일제 강점기 개량 한옥인 문화주택 설계도 문화주택은 화양절충和洋折衷 주택이었다. 즉, 일본식 화和와 서양식 양洋을 절충했다는 뜻으로, 1층은 거실과 서재, 식당으로 구성해 소파와 테이블, 식탁을 놓아 서양식으로 꾸미고 2층에는 침실을 두어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꾸몄다. 그런데 메이지시대의 일본 역시 서양의 제국주의를 모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식이라기보다 식민지 양식, 즉 콜로니얼 양식에 가까웠다. 5) 당시 건강하고 편리한 삶은 한옥의 개량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인식한 한인 주택업자에 의해 개량 한옥이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도시 한옥이 일제 강점기에 문화주택의 한 유형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서울에서는 주택개발업자들이 개발한 한옥을 일반적으로 ‘개량 한옥’이라 불렀다. 개량 한옥은 전통 한옥과 비슷하지만, 도시의 새로운 주거 생활에 맞도록 개량됐다. 개량 한옥에는 벽돌, 유리, 함석 같은 외국의 건축 자재들을 활용하고, 철근콘크리트 기초를 도입하거나 지붕 아래 현대식 단열재를 넣고 공조 설비를 매립하기도 했다. 당시 유행한 개량 한옥의 설계도 해설이다. 가족 수가 많은 중류 주택이다. 건평 26평 6홉, 가족은 부부 2명, 노인 1명, 아동 1명, 학생 2명, 식모 1명이다. 구조는 기초 콘크리트, 요대부腰帶部는 기와로 하고 주요부는 나무로 한 기와집이다. 서재 겸 응접실은 양풍으로 취급하여 벽과 천장은 양회로 칠한다. 그 외 각 방은 온돌, 내부는 순조선식 현관, 주방, 목욕실엔 콘크리트로 바른다. 중요한 각 방은 남향으로 하여 일광을 충분히 들어오게 하고 노인실은 아동실을 겸한다. 주방은 선반과 음식을 만드는 선반을 설치한다. 6) 콘크리트 숲에 둘러싸인 한옥 문화주택은 해방 후 점점 더 대중화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 많은 주택이 손실됐고, 1960년대부터 재건의 바람이 급격히 불었다.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농촌을 떠나 서울로 몰려드는 이촌향도의 물결이 치던 시기였다. 갑자기 인구가 불어나자 주택 부족이 심각해지면서 문화주택을 지어 파는 집장사가 생겨났다. 이렇게 새로 지어진 문화주택은 대부분 고유의 한옥이 아니라 한옥과 양옥의 절충식 주택이다. 해방 후 서구 물결과 함께 달라진 생활양식은 실용적이면서 심플한 주택 구조를 요구했다. 그 때문에 일부에서 고유의 한옥을 극히 귀족적이며, 유교의 도덕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비과학적이고 비기능적이라고 보았다. 절충식 주택은 서양식에다 로컬 컬러라 하여 고유 한옥의 아름다움을 가미한 형태였다. 한 지붕 밑에 응접실과 거실, 화장실, 목욕탕 등을 함께 설계해 동선을 단축하고, 벽돌과 완자창, 흰돌 등을 사용하고 마루와 온돌을 놓았던 것이다. 토담만 쌓아 그 위에 지붕을 덮은 토담집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얹고 귀를 맞추어 층층이 얹고, 그 틈을 흙으로 메운 귀틀집 일정 간격으로 자른 원목과 흙으로 쌓아 올린 목심집 1970년대 전국적으로 불어 닥친 새마을운동의 각종 사업 가운데서 주거 문화 개선의 일환인 주택 개량 사업은, 우리 고유의 살림집인 한옥을 허물어 사라지게 하고, 대신 정체불명의 철근콘크리트 아파트로 뒤덮어 버렸다. 또 인구의 도시 집중과 주택난으로 아파트 신축 경향이 부쩍 늘어났다. 이러한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과 복부인의 투기에 힘입어 아파트 붐이 일면서 아파트 공화국이니 아파트 문화니 하는 말이 생겨났다. 당시 한옥이 콘크리트 숲에 밀려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건축가도 적잖았다. 우리의 주생활은 수천 년 동안 이어 내려온 조상의 혈통과 맥박을 느낄 수 있는 민족의 슬기와 마음가짐의 표상이다. 비록 벽촌의 모옥삼간茅屋三間이라도 소박하고 자연과 합일되는 민간 건축의 아름다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근래에 서구 기계문명의 무비판적인 애용과 경제발전의 세찬 물결 때문에 한옥의 가치가 경시되고 있고 심지어 멀지 않아 자취마저 찾아보기 어렵게 될 것이라는 기우마저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_윤장섭 건축가, 경향신문, 1978 한민족이 알뜰히 가꾸어온 주생활 양식엔 민족의 얼이 간직돼 있다. 더욱이 온돌문화란 세계에 유례없는 주생활 방식이어서 시간에 따라 공간의 성격을 달리하고 계절감에 민감한 삶의 즐거움을 안겨다 준다. 대청의 대들보와 서까래가 연출하는 공간 구성은 우리만이 간직한 격조 높은 예술의 극치이며 민화와 사군자 등을 문틀에 배접하여 완자창과 겹창으로 흘러내리는 곡면을 사뿐히 받힌 초가지붕의 운치는 그 위에 올린 박이나 고추의 색을 빼고도 전 세계에 으뜸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의 보존 내지는 복원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민족 숙원사업이라 하겠다. _김중업 건축가, 동아일보, 1981 한옥 당대 새 지평을 열다 한옥은 1990년대 들어 삶의 질이 나아지면서 가족의 건강을 위한 자연과 어우러진 생태적인 주거 공간으로 황토집, 개량 한옥, 현대 한옥 등 다양한 이름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생태 건축이라 하여 구조체(뼈대) 없이 황토벽돌로만 지은 집, 또 귀틀집이나 목심집 등도 지어졌다. 이러한 구조의 집은 나무와 흙이 수축하면서 틈새가 발생해 단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현대 한옥, 즉 황토집은 으레 그런 것이거니 하는 편견이 자리했다. 2000년대 들어서 한스타일韓Style 바람이 불면서 전통 한옥을 고집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 한옥은 전통 한옥이라기보다 한식韓式과 양식洋式을 접목한 개량 또는 절충 한옥에 가까웠다. 이들 한옥은 뼈대와 지붕을 짜는 방식은 전통에 근접하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서 현대인의 삶을 담기엔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무거운 지붕으로 인해 부담스러워 보이는 외양, 기능성과 실용성이 떨어지는 공간구성, 나무기둥과 흙벽 사이의 틈, 전망 및 단열과 관계된 창호, 난방 방식, 주방과 화장실의 기능적인 마감 문제 등 현대인의 요구를 담아내기엔 부적합한 요소들이 많았다. 7) 민간 중심으로 현대인의 생활양식에 맞춰 지어진 현대 한옥 정부 주도로 전통적인 목구조 방식과 외관을 기본으로 하되, 복합적인 구조 방식과 혁신적인 시공 방식, 성능 향상된 재료 등으로 구축된 신한옥 2010년대 들어 한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한옥을 살림집으로 선호했다. 하지만, 한옥은 춥고 불편하다는 인식으로 보급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정부는 국가한옥센터를 중심으로 한옥 활성화를 위한 신한옥 모델을 연구하고, 한옥 등 건축 자산을 보전·활용하거나 미래의 건축 자산을 조성하기 위한「한옥 등 건축 자산의 진흥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국가한옥센터는 “신한옥을 한국의 전통적인 목구조 방식과 외관을 기본으로 하되, 복합적인 구조 방식과 혁신적인 시공 방식, 성능 향상된 재료 등으로 구축된 건물”로 정의한다. 그리고 신한옥의 필수 조건으로 “현재 한옥이 널리 사용되지 않는 이유로 설비로 인한 생활의 불편, 유지 관리의 어려움, 신축에 필요한 높은 비용으로 조사됐다”면서 “현대의 새로운 한옥은 이를 반영해 한옥의 설계 및 시공을 현대화, 산업화, 대중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최근 신도시와 뉴타운에도 한옥마을을 건립하는 등 신한옥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신한옥이 기존의 한옥이 가진 장점을 살리면서 현대 생활에 필요한 요구를 계속 수용해 간다면, 신한옥에 대한 높은 관심과 좋은 반응은 더욱 증대될 전망이다. 참고문헌: 1)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2) 임창복, 돌베개. 〈한옥의 정의와 개념 정립〉, 송인호.) 3) 5)《집에 들어온 인문학》, 서운영, 들녘. 4) 홍석후, 동아일보 1921. 6) 김윤기, 동아일보, 1930. 7) 《황토집 바로 짓기》, 이동일, 전우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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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9월호 특집1 살아 숨쉬는 건강 주택 한옥] 우리의 살림집, 한옥의 뿌리를 찾아서
전원생활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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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펜션] 몸은 가벼이 마음은 편하니 누이다
- 몸은 가벼이 마음은 편하니 누이다 매서운 북서풍도 잠시 머물다 조용히 물러나는 서귀포 중산간지역. 조용히 새소리만 울려 퍼지는 이곳에 아담한 갤러리가… 아니 펜션이 있다. 두 채의 건물을 오로지 손님 한 팀만을 위해 독채로 운영하는 ‘밀크인 제주’ 펜션이다. 글과 사진 백홍기 취재협조 밀크인 제주 www.milkinjeju.com HOUSE NOTE DATA 위치 제주도 서귀포시 분토왓로 대지면적 659.39㎡(199.81평) 건축면적 99.36㎡(30.10평) 연면적 120.02㎡(36.36평) 지하 20.66㎡(6.26평) 1층 99.36㎡(30.10평) 건폐율 15.07% 용적률 15.07% 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 용도 자연녹지지역 설계기간 2014년 5월 ~ 2014년 11월 공사기간 2014년 12월 ~ 2015년 09월 공사비용 2억 6천만 원 MATERIAL 외부마감 지붕 - 제물방수 위 우레탄 마감 외벽 - 노출콘크리트, 적삼목 사이딩, 탄화 코르크보드 내부마감 외벽 - 친환경 페인트, 자기질 타일 천장 - 친환경 페인트 바닥 - 천연 입체 마루(헤링본), 바닥 - 도자기 타일 창호 - 시스템 창호(엔썸) 단열재 지붕 - 가등급 2종1호1 150T 외벽 - 가등급 2종1호1 100T 바닥 - 가등급 2종1호1 150T 주방기구 하이그로시(신성싱크) 위생기구 유로젠 모던(아메리칸 스텐다드) 설계 아키포럼건축사사무소 시공 건축주 직영 010-5221-9321 www.milkinjeju.com 밀크인 제주(MILK in Jeju). 여기서 M.I.L.K는 Moments of Intimacy, Laughter and Kinship(친밀감과 웃음, 가족애의 순간들)의 약자다. M.I.L.K 프로젝트는 1999년 지오프 블랙웰이 뉴질랜드 M.I.L.K. 출판사에 사진공모전을 제안해 164개국에서 1만 7천 명의 사진가가 참여한 사상 최대 사진 프로젝트다. 이들 사진가에 의해 모인 4만여 장의 출품작을 FRIENDSHIP, LOVE, FAMILY라는 세 가지 주제로 각각 100장씩 추려내 사진집으로 출판했다. 사람들의 사랑이 담긴 다양한 순간을 남기기 위해 진행한 M.I.L.K 프로젝트는 사진을 좋아하는 펜션지기 이재선 씨의 마음을 울린 작업이기도 하다. 펜션 이름도 프로젝트 이름에서 따왔고 갤러리에 전시한 사진도 친구, 사랑, 가족이라는 3개의 테마를 압축해 놓은 것이다. 갤러리로 꾸민 안거리 복도는 사랑을 주제로 한 M.I.L.K 프로젝트 사진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으로 전시했다. 조명, 헤링본 바닥, 높은 천장은 고급 갤러리 느낌을 그대로 전해준다. 침실은 전면 창을 설치해 서귀포 시내의 야경과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침대 헤드에 설치한 탄화 코르크 보드 파티션은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 욕실과 분리하면서 개방감을 동시에 만족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작 「키스」로 장식한 문손잡이. 가볍게 밀고 당기면 스르륵 열린다. 절제에서 단순미美 찾아 덜고, 또 덜어냈다. 불편과 거추장스러움은 덜어내고 단순함을 담아낸 미니멀리즘minimalism 개념으로 지었다. 남과 유사하거나 유행을 좇아 건물을 짓는 건 싫다고 했다. 나만의 것, 여기서만 누릴 수 있는 멋과 편안함을 찾았다고 한다. “건축도 유행이 있습니다. 최근 모던 스타일에 깔끔한 징크나 스타코를 많이 사용하죠. 밀크인 제주는 단순한 박스 형태에 적삼목 사이딩과 개방창의 황금분할비를 적용했어요. 따뜻하고 심플하면서 지속할 수 있는 아름다운 형태를 생각한 거죠. ‘Less is More(단순함이 가장 아름답다)’라는 것과 친환경 콘셉트로 박스 형태의 건축물을 제주도 전통 배치 형태인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로 재해석해 ㄱ자로 배치했어요.” 건물은 주변 자연경관을 거스르지 않는 높이의 단층으로 계획했다. 천연 코르크 보드로 제주도 현무암의 색감과 질감을 재현해 친근하면서 따듯한 느낌이 들도록 내·외부 포인트 마감재로 사용했다. 들어가고 나옴이 없는 밋밋한 입면이라 자칫 삭막해 보일 수 있는 건물을 적삼목과 코르크를 적절하게 사용해 절제된 단순미에 우아함을 갖춘 갤러리처럼 완성했다. 무엇보다 건물의 완성도를 높인 건 두 메스를 연결한 전이공간이다. 이 공간 하나로 바라보는 방향과 각도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보이며, 호기심과 긴장감을 담아냈다. 기능적으로도 중정과 대청마루, 내·외부 동선의 완충 역할을 하는 곳으로 건물의 핵심적인 공간이다. 따뜻한 물을 채운 스파에 몸을 담그고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쌓인 피로는 금세 풀릴 것만 같다. 오픈된 구조에 급탕을 사용해도 열 회수 환기장치를 설치했기 때문에 습기가 차지 않고 늘 쾌적한 실내 환경을 유지한다. 제주의 느낌을 담은 석제타일로 모던 스타일을 꾸민 샤워실은 천장을 높여 세련되고 시원한 느낌이 든다. 진열 부스에 진열된 샤워용품은 오가닉스 제품이라 피부가 민감한 사람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쉬고 누리는 공간 안거리 현관에 들어서면 M.I.L.K 프로젝트 전시 서문과 옆으로 전시된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목적은 잊고 현실에 빠져 잠시 감상에 젖는다. 왼쪽 반대편 벽은 사진에서 사용하는 그레이카드와 같은 농도의 회색으로 벽을 칠해 사진의 집중도를 높였다. 높은 천장과 헤링본 무늬의 바닥으로 고급 갤러리를 연상케 하는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몇 권의 사진집이 감상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감상을 마치고 뒤돌아보며 어느덧 거실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실은 주방과 공유하는 공간이다. 원목의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주방과 거실이 나뉜다. 3m의 층높이로 시원한 공간감을 확보한 거실은 바닥부터 천정까지 이어진 전면 창의 개방감으로 자연을 내부로 끌어들였다. 데크 너머로 펼쳐진 서귀포 앞바다의 경관은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을 선사한다. 여행의 기본은 쉼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할 때 비로소 여행의 참맛을 안다. 만약 여행이 일상의 연속으로 마친다면 돌아오는 발걸음 가볍지 않을 것이다. 펜션지기 이재선 씨가 주방에 신경 쓴 점도 “가급적이면 일을 줄이고 쉬자”였다. “집에서 하던 설거지를 밖에서도 하려면 짜증날 때 많죠. 그래서 식기세척기를 설치했어요. 밥솥도 놓지 않았어요. 전자레인지 있으니 간단하게 햇반 사다 먹으면 되죠. 이곳에선 그저 쉬고 누리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했어요.” 거실은 3m의 층높이에 맞춘 넓은 전면 창으로 풍경을 끌어들여 개방감을 확장하고, 데크 너머로 제주 앞바다의 경관이 펼쳐져 가슴 속까지 시원한 느낌을 선사한다. 거실과 오픈형으로 계획한 주방도 풍광을 마음껏 누리는 구조다. 주방은 동선을 최소화하는 구조로 주방기기를 배치했고, 가사 일을 줄이기 위해 밥솥을 비치하지 않고, 식기세척기를 놔뒀다. 싱크대 하부장엔 구급상자가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깔끔하고 쾌적한 공간에 건강 더해 침실은 주방 뒤 복도로 돌아가면 나온다. 하나의 공간에 모든 것을 담고 파티션으로 공간을 나눴다. 먼저, 침대에 누우면 서귀포 야경과 아침에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침대 뒤에 설치한 스파와 샤워시설도 전면 창을 통해 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피로를 풀기에 좋은 구조다. 침실에 오픈된 욕조와 샤워실에 의해 습기가 발생할 것 같지만, 열 회수 환기장치를 설치해 제주 중산간지역의 맑은 공기를 실내로 끌어들여 항상 쾌적함을 유지한다. 건물 전체를 대여하므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것도 큰 장점이다. 그래서 아담한 온돌방으로 만든 밖거리 역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밖거리는 온돌방이라 바닥에 담요를 깔아 놨다. 사각거림을 느낄 수 있는 깔끔한 담요에 의해 공간이 더욱 포근하고 쾌적하게 다가온다. 정갈한 식자재, 싱크대 한편에 비치해둔 구급상자, 오가닉스 샴푸와 비누, 화장대 코너에 놓아둔 면봉 등 어느 펜션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심함이 요소요소에 가득하다. 이러한 세심함은 안주인 솜씨다. 조경설계 전문가였던 남편이 전체 인테리어와 방향을 잡고 소소한 부분은 아내가 담당하며 부부가 함께 일궈낸 쉼터다. 잘살고 싶어 4년 전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 정착한 부부가 그들만의 즐거움을 담은 공간을 만든 것이다. 아직 판단하기엔 이르지만, 부부의 해맑은 표정을 본다면, 분명 잘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리라. 온돌구조의 밖거리는 아담하고 아늑한 구조의 방이다. 침대를 불편하게 여기는 세대나 찜질방의 뜨끈한 기운을 느끼며 쉬고 싶은 이에게 적합하다. 두 메스를 연결한 전이공간 중정은 바라보는 방향과 각도에 따라 건물의 다양한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중정과 대청마루, 내·외부 동선의 완충 역할을 하는 곳으로 건물의 핵심적인 공간이다. 문의 밀크인 제주 T 010-5221-9321 W www.milkinje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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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펜션] 몸은 가벼이 마음은 편하니 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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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펜션으로 자리 잡은 가평 임산계곡의 '하늘 마루' 펜션
