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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아름다운 돌담과 옛 생활방식을 엿보는 아산 외암리 참판댁
- 옛 마을의 모습을 잘 보존하여 중요민속자료 236호로 지정 받은 충남 아산시 외암리. 이곳에는 여러 채의 기와집이 자리하지만 중요민속자료는 건재고택建齋古宅과 참판댁參判宅뿐이다. 그만큼 참판댁은 건축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뜻인데 뒤쪽의 큰댁(중요민속자료 195)과 앞쪽의 작은댁(중요민속자료 195-2)으로 나뉜다. 현 주인인 아래쪽 작은댁은 나중에 구입한 집이라고 한다. 참판댁은 대한제국의 종2품 참판직에 해당하는 시종부 부경 등을 지낸 이정렬 공公이 공직을 사퇴한 후 고종황제의 하사금으로 지은 집이라 하여 참판댁이라 불린다. 글 최성호 사진 윤홍로 기자 사랑채에는 ‘高宗皇帝고종황제 賜號사호 退湖居士퇴호거사 英王九歲書영왕구세서’라는 현판이 내 걸렸다. 즉 고종황제가 호를 내리고 영왕이 9살(1905년)에 쓴 것이다. 이때부터 이정렬 공은 ‘퇴호退湖’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어쨌든 이정렬 공은 고종황제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집을 고종황제의 하사금으로 지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득선 씨도 120∼130년 됐다 하고, 필자의 견해도 그 이상 된 것으로 보이는 바 실제로 고종황제의 하사금으로 지었는지는 단정 내리기 어렵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민속마을인 외암리에서 규모가 큰 참판댁. 안채 대청에서 바라본 뒤뜰로 돌담이 가지런히 장독대를 에워싸고 있다. 사생활은 보호하고 외부인은 감시 참판댁의 권위를 나타내는 행랑채보다 높은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채는 대문 정면에서 좌측으로 빗겨 위치한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평행 배치가 아니기에 들어서는 사람은 오히려 중문 쪽으로 시선이 가는 반면, 사랑채에서는 행랑채가 쉽게 바라보인다. 이러한 배치는 사랑채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면서 출입자를 적절하게 살피도록 한 것으로 생각된다.행랑채는 다른 곳과 달리 툇간退間(원칸살 밖에다 딴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을 두었는데 이곳에서만 보이는 구조로 행랑채의 활용도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만든 것 같다. 이득선 씨는 툇간 중 동측 한 칸은 마구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겨우 말 한 마리만 들어가는 이러한 마구간은 다른 곳에는 없는 특이한 구조다. 아마도 집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필요한 면적을 할당한 듯하다. 사랑채는 5칸 ‘一’자 집으로 왼쪽에서부터 작은사랑방, 대청, 큰사랑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고주 5량의 납도리집에 우진각지붕이다. 기단에 암키와 두 장을 겹쳐 만든 굴뚝으로 벌레 퇴치용이다. 이정렬 공은 고종황제에게 ‘퇴호退湖’라는 호를 받았다. 기단에 여름철 외출하고 돌아와서 간단하게 땀을 닦도록 수반을 만들었다. 기단에 만든 굴뚝과 수반의 쓰임새는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전퇴前退(집채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조그마한 칸)집으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이다. 좌측에서부터 각각 한 칸 방과 대청, 두 칸 큰사랑방, 마지막 한 칸이 다락과 부엌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전면 툇간은 몸종이 기거하는 머릿방이다. 집의 위상位相에 비해 사랑채의 대청 규모가 조금 작다는 것 외에는 기단의 높이도 적절하여 차분하면서 안정감을 준다. 이곳 사랑채 기단에는 다른 곳에 없는 시설이 두 가지 보인다. 첫째는 기단에 만든 굴뚝이다. 암키와 두 장을 겹쳐 만든 두 개의 구멍이 사랑마당을 향한다. 그러나 실제 연기를 빼는 굴뚝은 안마당 쪽으로 뽑아 놓았다. 이득선 씨는 이 굴뚝은 벌레를 쫓고자 설치했다고 한다. 안채 마당에 뽑은 굴뚝을 막은 채 불을 때면 연기가 사랑마당 쪽으로 나와 벌레를 쫓는다는 것이다. 한번 불을 때 연기를 내면 2∼3일간 벌레가 꾀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낮은 굴뚝은 주로 기후가 온화해 불을 잘 들이지 않아도 되는 남부지방에서 가끔 보이는 형식으로, 중부이북지방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곳 외암리의 건재고택 사랑채에는 높은 굴뚝이 아예 없다. 참판댁에서는 굴뚝을 이중으로 설치해 목적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한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둘째는 기단에 돌로 만든 조그마한 수반水盤이다. 이득선 씨는 사랑채 어른이 세수하던 곳으로, 더운 여름 바깥어른이 외출하고 돌아와서 간단하게 땀을 닦도록 만든 수반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지저분하지만 예전에는 몸종이 늘 닦아 반질반질했고, 수반 바로 앞 기둥에는 세수한 후 물기를 닦도록 베수건을 늘 걸어놓았다는 것이다. 큰 사랑방 앞 창문 위쪽에는 창호지도 바르지 않은 창을 자그맣게 뚫어 놓았다. 이득선 씨는 환기용이라면서 원래는 내부에도 상방 위에 환기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겨울에 세찬 바람이 들이쳐 최근에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는 속담만큼 한겨울에 조그마한 틈 사이로 찬바람이 들이치니 현재 뚫린 정도면 겨울에 만만찮은 바람이 들이쳤을 법하다. 사랑채 우측의 중문으로 안채로 통한다. 안채는 10칸의 ‘ㄱ’자 집으로 1고주高柱 5량樑의 납도리집이다. 2칸짜리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부엌, 안방, 윗방, 골방이 차례로 놓였고 오른쪽으로는 건넌방, 작은 부엌, 머릿방이 있다. 곳곳에 보이는 시렁에는 옛 살림살이가 잘 보관돼 있다. 《주자가례》에서 벗어난 현실적인 배치 안채는 사랑채 우측의 중문을 통해야 들어간다. 중문은 사랑채와 직각 방향으로 설치하여 안채가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중문 앞쪽에는 문을 별도로 냈는데 예전에는 현재하고 달리 사람이 통행할 정도로 담이 트여 중문으로 직접 들어갔다. 동네 아녀자들이 사랑채 앞을 지나지 않고 편하게 안채로 드나들게 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안채는 사랑채와 광채하고 더불어 튼 ‘ㅁ’자 형이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좌측은 남쪽에서부터 부엌 2칸, 안방, 윗방, 고방庫房 그리고 2칸 대청 건너편에 칸 반 크기의 건넌방을 배치한 구조다. 건넌방 옆으로 반 칸 부엌과 한 칸 방이 자리한다. 건넌방과 옆방을 연속적으로 배치하지 않고 사이에 반 칸 부엌을 드린 점이 특이하다. 가운데 부엌에다 양쪽 방의 아궁이를 설치해 난방한 것이다. 또한 대청의 판장문板牆門 상부에 만든 벽장은 사당이 지어지기 전 위패를 모시는 장소로 쓰였을 것이다. 사당이 안채 좌측에 위치한 점도 눈에 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는 정침正寢(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은 대부분 동쪽 즉, 안채를 바라볼 때 우측에 설치할 것을 권했다. 이곳 사당은 《주자가례》에서 벗어났는데 아마도 현재의 우물 때문인 것 같다. 집을 지을 때 수맥水脈을 살펴 우물을 찾고 보니 사당 자리가 우물 차지가 되어 사당이 자연스럽게 반대쪽으로 옮겨진 듯하다. 사당은 한 칸 규모 맞배지붕으로 여느 곳하고 모습이 다르다. 대부분의 사당과 달리 후벽를 외부로 뽑아내어 감실龕室(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 두는 장)을 만들어서 위패를 모셨다. 아마도 실내 공간을 넓게 확보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집을 둘러싸는 돌담으로 공간을 구획했다. 작은집 사랑채는 대청이 한쪽으로 배치된 남도식이다. 최근 외암리를 다시 찾으면서 옛날의 고즈넉한 마을 분위기가 사라진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마을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건물도 많이 짓고 주차장도 새롭게 단장했다. 특히 마을 입구에 여러 채의 전시용 및 행사용 건물을 짓다 보니 마치 민속촌에 들어가는 듯했다. 또한 예전에는 기와집도 몇 채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너도나도 기와집을 짓다 보니 고즈넉하던 마을 풍광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참판댁 아랫집도 단체 숙박을 위한 시설로 개조돼 마당에 찜질방까지 들어서 옛집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관광 개발도 좋고, 팜스테이도 좋지만 원형을 보전한다는 원칙은 최소한 지켰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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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아름다운 돌담과 옛 생활방식을 엿보는 아산 외암리 참판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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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서울 운현궁 雲峴宮
- 운현궁은 고종의 잠저潛邸이자,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한국 근대사 유적 중 유서 깊은 곳이다. 이하응이 왕실 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 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 정치로의 개혁 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던 잠저이기에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 글 최성호<산솔도시건축연구소 소장/전주대 겸임 교수>사진 윤홍로 기자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사적 제257 호)은 흥선대원군이 살던 집으로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나고 자란 곳이다. 1910년 운현궁 뒤에 서양식 건물(현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을 짓기 위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과 영화루, 은신군 · 남연군의 사당을 모두 헐었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오늘날 기상청과 천문대 격인 관상감(서운관書雲觀은 관상감 별칭)이 있던 고개 이름으로, 그것을 궁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운현궁은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10여 년 섭정攝政하며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행한 곳이다.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던 1863∼1873년 사이 대폭 확장했다. 운현궁이란 이름은 흥선군이 대원군, 부인 민 씨가 부대부인이란 작호를 받은 1863년 12월 9일에 붙여졌다. 예전엔 궁궐과 운현궁이 하나로 이어졌다고 한다. 운현궁 구조는 서양식 건물 앞쪽에 남향한 일렬 배치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과 안채인 노락당老갪堂, 이로당二老堂, 영로당이 자리한다. 현재 영로당은 주인이 달라 운현궁과 담으로 막혔다. 운현궁 행랑마당 쪽은 훼손이 심해 최근에 다시 지었다. 운현궁은 서쪽에서 진입해 경비대인 수직사(현유물전시관)를 거쳐 안채와 사랑채로 들어간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남쪽을,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은 서쪽을 바라본다. 본래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 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에 해당한다. 정원 곳곳에 문인화에 자주 등장하는 괴석怪石이 많다. 개혁 정치를 논한 노안당사랑채인 노안당은 몸채가 정면 6칸에 측면 3칸이고 남쪽으로 4칸 누마루인 영화루迎和樓가, 북쪽으로 2칸 온 돌방과 1칸 누마루가 붙은 T자 형태다. 몸채는 서쪽 사랑채 중문부터 전면 2칸 대청과 전면 2칸 온돌방을, 그리고 돌출한 몸채 전면과 좌우에 퇴칸을 두었다. 잘 다듬은 장대석 3벌 기단 위에 앉히고 누마루쪽 하부는 전돌로 예쁘게 장식했다. 홑처마로 동서 양쪽 면과 남쪽 일부에 차양遮陽을 달았다. 일반집에서 보기 힘든 차양으로 집이 높다 보니 비가 들이치지 않게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차양은 각재로 틀을 짜고, 그 위에 판재를 깐 다음 함석을 덮었는데 버팀목을 설치한 방법이 흥미롭다. 서까래 5∼6개 간격으로 버팀목을 놓고 평고대를 설치하고 철물을 걸쳐놓았다. 이렇게 하면 앞으로 쳐지면서 뒷부분이 처마 상부에 걸린다. 또한 흘러내리는 것을 막고자 평고대 쪽에 별도의 걸고리를 달았다. 별 어려움 없이 간단하게 차양을 설치하도록 한 훌륭한 고안물이다. 노안당은 대원군의 사랑채이자 정사를 논하던 곳으로, 그에 걸맞게 당당함이 느껴진다. 기단은 3벌대지만 중문에서 보면 기가 질릴 정도로 높다. 기둥도 일반적으로 커야 8치 정도를 사용하는 데 비해 10치 정도로 굵다. 홑처마지만 서까래 부재도 매우 크다. 대원군의 집답게 권위를 한껏 높인 것이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공자가‘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라고 한《논어》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일상 시 거처하며 주요개혁 정책을 논의한 곳이다. 4다. 노안당 4칸 누마루인 영화루와 퇴칸. 5 하인방 하부 초석 사이에 전돌로 고막이를 설치했다.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린 노락당.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인 되는 건물이다.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은 노락당노안당 뒤쪽 협문으로 들어가면 안채인 노락당에 이른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쪽 중문칸과 남쪽 행랑채, 동쪽 누마루를 연결한 口자 형태다. 후원도 건물에 싸여 전체적으로 日 자를 옆으로 뉘인 형태다. 정면 10칸에 측면 3칸 규모고 동쪽 양측 1칸과 서쪽 2칸을 남쪽으로 내밀어 남행각과 연결했다.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2칸 온돌방과 1칸 부엌을 대칭으로 배치했다. 온돌방과 대청 앞은 퇴칸이다. 동쪽과 서쪽 방 구성은 조금 다른데 동쪽 방은 안주인이 거처하던 방으로 북쪽으로 1칸을 더 내밀고 반 칸짜리 퇴칸을 뽑았다. 서쪽 방은 4개로 구획해 필요에 따라 트도록 했다. 운현궁의 정침으로 겹처마인 데다 대청도 매우 크다. 육간대청六間大廳으로 칸살이 16척(약 5m, 운현궁 사이트 참조)으로 마치 대궐이란 느낌이 들 정도다. 규모가 크다 보니 지붕도 높아져 운현궁에서 가장 큰 집이 됐다. 후원 굴뚝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재밌는 형태다. 연가煙家를 구성하는 장식들이 눈길을 끈다. 벽돌이 끝나는 지점 둥그런 부재는 도리처럼 사괘마춤을 한 모습이고, 그 위에 부재는 공포貢包(처마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들)처럼 까치발 모양이다. 다시 그 위에 전돌 1장과 기와, 연가를 올렸다. 그 가운데 하나는 태극문양을 새겨 한껏 멋을 냈다. 이것은 경복궁 아미산 굴뚝의 구성 방식과 같아 궁의 품격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전면 전체와 배면 일부에 설치한 차양遮陽. 연가로 구성한 후원 굴뚝 장식들. 노락당은 대청을 중심으로 동서쪽 모두 2칸 온돌방과 1칸 부엌(상부 다락)을 대칭으로 배치했다. 동쪽 이로당과 노락당, 노안당 옆으로 길이 나있다. 이로당 초석은 정방형인데 상부를 하부보다 약간 줄여서 다듬었다. 기둥은 평주와 고주 모두 네모기둥이고 약간의 민흘림이 있다. 남성이 범접치 못한 이로당이로당은 앞의 두 건물과 달리 평면이 ㅁ자 형태다. 애초 정면 7칸에 측면 7칸이던 것을 서쪽 면 전체를 덧달아 정면 8칸이 됐다. 남쪽은 서쪽부터 온돌방과 3칸 대청 · 온돌방이고 동쪽 끝이 통로인 퇴칸이다. 이 퇴칸은 남측 복도각과 북행각을 거쳐 노락당으로 이어진다. 대청과 동쪽 온돌방 전면에 퇴칸을 뒀다. 동쪽은 온돌방과 부엌을 거쳐 북쪽으로 이어지고, 북쪽은 온돌방과 마루방이고, 안쪽 마당 쪽에 장마루를 깐 툇마루를 만들어 실 간 연결에 편리성을 도모했다. 이로당 남쪽 중앙 3칸 대청과 서쪽 온돌방. 이로당과 노락당을 잇는 복도각. 이로당에서 본 서양식 건물은 현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으로 쓰인다. 현재 서울에 한옥은 몇 채 안 남았지만 옛날엔 건물 대부분이 기와집이었다. 그중에는 잘 살던 큰 집도 한두 채가 아니었다. 현존하는 그런 집은 운현궁과 윤보선 전 대통령 집이던 공덕귀 가옥 정도다. 서울은 예나 지금이나 잘 사는 사람이 모여 산다. 권력 주변엔 늘 부자들이 모여 살기 마련이다. 지금은 대갓집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집들이 제대로 남았다면 과거 조선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로당 북쪽과 동쪽, 이로당 북쪽 영로당은 담으로 막혔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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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서울 운현궁 雲峴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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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시대가 불안하면 닫힌 집 지어, 부안 김상만 가옥
- 사람은 보다 좋은 환경에서 살기 위해 집을 짓는다. 그러나 집 역시 사람이 짓기에 사회적 상황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집을 짓는 사람의 경제적 형편과 신분에 따라 집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집의 구조가 변화한다. 사회가 불안정하면 집의 구조는 매우 폐쇄적으로 변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고 노력한다. 부안 김상만 가옥(중요민속자료 150호)은 시대 상황에 따라 집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글 최성호 사진 윤홍로 기자 김상만 가옥은 1907년부터 인촌 김성수(1895∼1955)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초가다. 원래 초가였는지 또는 억새를 이은 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와집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가옥은 1895년 안채와 사랑채 헛간채를 짓고 1903년 안사랑채와 곳간채를 추가했다. 문간채는 1984년에 중건했다. 1895년 안채를 지은 해 이미 김씨 집안은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다. 인촌이 태어난 고창의 생가는 기와집이고, 또한 인촌의 부친 대에 수만 석을 한 거부 집안에서 초가를 지었다는 사실이 가세와 어울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이곳에 살림집을 짓지 않은 것 같다. 초기에 줄포에서 새로운 사업을 하며 임시 거처 겸 사무실 용도로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중문과 대문에서 본 바깥사랑채. 사무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바깥사랑채 뒤로 인촌이 주로 기거하던 안사랑채가 보인다. 육영사업에 대한 뜻을 관철시키고자 단식했던 곳이다. 배산하는 형국을 좇아 북서향한 안채. 6칸 반 一 자형 집으로 남쪽에서 흔히 보는 형태다. 가세를 숨기려 초가 지어김씨 집안은 1907년 이 집으로 이사했다. 고창 집에서 자꾸 도깨비불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집을 옮긴 이유가 도깨비불 때문일까. 당시 조선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일제에 반 예속된 상태에 있던 터라 치안이 매우 불안했다. 신분 질서의 급속한 와해와 민심 이반離反 그리고 가난으로 화적들이 들끓었다. 부자들이 보다 치안이 안정된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당연한 사회적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인촌 가문이 줄포로 이사할 때 먼저 사람만 빠져나오고 가산을 후에 옮겼다고 하니 상황이 매우 급박했던 것 같다. 줄포는 당시 영광의 법성포와 함께 서남해안에서 손꼽히는 항구였다. 일본인이 일찍부터 거주했으며 일본 헌병대도 주둔했다. 줄포의 사회 경제적 가치 때문에 일제는 적극적으로 치안을 유지했다. 결국 안정된 치안 때문에 이곳으로 살림을 이전했다고 본다. 어쨌든 1895년에도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가세를 고려해 집을 짓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부자라지만 누가 대놓고 기와집을 지어 사회적으로 지탄받거나 도적의 표적이 되기를 바라겠는가.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이 집은 기와집을 사서 해체하여지었다고 한다. 당시 집을 짓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고. 집을 헐고 한꺼번에 부재를 옮겨 지으면 남의 눈에 띄기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밤에 인력人力으로 부재를 하나하나 옮기다 보니 늦어졌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만큼 당시의 사회상이 집을 짓는 것도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할 정도로 불안했음을 보여준다. 김상만 가옥은 초가이긴 하지만 집의 부재는 매우 고급스럽다. 안채와 사랑채는 요새 시쳇말로 무늬만 초가다. 지붕에 기와만 올리면 품격을 갖춘 기와집이 된다. 김상만 가옥의 지붕은 현재 볏짚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사진을 보면 예전엔 억새로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 재료는 어떤 분이 일본집 같다고 지적해 고쳤다고 한다. 억새로 지은 집이 우리나라에 없는 것이 아닌데 어떤 근거로 일본 집 같다고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지붕의 볏짚은 매년 갈아야 하지만 억새는 내구성이 좋아 10년 정도는 갈지 않아도 되는 재료다. 관리인의 말로는 지붕의 볏짚을 매년 갈지 않고 삼 년마다 한 번 갈이 주기에 곳곳에서 비가 샌다고 한다. 전면 한 칸의 규모인 안채 대청. 위패를 모시기 위한 벽장을 짜서 걸었다. 안채 안방. 다양한 수장 공간을 갖추고 있다. 안채 툇마루. 전면 3칸의 규모의 안사랑채. 전후퇴집으로 좌측 끝 방은 마루로 꾸며져 있다. 바깥사랑채 뒤뜰. 바깥사랑채에서 안사랑채로 통한다. 복잡한 평면 구조를 한 전후퇴집김상만 가옥의 안채는 배산背山하는 형국을 좇아 북서향했다. 안채는 6칸 반 一 자형 집으로 남쪽에서 흔히 보는 형태다. 방은 우측에서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순서로 배치했다. 안채는 ‘전후퇴집’이다. 이러한 형식은 단칸방이 일렬로 배열된 홑집이 조선 후기 들어 사회·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기 위해 새로 등장한 구조다. 외견상으로 단순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면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전후퇴집과 양통집은 측면이 같은 두 칸 규모다. 방이 단순히 두 줄로 배열된 양통집과 달리 전후퇴집은 방의 앞뒤에 반 칸씩 마련된 전·후퇴를 이용해 다양하고 복잡한 기능을 지닌 평면을 만들어 낸다. 이 가옥 역시 전퇴와 후퇴를 이용해 다양한 평면을 만들어 내면서 또한 다른 집과 달리 다양한 수장 공간을 갖추고 있다. 수장 공간을 안채, 사랑채 할 것 없이 구석구석 공간이 나오는 모든 곳에 만들어 놓았다. 안에 들어가 보면 아기자기하다고 할 만큼 수장 공간이 다양하다. 안사랑채의 전면에도 조그맣고 다양한 수장 공간을 위아래에 설치했다. 이렇게 수장 공간이 다양한 것은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한 경제활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안채 대청은 전면 한 칸 규모로, 다른 부잣집의 대청에 비해 형편없이 작다. 처음부터 살림집으로 계획하지 않았기에 대청의 규모가 작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한 흔적은 위패를 모시기 위한 대청의 벽장에서도 볼 수 있다. 살림집으로 지었다면 사당을 만들거나 또는 대청의 벽에 벽감壁龕을 만들어 위패를 모셨을 것이다. 나중에 살림집으로 바뀌면서 위패를 모실 자리를 마련하기 어렵자 벽장을 짜 걸어 놓았을 것이다. 사랑채는 안사랑채와 바깥사랑채로 나뉜다. 먼저 바깥사랑채를 짓고 안사랑채를 나중에 지었다. 관리인의 말로는 바깥사랑채는 사무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바깥사랑채도 전후퇴집의 특징을 잘 활용해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바깥사랑채에도 안채와 같이 머릿방을 드렸다. 조용하게 쉬거나 은밀한 이야기가 필요할 때 이용했을 것이다. 안사랑채는 인촌이 주로 기거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육영사업에 대한 뜻을 세웠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단식했던 곳이라고 한다. 안사랑채는 전면 3칸의 크지 않은 규모다.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전후퇴집으로 좌측 끝 방은 마루로 꾸며져 있다. 현재 이 집은 다른 집과 달리 관리인을 두고 있다. 집안이 집안인지라 자신의 근거를 보존하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주인이 살지 않을 경우 관리인을 두는 예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렇기에 그나마 나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마침 장마철이라 아궁이에 불을 땠는가 물어보았다. 관리비가 너무 적어 불을 땔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관리비만으로는 자신의 생활비는커녕 가끔 불을 때는 비용조차 대기도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궁이를 막아 버렸다고 한다. 인촌 가문의 재력에 비하여 자신의 터전을 보전하고 가꾸려는 노력이 너무 미약해 보인다.관리인을 두었지만 관리하려는 개념이 잘못됐다. 도둑을 지키는 것만이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의 경우 일차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해 결국 집주인에게 관리 책임이 남는 것이다. 그나마 집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것일까. 마당에 덩그렇게 놓여있는 자신 집안사람의 동상을 만들어 놓은 정성에 1/10이라도 집에 관심을 가진다면 이렇게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채 전경. 우측에서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순서로 배치했다. 안채 뒤뜰. 김상만 가옥의 담 역할을 하는 대문 옆 문간채.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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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시대가 불안하면 닫힌 집 지어, 부안 김상만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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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물고기가 하늘로 뛰고 학이 날아다니는 괴산 김기응 가옥
- 김기응 가옥(중요민속자료 136호)은 현재 살고 있는 종부의 시할아버지인 김항연 金恒然이 1910년 지은 집이다. 고종 때 공조참판을 지낸 김향연은 경술국치 庚戌國恥로 조선이 무너지자 이곳으로 낙향했다. 고향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소수면이다. 낙향 이전부터 이곳 땅을 많이 소유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면 땅 때문에 이곳에 정착한 것 같지는 않다. 괴산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집터 앞에 넓은 들이 펼쳐져 조망이 시원스럽다. 이러한 풍광 때문에 고향이 아닌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집은 원래 관리인이 살던 안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을 다시 지었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기자 충북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의 김기응 가옥. 김기응 가옥의 뒷산에는 수백 년 된 장송 長松이 우거져 있다. 종부 宗婦(종가의 맏며느리)는 “이전에는 나무가 더 많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목재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으로 변했다. 1915년에 촬영한 해인사 전경 사진에서도 주변에는 나무가 울창하지만 조금 떨어진 뒷산은 민둥산에 가깝다. 그만큼 전국의 산이 헐벗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많은 양반 집안 [班家]에서 뒷산의 나무를 잘 보존한 것은 풍수적 의미가 강하다. 집의 풍수적 환경을 보전하고자 뒷산이나 비보 裨補(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움) 적 의미가 있는 곳의 나무를 잘 가꾸고 보존한 것이다. 이 집은 이러한 뒷동산을 배경으로 배치돼 있다. 대지가 급하지는 않지만 뒷동산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이 완만한 경사 때문에 집 안 가득 햇볕이 골고루 들어온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으로 공간 구성이 독특하다. 솟을대문 양쪽으로 늘어선 행랑채는 좌우가 ㄱ자로 꺾여 바깥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궁궐에서나 봄직한 꽃담김기응 가옥은 여느 고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안채에 이르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대문으로 들어서면 사랑채가 나오고, 그 옆의 중문을 통해 곧바로 안채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 가옥은 다층 구조라 사랑채 옆의 중문과 안행랑채에 있는 문을 지나야만 안채로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복잡한 이유는 조선 후기 들어 심화된 남녀유별의 관념을 반영한 것이다. 개화기 서구 문물이 물밀듯 밀어닥치자, 이를 적극 받아들이려는 흐름과 보수화 경향이 함께 나타났다. 보수화 경향은 그 정도를 넘어 수구화 守舊化 됐는데, 그 경향이 이 집에서는 더욱 심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둘째는 목재 수급이 원활치 않던 당시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 점이다. 새로 지은 건물 중 중요한 사랑채를 제외하고 행랑채의 재목은 그리 넉넉지 못하다. 행랑채의 서까래는 너무 가늘어 보기에도 불안할 정도다. 종부는 “재산 분배와 사업 실패로 가세 家勢가 기울긴 했지만 집 지을 당시에는 1500석을 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서는 꽤 알아주던 부자였다. 그럼에도 목재를 넉넉하게 쓰지 못할 정도로 그 사정이 열악했던 것이다. 셋째는 특징이자,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사랑채 뒤뜰의 담이다. 사랑채 뒤편은 안채의 행랑채와 마주하는데 그 간격이 넓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사랑채에서 마주 보이는 행랑채 담을 꽃담으로 아름답게 치장했다. 규모가 작을 뿐이지, 그 품격은 마치 궁궐의 꽃 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양쪽은 卍 자 문양을, 가운데는 팔각의 무시무종 無始無終(시작도 끝도 없다) 문양을 채워 넣었는데 네 귀퉁이 두 군데는 박쥐 문양을, 두 군데에는 당초 문양이다. 이러한 꽃 담을 일반 집에서 설치한다는 것은 과거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다. 19세기 말 사회의 신분 질서가 와해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 가옥을 지은 계기도 조선이 망하자 낙향한 것 때문이니 신분의 상징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사랑채는 ㄱ자형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납도리집이다. 바깥마당에서 바라본 중문. 사랑 행랑채에서 바라본 사랑채와 안행랑채. 장독대 뒤 울타리 밖은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넉넉한 마음이 혼란기 때 집을 지켜사랑채 선자서까래의 짜임이 재밌다. 추녀 주위의 서까래 짜임은 세 종류다. 선자, 엇선자, 평연으로 구분되는데, 우리나라 기와집에서는 선자서까래가 주류를 이루고 수준이 떨어지는 집에서 엇선자를 사용했다. 평연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가옥의 사랑채 추녀 밖에서 보이는 앞쪽은 선자서까래로, 외부에서 안 보이는 뒤쪽은 엇선자다. 이렇게 두 가지 방식을 혼용한 경우는 이곳에서 처음 보았다. 이러한 모습은 외부에도 그대로 나타나 부연의 짜임이 낯설다. 19세기 초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안채는 튼 ㅁ자형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 지은 사랑채나 행랑채하고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부엌은 서쪽 4칸의 규모로 다른 집보다 크다. 부엌만으로도 이 집안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을 것이다. 안방은 2칸인데 모두 남쪽에 면해 햇볕이 잘 들어 분위기가 밝고 명랑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 혼란기에 집을 유지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종부는 “종손께서 손이 커서 주변에 베푸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며 “산에서 내려온 공비들도 많이 베푼 집이라 하여 옷가지와 먹을 것만을 갖고 갔다”고 한다. 그렇기에 해방 혼란기와 한국전쟁 통에도 집이 고스란히 남았던 것이다. 종부에게 “해방 후 토지개혁 때 많은 땅을 강제로 수용당해 가슴 아프지 않았는가” 했더니, “가난한 사람이 잘 살게 됐는데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닌가” 하고 되묻는다. 부부가 일심동체라더니 마음 씀씀이까지 한결같은 모습이다. 종부는 우리가 집을 돌아보는 내내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많은 가보 家寶를 도둑맞았다”면서 “이제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그만큼 불신이 깊어 보였다. 우리가 대문을 벗어난 후에도 한참을 문가에서 서성였다. 과연 누가 이러한 불신을 노종부에게 남겨 주었는가. 우리의 욕심이 순박한 노종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가 아쉽기만 하다. 김기응 가옥의 사랑채에는 어약해중 천魚躍海中天과 비학루 飛鶴樓라는 편액 扁額이 걸려 있다. 어약해중천은 물고기가 바다 가운데에서 뛰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그야말로 인재가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펴는 모습을 의미한다. 비학루는 학이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모습을 이야기한다. 이 집을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도 어약해중천이라는 문구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퇴락해 가는 집을 노종부와 차종부 단둘만이 지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인재가 나와 가문을 살릴 수는 없을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집을 짓고 있다. 과연 그 가운데서 어약해중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단지 돈만 있을 뿐 아담한 정취나 고고한 품격조차 찾을 수 없는데……. 안채로 들어서는 문간. 사랑채 후원은 좁은 공간으로 답답해 보여 내담 벽을 각종 문양과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ㄷ자형의 안채는 30여 평 규모로 정면에 부엌, 안방, 대청, 뒷방을 일렬로 배치하고 꺾어진 곳에 건넌방과 부엌을 두었다. 안채 뒤뜰.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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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물고기가 하늘로 뛰고 학이 날아다니는 괴산 김기응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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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조선 중기 살림집을 엿보게 하는 여주 명성황후 생가
