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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이처럼 살고 싶은 집이 있을까, 제천 정원태 가옥
- 19세기 초에 지은 정원태 가옥 鄭元泰家屋은 초가집에 어울리지 않는 규모와 부재를 자랑한다. 특히 사랑채는 규모나 구조로 본다면 다른 어떤 기와집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정원태 가옥은 집은 보이는 것이 아닌 느낌으로 말한다는 것을 대변하는 곳이다. 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느낌 있는 집이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제천 정원태 가옥(중요민속자료 148호/충북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은 19세기 초에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안채와 사랑채 모두 초가지만 《민속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사랑채는 원래 기와였고 안채도 기와를 얹으려 했으나 돈이 부족해 기와를 얹지 못했다는 집주인의 증언이 있었다. 집에 쓰인 목재는 웬만한 기와집보다 튼실해 일반적인 초가에 비해 과하게 부재를 사용했다는 느낌이다. 정원태 선생이 한때 제천에서 계림재단桂林財團을 설립해 계림중학교를 운영했다는 것을 보아 이전부터 상당한 재력을 가졌던 것이 분명해 원래 모습은 기와였을 것이다. ㄱ자형 안채로 단순한 배치가 개방감을 살리는데 일조한다. 도로변에 위치한 사랑채는 전면 여섯 칸, 측면 한 칸 반 규모다. 예전에는 앞으로 행랑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초가에 어울리지 않는 구조와 부재지금은 사랑채까지 모두 초가이다. 사랑채에 기와가 얹어져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음에도 왜 초가로 고쳐 지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가세가 기울면서 집을 보수할 때 기와로 얹지 못하고 초가지붕으로 고쳐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자 김재갑이 쓴 정원태 선생의 이력에 1973년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학교에서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때 가세가 기울어져 많은 돈을 들여 기와를 얹을 여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를 제외하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83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현재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없었고 사랑채 건넌방 쪽 좌측 앞쪽에 변소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사랑채 앞에 문간채가 있었다고 하니 집 분위기가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하게 ㄱ자 안채 앞에 —자 형태의 사랑채가 배치돼 한눈에 집 전체를 읽을 수 있다. 어쩌면 가장 특징 없는 배치일 수도 있으나 오히려 이런 단순함이 넓은 마당과 어울리면서 편안하고 시원한 느낌을 배가한다. 이것이 바로 이 집의 특징이다. 개방감은 밖에서도 전해진다. 남향한 높은 언덕에 모든 경치를 내려 볼 수 있는 좋은 곳에 위치했기에 사랑채 앞 경관도 탁월해 절로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사랑채 앞으로 문간채가 있었다 하니 그 느낌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겠지만 넓은 대지를 안고 있어 모든 건물이 시원시원하게 배치된 점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집을 돌아보면서 이보다 넓은 마당을 가진 곳은 간혹 본 적은 있으나 전해지는 이와 같은 시원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어디도 어두운 구석이 없고 경쾌하다. 안채는 몸채 전면이 여섯 칸, 측면이 한 칸 반 규모인 ㄱ자 형태로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안채 우측으로 네 칸 규모 날개채가 뻗어있다. 날개채는 안방 두 칸, 부엌 두 칸 그리고 맨 위쪽은 골방이다. 몸채는 좌측 한 칸이 아래는 부엌, 상부는 다락이고 그 옆에 건넌방 두칸, 대청 두 칸이다. 전퇴를 둔 사랑채는 전망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안채 뒤쪽 모서리에 놓인 화장실. 다른 곳과 어울리게 초가다. 담 너머로 본 안채 측면. 오른쪽이 사랑채 좌측면이고 정면이 안채로 향하는 문이다.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부엌 배기 방식굴뚝은 다른 집에서 보기 힘든 형태로 진흙으로 감싸 만들었다. 굴뚝은 높이가 높을수록 배기가 잘되는 반면 쉽게 식는다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굴뚝 보온을 위해 볏짚으로 감싸는 등 여러 방식이 있으나 이곳에서는 진흙을 사용한 것이다. 굴뚝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원래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지관으로 이중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진흙으로 감쌌다는 것도 이채로운데 이렇게 이중관을 만든 사례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새로 고친 굴뚝은 원래 모습을 무시하고 플라스틱 관으로 굴뚝을 만든 후 진흙으로 감싸 눈속임을 한 것이 너무 아쉽다. 안채에서 보는 또 다른 특징은 부엌 배기 방식이다. 부엌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에 연기가 많이 나기 마련이어서 원활한 배기를 위해 창을 많이 내고 까치구멍 집처럼 지붕에 구멍을 내 연기를 배출한다. 그러나 이곳은 지붕에 다른 집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기 배출 시설을 만들었다. 안채가 위치한 날개채는 삼량집이다. 삼량집은 보 위에 동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치는 단순한 구조로 벽면에 삼각형 구멍이 생긴다. 대부분 이 구멍을 흙으로 메워 외풍을 막는데 이 집에서는 막지 않고 터서 부엌 배기구로 활용하고 있다. 안채 우측면으로 뚫린 곳이 부엌이다. 앞에서부터 부엌, 안방, 윗방, 골방 순으로 놓였다 안채 측면과 후면. 예전에는 굴뚝을 오지관으로 이중관을 만든 후 보온을 위해 진흙으로 감쌌지만 지금은 플라스틱 관으로 바뀌었다. 기교 없이 단아한 모습의 사랑채안채는 삼평주로 전퇴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삼량집이다. 전퇴를 가진 집은 일고주 오량집으로 꾸미는 것이 일반적이고 안채와 사랑채의 위계를 고려해 평주를 보통 안채와 사랑채가 같게 하거나 안채를 늘리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사랑채가 삼량집이라면 안채는 삼량집 혹은 오량집으로 짓는다. 하지만 이곳은 사랑채는 일고주 오량집이면서 안채는 삼평주 전퇴집이다. 역시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사례다. 전면 여섯 칸 측면 한 칸 반 규모인 사랑채는 맨 좌측 끝에 있는 건넌방 뒤쪽으로 광이 한 칸 돌출해 있어 전체적으로는 ㄴ자 형태다. 사랑채가 지금은 초가지만 규모나 구조로 본다면 다른 곳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고 쓰인 부재들도 초가보다는 기와에 어울린다. 좌측에서부터 건넌방 한 칸, 대청 두 칸, 사랑방 두 칸, 곁방 한 칸으로 돼 있으며 일자형 입면으로 평면적이지만 단아함을 보여준다. 기단이 높지 않고 기교 없는 구조가 단아한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킨다. 지붕가구는 전퇴를 둔 일고주 오량집이다. 지금은 사랑채 바로 앞에 길이 있어 어수선하고 초가라 고고한 맛이 없지만 예전에는 넓은 앞마당을 가진 당당한 기와집이었을 것이다.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본 전경. 마을 전체가 한눈에 잡힐 만큼 시원한 풍광이 압권이다. 배치도 정원태 가옥으로 돌아보면서 집에도 집주인과 궁합이 맞는 곳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 대부분은 '기와, 초가'하면서 집이 가지고 있는 격식으로 살고 싶은 집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원태 가옥은 집은 보이는 것이 아닌 느낌으로 말한다는 것을 대변하는 곳이다.풍수가들이 자주 찾아와 지세를 살핀다고 한다. 그만큼 풍수상으로도 괜찮은 곳이다. 뒷부분에 대한 허전함은 비보 개념으로 바람막이가 돼 줄 나무를 심는다면 나아질 것이다. 풍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랑채에서 보는 풍광은 장관이다.필자에게는 살고 싶다는 느낌이 절로 드는 집이었다. 나무까지 심어 진다면 살고 싶은 마음이 배가될 것이다. 수많은 옛집을 보면서 선교장이나 운현궁과 같은 엄청난 규모와 고고한 취향을 가진 곳도 이처럼 살고 싶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정원태 가옥은 그간 돌아본 곳들 중에서 가장 살고 싶은 집이다. 참고문헌 계산 정원태桂山鄭元泰(1913-1993)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가 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조부인 정운호(1862~1930) 선생은 화서의 고제자인 성재 유중교省齋柳重敎(1832~1893)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조부가 화서학파였으니 정원태 선생의 학문 연원도 화서학파였다고 할 수 있다. 이항로-최익현으로 이어지는 화 서학파는 당시 척화의 선봉에 서서 나라를 지키려 온 몸을 바쳤다. 많은 화서학파 사람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정원태 선생 조부도 의병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의 행적을 보면 아마도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보다는 풍부한 재력으로 의병활동에 많은 지원을 했을 것이다. 한편 정원태는 축척한 부로 한때는 제천에 계림중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가세가 기울면서 학교 운영에서 물러나 1973년 서울로 이주했다. 그 후 한학과 고전문집 번역에 참여해 수많은 고전문집을 발표했다(현재 집을 관리하며 살고 있는 분의 말에 의하면 동생들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고 한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 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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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이처럼 살고 싶은 집이 있을까, 제천 정원태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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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특이한 구조로 주목받는 안동 의성 김씨 종택