- 강원도 가평군에 위치한 명지산(明智山, 1267m)은 웅장한 산세와 울창한 숲을 자랑하며 계곡마다 사시사철 맑은 물이 끊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가평 시내를 벗어나 목동삼거리에서 연인산 쪽으로 꺾어 들면 멀리 명지산과 화악산 계곡에서 발원한 물들이 굽이굽이 다가든다. 바라보이는 풍경들마다 심산 유곡에 들어 온 느낌을 준다. 그만큼 신선하고 청정한 경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도계 방향으로 직진하다가 ‘논남’ 이정표를 따라 왼쪽 좁은 길로 접어들면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말 그대로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임산계곡이다. 처녀림에 가까운 임산폭포를 품은 명지산의 감춰진 계곡이다. 이 계곡 막다른 곳에 ‘하늘마루’ 펜션이 비밀의 장원처럼 숨겨져 있다. 건축정보 ·위 치 :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부 지 면 적 : 1800평 ·연 면 적 : 157평(1층 - 68평, 2층 - 89평) ·건 축 형 태 : 철근콘크리트조 ·외벽마감재 : 드라이비트 ·내벽마감재 : 실크벽지 ·단 열 재 : 스티로폼 100㎜ ·천 장 재 : 실크벽지, 루바 ·지 붕 재 : 아스팔트 슁글 ·바 닥 재 : 강화마루 ·창 호 재 : 국내산 시스템 창호 ·난 방 형 태 : 심야전기, 태양열(온수) ·벽 난 로 : 노출형 벽난로 ·정 화 조 : 1일 24톤 ·식 수 공 급 : 지하수(250m) ·시 공 기 간 : 2004년 8월 ∼ 2005년 3월 ·건 축 비 용 : 평당 300만 원 설 계 : 정품건축사사무소 031-582-7076 시 공 자 : 이태기 011-262-0145 비포장 계곡 길을 한참 올라가자, 아홉 살 먹은 진돗개 꽃님이가 짖으며 뛰어 나온다. 더 이상 올라갈 길이 없는 그곳에 ‘하늘마루’ 펜션이 하얀 속살을 보이며 숲 그늘에 숨어 있다. 펜션을 도맡아 경영하는 이상현 사장(60) 부부가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든든한 콘크리트 건물에 회백색 드라이비트로 마감한 외장이 중후한 호텔을 연상케 한다. 고급 대리석으로 내장을 마감한 실내는 가벼운 목구조 펜션과 달리 깊은 맛을 더하며 놀라움과 흥분을 안겨 준다. 140여 평에 이르는 웅장한 펜션 건물이 이 깊은 계곡에 세워져 있다니, 그 누가 상상이라도 하겠는가? 여섯 개의 방마다 위치를 달리해 넓은 창 너머로 펼쳐진 1000여 평의 정원과 정원을 휘감아 흐르는 계곡 물을 바라보는 펜션이 있다니, 그 누가 짐작이라도 하겠는가? 8년에 걸쳐 조성한 정원 하늘마루 펜션의 역사는 1997년부터 시작된다. 건축주 이춘기 사장(49)은 금융전문가로, 서른 중반부터 남몰래 전원생활을 꿈꿔 왔다. 그래서 몇 년에 걸쳐 일생을 자연과 벗하고 지낼 만한 땅을 찾았다. 그러나 그만한 땅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회사 직원의 권유로 이곳을 찾게 됐다. 이 계곡에 처음 들렀을 땐 민박과 양봉을 하는 화전민의 낡은 가옥만 있을 뿐, 그냥 숲과 바위와 밭이 어우러진 평범한 계곡이었다. 그가 ‘이 땅이야!’하고 결정한 것은 건너편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벽과 맑은 계곡 물 그리고 암벽 사이에서 자라는 함박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주인이 요구하는 값을 치르고 1800평의 땅을 사들였다. 이춘기 사장은 정원부터 손보기 시작했다. 어설픈 숲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산책길을 만들어 휴식할 수 있는 정원을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그러나 정원 가꾸기는 단번에 승부를 낼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잘 알았기에, 그는 주말을 이용해 조금씩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만들어 갔다. 말하자면 정원을 즐기기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낮은 밭을 메우고자 서른 트럭이 넘는 흙을 뿌렸고 제멋대로 돌출된 거친 바위들을 캐어 옮겼다. 하지만 숲 자체를 훼손하지는 않았다. 나무들이 자라는 자리를 그대로 존중해 주었다. 그리고 정원 절반에는 잔디를 깔았다. 그 반대편으로는 작은 연못과 분수를 만들었다. 지도상 38선이 가까운 지역임을 감안해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만들고 물은 계곡 건너편 높은 곳에서 끌어와 낙차를 이용해 분수까지 치솟게 했다. 이렇게 정원을 만드는 일에 꼬박 8년 가까운 정성과 노력을 들였다. 그래서 하늘마루를 찾는 고객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원이 없는 미완성 펜션들도 많은데, 이처럼 아름다운 숲 속의 정원을 갖춘 펜션을 만날 수 있다니, 그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정원의 곳곳에는 100여 종의 야생화들이 있다. 남달리 야생화를 좋아하는 이춘기 사장의 노력으로 깊은 숲에서나 만나는 희귀 야생화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모양이 꼭 두루미를 닮은 ‘두루미천남성’, 꽃이 요강단지처럼 생긴 ‘강릉요강난’을 비롯해 용머리꽃, 흰달개비, 금강초롱, 비단동자꽃 등 희귀종들이 즐비하다. 새로운 야생화가 있다면 반드시 달려가 정원으로 옮겨오는 열성 때문에 그는 현재 가평군 야생화협회 회장까지 맡고 있다. 처음에는 야생화를 소개하는 팻말을 일일이 붙였지만, 희귀종이라는 말에 몰래 캐 가는 고약한 일들이 벌어져 지금은 팻말을 거두었다. 야생화가 생존을 위해 이름 없는 꽃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까닭을 비로소 알게 됐다며 그는 미소를 짓는다. 혼전 커플, 예약 안한 고객은 ‘NO’ 현재의 펜션 건물이 들어선 것은 2005년 4월 말. 민박집으로 운영하던 낡은 가옥을 허물고 2004년 8월 건축을 시작해 꼬박 8개월에 걸쳐 지었다. 2층은 복층 대형 펜션룸으로 특별실 3개를 비롯해 모두 6개의 룸을 갖추었다. 1층에는 내실과 함께, 넓은 주방과 고객을 위한 카페를 마련했다. 그런데 튼튼하고 중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룸의 시설에서 일반적인 펜션 룸과는 개념을 달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하늘마루 펜션은 젊은 커플을 위한 룸이 없다는 점이다. 룸에는 화려한 인테리어나 침대 그리고 가구집기 등의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온돌방만 있을 뿐이다. 젊은 커플을 받지 않겠다는 주인의 의도를 읽어볼 수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처음부터 하늘마루 펜션은 철저한 가족 중심 펜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마루 펜션이 고집하는 운영 원칙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명지계곡이나 임산계곡 유원지이지만, 하늘마루 펜션은 아무나 이용하는 대중적 유원지 개념에서 벗어나 ‘건강한 가족들이 예약을 통해서만 이용하는 펜션’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펜션 입구에는 ‘이 펜션은 예약한 손님만 이용할 수 있다.’는 팻말을 걸어 놓았다. 혹시 신분을 숨기고 결혼 전의 젊은 커플이 이용하려고 하면, 다른 이용 가족들과의 관계와 분위기를 생각해 반드시 예약금을 환불해서라도 펜션 이용을 막는다고 한다. 또한 펜션 룸마다 주방 설비가 있지만 취사는 금지돼 있다. 1일 3식을 반드시 식당을 이용하는 것이 조건이다. 이러한 운영 규칙은 무질서와 쓰레기로부터 자연환경을 보호하려는 이춘기 사장의 자연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노력은 정화조 시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반 환경 규정에서 요구하는 정화 시설보다 무려 3배 이상의 시설비를 투입해 오물들이 거의 완벽하게 정화돼 방류된다. 방류 지점에는 금붕어를 길러가며 오염 정도를 확인한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노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고객들에게 술과 소음을 일으키는 노래방 기기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객들이 스스로 자연의 참맛을 즐기는 펜션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하늘마루 펜션은 자연의 덕을 보는 것만큼 이익을 자연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셈이다. 명지산 환경지킴이로 남고 싶어 자연을 즐기기 프로그램 1순위는 여름에 즐기는 ‘계곡 물놀이’다. 계곡 물은 한여름에도 얼음처럼 차서 가족을 위한 최고의 피서지다. 그 다음이 ‘한 밤에 별 보기’다. 명지산 자체가 예로부터 별이 잘 보이는 산으로 이름 난 곳이므로, 해발 510미터의 현재 위치에서도 날이 맑으면 쏟아지는 별들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인정 받은 펜션 자체의 ‘하늘마루 약수’와 식사마다 별식으로 제공하는 ‘흑돼지 바비큐’도 즐길 만한 먹거리다. 임산계곡 산책 코스도 빼놓을 수 없다. 펜션에서 10분만 올라가면 처녀림 가운데 감춰진 ‘임산폭포’를 볼 수 있는데 40미터 높이의 2단 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현재 이 폭포는 출입이 금지돼 있어 펜션 고객이 아니면 접근할 수 없다. 또한 왕복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산림욕 코스라던가, 3시간 이상 걸리는 정상 왕복 코스 등도 있어 선택이 다양하다. 고객들은 대개 직장인들이 모임을 위해 찾았다가 가족과 함께 다시 찾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늘마루 펜션은 상당한 단골 고객층을 갖고 있는 성공한 가족 펜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춘기 사장의 생각은 다르다. 하늘마루가 경제적 성공보다는 자연과의 조화와 교감을 체험할 수 있는 자연 속의 가족 펜션으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또한 그는 끝까지 임산계곡을 지키는 자연인의 한 사람으로 남기를 소원한단다. 하늘마루 펜션과 함께 명지산의 환경지킴이로 남기를 자처하는 것이다.田 글 김창범 / 사진 최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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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펜션으로 자리 잡은 가평 임산계곡의 '하늘 마루' 펜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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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년 된 경기도 전통가옥, 가평 한옥 펜션 ‘팜카티지’
- 먹는 것을 한식(韓食), 입는 것을 한복(韓服)이라 부르듯이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한옥(韓屋)이다. 한옥은 결코 어제의 ‘고(古)건축’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한옥이란, ‘한국 땅에 지어진 모든 건축물이며’, 좁은 의미로는 ‘사람이 살림하고 사는 살림집’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국땅에 지어진 모든 건축물로써의 한옥은 시대에 관계없이 한국땅에 순화되도록 지어진 집이란 뜻이다. 한옥이란 개념에는 상당한 포용력이 있으며 서양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집이라 해도 이 땅의 풍토에 순화되는 한 한옥(韓屋-살림집)으로 볼 수 있다. 구들 드린 온돌방이나 온수파이프를 돌려 난방하는 것 등은 모두 한옥에서 빌려온 것으로 우리 땅과 생활방식에 순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통 한옥의 가치는 이러한 새로운 한옥개념의 살림집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소중하다. 집은 삶의 기반이며, 따라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집을 성찰해야 한다. 우리가 전통한옥을 보존·유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매우 개방적이며 융통성을 보여주는 전통한옥의 면면을 살피는 일은 현재 우리 삶의 기반을 성숙하게 발전시키고 우리 땅의 풍토에 가장 적합한 살림집으로써의 새로운 한옥을 창조·재생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위치한 펜션 ‘팜카티지’는 전통한옥과, 펜션이라는 현대생활양식이 어떻게 화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는 우리가 과거의 건축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280년 된 경기도 전통가옥, 팜카티지 팔당대교를 건너 45번 국도를 타고 가다 팔각정 휴게소에서 37번 국도로 갈아타 청평호반에 이르면 펜션 팜카티지로 가는 유람선을 탈 수 있다. 저렴하고 안전한데다 근사한 강변 풍류도 즐길 수 있고 육로보다 수월하게 갈 수 있기 때문에 팜카티지를 처음 방문하는 경우엔 뱃길이 훨씬 편하게 이용할 수 있어 좋다. 펜션 팜카티지는 장락산 중턱, 홍천강 중·하류 산새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물론 물길이 힘들다면 육로로 찾아가는 방법도 있으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지난 8월 여름휴가시즌으로 바쁜 와중에 문을 연 팜카티지는 방문객 위주의 편의성과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 등, 여느 펜션과 다름없는 느낌이다. 한가지 다른 게 있다면 바로 건축형태인데, 팜카티지는 목조도, 황토도 아닌, 280년 된 경기도 전통가옥이기 때문이다. 성춘재와 천리재 등 두 채로 이루어진 팜카티지는 4개의 객실을 갖고 있는 보기 드문 진짜(!) 한옥 펜션이다. 습기가 올라오지 않게 마당과 레벨차를 둬 경사진 터 위에 얹은 성춘재는 기단이라 부르는 댓돌을 여러 겹 축조해 높게 만들었다. 가파르게 올라온 뙤약볕을 가리고 있는 한옥 특유의 깊은 처마의 모습도 단아하다. 우리 한옥이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할 수 있는 건 처마의 역할에 달렸다고 한다. 여름엔 차양이 되고 겨울엔 경사진 서까래와 함께 더운 공기를 머물게 하는 것이 바로 처마이기 때문이다. 냉·난방에 막대한 경비를 들여야 하는 도시의 살림집들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효율적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다소 높게 올리긴 했지만 집 구성의 기본단위는 낮게 잡은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의 평균 신장을 감안해 안마당에서 바라볼 때의 눈높이를 수평기준선으로 해 안방 머름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눈높이를 기준으로 하부와 상부를 구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춘재 툇마루에 올라서니 방 앞쪽의 머름 드린 창틀의 하단 높이와 어깨가 신기하게도 얼추 맞는 것 같다. 