- 명성황후는 최근 들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명성황후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많아진 데에는 ‘명성황후’라는 국내 창작 오페라의 성공과 TV 드라마가 한몫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명성황후가 과연 어떠한 생을 살았고, 어떻게 평가를 받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그 문제는 사학자의 몫이고,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건축과는 관련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생가(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제46호)’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지금부터 소개할 특징들 때문이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기자 명성황후 생가는 지어진 이유부터 전혀 다르다. 모든 집은 계속해서 살아갈 목적으로 지어진다. 그러나 명성황후 생가는 처음에는 시묘(侍墓) 살이를 위한 여막(廬幕 : 무덤 가까이에 지어 놓고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으로 지어졌다. 이렇게 잘 지은 기와집이 여막이라니… 시묘살이는 으레 조그마한 초막에서 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던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혼란은 시묘살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옛날의 시묘살이는 지금의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났다.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일상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손님도 맞이했고, 농사일도 관리했고, 먼 곳이 아니면 조문과 같은 외출도 했고, 약간의 음주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시묘살이 동안 거처하는 묘막에도 온돌을 설치했고 시종도 거느렸다. 시묘살이를 하는 사람은 대부분 한 집안을 이끌어 가는 가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일에 소홀할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수년간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생계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때문에 생계와 관련한 일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생활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면 시묘살이에 대한 오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집의 규모가 여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다. 신영훈 선생은 “여막이라기보다는 시봉청(侍奉廳)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여막이든 시봉청이든 과거에는 집안 형편에 따라 그 규모도 달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민유중(1630/인조 8년∼1687/숙종 13년)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이러한 집안의 위세는 대단했을 것이다. 여막 뒤편 나지막한 동산 위에 있는 묘와 신도비를 보면,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일반인은 영의정을 지냈더라도 묘에 호석(護石)을 두른 경우는 없는데, 이 묘에는 호석이 둘려 있다.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의 글이 숙종의 친필인 것만 보아도 그 집안의 위세를 알 만하다. 그러한 집안의 묘막을 거적때기로 가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집안의 위세에 걸맞게 묘막도 크고 화려하게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성황후 생가 안채는 고종황제의 황후로 개화기 국정에 참여했으나 을미사변으로 일인에 의해 시해되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던 명성황후가 출생해 8세까지 살던 집이다. 이 집은 1687년(숙종 13년)에 왕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됐는데, 당시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27평뿐이다. 사랑채 옆 곳간에서 바라본 안채. 14칸 규모의 민도리집인데, 8칸 규모의 팔작지붕 본채 한쪽에 6칸 규모의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 평면을 이룬다. 행랑채와 사랑채 마당에는 초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유교 사회에서 안채와 사랑채를 개방해명성황후 생가는 주변 정비 사업을 하면서 복원한 것이다. 여흥 민씨 집안사람이 살았던 여주군에서 매입하여 문화재로 지정했다. 1976년 안채를 중수(重修) 하고, 1995년에 사랑채와 행랑채 등을 중건하고, 주변을 정비하여 공원으로 만들었다. 나머지 건물들은 최근에 신축했기에 과거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것은 안채뿐이다. 6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관리인 이야기로는, “50년 전만 해도 밖의 행랑채까지 완형(完形)을 갖추고 있었다”고 했다. “가세(家勢)가 기울어 집을 관리하기 힘들자, 집주인이 조금씩 헐어 화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행랑채와 사랑채가 사라졌다”고 한다. 어쨌든 복원한 집과 원래의 집은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안내문에는 “비가 서있는 곳까지 집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기에 과거의 모습을 정확하게 복원한 것은 아니다. ‘원래의 모습대로 집을 복원했을까’ 하는 문제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가 서로 너무 개방적이라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집에서 안채와 사랑채가 이렇게 개방적 구조를 가진 예를 보지 못했다. ‘복원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개방형 구조로 만든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어쨌든 건물만 바라본다면 그리 가치가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집이 왜 지어져서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살펴본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면 한 번쯤은 찾아볼 만한 집이다. 오량 구조인 4칸 대청. 안채에서 바라본 사랑채 옆 중문과 행랑채 옆 대 문이 대각선으로 나 있다. 조선시대 사랑채 내부(재현). 고택을 보존하는 이유는여막 용도로 지었기 때문에 집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안채의 대청도 그리 높게 만들지 않아 권위적인 풍취를 찾기 힘들다. 권위를 내세우는 것을 자제하려는 의지마저 느끼게 한다.어쨌든 여막의 기능에 충실하려고 했던 모습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집은 민유중이 세상을 떠난(1687년) 그 무렵에 지었을 것이다. 이 집이 오래됐다는 것은 창문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양 여닫이 창문 가운데 문을 닫기 위해 설치한 수직부재는 옛날 방식이다. 이러한 점이 집의 연륜을 말해 주고 있다. 집은 사람이 살고 있을 때라야 가치를 지닌다. 마치 보여 주기 위한 모형처럼 잘 다듬어진 집을 볼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느끼기 위해 찾아가는가?’ 하는 회의감마저 든다. 이 집을 찾는 관광객은 대부분 단체 관람객이다. 그중에는 한류 열풍을 타고 찾아온 대만 관광객도 있다. 요사이 명성황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부쩍 사람이 늘어났다. 예전에는 이 집에 들어가려면, 관리인을 찾아서 문을 열어 달라고 했을 정도였는데, 그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실감한다. 그러나 이제 ‘명성황후 생가’는 집에 대한 가치가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나도 깨끗한 환경과 잘 닦인 도로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던 집들이 사라졌으니 박제(剝製)화된 허상만 남았을 뿐이다. 건물 안에 진열한 인형들 그리고 영어 번역기에서 흘러나오는 생경한 소리가 어색하기만 하다. 집이란 사람이 숨 쉬고 생활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을 느끼지 못한다면, 집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집을 보존한다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깨끗함이 아니라 생활이 담겨 있는 보전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안채 대청의 들어열개창과 퇴칸. 안채 대청마루와 사랑채.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서 ‘ㅁ’자형 배치를 이룬다. 안채 후정. 바닥에 납작 깔린 굴뚝이 이채롭다. 묘를 향해 머리를 돌린 신도비의 귀부이곳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신도비(神道碑)이다. 돌아간 분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비석으로, 한(漢) 나라 양진(楊震)의 ‘고대위양공지신도비(故大尉楊公之神道碑)’에서 비롯하여 종 2품 이상의 품계를 받은 사람에 한하여 세웠던 것이다. 민유중이 사망한 뒤 30년이 지난 1707년에 세워진 이 신도비는, 현재 민유중의 무덤과 함께 향토유적 5호로 지정돼 있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매우 뛰어난 솜씨를 자랑한다. 단순히 조각의 솜씨가 좋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신도비에는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힘이 있다. 거북 형상의 귀부가 갖춰져 있는 신도비는 고려 시대나 통일신라시대 많이 만들어졌던 부도비에 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의 부도비나 신도비는 고려 말부터 간략화되어 형식적으로 변화하고 힘도 약해진다. 그러나 이 신도비는 매우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조각 솜씨를 보여 준다. 머리가 민유중의 무덤을 향하고 있는 거북을 보면, 지금이라도 달려갈 것 같은 힘이 느껴진다. 비신(碑身 :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위에 올려져 있는 이수(비석의 머리) 하부에는 용 문양이 조각돼 있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전 시대를 통해서도 보기 힘든 양식이다. 어쨌든 이 신도비는 보물 제584호로 지정된 구례의 윤문효공신도비나 보물 제1395호로 지정된 도갑사 도선·수미비에 비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왜 이 신도비가 국가지정문화재로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一’자형 초당에서 바라본 안채. 초당 툇마루의 들어열개창. 민유중의 묘에서 본 전경. 민유중의 묘와 신도비. 귀부의 머리는 묘소 쪽을 향해 우향으로 틀고 있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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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조선 중기 살림집을 엿보게 하는 여주 명성황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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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풍수 인테리어 - 소문난 명당을 찾아서
- 많은 사람이 살기 좋은 아늑한 집을 소망하면서도 주먹구구식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고 있다. 환경·풍토·습관·생활 양식이 전혀 다른 외국 것을 모방하여 이식하기도 하고, 혹은 일시적 유행을 좇고 있다. 심지어 사람이 집의 주인이 아니라, 물량적으로 획일화·규격화되어 가는 집이라는 구조물의 부속품처럼 타율적으로 집에 눌려서 지내는 비극적이랄까 희극적인 양상마저 생기는 실정이다. 예전에 한 풍류인(風流人)은 "봄을 찾아서 들로 산으로 진종일 헤매다가 허탕을 치고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희한하게도 집 울타리에 핀 매화나무가지 끝에 봄은 이미 무르익었더라"고 했다. 이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자기 집을 소원하면서 이제라도 집터를 물색하는 사람, 집을 지으려는 사람, 집을 사려는 사람, 집을 소개하려는 사람, 집을 수리하거나 혹은 남의 집을 임대하려는 모든 뜻 있는 사람들에게 울타리에 핀 흰 매화꽃처럼 풍수지리가 기대 이상의 기준과 지침이 되고, 실용적으로 유익한 도움이 됐으면 한다. 이처럼 자연 속에서 편안한 삶을 추구하고, 그 속에서 자연을 닮은 집을 짓고 산 우리네 조상들의 지혜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 중에서 명당으로 소문난 유명 고택(古宅) 두 군데를 순례해 보자. 구례 운조루-금환낙지에 자리한 99칸 집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雲鳥樓)'는 조선 중기의 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제8호다. 1776년(영조 52)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가 건립했다고 전한다. 이 집터는 풍수설에 따르면 '금환낙지형(金環落地形)'이라 하여, 예로부터 명당으로 불렸다. 산자락이라 사태의 위험이 있고 고인돌마저 널려 있어 이곳 사람들은 개간을 꺼리던 자리였다. 1776년 이곳에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던 중 거북처럼 생긴 돌이 나왔다. 길이 25센티미터, 높이 12센티미터, 머리 3.5센티미터의 이 돌은 집을 짓고 1782년 함을 만들어 가보(家寶)로 전해 왔으나 1989년 도둑이 들어 훔쳐갔다. 이 집은 1776년 9월 16일 상량식을 가졌고, 6년 만인 1782년 유이주가 용천(龍川)부사로 있을 때 완공됐다. 운조루의 사랑채는 큰사랑·아래사랑채로 나뉜다. 주인은 큰사랑채에 거처하면서 손님을 맞거나 손님을 재웠다. 큰사랑채 서쪽에는 세 방향이 탁 트인 누마루(운조루)가 있어서 여름 거처로 쓰였다. 안채는 사랑채 사이의 중문을 통해 들어간다. 안주인이 거처하며 자식들과 며느리가 산다. 부엌, 찬칸, 곳간, 대청 들이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남쪽 행랑채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담 대신 18칸이 일직선(줄행랑)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헛간과 창고, 마구간 등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노복들이 살았다. 솟을대문 동쪽으로 작은 문이 있어서 옛날에는 안주인이 출입했다. 유이주는 이곳 집터를 닦을 때 거북처럼 생긴 돌이 나와 금귀몰니(金龜沒泥)가 분명하다고 여겼다. 이 집에서는 금거북이가 부엌자리에 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절대로 부엌바닥을 밖으로 쓸어내지 않으며, 바닥이 울퉁불퉁해도 그대로 두고 몇 년에 걸쳐 한 번씩 흙으로 메워 줄뿐이다. 집을 앉힐 때 부엌자리에 안방을 배치해야 할 구조였다. 하지만 거북자리에 안방을 두어 불을 때면 거북이가 말라죽는다 하여 안방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거북자리를 맨 땅 부엌으로 만들어 늘 습기가 있도록 했다. 운조루 사랑채 전경. 이 집에서는 금거북이가 부엌자리에 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절대로 부엌바닥을 밖으로 쓸어내지 않으며 바닥이 울퉁불퉁해도 그대로 두고 몇 년 걸쳐 한번씩 흙으로 메워 줄뿐이다. 운조루에서 찾아본 풍수 지혜를 살펴보자. 집 뒤의 산에 기대는 집터를 잡는데(배산임수), 산기슭에 바짝 붙여 집을 지었다. 뒤에는 산이 있되 경사가 완만하며 일조와 함께 배수가 양호하고, 또한 산에는 수목이 무성하다. 수목은 물과 흙을 보호·유지하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여 쾌적한 미기후를 조성한다.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집터를 풍수에서는 '진토(晉土)'라 하여 길하게 여긴다. 중국 진나라는 황하지역에 도읍을 정했는데 그곳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번성했으나, 양쯔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초나라는 북쪽이 낮고 남쪽이 높아 미개한 나라로 끝났다. 운조루는 대문에 호랑이뼈(현재는 도둑을 맞아 말머리뼈)를 걸어두어, 잡귀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운조루는 대문 앞으로 계곡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즉, 외당의 섬진강은 서류동출(西流東出)하는데 반해 운조루 앞의 물은 동류서출(東流西出)한다. 물의 흐름이 역행함으로써 지기(地氣)의 응집이 더 강하다. 또한 좌향은 남향으로, 남향집은 햇볕이 많이 들어 집에 양명한 기운을 북돋운다. 한국에서 남향집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바람이 막혀 아늑한 집이 된다. 뒷산은 활처럼 굽었는데, 운조루는 휜 안쪽 중심부에 위치한다. 따라서 작지만 좌우로 청룡과 백호가 감싸안아 장풍이 용이하다. 운조루 대문에는 호랑이뼈(현재는 도둑을 맞아 말머리뼈)를 걸어 두어, 잡귀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풍수에서 잡귀를 막기 위해 엄나무를 대문 위에 걸치거나, 또는 문패를 밤나무로 하면 도둑이 들지 못한다고 한다. 조산이 화산임으로 화기(火氣)를 제압하기 위해 물을 가둬 놓은 풍수적 비보책이다. 대문 밖에는 200평의 네모진 연못을 파놓고, 그 가운데에 섬을 두었다. 이것은 조산인 관악산이 화산이므로 화기(火氣)를 제압하기 위해 물을 가두어 놓은 풍수적 비보책(裨補策)이다.운조루는 내청룡이 짧아 수구가 허하다고 여겼던지 수구 가까이에 조탑(造塔)을 만들어 비보했다. 돌무더기로 수구막이를 한 것은 한국의 오랜 풍습이다. 운조루는 중문 칸에 안채의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을 두었고, 그 북쪽으로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쪽문을 따로 두었다. 또한 집의 규모에 비해 장식적 의장이 적어서 길하다. 풍수에서 집을 화려하게 꾸미면 마치 촛불이 마지막에 더 밝은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곧 쇠락할 징조로 여긴다. 운조루의 대문 앞과 집 안에는 큰 나무가 없어 길하다. 나무는 흙에 함유된 물기를 빨아들여 집 안의 흙이 건조해지고 윤기를 없어지게 만든다. 또 사람이 가사(假死)상태로 잠을 자는 밤 동안 산소를 빨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내 보내 집 안에 산소의 부족을 초래한다. 집 안에 큰 나무가 있으면 '곤궁할 곤(困)'으로 가난해지고, 대문 앞에 큰 나무가 있으면 '막을 한(閑)'이 되어 집 안으로 좋은 기가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 대문과 중문, 중문과 안방의 문이 서로 일직선상에 놓이지 않아서 길하다. 문들을 일직선상에 두면 대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곧장 방으로 들이닥친다. 따라서 기온 차에 의해 방 안의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또 직접 바라보이면 사생활이 침해되어 방 안에서도 불안을 느낀다. 지기는 흙에 따라 흐르고 흙에 머물므로 집을 지을 때에는 흙을 파내고 땅을 평평하게 고르는 것을 꺼린다. 땅의 생긴 경사도에 맞추되, 경사면에는 돌계단이나 대를 높여서 자연스럽게 집을 층차감 있게 사랑채와 안채를 짓는다. 운조루는 자연적 지형을 그대로 살려 건물을 층차감 있게 지었다. 운조루는 내청룡이 짧아 수구가 허하다고 여겼던지 수구 가까이에 조탑(造塔)을 만들어 비보(裨補)했다. 안동 의성 김씨 종택-육부자가 과거에 급제한 명당경북 안동의 천전(川前) 마을에는 자손이 크게 번창하고 6부자가 나란히 과거에 급제했다는 명가(名家)가 있다. 바로 의성 김씨(義城 金氏)의 종가댁(宗家宅)이다. 김진(金璡, 1500∼1580)이 처음으로 집을 지어 살았는데, 터의 기운이 영험하여 아들 다섯 명이 모두 대과나 소과에 급제했고, 자기도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됐다. 그래서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소문이 났다. 이 종가댁은 조선 중기의 주택으로 총 55칸의 단층 기와집이다. 하지만 마당에 서서 보면 배산임수의 부지 축대 위에 자리해 마치 이층집처럼 높아 보인다. 이 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생기(生氣)가 응집된 방이 따로 있어 그곳에서만 아이를 출산한다는 점이다. '태실(胎室)' 혹은 '산방(産房)'이라 부르며, 대소과에 급제한 다섯 아들이 모두 그 방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김진의 11대 후손인 김방렬(金邦烈)이 그 방을 헐어 버리고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만들었다. 영천의 영일(迎日) 정씨네로 시집 간 딸이 첫째와 둘째아들을 이 방에서 낳자, 집의 정기가 쇠약해진다고 여긴 탓이다. 그 딸은 할 수 없이 셋째아들은 다른 방에서 낳았는데, 예상대로 첫째와 둘째는 대과에 급제했으나 셋째아들만큼은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의 주인되는 김시우(金時雨, 김진의 15대 손)도 태실의 발복을 믿고 있다. 맏며느리가 대구의 친정에서 딸을 낳은 뒤로는 후사가 없었다. 그러자 없앴던 태실을 다시 온돌방으로 꾸미고, 해외에 근무하는 아들이 휴가를 얻어 돌아오면 그 방에서 아들 내외를 지내게 했다. 그 결과 손자를 얻어 대를 잇게 됐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주택으로 마당에 서서 보면 배산임수의 부지 축대 위에 자리해 마치 이층집처럼 높아 보인다. 안동 의성 김씨 종택이 입지한 천전 마을은 대현산을 등진 채, 앞에는 강물이 흘러 인접한 농토가 넓은 남향의 땅이다. 풍수적으로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이라 불리며 경주의 양동, 안동의 하회, 봉화의 유곡과 더불어 삼남(三南 ;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4대 길지의 하나로 꼽힌다. 비단은 고귀한 사람이 입는 옷이며, 그것을 밝은 달빛 아래에 깔아 놓았으니 세상에 이름을 날릴 인물이 나온다는 설명이다. 김진은 여기에서 '갓 꼭지가 보이면 이사하라'고 했는데, 그 말은 집을 처음에 지을 때는 행인의 갓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대가 낮았고, 따라서 앞쪽의 강물도 보이진 않았음을 내포한 말이다. 그렇지만 '갓 꼭지가 보인다'라는 말은 사람의 왕래가 많아진다는 뜻이 아니고, 앞쪽의 지대가 자연적 혹은 인위적으로 낮아져 대청에서 강물이 넘겨다 보이는 경우를 경계한 말이다. 강물이 풍수 상으로 보아 흉수(胸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대청 마루에서 강물이 바라다 보이지 않는다. 의성 김씨 종가댁은 구례 운조루와 마찬가지로 가상적인 공통점이 있다. 대문 앞과 집 안에 거목이 없어 길하고, 부지가 방정하고 전저후고(前低後高)의 택지라 길하다. 또 수로나 냇물의 유입이 없으며 집 안에 우물이 없는 것도 길하고, 솟을대문과 중문 그리고 중문과 안방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은 점도 풍수적으로 길하다. 정원수가 적고 가운데뜰에 연못이나 우물이 없으니 가상적으로 흉함을 발견하지 못했다. 의성 김씨 종가댁은 생기 왕성한 용맥에 자리잡고, 천전 마을 중에서 양기 흐름이 가장 양호한 곳에 해당되어 학자와 고관대작이 배출될 터다. 또 사랑방과 안방은 풍수적으로 매우 길한 방위적 배치를 보인다. 이처럼 길한 기운이 많아 복지로 손색이 없다. 대문 앞과 집 안에 거목이 없어 길하고, 부지가 방정하고 전저후고(前低後高)의 택지라 길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산 조상들의 지혜를 낡았다고 치부해 버리지 말고, 잠깐씩 빌려쓰는 여유를 가져보자. 글쓴이 고제희 님은고려대학교 생명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과 생태환경공학부 박사과정을 마치고, 2003년 대통령정책실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에서 풍수지리 자문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매일경제 및 한국경제 TV, SBS, EBS 등의 방송사를 통해 생활 속의 풍수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풍수전문포털사이트 www.21fengshui.com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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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풍수 인테리어 - 소문난 명당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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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명문 사대부가의 진수, 동춘고택 동춘당
- 동춘 고택(同春古宅)은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선생의 집이다. 그는 우암 송시열과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으로 둘은 친척간이다. 문묘에 배향된 분으로서 조선을 대표하는 대유학자다. 같은 집안에서 문묘에 배향된 경우는 광산 김씨인 김장생, 김집 부자와 은진 송 씨 집안인 송시열, 송준길뿐이다. 이렇듯 조선의 명문가인 동춘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본채와 그 앞에 세워진 동춘당(同春堂)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춘 고택 앞의 동춘당은 별당으로 송준길이 낙향해 지은 것이다.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송시열과 국사를 논의했다. 현판의 동춘당이라는 글씨는 송시열의 친필로 유명하며 동춘 고택은 대전지방유형문화재 제3호로, 동춘당은 보물 209호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대전 대덕구 회덕은 송 씨 집안의 집성촌과 같은 곳이다. 바로 옆에는 송준길 선생의 둘째 손자인 송병하가 분가해 지은 송용억 가옥(대전 민속자료 2호)이,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송유가 지은 쌍청당(대전 유형문화재 2호)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송규렴이 지은 옥오재(대전 유형문화재 9호)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송시열의 남간정사가 있다. 또한 같은 송 씨 집안은 아니지만 송준길과 학문이나 정치의 길을 같이 했던 김경여가 지은 별당인 송애당(대전 유형문화재 8호)이 있다. 한마디로 고택의 보고다. 이 일대는 예전에 응봉산을 배경으로 몇 채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모여 고즈넉한 마을을 형성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오래전 이곳을 찾은 분의 말씀으로는 옛날 동춘 고택으로 가던 길은 완전한 시골길이어서 내를 건넛마을로 들어갔다고 했다. 이제는 그 내도 없어지고, 고택 주변은 인위로 조성한 공원과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신도시로 변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단어를 실감하게 했다. 고택이라고 하여 예전의 한적한 풍광을 생각하고 찾아간다면 꽤 실망할 것이다. 동춘 고택으로 들어서는 고샅.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一’자 모양의 사랑채와 ‘ㄷ’자 모양의 안채가, 그 오른쪽에는 두 채의 가묘가 배치되어 있다. 가묘 앞에는 조선시대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이 관직을 물러난 후 거처하던 동춘당이 있다. 위 작은 사진은 우암 송시열의 친필로 유명한 현판. 동춘당 궁판에서 입식 생활을…동춘당은 다른 집보다 매우 높게 지어졌다. 신영훈 선생은 동춘당은 백제식 가옥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이라고 한다. 백제의 주거는 고상식이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낮아져 지금과 같은 높이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동춘당은 매우 단순한 구조로 두 칸의 온돌방과 네 칸의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마루의 측면 칸 사이가 넓기에 같은 네 칸이라도 더 넓다. 이것은 많은 손님을 고려했음인데, 당대의 석학으로 정권을 좌지우지하던 서인의 거두였으니 손님도 매우 많았을 법하다. 동춘당은 작지만 정성을 들여 지은 집이다. 보아 지나 내부의 대공에도 초각을 화려하게 했다. 선자로 잘 짜여 있으며 대들보도 넉넉한 부재를 곧게 다듬어 썼다. 작지만 잘 다듬어진 집이다. 동춘당의 마루문을 보면 창문의 하부에 설치한 궁판이 매우 높다. 동측의 궁판은 더 높다. 이러한 궁판의 높이는 앉아서 생활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답답하다. 그 높이로만 본다면 집을 지은 초기에는 좌식생활보다는 입식 생활은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동춘당의 담은 낮다. 사람이 서면 밖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높이다. 쪽마루에 걸터앉아도 밖의 경치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조선 효종 때의 사람인 이유태는 이상적인 집을 말하면서 “담의 높이는 방이나 툇마루에 앉아 말의 등이 보이고 목노의 행동거지를 살필 수 있을 만하면 된다”고 했다. 동춘당의 담도 이러한 사정과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도록 한 배려라고 본다. 그러나 동춘당에서 앞을 바라다보면 허전하기만 하다. 마당에도 별다른 조경을 하지 않아 황량하기까지 하다. 더욱이 길 건너 세워진 고층 빌딩들 때문에 무엇을 보려고 이렇게 집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깊게 든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당시에는 이러한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앞으로 펼쳐진 논밭과 부드럽게 넘실대는 나지막한 언덕들이 눈을 즐겁게 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러한 경관을 볼 수 없으니 이렇게 황량할 수밖에 없다. 근처에 있는 남간정사의 소개 때에도 언급했지만, 이곳 동춘당에서도 무엇을 생각하고 지었는지 찾아볼 길이 없다. 집의 보존이란 단순히 집을 남겨 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집은 위치한 곳의 풍광과 집에서 바라본 풍광이 같이 살아 있을 때 가치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남간정사나 동춘당의 보존은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이곳을 찾을 분들은 현재를 보지만 말고 적극적으로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정신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기 바란다. 그렇게 해야만 동춘당의 가치를 알게 된다. 동춘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다. 총 6칸 중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삼면에는 열개문을 달아 문만 떼면 별당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대들보 위에 세워서 마룻보를 받치는 짧은 기둥인 대공의 초각이 화려하다. 박공을 비롯하여 부챗살 모양의 선자 서까래, 우물반자 등 천장의 형태가 다양하다. 동춘 고택에서 소박한 영조법식을…동춘 고택은 앞에 사랑채를 배치하고 뒤의 안채를 ‘ㄷ’자 형태로 배치한 튼 ‘ㅁ’자 형태의 집이다. 안채는 사랑채 끝의 중문을 통해 들어간다. 중문을 열면 바로 안채 부엌의 벽면과 맞닥뜨려 자연스럽게 내외를 구분했다. 그러나 사랑채가 별도로 떨어져 있지 않아, 사랑 대청에서 안채를 들여다보는 구조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안채 마당에 내외 담을 별도로 설치했다. 그러나 내에 담이 그리 높지 않다. 높이는 사랑채에 앉으면 안채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아마도 서 있는 사람의 시야까지 가렸다면 안채는 매우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한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심리적으로만 내외를 하도록 하고, 또한 안채에서 사랑채의 동향을 파악해 손님 수발을 들도록 배려한 것이다. 안채는 부잣집의 대명사인 6간 대청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배치했다. 이 집이 여타 집과 다른 점은 안방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안방의 규모가 뒤쪽에 마루로 만들어진 고방까지 고려한다면 6칸이다. 안방만 4칸 규모다. 이러한 규모의 안방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은진 송 씨 집안에서 안방마님의 권위를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동춘 고택은 당대 송준길의 지위로 보아 그리 크지 않다. 세도했다는 집이 이보다는 훨씬 컸던 것에 비하면 소박하게 느껴진다. 신영훈 선생의 견해로는 영조법식에 맞추어 잘 지은 집이라고 한다. 또한 법에 따라 규모를 맞게 지어 집이 크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집을 지었던 송준길의 인품을 느끼게 한다. 동춘당에서 바라본 가묘. 앞면 6칸, 옆면 6칸인 사랑채. 부엌 위는 다락으로 꾸몄고, 앞에는 1칸 살림집을 달아 집 안의 여러 가지 일을 맡아보던 청지기가 사는 방을 두었다. 곳곳에 스며 있는 명문가의 정취동춘 고택에는 가묘가 두 채다. 하나는 송 씨 집안의 가묘이고 또 하나는 송준길의 가묘다. 가묘가 둘인 이유는 송준길 선생이 불천위(不遷位)이기 때문이다. 불천위란 사대봉사 이후에도 폐위되지 않고 계속 제사를 모시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불천위로 모시는 분이 있을 경우 가묘는 두 채가 된다. 이러한 집이 여기 말고도 몇 곳 있다. 불천위는 나라에서 지정하거나 문중의 결정에 의해 모시거나 두 가지인데 이곳의 경우는 송준길이 문묘에 배향됐기 때문에 아마도 국가에서 불천위로 모시도록 했을 것이다. 동춘 고택의 정취는 고샅에서 느낄 수 있다. 고샅이란 큰길에서 대문으로 들어가는 깊은 골목을 말한다. 고샅에는 잔자갈을 깔아 두어 사람의 왕래를 느끼게 한다. 이는 사람의 인기척을 느껴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고샅은 이러한 주인의 입장뿐만 아니라 손님의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손님으로서의 옷매무새를 다시 할 수 있는 준비공간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집에 대한 품위를 높여준다는 점이다. 집으로 은근하게 끌어들이는 공간 분위기는 찾는 이로 하여금 차분하게 만들어 주며 집에 대한 기대를 은연중에 높여 준다. 동춘 고택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문화재로 지정됐는데 그 이유는 일본인들이 송시열의 학문을 깊이 흠모했기에 그와 관련된 자료들은 일찍 발굴해 문화재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적으로 과거만큼 주목을 받지 못한다. 아마도 주변이 너무 변화돼 옛 맛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풍광을 머릿속에 상상하며 찾아본다면 다른 어떤 고택 못지않은 깊은 맛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동춘당과 동춘 고택이다. 현재를 넘어선 과거를 찾아보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도 꼭 한 번은 찾아보아야 할 집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쌓은 내외담. 안채 옆에는 사당인 가묘와 별묘가 배치되어 있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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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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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명문 사대부가의 진수, 동춘고택 동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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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사회 변화가 집에 미친 영향 윤보선 생가