- 안동 의성 김씨 종택 義城 金氏 宗宅(보물제450호/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80-1)은 158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학봉 김성일이 스스로 감동監董(건축 감독관)이 돼 지은 집이다. 학봉 김성일과 관련된 집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집 구조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여러모로 주목받는 곳이다. 가까운 위치에 학봉 종택도 있어 같이 둘러보면 안동 의성 김씨 종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학봉 김성일(1538~1593)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온 인물로 임진란 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것으로 조정에 보고해 임진란에 대비하지 못하게 했다는 원죄를 지닌 사람이다. 그 후 그는 죄를 물어야 한다는 논란 속에서 유성룡의 변호로 처벌을 면한 후 경상우도 관찰사로 임명돼 김시민을 도와 진주대첩을 이끌어 임진란 초기 전세 전환점을 가져온 인물이기도 하다. 진주대첩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한 학봉은 퇴계가 칭찬해 마지않았던 제자로 퇴계 학문을 계승한 학자였다. 가문에서 태실을 보존할 정도로 당시 그의 위상은 매우 높았다. 대청이 아닌 안방을 중심에 둔 안채실측조사 보고서에 나타난 학봉 종택 이력을 보면 1587년 새로 지은 후 1730년대에 바깥사랑채를 철거했으며 1890년 작은 사랑채를 다시 지었다. 그리고 1757년 학봉 태실을 없애고 마루로 개조했지만 1970년 이를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의성 김씨 종택은 여러모로 주목받는 집이다. 학봉 김성일과 관련된 집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집 구조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안채 배치다. 완전한 ㅁ자 형태인 안채는 다른 집과 달리 중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랑채와 직각으로 놓였다. 이렇게 배치하고 보니 안방은 행랑채와 나란한 남향이고 대청은 남북으로 긴 모양이 됐다. 우리나라 모든 집에서 대청은 중문 또는 대문을 향해 넓게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곳은 대문과 직각을 이룬다. 안채 배치 중심을 대청이 아닌 안방으로 잡았기 때문으로 이렇게 직각을 이루면 대청 깊이가 늘어난다. 안채를 햇빛이 잘 들도록 전면에 배치하다 보니 이런 형태가 됐다. 당시 대청은 여름을 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제례 중심으로 생활이 바뀌면서 집안 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쓰였다. 특히 안채 대청이 그런 역할의 중심에 있었기에 대부분의 집은 대청을 중앙에 위치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제례 문제 못지않게 생활공간으로서의 안방을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배려가 제례 공간이라는 대청 기능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한다. 대청 깊이가 깊어지면서 제례 편의성이 좋아지고 위계를 설정하는 것도 오히려 원활해졌다. 이러한 대청 구성은 바로 옆 의성 김씨 귀봉 종택에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ㅁ자 형태인 안채로 대청이 아닌 안방이 배치의 중심이다. 대청 깊이가 상당하다. 큰 사랑채와 바깥사랑채 측면으로 모두 행랑채와 연결된다. 오른쪽 끝 문을 열면 안채다. 왼편은 사랑채. 안 채 대청은 15㎝ 정도 차이를 두고 층을 두었다. 위계를 강조하기 위함으로 제일 높은 곳에 위폐를 모셨을 것이다. 안채를 향해 난 창으로 고풍스럽다. 안방과 윗방 날개채 지붕에 올라탄 안채 지붕안채의 독특한 구성은 실 배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붕 구성이 일반적인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과 사뭇 다르다. 안채 대청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이를 잘 표현하도록 지붕을 과장해 올렸는데 전면에서 볼 때 안채 지붕이 분명하게 드러날 정도다. 대청 지붕이 솟으면서 안방과 윗방 날개채 지붕이 상대적으로 낮아 보여 흡사 올라탄 형태다. 이러한 지붕 구조로 대청 천정과 기둥이 높아져 대들보와 종보 간격이 벌어졌다. 마치 중국 천두식 건물을 보는 듯 중후한 느낌이다. 한편으로 대청에서 안채와 윗방 지붕 부분과 서까래 마구리가 보이는 등 조금은 어수선하기도 하다. 이렇게 안채가 우리가 보아 왔던 일반적인 집과 여러모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어떤 이들은 학봉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왔을 때 눈여겨본 중국 주택을 참고해 이 집을 지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학봉이 주로 방문했다는 명나라 당시 수도 북경 사합원 주택과 이 집과는 유사성을 거의 찾을 수 없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학봉문집을 보면 '一依舊制稍寬廳事 以復行事, 즉 옛 모습 그대로 지었다. 다만 대청만은 조금 넓게 하여 일을 치르는데 편하게 했다(학봉 김성일의 생각과 삶/이해영/한국국학진흥원/127쪽)'고 기록돼있어 의성 김씨 종택은 옛날 집과 크게 다름없이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안채 대청 높이가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도 특이하다. 윗방 쪽이 제일 높고 앞쪽 중정 쪽 퇴칸이 가장 낮은데 높이는 각각 15cm 정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높이가 다른 것은 위계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제일 높은 곳에 위패를 모셨을 것이다. 조선 초기는 아직 성리학이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어서 사당을 짓기보다는 집 안에 위패를 두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 상대적으로 높은 곳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단을 높인 것이 아닌가 한다. 길게 일렬로 늘어선 문간채. 앞쪽이 바깥사랑채다. 안채 우측면과 문간채. 의성 김씨 집안 고서적 등을 모아 둔 장판각. 종가 권위 드러내고자 높은 곳에 놓은 사랑채종택 대청 건너편 광 위로 누마루와 비슷한 시설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마치 안사람들을 위한 휴게 공간으로 보이지만 실은 음식을 갈무리하는 곳이라 한다. 여름철에 음식을 통풍이 잘 되는 이곳에 보관해 상하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사랑채 역시 독특한 구조다. 큰 사랑채와 바깥사랑채로 나뉘는데 모두 복층 구조 행랑채와 연결된다. 행랑채 1층은 곳간이고 2층은 서고와 누다락이다. 바깥사랑채에서 큰 사랑채로 가려면 뒤편 한 칸 마루에 설치된 계단을 올라 복도 네 칸을 지나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깥사랑채는 1890년에 새로 지었다. 행랑채도 이때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안마당에서 본 큰 사랑채와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해 행랑채는 처음 이 집을 지었을 때 계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는 큰 사랑채 앞을 지금과 같이 바깥사랑채나 행랑채가 막아서지 않아 종택 큰 사랑답게 우뚝 서 있었을 것이며 경관 또한 매우 훌륭했을 것이다. 사랑채는 모두 전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모두 여덟 칸 규모다. 동쪽 두 칸은 방이고 나머지 여섯 칸은 대청이다. 현재 큰 사랑채는 뒤로 물려 높은 곳에 위치한다. 대부분 사랑채가 안채보다 전면에 나와 있는데 이처럼 뒤로 물려 높게 위치시킨 이유는 종가 사랑채의 권위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또한 여섯 칸이나 되는 넓은 대청 규모로 볼 때 사랑채를 생활 중심으로 계획한 것이 아니라 종가로서 다양한 모임을 위한 공간으로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권위와 더불어 이런 목적에 걸맞은 위치를 찾다 보니 안채 뒤 높은 곳에 짓게 된 것이다. 큰 사랑채 뒤편에 자리한 사당. . 장판각과 경모각 문 입구에 270여 년이 된 회화나무가 서 있다. 학봉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 침략 문제를 오판함으로써 조선 역사에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이점 때문에 학봉이란 사람이 폄하되곤 한다. 그러나 그는 퇴계 수제자로 조선 성리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리고 임진란이 일어나자 몸을 던져 전쟁을 지휘했다.진주대첩이라는 큰 업적을 남겼지만 결국 과로로 몸이 상해 임진란 발발 다음 해에 병으로 죽은 학봉 김성일. 의성 김씨 종택에 관련된 자료를 보면서 극히 일부분 때문에 만들어진 선입관을 가지고 그간 그를 평가해온 것은 아니었나 자문해 본다. 참고문헌 ·안동 의성김씨 종택 실측조사 보고서/문화재청·학봉 김성일의 생각과 삶/이해영/한국국학진흥원 ·답사여행의 길잡이 10(경북 북부)/한국 문화유산 답사회/돌베개·문화재청 홈페이지/우리 지역 문화재/ 안동시/안동 의성김씨 종택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2,04500000,37&pageNo=5_2_1_0디지털 안동문화대전/안동 의성김씨종택 http://andong.grandculture.net/Contents/Index?dataType=0203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 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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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특이한 구조로 주목받는 안동 의성 김씨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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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후손들의 애착이 대단한 군포 동래 정씨 종택