한옥에는 눈높이뿐 아니라 어깨 넓이도 응용해 집을 지었다고 하니, 살림집을 지을 때 우리 조상들이 어떤 마음으로 임했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조선시대 백성들은 사방 15척, 대략 4.5m 가량의 방을 냈는데, 300여 년 전 팜카티지를 살림터로 사용한 이들은 아마도 서민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잘 살피면 방과 거실, 주방과 욕실까지 모두 일률적인 양옥과 달리 방의 천장 높이와 대청이나 부엌의 천장 높이가 틀리다. 이렇게 높낮이가 다른 천장 구조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전통가옥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앉아서 생활하는 방과 서서 움직이는 일이 많은 대청의 천장 높이가 다른 것은 그 쓰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팜카티지의 난방형태는 구들과 전기보일러를 함께 쓰고 있는데, 사람이 살림을 사는 곳이면 구들처럼 한옥에 적당한 것도 없겠지만, 매일 사람이 머물러 있질 않기 때문에, 관리가 힘들어 최근에 전기보일러를 설치했다. 4년동안 나룻배로 기와며 자재 등 실어 날라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손님들의 왕래가 많진 않지만 청평호나 장락산, 유명산 등 입지적으로 유명 관광코스가 가까이 있어 그동안 관광객들이 구경삼아 다녀가곤 했기 때문에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전통가옥을 보존하는 관장이자 펜션지기인 노경미 씨에 의하면 이따금 분위기만 흉내낸 한옥형 펜션쯤 되겠지 생각하고 오는 손님 중엔 진짜 한옥인데 놀라 일정을 앞당겨 하루 이틀 사이 가버리는 사람들도 있단다. 이유는 비슷하다. 불편하고 춥고 게다가 벌레도 많고 결정적으로 TV나 비디오, 인터넷 등이 안되기 때문이란다. 노경미 씨는 배꼽을 잡고 웃는 기자에게 농담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올림픽 개발붐으로 사라질 위기에 있던 이 집을 84년 구입해 서울 풍납동에서 여기까지 옮겨오는데 꼬박 4년이 걸렸는데, 당시엔 물길이 전부라 나룻배를 이용해 기와며 자재 등을 실어 날랐다. “나더라 미쳤다고 했어요.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사실 나도 그 이유를 몰라요. 왜 시작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냥 싫었던 거 같아요. 300년 가까이 된 집이 삽날에 날아가는 게 싫었던 거죠. 못견디겠더라고요. 그래서 사긴 샀는데, 어디로 옮기긴 해야하고, 도시에 변변한 곳은 마땅치 않고, 우리 어머니가 산도보고 물도 보는 곳으로 가자고 해서 여기까지 온거예요. 집이라고 옮겨와 내가 살 것도 아니고, 살 수도 없잖아요. 지금은 우리 어머니 여기서 여생 보내신다고 내려와 계시지만, 그때만 해도 엄두도 못냈어요. 게다가 그냥 가만히 놔둬도 일년이면 유지비용이 5,000만 원 정도 들어가요. 내 딴에는 지난 10년 간 지킨다고 지켰는데 하루가 다르게 집이 자꾸 닳는 것 같은거예요. 저러다 큰일나겠다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죠” 팜카티지를 보존하고 있는 노경미 씨는 아직도 어려운 일이 많다며 말끝을 흐렸다. 지금은 작고한 인간문화재의 손을 빌어 총 세 채를 옮겨와 한 채는 100% 자재 용도로 뜯어 사용하고, 한 채(성춘재)는 처음의 모습과 가장 흡사하게 복원했다. 또 남은 한 채(천리재)는 지붕이나 내벽, 난방 등을 현대적으로 추가·보완했다. 살림집에서는 살림을 살아야 오래 보존할 수 있어 20여 년 가까이 주로 가족들과 친지들만 왕래하다 갑자기 펜션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궁금했다. 사람들이 노경미 씨의 마음처럼 이곳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건 아닐텐데 말이다. 자칫 훼손이라도 되면 어쩌느냐고 물었다. “처음 여기로 집을 옮겨다 놓겠다고 하자 가족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우리 식구들은 처음부터 내 마음하고 같았거든요. 가족이 없었다면 엄두도 못냈을 거예요. 어머니가 먼저 내려오시고, 나는 애들 공부 때문에 서울살이 다 정리하고 여기 내려온지 이제 5년 됐어요. 틈틈이 내려와서 들여다보긴 했지만 최근에 보니까 너무 많이 상한거예요. 해마다 보수비용 들여가면서 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왜그러나 알아봤어요. 이유는 사람이 안 살아서 그런데. 살림집엔 사람이 살림을 살아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야 워낙 없는 것처럼 있으시고, 안방이나 마루나 거의 매일 비어 있으니까. 그래서 집이 자꾸 기(氣)를 잃어 가는 거래요”. 노경미 씨는 그동안 훼손이라도 될까봐 관공소나 민간단체 등에서 대여를 문의해 올 때마다 안된다고 잘라 말했단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관광을 주선하겠다는 여행사들도 많았지만 한번도 내준 적이 없다. 그런 그녀가 집을 더 오래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펜션업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일단 결심을 하고 나니 젊은 사람들한테 더없이 좋은 한옥체험이 될 것 같아 뿌듯해지고,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한옥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고. 또 일단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 한옥 보존에 좋다는 걸 알고 신바람이 난 노경미 씨는 천리재를 중심으로 5월부터 복구공사를 시작해 기와도 새로 얹고 화장실도 현대식으로 고쳐 8월에 펜션 팜카티지를 오픈한 것이다. 다만 최근엔 한옥 보존 외에도 큰 걱정거리가 하나 늘었다. 제두루미와 백로가 노니던 홍천강변이 골재채취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경미 씨는 20년 가까이 골재를 캐냈으니 이젠 그만 둘때도 됐건만 때로 강바닥을 긁어 올리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며 애를 태운다. 아닌게 아니라, 강변에는 뿌리째 뽑혀나간 썩은 나무가 뒹굴고 골재채취선이 머문 곳은 쓰레기더미로 변해있다. 물이 줄고 강바닥이 드러나면서 처음 1,500평이던 대지도 눈에 띄게 줄었고, 최악의 경우 팜카티지에 영향을 미칠만큼 밀고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라며 군청이나 시에 진정을 넣어도 그때뿐이라고 불안해했다. 괜한 노파심에서 나온 생각이라고들 하지만 노경미 씨 가족에겐 오랜 살림터인 이곳의 자연이 더 이상 파괴되질 않길 바랄 뿐이다. 해지기 전에 올라갈 요량으로 배를 타고 나갔는데, 윈시림 속에서 팜카티지의 아름다운 내림마루가 보였다. 예부터 자연 풍광속에 집 한 채 멋지게 들여세우는 뛰어난 천분을 지녔다는 우리 조상에게는 풍경에 꼭 맞는 지붕의 높이와 크기를 가늠할 줄 아는 혜안도 지녔었나 보다. 한국 건축은 먼 곳에서 바라볼 때 한층 눈맛이 나는 특성을 지녔다고 하던데, 집 안에서 주변 풍경을 바라보는 즐거움만큼, 멀리 떨어져 집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田 드림펜션(031-717-9003, www.dreampension.co.kr) 팜카티지(011-9003-2369, www.chongpyong.com) ■ 글·사진 엄치언 기자 ■ 건축정보 ·위 치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건축형태 : 경기도전통가옥 ·대지면적 : 1,500평 ·건축면적 : 80평 ·내부마감 : 닥종이 ·외부마감 : 흙벽 ·바닥마감 : 민속장판, 들기름장판 ·지붕마감 : 팔각지붕(안채), 맞배지붕(사랑채) ·창 호 재 : 봉창+살창+넉살 ·난방형태 : 심야전기보일러, 온돌+구들 ·식수공급 : 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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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년 된 경기도 전통가옥, 가평 한옥 펜션 ‘팜카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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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원예 예술촌 이경자 대표 -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힐링타운
- '아름다운 산천은 한가한 사람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여유로워야 산천을 둘러보는 여유도 생긴다는 말이다. 남해 명소로 자리 잡은 원예예술촌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그런 지극한 여유를 지닌 이들이 아닐까. 원예예술촌 살림을 맡고 있는 이경자 대표와 정원을 함께 가꾸는 남편 김두한 씨를 만났다.글 박지혜 기자 사진 홍정기 기자 취재협조 원예예술촌 055-867-4702 www.housengarden.net "처음에는 이웃 독일마을에 집을 지었어요."이경자 씨는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다. 이경자 씨 부부는 독일과 인연이 깊다. 40년간 그곳에서 살았으니 한국에서보다 더 오래 됐으며 독일은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반세기 전 이야기는 마치 흑백영화의 장면처럼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갓 결혼한 20대 새색시의 삶은 전형적인 화이트컬러였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독일행으로 덩달아 180도 변했다. 이 씨의 표현대로라면'외국병'에 걸린 남편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집과 자동차를 마다하고 독일 광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이 스물다섯, 어떤 모험도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 혈기왕성한 청춘의 때였다. 1960, 70년대 독일이 산업 부흥기를 맞아 외국인 노동자를 대거 받아들일 때 이야기다."식당에 앉아 있는데 우연히 옆자리에서 독일 광부 모집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아, 귀가 번쩍 뜨였어요. 바로 저거다 싶었지요." 24세에 첫 직장을 다닌 김두한 씨는 이듬해 관철동 소방센터 소장으로 발령 받는 등 사회인으로서 시작이 순조로웠다. 자동차가 귀한 시절 자동차와 집을 보장받을 정도의 대우를 받는 그에게 더 중요한 건 물질적 혜택이 아닌 꿈을 향한 도전이었다."청소년기에는 서양 팝에 젖어 지냈고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흑백 텔레비전에 비친 파리 상젤리제 거리의 낭만에 매료돼 유럽에 가겠노라는 꿈도 꾸던 시절이었어요. 그런 참에 일본 엑스포로 떠나는 사장님을 공항까지 배웅하는데 해외 출장을 가는 사장님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나도 외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국비 유학생이 아니라면 외국은 엄두도 못 내던 시절 독일 노동자로 간다는 것은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몇 배의 월급을 더 벌 수 있기에 신청자는 꽤 많았다. 김 씨는'외국병'이 절정에 달하던 바로 그해 12월 광부 지원자 180명과 함께 전세기를 타고 독일로 향했다."육군 대위, 고등학교 선생, 공무원들… 내로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많았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함께 비행기에 올랐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어린 축에 속했어요. 처음 타 본 비행기가 알래스카를 넘어가는데 그 황홀함이란…."그 벅찬 환희는 오래가지 않았다. 비질 한 번 해보지 않았던 김 씨는 광부의 노동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임을 현장에 가서야 깨달은 것이다. 한국에서 받은 교육이라곤 강원도 탄광촌에서 하루 실습한 것 외에는 일주일간의 이론 교육이 다였다."빈 삽자루 하나에도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어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울었어요. 너무 힘드니까 눈물이 나데요. 새벽 별 보며 일하러 나가 지하에서 8시간 일하고 나면 잠을 자도 머리가 띵했어요. 입에 맞는 음식은 미깡(귤의 강원도 사투리)이었는데 속까지 시꺼메 먹을 수 없는 걸 보면 괜히 서러워지고 그랬어요."낯선 나라에서 고된 노동이 힘들기는 했어도 다시 한국행은 싫었다. 그럴 거라면 애초 독일로 올 이유가 없었다는 생각에 독일에 정착해보기로 하고 서울에 남아 있던 아내를 불렀다. 40년 만에 돌아온 고국, 한눈에 반한 남해"남편이 출국한 지 1년 지난 후 간호보조원 교육을 받아 독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남편은 3년 계약으로 갔는데 내가 들어가면 체류 기간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간호보조원 교육을 받고 독일로 가기까지 2년 정도 걸렸어요. 1994년에 일을 그만두었으니 독일에서 20년간 간호사로 일했네요."그녀가 간호사를 그만두던 해 김 씨는 레스토랑 경영을 시작하면서 사업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 3년 후에는 유럽 최대 규모의 1200석 패스트푸드점을 오픈해 교포들 사이에서도 꽤 성공한 인물로 알려졌다.부부는 독일 정착을 결정하면서 맨 먼저 한 일이 집을 구입한 것이다. 처음 살았던 연립형 주택은 이웃들이 정겨워 고국을 잊어도 좋을 정도였다. 차차 독일의 정원 문화에 익숙해졌는데 감정 표현이 솔직한 독일인들은 조금만 정원 관리를 소홀히 하면 한 마디 하기 일쑤였다."개인 정원이라도 마을 전체 경관과 이웃에게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기에 독일인들은 정원 관리가 몸에 뱄어요. 조금만 신경을 안 써 잡초가 무성해지면 이웃에서 잡초 뽑으라고 한 소리 할 정도예요. 우리나라처럼 취미로 원예를 하기보다 마을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한 도리라고 할까요."40년간 타국 생활에 젖어 있던 이경자 씨는 남편의 은퇴와 함께 온돌방이 있는 곳, 그리운 고국으로 들어와 정착할 것을 고려하면서 처음에는 두려움이 더 컸다고 한다. 독일인에게 더 익숙해진 그녀에게 같은 민족이 되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사로 잡은 것은 독일에 비할 수 없는 좋은 날씨와 공기, 쪽빛 바다와 어우러진 편안한 산세, 벼 익는 가을 풍경이 아름다운 남해의 자연이었다."유럽에도 이런 데는 없어요."2005년 독일마을에 지금은 펜션으로 사용하는'베토벤 하우스'를 짓고 독일을 오가다 2009년 한국에 정착할 요량으로 겨울을 나보자며 들어왔다 원예예술촌을 알게 됐고 이듬해 3월 원예촌에 입주했다. 그리고 제2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서 그들이 한때 살았던 브레멘의 이름을 따라 집을'브레멘 하우스'라 부르기로 했다. 3년간 잘 자라준 원예예술촌8월 초 푹푹 찌는 더위에 원예촌 입구에 있는 카페'브레멘'은 냉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찾는 손님들로 북적인다. 연인과 가족이 무리를 이뤄 남해에서 휴일을 만끽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원예촌에 첫 방문객을 맞던 3년 전만 해도 오늘과 같은 날을 상상이나 했을까. 사실 원예촌은 방문객으로부터 신랄한 쓴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입장료에 비해 볼거리가 부족하다는. 그것이 사실이라도 원예촌 사람들의 심정은 이랬다. 정원을 가꿔보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정원은 하루아침에, 하룻밤 꼬박 새워 바느질로 예쁜 드레스를 만들 듯 탄생하는 것이 아님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그 대가로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임을. 그런데 요즘은 원예촌 대표를 맡은 이경자 씨도 어깨가 좀 펴진다. 마을 정원이 3년 지나니 자리를 잡아 제 색을 한껏 발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맙다. 게다가 올해는 공동 정원에 더 많은 꽃을 식재하고 꽃 터널을 만들고 환경 정비사업도 하는 등 변화를 주었더니 방문객들 칭찬도 잦아졌다. 무엇보다 지난해 방문객이 25만 명이었는데 올해는 훨씬 늘어 40만 명까지도 가능할 것 같다. 7월 기준으로 지난해 대비 7만 명이 더 늘었으니 무리한 기대는 아니다."올해는 처음으로 이틀간 축제도 열었어요. 우리 모두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아주 반응이 좋아 앞으로 축제를 정착시킬 예정이에요."원예예술촌만이 갖는 매력은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는 22동의 다양한 스타일의 전원주택과 정원이 있다는 것이다. 김두한 씨는 방문객들이 집 창문 앞까지 와서 내부를 유심히 들여다볼 때면 깜짝 놀라기도 한단다. 그래도 크게 불편하거나 개의치 않는다. 그걸 예상하고 이곳에 살기로 결정했으니. 