- 외세의 압력에 의해 나라를 개방한 이래로 우리의 생활에는 변화가 많았다. 사회 신분 질서에 변화가 왔고, 새로운 기술과 공법이 도입됐다. 사회 변화는 집에도 영향을 많이 미친다. 집 구조의 변화는 사회 변화와 관련이 깊으며, 재료의 변화는 공업과 경제 환경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집의 형태와 느낌도 재료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이러한 변화를 찾아볼 수 있는 예가 전국에 몇 곳 있다. 서울에는 예가 꽤 있지만, 지방에는 그리 많지 않다. 경남 함양의 허삼둘 가옥, 충북 음성 팔성리 고가 등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예가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이다. ‘ㄱ’ 자형 안채 대청마루에서 바라본 마당과 중문간. 조선 사회 해체로 일반 사가에서 왕족만의 화려한 호사를 누려윤보선 생가(중요민속자료 196호) 솟을대문 앞에 서면, 다른 집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받는다. 이전에 보던 한옥과 느낌이 다른 이유는 바로 재료에 있다. 20세기 이전에 지어진 한옥에서는 방화장-행랑과 행랑 사이에 담을 높이 쌓아 화재의 연소를 방지하는 시설-에 돌을 사용한다. 그러나 윤보선 생가에서는 벽돌이 사용됐다. 붉은 벽돌로 쌓은 벽이 우리의 눈을 낯설게 한다. 이 집은 윤보선 대통령의 아버지가 1907년에 지은 것이나, 사랑채는 1920년대에 지어졌다고 한다. 시대만큼이나 건물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안채는 기존 기법을 그대로 살려지었으나, 사랑채는 화려함이 돋보이고 파격이 많이 보인다. 어떻게 보면 서로가 따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사랑채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일반 집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왕족의 집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물익공-익공의 끝 모양이 새 날개와 같이 뾰족하지 않고 둥그렇게 조각한 것-양식이다. 아름다운 초각까지 했으니 사치를 할 대로 하였다. 그리고 기단을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쌓았으니 상당한 파격이다. 모든 외부와 내부의 창호는 대부분 유리문을 사용했다. 특히 대청과 외부에 노출되는 모든 창호를 유리문으로 설치하여, 마치 근세에 새로 지은 한옥을 보는 듯하다. 내부의 마루는 전통 방식인 우물마루가 아니라 쪽널을 사용한 장마루를 설치하여 당시의 유행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는 안채와는 전혀 다른 감각의 집이다. 한마디로 20세기에 들어 조선사회가 해체되고 일제 치하에 들어가면서 일반 사가에서도 왕족이 누렸던 호사를 누리게 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앞서 말한 물익공 양식은 과거에는 왕족만이 했던 것이다. 돈이 있다고 초각을 한 익공집을 짓는다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못 했다. 행랑채와 솟을대문. 다른 건물과 별도로 담을 돌리고 대문을 낸 사랑채. 사랑채의 누마루. 사랑채는 누마루, 2칸 큰 사랑, 2칸 대청, 사랑 건넌방으로 배치하고, 앞퇴에 툇마루를 냈다. 보 아래에 초각을 한 보아지. 누마루의 엇선자 서까래. 장인 정신은 어데 가고 눈 가리고 아옹만 남아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고택(충남유형문화재 43) 주변에는 김정희의 묘 외에 묘가 둘 있는데 하나는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이고, 또 하나는 추사 증조부인 김한신의 묘이다. 추사 고조부는 영의정까지 지냈지만 무덤은 달랑 봉분 하나와 비석뿐이다. 그러나 아들의 묘소는 곡장(曲墻)에 호석까지 갖추었다. 이것은 추사의 증조부가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했기 때문에 왕가의 예법으로 묘를 모셨기 때문이다. 이만큼 조선시대의 위계는 함부로 깨뜨릴 수 없었다. 이러한 위계가 조선시대 말 이후 와해되면서 건물에서도 위계의 파괴가 발생한 것이다. 윤보선 생가의 사랑채를 지은 목수는 매우 솜씨가 좋은 사람이었다. 초각을 한 수준과 겹처마에서 보이는 서까래 다듬은 솜씨는 가히 신기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미 이 목수도 장인 정신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윤보선 대통령의 아들은, 이 사랑채를 ‘집장사 집’이라고 폄하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화려한 집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차근차근 들여다보면 그러한 말을 들을 만한 구석이 많이 보인다. 기본 구조재는 매우 튼실하게 잘 짜여 있다. 그러나 눈에 잘 띄지 않는 내부 구조는 대충 처리하고 말았다. 겉으로는 그렇게 가지런한 서까래도 보이지 않는 안쪽은 그렇지 않다. 선자(扇子) 서까래-편 부챗살 모양으로 배치한 서까래-도 선자의 흉내만 내고 엇선자로 걸었으며, 장마루도 튼실한 재료를 쓰지 않아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또한 합각이 걸려 천장으로 가려야 하는 부분도 우물천장으로 하지 않고 얇은 판으로만 가리고 말았다. 벽체의 두께도 얇고 또한 창문도 매우 부실하게 짜였다. 시대가 흘러 이제 자본주의의 개념이 들어오면서 장인들도 돈을 중요시하다 보니, 눈 가리고 아옹하는 그러한 집이 되고 말았다. 윤보선 생가의 안채는 ‘ㄱ’자 배치 형태이다. 중문간채가 ‘ㄴ’자 형태로 배치되어 안채의 배치는 튼 ‘ㅁ’자 배치가 됐다. 사랑채에 비하여 안채는 매우 소박하다. 대청도 두 칸의 크기이고, 안채의 전체 크기도 다른 부잣집보다는 작은 편이다. 다만 안방이 세 칸으로 상당히 큰 규모라는 데 특색이 있을 뿐이다. 윤보선 대통령의 부친이 크게 재산을 모아 사랑채를 짓고 서울로 진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채에서 눈여겨볼 것은 안방에 있는 금고이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육중하게 생긴 금고가 아직 안방 한쪽에 놓여 있다. 윤보선 생가에서 서울로 가져가고 싶어 했지만, 워낙 무게가 나가는 것이라 옮기지 못하여 지금까지 그 위치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금고도 당시에는 대형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곳을 돌아다녀 보아도 이렇게 금고를 집 안에 들여놓은 집은 보지 못했다. 한창때 이 집 안의 가세를 알아볼 수 있는 자료이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를 잇는 문. 장마루를 간ㄴ 사랑채. 사랑채는 누마루의 분합문을 제외하고 대부분 유리 미서기문이다. 한 솟을대문에 가옥 세 채가 윤 씨 집성촌의 위풍과 효율성윤보선 생가가 있는 충남 아산 둔포면 신항리는 윤 씨 집성촌이다. 그러므로 주변에는 같은 윤 씨 집안의 집이 몇 채 더 있다. 이 집들도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지어진 집이니 윤보선 생가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집들은 윤보선 생가에서 동쪽으로 조금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기와집 세 채(충남민속자료 12호 윤일선 가옥 / 충남민속자료 13호 윤재형 가옥/충남민속자료 15호 윤승구가옥)가 나란히 서있는데 고조부가 같다고 하니 6촌 지간의 집 네 채가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는 셈이다. 이 집들도 마찬가지로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벽돌로 벽을 쌓고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창고도 있고 담도 벽돌로 쌓았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세 집이 한 솟을대문을 쓴다는 것이다. 커다란 솟을대문이 세 집의 입구에 서 있고 솟을대문 바로 붙어 윤일선 가옥이 있고, 다음에 윤승구 가옥 그리고 제일 안쪽에 윤제형 가옥이 있다. 이러한 배치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러한 배치가 되다 보니 윤승구 가옥과 윤제형 가옥은 사랑채가 한길에 노출된 듯한 느낌을 준다. 지금의 상태가 허전할 수 있지만 좋은 전망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은 예전에는 이 집 앞으로 아무나 쉽게 지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오려면 솟을대문에 있는 청지기에게 고하고 나서야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청지기 하나로 세 집을 관리할 수 있으니 매우 효율적인 배치이다. ‘ㄱ’ 자형 안채는 부엌을 제외하고 전형적인 중부지방 평면 구성이다. 중간문은 양쪽 모두 대문을 달고 밖으로 여닫게 되어 있다. 안마당을 둘러싼 ‘ㄴ’ 자형 안 사랑채. 당시의 가세를 짐작게 하는 육중한 금고. 행랑채 서쪽 부속채. 윤 씨 집성촌 솟을대문에서 본 안채.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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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사회 변화가 집에 미친 영향 윤보선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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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자연과 벗하며 선善을 생각한다 충주 함월고택
- 충북 충주시 살미면 용천리에 자리한 최함월 崔涵月 고택(시도유형문화재 제87호)은 조선 숙종 때 문장가인 최응성의 생가이다. 1978년 충주댐 착공으로 1983년 충주에서 수안보로 가는 국도 옆에 옮긴 집이다. 터가 도로보다 낮아 조금 궁색하지만, 제 자리에 있을 때는 당당한 집이었을 것이다. 집 전면은 완전히 폐쇄된 형식이고 앞마당에 조그마한 정자와 연못이 있다. 사랑채, 안채, ㄱ자형 광채를 일렬로 배치한 구조이고, 광채 옆 담 밖에 사당인 무릉사 武陵祠가 있다. 이처럼 일렬로 배치한 집이다 보니 부지도 장방형이다. 함월 고택은 조선 숙종 때 문장가인 최응성이 살던 집이다. 서재로 사용했다는 ‘염선재’와 ‘함월정’이라는 정자가 남아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 그리고 담으로 막힌 함월 고택은 앞에서 보면 작지만 튼튼한 성처럼 느껴진다. 전면 행랑채와 사랑채가 ㄴ자를, 안채가 ㄱ자를 이루기에 담만 없다면 튼 口 자 구조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집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외관상 사랑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앞쪽으로 난 창이 거의 없고 일반 사랑채 같은 창호 분위기도 나지 않는다. 전면 대문은 전형적인 중문 형식으로, 대문을 열면 사랑채 측면이 나타나고 안채는 돌아 들어가야 한다. 현재의 대문은 아마도 예전에는 중문이었을 것이다. 집 좌측 광채 쪽으로 드나드는 협문, 현재 대문보다 협문을 주로 이용한다. 염선재 念善齋, 늘 선 善을 생각한다사랑채는 전면과 직각으로 배치하여 측면만 보인다. 안채 쪽은 배면과 같고 반대쪽 전면에 툇마루를 만들어 대청 문도 퇴칸 쪽으로 들어 열어야 한다. 이전하기 전 전면은 현재 방향이 아닌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쪽으로 보인다. 즉 사랑채를 바라보며 들어와 그 옆을 돌아 중문으로 들어가는 배치인데,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진입 형식이 바뀌었다. 사랑채는 이 집에서 태어난 최함월 선생이 서재로 썼다는 염선재이다. '늘 선을 생각한다'는 당호에서 최함월 선생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구조는 정면 4칸에 측면 2칸인 전후퇴집이다. 그러나 정확한 전후퇴집에서 조금 더 발전하여 구조가 다른 집보다 매우 복잡하다. 일반적 구조라면 전후 퇴칸까지 3칸에 기둥이 4개 서는데, 이 집은 기둥이 5개다. 측면에서 보면 작은 기둥이 촘촘히 서 있어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방을 나눌 때는 매우 유용하다. 퇴칸을 잘게 나눈 기둥으로 방의 용도에 따라 규모를 달리하여 4칸으로 나눈 각 방은 규모가 모두 다르다. 칸칸이 방 구조가 다르다 보니 4칸 작은 집임에도 이리저리 한참 따져보아야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집을 지은 까닭은 방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려는 욕구 때문이다. 사랑채는 작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어떠한 집보다 흥미를 유발하는 재밌는 구조이다. 현재 사랑채는 방이 3칸이고 제일 안쪽은 광이다. 창문 형태를 보면 제일 바깥쪽 방은 대청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맨 끝 방에는 반의반 칸을 내달아 살강(그릇을 얹어 놓기 위해 벽 중턱에 드린 선반)을 만들었다. 원래는 대청이었고 고종 11년(1874)에 무릉사라는 사당을 만들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전에는 이 살강에 위패를 모셨을 것이다. 최함월 선생이 서재로 썼다는 사랑채, 염선재. 사랑채는 담에 가리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함월 고택은 전면 행랑채와 사랑채가 ㄴ자를, 안채가 ㄱ자를 이루기에 전체적으로 튼 口 자 구조다. 안채는 툇마루조차 없는 매우 단출한 구조다. 안채, 소박한 맞배지붕 삼량집안채는 ㄱ자형으로 좌측에서부터 광, 부엌, 방, 대청 2칸, 여기에 안방과 부엌을 돌출시켰다. 일반적인 집이라면 격을 생각하여 최소한 우진각지붕으로 만들지만, 이 집은 그보다 격이 낮은 맞배지붕이다.맨 좌측 1칸은 변형하여 현재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건넌방을, 우측 돌출 부분에 안방을 배치했다. 목구조의 기본인 삼량집으로, 대공도 매우 소박한 동자 대공이다. 또한 대부분의 기와집에 설치한 툇마루조차 없는 매우 단출한 구조이다. 집을 지은 사람의 검박함을 알 수 있다. 재밌게도 건넌방과 1칸 부엌 사이를 1칸 공간으로 처리했다. 이 1칸을 목수는 매우 교묘하게 잘 이용했다. 다른 칸보다 좁게 칸을 반으로 나누어 건넌방을 키우고 나머지 반 칸 하부는 부엌으로, 상부는 건넌방 다락으로 구성했다. 기능적인 면을 해결하면서 건넌방의 규모와 쓰임새를 증대시킨 것이다. 건넌방과 부엌에 필요한 창은 대각선으로 배치했다. 건넌방 창은 높은 곳에, 부엌 창은 낮은 곳에 배치하여 입면에 경쾌한 변화를 주었다. 사랑채는 방이 3칸이고 제일 안쪽은 광이다. 창문 형태를 보면 제일 바깥쪽 방은 대청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툇마루, 원래는 이 부분이 전면이었을 것이다. 함월 정 涵月亭, 연못에 달이 드리우다집 앞 정자는 방이 1칸으로, 그 앞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규모가 작은 연못이지만 가운데 조그마한 섬까지 만들어 구색을 갖추었다. 정자는 1720년경에 지었다는데, 현재 모습은 그때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자 이름은 함월정 涵月亭인데 함월은 이 집을 지은 최응성의 호로 같이 공부한 수암 遂庵 권상하權尙夏가 지어주었다. 젖을 함 涵과 달 월月로 '달에 젖는다'또는 '달에 잠긴다'는 뜻이다. 매우 아취 雅趣가 풍기는 이름이다. 이곳에 앉아 연못에 드리운 달을 보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을 것이다.방은 1칸이지만, 그 주변에 퇴칸을 두어 2칸 규모이다. 뒤쪽 툇마루는 누마루처럼 들어 올렸는데, 이는 마루 아래 아궁이를 두었기 때문이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는데 현재 도로 쪽에는 설치하지 않았다. 팔작지붕 박공 면은 연못 쪽으로 향하고 지붕면은 도로 쪽으로 향한다. 지붕과 난간으로 볼 때 도로 쪽을 정면으로 계획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루를 높게 설치한 뒷면을 제외하고 삼면의 문을 모두 개방하게 한 점을 보면 경관을 고려하여 지은 정자이다. 따라서 원래 정자가 있던 곳은 경관이 좋았을 것이다. 광채 옆 담밖에 사당인 무릉사가 있다. 집 앞 정자는 방 1칸이고, 그 앞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정자 함월정은 젖을 함涵과 달 월月로‘달에 젖는다’또는‘달에 잠긴다’는 뜻이다. 충주호 건설로 함월 고택을 도로보다 한참 낮은 터에 이전했기에, 집의 품격이 느껴지지 않는다. 함월 고택은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을 피하여 이전했기에 원형에서 얼마간 변형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형은 바로 집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다. 집터를 잡을 때 좌향 坐向과 바라보이는 풍광을 고려했을 것이다. 집을 옮길 집터를 정할 때, 그것을 고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 상황으로 볼 때 전혀 그렇지 않다. 집의 전체 모습과 함월정 구조로 보아, 원래는 풍광 좋은 터에 자리했음이 분명하다. 지금과 같이 도로보다 낮은 곳이 아닌, 조금 높은 곳에서 주변을 내려다보는 위치였을 것이다. 현재는 집이 도로보다 한참 낮아 품격이 느껴지지 않는다. 집을 옮기면서 조금이나마 이러한 것을 되살리려 노력했다면 더욱 집이 돋보였을 것이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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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자연과 벗하며 선善을 생각한다 충주 함월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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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살림집으로 부활한 파주 단층 목구조 한옥
- 한옥 하면 비싸다는 선입견 때문에 한옥을 살림집으로 엄두를 못 내는 것이 일반인의 정서다. 하지만 황토집에서 비롯한 건강주택에 대한 관심은 문화재로만 떠올리던 한옥을 현대 살림집으로 끌어내 현대인의 삶에 알맞게 완결성을 높여 대중화 단계에 들어서게 했다. 전통 한옥을 상징하는 것은 초가삼간이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든 나무를 다듬어 짠 기둥과 도리와 보가 떠받치는 지붕 밑에 공존하는 북방문화인 구들과 남방문화인 마루다. 그렇다면 현대 한옥이란 무엇일까. 그 답을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도내리에 자리한 단층 목구조 한옥에 찾아보자. 외형은 한옥이되 내부 공간은 현대 주택이고, 기능은 황토집이다. 글 사진 전원주택라이프 편집부 건축정보위치 경기 파주시 월롱면 도내리건축면적 147.5㎡(44.6평)본채 135.5㎡(41.0평)다용도실/보일러실 12.0㎡(3.6평)건축형태 단층 목구조 한옥지붕재 개량형 한식 기와(팔작지붕)외벽재 창틀 하단 전돌, 황토벽돌 줄눈마감천장재 오량천장, 반자천장, 루버, 황토보드내벽재 황토 모르타르, 한지 벽지창호재 외부 새시 + 내부 세살 목창바닥재 우물〔井〕형태 온돌마루, 한지 장판난방형태 기름보일러, 구들, 벽난로식수공급 지하수설계 및 시공 (주)행인흙건축 진입로에서 본 전경으로 주택에 앞서 풍성한 소나무가 손님을 맞는다. 건축주는 이미 건축박람회에서 시공사를 마음에 두고, 신축 중인 경기도 용인시 구성읍 청덕리 주택을 방문했다. 그해 시공사 이 대표는 파주 현장을 답사하고 군軍동의(군사보호구역 내)에 필요한 기초 도면을 만들었다. 넓은 부지에 토목공사를 마치고 본채 건축 전까지 사용할 소형 주택도 지어놓은 상태였다. 건축주는 마음 같아선 최고의 집을 짓고 싶은데 비용이 문제였다. 봄 일을 확정 짓지 못한 이 대표는 건축주와 사양을 조정하고 시기를 앞당기기로 하면서 군더더기를 뺀 최종안을 내놓았다. 그 결과 파주 주택이 탄생한 것이다. 이 대표는 집을 짓는 일은 우리네 삶과 같다고 말한다. "터를 마련하는 과정은 연애할 때와 비슷해요. 집 짓는 일은 결혼과 같지요. 서로의 성격, 경제 조건, 주변 관계, 절차 등 이 모두가 힘들지요. 이때 서로 신뢰를 굳건하게 쌓아야 순탄한 결혼생활로 이어질 수 있어요." 오량천장을 한 거실. 나무 생김 그대로를 살려낸 대들보가 돋보인다. 주택 짜임은 간이 주추에 결구한 민도리 뼈대 방식이다. 한옥답게 전통미가 물씬 풍기는 인테리어 소품들이 활용됐다. 목재가 살아 숨 쉬는 듯 거친 호흡이 느껴진다. 배치, 공간구성, 짜임이 주택은 주변과 비교하면 지대가 높아 가로막힘이 없기에 시원스럽고, 과수원과 밭과 작은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편안한 느낌이다. 남향받이 터에 앉은 단아한 모습이 옛 한옥의 정취를 자아내는 데다 현대 건축물로서의 완결된 느낌은 매력 그 자체다. 외형은 'ㄱ' 자로 전통 한옥을 닮았지만, 내부 공간은 여느 현대주택과 다름없는 편리성을 갖췄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거실이고, 그 뒤로 차실茶室과 뒤뜰로 나가는 쪽마루가 있다. 거실 오른쪽에는 뒤로 주방이, 가운데에 화장실과 드레스룸이, 앞으로 방이 자리한다. 주방 뒤쪽으로 다용도실과 보일러실이 부속사처럼 이어진다. 거실 왼쪽에는 뒤로 구들방이, 앞으로 안방과 안방에 딸린 화장실이 자리한다. 짜임은 시공사에서 그동안 지어온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군더더기 없는 마감 완결성을 한층 높였다. 간이 주추에 결구한 민도리(납도리) 뼈대 방식에 거실에는 어김없이 오량천장이 자리한다. 반듯하게 마름질〔治木〕한 대들보가 나무 생김 그대로를 살려낸 것이 돋보인다. 벽체 외벽 하단부는 전돌로 상단부는 황토벽돌 줄눈 마감으로 처리했다. 황토벽돌을 이중(나무 기둥과 연이어 20㎝ 황토벽돌, 나무기둥 안쪽으로 10㎝ 황토벽돌)으로 쌓고 가창틀을 넣고 이중창호를 설치했다. 외부는 우드 새시고 내부는 세살 목창으로 정형화된 느낌이다. 거실을 제외한 방 천장은 평천장인데 보편적인 석고보드 대신 황토보드를 사용했다. 시공사만의 색과 맛이 잘 묻어나는 집이라고 하자, 이동일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기본 틀은 이제 정형화됐다고 보아야지요. 욕심을 낸다면 원형기둥이나 도리 아래 장혀(오량에서 도리에 걸친 서까래)를 보강하거나 중방을 넣어 옛 한옥의 맛을 살린다든지, 부연을 단 겹처마로 지붕선을 보강하거나 사랑방 형태의 누마루를 넣는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방수벽인 팔작지붕 한식 기와 하단의 전돌과 맞배지붕 양식기와 하단의 치장벽돌이 조화를 이루지요. 창호는 단열과 모양을 고려해 외부 새시와 내부 목창을 기본으로 하되, 외부 새시를 커버할 수 있는 덧창 형태로 목창을 보강하면 현대 한옥으로서의 완결성을 높일 수 있지요. 현대 한옥의 짜임이 견고해져 감에 따라 평당 건축비도 높아졌는데, 이 주택은 현대 한옥의 기본에 충실한 짜임을 최대한 살리되 비용을 낮춰 현대 한옥의 대중화된 일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해가 드는 정면으로 방을 배치해 조망과 채광 효과를 살렸다 오른편 뒤쪽에 놓인 주방으로 가사 편의를 위해 화사하고 깔끔하게 꾸몄다. '집 짓기'를 통해 소통을 배우다어디 집 짓는 일이 보통 일인가. 이동일 대표가 집 짓는 일을 결혼에 비교했으니, 그의 결혼생활은 순탄했는지 물어보았다. "하하—, 생각도 다르고 살아온 과정도 다른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동락同樂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결혼한 사람은 알지요. 자기 성질대로 한다면 금방 파탄이 나겠지만, 서로 맞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게 부부가 아니던가요. 건축주와 시공사 관계도 마찬가지지요. 또한 시공사와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글쎄요, 건축주가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왔는지가 집 짓는 과정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 같아요. 이 주택 건축주는 장사를 주로 했습니다. 남지 않는 장사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을 하지요. 에누리가 없는 장사가 어디에 있느냐는 생각도 하겠고요. 속여 보았기에 속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고나 할까요." "처음엔 그랬지요. 일하러 들어온 사람들에게 자재는 제대로 들여왔는지, 인건비는 얼마인지, 시시콜콜 떠보기에 가만히 지켜보았지요.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남들에게 '이 사장님은 거짓말 안 하니까 … 집 지으면서 속 한 번 끓이지 않아요'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했지요." "이제야 소통이 무엇인가 알 것 같아요. 집 짓는 일은 사람의 관계 맺기에 따라 차이가 커요. 모든 일이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신뢰지요. 믿지 못하는데 무슨 말이 들어오겠습니까. 하지만 이해관계가 얽힌 집 짓기에선 신뢰만 가지고는 부족해요. 도면만 놓고는 잘 모르거든요. 집이 지어지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달라질 수 있어요. 욕심도 생기고요. 그런 걸 잘 풀어내야 인간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집의 완결성을 높일 수 있어요. 건축주가 자기 욕심에 무조건 해 달라고 하거나 계약 사항 아니라고 시공사가 모르쇠 하면 서로 각 방 쓰는 일이 생기지요. 보통은 현장에 건축주가 없는 게 편하다고 하는데, 나는 공정이 바뀌어 형태를 갖추는 중요한 시기엔 꼭 건축주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과정을 알아야 소통도 되는 법이거든요." 말이 쉽지, 이해가 얽힌 일에 소통이 쉽겠는가. 특히 건축 현장에서 벌어지는 건축주와 시공사의 이러저러한 잡음을 잘 알기에 소통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궁금했다. "내가 현장에서 이런 말을 가끔 합니다. 간 보지 마라, 간을 자주 보면 짜지거나 싱거워지는 법이라고요. 사람 관계는 상대적인 거 같아요. 내가 어찌하는가에 따라 상대방도 달라지지요.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요. 이쪽의 진정성을 상대방이 인정하면 문이 열리는 것이고요. 내가 속마음을 숨기고 접근하면 상대방도 문을 닫게 되는 법이지요. 나는 답이 없다고 봅니다. 그저 있는 대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량형 한식 기와가 한옥의 멋을 더하는 주택 배면. 팔작지붕에 이중 부연까지 달아 처마 선이 강하게 살아났다. 현관과 방을 전면으로 돌출 시켜 조형미를 뽐내게 했다. 주택과 소나무가 잘 어울린다. 현대 한옥 대중화의 길을 열다취재 당일 이 주택에서 이동일 대표는 집 구경 겸 황토집 바로 짓기 특강을 진행했다. 예비 건축주, 협력업체 직원 등 40여 명이 어울린 행사는 건축업과 관련된 일반 행사로는 보기 드문 자리였다. 참가자 중 전원주택 관련 단체 회원이라고 밝힌 성남에서 온 분은, 한옥을 지으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집을 구경할 때마다 뭔가 부족하다 싶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그 문제들이 이미 다 해결돼 있어서 놀랐다고 말했다. 건축주는 참가자들을 위해 바비큐를 마련했는데 고기 써는 솜씨가 예술이었다. 안주인이 마련한 떡과 음식들은 정갈하고 풍성했다. 누군가 '건축주가 이렇게 한 상 차린 걸 보면, 그간의 관계가 좋았나 보지요'라고 말하자, 순간 건축주 부부와 이 대표 그리고 참가자들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현대 한옥 대중화가 활짝 열리고 있음임을 짐작게 했다. 현관에 해가 들자 따스한 느낌이 난다. 주택은 과수원과 밭과 작은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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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살림집으로 부활한 파주 단층 목구조 한옥
집짓기 정보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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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설계 전문가에게 듣는 단층집 잘 짓는 법 3-3
- 보통 단독주택은 2층 집을 당연시하지만 최근 단층집에 대한 수요와 설계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2층 주택의 상하 이동이 없어도 되고 계단으로 제외되는 전용면적도 없기 때문이다. 2층 주택의 수직 이동은 다락을 활용하면 되고 상부에 건물이 없어 천장을 높게 할 수 있고 디자인도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다. 이에 단층집을 지을 경우 확인해야 할 내용을 시공·설계 전문가에게 직접 들었다. 글 및 자료 제공네이처하우징 1800-5782 www.kimhan.co.kr시공 전문가 김한 네이처하우징 대표 집은 이층보다 단층이 좋다“어린 시절인 1970년 대, 기와집과 초가집 같은 고만고만한 집들 사이로 빨간 벽돌 이층집은 양옥집에 대한 로망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비 건축주 대부분 이층집을 꿈꾸고 이층집을 짓고 살지만, 이층집은 장점보다 비용이나 생활 편의 면이나 단점이 많습니다. 집은 자연친화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연은 완만하고 부드럽다. 초가지붕이 대표적이다. 산 능선을 닮은 단층집이 우리가 살 집입니다.” 이층집은 불필요한 공간을 낳는다이층집을 지으려고 마음먹는 순간 집의 면적이 커진다. 예를 들어 82.64㎡(25평)을 이층으로 지으면 일층이 15평, 이층이 10평이다. 그런데 15평으로는 일층 면적이 좁아 보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일층을 20평으로 넓히게 되고, 집은 30평이 된다. 계단도 문제다. 계단이 가파르면 위험하니 완만한 경사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계단이 차지하는 면적이 커진다. 문제는 이 계단 때문에 일층이 좁아 보이게 된다는 것. 집주인은 일층 면적을 넓히게 되고 집 면적이 늘어나면 건축비도 그만큼 상승한다. 또 같은 평수라 할지라도 인건비의 영향으로 단층집보다 이층집의 건축비가 더 많이 들 수 있다. 집을 짓기 위해 투입된 작업자들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공사비도, 공사기간도 1.5배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층 공간은 덥고 춥다지붕 아래 2층은 한여름 열기로 거의 찜통이 되고, 겨울에는 옷을 껴입어야 할 만큼 춥다. 지붕 단열을 잘 하면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려면 건축비가 상승한다. 실제로 현재 일반적인 건축방식으로 지은 주택의 단열 수준으로는 여름 찜통, 겨울 찬기를 피할 방법이 없다. 집안에서 빼앗기는 열의 25%가 지붕으로 져나간다는 것은 건축하는 사람들의 상식이다. 전망 때문이라면 기초를 높여라아이들이 있는 집을 제외하면 대부분 집주인들은 이층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특히 나이가 많을수록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고 위험하기까지 하니 더 그렇게 된다. 결국 이층 공간은 온기 없이 썰렁해질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이층집보다 단층집 짓기를 권한다. 전망을 생각해서 이층집을 짓겠다면, 단층으로 짓되 기초를 높여 지을 것을 권한다. 높은 기초에 데크를 깔면, 멀리서 그 집을 봤을 때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근사한 집이 된다. 도시처럼 집을 지을 땅이 작으면 집이 위로 올라가야 하지만, 집 지을 땅이 부족하지 않은 곳에서는 집이 옆으로 가면 된다. ※같은 면적을 기준으로, 공사비는 단층집과 복층 집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시공 전문가와 설계 전문가의 의견이 다를 수 있으며, 실제 금액은 시공 회사마다 산정 기준이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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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설계 전문가에게 듣는 단층집 잘 짓는 법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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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09월 특집 4] 시공·설계 전문가에게 듣는 단층집 잘 짓는 법 3-3
- 시공·설계 전문가에게 듣는 단층집 잘 짓는 법 3-3 보통 단독주택은 2층 집을 당연시하지만 최근 단층집에 대한 수요와 설계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2층 주택의 상하 이동이 없어도 되고 계단으로 제외되는 전용면적도 없기 때문이다. 2층 주택의 수직 이동은 다락을 활용하면 되고 상부에 건물이 없어 천장을 높게 할 수 있고 디자인도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다. 이에 단층집을 지을 경우 확인해야 할 내용을 시공·설계 전문가에게 직접 들었다. 글 및 자료 제공 네이처하우징 1800-5782 www.kimhan.co.kr 시공 전문가 김한 네이처하우징 대표 집은 이층보다 단층이 좋다 “어린 시절인 1970년 대, 기와집과 초가집 같은 고만고만한 집들 사이로 빨간 벽돌 이층집은 양옥집에 대한 로망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비 건축주 대부분 이층집을 꿈꾸고 이층집을 짓고 살지만, 이층집은 장점보다 비용이나 생활 편의 면이나 단점이 많습니다. 집은 자연친화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연은 완만하고 부드럽다. 초가지붕이 대표적이다. 산 능선을 닮은 단층집이 우리가 살 집입니다.” 이층집은 불필요한 공간을 낳는다 이층집을 지으려고 마음먹는 순간 집의 면적이 커진다. 예를 들어 82.64㎡(25평)을 이층으로 지으면 일층이 15평, 이층이 10평이다. 그런데 15평으로는 일층 면적이 좁아 보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일층을 20평으로 넓히게 되고, 집은 30평이 된다. 계단도 문제다. 계단이 가파르면 위험하니 완만한 경사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계단이 차지하는 면적이 커진다. 문제는 이 계단 때문에 일층이 좁아 보이게 된다는 것. 집주인은 일층 면적을 넓히게 되고 집 면적이 늘어나면 건축비도 그만큼 상승한다. 또 같은 평수라 할지라도 인건비의 영향으로 단층집보다 이층집의 건축비가 더 많이 들 수 있다. 집을 짓기 위해 투입된 작업자들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공사비도, 공사기간도 1.5배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층 공간은 덥고 춥다 지붕 아래 2층은 한여름 열기로 거의 찜통이 되고, 겨울에는 옷을 껴입어야 할 만큼 춥다. 지붕 단열을 잘 하면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려면 건축비가 상승한다. 실제로 현재 일반적인 건축방식으로 지은 주택의 단열 수준으로는 여름 찜통, 겨울 찬기를 피할 방법이 없다. 집안에서 빼앗기는 열의 25%가 지붕으로 져나간다는 것은 건축하는 사람들의 상식이다. 전망 때문이라면 기초를 높여라 아이들이 있는 집을 제외하면 대부분 집주인들은 이층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특히 나이가 많을수록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고 위험하기까지 하니 더 그렇게 된다. 결국 이층 공간은 온기 없이 썰렁해질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이층집보다 단층집 짓기를 권한다. 전망을 생각해서 이층집을 짓겠다면, 단층으로 짓되 기초를 높여 지을 것을 권한다. 높은 기초에 데크를 깔면, 멀리서 그 집을 봤을 때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근사한 집이 된다. 도시처럼 집을 지을 땅이 작으면 집이 위로 올라가야 하지만, 집 지을 땅이 부족하지 않은 곳에서는 집이 옆으로 가면 된다. ※같은 면적을 기준으로, 공사비는 단층집과 복층 집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시공 전문가와 설계 전문가의 의견이 다를 수 있으며, 실제 금액은 시공 회사마다 산정 기준이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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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09월 특집 4] 시공·설계 전문가에게 듣는 단층집 잘 짓는 법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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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담은 ‘문추헌’, ‘담류헌’, ‘건원재’ 세 집