- 군포동래 정씨 동래군파종택軍浦東來鄭氏東來君派宗宅(경기도 문화재자료제95호/경기 군포시속달동 24-4)은 현재 자리에서 500년을 이어온 유서 깊은 집이다. 이곳에 자리 잡은 사람은 동래군파 파시조인 정란종鄭갿宗(1433~1489)의 큰아들 정광보鄭光輔(1457~1524)로 정란종 묘소가 있는 이곳에 집을 지었다. 종택은 역사적 가치로 말미암아 현재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관리 중 이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종택을 지은 정광보 부친 정란종은 이시애 난 등을 평정한 공로로 동래부원군으로 봉해지면서 동래정씨의 파시조가 됐다. 동래 정씨 가문은 14대 난종부터 종손의 5대 조부인 26대 때까지 13대가 이어오는 동안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군君으로 봉해졌을 정도로 명문가였다. 집주인 말에 의하면 5대조도 조선이 망하면서 시호를 받지 못했을 뿐이라고 한다. 안채 대청에서 본 안마당. 고택은 관리가 아주 잘 되고 있는 편이다. 안채에서 사당으로 돌아가는 길. 오른편이 부엌, 왼쪽이 광채다. / 작은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 고즈넉한 풍경을 한 고택 입구. / 암키와와 수키와로 치장한 부엌 벽면으로 흙벽에 막혀 환기가 어렵기에 기와를 이용해 환기구를 만들었다. 집은 서향, 사랑채는 남향주변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묘터도 좋지만 나중에 자리 잡은 집터 역시 매우 좋은 자리다. 묘소는 남향이고 집터는 묏자리 건너편에 자리 잡았다. 묘를 바라보는 곳에 집터를 잡고 나니 향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집이 서쪽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 집의 향은 크게 둘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안채의 향이고 하나는 사랑채의 향이다. 안채는 서쪽을 보고 사랑채는 남쪽을 본다. 집을 지을 때 향의 중심점은 안채 대청이고 안채 대청의 향이 집의 주 향이 되는 것을 고려하면 이 집은 서향이다. 대지 여건상 서향이 오히려 좋은 풍광을 지녔음에도 사랑채를 남쪽으로 놓은 것은 겨울을 더욱 따뜻하게 나고 여름에 강한 서쪽 햇볕을 차단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집은 현재 안채와 사랑채, 광채가 몸채를 이루고 주변에 작은 사랑채, 중문바깥에 마방채가 있다. 그리고 뒷마당에 새로 지은 사당, 광채가 있다. 원래 안채 뒤에 별당이 있었고 연못 앞에 솟을대문 행랑채가 있었는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집은 전체적으로 ㄴ자 안채와 사랑채가 마주 보며 튼 ㅁ자 형태를 이룬다. 전퇴집 안채는 전면 네 칸이고 날개채는 두 칸 반이다. 날개채는 아래 두 칸이 부엌이고 나란한 두 칸은 안방이다. 이 집의 재미있는 특징은 부엌에 있다. 부엌은 현재 입식으로 개조됐지만 과거 집 구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대부분 집에서 그릇을 보관하는 찬장 등의 공간은 전면에 있지 않고 후면에 둔다. 그러나 이곳은 안채 퇴칸을 부엌 수납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다른 곳에서 본 기억이 없다. 전퇴는 대부분 각 실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뒤에 있는 퇴칸은 여러 용도를 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활용법이다. 묘를 바라보고 앉은 안채 대청으로 남향인 묏자리로 인해 서향이 됐다. 외부 마방채. 현재 이곳은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쓰고 있다. 화려한 꽃들로 물들은 안채 후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공간, 행사청사랑채는 전후퇴집, 2고주 5량집으로 전후퇴집은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홑집에서 출발해 조선 중기에는 전퇴집으로 후기에는 전후퇴집으로 발전해간다. 이런 평면의 발전은 살림집 규모와 용도가 늘어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사랑채가 전퇴집인 안채와 다른 구조를 보이는 것은 지은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안채는 1783년, 사랑채는 19세기 말인 1877년에 지으면서 구조상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이다. 사랑채 후퇴칸은 수복방, 책방, 광, 행사청을 위한 전실 등과 같이 다양한 공간으로 분할해 사용하고 있다. 사랑방으로 드나드는 뒷문도 이후 퇴칸을 활용해 만들어 놓았다. 사랑채는 안채와 직각으로 배치된 남향이다. 사랑채에서 문간채 방향 한 칸에는 높게 올린 누마루가 돌출돼 있는데 누마루에 올라서면 경관이 좋은 남서쪽을 내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에 있는 연못도 즐길 수 있다. 지금 연못 뒤에 있는 집은 예전에는 없던 것이라 한다. 주인 말에 의하면 위 집터까지 정원이었으며 연못 주변에 꽃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경관이 좋았다고 한다. 과거에 이곳에 앉으면 주변 좋은 경관이 내려다보이고 연못 주변 화초가 가득해 술 한 잔하면서 풍류를 즐기기에 정말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사랑채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사랑채 맨 끝에는 행사청이라는 방이 그것이다. 내부는 우물마루(마룻귀틀을 짜서 세로 방향에 짧은 널을 깔고 가로 방향에 긴 널을 깔아서 '井'자 모양으로 짠 마루. 대부분 고택에서 채용하는 방식이다)가 아니라 장마루(장귀틀과 동귀틀을 놓아서 짜지 않고, 긴 널로 죽죽 깔아서 만든 마루)다. 집주인은 예전부터 장마루였으며 서고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행사청이라는 단어로 볼 때 제사를 위한 제기를 보관하고 제사 준비를 위한 장소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장마루는 사랑 대청에 붙어 있는 광, 중문 옆에 붙어있는 광에서도 보이는데 아마도 중문을 포함한 사랑채를 새로 지으면서 물건을 쌓아두는 광은 간략하게 지으려 했던 의도로 보인다. 대청에서 본 안마당. 대청에서 본 후면. 평면도 주변 풍광이 매우 아름다워 집터로는 제격이다. 서향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경관을 고려했을 때는 좋은 자리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사당사당은 현재 한 칸으로 복원돼 있으나 원래는 두 칸이었다. 당시 사당은 전면 두 칸, 측면 두 칸으로 구성하고 전면 한 칸은 마루였다. 두 칸 중 한 칸은 불천위인 동래공 위패를, 다른 한 칸은 사대조를 모셨다고 한다. 사당은 한국전쟁 전까지 있었으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 이상 제사를 치르기 어렵다고 판단해 어른께서 위패를 땅에 묻어버리면서 사라졌다. 두 칸이었던 사당이 한 칸이 된 것은 복원할 당시 담당 공무원이 두 칸으로 된 사당이 없다는 이유로 한 칸으로 복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문 옆에는 사랑방을 위한 부엌이 있다. 부엌 바깥 벽면은 암키와와 수키와로 예쁘게 쌓아 치장해 놓았다. 무심코 보면 그냥 담에 장식을 한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사랑채 부엌을 위한 환기구다. 사랑채 부엌 바깥에는 사랑채 누마루가 있고 모든 벽이 판장벽이 아닌 흙벽으로 삼면이 막혀 환기가 잘 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벽에 환기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옆에 연이어 위치한 광채는 1930년대에 지었다. 돌저귀나 쇠장석들을 보면 분명 조선 시대에 지은 게 아니다. 현재는 한 칸이나 원래는 두 칸이었던 사당.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것을 복원했다. 문간채 방향으로 한 칸 돌출한 사랑채 누마루. 남서쪽 경관을 맘껏 즐길 수 있다. 2011년 5월 3일 종손은 종택을 포함한 대지 및 전답(18176㎡)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 무상 증여했다. 종택이 위치한 속달동이 군포시 도시개발사업에 포함되자 종손과 가족은 이곳이 영구히 보존돼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아 종택과 주변 땅 모두를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증했다.토지가 당시 공시지가로 35억 원에 이른다고 하니 가족 간 갈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래공파문중은 수십억원이라는 현실적 가치보다는 18대, 500년 이상을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그 역사적 가치를 보전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간 문중재산을 놓고 이전투구하는 모습만을 보아온 나로서는 생소하기만하다.문화의 가치를 무시하고 보전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과거란 돈벌이 수단으로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것을 떨쳐버리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우리는 문화후진국일 수밖에 없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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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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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후손들의 애착이 대단한 군포 동래 정씨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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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바타처럼 담백한 하남 상가주택