그렇게 눈빛이 마주치면 거주자와 방문객 사이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고 전원주택을 꿈꾸는 방문객에게 집과 정원에 대한 조언을 하며 꿈을 한층 구체화하는 데 도움도 주고 있다.김두한·이경자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브레멘을 두고 80년 토박이 주민은 '천지가 개벽했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원예촌에 입주한 후 그 해 여름 카페를 오픈했어요. 독일마을이나 원예촌에 오는 손님들이 쉴 공간이 없는 것을 보고 남편이'여보 선한 사업 한 번 해보자'며 시작한 것이었는데 우리 계획을 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렸어요. 남해군청에서도 장사가 안될 거라며 차라리 수퍼마켓을 하라고 권유할 정도였어요. 우리 역시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마음을 비운 채 소일거리 삼는 셈 치자며 강행했어요. 그런데 카페가 들어서니 카페주변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카페 앞으로 유동인구가 늘자 허허벌판이던 언덕에 주차장이 생기고 길도 깔끔하게 정비됐어요. 이어서 원예촌 안에 두 곳을 비롯해 이곳에는 카페가 8개나 생겨났어요."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은 김두한·이경자 부부뿐만 아니라 원예촌을 가꾸며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남해에는 요즘 힐링Healing 바람이 분다. 그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에 원예예술촌이 한 몫 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잡풀로 우거진 허허벌판을 일궈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언덕으로 가꾼 원예예술촌 사람들. 그들에게 이경자 씨는 마음 깊은 데서부터 찬사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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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원예 예술촌 이경자 대표 -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힐링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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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글밭을 일구며] 여기에 그리움이 있네
- 몇 차례 서리가 내렸다. 그토록 무성하던 언덕의 잡초들도 삭아져 키를 낮추고, 한 잎 남김없이 잎을 떨군 과실나무들은 이미 겨울잠에 들었다. 여름 동안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아랫마을은 낮게 엎드려 있다.산골생활에서 겨울이 행복한 것은 무엇보다 뜨끈뜨끈한 온돌방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 아궁이 지핀 군불로 하루가 따뜻한 온돌방에서 뒹굴다 보면 한 편의 시가 외워지고 늦가을 동안 감을 따느라 지친 육신의 피로가 시원하게 풀린다. 유가 급등으로 인한 연료비 걱정마저 없으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뒷산을 오르면 감나무 밭두렁 여기저기 가지치기를 한 나무들이 널려있어 조금만 수고를 하면 땔감은 충분히 마련된다. 땔감을 해오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노동이 아닌 운동에 덤으로 얻어지는 수확이라 여기니 그저 기분이 좋다. 옛날 초등학교시절 교실 난로에 땔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 반 아이들과 토끼몰이를 하던 즐거움이 떠올라 추억에 젖기도 한다.창고엔 겨울 내내 먹을 홍시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고 처마 아래엔 곶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김장을 마쳤으니 정다운 벗이라도 오면 반갑게 맞이할 일 뿐이다.산촌의 겨울 해거름은 빨리 찾아든다. 앞산과 뒷산의 하늘 길이가 더욱 짧아진 듯 해가 떴다 싶으면 한낮이고 점심때가 지났다 싶으면 이내 산그늘이 내린다.서둘러 군불을 지핀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는 일이 성가시지 않고 즐거운 것은 해거름에 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가 볼 만하거니와 장작이 타는 연기 냄새가 좋다. 알싸하니 매캐한, 아릿하니 구수하기도 한, 그것은 그리움이다. 먼 길을 달려온 그리움이 전신에 젖어드는 향기다. 촉촉하게 젖어서 숨 쉴 수 있는 향기. 돌아가신 부모님의 모습과 떠나버린 사랑과 산그늘 내리는 산촌에 한 점 풍경이 되어 내가 서있다는 것이 가슴 아리는 그리움이다.올 겨울엔 서재에도 장작난로를 설치했다. 어디에 앉아 있던 산골의 경치를 모두 보겠다는 욕심으로 큰 창을 많이 내었더니 겨울 실내가 추웠다. 두 해 동안 견뎌내며 난로를 놓아야겠다는 걱정만 하고 있었는데 먼저 전원생활을 시작한 강 건너 마을 K선생님이 손수 트럭을 몰아 재 너머 장터에서 난로를 구입해 와 설치해 주었다. 원앙을 조각하는 공예가인 분이라 가지고 있는 여러 장비가 적절하게 쓰였다. 먼저 난로를 들인 경험의 솜씨가 한 점 실수 없이 대나무 산자가 엮어진 황토벽을 보기 좋게 잘 뚫어 ㅜ자 굴뚝을 올려주었다.지붕 위로 솟구친 굴뚝에서 뒷산을 배경으로 두 갈래 하얀 연기가 원앙처럼 정답게 날아오른다. 난로가 뿜어내는 실내의 열기보다 난로를 설치해 준 사람의 정이 더욱 따뜻하게 가슴에 젖어들어 어스름 마당에 오래도록 굴뚝 연기를 올려다보며 서있다.'좀 더 잘 대해주어야지. 이 겨울 그들이 다시 나를 찾아오면 난로 위에 대추차를 끓이며 둘러앉아 더욱 정성으로 얘기 들어주고, 함께 아파해 주어야지. 나도 그들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지.'한 해 동안 우리 황토집을 다녀간 사람들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전원에 집을 짓기 위해 구경을 왔던 사람들이 아닌, 저마다 아픔 하나씩 안고 찾아들었던 사람들이다. 혼자 산골 황토집에 들어앉은 여자가 하소연의 대상으로 적격했을까. 어디 막상 마음 내켜 갈 길 없는 답답하고 외로운 발걸음이 이곳 산골을 향했을까. 도시에서 가까이 있을 땐 한마디 의논도 하소연도 없었던, 늘 괜찮아 보였던 모습을 가진 그들의 가슴 안에 그리도 큰 아픔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넉넉한 연륜과 사회적 지위로 인한 체면으로 어디 털어놓을 수 없었던 고통을 안고 먼 길 달려온 걸음 앞에 그 마음을 헤아리며 이야기 들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지만 그래도 마음 추스르고 일어서던 모습은 밝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혼자서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댈 것인가를. 먹고사는 일이 아닌 사람에게 받은 배신의 아픔, 그 상대가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가 될 때 아픔을 당한 사람은 얼마나 피폐한 정신으로 방황하게 되는가를. 그러나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당한 아픔의 고통에서 헤어날 길을 스스로 터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푸쉬킨의 시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삶은 모든 것이 그리움이 된다. 산골 해거름 굴뚝에 피어오르는 연기의 향기처럼. 원망도 미움도 내려놓고 그냥 가슴 아리는 그리움에 젖어들 일이다. 내가 그리움이 되면 더욱 좋을 터. 삭정이가 어디 나무에만 있는 것인가. 젖어서 향기를 낼 수 없는 생명도 삭정이가 되는 법. 산다는 것은 젖어드는 일이다. 그것이 설령 배반의 아픔이라 하더라도. 사랑의 이별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젖어들며 또 한 해를 보낼 일이다.田 글 장문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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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글밭을 일구며] 여기에 그리움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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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만난 사람] 한 번 때면 온기가 일주일 가는 벽난로 온돌방 발명가 이화종
- “나는 산촌이 좋다. 평야보다 서늘하고, 숲이 있어 정신이 맑아지고, 추운 날이 많아 할 일 없이 쏘다니지 않고, 집에서 마음 가다듬고 삶을 음미할 수 있어 좋다. 또 추운 덕분에 마당에 쌓인 눈도 쓸고, 장작도 패고, 해야만 될 일들이 있어 비교적 건강하다. 제일 좋은 건 오래된 나무며 바위의 묵직한 기운을 받아서 경거망동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벽난로 온돌방》 중에서 치악산 줄기를 따라 에돌아 난 길섶에 희끗희끗 보이는 잔설이 산촌임을 느끼게 한다. 농가 몇 채가 옹기종기 모인 한적한 나래실마을에 이르자 남향받이 산중턱에 아스팔트 슁글을 머리에 인 토담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도중에 길을 잘못 든 탓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가 여간 반갑지 않다. 군더더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수수한 토담집, 발명가 이화종 씨의 살림집이다. 아담한 마당은 일찌거니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온 사람들의 차가 차지하고 있다. 이화종 씨와 얘기를 나누는 중에도 전화벨은 쉼 없이 울려 댄다. 한 번 때면 일주일 가는 ‘벽난로 온돌방’이 시쳇말로 떴음을 실감하게 한다. 산촌 토담집에서 느끼는 인생의 단맛 이화종 씨가 귀농한 것도 토담집을 지은 것도 벽난로 온돌방을 발명한 것도, 그 바탕에는 부정父情이 짙게 깔려 있다. 그는 아들의 뇌성마비를 고치고자 병원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대체의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귀농을 결심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37살에 장가가서 얻은 뇌성마비 아들을 안고 많이 헤맸지요. 결국 나 자신이 예수와 석가가 되어야 아들 병을 고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산촌에 들어왔으니까요.” 그는 벽체 두께가 50센티미터나 되는 22평 토담집을 한국자연건강회 회원들과 5년간 한 달에 한 번씩 건강에 좋다는 전국의 주택을 찾아다닌 것을 계기로 지었다. “예나 지금이나 토담집은 흔치 않은데 당시 안동 하회마을의 다 쓰러져 가는 토담집이 한 채 있다고 하기에 답사에 나섰죠. 한여름이라 반소매 차림으로 그 집 안에 들어가 보니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웠어요. 황토 벽체에 무수히 많은 미세한 구멍으로 공기가 안팎으로 소통하면서 습한 기운을 빨아들이고 신선한 기운을 뿜어낸 거예요. 그때 건강을 위해 그만한 집도 없겠다 싶어 우리 집을 토담집으로 짓기로 했지요.” 이화종 씨의 토담집에 들어가면 마치 황토 굴에 들어온 듯하다. 황토는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는 토기운土氣運에 속하고 오장육부五臟六腑로는 비위脾胃에 속하며 오미五味로는 단맛〔甘〕에 속한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토담집을 기운(영양)의 보고寶庫라고 말한다. “요즘 사람들이 흙을 멀리하다 보니 누추한 것(겸손)을 모르고 속이 좁아 너그럽지 못해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거예요. 토기운인 비위가 약하면 구역질이 나고 위장이 약하면 만사가 귀찮아져 성격에 모가 나기 때문이죠. 흙집에서 살면 인체의 위장에 밥 한술이 들어가서 혈액〔血氣〕으로 나오는 것과 같아요. 또한 토기운은 단맛에 해당하는데 이곳 산촌 즉, 자연의 품에서 느끼는 단맛은 세상의 어떤 고통도 씻어 주고 인생의 참맛을 알게 하지요. 그게 진짜 단맛이에요.” 인체 오장육부를 닮은 벽난로 온돌방 이화종 씨의 토담집에는 불을 때는 아궁이가 집 밖이 아닌 집 안에 있다. 한 번 불을 때면 온기가 100일 동안 간다는 지리산 칠불암의 선방禪房인 아亞자방을 떠올리며 인체 오장육부를 본떠 만든 바로 벽난로 온돌방이다. 그러면 온돌과 인체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의 설명이다. “공기 구멍은 인체의 코로 막히면 답답해 불완전 연소를 하고, 아궁이는 입으로 많이 먹으면 토하듯이 연기만 나오고, 장작은 음식으로 국물이 많으면 소화가 안 되듯이 젖은 나무는 잘 타지 않고, 복부는 연소실로 속이 좁고 냉하면 영양 실조에 걸리지만 넓고 훈훈하면 불이 잘 타고, 창자는 고래로 길고 맑아야 장수하듯이 축열이 잘 되고, 항문은 굴뚝으로 치질과 변비에 안 걸리려면 그을음에 막히지 않아야 하지요.” 언뜻 옆으로 눕힌 벽난로와 편평한 침대처럼 보이는 벽난로 온돌방. 굴뚝으로 연기가 잘 빠지는 방법을 찾아 아궁이를 거실 내에 두었으므로 벽난로 역할을 겸하는 셈이다. 즉 아궁이의 불을 끄집어내면 벽난로가 되고, 밀어 넣고 문을 꼭 막으면 함실(부넘기 없이 불길이 그냥 곧게 고래로 들어가는 아궁이 구조) 온돌이 되는 것이다. 난방 기구는 대부분 실내 공기 중의 산소를 흡입해 연소하거나 공기의 대류를 이용하므로 환기를 안 하면 머리가 아프다. 벽난로 온돌방도 실내에서 불을 때는데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아프지 않을까? “서양식 벽난로는 실내 산소를 빼앗는 강도지만, 벽난로 온돌방은 신선한 공기를 흡입해 완전 연소시키고 복사 난방(실내 공기를 돌리지 않음)이므로 맑고 상쾌해요.” 벽난로 온돌방은 불을 많이 땐 첫날은 찜질, 다음날은 좌욕, 다음은 온돌이 된다고 한다. 열기가 오래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들장과 흙 두께를 두껍게 하고 구들 고래를 성글게 채워서 축열 효과가 높아요. 또한 아궁이가 거실 내에 있으므로 외부 냉기에 접촉하지 않고 철문으로 틈 없이 막으면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하지요.” 피부처럼 살아 숨쉬는 토담집 이화종 씨는 집 짓는 요령은 피부를 가꾸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세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피부에 접해도 거부감이 없는 흙과 나무를 재료로 쓰고, 둘째는 피부처럼 공기가 들락거려야 하고, 셋째는 인체의 눈·코·귀·입·항문처럼 집에도 구멍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흙이 집 짓기에 좋을까? 사실 이것은 황토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궁금증이기도 하다. 의외로 이화종 씨의 대답은 간단하다. “집터나 그 주위에서 나온 흙이 제일 좋아요. 그러한 흙은 그곳의 자연 흐름〔氣〕을 담고 있기에 터를 닦고 살려는 사람하고도 잘 맞으니까요. 우리 집도 비탈진 터를 다듬을 때 나온 흙으로 지었어요. 거름기를 머금어 거무튀튀한 겉흙을 20센티미터쯤 걷어 내고 속에서 나온 누렇고 뽀얀 원래의 흙으로요.” 종종 건강하게 살고자 황토집을 지었다면서 집 안을 온통 실크벽지로 마감해 놓은 경우를 접한다. 마치 랩(Wrap)으로 감싼 듯한 그런 집에서 건강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이화종 씨는 황토집은 살아 숨쉬는 생명체이기에 그 자체가 인위적인 마감재를 거부한다고 강조한다. “집은 밤에 편히 쉬는 곳이지요. 여기서 쉰다는 말은 낮에 활동하느라 몸에 쌓인 노폐물을 호흡하면서 빼낸다는 거예요. 황토 벽체는 그런 노폐물을 흡수해 정화시켜 주지요. 피부처럼 수많은 공기 구멍으로 숨을 쉬면서요. 그렇기에 거기에다 실크벽지를 바르면 황토집의 숨통을 옥죄는 것하고 다를 바 없지요. 결로結露가 생겨서 실크벽지가 들뜨는 것도 황토 벽체가 숨을 제대로 못 쉬기 때문이에요.” 황토집에 사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전날 과로나 과음을 해도 그 이튿날이면 몸이 개운하다고 한다. 황토집에서는 숙면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화종 씨. “밀폐된 공간에서는 숙면을 못 취하기에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려 대도 아침잠에서 깰까 말까 하는 사람이 있지요. 피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땐 자명종 대신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게 창문을 조금만 열어 두면 금방 일어나요. 황토집에서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개운하다는 말은 안팎으로 공기 흐름이 원활하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으레 보기 좋고 살기 좋은 집을 찾는다. 과연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켜 주는 집이 있을까? 이화종 씨는 몸이 고달프면 마음이 편하고, 몸이 편하면 마음에 고민이 많다는 말로 운을 뗐다. “자연을 닮아서 있는 듯 없는 듯해야 살기에 좋은 집이지요. 마치 오래 사귄 친한 벗처럼 말예요. 집의 외형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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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만난 사람] 한 번 때면 온기가 일주일 가는 벽난로 온돌방 발명가 이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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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글밭을 일구며] 해맞이