-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언제나 돌아갈 집이 있어서다. 그곳이 휴식, 나눔, 소통으로 가득한 공간이라면 더욱 반가울 것이다. 마음을 담은 ‘문추헌’, ‘담류헌’, ‘건원재’ 세 집이 바로 그러한 공간이다. 글 백홍기 기자취재협조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올해 초 집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낸 이 나왔다. 저자는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서현 건축가다. , , , , , 등을 낸 저자라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현장이 아닌 책에서 먼저 한 번쯤 봤을 이름이다. 책에는 ‘문추헌’, ‘담류헌’, ‘건원재’ 세 채가 실렸다. 공통점은 모두 작고 검소하다는 것이다. 문추헌15평 단층 주택이다. 건축주가 시골에서 조용히 혼자 살 집을 계획한 집이다. 예산은 총 5천만 원이 전부였다. 설계비만 고려해도 빠듯한 수준이다. 어떻게 5천만 원에 집 한 채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서현 건축가는 문추헌이 매체에 소개됐을 때, “5천만 원에 16평 집을 지었다고 난리 났다”라고 했다. 문추헌 사례를 보고 연락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건축주는 그동안 5천만 원이라는 현물보다 더 많은 자산을 쌓아왔다. 설계비와 감리비용, 일부 자재 비용이 예산에 포함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신뢰 信賴와 신의 信義로 대신한 비용이 예산을 넘어선 것이다. 담류헌퇴근하고 돌아오면, 아내와 두 아들 셋 중 하나는 꼭 울고 있다는 남편이 건축주로서 의뢰한 집이다. 초등학교 6학년과 1학년 아이들 때문에 노상 인터폰이 울린다며, 아이들에겐 자유로운 환경을, 아내에겐 편안한 마음으로 이웃과 허물없이 지낼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 주택은 정사각형이 모여 사각형을 이룬다. 사각형은 빛을 가두거나 통과시키고, 조합에 의해 색다른 형태를 만들어준다. 대표적인 게 주택 정면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십자가다. 이러한 변주는 내부에서 조명과 어우러져 다양한 형태로 빛과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건원재은퇴 후 시골에서 노년을 보낼 부부의 집이다. 하나 있는 아들은 자주 들어오지 않고 결혼하면 출가할 것이라 방은 두 개면 충분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달라고 했다. 건축가는 알아서 중정에 하늘을 담았다. 귀한 것에 가치를 두고 소중히 다루는 건축주는 차가 네 대 있다. 가격은 저렴한 경차지만, 하나같이 단종 된 모델이라 구하기 어려운 것이다. 평소 거주자는 두 명이지만, 노상 차를 네 대나 주차할 공간이 필요했다. 결국 자동차를 관리하려면 지붕이 필요했고 전용 주차장을 마련할 예산과 땅이 부족했기에 단층 주택을 위로 들어 올린 필로티 형태로 계획했다. 주거 공간 핵심은 중정이다. ‘ㅁ’자 형태로 만든 주택 중심에 중정을 두고 천장을 둥근 모양으로 뚫었다. 이곳에 태양은 발자취를 남긴다. Interview아파트 문화는 사회에서 규정한 공간에 나의 삶을 맞추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렇다 보니 나에게 맞는 공간을 찾는 게 어렵고, 거주자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공간을 세분화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내 마음을 담은 집>에 나온 집은 모두 작고 소소하다. 그 안에는 조용한 삶, 함께하는 삶, 꿈을 담은 삶이 있다. 저자인 서현 건축가를 만나 우리가 사는 주택의 의미와 주택을 잘 짓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Q 사람마다 작은 집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 서현 건축가가 생각하는 작은 집의 기준은?숫자로 얘기하긴 어렵다. 한국의 4인 가족이면, 소위 40평대를 넘어서면 큰집이 아닌가 싶다. 80평대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집을 채우기 위해 사는 모습이 이상해 보인다. 책에 보면 가장 작은 집이 16평이다. 그만하면 혼자 살기 딱 좋아 보인다. Q 현행법상 최소 주거면적(1인 14㎡(4.2평), 4인 43㎡(13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너무 작다. 어떤 기준으로 정했는지 잘은 모르지만, 거기서 얘기하는 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가지면서 살기 위한 최소이지, 우아함을 유지하면서 사는 건 아닐 것이다. 밥을 먹는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장 싸게 끼니라고 하는 라면만 먹고살아도 굶어 죽지 않는 것처럼 그거는 생존 최소한인 거 아닌가 생각한다. Q 어떤 집이 잘 지은 집이라고 생각하나.계절이라는 시간의 자연 변화를 내가 만든 공간이나 벽이라는 필터를 통해 보여 줄 수 있는 집. 그러한 필터를 통해 햇빛이 비치고 단풍이 든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그런 집을 짓고 싶다. 내가 지은 집에서 주인이 자려고 누웠을 때 어느 날 “단풍이 들었구나”라는 걸 느끼고, “건축가가 나에게 단풍을 이렇게 느끼게 만들어 줬네”라고 생각하면, 그 집을 잘 지었다고 생각할 거 같다. Q 좋은 디자인이란.문제를 잘 해결한 것을 좋은 디자인이라고 한다. 디자인은 예쁜 것을 만드는 것과 관계없다. 문제를 발견해서 그 문제를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거다. 예를 들어 연필이 그렇다. 연필이 예쁘지 않지만, 손에 딱 들어오는 크기, 굴러가지 않는 것, 적당한 심 굵기, 무게감 이런 게 좋은 디자인이다. 예쁘게 만드는 건 스타일링이다. 그래서 좋은 디자인은 항상 간단한 것이고, 좋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선 문제가 뭔지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Q 그렇다면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 방식이 필요하겠다.많은 사람이 자기 집에 대해 잘 모르고 이야기한다. 어떤 의미와 의도를 가지고 하는지,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경험치와 축적된 어휘 안에서만 문장을 만들기 때문에 밖으로 들어낸 문장을 직역하면 항상 혼선과 오해, 갈등이 생긴다. 이야기 속에 숨은 의도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 지식과 연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기와집을 좋아해요”라고 했을 때, “흰 회벽에 빨간 지붕을 얹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즉물적인 대답이다. ‘왜 저 이야기를 할까?’라고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여행의 로망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여행의 로망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그런 게 인문학적 접근이다. Q 그래서 많은 건축가가 집 설계가 어렵다고 하는 것인가.일단 집은 인간의 요구 조건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공간이 나의 생활과 잘 안 맞으면 금방 불편한 게 표가 난다. 그래서 짓고 난 뒤 불만도 가장 많고 하자에 의한 민감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나중에 살 사람이 적극적으로 설계에 개입하기 때문에 건축가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것도 다른 건축물보다 상대적으로 좁다. Q 듣고 보니 난이도가 높은 것 같다.설계 난이도보다는 짓는 과정의 난이도가 높은 것이다. Q 성공적인 집을 짓기 위한 팁이 있다면.두 가지를 얘기하겠다. 첫째 충분한 예산. 집은 돈이 짓는 거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안 된다. 두 번째, 좋은 건축가 만나면 된다. 좋은 건축가는 설계부터 건축이 끝날 때까지 책임지고 알아서 해준다. 그런데 좋은 건축가는 당연히 비싸다. 설계비 아끼겠다면 좋은 건축가의 전문적인 서비스를 자기 인생을 덜어 때워야 한다. ‘집 짓다 10년 늙었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예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설계할 때 쓰는 게 좋다. 이번에 서울건축사협회에서 정한 운영방안을 보면 일반 건물 평당 설계비를 30만 원으로 정했다. 그 정도면 설계하는 데 그렇게는 부족하지 않은 것 같다. 주택 설계비 비율은 잘 모르지만, 예산에 20% 정도? Q 책에 있는 문추헌은 총 5천만 원 들었다는데, 이건 어떻게 가능했나.문추헌에는 5천만 원이라는 금액 넘어 엄청난 자산이 들어가 있다. 그동안 본인이 보이지 않는 자산을 훨씬 더 많이 축적한 거다. 그건 화폐로 치환되지 않는 것이다. 그 가치를 보고 저 정도면 내가 나의 보이지 않는 자산을 투자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설계비 없이 지어 드린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가치는 쓱 지우고 돈으로 치환된 5천만 원만 보고 오해한다. Q 일본은 프리츠커 상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못 받았다.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가장 직접적인 문제는 한국은 건물을 훨씬 싸게 짓는다는 거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 건축을 비교하는 근거는 옆 나라라는 것인데, 두 나라는 태생이 다르다. 건물은 장인이 짓는 것인데 한국 역사는 건물 짓는 장인의 이름을 기록한 게 한 줄도 없다. 그런데 일본은 모든 장인의 이름을 기록해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남아있다. 그 얘기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름을 기록해 주지 않으면 그들이 이름을 남기기 위한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 그게 두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건물을 보아 왔는지 몇 백 년을 걸쳐서 증명해 왔다. 그걸 지금 와서 옆 나라 하면서 우리는 왜 한 명도 없냐고 하면 굉장히 이상한 얘기다. 일본의 기준으로 봤을 때 한국은 장인이 한 명도 없다. 건물은 개인이 짓는 게 아니고 집단이 사회적 역량을 다 투여해 짓는 것이라 단순 비교하면 안 된다. Q 한옥 장인은 다르지 않나.한옥도 일본 목수들과 비교하면 수준이 낮다. 일본 목수들은 극단적으로 자신들의 자존심을 이어간다. 나무를 놓고 대패를 밀 때 누가 가장 얇게 벗기느냐를 두고 테스트할 정도다. 다 미쳐있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관심은커녕 적당히 짓는다. Q 그래도 우리만의 건축 문화가 있지 않은가.그렇다. 우리만의 강력한 힘이 있다. 그릇으로 비교해보면 일본은 날이 살아 있다. 중국은 거대하고, 우리는 적당히 만드는데 보는 마음이 편해진다. 건물도 그렇다. 일본 집들은 직각 딱 맞고 모서리에 손이 밸 정도가 돼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거 필요 없고, 커다란 것들이 툭툭 던져지는 맛. 그런 힘이 있다. Q 마지막으로, 예산은 부족한데 집 짓고 싶어 하는 예비 건축주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건축가에게 ‘예산이 이 정도 있는데, 집을 지어줄 수 있나’ 상의하는 것이다. 아니면 규모나 재료를 줄여야 하는데, 이러한 문제는 아이디어로 해결해야 한다. 결국 좋은 건축가를 만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프면 제일 먼저 명의를 찾는 거와 같다. 집을 짓는 것도 건축가를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럼 나머지는 거의 다 풀린다. 세 집 건축주들은 고민 하나도 안 했다. 다 믿고 맡겼다. 담류헌 건축주는 집이 너무 궁금해 밤에 랜턴 켜고 보고 갔다 했고, 건원재 건축주는 현장에 2~3번에 왔던 거 같다. 시행착오로 나중에 건물 고칠 돈을 설계할 때 미리 쓰면 훨씬 합리적이고 10년 늙지 않고 진행할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게 맞는 좋은 건축가를 찾는 게 집 짓기의 시작이자 끝인 거 같다. 서현 건축가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이며, ‘가락시영아파트 재건축 사업’과 ‘노들섬’ 개발 등 대형 프로젝트 총괄 계획가다. ‘세모난 집’을 비롯해 다양한 주거 공간도 선보였다. <내 마음을 담은 집>에 소개한 주택 세 채는 서현 건축가가 지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작은 것들이다. 규모는 작지만, 건축 현장에서 벌어지는 작업 원리나 시공 정신은 규모를 떠나 모두 비슷하게 작동한다.다음번에는 ‘문추헌’, ‘담류헌’, ‘건원재’의 깊고 재미난 건축 이야기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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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담은 ‘문추헌’, ‘담류헌’, ‘건원재’ 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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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 INTERVIEW] 내 마음을 담은 집 건축사 서현
- 내 마음을 담은 집 건축사 서현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언제나 돌아갈 집이 있어서다. 그곳이 휴식, 나눔, 소통으로 가득한 공간이라면 더욱 반가울 것이다. 마음을 담은 ‘문추헌’, ‘담류헌’, ‘건원재’ 세 집이 바로 그러한 공간이다. 글 백홍기 기자 취재협조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올해 초 집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낸 <내 마음을 담은 집>이 나왔다. 저자는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서현 건축가다.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건축을 묻다>, <빨간 도시>, <배흘림기둥의 고백>, <또 한 권의 벽돌>, <세모난 집 짓기> 등을 낸 저자라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현장이 아닌 책에서 먼저 한 번쯤 봤을 이름이다. 책에는 ‘문추헌’, ‘담류헌’, ‘건원재’ 세 채가 실렸다. 공통점은 모두 작고 검소하다는 것이다. 문추헌 15평 단층 주택이다. 건축주가 시골에서 조용히 혼자 살 집을 계획한 집이다. 예산은 총 5천만 원이 전부였다. 설계비만 고려해도 빠듯한 수준이다. 어떻게 5천만 원에 집 한 채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서현 건축가는 문추헌이 매체에 소개됐을 때, “5천만 원에 16평 집을 지었다고 난리 났다”라고 했다. 문추헌 사례를 보고 연락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건축주는 그동안 5천만 원이라는 현물보다 더 많은 자산을 쌓아왔다. 설계비와 감리비용, 일부 자재비용이 예산에 포함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신뢰信賴와 신의信義로 대신한 비용이 예산을 넘어선 것이다. 담류헌 퇴근하고 돌아오면, 아내와 두 아들 셋 중 하나는 꼭 울고 있다는 남편이 건축주로서 의뢰한 집이다. 초등학교 6학년과 1학년 아이들 때문에 노상 인터폰이 울린다며, 아이들에겐 자유로운 환경을, 아내에겐 편안한 마음으로 이웃과 허물없이 지낼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 주택은 정사각형이 모여 사각형을 이룬다. 사각형은 빛을 가두거나 통과시키고, 조합에 의해 색다른 형태를 만들어준다. 대표적인 게 주택 정면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십자가다. 이러한 변주는 내부에서 조명과 어우러져 다양한 형태로 빛과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건원재 은퇴 후 시골에서 노년을 보낼 부부의 집이다. 하나 있는 아들은 자주 들어오지 않고 결혼하면 출가할 것이라 방은 두 개면 충분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달라고 했다. 건축가는 알아서 중정에 하늘을 담았다. 귀한 것에 가치를 두고 소중히 다루는 건축주는 차가 네 대 있다. 가격은 저렴한 경차지만, 하나같이 단종 된 모델이라 구하기 어려운 것이다. 평소 거주자는 두 명이지만, 노상 차를 네 대나 주차할 공간이 필요했다. 결국 자동차를 관리하려면 지붕이 필요했고 전용 주차장을 마련할 예산과 땅이 부족했기에 단층 주택을 위로 들어 올린 필로티 형태로 계획했다. 주거 공간 핵심은 중정이다. ‘ㅁ’자 형태로 만든 주택 중심에 중정을 두고 천장을 둥근 모양으로 뚫었다. 이곳에 태양은 발자취를 남긴다. Interview 아파트 문화는 사회에서 규정한 공간에 나의 삶을 맞추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렇다 보니 나에게 맞는 공간을 찾는 게 어렵고, 거주자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공간을 세분화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내 마음을 담은 집>에 나온 집은 모두 작고 소소하다. 그 안에는 조용한 삶, 함께하는 삶, 꿈을 담은 삶이 있다. 저자인 서현 건축가를 만나 우리가 사는 주택의 의미와 주택을 잘 짓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Q 사람마다 작은 집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 서현 건축가가 생각하는 작은 집의 기준은? 숫자로 얘기하긴 어렵다. 한국의 4인 가족이면, 소위 40평대를 넘어서면 큰집이 아닌가 싶다. 80평대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집을 채우기 위해 사는 모습이 이상해 보인다. 책에 보면 가장 작은 집이 16평이다. 그만하면 혼자 살기 딱 좋아 보인다. Q 현행법상 최소 주거면적(1인 14㎡(4.2평), 4인 43㎡(13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너무 작다. 어떤 기준으로 정했는지 잘은 모르지만, 거기서 얘기하는 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가지면서 살기 위한 최소이지, 우아함을 유지하면서 사는 건 아닐 것이다. 밥을 먹는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장 싸게 끼니라고 하는 라면만 먹고 살아도 굶어 죽지 않는 것처럼 그거는 생존 최소한인거 아닌가 생각한다. Q 어떤 집이 잘 지은 집이라고 생각하나. 계절이라는 시간의 자연 변화를 내가 만든 공간이나 벽이라는 필터를 통해 보여 줄 수 있는 집. 그러한 필터를 통해 햇빛이 비치고 단풍이 든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그런 집을 짓고 싶다. 내가 지은 집에서 주인이 자려고 누웠을 때 어느 날 “단풍이 들었구나”라는 걸 느끼고, “건축가가 나에게 단풍을 이렇게 느끼게 만들어 줬네”라고 생각하면, 그 집을 잘 지었다고 생각할 거 같다. Q 좋은 디자인이란. 문제를 잘 해결한 것을 좋은 디자인이라고 한다. 디자인은 예쁜 것을 만드는 것과 관계없다. 문제를 발견해서 그 문제를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거다. 예를 들어 연필이 그렇다. 연필이 예쁘지 않지만, 손에 딱 들어오는 크기, 굴러가지 않는 것, 적당한 심 굵기, 무게감 이런 게 좋은 디자인이다. 예쁘게 만드는 건 스타일링이다. 그래서 좋은 디자인은 항상 간단한 것이고, 좋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선 문제가 뭔지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Q 그렇다면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 방식이 필요하겠다. 많은 사람이 자기 집에 대해 잘 모르고 이야기한다. 어떤 의미와 의도를 가지고 하는지,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경험치와 축적된 어휘 안에서만 문장을 만들기 때문에 밖으로 들어낸 문장을 직역하면 항상 혼선과 오해, 갈등이 생긴다. 이야기 속에 숨은 의도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 지식과 연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기와집을 좋아해요”라고 했을 때, “흰 회벽에 빨간 지붕을 얹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즉물적인 대답이다. ‘왜 저 이야기를 할까?’라고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여행의 로망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여행의 로망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그런 게 인문학적 접근이다. Q 그래서 많은 건축가가 집 설계가 어렵다고 하는 것인가. 일단 집은 인간의 요구 조건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공간이 나의 생활과 잘 안 맞으면 금방 불편한 게 표가 난다. 그래서 짓고 난 뒤 불만도 가장 많고 하자에 의한 민감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나중에 살 사람이 적극적으로 설계에 개입하기 때문에 건축가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것도 다른 건축물보다 상대적으로 좁다. Q 듣고 보니 난이도가 높은 것 같다. 설계 난이도보다는 짓는 과정의 난이도가 높은 것이다. Q 성공적인 집을 짓기 위한 팁이 있다면. 두 가지를 얘기하겠다. 첫째 충분한 예산. 집은 돈이 짓는 거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안 된다. 두 번째, 좋은 건축가 만나면 된다. 좋은 건축가는 설계부터 건축이 끝날 때까지 책임지고 알아서 해준다. 그런데 좋은 건축가는 당연히 비싸다. 설계비 아끼겠다면 좋은 건축가의 전문적인 서비스를 자기 인생을 덜어 때워야 한다. ‘집 짓다 10년 늙었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예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설계할 때 쓰는 게 좋다. 이번에 서울건축사협회에서 정한 운영방안을 보면 일반 건물 평당 설계비를 30만 원으로 정했다. 그 정도면 설계하는 데 그렇게는 부족하지 않은 것 같다. 주택 설계비 비율은 잘 모르지만, 예산에 20% 정도? Q 책에 있는 문추헌은 총 5천만 원 들었다는데, 이건 어떻게 가능했나. 문추헌에는 5천만 원이라는 금액 넘어 엄청난 자산이 들어가 있다. 그동안 본인이 보이지 않는 자산을 훨씬 더 많이 축적한 거다. 그건 화폐로 치환되지 않는 것이다. 그 가치를 보고 저 정도면 내가 나의 보이지 않는 자산을 투자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설계비 없이 지어 드린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가치는 쓱 지우고 돈으로 치환된 5천만 원만 보고 오해한다. Q 일본은 프리츠커 상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못 받았다.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가장 직접적인 문제는 한국은 건물을 훨씬 싸게 짓는다는 거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 건축을 비교하는 근거는 옆 나라라는 것인데, 두 나라는 태생이 다르다. 건물은 장인이 짓는 것인데 한국 역사는 건물 짓는 장인의 이름을 기록한 게 한 줄도 없다. 그런데 일본은 모든 장인의 이름을 기록해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남아있다. 그 얘기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름을 기록해 주지 않으면 그들이 이름을 남기기 위한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 그게 두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건물을 보아 왔는지 몇 백 년을 걸쳐서 증명해 왔다. 그걸 지금 와서 옆 나라 하면서 우리는 왜 한 명도 없냐고 하면 굉장히 이상한 얘기다. 일본의 기준으로 봤을 때 한국은 장인이 한 명도 없다. 건물은 개인이 짓는 게 아니고 집단이 사회적 역량을 다 투여해 짓는 것이라 단순 비교하면 안 된다. Q 한옥 장인은 다르지 않나. 한옥도 일본 목수들과 비교하면 수준이 낮다. 일본 목수들은 극단적으로 자신들의 자존심을 이어간다. 나무를 놓고 대패를 밀 때 누가 가장 얇게 벗기느냐를 두고 테스트할 정도다. 다 미쳐있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관심은커녕 적당히 짓는다. Q 그래도 우리만의 건축 문화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만의 강력한 힘이 있다. 그릇으로 비교해보면 일본은 날이 살아 있다. 중국은 거대하고, 우리는 적당히 만드는데 보는 마음이 편해진다. 건물도 그렇다. 일본 집들은 직각 딱 맞고 모서리에 손이 밸 정도가 돼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거 필요 없고, 커다란 것들이 툭툭 던져지는 맛. 그런 힘이 있다. Q 마지막으로, 예산은 부족한데 집 짓고 싶어 하는 예비 건축주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건축가에게 ‘예산이 이 정도 있는데, 집을 지어줄 수 있나’ 상의하는 것이다. 아니면 규모나 재료를 줄여야 하는데, 이러한 문제는 아이디어로 해결해야 한다. 결국 좋은 건축가를 만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프면 제일 먼저 명의를 찾는 거와 같다. 집을 짓는 것도 건축가를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럼 나머지는 거의 다 풀린다. 세 집 건축주들은 고민 하나도 안 했다. 다 믿고 맡겼다. 담류헌 건축주는 집이 너무 궁금해 밤에 랜턴 켜고 보고 갔다 했고, 건원재 건축주는 현장에 2~3번에 왔던 거 같다. 시행착오로 나중에 건물 고칠 돈을 설계할 때 미리 쓰면 훨씬 합리적이고 10년 늙지 않고 진행할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게 맞는 좋은 건축가를 찾는 게 집 짓기의 시작이자 끝인 거 같다. 서현 건축가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이며, ‘가락시영아파트 재건축 사업’과 ‘노들섬’ 개발 등 대형 프로젝트 총괄 계획가다. ‘세모난 집’을 비롯해 다양한 주거 공간도 선보였다. <내 마음을 담은 집>에 소개한 주택 세 채는 서현 건축가가 지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작은 것들이다. 규모는 작지만, 건축 현장에서 벌어지는 작업 원리나 시공 정신은 규모를 떠나 모두 비슷하게 작동한다. 다음번에는 ‘문추헌’, ‘담류헌’, ‘건원재’의 깊고 재미난 건축 이야기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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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 INTERVIEW] 내 마음을 담은 집 건축사 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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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대 주거의 만남 26평 대청마루 품은 집
- 시대와 생활 변화에 따라 집도 달라졌다. 공간이 사라지거나 모습만 변한 채 쓰임은 그대로인 공간이 있다. 나뉘거나 더해진 것도 있다. ‘대청마루 품은 집’은 유연성을 가진 전통 한옥에서 형태를 차용하고 현대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 거실은 별도로 뒀다. 과거와 현대 주거의 만남이다. 진행&구성 백홍기 기자 글 김동희(건축사사무소 KDDH 소장) 자료제공 건축사사무소 KDDH https://cafe.naver.com/kimddonghee HOUSE NOTE건물높이 5.90m구조 경량 목구조가상 대지 400.00㎡(121.00평)건축면적 86.10㎡(26.04평)연면적 86.10㎡(26.04평, 건축 허가면적 82.75㎡(25.03평)) 1층 86.10㎡(26.04평) 다락 43.30㎡(13.10평) 외부마감 지붕 - 컬러강판 벽 - 파벽돌(T50 외단열 시스템)내부마감 벽 - 고급벽지, 고급 천장벽지 바닥 - 강마루(동화자연마루) 다락바닥 - 강화마루(동화자연마루), 목재나간 화장실 - 시트+우레탄 방수 위 타일, 천장 편백 마감단열 벽 - R23 글라스울 지붕 - R37 글라스울(지역 따라 조정)천창 벨룩스(FS, 533x962) 창호 미국식 창호(삼익산업), 영림창호실내문 영림(기성문 선택)현관문 방화문 + 목재마감보일러 콘덴싱 보일러(경동나비엔), (LCB-25K, 23200Kcal/h, Wifi 온도조절기) 설계 건축사사무소 KDDH 손정용 이사 02-2051-1677설계참여 문다인시공 미르하우징설계비용 1000만 원(건축 인허가 별도)공사비용 1억 5900만 원(2020년 기준, 내진구조설계, 인테리어 포함)※ 별도작업(별도비용) 건축+토목 인허가, 정화조, 지하수 개발, 조경, 담장, 데크, 특수조명, 싱크대, 태양 전기패널, 에어컨, CCTV, 기본 기초공사 외 지질 따라 지반 보강공사, 각종 인입비, 세금 전통 건축물인 한옥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기와집을 떠올리지만, 다수를 이루는 민초의 집은 초가였다. 작고 아담하게 지은 초가에는 욕심이 없다. 손님을 맞이하거나 직접 관리할 수 있는 만큼만 공간을 만들었다. 가난해서 그랬다고 할 수 있겠지만, 최적화에 의한 형태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작지만, 그 안에서 부족하지 않은 충분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규모는 환경에 어울려야 하고, 공간은 쓰임에 따라야 한다. 대청마루 기능과 역할 재현한옥에서 대청은 외부와 내부 공간 연결을 앞둔 예비 공간 즉, 전이공간이다. 그러데 대청은 둘러쳐진 것도 아니고 막힌 것도 아니라 명확한 입장이 없어 보여 애매하고 쓸모없어 보인다. 하지만, 형태적으로 대청이 없었다면 육중한 지붕에 눌린 1층이 답답해 보였을 것이다. 대청은 그 느낌을 상쇄시키는 미학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그리고 개방적이다 보니 공적 공간으로도 사용한다. 집은 다분히 사적인 공간이지만 공적 공간도 필요하다. 가족이 모여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특별실이 필요한데 그곳이 공적 공간이 되는 셈이다. 현대 삶의 방식을 반영하면, 적극적인 공적 공간이 가족실을 확대한 영역으로 보는 것도 좋다. 그렇다면, 과거 대청마루가 현대에서 가족실로 진화한 것은 아닐까? 과거의 대청과 현대 가족실, 미래 또 다른 모습의 대청마루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집을 단층으로 짓고 지붕을 경사지붕으로 한다면, 묵직한 지붕이 크게 보이고 어색한 가분수에 답답한 1층이 버티고 있는 느낌일 것이다. 비어있는 공간 느낌을 살리면서 가족이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필요하다면, 대청마루는 유용하지 않을까? 작아도 넉넉한 집‘대청마루가 있는 집’은 단층이다. 대청마루 중심으로 공간을 좌우로 나눴다. 왼쪽에 거실과 주방을 중심으로 배치하고 오른쪽에 안방을 뒀다. 마루는 앞뒤로 큰 창문을 내 밝은 공간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이 공간은 선룸 역할도 한다. 손주들의 실내 놀이공간으로 활용해도 좋다. 대청과 이어지는 작은 사랑방은 손님이 머물기에 편하다. 다락에는 별도 창고를 마련했다. 대청마루와 통하는 창도 냈다. 다락이 별도 방 역할도 할 수 있으니 30평 규모라고 보기엔 조금 넉넉한 집이다. 사랑방과 거실 사이에 한식 창을 만든다면 실내 분위기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 고창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거실과 주방이 만나는 곳에는 식탁이 있고 그 주변에 마루를 깔았다. 낮잠 잘 수 있도록 한 사람이 누울 딱 그만한 크기로 계획했다. 집은 전체적으로 처마를 충분히 빼내고 완만한 물매에 단순한 지붕선을 최대한 살렸다. 거실에서 마당은 한껏 열려 있어 세상을 품은 듯한 공간감을 가진다. 대청마루로 나가도 마찬가지다. 이 집은 실내에 있으면서 야외에서 즐기는 느낌으로 색다른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여기에 지붕에 천창을 더욱 적극적으로 설치하면 온실로 만들 수도 있다. 자신의 형편과 취향에 맞는 집을 지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작은 규모라도 좋다면, 이 집도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대청을 품은 집’은 작고 단순해 보이지만, 이 안에 자신이 좋아하는 마감재와 가구로 채우면, 개성이 담긴 나만의 집으로 얼마든지 꾸밀 수 있다. 집 규모와 상관없이 형편에 맞는 안성맞춤 집을 지을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다. 나에게 맞고 활용성도 높일 수만 있다면, 당장 몇 백 년을 버티는 집보다 작고 간결한 주택이 더 좋을 것이다. 이 집도 쓰임에 따라 공간 연출에 따라 얼마든지 전원생활에 안성맞춤인 공간을 제공할 것이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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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대 주거의 만남 26평 대청마루 품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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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DESIGN] 과거와 현대 주거의 만남 대청마루 품은 집
- 과거와 현대 주거의 만남 대청마루 품은 집 시대와 생활 변화에 따라 집도 달라졌다. 공간이 사라지거나 모습만 변한 채 쓰임은 그대로인 공간이 있다. 나뉘거나 더해진 것도 있다. ‘대청마루 품은 집’은 유연성을 가진 전통 한옥에서 형태를 차용하고 현대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 거실은 별도로 뒀다. 과거와 현대 주거의 만남이다. 진행&구성 백홍기 기자 | 글 김동희(건축사사무소 KDDH 소장) 자료제공 건축사사무소 KDDH cafe.naver.com/kimddonghee HOUSE NOTE 건물높이 5.90m 구조 경량 목구조 가상 대지 400.00㎡(121.00평) 건축면적 86.10㎡(26.04평) 연면적 86.10㎡(26.04평, 건축허가면적 82.75㎡(25.03평)) 1층 86.10㎡(26.04평) 다락 43.30㎡(13.10평) 외부마감 지붕 - 컬러강판 벽 - 파벽돌(T50 외단열 시스템) 내부마감 벽 - 고급벽지, 고급 천장벽지 바닥 - 강마루(동화자연마루) 다락바닥 - 강화마루(동화자연마루), 목재나간 화장실 - 시트+우레탄 방수 위 타일, 천장 편백 마감 단열 벽 - R23 글라스울 지붕 - R37 글라스울(지역 따라 조정) 천창 벨룩스(FS, 533x962) 창호 미국식 창호(삼익산업), 영림창호 실내문 영림(기성문 선택) 현관문 방화문 + 목재마감 보일러 콘덴싱 보일러(경동나비엔) (LCB-25K, 23200Kcal/h, Wifi 온도조절기) 설계 건축사사무소 KDDH 손정용 이사 02-2051-1677 설계참여 문다인 시공 미르하우징 설계비용 1000만 원(건축 인허가 별도) 공사비용 1억 5900만 원(2020년 기준, 내진구조설계, 인테리어 포함) ※ 별도작업(별도비용) 건축+토목 인허가, 정화조, 지하수 개발, 조경, 담장, 데크, 특수조명, 싱크대, 태양 전기패널, 에어컨, CCTV, 기본 기초공사외 지질 따라 지반 보강공사, 각종 인입비, 세금 전통 건축물인 한옥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기와집을 떠올리지만, 다수를 이루는 민초의 집은 초가였다. 작고 아담하게 지은 초가에는 욕심이 없다. 손님을 맞이하거나 직접 관리할 수 있는 만큼만 공간을 만들었다. 가난해서 그랬다고 할 수 있겠지만, 최적화에 의한 형태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작지만, 그 안에서 부족하지 않은 충분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규모는 환경에 어울려야 하고, 공간은 쓰임에 따라야 한다. 대청마루 기능과 역할 재현 한옥에서 대청은 외부와 내부 공간 연결을 앞둔 예비공간 즉, 전이공간이다. 그러데 대청은 둘러쳐진 것도 아니고 막힌 것도 아니라 명확한 입장이 없어 보여 애매하고 쓸모없어 보인다. 하지만, 형태적으로 대청이 없었다면 육중한 지붕에 눌린 1층이 답답해 보였을 것이다. 대청은 그 느낌을 상쇄시키는 미학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그리고 개방적이다 보니 공적 공간으로도 사용한다. 집은 다분히 사적인 공간이지만 공적 공간도 필요하다. 가족이 모여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특별실이 필요한데 그곳이 공적 공간이 되는 셈이다. 현대 삶의 방식을 반영하면, 적극적인 공적 공간이 가족실을 확대한 영역으로 보는 것도 좋다. 그렇다면, 과거 대청마루가 현대에서 가족실로 진화한 것은 아닐까? 과거의 대청과 현대 가족실, 미래 또 다른 모습의 대청마루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집을 단층으로 짓고 지붕을 경사지붕으로 한다면, 묵직한 지붕이 크게 보이고 어색한 가분수에 답답한 1층이 버티고 있는 느낌일 것이다. 비어있는 공간 느낌을 살리면서 가족이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필요하다면, 대청마루는 유용하지 않을까? 작아도 넉넉한 집 ‘대청마루가 있는 집’은 단층이다. 대청마루 중심으로 공간을 좌우로 나눴다. 왼쪽에 거실과 주방을 중심으로 배치하고 오른쪽에 안방을 뒀다. 마루는 앞뒤로 큰 창문을 내 밝은 공간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이 공간은 선룸 역할도 한다. 손주들의 실내 놀이공간으로 활용해도 좋다. 대청과 이어지는 작은 사랑방은 손님이 머물기에 편하다. 다락에는 별도 창고를 마련했다. 대청마루와 통하는 창도 냈다. 다락이 별도 방 역할도 할 수 있으니 30평 규모라고 보기엔 조금 넉넉한 집이다. 사랑방과 거실 사이에 한식 창을 만든다면 실내 분위기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 고창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거실과 주방이 만나는 곳에는 식탁이 있고 그 주변에 마루를 깔았다. 낮잠 잘 수 있도록 한 사람이 누울 딱 그만한 크기로 계획했다. 집은 전체적으로 처마를 충분히 빼내고 완만한 물매에 단순한 지붕선을 최대한 살렸다. 거실에서 마당은 한껏 열려 있어 세상을 품은 듯한 공간감을 가진다. 대청마루로 나가도 마찬가지다. 이 집은 실내에 있으면서 야외에서 즐기는 느낌으로 색다른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여기에 지붕에 천창을 더욱 적극적으로 설치하면 온실로 만들 수도 있다. 자신의 형편과 취향에 맞는 집을 지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작은 규모라도 좋다면, 이 집도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대청을 품은 집’은 작고 단순해 보이지만, 이 안에 자신이 좋아하는 마감재와 가구로 채우면, 개성이 담긴 나만의 집으로 얼마든지 꾸밀 수 있다. 집 규모와 상관없이 형편에 맞는 안성맞춤 집을 지을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다. 나에게 맞고 활용성도 높일 수만 있다면, 당장 몇 백 년을 버티는 집보다 작고 간결한 주택이 더 좋을 것이다. 이 집도 쓰임에 따라 공간 연출에 따라 얼마든지 전원생활에 안성맞춤인 공간을 제공할 것이다. 다락 평면도1층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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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DESIGN] 과거와 현대 주거의 만남 대청마루 품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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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집 바로 짓기- 집의 모양을 결정짓는 지붕 공사2