- 건축주의 주거와 일자리(빵집)가 함께하는 상가주택이다. 오래 씹을수록 물리지 않고, 오히려 담백하면서 깊은 맛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건축주가 만든 치아바타를 건물로 표현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멋을 내지 않는 투박한 외관을 표현하고자 박스 형태의 디자인을 기본으로 노송무늬가 찍힌 노출콘크리트로 텍스쳐Texture를 살리고, 정면의 박스 위에 나무 박스를 무심히 올려놓은 느낌을 주었다.글 이장욱(GIP&예 건축사사무소) | 사진 차재철 HOUSE NOTEDATA위치 경기 하남시 미사지구지역/지구 제1종 일반주거지역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대지면적 255.00㎡(77.13평)건축면적 150.34㎡(45.47평)건폐율 58.96%연면적 493.34㎡(149.23평) 1층 123.77㎡(37.44평) 2층 120.05㎡(36.31평) 3층 119.19㎡(36.05평) 4층 130.33㎡(39.42평)용적률 193.47%건축비용 7억 8천만 원설계 GIP&예 건축사사무소 031-8020-8800 www.ecocellhome.com시공 GIP 하우징 건축주 부부와의 첫 만남은 건축주가 오랫동안 종사해온 마케팅 일을 접고 좋은 동네에 차린 빵집에서였다. 투박하면서 아기자기하고 군더더기 없는 빵집 인테리어는 부부의 취향을 여실히 말해줬다. 건축주에게 원하는 주택의 프로그램을 PPT로 정리한 자료를 받았다. 그 후 이해력이 넓은 부부와 일목요연하고 명확한 PPT 덕분에 막힘없이 설계를 진행했다.‘살면서 일도 즐길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상가주택……’, ‘눈에 띄지 않고 투박하지만, 세련되고 정갈하며 지루하지 않은 건물.’ 부부의 요구 사항은 단순하면서 매우 난해했다. 여느 상가주택과 달리 잘 나가는(공실률이 없는) 건물이 아닌, 부부의 삶을 고스란히 담는 건물로 이해했다. 그리고 처음의 콘셉트를 유지하며, 부부의 어휘를 건물로 표현해냈다. 남쪽은 자전거도로의 활기참과 녹음의 어우러짐에 건물이 너무 무겁게 다가가지 않도록 몇몇 창에 원색에 가까운 컬러로 변화를 줬다. 은근히 눈길을 끄는 건물어렵던 콘셉트에 대한 고민을 한 방에 풀리게 한 것이 건축주가 만들어준 천연재료 본연의 맛으로 승부를 건다는 이탈리아 빵인 ‘치아바타Ciabatta’였다. 오래 씹을수록 물리지 않고, 오히려 담백하면서 깊은 맛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치아바타를 건물로 표현하고 싶었다.우선 멋을 내지 않는 투박한 외관을 표현하고자 박스 형태의 디자인을 기본으로 노송무늬가 찍힌 노출콘크리트로 텍스쳐Texture를 살리고, 정면에는 박스 위에 나무 박스를 무심히 올려놓은 느낌을 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 무늬가 같지만 물성이 다른 2개의 재료, 즉 노송무늬 노출콘크리트와 탄화목을 선택했다. 건축주 부부가 운영하는 1층 빵집. 클래식하게 마무리한 외관과 아늑한 분위기의 건강 빵집 인테리어가 잘 어우러진다. 빵집 후문 오래 지나도 치아바타와 같은 맛이 우러나오도록 건물의 많은 면을 목재로 마감하고 싶었지만, 목재의 변색을 우려해야 했다. 다행히 건물의 주 출입구가 있는 정면이 직사광선을 받지 않는 북쪽이라, 이를 이용해 정면에 맘껏 목재 박스를 계획했다. 스테인Stain으로 많이 처리하지 않는 목재이기에, 그 색상과 모양을 잃지 않은 채 아주 서서히 안정돼 가는 점을 살려냈다. 이로 인해 일대에서 눈에 먼저 띄는 건물이 됐지만, 그렇다고 뽐낸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1층 부분은 자연 재료에 가까운 기와 조각[瓦片]을 붙이는 방식으로 숨을 죽임으로써 신축 건물이지만 오래된 듯하고, 또 오래된 듯하지만 세련된 느낌의 치아바타와 같이 됐다. 현관에 앉아서 신발을 신고 벗기 편하게 긴 의자를 배치했다. 현관에서 바라본 거실. 좌측에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실과 드레스룸이 있는 안방이, 우측에 주방/식당이 있다. 거실에서 바라본 주방과 현관 모습으로 공간 구조를 한눈에 알 수 있다. 화이트 톤을 주조로 매립등으로 포인트를 줘 실내 분위기를 밝고 세련되게 연출했다. 건물의 남쪽 면은 직사광선이 강하므로 노출콘크리트의 톤을 다운시켰다. 다만, 자전거도로의 활기참과 녹음의 어우러짐에 건물이 너무 무겁게 다가가지 않도록 몇몇 창에 원색에 가까운 컬러로 변화를 줬다. 가사 동선에 맞춰 조리대와 싱크대, 식탁을 배치한 주방/식당. 코너 창으로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방 식탁 현관 가까이 서재를 사이에 두고 배치한 아들 방 MATERIAL외부마감 지붕 - 컬러강판 벽 - 송판 노출콘크리트, 탄화목(KD우드테크), 와편瓦片 데크 - 타일내부마감 천장 - 도배 벽 - 도배 바닥 - 데코타일, 강마루계단실 디딤판 - 18T 애쉬 집성재 난간 - 평철단열재 지붕 - 180T 경질 우레탄 보온판 내단열 - 120T 우레탄 단열재 뿜칠 마감창호 LG 하우시스현관문 성우스타게이트조명 LED주방가구(싱크대) 한샘 유로8000위생기구 대림바스 안방에 부속된 드레스룸 화이트 톤으로 밝고 화사하게 디자인한 안방 안방 입구에서 바라본 좌측 모습으로 정면이 드레스룸이고 좌측이 욕실이다. 안방 화장실 관건은 지붕 디자인이었다. 이를 위해 네모난 공간 가운데에서 올라가는 다락 계단과 어우러져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다락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지붕 마감재를 드러내기보다 박스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편심偏心의 꼭짓점을 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네모난 공간의 한쪽 거실 높이가 극대화되면서 높은 곳이 보이지 않을 위치에 꼭짓점을 잡고 들어 올리는 방법으로…, 이를 통해 계단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모두 쓰임새를 갖추도록 했다. 특히, 지붕과 입면 디자인이, 그 궤軌를 같이해 이야기에 끊어짐이 없도록 했다. 서재 박공 천장과 천창을 활용해 개방감을 주면서 공간 활용도를 높인 다락. 보조 주방을 계획해 간단한 음식을 곁들이며 TV 시청 및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건물에서 치아바타의 향이 은은하게 퍼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설계를 완성했다. 여타 상가주택과 달리 건축주의 주거와 일자리가 함께하기에 더욱 재밌는 설계였다. 건축주의 취향에 맞춰 클래식하게 마무리한 외관과 아늑한 분위기의 건강 빵집 인테리어가 잘 어우러진다. 건축주의 바람대로 행인들에게 튀지 않으면서 눈이 계속 가는 은근한 매력이 있는 건물로 비치기를 바란다. 남쪽은 자전거도로의 활기참과 녹음의 어우러짐에 건물이 너무 무겁게 다가가지 않도록 몇몇 창에 원색에 가까운 컬러로 변화를 줬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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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바타처럼 담백한 하남 상가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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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더욱 빛나는 안동 임청각
- 임청각臨淸閣(보물 제182호, 경북 안동시 법흥동 20-3) 은 고성 이씨固城李氏 용현공파 종택으로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1911년 이상룡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모든 재산을 팔아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후 임청각은 소유권 문제로 진통을 겪다가 2010년에서야 고성 이씨 종중으로 소유권이 이전된 아픈 역사를 지닌 집이기도 하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고택 중 가장 규모가 큰 집으로 알려진 임청각은 예전 건물 전체가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1942년 완공된 철도 중앙선이 임청각 앞으로 지나가면서 대문간과 행랑채가 헐려나가 60여 칸 규모로 축소됐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지금 규모만으로도 다른 고택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현재 남아있는 20세기 이전 고택 중 이 집과 규모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강릉 선교장 정도가 아닐까 한다. 임청각은 1519년 이명李名 이 건립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고성이씨 종회에서 발간한 임청각 소개서에 의하면 임진란 후와 1767년에 중수했다고 하는데 중수기重修記에는 1626년 군자정 단청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626년과 1769년, 두 번에 걸쳐 중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침인 임청각 구조를 보면 일부에서 고식古式구조가 엿보여 두 번의 중수가 있었음에도 옛 구조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배치도 빼어난 조망을 지닌 별당이자 사랑채인 군자정. 연못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규모가 상당한 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가로서 위풍당당함을 자랑한 임청각임청각이란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登東 而舒嘯 臨淸流而賦詩(동쪽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읖조린다)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은 철도 개설로 낙동강과 단절됐으나 과거에는 대문이 낙동강과 붙어 있었다고 하니 임청각이라는 이름이 결코 집 분위기와 동떨어진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낙동강과 반변천半邊川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위치한 이곳은 지금은 도시가 확장돼 고가도로와 현대식 건물로 주변이 산만해졌지만 예전에는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택에서 발간한 자료에 의하면'집 대문을 누대樓臺로 지었는데 바로 이 누대 앞에 낙동강이 흘러 2층 이곳에서 낚시를 하기도 하였다'고 하니 집 앞 자연 풍광이 매우 수려했음을 알 수 있다. 