- 불을 지핀다. 며칠 동안 집을 떠났다 돌아오면 맨 먼저 아궁이에 불부터 지핀다. 한 개비 성냥불은 구겨진 신문지를 태우며 잔가지에 옮겨 붙고 이어 장작에 옮겨 붙은 불은 아궁이를 달구며 순하게 구들로 빨려 들어간다. 부넘기를 타올라 구들장을 떠받친 굄돌 사이를 거쳐 고래로 빠져나가는 맹렬한 불길로 달궈진 구들장은 두어 시간 후면 뜨끈뜨끈한 온돌방으로 나를 쉬게 한다.한 아궁이 땔감을 밀어 넣고 집을 살핀다. 하얀 눈길에 발자국이 찍힐 때 환하게 생기를 되찾는 집의 기운을 느낀다. 굴뚝은 뭉글뭉글 신나게 연기를 피워 올리며 주인이 돌아왔음을 마을에 알린다.사람에게만 기다림이 있는 것이 아님을 집을 짓고부터 알았다. 집을 비우면 집은 주인을 기다린다는 것을. 둘레의 나무들도, 마당에 놓인 바윗돌까지도 모두 함께 주인이 어서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산골에 우리 집을 짓고부터 알았다.그럼에도 나는 이따금 집을 떠난다. 도시에 있는 아이들이 보고 싶은 이유 속엔 기실 산골생활의 적적함이 큰 몫을 한다. 그것은 전원에 대한 감동의 척도가 낮아진 때문이며 집을 나섬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내 나름의 방편이기도 하다. 마당을 나설 때부터 우리 집과 이곳이 그리워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쁨이 보태진다.강을 품어 안고 어깨 두른 산자락이 다시 신비가 되고, 적요하던 산골 마을이 사람이 살 곳으로 아늑해 보이는 것도 먼 길을 한 바퀴 돌아왔을 때이다. 울타리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간 멧돼지 가족의 선명한 발자국이 반가운 것도, 대숲을 스치던 스산한 바람 소리가 청아한 음률이 되고, 겨울나무 빈 가지 앞에서 마음을 여미게 되는 것도 집을 떠났다 돌아왔을 때이다.그렇다. 떠남은 돌아오기 위함이며 새로운 모색이 시작되는 걸음이다. 희망을 찾는 출발이 되고 가슴 떨리는 그리움을 만나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새해에 더욱 길을 떠난다. 해맞이, 그 벅찬 희망을 만나기 위하여. 느슨해진 삶이 탱탱하게 조율되어 모든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위하여.오래전, 그 해의 첫 해오름을 나는 동해 바닷가에서 맞이했다. 아파트 거실에서 편안히 볼 수 있는, 해운대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를 두고 어둠 속을 두 시간쯤 달린 그곳은 울산시를 벗어나 솔숲이 아름다운 작은 갯마을 앞이었다. 파도에 밀려 자갈이 긴 둔덕을 이루고 있는 바닷가에 닿았을 때 고요한 새벽인데도 자갈 구르는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차르르차르르차르르르… 거세게 뭍을 할퀴던 바다의 포효. 해를 낳기 위한 바다의 요동. 그 거센 진통 앞에서 나는 전신을 떨었다. 이윽고 동녘 하늘 가득 모래집물을 붉게 터뜨리며 둥근 얼굴 하나 솟게 하고 기진해 눕던 바다. 어디에서 새벽을 기다렸는지 갈매기들의 비상이 시작되었다. 남아 있던 어둠이 갈매기의 날갯짓에 털려 흩어질 때쯤 바다는 서서히 환희의 출렁임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천지 창조의 첫날이 그러했을 듯 수평선 너머 온 하늘이 새벽 노을의 장관으로 숨을 멎게 하던 그때, 나의 환호는 노을이 아름다운 동녘 하늘로 달려가고 그 기운은 다시 새 즈믄 해 새벽 백두대간 능선에 나를 서게 했다.해보다 먼저 산이 솟아올랐다. 힘찬 맥박을 뿜어내며 서서히 서서히 솟구쳐 오르던 검은 숲. 건장한 나신을 드러내던 나무들 너머로 심해의 물빛 같은 새벽 하늘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신비롭던 하늘빛. 산정에 도착하여 바라보았던 광활한 우주의 새벽은 나를 무중력의 우주인이 되게 했다. 그 황홀한 유영. 이윽고 검푸른 하늘에 진홍빛 양수를 질펀하게 터뜨리며 해를 낳던 산의 요동. 붉은 햇덩이 하나 솟구쳐 올리고 비로소 산은 제자리를 잡았다. 떠오른 해는 세상의 순리를 내려다보고 산은 엄숙한 위엄으로 땅의 질서를 다스린다는 것을 그 겨울 새벽 백두대간 진부령 능선에서 알 수 있었다.그런 해맞이를 맞이한 이후, 내 삶은 그때 겪고 있던 시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원고를 새벽에 시작하고 새벽에 마무리하는 버릇을 들였다. 잠자리에 들 때부터 새벽을 기다리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장작불이 사그라진 아궁이를 닫고 뜨끈해진 아랫목에 먼 길을 돌아온 몸을 누인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산골의 밤은 태고인 듯 고요하다. 오늘밤 켜놓은 촛불이 천장의 서까래를 돋보이게 하며 나를 어린 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이 신비로운 안식을 내가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꿈인 듯 몽롱하다.새해의 새벽을 기다린다. 아직도 불꽃처럼 발갛게 감이 달린 우리집 마당 감나무 앞에서 우러러 해맞이를 할 것이다. 내 아이들과 함께 강 건너 앞 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힘차게 당겨 안을 것이다.田글 장문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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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글밭을 일구며] 해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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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 자연을 옮기며 사는 황토연구가 김정덕
- 생활 속에 자연을 옮기며 사는 황토연구가 김정덕 《황토집과 자연건강법》이란 책을 통해 생활 속에서 자연을 실천하며 사는 김정덕 씨. 충남 천안시 병천면의 황토집에서 생활한 지 16년째인 그는 늘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을 맞느라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다. 일본에서 전공한 의상디자인과는 별도로 자연 속에서 모든 생활을 실천하는 일본인의 삶의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까지 그러한 생활을 꾸준히 연구하며 지내고 있다. 자연 그대로를 입고, 먹고, 마시고 하는 그의 생활은 한마디로 요즘 회자되는 ‘웰빙(Well-Being)’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한 김정덕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집 입구 초가지붕 정자와 백일홍의 붉은 빛이 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모습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집 안에서 김정덕 씨가 나오며 인사를 건넨다. 1935년생이라는 자료를 보고 하얗게 센머리에 연로한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리게 한 정정한 모습에 잠시 놀라게 된다. 마당에 심은 꽃과 처음 보는 식물들의 이름을 물어보며, 처음 안내를 받은 곳은 ‘약방’이라고 부르는 황토방. 허리를 깊이 숙이고 들어가야 할 만큼 작은 방문과 낮은 천장이 다락방을 연상케 하는 곳이다.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이라며 직접 풀을 먹여 씌운 이불을 끌어다 주는 손길이 마치 시골 외할머니댁을 찾은 느낌이다. 온돌방의 매력을 담은 작업실 김정덕 씨가 사는 집은 크게 3동으로 나뉘어져 있다. 약방과 거실이 있는 동과 살림채, 2003년에 완공한 서재로 구성돼 있다. 심야전기보일러와 온돌을 겸용한 약방은, 방 안에 개수대를 마련해 차 준비를 할 수 있게 했다. 약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분위기에 푹 빠져들어 좀체 밖으로 나가기 싫어한다고 한다. 방문한 날에도 가을바람의 차가운 기운이 계속 됐고, 덕분에 따뜻한 온돌방의 기운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먹거리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자연소재인 황토에 관심을 갖게 됐다. 김정덕 씨는 그간의 노하우를 오산주택에 제공하면서 황토방 보급에 힘쓰고 있다. 1년간의 공사 끝에 2003년 완공한 서재는 외관이 깔끔한데 방 안에는 아늑한 분위기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을 정도다. 닥종이로 벽을 바르고, 차를 마시게끔 이곳에도 개수대를 설치했다. 황토방에 걸맞게 방에는 옛 정취 물씬 풍기는 소품들로 꾸며 놓았다. 약방과 서재에는 히말라야에서 들여온 ‘암염(岩鹽)’이 있는데, 전등 주변에 놓아두면 스탠드를 대신할 만큼 아름다운 조명을 낸다고 한다. 안살림을 사는 살림채에서는 손님에게 대접할 각종 차를 준비하느라 늘 며느리의 손길이 바쁘다. 이곳에는 김정덕 씨의 작업실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바느질방’이다.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만큼 자신이 입는 옷을 손수 수선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만드는 공간이다. 각 동마다 어김없이 자리한 작업실은 바쁜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김정덕 씨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1988년. 도심에서 살다가 전원으로 터를 옮기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처음 전원생활을 시작했을 때 어땠느냐는 질문에 진작에 내려올 걸 하는 후회가 가장 먼저 들었다고. “서울에선 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바쁘게 지내면서 계절이 변하는 모습에도 별다른 감흥을 못 느꼈죠. 하지만 이곳에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그게 가장 달라진 점이죠. 계절마다 달라지는 주변 풍경들, 시원하고 추운 바람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며 느끼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지더군요.” 풍선넝쿨이란 식물에 ‘삼위일체성령님’이란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작은 식물 하나에서도 큰 사랑을 발견하는 그다. 이처럼 자연을 가까이 느끼면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늘 변화하는 생활의 흐름을 잃지 않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할 땐 《가정화보》라는 잡지를 즐겨봤는데, 지금까지도 그 책을 정기구독하고 있다. 다양한 볼거리와 집안을 꾸미는 방법 등을 보며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안목을 키우려는 것이다. 찻잔을 촬영할 때에, 테이블 받침을 챙기는 모습에 그의 세심한 센스가 엿보인다. 자연 속에 건강한 삶이 있어 32살이란 늦은 나이에 일본에서 시작한 의상디자인 공부는 미국 유학길로까지 이어져 잘 진행됐지만 그는 민간요법에 관심이 더 많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수촌인 오시마(大島)지역 등을 직접 찾아 장수 노인들의 생활을 분석하고, 먹거리를 찾아가며 얻는 새로운 지식의 기쁨이란, 마음을 뻐근하게, 얼굴에 붉은 열이 올라 상기될 만큼 매력적이었다고. 늦은 나이에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때라서 일반 학생들보다는 여유가 있었고, 관망하는 자세로 생활에 임한 것이 더 도움이 된 듯 하단다. ‘대체의학’이란 말도 있지만, 그는 굳이 의학이란 말을 빼고라도 자연 그대로 자연 안에서 우리 몸을 충분히 건강하게 유지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 생각은 그의 생활을 지금까지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데 있어 중심이 되고 있다. 매일아침 일어나 25분 동안 풍욕(風浴)을 즐기고, 맨드라미 잎을 따다 김치를 만들고, 백일홍과 천일홍 꽃잎을 따다 차를 만드는 등 자연을 생활 속으로 옮겨 쓰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김정덕 씨는 자연식을 위주로 하는 음식점에 음식과 관련된 카운셀링을 하며, 수익을 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카운셀링과 함께 《壽테크》라는 사보에 〈김정덕의 웰빙라이프〉를 진행한 기사를 모아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산모를 위한 산후 전후의 건강 관리법에 관한 자료도 수집단계에 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간에도 그의 전화는 계속해서 벨소리를 내느라 바빴다. ‘들꽃피는 언덕’이란 음식점의 주인이 민들레 김치와 오이지가 맛이 너무 잘 들어 손님들의 반응이 좋다는 내용이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두 팀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전원생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활을 내보이며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전원에서 살려면 무엇보다 자연에 절대적으로 순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름에 더운 바람이 불면 더운 대로 손부채나 부채를 사용해 차분히 더위를 가라앉히고, 겨울에는 추운 대로 불을 떼면서 살아야죠. 요즘에는 방 안에서 반팔만으로 사계절을 나잖아요. 난방이 잘 돼 그런지, 계절에 동화되지 못한 채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자연 환경에 동화되는 것이 전원생활의 기본인데 말예요.” 글 조영옥 기자 / 사진 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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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 자연을 옮기며 사는 황토연구가 김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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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만난 사람]생활 속의 황토연구가 김정덕