- 사람의 외모 즉, 얼굴 생김에서 머리 모양은 그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한다. 현대 지붕 마감재는 방수와 단열 기능보다 집의 전체 모양을 결정하는 치장 역할이 중요하다. 단열(지붕과 천장 내부 단열)과 방수(방수 시트 시공)를 별도로 처리하므로 지붕 마감재는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다. 옛 살림집의 민가는 초가나 너와집이고 반가班家는 기와집 일색이던 소재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현대 한옥 또는 현대 황토집(흙집)으로 다양화하는 길을 낸 셈이다. '한옥은 기와집이라야 어울려……', '초가라야 황토집 냄새가 나지……'하는 편견만 극복한다면 현대 건축 양식의 하나로 현대 한옥 또는 현대 황토집은 다양한 지붕 모양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한식 기와 전통 기와 개량형 기와 여전히 한옥형 황토집의 대표 지붕재는 한식 기와이다. 옛집의 기와는 점토(찰흙)로 빚어 불에 구워 만든 방수를 위한 마감재였다. 지붕 바닥 면에 까는 암키와와 암키와 사이에 흙을 채우고 수키와로 마감했다. 수키와는 암키와 위에 올라가는 반원형 단면 기와로 길이는 암키와와 같지만 폭은 반 정도밖에 안 된다. 기와는 처마 끝에서 용마루 쪽으로 이어간다. 오늘날에도 전통 한옥은 이러한 토기와를 사용하지만, 치장재 기능을 강화한 한식형 시멘트 가압기와(암수 기와가 하나로 만들어져 못으로 고정하는 개량형 기와)가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된다. 개량형 한식기와는 바닥기와(암수가 하나로 된 기와), 처마 기와, 용마루를 만드는 착고, 부고, 암마루장, 숫마루장으로 구성된다. 용마루 양쪽 끝이나 추녀마루 끝에는 망와로 장식한다. 지붕 합판 위에 방수 시트를 깔고 기와걸이 상(나무각재)을 댄 후 못으로 기와를 고정한다. 너와 전통 너와 돌 너와 수입 너와 토속성을 중시하는 살림집이나 음식점 등에서는 너와 지붕을 선호한다. 너와는 얇고 넓은 판재로 이은 지붕이다. 강원도 산간에서 많이 보이던 지붕 형태이다. 가로 20㎝, 세로 30㎝ 정도 송판을 1치 정도 두께 판재로 만들어 이은 지붕인데, 너와는 도끼로 쪼개서 만드는 것이 원칙이다. 톱으로 켜면 섬유질이 나타나지 않고 골이 형성되지 않아 배수가 느려져 쉽게 썩기 때문이다. 보통 참나무 너와를 사용하는데, 요즘 방부 처리된 적삼목 수입 너와를 사용하기도 한다. 나무가 바래고 썩으면 갈아주어야 하고, 수입 적삼목 너와는 비용이 많이 들어 부담스러운 편이다. 너와 중에 송판으로 만든 것 외에 검은색 점판암 계열의 천연 너와도 있는데 돌 너와(혹은 돌기와)라고 한다. 서구형 처마, 지붕, 마감재 처마, 지붕 만들기 한옥은 팔작지붕 형태 등 일정한 법칙으로 지붕을 짠다. 반면 아스팔트 슁글이나 수입 기와, 너와 등으로 지붕을 마감할 때는 단순한 맞배지붕 형태 즉, 중도리와 종도리만으로 지붕을 짤 수 있다. 나아가 맞배지붕에 목기연이 걸리는 박공판도 없애고 서구식 박공지붕에 아스팔트 슁글 마감이면 지붕 만들기는 더욱 간단하다. 보편적 방식으로는 집의 평면 구성에 따라 생긴 지붕 모양을 트러스로 짜면 된다. 문제는 지붕경사도에 따라 처마가 창을 가릴 정도로 내려오기에 그 처리를 잘해야 한다. 일반 주택은 처마 길이가 짧아도 문제없지만, 황토집 처마는 보통 1m 정도이기에 지붕선과 동일하게 내려오면 문제가 발생한다. 원형이나 사각 서까래로 한옥 처마처럼 경사도를 유지하고, 그 서까래를 트러스에 고정하여 처마와 트러스 부분을 덧지붕으로 보완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아니면 서까래를 처마 도리에 수평으로 고정할 때 생긴 모양대로 합판으로 마감하여 트러스와 처마가 일정 각도(경사도)를 유지하는 형태로 만든다. 물론 집의 뼈대가 한옥 형태이면서 지붕은 서구적이라 어울림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반면 현대적이고 시공이 쉬우며 평면 구성으로 생겨난 집의 형태에 맞춘 다양한 지붕 모양이 가능하다. 서구 경량 목조주택은 지붕 목재를 보호하기 위해 공기 순환용 환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서까래 방식 처마는 서까래와 서까래 틈 사이로 공기 순환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기에 별도의 환기구를 내지 않는다. 단 처마 서까래 노출 방식이 아닌, 서구 경량 목조주택처럼 처마 아래 면에서 루버나 다른 소재로 마감하여 밀폐시킨다면 환기구는 필요하다. 서구형 지붕 마감 서구 형태의 지붕에 잘 어울리는 소재는 아스팔트 슁글이다. 서구 주택의 유입으로 아스팔트 슁글 지붕은 보편화된 지붕재가 되었다. 가격이 저렴하고 시공이 용이한 장점이 있다. 방수 시트를 정확히 겹쳐 시공하고 먹 선을 놓은 후 처마 끝 선부터 아스팔트 슁글을 깔아 나가면 된다. 아스팔트 슁글용 못으로 중간중간 고정한다. 아스팔트 슁글 대체용으로 수입 기와(대표적으로 라파즈 기와 등)나 금속기와, 적삼목 너와도 사용한다. 서까래에 빗물이 타는 것을 방지하려면 지붕 마감 합판을 8㎝ 정도 평고대 밖으로 내밀고 동판 후레슁으로 물끊기를 해야 하자가 없다. 서까래를 노출하지 않고 방부목으로 박공판(띠장 형태)을 댄다면 이음매 부분만 동판 후레싱을 접는다. ※중요한 점은 지붕 마감재에 따라 지붕 모양을 달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스팔트 슁글은 한옥형 맞배지붕이나 서구식 박공지붕 형태에, 한식기와는 우진각지붕이나 팔작지붕 형태에 어울린다. 집 전체로 보았을 때 지붕에 눌려 집이 무거워 보이거나 반대로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글 이동일 글쓴이 이동일 님은 (주)행인흙건축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사)전원생활협회 이사, 수필가로 활동 중입니다. 저서로 등이 있습니다. 집은 모름지기 건축주와 시공사, 현장 일꾼이 함께 짓는 공동 작품임을 강조하며 40여 동의 현대 한옥 현대 흙집을 지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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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집 바로 짓기- 집의 모양을 결정짓는 지붕 공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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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집 바로 짓기 - 집의 모양을 결정짓는 지붕공사1
- 사람의 외모 즉, 얼굴 생김에서 머리 모양은 그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한다뼈대가 집의 골격을 나타내고 수명을 좌우한다면, 지붕 모양은 집 전체의 느낌을 좌우하는 결정체이다. 지붕 선은 해와 비를 가리는 기능뿐만 아니라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이미지까지 담는다. 한옥형 처마 선에 고전적 이미지의 기와집 모양새를 만들지, 소박한 맛배지붕에 양식洋式기와나 아스팔트 슁글 지붕으로 마감할지, 아예 보편화된 서구식 느낌의 박공지붕에 아스팔트 슁글로 마감할지에 따라 집의 전체적인 맛과 느낌과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처마 지붕 만들기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한옥은 처마가 지붕의 전체 맛을 살린다. 처마란 서까래가 기둥 밖으로 빠져나와 만들어낸 공간이다. 그 깊이는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기둥뿌리에서 처마 끝을 연결하는 내각 범위는 28∼33도이다. 처마를 깊이 빼는 이유는 벽을 보호하고 여름을 시원하게 나기 위한 방편이다. 서까래만 갖고는 처마를 깊이 빼는 데 한계가 있기에, 그 끝에 부연附椽이라는 짧은 서까래를 덧달기도 한다. 서까래 하나로만 만든 처마를 홑처마, 부연을 단 처마를 겹처마라 부른다. 서까래는 보통 1자 간격으로 건다. 너무 좁으면 답답하고, 너무 넓으면 허술해 보인다. 처마 길이는 처마도리 끝에서 3자, 부연을 걸 경우 4자 정도 뽑는다. 지붕 형태 한옥의 지붕 형태는 보통 우진각, 맞배, 팔작으로 나뉜다. 우진각지붕은 네 면 모두 지붕면을 만든 형태이다. 전면 또는 후면에서 보면 사다리꼴이고, 양 측면에서 보면 삼각형 모양이다. 우진각지붕은 용마루와 추녀마루만 있고 내림마루가 없는 형태로, 초가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맞배지붕은 집의 앞뒤에서만 지붕면이 보인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로만 짜여 졌으며 책을 엎어놓은 형태로 추녀라는 부재가 없다. 팔작(합각) 지붕은 우진각 지붕에 맞배지붕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측면에도 지붕이 만들어지지만 우진각지붕처럼 삼각형 끝점까지 기와가 올라가지 않고 작은 박공(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의 합각 부분에 八 자 모양으로 걸린 부재) 부분이 만들어진다. 전면 또는 후면에서 보면 갓을 쓴 것과 같고, 측면에서는 사다리꼴 위에 맞배지붕의 측면 박공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추녀, 앙곡 처마 네 귀의 기둥 위에 끝이 번쩍 들린 크고 긴 서까래, 추녀 차목한 추녀. 집 모서리에 45도 방향으로 걸리는 방형 단면 부재이다. 지붕을 만들 때 추녀를 가장 먼저 건다. 맞배지붕에는 추녀가 생기지 않는다. 추녀 안쪽 끝은 중도리 모서리에 올라앉으며 주심도리가 지렛대 역할을 해서 균형을 잡는다. 보통 처마(서까래)보다 2∼4치(6∼12㎝) 더 뺀다. 보통 폭 7치(21㎝), 높이 1자(30㎝)인 목재를 역 사다리꼴로 다듬고 말구는 약간 비스듬하게 자른다. 이는 서까래도 마찬가지인데 집을 올려다볼 때 옆으로 퍼지는 착시 현상을 교정하기 위함이다. 겹처마는 부연 길이 만한 짧은 추녀가 하나 더 올라가는데, 이것을 사래라고 한다. 추녀를 걸면 추녀와 추녀를 평고대로 연결한다. 한옥의 처마는 입면 상에서 볼 때 중앙에서 양쪽으로 갈수록 들어 올라가는 곡선인데, 이를 앙곡이라 부른다. 서까래 추녀와 서까래를 걸 중도리 홑처마 추녀, 평고대, 서까래 걸기. 홑처마 추녀 선. 평고대를 건 후, 그 곡선에 맞추어 서까래를 건다. 서까래는 처마와 지붕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부재이다. 육송이나 낙엽송을 다듬어 사용하거나, 산림조합에서 가공한 낙엽송 원형 서까래를 사용하기도 한다. 거실 오량 천장은 중도리와 마룻대(종도리)로 별도의 오량을 짜고 서까래로 모양을 낸다. 모퉁이 부분에 부챗살처럼 방사선으로 서까래를 거는데, 이를 선자연이라 부른다. 건물의 폭과 길이를 계산해 지붕 모양을 정한 후 서까래를 걸고 덧 집을 만든다. 이때 건물 전체적으로 중도리를 세우고 서까래를 고정하거나, 트러스로 지붕 모양을 만든 후 거기에 연결해 처마를 만들기도 한다. 중도리와 종도리를 만들어 전체 지붕을 구성해 한옥의 짜임을 따르는 형태이다. 보통 처마로 나가는 부분만 원형 서까래를 사용하고 안에서 보이지 않는 곳은 일반 각재로 지붕을 구성한다. 개판, 당골막이, 착고막이 추녀, 평고대, 서까래 입면. 서까래 개판 깔기. 서까래(또는 부연까지)를 걸면, 그 사이가 뚫리는데 그곳을 막고자 까는 판재를 개판이라 한다. 개판을 깔지 않을 경우 싸릿대나 옥수숫대 등으로 엮어 까는데, 이를 산자라 부른다. 개판은 서까래에 고정하는데 반드시 한쪽만 못질한다. 양쪽 모두 못을 박으면 개판의 신축에 대응하지 못해 갈라지기 때문이다. 요즘 미송합판이나 루버를 사용하는 예가 많다. 서까래와 서까래 사이의 틈을 진흙으로 메우는데, 이를 당골막이라고 한다. 흔히 단골메기라고도 하는데, 단골처럼 들락날락하는 쥐의 출입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당골막이는 보통 찰흙과 마사(또는 모래)를 섞고 강도를 높이고자 시멘트(또는 회)를 약간 섞기도 한다. 흙이 부스러지거나 곤충이 흙을 파고들어 집 짓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시멘트나 회를 섞지 않을 경우 진흙과 마사만 배합해 당골막이 후 외부를 줄눈용 자재로 깔끔하게 마감하면 질감과 기능이 살아난다. 내부는 내장 공사 전 단열을 위해 당골막이를 보강한다. 거실이나 주방 등 서까래 당골막이가 드러나는 부분은 황토 모르타르로 마감한다. 이때 흙이 부스러지는 것을 막고자 줄눈용 자재로 마감하기도 한다. 부연과 부연 사이는 판재로 막는데, 이를 착고판(또는 착고막이)이라 한다. 지붕 단열 겹처마 부연 평고대, 부연 걸기. 천장 단열을 주로 하는데 덧집을 지으면 거실의 오량천장과 덧집 사이로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협소하므로 미리 단열 처리한다. 외부 서까래와 오량천장 사이가 좁은 곳은 보통 50㎜ 스티로폼을, 나머지 공간은 80∼100㎜ 스티로폼을 사용한다. 스티로폼은 1호 정품을 사용해야 단열 효과가 높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나 스티로폼 단열 시 50㎜ 두 장을 엇갈리게 겹치면 단열 효과는 더 높아진다. 특히 오량천장 위 단열은 모서리 부분이 많기에 우레탄폼으로 보강하는 것이 좋다. 지붕에 흙(알매)을 올리고픈 것이 일반인의 심리지만 단열에 도움이 적을뿐더러 지붕의 하중만 키우는 격이다. 거실 오량천장은 목재(루버 또는 개판)가 마감재이고, 방은 석고보드가 마감재이기에 흙을 올리는 일은 의미가 없다. 덧집(덧지붕) 겹처마 합각 박공, 목기연 걸기 전체 지붕 모양은 중도리에 지붕 선을 고려한 받침목을 고이고 각재로 덧집을 짓는다. 현장에서 일반적으로 정재 다루끼(12자×1.5치×1.5치 각재)라고 부르는 부재를 사용해 1자 간격으로 상을 걸어 전체 지붕 모양을 만든다. 전통 한옥에서는 덧집이란 표현은 없다. 삼량, 오량, 칠량 등 지붕 선이 이미 확정되기 때문이다. 폭이 같은 一 자나 ㄱ자, ㄷ자 형태의 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적 평면 구성은 건물의 폭을 같게 할 수 없기에 다양한 평면 구성에 지붕 모양을 맞춰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렇기에 한옥 목수일 중 지붕 모양을 만드는 일이 가장 어렵다. 처마를 만든 후 전체 지붕 모양을 다시 만든다 하여 덧지붕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물매 2층 처마 지붕 작업 맞배지붕이나 우진각지붕, 현대식 박공지붕은 물매가 직선이지만, 팔작지붕에 기와를 올릴 경우 곡선으로 처리한다. 처마의 앙곡과 안허리곡을 자연스럽게 하고, 빗물을 빨리 배수하는 장치이다. 빗물의 양이 적은 용마루 부분에서는 빗물을 빨리 내려가게 하고, 빗물의 양이 많은 추녀 부분에서는 조금 완만하게 하여 기와의 마모를 비슷하게 하려는 과학적 의도가 숨어 있다. 방수 합판 덧지붕 만들기 및 방수 합판 깔기. 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의 박공이 만들어지는 부분에는 부연처럼 생겼으나, 그보다 훨씬 짧은 서까래(목기연)를 건다. 박공판에 목기연과 목기연 개판까지 시공하면 전체 덧집 위로 방수 합판(일반적으로 O.S.B. 합판)을 덮는다. 옛집은 서까래 위로 산자를 엮고 흙을 친 후 기와를 얹었다. 현대에는 단열 및 방수를 고려해 합판으로 전체 지붕을 마감하고, 그 위에 방수 시트를 깔고 지붕재를 마감재로 사용한다. 옛집은 기와가 방수 및 단열 기능을 모두 담당했으나, 현대에는 지붕 마감재 역할만 한다. 때문에 아스팔트 슁글(슁글형 금속기와)이나 너와(적삼목 또는 참나무 너와 등), 기와(토기와, 개량형 한식 기와, 수입 기와) 등 다양한 소재의 결합이 가능하다. 글 이동일 글쓴이 이동일 님은 (주)행인흙건축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사)전원생활협회 이사, 수필가로 활동 중입니다. 저서로 등이 있습니다. 집은 모름지기 건축주와 시공사, 현장 일꾼이 함께 짓는 공동 작품임을 강조하며 40여 동의 현대 한옥 현대 흙집을 지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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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집 바로 짓기 - 집의 모양을 결정짓는 지붕공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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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집 그것이 알고 싶다
-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집 가족 건강을 위한 당신의 선택은… 흙은 생명의 근원이다. 한자'土'는 초목이 땅 위로 나올 때, 싹에 흙이 묻어 있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모든 생물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구약성서에는"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지으셨다"는 기록이 있다. 흙은 순수한 자연을 상징한다. 자연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화기和氣가 감도는 법이다. 그렇기에 흙으로 지은 집 앞에 건강, 친환경, 생태, 참살이 등 갖가지 수식어를 붙인다. 그 뿌리는 바로 우리네 전통 살림집 즉, 자연환경에 순응하여 지은 집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한옥이니, 흙집이니, 황토집이니 이름이 다양하다 보니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네 전통 살림집이 현대 주거 환경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기 때문인데 그 과정을 살펴보자. 글. 사진 전원주택라이프 편집부 우리네 살림집은 어떻게 지어질까. 한국전통초가연구소 윤원태 박사는 큰 틀 안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나무와 흙, 돌, 볏짚, 물을 주재료로 사용하고, 먼저 기단을 쌓고 주추를 놓는다. 그 뒤엔 나무를 깎아 다듬은 후 집의 하중을 지탱하는 기둥을 세우고 보와 도리 마룻대를 걸친다. 서까래 위에 가는 대나무나 싸리나무 산자를 엮어 알매(볏짚을 썰어 넣고 반죽한 흙)를 얹은 다음 지붕(기와, 볏짚, 너와 등)을 덮고, 흙으로 벽체를 만들고, 구들과 마루를 시설하면 건강에 좋은 훌륭한 살림집이 탄생한다." 초가집이나 기와집이나 구조체인 나무를 제외한 모든 부분 즉, 벽과 바닥과 천장 등 흙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흙의 내구성과 대량 생산 등을 위해 벽돌로 발전한 것이다. 현재 '황토집'이라고 불리는 집들은 공간 구성이나 구조(뼈대), 지붕 모양, 창호, 마감 사양에서 특성이 서로 다르다. 예비 건축주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인데, 이동일(행인흙건축) 대표의 설명을 들어보자. "조적조나 콘크리트조(RC조), 서구식 경량 목구조, 철골조… 이렇게 구조 방식으로 구분하는 건축 유형과 다르게 전통 살림집은 모든 구조 양식과 결합했다. 한옥 형태의 독자성을 갖는 집 모두를 황토집으로 통칭하다 보니 혼란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 한옥은 무엇일까. 사전에는'서양의 집과 구분되는 우리 고유의 재래식 집, 조선집, 한식집'으로 나온다. 신영훈(한옥문화원) 원장은'이 땅에 지은 전형적인 모든 건축물'이라며, 그 특성으로 구들과 대청을 꼽는다. 북방에서 발전한 폐쇄적인 구들방과 남방에서 비롯한 개방적인 대청이 한 건물에 공존하는 것이다. 황토집, 세분화는 어떻게 우리의 전통 살림집, 한옥은 근근이 생명력을 유지하며 현대에 이르러 다양하게 진화했다. 황토집이란 이름으로… 이동일 대표는 황토집이란 명칭은 1990년대 후반 황토 모르타르로 벽과 방바닥을 마감한 황토방 아파트 광고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그 후 흙으로 벽돌을 찍어 집을 지은 김정덕 할머니가 알려지면서 황토집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젠 황토집도 건축 유형별로 세분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황토만으로 구조 벽을 세우는'담틀집', 황토벽돌만으로 구조 벽을 세우는'황토벽돌집', 통나무 토막과 황토로 벽을 세우는'목심흙집', 나무 귀틀과 황토로 벽을 세우는'귀틀집', 경량 목구조 방식의 뼈대에 황토벽돌을 쌓는'경량 목구조 황토집', 철골(스틸) 뼈대에 황토벽돌을 쌓는'철골 황토집'으로 구분했으면 한다. 그리고 한옥 목구조 뼈대에 심벽치기를 한'한옥 목구조 심벽집(전통한옥)', 한옥 목구조 뼈대에 황토벽돌을 쌓으면'한옥 목구조 황토벽돌집'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좋겠다. 물론 그 유형에 따라 지붕 모양과 재료, 창호, 단열, 마감 사양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기초에서부터 구조재와 마감재, 지붕재 그리고 시공 기술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것과 서양의 것이 마구 뒤섞였기에 그 구분이 쉽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다만 우리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흙이 모두 속한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우리네 전통 살림집은 자연에 순응하고 이웃과 조화를 이루는 황토집이였다. 예비 건축주들의 궁금증 Q & AQ 황토벽돌은 종류도 다양하고 찍는 방식도 다르다던데요. 이동일 | 흙벽돌을 굳이 황토벽돌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누런색을 띠는 몸에 좋은 흙으로 굽지 않고 자연 건조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벽돌집이 유행하면서 흙벽돌이 생산됐으나 주로 창고와 연초(담배) 건조장 등 부속사 건물에 사용됐습니다.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황토벽돌은 크게 ▲진흙과 마사磨砂·볏짚 등을 혼합해 손으로 찍는'손 황토벽돌' ▲황토에 5% 정도 회나 시멘트 또는 돌가루를 썩는'프레스 황토벽돌'▲황토만을 압착하는 '진공 압착 황토벽돌'로 구분합니다. 요즘 비에 강해 황토벽돌만으로 집을 2층까지 짓는 황토벽돌도 나왔습니다. 건축 소재는 본연의 성질을 온전히 간직할 때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병을 치유한다거나 작은 약방을 짓는다면 투박하지만 황토의 순수성을 간직한 손 황토벽돌을, 비에 노출되는 정도가 심하고 보통 건축비로 짓는다면 프레스 방식 황토벽돌을, 집의 모양과 기능을 고려해 뼈대를 세우고 창틀 하단부에 방수벽을 시공한다면 진공 압착식 황토벽돌을 권합니다. Q 살기에 불편하지는 않은지, 집 관리가 어렵지는 않은지요. 이동일 | 이러한 편견은 전통 한옥의 공간 구성에서 현대인들이 느끼는 불편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옥 목구조 방식도 예전의 칸 개념을 넘어 공간 구성이 가능하기에 지붕 모양만 고려하면 현대 주택으로 불편함은 없습니다. 황토집은 현재 한옥형 살림집의 현대화(현대 한옥, 현대 흙집)를 이루는 단계입니다. 황토집은 관리가 어렵다는 생각은 벽의 틈 발생 문제와 목재 관리에 대한 기우 때문입니다. 목심흙집과 귀틀집은 틈 발생 현상이 당연하기에 지속적인 보완이 필요합니다. 한옥 목구조 현대 한옥은 신축 후 1년 정도 지나면 나무 기둥과 황토벽 이음매를 보수해야 합니다. 나무와 황토 등 생태적 건축 소재가 갖는 자연 현상인데, 현대 시공 기술력으로 최소화했기에 크게 우려할 문제는 아닙니다. 목재도 신축한 지 2년 후 상태에 맞추어 관리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단 비에 약한 외벽의 보완은 시공 기술상 중요한 문제로, 집을 어떻게 짓느냐에 달렸습니다. 초가뿐 아니라 사대부가 기와집도 벽체는 물론 바닥이며 천장까지 모두 흙이다. Q 황토집은 건축비가 쌀 것 같은데 왜 비싼가요. 이동일 | 황토집에 대한 개념이 정착되지 않았기에 흔히'황토로 집을 짓는데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집은 황토만으로 지을 수는 없습니다. 건축주 직영이나 저렴한 건축비로 짓는 집은 담틀집이나 황토벽돌집, 귀틀집, 목심흙집이 있습니다. 일반 건축 예산으로 짓는 집은 경량 목구조 황토집이나 철골조 황토집 등이 있습니다. 한옥 목구조 뼈대에 기와지붕 형태라면 사양에 차이가 있지만 중·고가에 속하고, 전통 한옥은 고가에 속합니다. 조적조, 철근콘크리트조, 경량 목구조, 철골조 하듯이 건축 구조가 명확한 건물은 마감 사양에 따라 건축비가 다릅니다. 하지만 황토집은 구조 방식, 지붕 모양과 재료, 마감 사양 등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특히 시공업체마다 구조 및 마감 방식, 시공 기술력에 차이가 있기에 큰 편차를 보입니다. 병을 치유한다거나 작은 약방을 짓는다면 투박하지만 황토의 순수성을 간직한 손 황토벽돌을, 비에 노출되는 정도가 심하고 보통 건축비로 짓는다면 프레스 방식 황토벽돌을, 집의 모양과 기능을 고려해 뼈대를 세우고 창틀 하단부에 방수벽을 시공한다면 진공 압착식 황토벽돌을 권한다. Q 업체 선정이 쉽지 않은데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요.이동일 | 여타 구조의 주택과 달리 황토집은 자재와 시공사가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시공이 까다롭기에 대중화 단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건축주가 직접 쉽게 짓기도 하지만 제대로 지으려면 한도 끝도 없고 많은 비용이 듭니다. 때문에 황토집 관련 시공사들은 유형별로 자기 방식을 선보이며 건축비를 제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황토집의 건축 유형을 명확히 하고, 그에 따른 시공사와 접촉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집이 그렇지만 특히 황토집은 시공 기술력을 갖춘 시공사를 만나야 여름에는 비를, 겨울에는 추위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시공사가 지은 집을 직접 방문해 눈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친환경 건강 바람을 타고 전통 살림집의 현대화 물결이 거세다. Q 목구조 심벽집의 벽체는 단열성이 떨어져 겨울철 외풍外風이 심해 춥다고 하는데 특별한 보완 기술이 있나요. 윤원태 | 과거 민가 건축에 사용한 기둥을 비롯한 각 부재는 100∼130㎜ 규격의 목재를 사용해 심벽치기(흙벽)한 벽체 두께가 불과 80∼100㎜로 황토가 지닌 축열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단열성이 떨어졌습니다. 황토의 물성실험에서 얻어진 축열 효과는 140㎜ 이상인 심벽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새로운 목구조 심벽집 건축에 필요한 목재는 면적에 따라 최소 140∼200㎜ 두께의 심벽이 만들어지기에 단열 효과가 높습니다. 따라서 목재의 수축으로 목재와 심벽이 만나는 부분에 생기는 틈(외풍 유입 지점)은 목재에 20㎜ 깊이의 홈을 파고, 거기에 황토를 메움으로써 외풍을 차단합니다. Q 목구조 심벽집은 건축비가 많이 발생하지 않나요. 윤원태 | 자재와 건축 기술에 따라 건축비 차이가 2∼3배 발생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국산 춘양목(금강송)이나 육송하고 수입 송은 2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또한 5량에 소로 수장으로 주두와 장여·창방 등을 넣고 겹처마에 기와로 지붕을 마감한 집하고 3량 민도리집은 3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따라서 건축 대행사의 전문가와 상의해 예산에 맞추어 목재와 건축 기술, 마감재, 지붕재 등을 선택함으로써 자재비와 인건비를 최소화하는 맞춤형 주택을 권합니다. 적은 비용으로 고급스러운 집을 짓고자 욕심을 내면 자칫 건축비 과다 지출로 채권이 발생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병을 치유한다거나 약방을 짓는다면 투박하지만 황토의 순수성을 간직한 손 황토벽돌을, 비에 노출되는 정도가 심하고 보통 건축비로 짓는다면 프레스 방식 황토벽돌을, 집의 모양과 기능을 고려해 뼈대를 세우고 창틀 하단부에 방수벽을 시공한다면 진공 압착식 황토벽돌을 권한다. Q 목구조 심벽집은 다른 건축 공법에 비해 내구성이 떨어지지 않나요. 윤원태 | 목구조 심벽집의 기본 골조는 목재(소나무)입니다. 관리 능력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골조의 내구연한은 200∼300년입니다. 심벽에 사용하는 황토도 반영구적입니다. 다만 관리 소홀로 심벽이 파손되거나 일부 갈라져 황토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때는 황토를 반죽해 손상된 부분을 쉽게 보수하기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건강을 중시해 순수 황토만 고집하기에 종종 외벽에 하자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내벽은 당연히 순수 황토로 마감해야겠지만, 외벽은 황토(3) : 모래(2) : 백시멘트(1)의 비율로 사용한다면 빗물에 약해지거나 파손될 위험이 줄어듭니다. Q 목구조 심벽집은 건축 기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나요? 윤원태 | 건축 기술과 면적에 따라 차이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면 면적이 100.0㎡(30.3평)인 5량 기와집으로 소로 수장을 하면 목수의 영역인 치목(바심질)에서부터 뼈대 결구까지만 120일 이상 걸리고, 벽체 마감까지 180일 이상 걸립니다. 하지만 3량 민도리집이라면 뼈대 구성과 벽체 마감 등 마무리 단계까지 90∼100일이면 짓습니다. 새로운 목구조 심벽집 건축에 필요한 목재는 면적에 따라 최소 140~200㎜ 두께의 심벽이 만들어지기에 단열 효과가 높다. 따라서 목재의 수축으로 목재와 심벽이 만나는 부분에 생기는 틈(외풍 유입 지점)은 목재에 200 ㎜ 깊이의 홈을 파고, 거기에 황토를 메움으로써 외풍을 차단한다. 이동일 님은 사람 냄새나는 집을 짓는 ㈜행인흙건축 대표를 역임하고 (사)전원생활협회 이사, 수필가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새집줄게 흙집다오》 《황토집 바로 짓기》등이 있습니다. 집은 모름지기 건축주와 시공사, 현장 일꾼이 함께 짓는 공동 작품임을 강조하며 40여 동의 현대 한옥 현대 흙집을 지었습니다. 윤원태 박사는 부산시 경성대 전통건축학 지도 교수이자 한국전통초가연구소 소장으로, 전통주택을 현대인의 주거 생활에 맞게 개량한 현대식 전통주택을 보급했습니다. 《열린문학지》에'산사의 밤'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며, 국제문화예술상 최고 문화상(2005년)을 비롯한 많은 상을 받았으며, 《한국의 전통 초가》《황토집 따라 짓기》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한국전통초가연구소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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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집 그것이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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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의 멋과 매력을 좌우하는 '기와' - 전통 기와에서 현대식 개량기와까지
- 주택의 머리, 즉 지붕에 뭘 얹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기와는 천년의 세월에도 변함이 없는 가하면 기와주택만의 고고한 아우라를 풍기기도 한다. 기와를 선택할 땐 비용을 고려해 소재를 먼저 결정하고 형태와 색으로 디자인을 세분화한다. 봄날 햇볕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면서 편안한 느낌을 주는 기와가 있는가 하면 차갑고 무거워 보이는 기와도 있다. 또 곳곳의 장식 요소로 시선을 끌어당기는 기와도 있다. 주택 유형과 디자인을 먼저 살펴보고 기와 형태와 색을 결정하면 된다. 기와는 시간이 쌓일수록 멋과 아름다움이 진해진다. 이러한 기와의 멋과 감성에 매료돼 기와를 고집하는 마니아들도 많다. 하지만, 3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외형적으로 큰 변화 없이 건재할 수 있던 것은 다른 재료와 다르게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내구성과 눈비를 완벽하게 차단해 나무 부재를 썩지 않게 하는 뛰어난 기능 때문이다. 가격이 비싸 일반 서민은 사용하기 어려웠던 기와는 현재 새로운 소재와 기술 개발로 기존 기와의 멋과 감성은 유지하면서 저렴하고 내구성까지 뛰어난 개량기와를 선보이며 또다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에 전통 점토기와부터 개량기와까지 기와의 이모저모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다. 글 백홍기 기자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향토대백과》, 한국박물관연구회 지붕재의 시작은 이엉이나 볏짚, 나무껍질 등이었다. 식물성 재료가 주를 이루었지만 내구력이 약하다 보니 보수를 하거나 교체를 해야 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돌을 지붕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돌은 무게와 연마 때문에 다루기가 어려워 사용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다 다루기 쉬운 진흙으로 일정한 모양을 만든 뒤 불에 구워 방수 효과는 물론 강도가 높아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와가 개발됐다. 기와의 기원은 가장 오래된 흔적과 문헌에 따라 약 3000년 전 서양은 고대 그리스 시대, 동양은 중국 삼황오제 시대에 사용한 것으로 본다. 한반도에서 점토기와를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진 건 1913년 평양 강남구역 토성리 낙랑유적지에서 출토된 점토기와를 근거로 기원전 2~1세기경이라고 추정한다. 당시 한반도 북부지방에 목구조 기와집이 등장했으며, 여기에 사용한 낙랑기와가 우리나라 최초의 점토기와다. 낙랑기와는 중국 한나라에서 사용한 수막새의 글과 무늬가 같아 한나라의 건축문화가 유입됐다고 추정한다. 삼국 시대부터 명맥 이어온 기와기와가 한반도에 널리 퍼지기 시작한 건 삼국 시대다. 이와 관련해 국토연구원《한국형 국토발전 실천 전략 연구》를 보면 “삼국 시대에 기와를 굽는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상류계층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기와집이 일반화되었고, 이들 기와집에는 온돌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도 “신라 경주부터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기와집들이 들어서 있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은 일본 문헌에도 있는데, 『일본서기』에 “백제에 와박사(기와박사)라는 직제까지 있었다”라는 내용이다.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워 중국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지만, 후세로 갈수록 점차 독창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다. 백제는 초기에 고구려 양식을 보이다 5세기 후반 중국 문화와 융합해 백제 고유의 우아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백제 기와 양식은 신라와 일본 아스카문화[飛鳥文化]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양식을 이어받아 두 가지 양식을 보이는 게 특징이다. 이후 두 양식이 어우러져 신라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하며, 통일신라 시대로 전해졌다. 통일신라 시대는 여러 문화가 융합하면서 기와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다양하게 발전한 모습을 보인다. 그동안 기와 장식에서 두드러진 수막새 장식에서 암막새가 새로 등장한 것이다. 또한, 막새면에 장식하는 무늬도 단순한 단판양식에서 이중으로 연꽃잎을 장식하는 중판양식 외 복판·세판·혼판양식으로 복잡하고 섬세해졌다. 고려 시대는 초기에 통일신라 시대의 섬세하고 화려한 전통을 계승하다 점차 단순해졌다. 그리고 귀목무늬(鬼目文)와 청자기와라는 새로운 무늬와 제작 기법이 나타났다. 고려 시대 후기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범梵자를 새긴 막새가 나타나는 동시에 암막새의 드림새가 역삼각형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암막새의 변형은 조선 시대까지 계속돼 하트나 계란 모양으로 바뀌면서 무늬도 간단한 연꽃무늬나 건물과 관련된 내용의 글 등을 기록하기도 했다. 막새를 서까래에 90°로 부착하던 것도 둔각으로 설치해 빗물이 잘 흐르도록 기능적으로 발전했다. 조선 시대는 유교정신에 따라 기와는 더욱 간소해지고 소박해졌다. 장식 요소로 용마루 양 끝에 세운 치미는 취두와 용두로 바뀌고, 추녀마루나 내림마루 끝을 살짝 들어 올려 멋을 낸 곱새기와는 망새, 바래기, 토수로 대치하면서 외형적으로 간결해진 것이다. 낙랑_낙랑예관이 새겨진 수막새낙랑군의 예관禮官이라는 관직을 알려주는‘낙랑예관’글자를 막새면 중심부에 새겨 넣고 주위에 구름무늬[雲氣文]를 채운 문자기와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형태나 제작기법이 중국과 동일하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_암키와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진 암키와는 높은 온도로 구원 표면이 단단하다. 붉은색을 띠는 고구려 기와는 바깥쪽에 비스듬한 문살무늬[格子文]를 넣은 기와가 유행했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_짐승얼굴무늬 수막새짐승 얼굴을 표현한 막새기와는 화재를 막고 건물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부릅뜬 눈과 크게 벌린 입에는 날카로운 이빨, 두툼한 코가 두드러진다. 고구려 시대 짐승얼굴무늬 기와의 전형적인 양식이며 주로 평양부근에서 출토됐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백제_연꽃무늬 수막새백제 시대는 수키와와 암키와, 수막새와 서까래기와, 치미 등으로 구분한다. 꽃잎 끝이 둥글고 적당한 부피감을 보이는 연꽃무늬 수막새는 백제 기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일본으로 전파된 이 형식은 아스카사[飛鳥寺] 등에서 볼 수 있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_도깨비 얼굴무늬 기와짐승얼굴무늬는 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의미로 제사용기나 건축물, 무덤 등에 많이 사용했다. 얼굴이 크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두툼한 모습이다. 테두리는 구슬무늬를 전면에 배치하고 무늬에서 힘이 느껴진다. 통일신라 시대에 대량 생산한 짐승 얼굴무늬 기와는 형태와 구도에서 완벽한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뿔 사이에 있는 구멍은 못을 박아 귀마루 끝을 고정하기 위한 것이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고려_청자 당초무늬 암막새당초무늬가 돋을새김으로 만든 암막새다. 