규모뿐만 아니라 구조에서도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경사가 급한 땅을 안았기에 건물들이 횡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좌측에 몸채가 있고 그 우측으로 별당인 군자정이 있으며 맨 우측 언덕에는 사당이 배치됐다. 지금은 철로 보호막에 막혀 제 위용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과거 언덕에 수십 칸의 건물이 횡으로 배열된 모습은 대가大家로서 위풍당당함을 자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집은 크게 보면 3열로 구성됐다. 경사를 따라 맨 뒤에서부터 몸채, 안행랑채, 바깥 행랑채가 —자로 놓였다. 이렇게 —자로 배치된 건물을 수직방향 날개채가 연결한다. 따라서 건물 전체는 매우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현재 남아있는 고택 중에서 이와 같은 구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임청각은 건물로 둘러싸인 중정형 마당을 중심으로 각 실을 배치했다. 이런 중정형 집은 중정이 넓지 않을 경우 매우 답답하게 느껴지는데 임청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앞쪽 안행랑채가 2층으로 지어져 답답함을 가중시킨다. 안채에서 생활하는 안주인의 입장에서는 감옥이 따로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폐쇄적인 구조다. 행랑채에서 사랑채로 들어가는 계단. 오량집 안채는 상당히 폐쇄적인 구조에다 중정까지 좁아 매우 답답하게 느껴진다. 미관을 고려한 주먹장이음, 이곳이 유일해또 다른 구조적 특징은 月자 형태로 만든 정침이다. 이러한 구성은 화성 정용채 가옥과 임청각 두 곳뿐이다. 독특한 구조 때문에 임청각 평면 형태를 문자형文字形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대부분 용用자 형으로 이야기 하나 日자와 月자를 합친 것이라 해석하는 이도 있다. 폐쇄적인 구조라지만 집은 매우 튼실한데 안정감을 느끼게 할 만큼 넉넉히 사용한 부재가 인상적이다. 안채를 보면 민도리집이지만 보를 받치는 동자주가 포형동자주로 아름답게 초각돼 있고 대들보를 받치는 보아지도 매우 화려하다. 매우 공력을 들인 집임이 틀림없다. 안채는 대청 깊이가 두 칸 오량집으로 뒤쪽 한 칸 반이 대청, 앞쪽 반 칸이 퇴칸이다. 그런데 대청 보이지 않는 곳에 다른 집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서까래는 윗부분 단연短椽(기둥 윗머리 사개통에 보나 도리를 받치기 위해 가로나 세로로 먼저 얹는 짧은 나무)과 아랫부분 장연長椽(오량 이상으로 지은 집의 맨 끝에 걸리는 서까래)을 엇갈려 건다. 그러나 이곳은 다른 집과 달리 두 서까래를 주먹장이음(한 부재에는 주먹처럼 끝이 넓고 안으로 갈수록 좁은 주먹장을 내고 다른 부재에는 주먹장 구멍을 파 물리게 하는 길이이음)으로 맞대어 연결했다. 일반적 공법에서 벗어나 까다로운 주먹장이음을 택한 것은 미관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장연과 단연을 엇갈려 배열할 경우 내부에서 올려다보면 중도리를 중심으로 장연과 단연이 엇갈려 배치돼 가지런한 느낌이 감소되기 마련이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임청각은 다른 집과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서까래 연결법은 지금까지 본 고택 중 이곳이 유일하다. 여자 하인이 생활했던 안행랑채. 역시 폐쇄적 구조로 안채에 비하면 마루가 작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랑채에서 군자정으로 가는 입구. 솟을대문을 한 사당 입구와 내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사랑채에서 안채와 안행랑채로 이어지는 통로. 남녀유별 사상으로 입구가 좁고 낮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상룡 선생을 낳다주목받는 또 다른 곳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앞쪽에 위치한 방이다. 앞마당에 우물이 있어 우물방으로도 불린다. 종중 안내 책자에는 산청産廳(임부들이 태교 및 해산을 하는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상룡 선생, 외손外孫문헌공 등 정승 3명이 이 방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곳이 잠시 산청으로 쓰였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임청각의 배치로 보아 사랑채로 쓰였던 곳이 아닌가 한다. 정침 옆에는 별당이자 사랑채인 군자정君子亭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철도로 잘리고 콘크리트 건물로 혼탁해졌음에도 지금도 마음을 확 뚫리게 한다. 왜 이곳에 군자정을 지었는지 한눈에 이해가 될 정도로 빼어난 조망을 지녔다. 동쪽 네 칸 대청 옆에 —열로 4칸의 방이 배열돼 전체적으로는 ㅏ자 형태 평면이다. 그러나 대청과 방 네 칸의 구조가 다르다. 대청은 쇠서(전각 기둥 위에 덧붙이는, 소의 혀와 같이 생긴 장식)가 없는 물익공으로 된 이익공구조에 팔작지붕이고 방은 민도리 삼량집이다. 왜 이렇게 구조를 달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화려한 누마루에 단아한 맞배지붕이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 1767년 이종악李宗岳이 작성한 중수기에 7대조가 병인년(1626년)에 단청을 올렸다고 한 것으로 보아 군자정은 단청한 집이었다. 지금은 색이 바래 외부에서는 단청한 흔적을 찾기 힘들고 내부에 흐릿하게 남아 있다. 사진 우측이 이상룡 선생이 태어난 사랑채다. 임청각은 보물로 지정된 물질적 가치보다 일제 강점기에 고성 이씨가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더욱 빛나는 집이다. 우리가 서예의 가치를 단순히 잘 썼다는 것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글쓴이의 인품과 더불어 고려하는 것처럼 집의 그것도 살았던 사람과 연관 지어 판단해야 한다. 군자정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호연지기를 키우기에 충분했다. 이런 경관을 바라다보고 살아온 석주 이상룡 선생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모든 재산을 팔아 모든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생애를 독립운동에 바쳤다. 집이 지닌 가치는 그냥 드러나지 않는다. 그곳의 내력과 함께 살펴볼 때 비로소 읽힌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 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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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더욱 빛나는 안동 임청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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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수려한 경관을 담은 우복종택과 대산루
- 우복동천이라고도 불리는 우복종택愚伏宗宅(경북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93-2, 시도민속자료 제31호)은 우복 선생이 38세 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7년간 거처하던 곳으로 영조 때인 1750년 전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우복 선생이 일상생활을 위해 지은 대산루對山樓(시도유형문화재 제156호)는 보기 드문 2층에 온돌방을 드린 복층 건물이다. 일반 한옥에서 볼 수 없는 중후함을 느낄 수 있다.글 최성호 사진 홍정기 명조 때 태어나 류성룡에게 수학한 진주 정씨 우복 정경세鄭經世(1563~1633) 선생은 선조 때 문과에 합격해 관직에 진출했다. 우복 선생은 영남학파 4세대 대표자로 추앙받았던 분으로 이 황의 학문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진다. 우복 선생은 17세기 김장생의 주기론적 예학에 맞서는 영남학파 사상적 지주였다.우복종택愚伏宗宅은 선생이 38세 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7년간 거처하던 곳이다. 우복동천이라고도 불리고 영조 때 남북 10리와 동서 5리 우복동천구역을 하사하자 5대손인 정주원鄭胄源부터 이곳에 대대로 살았다. 그러므로 종택은 영조 때인 1750년 전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보기 드문 2층에 온돌방을 드린 복층 건축물 대산루. 왼쪽 단층 부분은 강학공간으로 사용했다. 겹집에 내외 구분이 심하지 않은 종택집은 넓은 산등성이에 동향으로 지어졌다. 배치는 튼 ㅁ자로 ㄱ자형 안채와 ㅡ자형 곁채를 ㄷ자로 구성했고 그 앞에 전면 다섯 칸 측면 한 칸 사랑채를 배치했다. 종택 좌측 조금 떨어진 사당에는 우복 6대손인 입재立齋정정로의 불천위가묘가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높은 단 위에 우뚝 선 사랑채를 마주하게 된다. 사랑채는 전면 다섯 칸 측면 한 칸으로 안채는 중문을 별도로 두지 않고 사랑채를 돌아들어가도록 구성했다. 사랑방에서 안채로 바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점, 사랑마루에서 안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는 점 등을 볼 때 내외 구분이 경상도 다른 집과 달리 심하지 않다. 사랑채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대청으로 올라가는 곳이다. 사랑채 앞 툇마루는 계자난간을 둘렀는데 계자난간이 없는 한 칸이 바로 대청으로 올라가는 입구다. 오르내리기 편하게 하려고 다른 부분보다 조금 낮게 만들어 낮춘 것 같은데 어설퍼 보인다. 여기서 조금 더 낮게 했다면 더 편리했을 텐데 아쉽다. 사랑채 당호는 산수헌山水軒이다. 워낙 높은 곳에 자리 잡다 보니 솟을 대문이 시야를 가리고 있음에도 사랑 대청에서 보면 앞산이 바로 발치에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그야말로 산수헌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풍광이다. 안채는 ㄱ자를 뒤집어 놓은 형태로 전면 네 칸 측면 다섯 칸에 겹집 구조다. 