- 생활 속의 황토연구가 김정덕 《황토집과 자연건강법》이란 책을 통해 생활 속에서 자연을 실천하며 사는 김정덕 씨. 충남 천안시 병천면의 황토집에서 생활한 지 16년째인 그는 늘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을 맞느라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다. 일본에서 전공한 의상디자인과는 별도로 자연 속에서 모든 생활을 실천하는 일본인의 삶의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까지 그러한 생활을 꾸준히 연구하며 지내고 있다. 자연 그대로를 입고, 먹고, 마시고 하는 그의 생활은 한마디로 요즘 회자되는 ‘웰빙(Well-Being)’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한 김정덕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집 입구 초가지붕 정자와 백일홍의 붉은 빛이 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모습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집 안에서 김정덕 씨가 나오며 인사를 건넨다. 1935년생이라는 자료를 보고 하얗게 센머리에 연로한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리게 한 정정한 모습에 잠시 놀라게 된다. 마당에 심은 꽃과 처음 보는 식물들의 이름을 물어보며, 처음 안내를 받은 곳은 ‘약방’이라고 부르는 황토방. 허리를 깊이 숙이고 들어가야 할 만큼 작은 방문과 낮은 천장이 다락방을 연상케 하는 곳이다.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이라며 직접 풀을 먹여 씌운 이불을 끌어다 주는 손길이 마치 시골 외할머니댁을 찾은 느낌이다. 온돌방의 매력을 담은 작업실 김정덕 씨가 사는 집은 크게 3동으로 나뉘어져 있다. 약방과 거실이 있는 동과 살림채, 2003년에 완공한 서재로 구성돼 있다. 심야전기보일러와 온돌을 겸용한 약방은, 방 안에 개수대를 마련해 차 준비를 할 수 있게 했다. 약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분위기에 푹 빠져들어 좀체 밖으로 나가기 싫어한다고 한다. 방문한 날에도 가을바람의 차가운 기운이 계속 됐고, 덕분에 따뜻한 온돌방의 기운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먹거리를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자연소재인 황토에 관심을 갖게 됐다. 김정덕 씨는 그간의 노하우를 오산주택에 제공하면서 황토방 보급에 힘쓰고 있다. 1년간의 공사 끝에 2003년 완공한 서재는 외관이 깔끔한데 방 안에는 아늑한 분위기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을 정도다. 닥종이로 벽을 바르고, 차를 마시게끔 이곳에도 개수대를 설치했다. 황토방에 걸맞게 방에는 옛 정취 물씬 풍기는 소품들로 꾸며 놓았다. 약방과 서재에는 히말라야에서 들여온 ‘암염(岩鹽)’이 있는데, 전등 주변에 놓아두면 스탠드를 대신할 만큼 아름다운 조명을 낸다고 한다. 안살림을 사는 살림채에서는 손님에게 대접할 각종 차를 준비하느라 늘 며느리의 손길이 바쁘다. 이곳에는 김정덕 씨의 작업실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바느질방’이다.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만큼 자신이 입는 옷을 손수 수선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만드는 공간이다. 각 동마다 어김없이 자리한 작업실은 바쁜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김정덕 씨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1988년. 도심에서 살다가 전원으로 터를 옮기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처음 전원생활을 시작했을 때 어땠느냐는 질문에 진작에 내려올 걸 하는 후회가 가장 먼저 들었다고. “서울에선 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바쁘게 지내면서 계절이 변하는 모습에도 별다른 감흥을 못 느꼈죠. 하지만 이곳에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그게 가장 달라진 점이죠. 계절마다 달라지는 주변 풍경들, 시원하고 추운 바람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며 느끼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지더군요.” 풍선넝쿨이란 식물에 ‘삼위일체성령님’이란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작은 식물 하나에서도 큰 사랑을 발견하는 그다. 이처럼 자연을 가까이 느끼면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늘 변화하는 생활의 흐름을 잃지 않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할 땐 《가정화보》라는 잡지를 즐겨봤는데, 지금까지도 그 책을 정기구독하고 있다. 다양한 볼거리와 집안을 꾸미는 방법 등을 보며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안목을 키우려는 것이다. 찻잔을 촬영할 때에, 테이블 받침을 챙기는 모습에 그의 세심한 센스가 엿보인다. 자연 속에 건강한 삶이 있어 32살이란 늦은 나이에 일본에서 시작한 의상디자인 공부는 미국 유학길로까지 이어져 잘 진행됐지만 그는 민간요법에 관심이 더 많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수촌인 오시마(大島)지역 등을 직접 찾아 장수 노인들의 생활을 분석하고, 먹거리를 찾아가며 얻는 새로운 지식의 기쁨이란, 마음을 뻐근하게, 얼굴에 붉은 열이 올라 상기될 만큼 매력적이었다고. 늦은 나이에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때라서 일반 학생들보다는 여유가 있었고, 관망하는 자세로 생활에 임한 것이 더 도움이 된 듯 하단다. ‘대체의학’이란 말도 있지만, 그는 굳이 의학이란 말을 빼고라도 자연 그대로 자연 안에서 우리 몸을 충분히 건강하게 유지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 생각은 그의 생활을 지금까지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데 있어 중심이 되고 있다. 매일아침 일어나 25분 동안 풍욕(風浴)을 즐기고, 맨드라미 잎을 따다 김치를 만들고, 백일홍과 천일홍 꽃잎을 따다 차를 만드는 등 자연을 생활 속으로 옮겨 쓰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김정덕 씨는 자연식을 위주로 하는 음식점에 음식과 관련된 카운셀링을 하며, 수익을 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카운셀링과 함께 《壽테크》라는 사보에 〈김정덕의 웰빙라이프〉를 진행한 기사를 모아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산모를 위한 산후 전후의 건강 관리법에 관한 자료도 수집단계에 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간에도 그의 전화는 계속해서 벨소리를 내느라 바빴다. ‘들꽃피는 언덕’이란 음식점의 주인이 민들레 김치와 오이지가 맛이 너무 잘 들어 손님들의 반응이 좋다는 내용이다.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두 팀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전원생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활을 내보이며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전원에서 살려면 무엇보다 자연에 절대적으로 순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름에 더운 바람이 불면 더운 대로 손부채나 부채를 사용해 차분히 더위를 가라앉히고, 겨울에는 추운 대로 불을 떼면서 살아야죠. 요즘에는 방 안에서 반팔만으로 사계절을 나잖아요. 난방이 잘 돼 그런지, 계절에 동화되지 못한 채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자연 환경에 동화되는 것이 전원생활의 기본인데 말예요.” 田 글 조영옥 기자 / 사진 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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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울퉁불퉁 메주로 장 담그는 이야기
-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면서 도시에서 정착하게 된 사람이 있다. 그는 어릴 때 겪었던 사건과 추억들을 회상해 감칠맛 나고 구수한 이야기들을 참 잘 써낸다. 지금 30대 후반 나이까지는 시골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에 가슴 따뜻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나의 경우, 그런 감성을 동경하다가 서른이 넘어서 시골로 귀향해 이제야 그런 감성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내가 처음 만난 시골은 순박하지만 거칠어서 그 속살에 살갗을 베일 것 같은 연인과 사귀는 느낌이었다. 사랑하지만, 손을 잡고 포옹이라도 하려면 생채기를 감수해야 할 위험한 연인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계속 사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정이 들어서 발목이 잡혀버린 시골생활에서 우리가 처음 한 일은 장 담그는 일이었다. 콩대를 베는 일보다 보랏빛 쑥부쟁이가 살랑살랑 허리를 흔드는 밭둑에 더 자주 눈길을 주면서 서툰 손길로 수확한 콩으로 처음 메주를 만들었던 것이 벌써 5년 전이었던가. 그렇게 흐르는 세월 속에 이제는 쑥부쟁이 따위에 눈길을 빼앗기기보다 마른 콩깍지에서 튀어나가는 콩알에 더 신경이 쓰이는 시골아낙으로 변신을 했다. 계란말이와 소시지를 도시락 반찬으로 자주 먹던 세대였기에 된장찌개를 먹으며 성장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던 내게 장 담그는 일은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지금부터 장 담글 줄 모르는 요즘 여자들에 속했던 내가 장맛의 오덕(五德)을 읊을 정도가 된 이야기를 해 보겠다. 가마솥에 콩을 씻어 안치고 장작불을 때는 일은 지금도 재미있다. 남편과 나는 찬물에 콩을 씻는 일은 서로 미루면서도 불을 지피는 아궁이 앞에서는 주도권을 잡으려고 부지깽이부터 들고 설친다. “잠자리에 오줌을 싼다”는 어른들의 핀잔을 듣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불장난의 매력은 나이를 초월하는 모양이다. 마른 나무가 타면서 나오는 그을음내가 살짝 배서 구수한 냄새를 내며 콩이 다 삶아지면 나무절구에 콩콩 찧는다. 이 일은 재미있어 보이지만 힘을 쓰는 일이 장난이 아니다. 주로 남편이 절구질을 하면 찧어진 콩으로 네모난 메주로 만드는 일은 내 몫이다. 흔히 메주는 ‘못 생긴 것’의 대명사로 일컫는데 한 번도 메주를 만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비유를 쓸 자격이 없다. 내가 메주를 만들어 보니 메주는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만드는 데에 그 기술의 핵심이 있었다. 모양이야 대충 직육면체를 유지하면 되지만 단단하게 꼭꼭 뭉치지 않으면 짚으로 엮어서 말리는 과정에서 부서지고 갈라지기 때문에 자꾸 다지다 보니 일정하지 않은 들쑥날쑥한 모양이 되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았다. 그렇게 만든 메주는 그늘에서 표면이 꾸덕꾸덕해지게 이틀 정도 말린 후에는 짚으로 엮어서 눈과 비에 맞지 않게 처마 밑에 매달아서 햇볕과 바람에 벽돌처럼 단단해질 때까지 말린다. 이 과정이 보통 40일 정도 걸린다. 그 다음에는 메주를 ‘띄운다’고 하는데 이 과정이야말로 장맛을 좌우하는 첫 번째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 음식 문화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발효 과학의 기술이 바로 이 ‘띄우기’에 집약되어 있다. 코끝을 자극하는 청국장이 바로 이 띄우기의 기술을 적용해 햇콩 맛을 볼 수 있게 만든 인스턴트 장이다. 흔히 백태라고 하는 메주콩은 밥에 넣어 먹거나 요리에 응용해도 그 자체로는 별 맛이 없지만 이렇게 띄워서 청국장을 만들거나 된장을 담가야 그 깊은 속 맛을 보여준다. 잘 마른 메주는 따뜻한 온돌방에서 짚을 깔고 켜켜이 쌓아 놓은 다음에 이불을 덮어서 놔두면 구수한 냄새가 나면서 하얀 곰팡이가 메주의 표면을 감싸게 되고 메주 속이 고약처럼 찐득하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 이 때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지 못해서 띄우기가 잘못되면 장맛이 없고 역하고 쿰쿰한 냄새가 난다. 된장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런 잘못 띄운 메주로 담근 장을 먹으면서 생긴 냄새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친 메주야말로 정말 메주다. 조금씩 갈라지고 거친 피부에 거뭇한 곰팡이까지 핀, 간신히 직육면체의 형태를 유지한 메주의 모습은 파란만장한 한 세월을 이겨낸 팔자 드센 여인을 닮았다고나 할까? 메주를 못생겼다고 타박하기 이전에 곰삭은 생의 뒷 힘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야 말로 장맛을 논할 수 있으리……. 이렇게 완성품 메주가 되기까지 약 70일 정도 걸리는 동안 비바람에 묻어 온 먼지와 짚에서 붙은 검불들을 물로 싹싹 씻어내고 나면 비교적 우아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여기까지의 과정이 농경사회에서는 한 해 농사의 끝이었다. 다시 새해가 돌아와 설을 쇠고 나면 여자들은 겨우내 말리고 띄운 메주로 장을 담을 준비에 들어간다. 말(午)날이나 양(未)날로 날을 잡아 소금을 준비해 놓는다. 정월 첫 말날을 장 담그는 날로 정한 우리는 설을 지내는 것보다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우리 집 장 담그기에는 전통 방법을 준수하면서도 특별한 비법이 있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먼저 굵은 대나무를 잘라다가 가마솥에 물을 붓고 끊인 물에 죽염을 풀어서 가라앉힌 물을 장 담그는 물로 사용한다. 손이 많이 가지만 대나무의 유효 성분이 잡균의 번식을 막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이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는 24절기를 상징하는 24가지 한약재를 사다가 분말로 만들어 놓은 것을 면주머니에 담아놓아야 한다. 24절기의 기운이 들어간 약재들은 장이 익는 한 해 동안 그 효능을 유감없이 발휘해 더 나은 장맛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장을 담가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떠돌이 스님의 믿거나 말거나 한 말을 새겨들은 실험 정신이 강한 남편의 밀어붙이기가 우리 집 장맛의 비밀이 된 지 벌써 여러 해를 나고 있다. ‘왜 시골에 사느냐?’ 고 물으면 그냥 웃을 수 있는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제 시골에 사는 재미의 한 가지에는 울퉁불퉁 못생기고 곰삭은 메주로 장을 담가 친구들을 불러들여 끓여 먹인 후에 ‘기가 막히게 맛있다’는 옆구리 찔려서 아부하는 말을 듣는 재미도 추가된다. 田 ■ 글·오수향(주부) 글쓴이 오수향은 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 폐교에 살면서 글쓰기의 꿈을 쫓아가고 있는 주부입니다. 공주 KBS,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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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울퉁불퉁 메주로 장 담그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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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의 아이들 교육 “좋은 점이 더 많아요”
- 언덕에 지은집 시골에서의 아이들 교육 “좋은 점이 더 많아요” -------------------------------------------------------------------------------- 한옥이 사라져가고 있다. 사회가 급변하면서 서구의 편리함을 극대화한 건축물들이 들어오고 우리네 조상의 숨결이 묻어있는 한옥은 그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자연과 융화되고 수많은 삶의 지혜를 담고있는 한옥은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서구의 주택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민들레울이 지어지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옥이 갖고 있는 미를 최대한 살려보려 노력했고 한옥에 담긴 조상의 지혜를 얻으려 애도 썼다. 그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한옥에 대해 알게 되었고 우리의 것, 한옥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짧은 소견이지만 참된 주가(柱家)문화가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민들레울이 지어지는 과정을 통해 한옥의 아름다움과 그 조영사상을 소개하고자 몇 차례에 걸쳐 글을 싣는다. -------------------------------------------------------------------------------- 집을 왜 짓는가? 집을 어떻게 짓는가? 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집짓기의 주체는 누구인가? 집을 짓고자 하면서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물음표가 만들어진다. 요즘은 집이 재산 증식에 큰 몫을 하면서 마치 아파트 하나 장만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양 매달리고 있지만 정작 집에 대한 본질적 의미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규격화된 집에서 틀에 박혀 살다보니 철학과 감정이 깃들 지 않은 메마른 집처럼 인간도 황폐화되어 가는 것이다. 집을 왜 짓는가? 이는 단순히 집짓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한 통찰의 문제이다. 인간이란 여럿이 함께 사는 사회성을 지닌 동물이므로 집이란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단순히 건축적인 면으로 들여다 볼 때 그 집은 삶과는 상관없는 사물로 그치는 것이다. 집의 참다운 가치와 아름다움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철학과 감정이 깃드는 데서 나온다. 사람이 주인이 된 건축, 주인의 땀과 정성이 재어져 삶의 진솔함이 베어나는 집이야말로 이상성의 집이다. 