불교가 성행하던 고려는 사찰에서 활발하게 기와를 제작했고, 청자로 만든 청기와는 가장 화려한 기와로 꼽는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고려_청자 양각 모란무늬 수막새막새 면에 두 겹의 원 테두리가 음각되어 있고 바깥 테두리에는 연밥문을, 안 테두리에는 모란문이 양각되어 있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조선_건륭乾隆이 새겨진 암막새조선 시대 기와는 장식이나 미적인 측면보다 기능에 중점 뒀다. 이전 시기에는 막새면을 직각으로 붙였으나 조선 시대에는 연목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둔각을 이룬다. 장식을 위한 연꽃무늬[蓮花文]는 사라지고 제작과 관련한 명문銘文을 넣었다. 기와에 새겨진 글귀는‘건륭 20년(1775)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이다(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전통 한식 점토기와를 사용한 주택 사찰에 사용한 플라스틱 한식기와(출처: 대한한옥개발㈜ www.iruhun.com) 기능과 가성비로 무장한 개량기와 등장기와 생산이 융성했던 시기에도 누구나 기와를 사용할 수 있었던 아니다. 제작 과정이 까다롭고 이동과 시공이 어려우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지붕을 엮었다. 여기에 일제 강점기와 6·25전란을 겪으며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극히 일부 계층에서만 기와를 사용했다. 60년대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주택 수요에 따라 기와의 수요도 증가하자 대중적으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시멘트 기와가 등장했다. 시멘트 기와는 기존 기와보다 제작이 쉽고 가볍고 저렴한 데다 시공도 간편해 70년대를 기점으로 단독주택 지붕재를 대표하는 기와가 됐다. 2000년대 초반까지 기와는 크게 전통 한식기와, 한식기와 모양의 시멘트 기와, 유럽 스타일의 수입기와로 나뉘었다. 그러다 2004년 대한한옥개발(주)에서 외형은 전통 한식기와와 유사해 한옥 고유의 멋을 낼 수 있으면서 가격은 저렴한 플라스틱 기와 ‘천년와’를 선보이면서 시멘트기와에 이어 새로운 한식 개량기와 시대를 열었다. 2000년 후반에는 (주)페루프에서 전통 한식기와의 모양을 재현한 금속기와를 내놨다. 2010년대에는 여러 기업에서 한식기와의 모양과 색, 막새 무늬까지 재현한 금속기와를 선보여 한식 개량기와의 춘추전국 시대라고 할 정도로 다양해졌다. 오지기와 또는 스페니쉬 기와라고 하는 유럽식 점토기는 1990년대부터 조금씩 사용하기 시작해 2000년대 후반부터 프로방스 주택이나 지중해풍 주택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급격하게 성장했다. 유럽 특유의 색감과 담백함은 많은 사람의 선택을 이끌었고 현재 가장 널리 사용하는 기와 가운데 하나로 국내 시장에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또한, 건축자재 생산 기업인 (주)로자는 2011년 유럽풍 점토기와의 아름다운 미관을 유지하면서 시공이 간편하고 저렴한 금속기와를 선보여 소비자의 선택의 폭을 더욱 넓혔다. 현재 기와 시장은 2010년에 들어서면서 크게 고가지만 자연스러운 멋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점토기와, 실용성과 가성비를 추구하는 개량기와로 양분된 모습이다. 유럽식 점토기와를 사용한 주택 유럽식 금속기와를 사용한 주택(출처: 로자 www.roser.com) 대체할 수 없는 기와의 멋과 감성기와는 정밀과학이고 예술이다. 천여 장의 기와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각각 제자리에서 견고하게 맞물린 건축물은 천년의 세월을 견디게 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한 장의 기와가 차곡차곡 쌓여 기와주택만의 고고한 아우라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유럽식 기와지붕은 한식 기와지붕보다 구성이 단순하고 담백하다. 봄날 햇볕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색감은 편안한 느낌을 준다. 반면 한식기와지붕은 차갑고 무겁다. 하지만, 유연한 선과 곳곳의 장식 요소가 이를 상쇄시키면서 시선을 끌어들인다. 한식기와는 구성이 복잡하지만, 각각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안다면, 또 다른 미의 세계로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다. 간략하게 한식기와의 구성을 살펴보면, 크게 평(기본)기와, 서까래기와, 마루기와, 막새, 망새(망와), 특수기와로 나뉜다. 프랑스 점토기와 주택 평(기본)기와암키와와 수키와에 대한 총칭이다. 암키와는 바닥에 비늘처럼 겹겹이 깔아 빗물을 고랑으로 흘러내리게 하고 수키와는 세로로 연결한 암키와 틈새를 덮어 눈비를 막는 동시에 연결부를 장식한다.서까래 기와연목기와 부연기와, 사래기와, 토수로 나뉘는데, 서까래 부식을 방지하고 장식하는 데 사용한다. 막새추녀 끝에 부착하는 기와로 막새 끝에 무늬를 새긴 드림새를 붙여 처마 끝 틈새를 감추는 동시에 처마를 아름답게 꾸며준다. 막새는 암막새와 수막새가 있으며, 암막새는 암키와에 드림새를 붙인 것이고 수막새는 수키와에 드림새를 붙인 것이다. 막새 중에서 목부재 마구리면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을 초가리기와라고 한다. 부재에 따라 연목초가리, 부연초가리, 추녀초가리, 사래초가리라고도 부른다. 마루기와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의 선과 모양을 내는 기와다. 한옥지붕의 유연한 선을 만드는 게 마루기와다. 용마루는 지붕 등성 부분, 내림마루는 용마루에서 지붕 중간까지 내려온 부분, 추녀마루는 내림마루 밑에서 추녀 끝까지 내려온 부분으로 나뉘며, 모양에 따라 용마루(종마루), 내림마루(합각마루), 추녀마루(귀마루), 박공마루 등으로 구분한다. 한옥의 건축미를 잘 나타내는 마루는 치미(망새), 영두, 귀면기와, 잡상 등을 이용해 장식한다. 망새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끝에 부착하는 기와로 화재를 막는다는 뜻에서 용두龍頭, 토수吐首 등을 부착하거나 재앙을 막는다는 뜻으로 귀면와鬼面瓦, 취두鷲頭를 부착하기도 한다. 용두와 취두는 궁궐 등 중요한 건물의 지붕마루를 장식하는데 사용했다. 일반 가정집에서는 망와라 하여 암막새를 세워 장식했다. 특수기와특별한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기와다. 예컨대, 창덕궁 대조전 등 용마루가 없는 부분을 덮기 위해 사용한 곡와曲瓦 또는 궁와弓瓦, 모임지붕처럼 여러 지붕의 끝이 모인 꼭짓점을 가리기 위해 사용한 절병통節甁桶 같은 것이다. 영국 점토기와 주택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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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의 멋과 매력을 좌우하는 '기와' - 전통 기와에서 현대식 개량기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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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실내 정원을 더욱 빛나게, 점경물 무엇을 어떻게 고를까
- '굴곡을 이용해 작은 산을 만들고 계곡을 놓는다.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은 물줄기를 타고 물레방아를 거쳐 호수에 떨어진다. 주위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자태를 뽐내고 각종 식물이 주변을 감싼다.' 최근 실내 정원의 화두는 자연이다. 따라서 실내 조경도 야생의 자연을 실내에서도 그대로 접하도록 하는 데 맞춰져 있다. 하나의 작은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조경 소품들을 모아봤다. 제품 협조 가든뷰 원형 수반 물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며 선녀 수반, 사각 수반 등 다양한 형태의 제품이 출시되고 있다. 초가집 시골 자연의 향취를 느끼도록 다양한 소재들이 이용되는데 초가집도 그중 하나다. 이외에 원두막, 정자, 기와집 등도 시중에서 접할 수 있다. 석등 자연의 풍취를 표현하기 위한 소품으로 있는 그대로 사용하거나 안에 등을 넣어 조명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맷돌 분수맷돌 모양으로 된 분수 모터를 통해 물을 위로 올리면 자연스럽게 물이 입구 쪽으로 모여 떨어진다. 표주박입구가 꺾인 것, 그렇지 않은 것 등 형태는 다양하다. 나무 물줄기 물레방아, 분수 등으로 물이 흐르도록 하는 수경 제품. 물의 흐름을 유도하고 계곡과 유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물레방아 방아 지름이 20㎝부터 2m까지 다양하다. 만약 물을 담을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5∼10㎝ 되는 높이에 물레방아를 담고 속에 투명 호스로 모터와 연결하면 사용할 수 있다. 돌, 나무 등의 재질로 구성된 제품이 있다. 개울 소(65×23×12㎝), 중(85×40×18㎝), 대(130×60×24㎝)로 나누며 우레탄 재질로 되어 있다. 개울과 함께 물과 관련된 제품은 포터와 물확(수반)이 필수다. 울타리 화단이 없는 경우 그 경계용으로 이용한다. 형태는 라운드와 일자형 두 가지로 원하는 모양으로 정원을 만들 수 있다. 나무로 된 울타리의 경우 원기둥 사이마다 줄로 연결되어 있다. 세울 때 기댈 수 있는 벽이 있으면 좋으며, 화단을 만들어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면 더욱 튼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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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실내 정원을 더욱 빛나게, 점경물 무엇을 어떻게 고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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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엄마의 품, 김혜련 작가의 집과 밥
- 집을 가꾸고, 밥을 해 먹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존재의 근원이라는 김혜련 작가. 특히, 집이란 따스함과 받아들여짐의 상징으로서의 공간, 갓 태어난 아기같이 천진한 잠을 잘 수 있는 깊고 원초적인 공간이라고 말한다. 방황하던 그녀를 ‘일상’이라는 보금자리로 이끌어준 경주 집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글 이수민 기자 사진 김혜련 작가(경주 집), 박창배 기자(상주 집) 취재협조 서울셀렉션 집은 물리적, 정신적 쉼터김혜련 작가를 만난 곳은 경상북도 상주의 한 농가였다. 경주에서 10여 년간 살다, 함께 살고 있는 반려자의 고향인 상주로 얼마 전 이사를 했다. 그녀는 본디 서울 한복판에서 일을 하고 살았던, 도시 사람이다. 그러다 40대 후반 어느 날, 도시에서의 사회적 지위와 물질적 혜택을 모두 내려놓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4년간 시간을 보내고 내려와 경주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살았다. 방황하던 자신을 붙잡아 줄 곳이 경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 생활의 기본적 요소로 입는 것(衣), 먹는 것(食,) 사는 곳(住)을 꼽는다. 그중 주住는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말한다. 집이란 누구에게나 몸과 마음을 편히 쉬게 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자 정신적 쉼터다. 김혜련 작가에게는 더욱 그랬다. “지인을 몇 번 따라와 본 경주는 아름다웠어요. 시끄러운 자본주의 한가운데에서 천년의 침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고분과 그 위에 자라고 있는 키 큰 소나무, 작은 둔덕 같은 곡선의 무덤가에서 온화함이 뿜어져 나왔어요. 내면의 황량한 자리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가는 게 느껴지더군요.” 김혜련 작가는 방황하던 자신의 영혼을 고요히 눕히고 치유할 곳으로 경주를 선택한 연유를 말하며, 100여 년 된 고택을 고치며 살게 된 경주 집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혜련 작가는 백 년 된 낡은 고택의 원형을 유지해 고쳤다. 경주 집 수리는 시멘트 담 대신 쌓아올린 흙돌담과 나무 대문으로 마무리했다. 경주의 남산 마을당시, 살 지역을 경주로 정했지만 마음에 드는 집 찾기는 쉽지 않았다. 김혜련 작가는 집이 마음에 들어도 마을이 편안하지 않으면 그 집이 안온하기는 어렵기에, 마음에 드는 마을을 정하고, 그 안에 있는 집을 찾기로 기준을 잡았다. 그러다 경주의 ‘남산마을’을 만났다. 남산 아래 칠십여 호가 있는 넉넉하고 큰 마을이었다. 낮고 단단한 기와집, 작은 ‘촌집’들이 넓은 산자락에 여유 있게 모여 있는 마을이었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되기도 한다 하니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안온한 땅이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본인이 찾던, 삶의 황량함을 품어줄 장소라 확신했다. 그러고는 마을 안에 한 할머니가 살다 내놓은 낡은 고택을 냉큼 계약했다. “고택을 다시 살려내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젊은 날의 혈기가 담긴 어린 생기가 아닌, 희로애락을 겪어낸 시간의 두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생기를 말이죠.” 집을 고치는 방향은 분명했다. 최소한의 개조로 시간의 퇴적층을 유지하는 것이다. 백 년 된 집을 고칠 목수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새집을 지을 목수는 많았지만, 헌집을 고쳐줄 목수를 찾는 건 쉽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마침 동네에 낡은 집을 원형 그대로 살려 잘 고쳐놓은 집이 있어, 그 집을 고친 목수를 소개받았다. 경험이 있던 목수라 일이 수월할 줄 알았는데, 과정은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십여 년 목수 일을 한 탓이겠지만, 자기 고집 대로였다. 그렇게 애를 먹이다가도 목수는 가끔 명언을 해서 즐겁기도 했다. “이런 헌 집을 고치는 일은 손바느질 같은 거예요. 한 땀, 한 땀 하는 거지. 새 집 짓는 거야 재봉틀로 드르륵 박는 것처럼 쉽지, 쉬워.” 오랜 세월 낀 먼지를 물에 불리고 칫솔로 문살을 닦는 일은 김혜련 작가가 맡았다. 창밖으로 작지만 정겹고 아늑한 마당이 보인다. 경주 집을 고치면서 호사를 부린 것은 벽지였다. 문경의 무형문화재 한지 장인이 만든 한지를 발랐다. 백 년을 지탱해준 집에 대한 감사의 선물이었다. 벽지로 사용한 문경 무형문화재 한지 장인이 만든 한지는 비단보다 더 부드럽고 우윳빛보다 투명한 밝은 빛을 띤다. 바닥은 콩댐을 했다. 한 번 바르고, 불 때면서 말리고, 다시 바르고 또 닷새 말리고를 다섯 번 반복했다. 김혜련 작가는 좋은 사람들 불러서 밥 먹고, 정원 가꾸고 하는 일상을 즐긴다. 백 년 된 집철거 작업이 시작됐다. 시멘트로 온통 덧댄 창고들을 철거하고 마당에서 시멘트를 걷어냈다. 집은 원형 그대로의 작고 소박한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있던 나무 기둥들에서 칠을 벗겨냈다. 그러자 오래된 나무 특유의 살결이 햇빛 속에 드러났다. 부엌의 그을음 낀 서까래를 닦는 작업은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을음을 걷어내자, 검은 살결이 중생대 거대한 동물의 뼈처럼 단단하고 아름답게 드러났다. 나무는 그을음이 배면 잘 썩지 않는다고 한다. 안방과 건넌방의 천장에 쳐놓은 낮은 방장을 걷어내니 천장에서 쥐똥이 우수수 떨어졌다. 서까래 사이사이에 드러난 부분은 다시 황토로 발랐다. 나무에 낀 오래된 때를 조심스럽게 닦아내자 종도리에 흐릿하게 상량식上梁式(집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종도리를 올릴 때 고사를 지내는 의식) 때 쓴 글자가 보였다.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집이 지어진 해와 날이 적힌 글자가 있었다. 집은 191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집은 험한 세월을 살아낸 생존자, 존귀한 존재였다. 경외심으로 저절로 옷깃이 여며졌다. 집을 가꾸고, 그 안에서 밥을 해먹는 평범한 일상이 몸과 정신을 가다듬고 단련하는 힘이라 말한다. 집을 고치다집 수리의 첫 번째 원칙이었던, 집의 원형을 유지한다는 원칙을 깨고 편의 위주로 생각한 건 부엌과 화장실이었다. 편리한 부엌과 화장실은 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었다. 부엌은 넓히고 서쪽으로 큰 창을 냈다. 크고 확 트인 부엌을 만들었다. 싱크대나 기타 부엌 시설들을 신경 써서 환하고 견고한 것들로 들였다. 원한 대로 환하고 쾌적한 부엌을 만들었다. 평생의 ‘괴로운 밥 짓기’를 ‘즐거운 밥 짓기’로 바꾸기 위해 최대한 기분 좋은 환경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을 고치는 일 중에서 직접 한 것은 ‘문 닦기’와 ‘콩댐하기’였어요. 한옥엔 문이 많아 일도 많았죠. 얼마나 오랜 세월 먼지가 끼었는지, 물을 뿌려서 불리고 칫솔로 문살 사이사이를 닦는 일을 며칠 동안 계속했어요.” 이렇게 집을 고치면서 김혜련 작가는 오래된 것들이 지닌 단단한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생기, 소멸해가는 것들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집에 호사를 부린 것은 벽지였다. “백 년을 지탱해준 집에 대한 선물이었어요. 문경의 무형문화재 한지 장인이 만든 한지였죠. 비단보다 더 부드럽고, 우윳빛보다 투명한 밝은 빛을 띤 한지로 도배를 했어요. 집은 옛 자태를 찾은 듯 은은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어요.” 상주 집도 곳곳을 고쳐 살고 있다. 주방은 벽을 뚫고 나무틀을 짜 넣은 다음 유리를 대어 바깥 풍경을 그림처럼 담아 즐기고 있다. 손수 담근 된장과 직접 재배한 배추, 갖은 뿌리채소를 우려 맛을 낸 국물 요리로 차린 보양 밥상. 평범한 농가이지만, 사람의 손끝으로 만들어진 식탁, 도마, 격자문살 창틀에서 따뜻하며 단아함이 느껴진다. 대문 달고 흙돌담 쌓아 완성방바닥도 한지로 발랐다. 한지로 장판을 하려면 ‘콩댐’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두터운 한지에 콩과 생들기름을 7 대 3의 비율로 섞어 바르는 것이다. ‘문경 한지’에서 콩댐하는 법을 배웠다. 반드시 생들기름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냥 들기름을 쓰면 기름에 절어서 못 쓴다더군요. 색도 너무 짙어져서 은은한 노란 빛깔을 얻을 수 없고요. 평생 기름을 짰다는 상주 은척에 있는 한 할아버지에게 부탁해 생들기름을 짜고, 불린 콩을 곱게 갈아 섞어서 고운 면 주머니에 넣고, 하라는 대로 방바닥에 굴렸어요.” 한 번 바르고 닷새 동안 불 때면서 말리고, 다시 바르고 또 닷새를 말리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다섯 번의 콩댐을 했다. 집 수리의 마무리는 담을 쌓고 대문을 다는 일이었다. 무너진 시멘트 담 대신 집과 주변 자연이 어울리는 담을 쌓고 싶었다. 집 뒤쪽에 남아있는 오래된 흙돌담과 어울리게 황토와 돌로 담을 쌓았다. 나지막하게 쌓아 올린 담은 집과 잘 어울렸고, 마을 골목과도 제법 잘 어울렸다. 상주에 살면서 자연의 야생적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있다. 직접 배추도 키우고, 시래기도 말리면서 일상을 보낸다. 고택과의 첫날밤9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때쯤 집은 아름답게 복원됐다. 김혜련 작가는 아무런 짐 없이 이불 한 채만 들고 첫날밤을 맞으러 집에 갔다. “집에 들어섰을 때 넉넉하고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이 나를 품고 있는 듯 안온했죠. 포대기에 싸여 엄마 품에 안긴 아기 같은 기분 같았어요. 그때 내가 그 낡은 집을 왜 그리 좋아했는지, 진정한 이유를 알겠더군요. 무의식적으로 ‘집의 모성’에 기대고 싶었던 거 같아요.” 작가에게 ‘집’은 그녀 안의 아이가 찾던 엄마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라면서 엄마의 사랑이 늘 부족하다 느꼈다. 그래서 그녀 내면의 아이는 집을 지음으로써 엄마를 찾고 그 안에서 천진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게 김혜련 작가에게 집은 부재했던 모성이고 몸 자체이기도 했다. “물론 백 년 된 집이니 집을 다 고치고 난 뒤에도 계속 고쳐야 할 부분들이 생겨났어요. 이곳을 고치면 저곳을 고쳐야 하고 저곳을 고치면 고친 이곳을 다시 고쳐야 했죠. 그렇게 집은 저와 함께 늙어갔어요. 다만, 늙음은 퇴락이 아니라 원숙함임을 받아들이면서요.” 서재에는 책을 좋아하는 김혜련 작가를 위해 반려자가 직접 짜준 책장이 벽을 두르고 있다. 책장 칸칸이 경주 고물상에서 구입한 이색 골동 장식품들이 눈에 띈다. 침실. 상주 집은 한옥이 아닌, 평범한 농가다. 반려자는 한옥을 좋아하는 김혜련 작가를 위해 올봄부터 작은 한옥 한 채를 지을 계획을 세웠다. 집을 통해 찾은 평안“물질로서의 집, 자본주의 시각으로의 집만 생각했던 적도 있었죠. 그래서였는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지만 외로웠고 결핍을 느꼈죠. 다행스럽게도 집을 가꾸면서 이 오래되고 진부한 일상이 내 몸과 정신을 가다듬고 단련해 강하게 만드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김혜련 작가는 다른 사람들도 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한다.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품어주는 공간으로 집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밥해 먹고 집 가꾸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경주 집은, 엄마 품이 그리워 매일 눈물짓던 지인에게 건네주고, 이제는 그곳에서부터 함께한 반려자와 삶의 터전을 상주로 옮겨 생활하고 있다. “경주는 고도의 아름다움이 내재돼 있지만, 사람의 손길이 계속해서 닿는 곳이죠. 반면에, 상주는 자연의 야생성이 아름다운 곳이에요. 투박한 듯 펼쳐져 있는 자연 속에서 생생한 정기를 느낄 수 있죠. 게다가 좋은 사람이 많아요. 귀농 귀촌을 하러 온, 가난하지만 건강한 젊은이들이요.” 그녀는 상주에 살면서 달라진 게 있다고 한다. “전에는 만났다가 헤어질 수도 있다 여겼는데, 이제는 만남이 소중하다는 것, 관계가 소중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그래서 좋은 사람들 불러서 밥도 해먹고, 정원도 가꾸고, 이런저런 모임을 해요. 이 상주 집에서도 말 그대로 일상을 살고 있는 거죠. 그리고 있는 그대로 주어진 삶, 오는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살고 있어요. 결국 집 안에서 일어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나를 강건하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거실은 반려자가 직접 나무로 짠 식탁, 독서대, 미닫이문으로 채웠다. 따뜻하며 정갈한 분위기가 멋스럽다. 김혜련 작가의 『밥하는 시간』일상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삶을 치유하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20여 년간의 교사 생활을 접고 경주 남산마을에서 백 년 된 집을 가꾸고, 밥을 해먹으며, 자연과 만나는 일상을 담았다.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을 들여다보고 그 진짜 의미를 회복하고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삶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서울셀렉션 펴냄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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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엄마의 품, 김혜련 작가의 집과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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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걷다 지치면 “안트레 옵서예~” 제주 ‘안트레’
- 올레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7코스에 인접해있는 '안트레'는 이름뿐만 아니라 외관도 독특하다. 100년이 넘은 초가를 리모델링해 만든 펜션이 지나가는 이의 발을 붙잡는다. 어디 한 곳 흠 잡을 데가 없다. 5남매 자녀들과 함께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가꿨다는 펜션지기 고신자(62세) 씨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랑과 정성으로 만들어진 '안트레'는 돌담에 피어난 동백꽃마저 사랑스럽다. '안트레'란 '안으로'라는 의미를 가진 제주방언이다. 또한 인정 넘치는 제주도민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 안트레'라는 펜션 이름은 가족공모를 통해 얻었다. 고신자 씨는 슬하에 5남매를 뒀다는 점을 활용해 상금 10만 원을 내걸고 가족 내 이름 공모를 실시했다. 치열한 고민 끝에 결국 큰딸의 의견대로 '안트레'라는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서귀포시 법환동에 위치한 이 펜션은 오픈한 지 아직 1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같이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종종 지인이 다른 이에게 펜션을 구경시켜주겠다며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지만 투숙객 때문에 정중히 거절할 정도다.이처럼 큰 인기를 얻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펜션지기의 넉넉한 인심과 정성 때문이다. 큰딸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유기농으로 키운 밀감을 "한번 맛보라"며 나눠주는가 하면 카페에서 파는 음료수 하나라도 가족의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야 판매를 시작한다. 고신자 씨는 100년이 넘은 이 초가가 곧 허물어질 것이 너무 안타까워 두 동의 구옥을 구입했다. 마침 올레 7코스가 지나가는 길옆이라 초가를 리모델링해 펜션으로 꾸미게 된 것. 직접 나무를 심고 돌을 쌓으며 정성을 쏟았다. 원래 '안트레'는 가족의 공간으로, 아파트에서 답답함을 느꼈던 펜션지기가 별장으로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샌가 이러한 공간을 가족만 나누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방 2칸, 15평 초가의 구조를 그대로 살렸다. 초가 본연의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또한 노출된 서까래 아래 놓인 현대식 물건들은 묘한 조화를 이룬다. 편의를 위해 부엌을 안으로 들였고 집기는 현대식으로 구비해 놓았다.전망 또한 아름답다. 부엌에서는 법환포구가, 침실에서는 제주도 특유의 밀감 밭이 바라보인다."여기 침실은 창문에서 보이는 밀감 밭이 포인트예요. 10월에서 11월이 절경이지. 밀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다 허물어가는 초가를 이렇게 멋들어지게 리모델링해 놓으니 동네 사람들도 좋아한다. 10명이 넘는 손자, 손녀도 여기서는 마음껏 뛰놀 수 있다. 특히 외국 사람들은 감탄을 한다. 심지어 호텔보다 더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정성으로 지은 갤러리와 카페객실과 마주한 한옥 카페는 일종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어 투숙객 외에도 누구에게나 만남의 장소로 열려있다. 기와집을 리모델링해 한옥의 아름다움을 살린 카페는 좌식으로 꾸몄다. 커피와 음료, 감귤 즙이 들어간 강정까지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편안히 앉아서 즐길 수 있다. 카페는 둘째딸인 오경아(38세) 씨 전담이다. 카페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또한 눈에 띄는데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멋을 더했고 기존의 물건들과 새로 구입한 소품들을 조화롭게 활용했다. 전등 하나부터 탁자까지 어디 하나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다."큰언니가 머그에도 상징을 넣었어요. 조그마한 동그라미 3개는 제주도 돌담을 상징하고, 그 밑에 그려져 있는 두 개의 수평선이 바로 올레길을 상징해요."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럴듯하다. 머그에 새겨질 문양까지 세심하게 생각한 그들의 정성이 가히 놀랍다.'안트레'에서 유일하게 콘크리트로 신축한 건물은 갤러리이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손님을 반겨주는 건물이다."카페 규모가 작아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카페에 손님이 꽉 차면 멀리서 오신 손님들이 있을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이 갤러리를 만들었죠. 손님들을 불편하게 해드릴 순 없었어요."이렇게 넉넉한 인심과 한결같은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는 펜션지기에게도 한때 아픔은 있었다. 고신자 씨는 '사연 많은 집안'이라며 고달팠던 가족사를 슬쩍 꺼냈다. 교육계에 몸담고 있던 남편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남편이 교장으로 발령받으려는 찰나였어요. 그때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죠. 어떤 일이든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에 이 일, 저 일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그러다 레스토랑을 시작하게 됐죠."지금도 여전히 병가에 있는 남편을 간병인 한 번 쓰지 않고 몸소 돌봤다. 그렇게 지낸 지 꽤 오래다. " 아마도 남편이 건강했으면 아무것도 안했을 것"이라는 펜션지기의 말마따나, 그런 내력이 지금의 '안트레'를 만들었을 것이다.하늘하늘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그리고 소리. 카페와 펜션사이 넓은 흔들의자에 앉아 자연을 만끽하다보면 온갖 스트레스는 멀리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안트레'의 정원은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눈에 쏙 들어온다. 여행자들에게 편안한 휴식과 제주도의 참맛을 보여주는 '안트레'. 인간미가 사그라지는 시대에 '정情'이란 무엇인지 새삼 느끼게 한다. 글 홍예지 기자 사진 황예함 기자 취재협조 안트레 064-738-7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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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걷다 지치면 “안트레 옵서예~” 제주 ‘안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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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Garden(1)] 우리 집 정원을 한눈에 연못과 어우러진 정자의 멋
- 정원 만들기는 나무와 꽃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욱 가까이 느끼려는 이들의 소박한 꿈에서 비롯한다. 그 꿈을 실현하는 공간인 정자는 정원 만들기의 화룡점정畵龍點靑에 속한다. 올 여름 집의 연못이나 계곡 근처에 정자를 만들어보자. 정자 밖으로 펼쳐진 연못과 계곡 풍경에서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을 맛볼 것이다.글 서상신 기자 자료협조 및 도움말 초원조경개발 054-335-6120 www.초원조경.kr (주)아름 054-337-3399 www.areum.co.kr 백제의 미소 041-663-0890 www.bjsmile.com예로부터 선조들은 강이나 산, 계곡 등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자연을 감상하며 풍류를 즐겼다. 정자는 주로 수려한 경치를 관망하거나 분위기가 한적하여 휴식을 즐길만한 곳에 놓였다.'동산 안에서 폭포를 마주보는 곳에 시내를 가로질러 정자를 세운다. 이 정자는 구석진 곳을 피하여 훤히 트이게 짓고, 그 좌우에 장송長松과 괴석을 배치한다. 여름날 정자에 오르면 절로 시원한 기분이 드니 굳이 더위를 물리칠 필요가 없다.' -<금화경독기>전원주택 울타리 안의 정자 역시 집과 정원의 전망을 아우르는 위치에 짓는다. 집 안에서 내다볼 때 시선이 정자에 가로막히지 않아야 한다. 집 주변 산이나 강 혹은 정성스레 가꾼 정원과 텃밭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놓는다. 정자는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그 형태가 달라진다. 그 중 연못이나 계곡 같은 수변 공간에 놓이는 정자는 자연을 감상뿐만 아니라 여름철 물을 통해 느끼는 청량감으로 배 이상의 효과를 본다.연못 주변에 정자 만들기연못 같은 수변 공간에 정자를 놓을 때는 몇 가지에 주의한다. 정자는 목재가 주 재료이기에 물에 닿지 않게 한다. 목재가 물을 많이 함유하면 강도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심지어 썩을 우려가 있어 수변에 정자를 놓을 때 즉, 주춧돌이 물에 잠기거나 걸치면 일반 주춧돌보다 키가 월등히 큰 장주초석을 쓴다. 석재 중 화강암이 많이 쓰이는데 결정이 아름답고 내구성이 우수하여 주춧돌로 적합하다. 또한 정자를 만들 목재로 습기에 강하고 인체에 유해한 CCA가 아닌 ACQ 방부목을 사용한다. 방부목은 수분, 버섯곰팡이, 해충으로부터 목재를 보호하고자 방부액을 가압 처리한 목재이다. 시공 후 오일스테인으로 도장하는 것이 좋다. 스테인은 원하는 색상을 균일하게 내고 나무 속으로 최대8mm까지 스며들어 습기나 곰팡이로부터 보호해 준다. 그 중 오일스테인은 침투성이 좋고 퇴색이 적어 도장용으로 많이 쓰인다. 도장 후 2~3년에 한 번씩 목재에 오일스테인을 칠하면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 정자를 수심이 깊은 계곡이나 연못 근처에 놓을 경우, 안전을 고려하여 난간을 높이는 것이 좋다.사례충남 서산 '백제의 미소' 펜션, 기와형 팔각정자충남 서산에 위치한 펜션 '백제의 미소'는 황토와 소나무 그리고 돌만으로 지은초가집과 기와집이 작은 마을을 이룬다. 산의 절반을 절토해 대지로 조성하고 ,그 아래로 많은 돌을 쌓아 2단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을 두루 내려다보도록 마사와 맷돌로 담을 쌓고 소나무와 황토로 만든 기와형 팍각 정자를 놓았다.충북 진천 귀틀집의 사각 정자집과 정자 모두 건축주 직영으로 통나무와 아스팔트 슁글로 마루형 사각정자를 만들었다. 집과 같은 건축 재료를 사용해 전체적으로 통일감을 주고 정자 옆 자그마한 연못에 분수를 설치하여 시원함을 더했다. 정자 안에 해먹을 메어 놓아 낮잠과 독서 등 다양하게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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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Garden(1)] 우리 집 정원을 한눈에 연못과 어우러진 정자의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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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범의 펜션 이야기] 지역특색 살려 차별화 전략에 성공한 서산 백제의 미소