인근 양진당에서 소개했듯 이 지역은 겹집 구조 잔재가 남아있는데 우복종택 역시 지역적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안채 몸체는 좌측 한 칸을 안방, 다음 두 칸을 대청, 나머지 한 칸을 건넌방으로 구성됐다. 안채에서 바깥으로 나온 날개 채는 앞 두 칸이 부엌이고 뒤 세 칸이 안방과 상방이다. 곁채는 뒤로부터 두 칸이 광이고 가운데 부엌이 있으며 앞 두 칸은 방이다. 곁채를 붙여 적극적으로 ㄷ자 형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다른 튼 ㅁ자 집처럼 전면 행랑채에 광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행랑채가 아닌 곁채에 광이 들어오면서 광으로의 출입을 원활하게 하고자 약간 간격을 둔 것으로 보인다. 종택 사랑채에서 본 솟을대문과 전경. 내외 구분이 심하지 않은 안채는 전면 네 칸 측면 다섯 칸 겹 집 구조다. 높은 단 위에 우뚝 선 사랑채는 계자난간으로 둘러 조망을 맘껏 감상토록 했다. 산수헌이란 당호가 붙었다. 안채 좌측 후면에서 본 모습. 단출한 계정과 중후한 대산루우복종택으로 올라가는 길 우측에 작은 초가와 커다란 누각이 있다. 작은 초가집이 계정溪亭, 뒤에 있는 누각이 대산루對山樓다. 대청 한 칸, 방 한 칸으로 꾸민 계정은 지붕을 초가로 올린 단출하면서도 검박한 건물이다. 우복 선생이 정착하면서 일상생활을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우복의 평소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 아닌가 한다. 계정 뒤에 위치한 대산루는 우복종택보다 주목받아온 건물로 정종로가 1700년대 후반 이름을 붙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2층에 온돌방을 드린 복층 건물이란 점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실제 우복종택보다 자주 소개되기도 했다. ㅜ자 형태 대산루는 좌측으로 뻗은 날개는 단층이고 누마루 부분은 복층이다. 1층은 학문을 수양하거나 가르치던 강학공간講學空間으로 2층은 개인 공간으로 활용했다. 강학공간은 측면 두 칸, 정면 다섯 칸으로 좌측 두 칸은 대청, 중간 두 칸은 전면에 툇마루를 둔 방으로 구성했으며 우측 한 칸은 부엌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꾸몄다. 정면 두 칸, 측면 다섯 칸인 누마루 1층은 부엌과 창고로 2층은 온돌방, 고방, 책방(두 칸)으로 쓴다. 뒤편 고방과 책방을 모두 방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게 한 것으로 보아 2층 후면은 모두 주인 전용공간이었던 보인다. 2층 온돌방 하부는 모두 흙으로 채워 쌓았다. 온돌 특성상 같은 위치 1층에 방을 놓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2층에 온돌방을 드리는 경우 지상에서 5자 정도 흙을 채운 후 그 위에 아궁이와 고래를 만들고 구들장을 올린 다음 흙을 덮어 마무리한다. 그래서 아궁이가 낮은 곳에 있지 않고 사람 눈높이 정도에 설치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곳도 같은 형태다. 들이치는 비 등으로 벽이 손상될 것을 우려해 누마루 1층과 온돌을 들이지 않은 1층 창고는 돌로 마감했다. 그래서 대산루에서는 일반 한옥에서 볼 수 없는 중후함이 느껴진다. 대산루 1층 평면도 대산루 2층 평면도 대산루에서만 보이는 누마루 구멍과 돌로 만든 계단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누마루에 난 구멍이다. 중간에 뚫린 구멍 형태가 마치 옛날 변기인 매화틀과 비슷하게 생겨 용변을 보는 구멍이 아니었나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속단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다. 옛날에는 요강을 사용했기에 굳이 이곳에서 용변을 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용도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다음으로 사람들에게 논란이 되는 것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현재 모습을 보면 계단 양 측면과 후면은 돌을 쌓아 마감하고 하부는 흙으로 채웠는데 왜 나무가 아닌 돌로 마감했는가 하는 점이다. 김봉렬은 돌계단을 대산루 계획 핵심이라 정의하면서 누각에 차별성을 두기 위한 무언의 통제소 역할을 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은 과한 해석이 아닌가 한다. 계단 뒷부분 두 기둥 기초를 큰 댓돌로 앉힌 것을 보면 처음부터 돌로 마감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봉렬의 말대로 차별성을 두기 위한 것일 수도 있으나 돌을 놓으면 바닥이 차 특히 노인에게 좋지 않다. 이런 문제점까지 감수하면서 돌로 계단을 놓은 것은 다른 뜻이 있었을 것이다. 돌 구조에 나무 계단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무로 계단을 짜 설치하는 것도 쉽지 않고 설사 나무 계단을 설치했다 해도 쉽게 썩는다. 목수는 계단 재료에 대한 선택 여지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대산은 산을 마주 대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나무가 크게 웃자라 왼쪽 산이 조금 보일 뿐이지만 처음 누정을 지었을 때는 아주 잘 보였을 것이다. 대산루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 나무를 약간 잘라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대산루로 향하는 진입로. 지금은 나무가 크게 자라 시야를 가리지만 처음 지었을 당시는 훌륭한 경관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안채 곁채 동쪽에 놓인 사당으로 우복 6대손인 정정로의 불천위 가묘가 있다. 대청 한 칸, 방 한 칸을 들인 계정은 우복 선생이 일상생활을 위해지었다. / 단층 대청에서 본 모습으로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이 돌로 마감된 특이한 경우다. 기둥 기초를 댓돌로 한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돌로 마감하려 했던 의도로 여겨진다. 산을 마주한다는 뜻을 지닌 대산루. 일반 한옥에서 볼 수 없는 중후한 멋이 있다. 우복종택 입구 우측에 자리한 계정과 대산루.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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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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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수려한 경관을 담은 우복종택과 대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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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빛깔을 닮은 집, 이천 상가주택
- 청명했던 가을바람 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건축주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천시 백사면 에서 아버지에 이어 2대째 살아온 건축주가 자신의 소박한 꿈을 늘어놨다. 20년간 방치해 오래전부터 동내 주차장처럼사용하던 땅에 자신이 간직해온 예쁜 건물을 짓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땅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동네 토박이인 건축주는 안정적인 터전을 원한다며, 상가 중심의 주택 을 주문했다. 주변 상권과 교통, 환경을 분석한 결과, 상가보다 원룸 임대 수요가 많았다. 건축주의 요구와 지역 특성에 맞게 상가와 원룸 그리고 건축주의 주거공간을 적절히 담아 내기로 결정했다. 이름도 지었다. ‘자연의 빛깔을 닮은 집’이라고. 지역 환경과 이웃 주민과 한데 어우러져 지역의 아이콘이 되라는 마음을담아.글. 사진 박현우 건축정보위치 경기 이천시 백사면 모전리 구조 철근콘크리트조 지역지구 계획관리지역, 자연취락지구 대지면적 269㎡(81.37평) 건축면적 150.58㎡(45.55평) 연면적 248.60㎡(75.20평) 주용도 단독(다가구)주택 4가구, 근린생활시설 2 설계 건축사사무소케이디디에이치(KDDH) 02-2051-1677 www.kddh.co.kr건축가 김동희, 박현우 가상 시공 설계는 건축주의 이해를 돕고 건축물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자연을 담아낸 건물 건축주의 땅은 이천시 백사면의 지방국도인 이여로에서 모전리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 외딴 섬처럼 위치하지만, 지역 주민의 왕래가 빈번한 길목에 있다. 그곳에 서서 맞은편을 바라보면 드넓은 논 위에 길게 늘어진 구릉지가 겹치면서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모전리에 오래전부터 하나둘씩 건물이 들어서면서 작은 동네를 형성한 것도 아름다운 풍경에 이끌려 이뤄진 것은 아닌지 잠시 상념에 빠졌다. 작은 시골마을 길목에 들어선 건물은 최대한 땅에 접하는 부분을 최소화했다. 과거 이 땅이 주민을 배려했듯이 건물이 탄생하면서 생겨난 공간 또한 그러하길 바라는 마음과 이것이 도시의 맥락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물 구조는 주변 상권 분석을 통해 적정한 임대 면적의 상가와 장방형의 원룸으로 계획했다. 특히, 원룸은 확장형 발코니 면적을 최대한 확보함으로써 전용면적 약 23㎡(7평) 최상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평면적으로 짜임새있는 동선 및 내부 공간은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쾌적성과 편의성을 최대한 고려해 조화로운 생활이 이뤄지도록 했다. 각각의 원룸은 주방 시설과 침실을 분리해 쾌적함을 제공하고, 내부는 건물의 빛깔과 어울리는 파스텔 톤으로 화사한 공간을 연출했다. 여러 개의 건물을 조합한 것처럼 다양한 형태를 띠는 건축물 구조의 장점을 살려 원룸에 테라스까지 제공함으로써 임대성을 극대화했다. 3층엔 건축주를 위한 하늘마당을 선사했다. 건축주는 건물을 짓는 내내 이 공간은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너무나 행복해 했다. “건축주의 행복은 우리에겐 또 다른 큰 행복이다”며 답하고 스스로 보람된 일을 하는 것에 자부심을 되새겼다. 건물의 색채는 건축주와 미팅을 위해 이천을 오가며 느껴왔던 마을 주변의 아름다운 빛깔을 담았다. ‘사람들에게 산뜻한 느낌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건축주도 적극 찬성하며 반겼다. 