한옥에 대한 관심 건축에 대한 관심과 일가견은 물론 조그만치의 상식도 없다. 건축은 그저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나 관여하는 것이라 치부하고 일별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건축양식이니 건축에 조영된 사상, 숨은 뜻 따위엔 아예 문외한 일 수밖에... 거처하는 집조차 지어진 집이니 그저 그 안에 들어가 ‘살아주고’ ‘살아가는’ 것이 그저 당연하다 여길 뿐이었다. 일반적인 집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이니 ‘한옥’에 대해서는 새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한옥과 양옥의 구분, 또 집과 건축의 구분은 무엇일까? 그리고 한옥이라 하면 도대체 어디까지를 일컫는가? 단순히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기와집, 초가, 너와집, 귀틀집 등으로만 구분하는 것이 한옥의 범주일까? 그렇다면 이런 유형의 집들은 과연 언제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이 땅위에 정착되었고 또 어떤 이유로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가기 시작했는가? 집에, 구체적으로 우리의 ‘한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마자 이런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한옥에 관련된 책들을 들춰본다. 이 방면의 자료들을 수집하여 상식의 범위를 넓혀간다. 집 구경도 다니기 시작한다. 이 방면에 아무런 식견이나 공부가 안된 상태이니 그야말로 코끼리 발가락 만지는 식이다. 이따금 한옥에 관련된 강좌를 듣기도 하여 견문을 넓혀간다. 그 중 가장 도움을 받은 것은 신영훈님의 강좌와 그의 저서들이다. 목수(木手)신영훈님에 의해 한옥의 미학의 우수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네 살림집 ‘한옥’ ‘집’이라는 개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단순히 외형적인 건물로써의 ‘집’과 삶의 공간으로서의 ‘살림집’, 가족과 가문으로의 집 혹은 ‘집안’ 등으로 구분되어 지고, 건물을 의미하는 집은 우리의 주거문화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문화를 달리하는 민족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살림집을 가지게 된다. 한국인들이 즐겨 입었던 의복을 한복(韓服)이라 부르고 전래의 우리 음식을 한식(韓食)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또 우리는 우리네 조상이 살았던 집, 살림집을 한옥(韓屋)이라 부른다. 이는 다른 민족과 구분되어 우리만이 갖는 독특한 생활문화의 반영인데, 특히 우리네 살림집 ‘한옥’은 그 어떤 형태의 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독특한 구조로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지혜를 보여준다. 온돌과 마루를 취한 구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정형화된 한옥은 온돌과 마루를 함께 취한 이상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방에서 시작된 원두막 형태의 집들이 북상하면서 지상으로 낮아져 마루로 발전하였고, 주로 북방에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들인 화덕의 형태가 구들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두가지 요소가 한반도에서 결합해 독특한 주거 문화로 정착된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유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특징이 내재된 한옥이 지금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집을 옮길 수 있음은 한옥의 큰 장점 민들레울의 기와집(본채와 사랑채)은 ‘이실집’이다. 즉 다른 곳에서 옮겨서 지은 집이라는 의미인데, 집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은 한옥의 또 하나의 큰 장점이다. 이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사개를 맞춰 나무를 조립하기에 가능한 것으로, 한치의 빈틈도 없이 치목하여 기둥과 도리, 보 등이 서로 맞물리므로 못을 사용하지 않고도 수백 수천년을 견딜 수 있으며 필요하면 그대로 해체하여 옮겨서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이 집이 세워졌던 곳은 서대문구 천연동이다. 지금의 독립문 근처로 남향의 야트막한 둔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주변여건 때문인 듯 대문이 북쪽으로 나있었다는 것과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전각이 한칸 돌출 된 형태의 출입구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본래 우리의 전통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유형이다. 이 집이 조성된 연대가 소화 14년(서기 1939년), 일제 강점기가 막바지 기승을 부릴 때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형성된 것이다. 시대적 산물이라고나 할까? 집을 옮기면서 이 부분을 없앨까도 생각했지만 위치만 바꾸어 그대로 살렸다. 땅에는 터의 영기가 있다. 땅에는 터의 영기( 氣)가 있다. 그 터에 신이 있다는 설정이다. 우리는 이를 토신(土神)이라 부른다. 농사를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땅은 경배와 소출의 대상이었지 물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터를 사용하는 이의 마음이다. 등기상의 주인은 후손들에게서 잠시 터를 빌려 사용한다는 마음으로 가꾸고 보존하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민들레울이 들어선 이 터는 좌향이 썩 훌륭하다. 알맞은 정도의 배산(背山)과 적지만 임수(臨水)했다. 뒤쪽의 산은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편안한 높이이며 앞쪽으로는 수목원 삼림욕장과 광릉을 감싸안은 죽엽산 줄기아래 논과 맞닿은 곳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터는 이쯤이면 썩 괜찮은 것 같다. 완성하는 지기(地氣)가 발현한다고까지야 장담할 수 없지만 시원스런 눈맛이 그만쯤이면 됐다. ‘민들레울’이 지어진 까닭 민들레울은 몇 가지를 지향하며 조형되었다. 우선 건물로서의 민들레울은 전통에 바탕을 두어 옛 것을 재현하고자 했다. 민들레울을 구성한 본채와 사랑채, 교육관, 측간 등이 초가와 기와, 돌기와 집으로 이루어졌다. 실내재료와 인테리어 등은 현대적인 소재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골격과 형태는 전통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민들레 울은 전통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자 조성되었다. 건물로서의 전통 가옥에서 나아가 집이 갖는 문화성을 나타내기 위해 생활문화공간으로 꾸며졌다. 민들레울 본관은 살림집의 구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전통 차실과 한식집으로 마련되었다. 본관 바로 왼편에 있는 건물(달림방)은 사랑채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구들을 들인 전형적인 온돌방이다. 사랑채 앞쪽으로는 초가로 지은 교육관(다린초당)이 자리잡고 있다. 전통문화 강좌와 더불어 초중고 학생들의 전통문화교육 공간을 위해 세워진 공간이다. 이렇듯 민들레울에 들어선 건축물들은 제각각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갖도록 조영되었다. 민들레울은 궁극적으로 복합적인 어울림 터다. 그러므로 이 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열린 공간이다. 전통생활문화의 열린 마당! 이는 전통문화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정착되어지길 바라는 취지이다. 너무 설명이 장황하게 되었다. 아무튼 앞으로 민들레울이 지어지는 과정을 건물로서, 그리고 조상의 살림집으로서 한옥이 갖는 특성을 살펴보기로 하겠다.田 ■ 글·정순오 (민들레울 대표 031-544-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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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의 아이들 교육 “좋은 점이 더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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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전원주택라이프] 전원주택_화천 목조주택_리슈건축사사무소
- 월간전원주택라이프 http://www.countryhome.co.kr 구들방 품은 하이브리드 주택 화천 화락재 시골생활을 좋아하는 부부의 의뢰였다. 기존에 소박한 목조주택 옆에 본격적인 시골생활을 위한 주택을 짓고 싶어 했다. 팀버프레임 중목구조의 목조주택을 원했고, 채광과 조망을 잘 살리는 집이고자 했다. 기존 주택과도 어울리는 집으로 배치되기를 원했다. 집 이름은 ‘주변 자연 속 꽃들과 함께 즐거운 삶’이고자 하는 의미로 화락재化樂齋로 지었다. 글 홍만식(리슈건축사사무소 대표) | 사진 김용순 작가 HOUSE NOTE DATA 위치 강원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지역/지구 계획관리지역 건축구조 일반 목구조 대지면적 1050.00㎡(317.62평) 건축면적 205.39㎡(62.13평, 기존주택 포함) 전체 연면적 264.66㎡(80.05평, 기존주택 포함) 신축 연면적 168.66㎡(51.01평) 1층 106.07㎡(32.08평) 2층 62.59㎡(18.93평) 건폐율 19.56%(기존주택 포함) 용적률 25.21%(기존주택 포함) 설계기간 2018년 4월~8월 공사기간 2019년 4월~9월 건축비용 750만 원(3.3㎡당) 설계 리슈건축사사무소 070-4946-8783 www.richue.com 시공 반하우스 MATERIAL 외부마감 지붕 - 리얼징크 돌출 이음 벽 - 파벽돌 타일 데크 - 방부목(툇마루), 석재(테라스) 내부마감 천장 - 석고보드, 벽지 벽 - 석고보드, 벽지 바닥 - 강마루 계단실 디딤판 - 집성목 단열재 지붕 - 글라스울 R32 외단열 - T60 비드법 보온판 가등급 내단열 - 글라스울 R21 창호 시스템창호(페도라시스템) 현관 성우스타게이트(단열도어) 옛집과 새집의 만남 남쪽으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서쪽으로 조망이 수려한 대지다. 기존 주택은 남쪽 채광에 중점을 둔 배치로 조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기존 주택의 남쪽으로 마당을 두는 ‘ㄱ’자 배치로 옛집과 새집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관계로 구성하기로 했다. ‘ㄱ’자의 한 면인 동쪽으로 거실과 주방, 식당을 나란히 두고, 다른 한 면인 남쪽으로는 황토방과 안방을 두어 거실과 안방에서 서쪽 풍경을 조망할 수 있게 계획했다. 두 집으로 만들어진 안마당은 두 집을 드나드는 통로이면서 생활 속에서 다양한 일상을 겸하는 이벤트 장소가 된다. 옛집과 새집이 만들어낸 마당은 내외부 공간 어디에서나 시각적 체험적으로 중심이 되고, 두 집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중목구조와 경량 목구조의 만남 건축주는 중후하면서도 모던한 팀버프레임 중목구조의 집을 원했다. 설계를 하면서 전체를 중목구조로 하면 준비된 예산을 초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요 공간인 거실과 식당 영역은 팀버프레임 중목구조로 하면서 나머지는 경량 목구조로 결합하는 하이브리드 팀버프레임 주택을 계획했다. 팀버프레임 목구조 전문가인 반하우스 송만영 대표와 수차례 협의를 하면서 새로운 시도인 하이브리드 팀버프레임 구조를 적용했다. 이로써 비용은 절감하면서 팀버프레임 목구조의 중후함과 자연 목재의 느낌을 잘 살려낸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구들 황토방과 온돌방의 만남 건축주는 직접 나무를 태워 난방을 하는 구들 황토방을 만들고 싶어 했다. 우리는 안방과 식당 사이에 아궁이와 구들 황토방을 배치해 안방과 연계된 공간이 되도록 했다. 아궁이가 있는 공간에는 문이 있는 실내공간으로 만들어 구들 황토방과 온돌방의 결합으로 생길 수 있는 관리나 단열 문제를 해결했다. 구들 황토방은 한식 창호로 계획해 운치를 더하고, 안방 쪽 서쪽 풍경과 안마당 쪽을 바라 볼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온돌방인 안방과 구들 황토방의 만남은 과거 주거생활의 운치와 현재 주거생활의 일상이 결합된 실용공간이자 감성의 장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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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전원주택라이프] 전원주택_화천 목조주택_리슈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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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전원주택라이프] 전원주택_경산 목조주택_다우주택
- 월간전원주택라이프 http://www.countryhome.co.kr 마스터 빌더를 향한 도전 ‘원효·설총·일연’ 세 명의 성현聖賢(삼성현)을 볼 수 있는 삼성현역사문화관. 주말이면 문화관을 찾는 사람들의 줄이 이어진다. 이곳 문화관 주차장 옆에 시선을 끄는 집이 있다. 집을 구경하기 위해 주변을 배회하는 낯선 이들을 언제나 스스럼없이 밝게 맞이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건축주 황종대 대표다. 글과 사진 백홍기 취재협조 다우주택 www.다우주택.com HOUSE NOTE DATA · 위 치 경북 경산시 남산면 상대로 · 대지면적 495.00㎡(150.00평) · 건축면적 92.40㎡(28.00평) · 연 면 적 158.40㎡(48.00평) 지하 29.70㎡(9.00평) 1층 92.40㎡(28.00평) 2층 66.00㎡(20.00평) 포치 39.6㎡(12.00평) · 건 폐 율 18.66% · 용 적 률 32.00% · 건축구조 중량목구조 · 용 도 관리지역 · 설계기간 2015년 6월 ~ 2015년 8월 · 공사기간 2015년 8월 ~ 2015년 12월 · 공사비용 2억7천만 원(3.3㎡당 600만 원) MATERIAL 외부마감 지붕 - 포르투갈 기와 외벽 - 상단 스타코, 하단 적벽돌 내부마감 외벽-구조재 노출, 실크벽지 천장 - 미송 원목 바닥 - 옥돌, 모노륨 4.5 창호 - 시스템 창호(아이너스) 단열재 내벽 - 인슐레이션 R19 설계 및 시공 다우주택 053-853-6110 www.다우주택.com 2015년 경산시청에서 동쪽 큰길 따라 5㎞ 지점에 경산의 랜드마크 삼성현역사문화관이 들어섰다. 문화관은 큰길에서 300m 안쪽에 자리 잡았다. 같은 해 문화관 인근에 황 대표가 집을 지었다. 사각형의 대지는 뒤쪽이 3m 정도 낮아 도로에 맞춰 성토한 뒤 평평하게 다졌다. 레벨 차에 의해 생긴 뒤쪽 마당 아래엔 지하 창고를 마련했다. 창고는 비밀 문을 지나는 것처럼 뒷마당 중앙에 통로를 연결했다. 집은 곳곳에 꽃으로 장식해 화사하고 노을의 따뜻한 색감을 표현해 온기가 느껴진다. 1층 정면을 감싼 포치는 데크 앞까지 나선 처마를 받친다. 포치의 부드러운 아치는 2층 테라스에도 적용해 집을 바라보는 사람의 감성을 자극한다. 부드러움과 견고함 갖춘 중량목구조 데크는 거실과 주방 동선을 연결해 선이 매끄럽다. 포치는 데크에서의 이동과 활동에 자유로움을 부여하고, 여름철 햇빛이 거실로 직접 들어오는 걸 막는 차양 역할도 한다. 부드러운 아치를 연계한 2층 발코니는 안쪽에 진한 오렌지색으로 칠해 개성을 발산한다. 내부는 외형과 다른 느낌이다. 외형이 바람에 흔들리는 꽃이라면 내부는 꼿꼿하게 선 나무다. 중량목구조의 구조재를 드러내 인테리어 소재로 이용해 인상이 강하다. 나무의 유려한 질감과 따뜻한 색감이 강인함과 균형을 이뤄 무겁진 않다. 시야에 걸리는 구조재는 모든 모서리를 둥근 패턴으로 따내 한결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거실은 바닥을 밝은 포세린타일로 마감하고 벽난로를 설치해 밝고 아늑한 공간으로 계획했다. 현관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게 배치한 주방은 한눈에 봐도 넉넉하다. 폭이 넓은 ㄷ자 형태로 싱크대를 계획해 수납공간도 충분해 보인다. 이 때문에 다른 공간에 수납공간을 만들지 않아 여유가 넘친다. 식탁은 주방 옆에 나란히 두고 동선을 데크와 연결해 이동이 자유롭다. 1층엔 여러 사람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온돌방 하나만 뒀다. 온돌방은 바닥을 옥돌로 마감해 가족의 건강을 담당하는 공간이다. 침실은 2층에 뒀다. 손님이 자주 찾아 침실을 1층 공유 공간과 충분한 거리를 뒀다. 그럼에도 오픈 천장을 통해 소통은 자유롭다. 경계와 소통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계획해서다. 나무에 생명을 불어 넣다 준공을 하고 입주한 지 수개월이 지났다. 집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바쁜 일상에 간혹 숨 쉴 여유가 생기면 하나씩 완성하다 보니 아직 미흡한 부분이 남았다. “이번에 대문 기와를 얹었으니 다음엔 문을 달아야죠. 그다음엔 울타리도 손보고, 마당도 좀 가꿔야죠. 어차피 집은 사는 동안 손길이 필요해요. 천천히 하는 거죠.” 집주인이자 시공을 맡은 황 대표는 스무 살 전에 나무를 잡기 시작했다. 나무를 깎고 다듬고 보듬으며 살아 온 지 30년에 가깝다. 그에게 목수는 나무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래서 끌렸다. 그가 집을 짓는 건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과정이다. “집은 내가 낳은 또 다른 자식입니다. 그러니 내가 지은 집을 좋아하고 예뻐하면 기분이 좋죠. 이 일을 하는 보람이기도 합니다.” 건축은 공학의 집합이고, 창조의 작업이며, 혼을 담아내는 과정이다. 그러니 일정한 경지에 올라서면 도편수나 제와장이라는 ‘장인’ 호칭과 함께 살아있는 문화재로 인정받는다. 이때부터 집은 하나의 작품이고 예술로 평가받는다. 오랜 세월 집만 바라보고 살아온 황 대표도 작은 바람이 있다. 마스터 빌더가 되기 위한 꿈이다. 집에 관한 모든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해 사람들에게 집다운 집을 알리고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쉴 틈이 없다. 일을 마치고도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한 노력으로 치열하다. 그의 치열함은 세상이 아닌 자신을 향한다. 고단하고 지루하지만,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철과 같아 지치지 않는다. 그래서 기대된다. 그의 내일이. 십 년 뒤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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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전원주택라이프] 전원주택_경산 목조주택_다우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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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전원주택라이프] 전원주택_구미 황토주택_게르마늄황토집