- 서산에 특이한 펜션이 있다는 얘기를 본지本誌 독자들로부터 들었다. 펜션 ‘백제의 미소’는 그 이름 탓에 신비한 기대감을 던져주었다. ‘백제의 미소’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64호)이 던지는 미소만큼이나 은밀하다고 할까. 서울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해대교를 지나 서산 나들목까지 1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나지막한 산과 들을 바라보며 32번 국도를 타고 덕산 방면으로 5분 정도 달리면 해발 670여 미터의 가야봉을 중심으로 원효봉과 일락봉을 거느리고 개심사와 수덕사 등 천 년 고찰과 유적들을 품은 서산 가야산 줄기가 펼쳐진다. ‘백제의 미소’는 그 산자락 아래 고풍저수지 곁에서 고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순전히 서산 황토를 이겨서 지은, 벽 두께가 무려 30∼40센티미터나 되는 초가집과 기와집이 즐비하게 자리한 ‘백제의 미소’에 이르면 마치 천 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80년은 족히 된 안면도 해송들을 들여와 다듬어 지은 11동의 건물이 나지막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는 ‘백제의 미소’는 딱히 어떤 전통 건물 양식이라고 논하기에 앞서 순수 토종 건축물로 백제시대 사람이라면 이렇게 짓고 살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게 한다. 백제 고을을 재현한 문화 체험의 장 펜션지기 서명석(50세) 씨는 20여 년을 도금 분야 제조업 공장을 경영했다. 펜션과는 아무런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그의 마음 가운데서는 오래 전부터 시골생활에 대한 꿈이 싹텄다. 서산이 고향으로 이미 8년 전 가야산 아래 2만 평의 부지를 구입하고 그 꿈이 구체화될 귀향의 시간을 기다려온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현실화됐다. 이 사고로 중상을 입어 1년을 입원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한 끝에 인생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고 가야산 밑에 펜션을 짓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떤 펜션을 지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만 했다. 서명석 씨는 이미 구입한 펜션 부지의 조건과 주변 펜션들의 상황을 따져보았다. 서산에서 가까운 태안해상국립공원을 중심으로 안면도 지역에는 이름난 펜션들이 즐비하다. 가야산 일대의 관광지에도 펜션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고풍리 일대는 바다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관광지가 인접한 곳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산골에 불과하다. 그런 이유로 무엇인가 특별하지 않으면 차별화할 수 없고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그러나 그 특별함은 이미 마음 가운데 자리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면서 느낀 옛 정취를 그대로 재현하고 싶은 욕구였다. 고향을 다시 짓는 즐거움을 통해 펜션사업을 하자는 것이었다. 서명석 씨는 생각을 곧바로 실행에 옮겨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과 계획은 ‘백제의 미소’라는 펜션 이름 속에 모두 들어 있다. 백제 문화 유적이 많은 이 지역의 특색을 살려서 옛 전통 마을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무엇을 어디에 지을 것인가를 꼼꼼히 설계해 놓고 먼저 토목공사에 들어갔다. 산의 절반을 절토해 대지를 만들고 마당을 준비하고 오솔길과 정원을 준비했다. 또한 많은 돌을 쌓아 담과 층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소나무를 심어 마을 모양을 갖추어 갔다. 이러한 작업에만 2년 가까운 시간과 20억이라는 비용이 들었다고. 그러고 나서 비로소 11동의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집들은 황토와 나무와 돌이라는 세 가지 재료로만 지어졌다. 벽은 순전히 흙만을 이겨 쌓아서 벽 두께가 무려 70센티미터나 되는 곳도 있다. 바닥은 구들장을 놓아 만든 전통 온돌바닥이다. 그래서 이용객들은 스스로 장작을 가져다가 아궁이 불을 지피는 수고를 해야 한다. 이렇게 직접 불을 때는 방은 한 마디로 절절 끓는다. 그래서 황토 바닥에 등을 지지고 나면 개운한 찜질 효과를 보게 된다. 천장은 서까래 위에 대나무를 얽어 망을 만들고, 그 위에 황토 흙을 두껍게 발랐다. 여기에 기와나 볏짚을 얹어 집을 완성했다. 그는 이제 흙집 짓기에는 전문가가 다 됐다고 한다. 집 짓기는 인허가가 어렵지 흙을 이기고 만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한다. 서산 명소로 꼽히는 ‘민속촌’으로 확장할 터 ‘백제의 미소’가 고객들에게 미소를 던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 이제 6개월 남짓 영업한 결과 펜션지기로서는 대만족이라고 한다. 전통 흙집을 테마로 세운 것이 적중해 이용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그래서 주말이면 ‘백제의 미소’에는 미소 정도가 아니라 온통 웃음이 터진다고. 수도권, 호남권, 충청권에서 온 고객 30여 명이 어울리는 잔칫날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온 동네가 한바탕 떠들썩해 사람 사는 맛이 난다는 것이다. 대부분 가족 단위로 온 고객들은 삼삼오오 마당에 나와 서로 통성명을 하고 세상사는 얘기도 나누며 저마다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이 펜션 주변에는 백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사적지들이 30분 거리에 둘려 있다. 수덕사, 한국고건축박물관, 충의사, 해미읍성, 삼존마애불상, 보원사, 개심사 그리고 용현자연휴양림 등이 그것이다. 지금 한창 공사 중인 가야산 순환 관광도로가 개통되면, 이 지역을 찾는 관광 인구가 증가하고 펜션을 찾는 고객도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펜션지기 서명석 씨의 꿈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제 전원카페, 주막집 같은 먹거리 장터, 우물터, 물레방앗간 그리고 수영장, 민속박물관과 전시장 등을 준비 중이라고. 그야말로 서산을 대표하는 작은 민속촌이 세워질 모양이다. 이미 7채의 초가집과 4채의 기와집만으로도 큰 마을을 이루고 있는 ‘백제의 미소’는 펜션의 규모를 넘어서 기업형 콘도의 모습을 갖추어 가는 셈이다. 50억의 개발비가 들어갔지만 아직도 몇 십 억의 투자를 더 감안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백제의 미소’가 백제 문화를 체험하는 현장이 되려면 은근한 미소의 서비스가 보장되는 조용하고도 은밀한 휴식공간으로 조성돼야 한다고 본다. 대부분 인근 도시에서 방문하는 가족 단위 이용객들을 위해 펜션의 본질적 서비스가 잘 구현되는 운영 시스템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당초의 펜션 테마를 지켜 가는 방법이다. 펜션지기는 이제 서비스에 최선을 다해 고향의 맛과 멋을 그리워하는 도시 고객들에게 고향의 모든 혜택을 누릴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고 말한다. 은근한 백제의 ‘미소’를 오랜 추억으로 간직하도록 인정과 사랑이 소박하게 묻어나는 펜션으로 자리잡길 바란다고 강조한다.田 글 김창범 ·사진 윤홍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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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범의 펜션 이야기] 지역특색 살려 차별화 전략에 성공한 서산 백제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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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EDITION 환경의 역습! 건강 전원주택으로 막는다2]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 흙집은 원시 주거인 움집(竪穴住居)에서 출발하여 70년대 말 시골에서 흔히 보았던 초가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 전통 주거 문화의 표상表象이다. 이러한 흙집은 1970년대 불어닥친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주택 개량 사업으로 모두 헐리고 철골과 시멘트로 탈바꿈한 현대 가옥들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흙집 주거의 역사를 단절시킨 주거 문화의 최대 실패작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도 지금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회귀 본능과 함께 자연 친화적인 현상이 발동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살아 온 시멘트 집이 유해성 물질을 내뿜으며 각종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시멘트 집에 대한 거부 반응과 함께 흙이 인체에 이롭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면서 흙집을 선호하는 경향이 차츰 늘고 있다. 이렇듯 지금은 도시인이 흙집을 짓고 살고자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시기다. 수천 년을 이어내려 온 우리 선조들의 삶의 애환이 서린 서민 주거인 흙집이 사라진 주 요인은 무엇일까? 여기에서는 주거 생활의 불편함을 초래했다는 시각에서 접근해 보았다. 하여 21세기 흙집은, 과거 흙집의 불편함을 현대화된 건축 기술로 풀어냄으로써 현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전통 흙집과 현대 흙집의 차이점 전통 흙집이란 70년대 이전의 주거 건축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전통 건축 기술인 목구조로 뼈대를 결구結構하여 내력벽과 비내력벽을 힘살대(직경이 20㎜ 정도의 가는 나무를 인방과 인방 사이에 세로로 약 40㎝ 간격으로 고정시킨 벽체의 뼈대)를 박아 대나무 등으로 외를 엮어 거섶(볏짚을 약 6㎝ 정도 되도록 짧게 썰어 넣는 것을 말함) 등을 넣어 반죽한 흙으로 맞벽을 쳐 만든 토벽집을 전통 흙집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전통 흙집은 지붕의 소재에 따라 기와집, 초가집, 굴피집이라 부르는데 상류 주택에서는 기와집을 선호했으며, 서민 가옥은 대부분 초가였다. 당시의 와가瓦家나 초가 모두 평면 칸잡이가 ‘一’자형 또는 ‘ㄱ’자형, ‘田’자형 서너 칸으로 부엌과 큰방, 작은방, 대청과 툇마루로 구성됐다. 방과 부엌과의 동선動線이 분리되어 툇마루를 방과 부엌 사이를 오르내리는 접속 공간으로 활용함으로써 주거 생활의 불편함을 초래한 평면 구조다. 구조재로 12센티미터 굵기의 나무를 사용하여 벽체 두께가 8∼10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아 흙벽의 주요 성질인 축열 효과(흙집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는 말로 외부 온도 차이에 쉽게 반응하지 않는 것을 말함)를 얻지 못함으로써 단열재의 역할 저하로 외풍外風이 심했다. 또한 목재와 흙의 친화성이 떨어져 틈 벌어짐을 해결하지 못한 것도 전통 흙집의 역사를 단절시킨 주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 현대 흙집은 전통 흙집에서 표출된 평면 구조와 단열성 등 많은 단점들을 보완해야만 아파트 문화에 물든 현대인이 쉽게 찾을 것이다. 현대식 흙집의 몇 가지 기본 구성을 살펴보자. 첫째, 평면이 침실과 주방·거실 등으로 실내 공간이 일체성을 보여야 한다. 둘째, 흙벽의 두께를 두껍게 하여 단열 효과를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흙벽의 두께가 최소 14센티미터 이상이라야 축열 효과가 나타난다. 벽 두께를 두껍게 하려면 이중二重 심벽치기 기술이 필요하다. 셋째, 기둥과 흙벽 사이의 틈 벌어짐을 방지하는 기술이다. 넷째, 지붕재는 자연과 가장 친화적인 기와나 너와·피죽 등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사정에 따라 흙집과 잘 어울리는 아스팔트 슁글 등의 소재 사용도 생각할 만하다. 흙집의 현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과 해결책 흙집은 시공비가 많이 든다 흙집하면 누구나 시공비가 많이 들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물론 전통 건축 공법인 사개맞춤식 한옥(기와집)은 목구조의 결구 방법에 따라 평당 500만∼800만 원이 든다. 하지만 현대식 평면 구조로 된 목구조 흙집은 건축 자재의 등급에 따라 다소 가격 변동은 있지만, 보편적으로 평당 300만∼400만 원이면 훌륭하게 지을 수 있다. 일례로 30평형대 흙집의 예상 건축비를 살펴보자( 참조). 앞의 에서 보았듯이 평당 3,000,000원대면 같은 평면 구조인 스틸하우스, 2″×6″ 경량 목조주택, 통나무주택, 콘크리트주택 등과 비교할 때 건축비에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흙집은 관리하기 어렵다 흙집은 갈무리를 잘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요즘은 목재의 방수, 방부, 방충재로 사용하는 오일스테인(Oil Stain)과 우드 키퍼(Wood Keeper) 등 좋은 제품이 시중에 많이 있어 관리 요령만 숙지하면 항상 새 집처럼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황토는 빗물에 약하다. 그렇다고 황토에 시멘트나 기타 화학 접착 물질을 혼합한 모르타르 등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흙집 바람을 타고 황토 관련 업체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검증되지 않은 제품들이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 물론 좋은 제품과 양심적인 업체도 있다. 그러나 일부 업체들에서 상술적인 제품을 판매하고 있어 소비자들에게 불신을 사고 있다. 사람들은 순수 황토 그 자체만으로 흙집을 짓기 원한다. 그러나 순수 황토로 흙집을 지을 경우 먼저 하자 발생을 생각한다. 그것은 흙벽의 갈라짐(Crack)과 빗물에 의한 깎임 등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들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갈라짐은 마감 미장 기술에서 다소 보완이 가능하다. 황토를 지장수 만드는 방법으로 앙금(물에 가라앉은 보드라운 진흙)을 만들어 부드러운 붓으로 벽면에 덧바르면 언제든지 흙벽의 하자를 보수할 수 있어 늘 새 집처럼 관리할 수 있다. 흙벽돌 무엇이 문제인가 흙집을 짓는 사람들은 주로 황토벽돌을 사용한다. 황토벽돌은 토련기(흙을 이는 기계) 공법으로 만들어낸 벽돌과 프레스 공법으로 찍어낸 벽돌이 있는데 두 제품은 차이가 많다. 순수 황토로 만든 토련기 공법은 압축 강도에 약한 것이 단점이며, 프레스 공법은 수분水分에 약한 것이 단점이다. 하지만 시중에는 이를 보완하고자 시멘트 등의 혼합 물질을 첨가하여 만든 황토벽돌이 많이 유통되고 있다. 그리고 600도씨 이상에서 소성한 황토벽돌도 있다. 이러한 흙벽돌은 인체에 유익한 미생물의 서식과 원적외선 방출량이 현저히 떨어진다. 예를 들면 자연 광물질인 흙(황토) 속에는 인체에 유익한 효소 작용을 하는 카탈라아제(노화 현상 방지 효소), 프로테아제(정화 및 분해 작용 효소), 디페놀옥시다아제(산화 환원 효소), 사카라아제(영양 효소) 등과 같은 미생물이 무수히 서식한다. 그리고 60도씨 이상 가열할 때 최대로 방출되는 원적외선은 인체의 혈류량을 증가시켜 신진대사 촉진으로 피로를 풀어 주는 역할을 돕는 건강 광선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인체에 유익한 미생물과 원적외선은 순수한 흙벽(거섶을 넣고 황토를 반죽하여 맞벽치기한 벽) 속에서 많은 양을 얻는 것이지 혼합 물질(시멘트나 수지)을 첨가한 제품에서는 미생물 서식은 기대하기 어렵고 원적외선 방출량은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목구조 흙집 자재 및 시공 전문가를 구하기 힘들다 전원에서 황토집을 짓고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대부분은 목구조 흙집에 대한 인지도와 신뢰성 부족으로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자재 수급에서부터 기술력 확보 등 목구조 흙집에 대한 노하우 부재를 염려하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목구조 흙집은 우리의 전통 건축 기술임에 틀림이 없다. 하여 건축 기술자(목수)의 선택은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시공사를 선택할 때에는 건축주가 원하는 흙집을 지을 수 있는지, 그 능력을 확인해야 한다. 다시 말해 흙집을 지은 실적과 건축 기술, 재정 능력, 축적된 노하우 등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목구조 흙집에는 먼저 질 좋은 소나무를 확보해야 한다. 소나무는 국산 육송이 제일이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량이 절대 부족하기에 가격이 다소 비싼 편이다. 그러나 캐나다 등지에서 생산되는 미송美松이 국내에 많이 수입되기에 목재(가재목) 구입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흙집의 최고 자재인 황토는 국내 매장량과 공급량이 충분하다. 다만 황토의 생산지가 지방마다 일부 한정되어 있어 구입 시 운반에 다소 어려움을 겪는 일이 있다. 필자는 황토 조달은 건축주가 토목공사를 할 때 자기 땅에서 나오는 흙을 분석하여 잡석雜石과 철분이 많이 혼합된 흙이 아니면 그 흙을 사용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만약 현장에서 확보된 흙이 점토질을 많이 함유한 흙일 경우 세사(가는 모래)를 일정량 혼합해서 사용할 수 있으며, 반대로 마사와 모래 성분이 많은 흙은 소석회를 일부 첨가하여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비 건축주를 위한 제언 필자의 한국전통초가연구소에는 많은 사람이 흙집 상담을 위해 찾아오는데 십중팔구 첫마디가 ‘평당 얼마에 지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문의한다. 건축에 문외한門外漢이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자주 쓰는 비유법이 있다. ‘자동차를 살 때도 무턱대고 한 대에 얼마 하느냐고 묻습니까?’ 똑같은 질문이다. 자동차는 차종에 따라 그리고 같은 차종이라도 배기량 및 옵션에 따라 가격이 각기 다르다. 그렇기에 자신의 경제력에 따라 차종을 선택하여 구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건축주는 경제력에 맞추어 맞춤식 건축을 해야 한다. 건축비는 대지 구입비와 건축비, 조경 공사비를 분리하여 순수 건축비를 산정해야 한다. 그리고 건축 후 추가로 드는 여윳돈도 계획해 놓아야 한다. 건축주들은 공통적으로 건축비는 저렴하게 잡고 집은 최대한 고급스럽게 지으려는 욕심을 부린다. 예를 들면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수십 번을 고쳐 그려 완성한 도면을 공사 중에 또 고치려고 한다. 물론 평생에 두세 번 지을 수 없는 집이고 보면 그렇게 욕심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한 욕심은 건축비와 비례하기에 조금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공사에다 견적을 의뢰하여 건축을 결정할 때 이것만은 참고하기 바란다. A사, B사, C사에서 받은 견적이 예를 들어 평당 250만 원과 300만 원, 350만 원으로 각각 다를 경우 건축주들 대부분은 가장 저렴한 회사와 계약을 맺는다. 이때 계약서에는 공사 범위를 명확히 명기하고 별도의 시방서를 작성하여 어떤 메이커의 자재를 사용할 것인지, 또 공정은 어디까지 마무리할 것인지를 기입해야 공사 후 상호 분쟁을 막을 수 있다. 시방서 없이 250만 원에 공사하겠다는 업체에 의뢰하여 건축한다면 업자는 250만 원에 준한 집을 지을 것이고, 건축주는 300만 원에 상당한 집을 지어 주길 원하므로 집이 완성되기 전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일어나고 만다.田 글 윤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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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EDITION 환경의 역습! 건강 전원주택으로 막는다2]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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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부르는 실내 정원III] 실내 정원을 더욱 빛나게 점경물 무엇을 어떻게 고를까
- '굴곡을 이용해 작은 산을 만들고 계곡을 놓는다.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은 물줄기를 타고 물레방아를 거쳐 호수에 떨어진다. 주위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자태를 뽐내고 각종 식물이 주변을 감싼다.'최근 실내 정원의 화두는 자연이다. 따라서 실내 조경도 야생의 자연을 실내에서도 그대로 접하도록 하는 데 맞춰져 있다. 하나의 작은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조경 소품들을 모아봤다. 제품협조 : 가든뷰 02-507-3500, www.gardenview.co.kr1.원형수반 : 물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며 선녀수반, 사각수반 등 다양한 형태의 제품이 출시되고 있다.2.초가집 : 시골 자연의 향취를 느끼도록 다양한 소재들이 이용되는데 초가집도 그 중 하나다. 이외에 원두막, 정자, 기와집 등도 시중에서 접할 수 있다.3.석등 : 자연의 풍취를 표현하기 위한 소품으로 있는 그대로 사용하거나 안에 등을 넣어 조명으로 활용하기도 한다.4.맷돌분수 : 맷돌 모양으로 된 분수 모터를 통해 물을 위로 올리면 자연스럽게 물이 입구 쪽으로 모여 떨어진다. 5.표주박 : 입구가 꺾인 것, 그렇지 않은 것 등 형태는 다양하다.6.나무물줄기 : 물레방아, 분수 등으로 물이 흐르도록 하는 수경제품. 물의 흐름을 유도하고 계곡과 유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7.물레방아 : 방아지름이 20㎝부터 2m까지 다양하다. 만약 물을 담을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5∼10㎝ 되는 높이에 물레방아를 담고 속에 투명 호스로 모터와 연결하면 사용할 수 있다. 돌, 나무 등의 재질로 구성된 제품이 있다.8.개울 : 소(65×23×12㎝), 중(85×40×18㎝), 대(130×60×24㎝)로 나누며 우레탄 재질로 되어 있다. 개울과 함께 물과 관련된 제품은 포터와 물확(수반)이 필수다.9.울타리 : 화단이 없는 경우 그 경계용으로 이용한다. 형태는 라운드와 일자형 두 가지로 원하는 모양으로 정원을 만들 수 있다. 나무로 된 울타리의 경우 원기둥 사이마다 줄로 연결되어 있다. 세울 때 기댈 수 있는 벽이 있으면 좋으며, 화단을 만들어 나무울타리를 설치하면 더욱 튼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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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부르는 실내 정원III] 실내 정원을 더욱 빛나게 점경물 무엇을 어떻게 고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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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범의 펜션 이야기] 전통 문화의 별미를 차려 놓은 한옥 펜션마을, 영주 '선비촌'
- 경북 영주라고 하면, 언뜻 특별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중앙선과 영동선 그리고 경북선이 교차하는 철도 교통의 요충지 정도로 알려졌을 뿐이다. 그러나 유교 성리학의 이치를 가르치고 발전시킨 유학의 본고장이라는 사실을 알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 중심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선구자라 일컫는 안향(安珦, 1243∼1306) 선생이 공부하던 순흥 땅에 스승을 기리며, 조선 중종 37년(1542년)에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세웠던 곳이 현재 남아 있는 소수서원이다. 소수서원은 미국의 하버드대학보다 93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다. 이곳에서 배출시킨 인재는 무려 4000여 명에 달한다. 명종 5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선생이 이름을 소수서원으로 바꾸고 제자들을 양성하여 훗날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기초를 닦은 곳이기도 하다. 소수서원 옆에는 영주 선비촌이 자리한다. 한국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에 조선시대 선비들이 충절이 서려 있어, 서원에서 배출된 선현들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의 복원 및 생활상을 재현하여 후세들에게 자긍심을 일깨우고 전인교육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곳이다. 선비촌에는 영주시 소재 지정 또는 비지정 전통주택 12채를 재현해 놓았다. 중앙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에서 영주 소수서원까지는 결코 먼 거리가 아니다. 불과 두 시간 반이면 도달할 수 있다. 소백산 죽령터널을 지나 곳곳에 인삼밭이 널린 풍경을 보며 풍기나들목을 빠져나오면 20분 만에 소수서원에 도착할 수 있다. 서원의 고색 창연한 분위기는 입구에 가득한 소나무 군락지로 더욱 깊어진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소나무 품종인 적송이다. 껍질과 속이 붉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금강송이라고도 부른다. 유생들이 생활하는 곳이라 하여 학자수(學者樹)라는 별칭이 붙은 소나무 숲과 함께 500년 넘는 은행나무, 서원의 전통 가옥과 정자 그리고 주변을 휘감아 흐르는 죽계천 등이 조화를 이루며 소수서원은 유교 문화의 깊은 맛을 더해 준다. 마침 취재진을 맞이하는 소수박물관의 학예연구원인 박석홍 씨의 안내로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 그리고 목적지인 선비촌을 둘러보았다. 선비촌은 소수서원의 뒤쪽, 죽계천의 반대편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다. 용인 민속촌을 연상시킬 만큼 각양각색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어우러져 하나의 펜션 촌을 이룬다. 20만 평의 땅에 기와집이 7채, 초가집이 5채 그리고 강학시설 2동과 정자, 누각 등 다양한 민속시설과 저자거리로 조성해 놓았다. 숙박공간과 전시공간을 합쳐 40여 채의 전통가옥이 들어서 있으며, 순흥 지역의 전통 한옥을 완전하게 재현시킨 아흔아홉 칸 양반 집이 완공 단계에 있다. 이 가운데 펜션 시설로 이용되는 곳이 17동에 이른다. 기와집 객실이 50개, 초가집 객실이 20개 등 모두 70개의 펜션 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객실에는 저마다 별개의 세면실과 화장실을 설치하여 고객의 불편을 최대한 덜었다. 화재 예방 차원에서 취사는 별도로 허락되지 않지만 저자거리에서 다양한 먹거리를 맛볼 수 있다. 양반 집에서 유교 문화 체험을 영주 선비촌은 2004년 9월 정식으로 개관했다. 준비하는 데만 무려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전통 한옥을 꼼꼼하게 재현하는 데에 8년이 걸렸다. 박석홍 학예연구원에 따르면, 영주 지역 유지들이 이처럼 시간과 정성을 들여 선비촌을 건설한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고 한다. 구한말 의병과 왜병이 일대 접전을 벌이면서 수많은 전통 가옥이 소실됐는데, 그 전만 해도 200채에 가까운 한옥이 즐비했던 곳이다. 아흔아홉 칸의 기와집들이 줄지어 있어서 몇 십리를 가도 비를 맞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조선 세조 때에는 단종(端宗)의 복위를 시도했던 이곳 유생들의 반역 행위로, 순흥 지역 수백 명의 유생과 가족이 몰살당했던 피비린내 나는 역향(逆鄕)의 고을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이 때 이미 마을의 절반 이상이 불태워지고 허물어졌다고 한다. 이런 참극이 일어나기 전에는 권세와 영화가 넘쳤던 순흥 안씨의 땅으로, ‘참나무 숯불에 이밥을 해먹는 동네,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동네’였다. 과거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재현하여 말살된 순흥의 역사를 복원시키자는 후손들의 열망이 영주 선비촌을 만든 힘이 됐다고 한다. 여기에 향토사학자, 민속학자, 고건축전문가, 문화인류학자, 대목 등이 한마음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정부와 도청, 시청 등 관련 기관들이 막대한 예산을 지원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세계에 영주 선비촌은 현재 국내보다는 외국에 더 많이 알려진 상태다. 한국 전통 문화를 체험하려는 주한 외국사절들이 꾸준히 방문하고, 얼마 전에는 스위스 바젤대학의 건축학과 학생 20여 명이 숙박하며 한국 전통 가옥을 배워 가기도 했다. 선비촌에는 영주와 풍기 지역의 전통 가옥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원형 가옥을 다치지 않고, 그 건축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건축물이다. 그래서 경북 북부지역 유교 문화권의 건축과 생활 양식을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어 전통 가옥을 연구하는 동아리 모임이나 전문가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그 가운데서도 가족 단위의 고객이 가장 많다. 순흥의 역사와 전통 문화 그리고 소수서원이 보여 주는 유교 세계를 자녀들에게 체험시키려는 부모들의 방문이 두드러진다. 지난 겨울철에도 주말 예약이 넘쳤다. 숙박료가 2만∼4만 원으로 저렴하기에 이곳을 아는 가족들은 다시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 그리고 인근의 영주 부석사 등을 방문할 수 있어서 자녀들을 위한 체험 학습장으로는 최고의 환경을 가졌다고 하겠다. 또한 청소년 수련장과 학술 세미나장 등도 갖춰져 학교 또는 기업 단위의 방문도 끊이지 않는다. 전통 문화를 테마로 하는 대규모 펜션 촌으로, 현재 영주 선비촌은 하나의 실험적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펜션들과는 아주 대조적인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다. 즉, 가장 한국적인 숙박시설이 고객들에게도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선호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자기들만의 휴식과 편리성을 추구하는 20대 커플들에게는 다소 불편한 곳으로 보이겠지만, 색다른 체험과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엿보인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고객은 외국인 관광객들과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들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의 역사와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가질 만한 대상들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현재 영주시로부터 위탁 경영을 맡은 (주)길원개발의 대표이며 영주 선비촌 촌장인 김준년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은 우리 역사의 한 모퉁이를 체험하게 하는 학습장으로 준비된 곳입니다. 과거의 생활을 재현하다 보니 불편한 점도 있지만, 우리 조상이 터득한 생활의 지혜를 알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고객을 위한 다양한 편의시설을 늘려서 한국 최고의 전통 문화 체험장으로 가꿔갈 계획입니다. 특히 고객을 위해 피부에 와 닿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분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일이지만, 이곳 체험은 한옥 펜션으로 특별한 별미로 기억될 것입니다.”田 글 김창범 / 사진 윤홍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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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범의 펜션 이야기] 전통 문화의 별미를 차려 놓은 한옥 펜션마을, 영주 '선비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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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것의 경쟁력 살린 강촌 ‘남이섬 한옥마을’ 펜션
- 우리 옛것의 경쟁력 살린강촌 ‘남이섬 한옥마을’ 펜션 서구풍 펜션 일색인 강촌 일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황토벽돌과 전통 기와로 한옥의 멋을 살린 ‘남이섬 한옥마을’ 펜션. 펜션지기는 세월이 흐를수록 고풍스런 멋을 더하면서, 동시대인들의 웰빙 욕구에도 부합한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목구조 황토집을 선택했다. 한옥의 멋스러움과 황토의 효능 그리고 텃밭 개방 등 이곳만이 지닌 장점들로 별다른 매체 광고를 하지 않았음에도 줄곧 입소문만으로 이용객의 발길을 붙들어 요즘 같은 불경기에도 꽤 안정된 수익을 얻고 있다. 경춘가도 46번 국도를 타고 가평을 지나면 경기도와 강원도를 가르는 경강교(京江橋)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면 강을 품고 달리는 시원한 드라이브 길이 나오는데, 이때 도로 오른편의 야트막한 산들을 주의 깊게 살피면 춘천 방면으로 200미터쯤 아래, 산자락에 옴팍 들어앉은 기와집이 시선을 확 부여잡는다. 서구풍 펜션 일색인 강촌 일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황토벽돌과 전통 기와로 한옥의 제 맛을 살린 토종 펜션 ‘남이섬 한옥마을’이다. 전통 한옥의 멋과 황토 효능으로 차별화 한옥의 예스러운 미감에다 펜션이라는 서구형 민박의 기능을 접목시킨 펜션지기 서동진(34세) 씨. 3년 전 가평읍에서 노래방 두 곳을 운영했다는 그는 취객들 뒤치다꺼리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부모님과 아내를 생각해 안정된 수익과 전원생활의 여유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펜션 운영을 결심하게 됐다. 건축구조를 결정하기까지 3개월 동안 부친 서남호(57세) 씨와 전국의 이름난 펜션들을 훑고 다녔다는데, 당시 목격한 세련된 외양의 서구형 펜션들은 그들 부자의 마음에 썩 와닿지 않았다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붐을 이룬 유럽식 경량목구조 펜션은 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언젠가 새로운 유행이 휩쓸게 되면 금세 헌 집 취급을 받을 터이고, 유행을 좇기 위한 리모델링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세월이 흐를수록 고풍스런 멋을 더하면서도 웰빙이라는 동시대인들의 욕구에 부합하는 전통 한옥 방식의 목구조 황토집을 선택했습니다.” 펜션지기는 2002년 봄,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답 2060평을 평당 30∼35만 원씩에 매입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지형에다 남이섬, 아침고요수목원 그리고 강촌리조트 등 강촌 일대의 유명 휴양시설들과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놓였기에 최적의 입지처럼 보였다. 설계와 시공은 더디고 고되더라도 본인이 직접 맡았다. 설계에만 2개월이 소요되고, 건물 1개 동을 짓는데 5∼6개월이 걸릴 정도로 힘든 과정이었지만 애써 들인 공만큼 펜션에 대한 자부심은 커졌다고. “A4 용지 수백 장을 버려가며 혼자 힘으로 객실 크기 8×15.2미터의 적정비율을 찾아냈는가 하면, 목수들과 동고동락하며 건물의 뼈대와 지붕을 세웠습니다. 비록 모든 방을 원룸형으로 처리한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내 힘으로 이만큼 이뤄낸 게 어딘가 싶어 대견스럽습니다.” 뚝딱뚝딱 허투로 지은 집 내줄 수는 없어 힘들고 더뎌도 자신이 옳다고 믿은 길을 택한 펜션지기의 소신과 뚝심은 자재 선택과 시공 과정에서도 오롯이 드러난다. 건물 안팎으로 감지되는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했더니, 사찰만 전문적으로 짓는 목수 6명을 고용해 러시아산 소나무 원목을 현장에서 일일이 원형으로 다듬고 손질해서 자연 그대로의 질감과 생김새를 갖춘 목구조재를 사용했단다. 건물의 뼈대를 잇고 창틀을 엮을 때도 못과 접착제 같은 인공적인 결합물을 사용치 않고 목재의 결구와 끼움, 맞춤 등에 의한 전통 한옥 건축 방식을 적용했다. 벽체의 주재료인 황토벽돌 또한 짚을 썰어 넣어 자연 건조시킨 20센티미터 두께의 제품을 사용했다. 수공으로 빚은 황토벽돌이 사람 몸에 좋은 원적외선을 많이 방출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을 고집했다고. “자연을 벗 삼아 편히 쉬고 갈 요량으로 이곳까지 찾아 준 손님들에게 뚝딱뚝딱 허투로 지은 집을 내주고 싶지는 않았어요. 객실 손님들이 아침에 일어나서는 몸과 마음이 개운해졌다고 말할 때는 내 신념대로 밀어붙이길 참 잘했구나 싶어요.” 채 나눔 통해 정(靜)-동(動) 공간 분리 4개 동에 모두 19개의 객실을 앉혔는데, 이도 건물마다 마구잡이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이용객의 취향에 따라 설계 때부터 신경을 써서 객실 배치를 유도한 것이다. 단층 2개 동에는 시끌벅적 놀다갈 사람들을 위해 주로 대형실과 중형실을 들였다. 내벽 하단 85센티미터까지만 루바를 대고 나머지는 황토벽돌을 그대로 노출해 실내에서도 부드러운 황토의 질감을 만끽할 수 있다. 복층 건물의 2층 객실 6곳은 모두 커플들을 위한 침대방인데 단체 손님들이 많이 드는 단층 건물들과 높이와 간격 면에서 동떨어져 있어 조용히 쉼을 누리기에 적절하다. 펜션지기의 푸근하고 넉넉한 마음씨도 이곳을 찾은 이용객들의 마음을 부여잡기에 모자람이 없다. 체육시설부지 아래 방치해 뒀던 전답 1000여 평을 지난해부터 손수 일궈 이곳에서 나는 모든 작물들을 원하는 사람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끔 개방했다. 텃밭에서 나는 야채를 수확해 먹는 재미를 못 잊어 다시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 번 왔다간 학생들 중에는 부모님과 다시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근 펜션들이 20대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해 단체룸을 많이 들인 반면, 우리 집은 한옥의 멋에다 황토의 효능 그리고 독립된 커플룸이 있다 보니 이용객의 연령층도 20∼60대로 다양합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같은 불경기에 매체를 이용한 별다른 광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관리·운영비 등 제반 경비를 제외하고 순수익만 월 300∼400만 원씩 남길 정도로 비교적 안정된 매출을 올리고 있다. 펜션지기는 한번 찾은 손님의 절반 가까이가 되찾는다는 점에 착안해, 펜션 명함을 제시하는 이용객들에게는 객실 이용료의 10퍼센트를 할인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예년 같지 않은 펜션 경기가 이곳이라고 해서 그냥 비켜 갈리는 없다. 얼어붙은 소비심리로 제 살 깎아 먹기식 덤핑 가격 경쟁은 물론, 고객 유치를 위한 출혈 광고 경쟁까지 붙어 한 달에 광고비만 300∼500만 원씩 예사로 지출하는 펜션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월 매출액의 20∼25퍼센트를 광고비에 쏟아 붓는 셈이다. 게다가 지난해부터는 관광객들이 드라마 〈겨울연가〉의 여파로 남이섬으로 대거 몰리면서 경강교를 사이에 두고 윗마을과 아랫마을에 위치한 펜션들의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곳 펜션지기의 마음도 썩 편치 않다고. 지난해부터 뜻을 함께 하는 강촌 인근의 펜션지기 7명과 ‘아름다운 남이섬 여행’이라는 친목모임을 만들어 공동의 이익과 발전을 꾀하고 있다. “한마디로 전쟁입니다. 광고비 지출에 따라 이용객 수도 비례하는 것을 보면 나도 뭔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조바심이 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광고만이 능사는 아닐 겁니다. 우리 한옥의 우수성을 믿기에 앞으로도 부지런히 몸을 놀려 손님들에 대한 서비스 질 향상에 힘쓸 작정입니다.” 대화를 갈무리 짓고 올봄 야생화 꽃씨를 심을 땅을 안내해 주겠다는 펜션지기를 따라 마당에 나섰다. 흙 묻은 작업복에 낡은 운동화 차림으로 길을 재촉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우리 옛 것의 경쟁력을 믿고 한 길을 택한 그의 우직하고 곧은 마음이야말로 이 집의 하중을 떠받들고 있는 진짜 기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田 글 송희정 기자 / 사진 윤홍로 기자 건축정보·위 치 :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서천리·건축형태 : 목구조 황토집·부지면적 : 2060평·연 면 적 : 180평·외벽마감재 : 황토벽돌 줄눈마감 (복층 2층 하프로그 사이딩)·내벽마감재 : 황토벽돌, 하단부 루바 (복층 2층 루바)·천장마감재 : 루바·지붕마감재 : 흙기와·바닥마감재 : 장판·난방형태 : 심야전기보일러·식 수 : 지하수·건 축 비 : 평당 400만 원■ 설계·시공 : 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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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것의 경쟁력 살린 강촌 ‘남이섬 한옥마을’ 펜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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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 정기에 음악과 그림과 도예를 담은, 전통 한옥펜션, ‘취옹예술관’