캔버스에 스케치하듯 나무와 노을의 색채를 계획했다. 땅에 접한 저층부는 열처리 목재에 오일스테인으로 칠해 나무 빛깔을 표현했고, 대로변초입에서 보이는 부분은 푸른 잎의 연두색 패널로 처리해 한 그루의 나무가 있는 느낌으로 했다. 그리고 후면 2층 구조물은 따스한 노을의 느낌을 담아냈다. 1층 상가. 전면을 창으로 만들어 마음을 향한 열린 공간으로 했다. 내부의 창은 큰 통창으로 쾌적한 채광과 조망을 제공하고, 블랙& 화이트의 조합으로 깔끔하게 했다. 원룸. 짜임새 있는 평면 계획을 통해 별도의 주방 및 세탁실을 뒀다. 외부 건물의 색채 콘셉트를 내부에도 적용해 따뜻하면서 산뜻한 공간을 연출했다. 건축주 공간, 거실. 거실에서 활동이 많은 건축주의 성향을 고려해 일반 적인 80㎡(24평) 구조보다 거실 공간을 넓게 했다. 현관문과 3층부터 건축주의 공간으로 만들어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도 다락방을 오르듯이 편안한 느낌의 친근한 목재 소재로 마감했다. 건축주 전용 마당. 주거 공간(3층) 레벨에서 바로 접근이 가능한 건축주만의 공간이다. 더 이상 하자보수는 없다 스페이스 프로그램은 공간에 관한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건축물의 용도에 따른 공간 면적들을 도표로 작성한 것이다. 건축주에게 공간 활용을 어떻게 생각하고, 앞으로 이용 계획에 관해서 의논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토대로 구성한 건축물은 상가와 원룸, 건축주의 공간이 공존하고, 3~4개의 매스 조합은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어 삼면이 도로에 접한 아일랜드형 대지 위에 앉힌 건물은 위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시공 초기부터 완공에 이르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건축주의 신뢰를 더욱 깊게 한 것은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설계다. BIM은 다차원 가상공간에서 기획, 설계, 시공, 유지관리 등을 가상의 모델을 보며 관리하는 것이다. 또한 건축에 사 용되는 모든 부재의 정보까지 담고 있어 건축주의 이해를 돕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이용되는 BIM설계는 3차원 가상 시공을 통해 공간을 이루는 요소들의 간섭을 사전에 체크하고, 설계의 오류를 직관적으로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나아가 건물 의 물량을 파악하고 시공의 공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 이용된다. 이번 프로젝트는 건축과 구조 부분을 BIM설계로 제작한 시공 전 모델을 직접 확인하면서 진행한 덕에 건축주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형성 됐다. 또한 BIM설계는 공사를 시작 하기 전에 시공자가 건물에 대한 기술적 이해도를 높이는 데 이용되고,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자주 활용됨으로써 좋은 품질의 건물이 완성되는 데 일조했다. 자연과 마을 속으로 건축주의 소박한 꿈을 실현하고자 한자리에 뭉친 우리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지역 건축 업계 사람이 아닌 서울에 연고지를 뒀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마을 한 가운데 적막했던 땅이 정리 되고 이색적인 건물 형태가 드러나면서 호기심을 보이는 이들이 늘었다. 가림막이 걷혀지고 거친 외벽에 색색의 옷까지 입혀지자,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 달라졌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하나이면서 마치 두 개와 같은 외형 때문에 도대체 무엇을 하는 건물인지,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때로는 이천에서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칠 때면 꼭 내부를 들여다보곤 했다. 이러한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건축주는 즐거워했고, 그런 일이 있을 때면 전화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역 주민도 그동안 보았던 상가주택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인식하면서 건축주가 굳이 서울에 있는 전문가들과 작업하려 했는지 이해하게 됐다. 사실 이것은 서울의 도시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역할이다. 건축 전문가로서 발전적인 사고를 가진다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도로 입구에서 바라본 정면 모습. / 정면을 옆에서 바라본 모습. 1.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2.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자연의 빛깔을 닮은 집'이 앞으로 좋은 인연으로 사람을 맺어주는 매개체와 같이 좋은 방향으로 쓰임새 있는 모두의 공간이 되길 바란다.자연의 빛깔을 담은 이 공간에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풍요와 따사로움이 충만해지길 희망하며…….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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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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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빛깔을 닮은 집, 이천 상가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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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를 대비해 지은 별내 상가주택
- 별내 신도시 개발 계획이 확정되고 토지가 수용된 주민들은 토지 보상과 함께 아파트 입주권을 받을 것인가, 점포주택지(이주자택지)를 받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대부분의 원주민은 아무리 몇 년 사이 아파트 시장이 붕괴됐다 하더라도 혹시라도 이주자택지 추첨에서 좋지 않은 위치가 걸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건축주 부부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점포 겸용 주택을 짓기로 결정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봉자 씨는 "아파트에 들어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고요. 보상으로 받은 땅을 처분하고 전원주택을 지을까 생각을 했지만 남편이나 저나 지금은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살 때는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좀 더 나이가 들면 그때 본격적인 전원생활을 하려고요. 일단 점포 겸용 주택을 지어 살면서 적응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요"라며 아파트 분양권이 아닌 이주자 택지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글, 사진 전원택라이프 편집부취재 협조 ㈜신영종합건설 1577-7041 삼면이 도로에 면한 노른자 땅 당첨돼 전면은 4차선 도로, 측면은 택지 진입로, 후면은 택지 내 도로, 이렇게 삼면이 도로에 접한 그야말로 노른자 땅에 놓였다. 도로와 면한 곳이 많을수록 인지도가 높아지고, 유동 인구가 많기에 소위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많은 웃돈이 붙는다. 그래서 이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춘 땅 주인들은 임대에 큰 어려움이 없어 건물에 특별한 신경을 쓰지 않기 마련이지만 건축주 생각은 달랐다. 제대로 지어야 상가 임차인과 주거 공간 세입자들이 마음 놓고 영업하고 편하게 살 것으로 여겼다. "이곳 점포주택지는 용적률 완화 혜택을 받아 4층까지 지을 수 있게 됐어요. 그래서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래도 엘리베이터를 놓아야 할 것 같더라고요. 인근 건물 건축주들은'왜 괜한 돈을 쓰려고 하느냐'고 했지만 그래도'그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4층에 사는 우리는 그렇다 하더라도 세입자 입장에서는 3층을 오르내리기 힘들 것이고, 계단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사는 데에도 불편하지 않겠어요? 제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니까 반대했던 사람들도 다 놓더라고요." 해가 드는 방향으로 큰 창을 낸 4층 주인 세대 거실. 양 측면 대리석 아트월과 천장 조명이 감각적이다. 다락으로 향하는 계단실과 부엌 수납공간 현관 앞 이미지 월 /작은방뿐만 아니라 주방, 식당 공간에도 불암산을 조망하도록 창을 냈다. 4층 주인세대 평면도 모던하게 꾸민 주방/식당.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고자 ㄷ자형으로 계획했다. 욕실도 현대식으로 만들어 이용이 편리하다. / 과감한 목재 사용으로 건강미를 불어넣은 다락. 건축주는 무엇보다 시공사를 선정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 여러 건축사사무소에 설계를 의뢰했지만 마음에 쏙 드는 결과물을 얻지 못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시공사가 지은 판교의 여러 점포 겸용 주택을 보고는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입주자를 만나 업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확신을 얻었고,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삼면이 도로에 면한 노른자 땅이라 임대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깔끔하게 디자인한 측면과 배면. 주차장을 만들면서 1층 상가가 안으로 조금 들어갔다. 점포겸용주택(상가주택) 어떤 땅이 좋을까·일조 사선 제한 규정을 받지 않는 땅 도심에서는 북쪽에 도로가 있어야 좋은 땅이지만 대부분의 택지 개발지구는 대지 남쪽에 있어야 건축물을 크게 지을 수 있는 좋은 땅이다. 도로가 아니더라도 건축을 금지한 공원, 공지 등이 있 으면 괜찮은 땅이다. 