- 월간전원주택라이프 http://www.countryhome.co.kr 황토의 기운으로 건강을 찾다! 중후한 멋과 옛것의 감성이 담겨진 주택. 여기에 친환경 자재만을 사용해 건강을 되찾고 건축주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편리한 생활공간까지 담아내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글과 사진 백홍기 취재협조 게르마늄황토집 www.게르마늄황토집.kr HOUSE NOTE DATA · 위치 :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 · 대지면적 : 1,088.00㎡(329.69평) · 건축면적 : 159.77㎡(48.41평) · 연면적 : 198.10㎡(60.03평) 지하 21.83㎡(6.61평) 1층 120.08㎡(36.38평) 2층 16.50㎡(5.00평) 창고 39.69㎡(12.02평) · 건폐율 : 14.68% · 용적률 : 16.20% · 건축구조 : 중량목구조 · 용도 : 자연녹지지역 · 설계기간 : 2015년 2월 ~ 2015년 3월 · 공사기간 : 2015년 4월 ~ 2016년 4월 MATERIAL · 외부마감 : 지붕 - 오지기와 외벽 - 황토벽돌 · 내부마감 : 벽 - 게르마늄 황토벽돌, 닥나무 한지 바닥 - 게르마늄 황토 바닥재 + 벨기에 퀵스텝마루 창호 - 알파칸 삼중유리 · 단열재 : 지붕 - T50 우레탄 난연 스티로폼 + 수퍼 R30 열 반사 단열재 외벽 - T60 열 반사 단열재 · 주방기구 : 현장 주문 제작 · 난방기구 : 지열보일러, 구들, 벽난로 설계 운정건축 시공 게르마늄황토집 031-798-3544 www.게르마늄황토집.kr 마른장마에 반가운 비가 한차례 지나갔다. 짙푸른 하늘엔 옅은 흰 구름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 아래 붉은빛을 머금은 황토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집 앞에서 반갑게 맞아준 이는 안주인 장재희 씨다. 집 안으로 안내하는 장 씨를 따라 들어서자 강렬했던 밖의 열기를 시원한 공기가 식혀준다. 그녀는 올해 5월에 입주하고 한 달 내내 집들이하면서 “꼼꼼하게 집을 잘 지었다”는 지인들의 칭찬에 내심 뿌듯한 표정을 보였다. 한눈에 반한 황토주택 “몸에 좋은 황토로 지은 집을 원했는데, 옛날 황토집 같은 스타일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여기저기 찾다 우연히 게르마늄황토주택에서 지은 집을 보니 다른 집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오픈 천장으로 2층 높이까지 시원하게 열린 거실 창, 자연스러운 색감의 황토벽돌, 과하지 않고 단아한 모습의 박공지붕에 반한 장 씨는 모던 스타일을 고집하던 남편을 설득하기에 나섰다. 남편과 의견 차이가 쉽게 좁혀지지 않아 결정하기까지 쉽진 않았다. 부부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상황에서 황토주택의 장점이 결국, 박 씨의 양보를 끌어냈다. 산을 등지고 집 옆으로 개울이 흐르는 이곳은 마을 안쪽에 자리 잡아 통행하는 차량도 없어 조용하다. 시골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고 시내와 접근성도 좋아 전원주택 집터로는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이 땅은 애초에 맹지였다. 집터가 좋아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많았지만, 사봐야 집을 지을 수 없으니 집짓기엔 쓸모없는 땅이었다. 집을 지으려면 도로와 인접한 곳까지 500평이 넘는 땅을 사고 도로까지 내야 하니 부담이 컸던 것이다. “전부터 언니가 나란히 집을 짓자고 했어요. 그래서 함께 땅을 사고 도로를 내 집을 지을 수 있었죠. 오히려 맹지였던 게 좋은 땅을 적절하게 살 수 있었던 기회였죠.” 집을 짓는다는 소식에 가장 반겼던 이는 작은아들이다. 다락처럼 아늑하고 아담하면서 독립적인 공간을 갖고 싶어 했다.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작은아들은 주말이면 자신만의 공간에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군대에 들어간 큰아들은 1층에 방을 마련했다. 큰아들 역시 휴가 나와 집에서 쉴 때면, 그윽한 나무 향이 “숲 속에 있는 거 같다”며 즐거워한다. 코너를 활용한 수납공간 살다 보면 환경에 적응한다고 하지만,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전원생활도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때론,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들에 익숙해져야 한다. 건축주 장 씨의 전원생활에서 가장 위협적인 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다. 청개구리는 깜짝 놀래주는 게 자신의 본분인 양 곳곳에 숨어 장 씨를 노린다. 밖에선 늘 청개구리 습격에 살짝 긴장 아닌 긴장을 하지만, 집 안에 들어서면 지상 낙원이나 다름없다. 특히, 시원하게 넓은 창과 알록달록한 타일로 포인트를 넣은 주방은 장 씨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아파트에 살면서 창이 작고, 크기가 좁은 주방을 보면 늘 답답했어요. 그런데 여기는 양쪽으로 큰 창을 설치해 밖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서 즐거워요.” 주방 옆 코너는 자칫 버려질 수 있는 공간을 수납공간으로 활용한 점이 돋보인다. 맞은편에 배치한 다용도실은 문이 없고 수납장으로 경계를 나눴다.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 한 공간처럼 보이지만, 신발을 신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엄연히 분리된 공간이다. 주방과 다용도실은 간섭 없이 쉽게 이용할 수 있으면서 가사 일을 분리해 효율성이 높다. 2층엔 작은 테이블을 두고 한가로울 때 차 한잔의 여유를 누린다. 작고 소소하지만, 이곳의 여유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정한 휴식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2층 휴게 공간이 마음의 휴식처라면, 바깥 일로 고단할 때 몸의 피로를 푸는 온돌방은 육체의 휴식처다. 해 질 무렵 저녁을 해결하고 느릿느릿 데크로 나서서 늘 가볍게 산책을 즐긴다는 건축주 부부는 소쩍새 울음소리와 기척을 숨기려는 풀벌레들, 산과 들, 나무와 풀들 사이에서 생명의 기운을 얻는다. 그리고 집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문의 게르마늄황토집 T 031-798-3544 W www.게르마늄황토집.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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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전원주택라이프] 전원주택_구미 황토주택_게르마늄황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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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전원주택라이프] 전원주택, 제주 펜션_밀크인제주
- 월간전원주택라이프 http://www.countryhome.co.kr 몸은 가벼이 마음은 편하니 누이다 매서운 북서풍도 잠시 머물다 조용히 물러나는 서귀포 중산간지역. 조용히 새소리만 울려 퍼지는 이곳에 아담한 갤러리가… 아니 펜션이 있다. 두 채의 건물을 오로지 손님 한 팀만을 위해 독채로 운영하는 ‘밀크인 제주’ 펜션이다. 글과 사진 백홍기 취재협조 밀크인 제주 www.milkinjeju.com 건축 정보 DATA · 위 치 : 제주도 서귀포시 분토왓로 · 대지면적 : 659.39㎡(199.81평) · 건축면적 : 99.36㎡(30.10평) · 연 면 적 : 120.02㎡(36.36평) 지하 20.66㎡(6.26평) 1층 99.36㎡(30.10평) · 건 폐 율 : 15.07% · 용 적 률 : 15.07% · 건축구조 : 철근콘크리트 · 용 도 : 자연녹지지역 · 설계기간 : 2014년 5월 ~ 2014년 11월 · 공사기간 : 2014년 12월 ~ 2015년 09월 · 공사비용 : 2억 6천만 원 MATERIAL · 외부마감 : 지붕 - 제물방수 위 우레탄 마감 외벽 - 노출콘크리트, 적삼목 사이딩, 탄화 코르크보드 · 내부마감 : 외벽 - 친환경 페인트, 자기질 타일 천장 - 친환경 페인트 바닥 - 천연 입체 마루(헤링본), 바닥 - 도자기 타일 창호 - 시스템 창호(엔썸) · 단 열 재 : 지붕 - 가등급 2종1호1 150T 외벽 - 가등급 2종1호1 100T 바닥 - 가등급 2종1호1 150T · 주방기구 : 하이그로시(신성싱크) · 위생기구 : 유로젠 모던(아메리칸 스텐다드) 설계 아키포럼건축사사무소 시공 건축주 직영 010-5221-9321 www.milkinjeju.com 밀크인 제주(MILK in Jeju). 여기서 M.I.L.K는 Moments of Intimacy, Laughter and Kinship(친밀감과 웃음, 가족애의 순간들)의 약자다. M.I.L.K 프로젝트는 1999년 지오프 블랙웰이 뉴질랜드 M.I.L.K. 출판사에 사진공모전을 제안해 164개국에서 1만 7천 명의 사진가가 참여한 사상 최대 사진 프로젝트다. 이들 사진가에 의해 모인 4만여 장의 출품작을 FRIENDSHIP, LOVE, FAMILY라는 세 가지 주제로 각각 100장씩 추려내 사진집으로 출판했다. 사람들의 사랑이 담긴 다양한 순간을 남기기 위해 진행한 M.I.L.K 프로젝트는 사진을 좋아하는 펜션지기 이재선 씨의 마음을 울린 작업이기도 하다. 펜션 이름도 프로젝트 이름에서 따왔고 갤러리에 전시한 사진도 친구, 사랑, 가족이라는 3개의 테마를 압축해 놓은 것이다. 절제에서 단순미美 찾아 덜고, 또 덜어냈다. 불편과 거추장스러움은 덜어내고 단순함을 담아낸 미니멀리즘minimalism 개념으로 지었다. 남과 유사하거나 유행을 좇아 건물을 짓는 건 싫다고 했다. 나만의 것, 여기서만 누릴 수 있는 멋과 편안함을 찾았다고 한다. “건축도 유행이 있습니다. 최근 모던 스타일에 깔끔한 징크나 스타코를 많이 사용하죠. 밀크인 제주는 단순한 박스 형태에 적삼목 사이딩과 개방창의 황금분할비를 적용했어요. 따뜻하고 심플하면서 지속할 수 있는 아름다운 형태를 생각한 거죠. ‘Less is More(단순함이 가장 아름답다)’라는 것과 친환경 콘셉트로 박스 형태의 건축물을 제주도 전통 배치 형태인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로 재해석해 ㄱ자로 배치했어요.” 건물은 주변 자연경관을 거스르지 않는 높이의 단층으로 계획했다. 천연 코르크 보드로 제주도 현무암의 색감과 질감을 재현해 친근하면서 따듯한 느낌이 들도록 내·외부 포인트 마감재로 사용했다. 들어가고 나옴이 없는 밋밋한 입면이라 자칫 삭막해 보일 수 있는 건물을 적삼목과 코르크를 적절하게 사용해 절제된 단순미에 우아함을 갖춘 갤러리처럼 완성했다. 무엇보다 건물의 완성도를 높인 건 두 메스를 연결한 전이공간이다. 이 공간 하나로 바라보는 방향과 각도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보이며, 호기심과 긴장감을 담아냈다. 기능적으로도 중정과 대청마루, 내·외부 동선의 완충 역할을 하는 곳으로 건물의 핵심적인 공간이다. 쉬고 누리는 공간 안거리 현관에 들어서면 M.I.L.K 프로젝트 전시 서문과 옆으로 전시된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목적은 잊고 현실에 빠져 잠시 감상에 젖는다. 왼쪽 반대편 벽은 사진에서 사용하는 그레이카드와 같은 농도의 회색으로 벽을 칠해 사진의 집중도를 높였다. 높은 천장과 헤링본 무늬의 바닥으로 고급 갤러리를 연상케 하는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몇 권의 사진집이 감상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감상을 마치고 뒤돌아보며 어느덧 거실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실은 주방과 공유하는 공간이다. 원목의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주방과 거실이 나뉜다. 3m의 층높이로 시원한 공간감을 확보한 거실은 바닥부터 천정까지 이어진 전면 창의 개방감으로 자연을 내부로 끌어들였다. 데크 너머로 펼쳐진 서귀포 앞바다의 경관은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을 선사한다. 여행의 기본은 쉼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할 때 비로소 여행의 참맛을 안다. 만약 여행이 일상의 연속으로 마친다면 돌아오는 발걸음 가볍지 않을 것이다. 펜션지기 이재선 씨가 주방에 신경 쓴 점도 “가급적이면 일을 줄이고 쉬자”였다. “집에서 하던 설거지를 밖에서도 하려면 짜증날 때 많죠. 그래서 식기세척기를 설치했어요. 밥솥도 놓지 않았어요. 전자레인지 있으니 간단하게 햇반 사다 먹으면 되죠. 이곳에선 그저 쉬고 누리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했어요.” 깔끔하고 쾌적한 공간에 건강 더해 침실은 주방 뒤 복도로 돌아가면 나온다. 하나의 공간에 모든 것을 담고 파티션으로 공간을 나눴다. 먼저, 침대에 누우면 서귀포 야경과 아침에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침대 뒤에 설치한 스파와 샤워시설도 전면 창을 통해 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피로를 풀기에 좋은 구조다. 침실에 오픈된 욕조와 샤워실에 의해 습기가 발생할 것 같지만, 열 회수 환기장치를 설치해 제주 중산간지역의 맑은 공기를 실내로 끌어들여 항상 쾌적함을 유지한다. 건물 전체를 대여하므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것도 큰 장점이다. 그래서 아담한 온돌방으로 만든 밖거리 역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밖거리는 온돌방이라 바닥에 담요를 깔아 놨다. 사각거림을 느낄 수 있는 깔끔한 담요에 의해 공간이 더욱 포근하고 쾌적하게 다가온다. 정갈한 식자재, 싱크대 한편에 비치해둔 구급상자, 오가닉스 샴푸와 비누, 화장대 코너에 놓아둔 면봉 등 어느 펜션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심함이 요소요소에 가득하다. 이러한 세심함은 안주인 솜씨다. 조경설계 전문가였던 남편이 전체 인테리어와 방향을 잡고 소소한 부분은 아내가 담당하며 부부가 함께 일궈낸 쉼터다. 잘살고 싶어 4년 전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 정착한 부부가 그들만의 즐거움을 담은 공간을 만든 것이다. 아직 판단하기엔 이르지만, 부부의 해맑은 표정을 본다면, 분명 잘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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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전원주택라이프] 전원주택, 제주 펜션_밀크인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