그리고 20m 이상 되는 도로에 붙어 있으면 일조 사선 제한 규정을 받지 않 는다(단, 반드시 해당 지자체에 일조 사선 제한 규정을 확인해야 한다). ·도로와 면한 길이가 긴 땅 도로와 면한 부지 길이가 길면 어떤 점이 좋을까? 일단 주차장을 확보하고 남은 땅이 접도 면에 로 길게 형성돼 건축물을 도로 면에 길게 놓을 수 있다. 이런 경우 1층 상가를 분할할 수 있으며, 도로 면에 길게 놓았기에 상가 입지 조건도 좋아진다. ·주위 환경이 양호한 곳(공원, 수水공간)과 연계된 땅 공원이나 수 공간과 연계돼 주위 환경이 양호한 곳은 상권이 활(특)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곳은 대체로 조망권과 일조권 확보가 덤으로 주어진다. ·대지 앞뒤로 도로가 있으며 도로 레벨 차가 3m 이상인 땅 단순하게 생각해 땅이 평지면 집짓기 좋고 공사비도 절감될 텐데, 왜 경사진 대지가 괜찮다고 할 까 하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레벨 차가 있으면 지상 같은 지하층 상가가 덤으로 생긴다. 레 벨 차로 생겨난 지하 1층을 상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지하층으로 인정받으면 주차장 법에 문 제가 없는 선까지 상가 공간이 확장되기에, 낮은 도로에 면한 지하 1층 상가와 높은 도로에 면한 지상 1층 상가, 2개 층의 상가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땅은 대체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참고: ‘ 최길찬의상가주택이야기’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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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를 대비해 지은 별내 상가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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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아치하우스, 작지만 실속 가득한 특이한 집
- 13.5㎡(4.1평) 초소형 원룸 단층 아치 하우스다. 작은 규모지만 단열재를 포함해 갖춰야 할 것은 모두 갖춘 이동식 주택이다. 아치 하우스는 별장뿐만 아니라 펜션으로도 사용 가능하다.글. 사진 전원주택라이프 편집부 건축정보위치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건축면적 13.5㎡(4.1평)외벽재 파운드리 시더 사이딩내벽재 리빙우드, 타일지붕재 아치 패널 위 시멘트 사이딩바닥재 강화마루난방형태 탄소 매트 필름 난방, 저탕식 온수기설계 및 시공 ㈜스판코리아 가격 1,600만원 제품문의 져스틴하우스 이재호 대표 010-3643-5155http://mstorefarm.naver.com/justinhouse 전원주택 시장이 날로 커지면서 새로운 주택 형태가 속속 선보이고 있다. 특히 주말이면 자연을 찾아 도심을 떠나는 이들이 크게 늘면서 이들을 타깃으로 한 별장과 펜션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여기에 더해 근래에는 이미 자연에 정착한 이들이 친인척이나 지인들의 방문을 고려해 작은 규모의 별채를 짓는 모습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울산 천정리에 위치한 방문객을 위한 13.5㎡(4.1평) 아치 하우스가 이러한 경우다. 전체를 목재로 마감해 친환경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 다락 형태 2층을 만들어 침실로 활용한다. 우측 문과 인접한 작은 주방과 욕실. 이곳 아치하우스는 방문객을 위한 숙소로 쓰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 특이한 모양으로 시선 집중둥근 원을 반으로 갈라놓은 듯한 울산 주택은 패널을 하프 라운드 형태로 제작한 후 지붕과 외벽을 마감했는데 벽체는 일반 목구조와 마찬가지로 석고보드, 합판, 단열재, 마감재순으로 처리했다. 특이한 것은 지붕이다. 아치 패널을 이어 붙인 다음 각 패널 이음새를 고정하고 오랜 시간 결속력을 강화하는 거멀접기를 한 후 각 패널 홈마다 단열재를 채워 넣었다. 그 위에 합판을 설치하고 시멘트 사이딩으로 마감했다. 스테인리스 재질 아치 패널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주변 경관과 훌륭한 조화를 이뤄 어디에 설치해도 부족함이 없고 기계화 시스템으로 어떤형태로도 성형 및 시공이 가능해 작은 대지 면적에도 안성맞춤이다. 또한 기계화 시스템은 공기를 단축하고 건축비를 절감하는 효과를 준다. 측면으로 반원이 독특한 모양을 낸다. 4.1평으로 아담하지만 주택의 기능을 하기에 충분하다. 공장에서 단열재를 시공하는 모습. 크레인을 동원해 공장에서 제작한 아치 하우스를 설치하고 있다. 내부를 거실, 주방, 욕실로 구성했고 사다리를 놓아 위층에 침대를 놓았다. 내부는 목재로 마감해 친환경적인 인테리어를 구현했고 물 사용이 많은 욕실에 타일을 깔았다. 아치 하우스를 마련한 관계자는 "손님이 생활하면서 묵어가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단열 성능이 좋아 추위나 더위에도 거뜬하다"고 말했다. 두개의 동을 하나로 연결해 사용하기도 한다. 4개 동이 아담하게 놓여 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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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아치하우스, 작지만 실속 가득한 특이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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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상가주택, 깊이가 다른 3개의 마당을 품은 '삼각 집'
- 삼각형 필지에 맞춰 매스를 직각 삼각형으로 구성한 고양 삼각 집. 기하학적인 삼각형의 틀과 풍부한 사각형이 공간의 깊이감을 더해 준다. 여기에 삼각형의 형태는 수직 깊이가 다른 3개의 마당을 품고 있다.글 홍만식(㈜리슈건축사사무소 소장)사진 김재윤 작가※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인터뷰와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HOUSE NOTE▶DATA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지역/지구 제1종 일반주거지역, 지구단위계획구역용도 근린생활시설, 다가구주택건축구조 철근콘크리트조대지면적 403.00㎡(121.91평)건축면적 224.73㎡(67.98평)건폐율 55.76%(법정 60% 이하)연면적 437.56㎡(132.36평) 1층 103.38㎡(31.27평) 2층 172.04㎡(52.04평) 3층 162.14㎡(49.05평)용적률 108.58%(법정 120% 이하)규모 지상 3층높이 13.66m주차 6대설계기간 2016년 4월~8월공사기간 2016년 9월~2017년 6월건축비용 6억 7천만 원 주택 야경 맥락과 조건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명지병원 인근에 자리한 상가주택으로, 필지는 서쪽으로 30m 전면 도로(호국로)를 둔 삼각형이다. 차량으로 인해 소음이 많은 곳이지만, 도로 너머로 논과 밭 그리고 멀리 나지막한 산이 바라보이는 좋은 조망권을 갖고 있다. 필로티 구조의 주차장 건축주는 1층 근생시설, 2층 임대 주거, 3층 자가 주택을 구성하고 싶어 했다. 필지의 크기에 비해 용적률(법정 120% 이하)이 여유가 있기에 거주자들에게 더욱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건물을 원했다. 자가 주택은 자연 채광과 환기가 잘 되고 마당과 함께 자녀들의 꿈인 다락이 있는 공간으로 계획했으면 했다. 건축주 세대 거실 거실 겸 북카페로 계획해 발코니 맞은편에 평상을 설치하고 편히 책을 보도록 했다. 건축주의 작은 방 두 곳과 이어진 다락. 다각형 모습이 시지각적으로 재미를 더한다. ▶MATERIAL외부마감 지붕 - 리얼징크 벽 - 스터코, T24 투명 로이 유리 데크 - 방킬라이내부마감 천장 - 석고보드 위 수성페인트 벽 - 벽지 바닥 - 타일, 강마루 / 투명 에폭시(근생시설) 단열재 지붕 - T180 비드법 보온판 2종 4호 외단열 - T120 비드법 보온판 2종 4호계단실 디딤판 - 에폭시 코팅 난간 - 평철창호 ㈜위트설계 ㈜리슈건축사사무소 홍만식 소장 02-790-6404설계담당 임도영, 이상민구조설계 광림구조전기설계 코담기술단시공 윤홍건축 010-4020-8004 www.yoonhong.co.kr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은 천장을 오픈해 시원한 느낌을 줬고, 3층 계단실은 발코니와 연결된 벽을 창으로 계획해 채광을 확보했다. 건축주 세대 복도에서 본 마당 풍부한 단순함의 기하학삼각형 모양의 필지는 그대로 삼각형의 기하학적 형태가 된다. 삼각형의 기하학은 전체적인 틀을 만들고 사각의 실들로 채우면서 생기는 틀과 실의 사이는 공간의 깊이를 더해 준다. 여기서 사이 공간으로 생기는 삼각형 틀의 벽체는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만들면서 주변과의 관계를 제어하게 된다.이러한 관계의 조직을 통해 필지가 만드는 맥락적 형태는 단순한 삼각형이지만, 풍부한 공간을 담으면서도 매력적인 시각적 형태가 된다. 임대 주거에 배려한 2개 층 깊이의 마당 수직적 깊이의 마당들삼각형의 형태는 수직 깊이가 다른 3개의 마당을 품고 있다. 이들 마당은 내부와 연계된 이벤트 공간이면서 층간으로 분리된 프로그램들이 시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깊이감을 만든다. 바로 주차장 쪽에 있는 3개 층 깊이의 마당과 2층 임대 주거에 배려된 2개 층 깊이의 마당, 그리고 주인 주택에 거실과 연계된 1개 층 깊이의 마당이다. 3개의 마당은 수직적으로 깊이를 만들면서 수평적으로 각 층에서 주변을 조망할 때 시각적인 프레임을 만들어 준다.이들 마당을 잇는 동선은 내·외부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어 공간의 풍부함을 더해 준다. 수직적 깊이를 만들면서 수평적으로 각 층에서 주변을 조망할 때 시각적인 프레임을 만들어 준다. 정면과 배면에 다양한 크기의 창과 개구부가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전면과 배면에선 평범한 주택 같아 보이지만 좌측면에서 화정동 삼각 집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다. 추가 [스틸하우스, 펜션, 상가주택, 기타] 깊이가 다른 3개의 마당을 품은 고양 삼각 집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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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상가주택, 깊이가 다른 3개의 마당을 품은 '삼각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