- 경춘국도(46번) 청평검문소 삼거리에서 현리 방면(37번)으로 꺾어 들어서면 조종천 맑은 물이 축령산 계곡을 따라 시원스럽게 흐른다. 5월 초인데도 숲은 어느새 녹색으로 우거져 그늘이 시원하게 다가온다. 여기저기에서 유원지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 이 길은 그 유명한 ‘아침고요수목원’으로 이어진다. 이정표를 따라 경기도 가평군 상면 행현리 고개를 넘으면 축령산이 마주 보이는 곳에 아흔아홉 칸(間)은 족히 되는 기와집의 높고 낮은 지붕들이 가지런히 내려다보인다. 그곳이 취옹예술관이다. 이 일대는 지금 신작로(新作路)를 내느라 어지럽혀져 있고, 또 온갖 모양의 요란스런 민박과 펜션이 들어서고 있어 아쉽게도 옛 정취는 찾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할까! 취옹예술관이라고 새겨진 나무 현판이 달린 문으로 들어서면 별세계(別世界)가 펼쳐진다. 높은 돌담 위로 올려다 보이는 팔각정인 청류정(淸流亭)이 가장 먼저 일행을 맞는다. 그리고 작은 내를 끼고 잣나무 숲 기슭에 걸쳐 지은 취옹산방이 멀리서 부른다. 마치 숨겨진 비밀의 정원처럼 취옹예술관은 감춰놓은 풍경들을 하나둘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눈에 들어오는 한옥의 규모와 품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주인장인 도예가 김 호 관장이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석이당(石二堂)으로 안내한다. 작은 강의실로 쓰인다는 이 기다란 마루방은 한옥의 맛을 유감없이 전해 준다. 대들보와 서까래 그리고 기둥의 어울림이 예사롭지 않다. 천장 아래 매달린 목어등(木魚燈)은 한옥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금년에 따왔다는 작설차를 따르는 김 관장의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또 어떤가! 별채 한옥들의 기와지붕이 멀리 축령산 줄기에 걸쳐 있어 감탄을 절로 일으키게 한다. 장인의 혼을 담아 한옥 향기 짙게 드리우고 도예가인 스승 이희전 선생이 붙여주었다는 ‘취옹’이라는 아호(雅號)의 의미대로 스스로 ‘도자기를 굽는 화부(火夫)’라고 소개하는 김 호 관장. 그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5년 전, 1999년의 일이다. 10여 년을 변함없이 도자기를 굽고 문화예술마당으로 운영하던 포천의 취옹예술관을 수해로 모두 잃었다. 그후 재기의 결단으로 이곳 축령산 기슭에 둥지를 튼 것이다. 경기도 일대를 다 다녔지만 축령산처럼 마음을 편안히 하는 곳도 없었다고 한다. 조용하고 물이 맑고 게다가 석재(石材)도 풍부해서 그것을 캐어내 석축을 쌓으면 마음먹고 한옥을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땅을 사들였다. 그래서 2000여 평의 땅에 평생 소원인 전통 한옥을 세우는 일을 시작했다. 김 관장이 전통 한옥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척 오랜 일이다. 중학교 2학년 때쯤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의 미륵사지를 방문한 후, 전통 한옥에 관심을 가졌다. 물론 집터만 남았지만, 망초꽃으로 뒤덮인 사적지에서 받은 인상은 조상들의 집에 대한 그리움이라고나 할까. 우리만의 아름다운 집을 짓고 보존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그후 웬만한 기와집은 다 둘러보면서 미학은 물론, 대목(大木)의 안목까지 익혔다고 하니, 취옹예술관의 한옥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는 수십 년을 가슴에 쌓아 온 한옥의 꿈을 한 채, 두 채 이곳에 펼치고 있다. 그래서 일본식 건축술에 고유한 영역을 상실한 우리네 한옥을 원래대로 살리고 지켜가려는 꿈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터를 잡는 일과 조경을 준비하는 일에 2년의 공을 들였고, 집을 짓는 데만 3년이 걸렸다. 경내는 3단의 터를 조성하여 첫 단 중심에는 청류정(淸流亭)을 앉혔다. 그 좌우에는 ‘미술관’과 ‘다석지실(茶石地室)’이라는 전시실이 나란히 있다. 장차 전시실을 공방이나 아틀리에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둘째 단에는 ‘수향헌(垂鄕軒)’과 ‘백송제(白松齊)’라는 객사(客舍)를 두고, 식당과 세미나 장으로 쓰는 ‘석이당(石二堂)’을 앉혔다. 그리고 맨 상단에는 주 전시실 두 동을 한참 짓고 있다. 김 관장은 조경과 터 조성을 먼저 한 셈이다. 현재 일곱 동의 건물에 상단 전시실 두 동을 더 지으면 모두 아홉 동으로 대궐 규모의 한옥 단지가 조성된다.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재정이나 건축 면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묵묵히 인내하며 기다리며 추진해 온 김 관장의 열정에는 그 누구도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결국에는 이 엄청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전통 문화예술이 살아 숨쉬는 곳 더구나 문화 낙후지역의 경기도민에게 문화예술 체험 기회를 제공하자는 생각으로, 장르별 문화학교를 개설하여 각종 공연도 쉬지 않고 있다. 김 관장만의 이 독특한 주장과 철학은 이미 오래 전 포천에서부터 시작해 온 일이다. 양악에서 국악까지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고 사물놀이를 가르침은 물론, 동양화를 그리고 도자기를 굽는 등의 이 모두는 농사짓는 시골 사람들로서는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고급 문화예술이다. 이와 함께 경기도 내의 문화예술집단이 서로 협력하여 운영하는 ‘기전문화대학’의 경기 북부지역 캠퍼스로도 내놓고 있다. 바로 이곳에 ‘한국 문화예술 체험’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펜션을 개설했다. 마당을 중심으로 기역자로 놓인 ‘수향헌’과 ‘백송제’라는 두 채의 객사가 취옹예술관의 펜션이다. 수향헌에는 7평에서 10평 남짓한 방이 모두 3개 있다. 장작불을 때 한옥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런가 하면 백송제는 같은 크기의 방을 6개 갖추고 있다. 보일러로 난방을 하게 한 다소 현대식 방들이다. 모두 최신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갖추고 있어 전혀 불편하지 않다. 단 취사시설은 갖춰져 있지 않아 석이당 식당을 이용해야 한다. 공연히 음식을 만든다고 부산을 떨지 않아 좋다. 주변을 조용히 산책하거나 마주 건너다 보이는 ‘취옹산방’ 마루에 걸터앉아 축령산을 바라보는 여유는, 값을 매기기 어려운 즐거움일 것이다. 김 관장의 개인 사저로 사용하는 이곳은 한옥의 걸작품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하다. 며느리서까래를 달아 지붕을 쳐 올린 솜씨가 한옥의 멋을 한껏 보여주기 때문이다. 달랑 방 하나에 누마루를 들였는데 현대에 지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누마루에서 예술관 전체를 조망하는 즐거움은 또 다른 수확이라고 할까. 조용히 흘러내리는 골짜기 물을 내려다보며 청류정과 마주하여 주인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면 신선의 풍류를 달리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펜션의 새 지평을 여는 취옹예술관 주인장 김 호 관장은 당초 수향헌과 백송제를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작가들의 숙소로 제공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시인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지금은 그들을 위한 펜션으로 제공하고 있다. 펜션이 지나치게 상업화되면서 펜션 본래의 문화적 의미가 퇴색되는 것을 우려하는 김 관장. 그는 취옹예술관을 통해서라도 펜션의 모습이 제대로 살아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가족이 함께 머물며 우리의 전통 문화예술을 체험하고 배우는 즐거움이 이 펜션이 제시하는 테마이다. 김 관장은 보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다양한 기획 이벤트를 펼칠 계획이다. 그래서 도회에서도 만나기 힘든 독특한 음악회와 미술전시회 등을 계속 준비하고 있다. 특히 젊은 작가들에게 창작 의욕을 높여 주고 작품을 무료로 전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해, 전시실 관람자들이 더 많이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또 작가들의 고객인 예술 애호가들의 참여 폭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펜션은 중요한 계기를 만들 것이라고 한다. 다행히 우리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일반 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이제 취옹예술관 펜션은 요즈음 침체된 펜션 비즈니스에 활기를 불어넣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술의 생산자와 수요자들이 즐겁게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취옹예술관 펜션은 축령산 기슭에서 새로운 차원의 펜션 문화 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화된 펜션으로부터 한국화된 펜션으로 발전되는 우리 펜션의 새로운 가능성과 그 미래를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田 ■ 취옹예술관 (031)585-8649, www.chi-ong.co.kr ■ 글 김창범(월간 전원주택라이프 편집위원, ‘펜션으로 성공하기’ 저자) ■ 사진 권지혜 기자 ■ 인터뷰 * 농촌 지역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취옹예술관은 가평을 중심으로 한 경기 동북부 지역을 대상으로 주민의 문화적인 여가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재능 있는 청소년 및 역량 있는 지역 작가를 육성하며 여러 분야의 예술인의 활동을 지원하고자 설립됐다. 나아가 세계의 유수한 미술관과 교류 및 협력을 통하여 국내의 유망한 작가가 국제 무대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외국작가들을 초청하여 전시회 및 워크숍 등을 열어 국내외 작가들 간의 교류를 활성화하는데 목적이 있다. 문화활동은 이제 더 이상 특정 지역이나 일부 계층 혹은, 전문인들의 영역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여 주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일부 계층이나 대도시 위주로 편중화 현상이 깊어지고 있다. 굳이 외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도시와 농촌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특히, 소외된 농촌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공간을 더욱 많이 마련하여 균형 있는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이 시대의 의무일 것이다. 비록 역량은 부족하더라도 ‘취옹예술관’은 문화예술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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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 정기에 음악과 그림과 도예를 담은, 전통 한옥펜션, ‘취옹예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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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박물관 특별기획전 李진사댁 기와집 구경하기
-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북촌’이라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 매천야록, 황현(1855~1910) 이번 전시는 이진사댁 기와집을 테마로 조선시대 양반집이 목가구를 둘러보며 뛰어난 안목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한옥 구조에 따라 대문부터 시작해서 대청마루, 사랑방, 안방, 부엌 그리고 서당의 순서로 전시를 구성했으며 조선시대 칠공예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나전칠기도 함께 소개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 문화와 전통적 가치를 되돌아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간 2023년 6월 29일 ~ 11월 30일장소 북촌박물관문의 02-766-8402 (10:00~18:00 / 일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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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 PEOPLE] 집은 엄마의 품, 김혜련 작가의 집과 밥
- 집은 엄마의 품 김혜련 작가의 집과 밥 집을 가꾸고, 밥을 해 먹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존재의 근원이라는 김혜련 작가. 특히, 집이란 따스함과 받아들여짐의 상징으로서의 공간, 갓 태어난 아기같이 천진한 잠을 잘 수 있는 깊고 원초적인 공간이라고 말한다. 방황하던 그녀를 ‘일상’이라는 보금자리로 이끌어준 경주 집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글 이수민 기자 | 사진 김혜련 작가(경주 집), 박창배 기자(상주 집) | 취재협조 서울셀렉션 김혜련 작가는 백 년 된 낡은 고택의 원형을 유지해 고쳤다. 경주 집수리는 시멘트 담 대신 쌓아올린 흙돌담과 나무 대문으로 마무리했다. 집은 물리적, 정신적 쉼터 김혜련 작가를 만난 곳은 경상북도 상주의 한 농가였다. 경주에서 10여 년간 살다, 함께 살고 있는 반려자의 고향인 상주로 얼마 전 이사를 했다. 그녀는 본디 서울 한복판에서 일을 하고 살았던, 도시 사람이다. 그러다 40대 후반 어느 날, 도시에서의 사회적 지위와 물질적 혜택을 모두 내려놓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4년간 시간을 보내고 내려와 경주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살았다. 방황하던 자신을 붙잡아 줄 곳이 경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낀 먼지를 물에 불리고 칫솔로 문살을 닦는 일은 김혜련 작가가 맡았다. 창밖으로 작지만 정겹고 아늑한 마당이 보인다. 경주 집을 고치면서 호사를 부린 것은 벽지였다. 문경의 무형문화재 한지 장인이 만든 한지를 발랐다. 백 년을 지탱해준 집에 대한 감사의 선물이었다. 인간 생활의 기본적 요소로 입는 것(衣), 먹는 것(食,) 사는 곳(住)을 꼽는다. 그중 주住는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말한다. 집이란 누구에게나 몸과 마음을 편히 쉬게 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자 정신적 쉼터다. 김혜련 작가에게는 더욱 그랬다. “지인을 몇 번 따라와 본 경주는 아름다웠어요. 시끄러운 자본주의 한 가운데에서 천년의 침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고분과 그 위에 자라고 있는 키 큰 소나무, 작은 둔덕 같은 곡선의 무덤가에서 온화함이 뿜어져 나왔어요. 내면의 황량한 자리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가는 게 느껴지더군요.” 벽지로 사용한 문경 무형문화재 한지 장인이 만든 한지는 비단보다 더 부드럽고 우윳빛보다 투명한 밝은 빛을 띤다. 바닥은 콩댐을 했다. 한 번 바르고, 불 때면서 말리고, 다시 바르고 또 닷새 말리고를 다섯 번 반복했다. 김혜련 작가는 방황하던 자신의 영혼을 고요히 눕히고 치유할 곳으로 경주를 선택한 연유를 말하며, 100여년 된 고택을 고치며 살게 된 경주 집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혜련 작가는 좋은 사람들 불러서 밥 먹고, 정원 가꾸고 하는 일상을 즐긴다. 경주의 남산 마을 당시, 살 지역을 경주로 정했지만 마음에 드는 집 찾기는 쉽지 않았다. 김혜련 작가는 집이 마음에 들어도 마을이 편안하지 않으면 그 집이 안온하기는 어렵기에, 마음에 드는 마을을 정하고, 그 안에 있는 집을 찾기로 기준을 잡았다. 그러다 경주의 ‘남산마을’을 만났다. 남산 아래 칠십여 호가 있는 넉넉하고 큰 마을이었다. 낮고 단단한 기와집, 작은 ‘촌집’들이 넓은 산자락에 여유 있게 모여 있는 마을이었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되기도 한다하니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안온한 땅이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본인이 찾던, 삶의 황량함을 품어줄 장소라 확신했다. 그러고는 마을 안에 한 할머니가 살다 내놓은 낡은 고택을 냉큼 계약했다. “고택을 다시 살려내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젊은 날의 혈기가 담긴 어린 생기가 아닌, 희로애락을 겪어낸 시간의 두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생기를 말이죠.” 집을 가꾸고, 그 안에서 밥을 해먹는 평범한 일상이 몸과 정신을 가다듬고 단련하는 힘이라 말한다. 집을 고치는 방향은 분명했다. 최소한의 개조로 시간의 퇴적층을 유지하는 것이다. 백 년 된 집을 고칠 목수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새집을 지을 목수는 많았지만, 헌집을 고쳐줄 목수를 찾는 건 쉽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마침 동네에 낡은 집을 원형 그대로 살려 잘 고쳐놓은 집이 있어, 그 집을 고친 목수를 소개받았다. 경험이 있던 목수라 일이 수월할 줄 알았는데, 과정은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십여 년 목수 일을 한 탓이겠지만, 자기 고집대로였다. 그렇게 애를 먹이다가도 목수는 가끔 명언을 해서 즐겁기도 했다. “이런 헌 집을 고치는 일은 손바느질 같은 거예요. 한 땀, 한 땀 하는 거지. 새 집 짓는 거야 재봉틀로 드르륵 박는 것처럼 쉽지, 쉬워.” 백 년 된 집 철거 작업이 시작됐다. 시멘트로 온통 덧댄 창고들을 철거하고 마당에서 시멘트를 걷어냈다. 집은 원형 그대로의 작고 소박한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있던 나무 기둥들에서 칠을 벗겨냈다. 그러자 오래된 나무 특유의 살결이 햇빛 속에 드러났다. 부엌의 그을음 낀 서까래를 닦는 작업은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을음을 걷어내자, 검은 살결이 중생대 거대한 동물의 뼈처럼 단단하고 아름답게 드러났다. 나무는 그을음이 배면 잘 썩지 않는다고 한다. 안방과 건너 방의 천장에 쳐놓은 낮은 방장을 걷어내니 천장에서 쥐똥이 우수수 떨어졌다. 서까래 사이사이에 드러난 부분은 다시 황토로 발랐다. 나무에 낀 오래된 때를 조심스럽게 닦아내자 종도리에 흐릿하게 상량식上梁式(집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종도리를 올릴 때 고사를 지내는 의식) 때 쓴 글자가 보였다.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집이 지어진 해와 날이 적힌 글자가 있었다. 집은 191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집은 험한 세월을 살아낸 생존자, 존귀한 존재였다. 경외심으로 저절로 옷깃이 여며졌다. 상주 집도 곳곳을 고쳐 살고 있다. 주방은 벽을 뚫고 나무틀을 짜 넣은 다음 유리를 대어 바깥 풍경을 그림처럼 담아 즐기고 있다. 손수 담근 된장과 직접 재배한 배추, 갖은 뿌리채소를 우려 맛을 낸 국물 요리로 차린 보양 밥상. 평범한 농가이지만, 사람의 손끝으로 만들어진 식탁, 도마, 격자문살 창틀에서 따뜻하며 단아함이 느껴진다. 집을 고치다 집수리의 첫 번째 원칙이었던, 집의 원형을 유지한다는 원칙을 깨고 편의 위주로 생각한 건 부엌과 화장실이었다. 편리한 부엌과 화장실은 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었다. 부엌은 넓히고 서쪽으로 큰 창을 냈다. 크고 확 트인 부엌을 만들었다. 싱크대나 기타 부엌 시설들을 신경 써서 환하고 견고한 것들로 들였다. 원한 대로 환하고 쾌적한 부엌을 만들었다. 평생의 ‘괴로운 밥 짓기’를 ‘즐거운 밥 짓기’로 바꾸기 위해 최대한 기분 좋은 환경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을 고치는 일 중에서 직접 한 것은 ‘문 닦기’와 ‘콩댐하기’였어요. 한옥엔 문이 많아 일도 많았죠. 얼마나 오랜 세월 먼지가 끼었는지, 물을 뿌려서 불리고 칫솔로 문살 사이사이를 닦는 일을 며칠 동안 계속했어요.” 이렇게 집을 고치면서 김혜련 작가는 오래된 것들이 지닌 단단한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생기, 소멸해가는 것들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집에 호사를 부린 것은 벽지였다. “백 년을 지탱해준 집에 대한 선물이었어요. 문경의 무형문화재 한지 장인이 만든 한지였죠. 비단보다 더 부드럽고, 우윳빛보다 투명한 밝은 빛을 띤 한지로 도배를 했어요. 집은 옛 자태를 찾은 듯 은은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어요.” 서재에는 책을 좋아하는 김혜련 작가를 위해 반려자가 직접 짜준 책장이 벽을 두르고 있다. 책장 칸칸이 경주 고물상에서 구입한 이색 골동 장식품들이 눈에 띈다. 대문 달고 흙돌담 쌓아 완성 방바닥도 한지로 발랐다. 한지로 장판을 하려면 ‘콩댐’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두터운 한지에 콩과 생들기름을 7대3의 비율로 섞어 바르는 것이다. ‘문경 한지’에서 콩댐하는 법을 배웠다. 반드시 생들기름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냥 들기름을 쓰면 기름에 절어서 못 쓴다더군요. 색도 너무 짙어져서 은은한 노란 빛깔을 얻을 수 없고요. 평생 기름을 짰다는 상주 은척에 있는 한 할아버지에게 부탁해 생들기름을 짜고, 불린 콩을 곱게 갈아 섞어서 고운 면 주머니에 넣고, 하라는 대로 방바닥에 굴렸어요.” 한 번 바르고 닷새 동안 불 때면서 말리고, 다시 바르고 또 닷새를 말리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다섯 번의 콩댐을 했다. 집수리의 마무리는 담을 쌓고 대문을 다는 일이었다. 무너진 시멘트 담 대신 집과 주변 자연이 어울리는 담을 쌓고 싶었다. 집 뒤쪽에 남아있는 오래된 흙돌담과 어울리게 황토와 돌로 담을 쌓았다. 나지막하게 쌓아 올린 담은 집과 잘 어울렸고, 마을 골목과도 제법 잘 어울렸다. 침실. 상주 집은 한옥이 아닌, 평범한 농가다. 반려자는 한옥을 좋아하는 김혜련 작가를 위해 올 봄부터 작은 한옥 한 채를 지을 계획을 세웠다. 고택과의 첫날 밤 9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때쯤 집은 아름답게 복원됐다. 김혜련 작가는 아무런 짐 없이 이불 한 채만 들고 첫날밤을 맞으러 집에 갔다. “집에 들어섰을 때 넉넉하고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이 나를 품고 있는 듯 안온했죠. 포대기에 싸여 엄마 품에 안긴 아기 같은 기분 같았어요. 그때 내가 그 낡은 집을 왜 그리 좋아했는지, 진정한 이유를 알겠더군요. 무의식적으로 ‘집의 모성’에 기대고 싶었던 거 같아요.” 작가에게 ‘집’은 그녀 안의 아이가 찾던 엄마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라면서 엄마의 사랑이 늘 부족하다 느꼈다. 그래서 그녀 내면의 아이는 집을 지음으로써 엄마를 찾고 그 안에서 천진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게 김혜련 작가에게 집은 부재했던 모성이고 몸 자체이기도 했다. “물론 백 년 된 집이니 집을 다 고치고 난 뒤에도 계속 고쳐야할 부분들이 생겨났어요. 이곳을 고치면 저곳을 고쳐야하고 저곳을 고치면 고친 이곳을 다시 고쳐야 했죠. 그렇게 집은 저와 함께 늙어갔어요. 다만, 늙음은 퇴락이 아니라 원숙함임을 받아들이면서요.” 거실은 반려자가 직접 나무로 짠 식탁, 독서대, 미닫이문으로 채웠다. 따뜻하며 정갈한 분위기가 멋스럽다. 집을 통해 찾은 평안 “물질로서의 집, 자본주의 시각으로의 집만 생각했던 적도 있었죠. 그래서였는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지만 외로웠고 결핍을 느꼈죠. 다행스럽게도 집을 가꾸면서 이 오래되고 진부한 일상이 내 몸과 정신을 가다듬고 단련해 강하게 만드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김혜련 작가는 다른 사람들도 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한다.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품어주는 공간으로 집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밥 해먹고 집 가꾸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경주 집은, 엄마 품이 그리워 매일 눈물짓던 지인에게 건네주고, 이제는 그곳에서부터 함께한 반려자와 삶의 터전을 상주로 옮겨 생활하고 있다. “경주는 고도의 아름다움이 내재돼 있지만, 사람의 손길이 계속해서 닿는 곳이죠. 반면에, 상주는 자연의 야생성이 아름다운 곳이에요. 투박한 듯 펼쳐져있는 자연 속에서 생생한 정기를 느낄 수 있죠. 게다가 좋은 사람이 많아요. 귀농귀촌을 하러 온, 가난하지만 건강한 젊은이들이요.” 그녀는 상주에 살면서 달라진 게 있다고 한다. “전에는 만났다가 헤어질 수도 있다 여겼는데, 이제는 만남이 소중하다는 것, 관계가 소중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그래서 좋은 사람들 불러서 밥도 해먹고, 정원도 가꾸고, 이런저런 모임을 해요. 이 상주 집에서도 말 그대로 일상을 살고 있는 거죠. 그리고 있는 그대로 주어진 삶, 오는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살고 있어요. 결국 집 안에서 일어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나를 강건하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상주에 살면서 자연의 야생적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있다. 직접 배추도 키우고, 시래기도 말리면서 일상을 보낸다. 김혜련 작가의 『밥 하는 시간』 일상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삶을 치유하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20여 년간의 교사생활을 접고 경주 남산마을에서 백 년 된 집을 가꾸고, 밥을 해먹으며, 자연과 만나는 일상을 담았다.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을 들여다보고 그 진짜 의미를 회복하고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삶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서울셀렉션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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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 PEOPLE] 집은 엄마의 품, 김혜련 작가의 집과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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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기만 해서는 안돼요. 이야기, 역사가 담겨야지요” , 마을벽화 그리는 ‘공공벽화연구소꺼리’ 백혜미 대표
- 젊은 사람들이 떠나 황량하기만 했던 농촌 마을이 환하게 바뀌었다. 을씨년스럽기만 했던 동네에 화사한 옷을 입히자 하나둘 찾는 발걸음이 생겼다. 거창 황산마을, 대전 산내동. 저마다의 특성을 담아 벽화를 새겼더니 방문한 사람은 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사는 사람은 이를 통해 저마다의 추억을 더듬는다. 벽화로 농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공공벽화연구소 꺼리'백혜미 대표를 만났다.글 홍정기 기자 사진 최영희 기자 일부 사진 제공 공공벽화연구소 꺼리 070-7625-7826 www.ggeory.co.kr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마을은 작은 개천을 사이에 두고 1구와 2구로 나뉜다. 외지인에게는 크게 다를 바 없는 농촌 마을이지만 원주민들은 오래전부터 묘한 신경전을 벌여왔다. 양반이 다수였던 1구와 평민층이 주를 이뤘던 2구의 주택 형태는 지금까지 이어져, 으리으리한 기와집과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초가에서 모습을 바꾼 슬레이트 지붕의 양옥이 개천을 경계로 상반된 모습으로 놓였다.여느 농촌이 그렇듯 외지인이 들어올 일이 적은 이곳은 그래서 꽤나 오랜 시간 갈등을 겪어왔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한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구를 찾는 사람이 늘자 몇년 전 지자체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1구를 '황산고가마을'로 지정하고는 이를 위한 각종 지원책을 내놨다.그러자 2구 사람들이 "있는 집에 더 주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단단히 뿔이 났다. 당황한 지자체는 2구를 지원할 방법을 고심하다 '벽화'를 떠올렸다. 최근 전국에 걸쳐 생기기 시작한 벽화 마을이 나름 인기몰이를 하던 터라, 지자체는 적은 비용으로 잘만 하면 상대적으로 낙후된 2구를 쾌적하게 변모시켜 1구와 2구의 묵은 갈등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지자체는 벽화마을 조성을 위해 지역 미술가 단체와 협의를 했지만 벽화 전문가를 찾기 어려웠다. 결국 수소문 끝에 2011년 초 '공공벽화연구소 꺼리'백혜미 대표와 연락이 닿았다. 이렇게 시작한 '황산2구 벽화마을 조성 사업'은 석 달이 걸려 끝이 났다. 마을 주민 벽화 덕에 어깨 펴고 살아… 그런데백혜미 대표는 지자체 관계자, 미술 단체와의 미팅을 통해 디자인 초안을 잡고 몇 차례의 수정 작업을 거쳐 시안을 완성한 후 바로 벽화 작업에 들어갔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그림을 그린다고 마을이 나아지느냐"며 탐탁지 않게 여겼던 몇몇 주민들도 달라진 마을 풍경에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이제는 '황산고가마을'보다 '황산벽화마을'을찾는이들이더많다. 마을 앞 수승대(명승 제53호)를 거쳐 이전에는 1구로 움직였던 관광객 발길이 벽화가 등장한 후로는 2구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요즘 2구 사람들 어깨가 확 펴졌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작업을 의뢰했던 지자체에서도 만족도가 높아 이 정도면 소위 '대박'이라 할만도 한데 정작 작업을 맡았던 박혜미 대표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 지역미술전문가들이 도와줬으니 다른 어떤지역보다 디자인과 결과물이 잘 나왔어요. 그런데 벽화는 예쁘다고 좋은 게 아니거든요. 현장에 가보면 알겠지만, 벽화에 지역 이야기만 있지 정작 그 곳에 사는 주민 이야기는 없어요."주민과 제대로 된 소통이 없었던 점이 못내 아쉽다는 이야기다. 벽화는 보기에 좋은 그림에 그쳐서는 안 되고 담장 주인의 목소리와 마을의 역사를 담아야 한다고 믿는 백 대표에게 황산마을 작업은 다른 상업용 벽화와 별반 다를 게 없다."벽화 작업을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듣는 거예요. 특히 마을 벽화일 경우 더 그렇지요. 상업 공간은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할 정도로 예쁜 그림이면 되지만 마을 벽화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거든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가 그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이웃 주민일 수도 있고 이장님일 수도 있어요. 물론 그림 그릴 담벼락 주인이 가장 좋지요."담 주인이건 이웃 주민이건 이장님이건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안면을 트면 인생사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지는 인생역정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벽화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친다. 그 아이디어를 붙잡고 디자인 시안을 만든 후, 작업을 의뢰한 지자체 관계자와 협의를 하는데, 아무리 좋은 시안이 나와도 한 번에 오케이 나는 일은 거의 없단다. 결국 주민을 다시 만나 모자란 것을 보충하고 관계자와의 미팅을 수차례 거친 후에야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듣는 게 중요한 다른 이유는 관리적인 측면 때문이에요.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그림이 있다면 별 신경을 안 쓰지만 그림 안에 자신의 이야기가 녹아 있고 역사가 묻어 있으면 상당한 관심을 두게 되죠. 실제 어느 어르신은 당신 집 담 벽화가 혹시라도 때가 탈까 노심초사하고 누군가 광고 스티커를 붙이면 불같이 화를 내세요." 8개월간 한 마을에 집중… 소통이 가장 중요그러다 보니 당연히 작업 기간이 길 수밖에 없다. 황산마을은 그나마 짧은 축에 속해 백혜미 씨가 가장 애착을 갖는 대전 산내동 벽화는 장장 8개월에 걸쳐 작업이 이뤄졌다. '무지개프로젝트'일환으로 진행된 산내동 벽화마을 조성 사업은 점점 낙후되는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지자체에서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한다.마을 입구 벽, 산내동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 그림이 길을 안내한다. 큰 길을 끝까지 걷는 데 20분 남짓 걸리는 짧지 않은 거리지만 곳곳에 그린 벽화를 보는 재미가 쏠쏠해 시간 가는 지, 다리 아픈지 모른다.버스 정류장 앞 벽에는 한 여성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차를 기다리는 동안 책을 보고 있고, 그 옆에는 여러 의자를 침대 삼아 턱 하니 누워있는 남성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여성이 그려져 있다.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여학생에게 벽화에 대해 물었다. 백 대표가 말한 주민과의 소통의 결과가 궁금했다."이 동네 집들이 낡아 예전에는 되게 삭막했거든요. 사람들이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려서 지저분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벽화가 완성되고 나니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고 거리를 걷는 재미가 생겼어요. 어른들뿐만 아니라 제 친구들도 좋아서 사진 찍고 그랬어요. 정류장에 있는 이 그림은 '차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만 보지 말고 책을 읽어라, 그리고 공공장소에서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자'뭐 이런 뜻 아닐까요?"그림에 대한 두 학생의 해석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들이 그림을 단순히 '그림'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도로에서 동네로 진입하는 골목 어귀에 쓰레기통을 뒤지고 나오는 고양이 벽화가 있다. 일명 산내동 지킴이다. 외지인이 보기에는 그냥 귀여운 고양이지만 여기에도 마을 이야기가 담겼다. 골목으로 접어드는 길이다 보니 언제부턴지 사람들이 이곳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하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호시탐탐 쓰레기통을 노리는 고양이에게 감시 임무를 맡긴 것이다. 그리고 한 식당 측면 벽에는 엄마와 아이가 숨바꼭질 놀이에 한창이다. 이곳 벽에 딱 붙어 친구들을 놀라게 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주인의 말에 아이디어를 얻었다.이렇게 산내동 벽화에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벽화의 핵심은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사실 '공공벽화연구소 꺼리'를 운영하는 백혜미 대표에게 마을 벽화를 그리는 일은 그리 큰 이문이 남는 사업이 아니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8개월을 한 지역에서 먹고 자며 매달려야 하는데, 대부분이 지자체가 주도하는 것이라 예산이 넉넉지 않아 큰 이익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틈틈이 카페 등 상업용 시설에 벽화를 그린다."그래도 농촌 마을 벽화 작업이 가장 보람 있어요. 상업용 벽화는 작업이 끝나면 더 이상의 소통이 없지만 공공 벽화는 계속 끈이 이어지거든요. 제 그림을 주민이 좋아해 주고 제 그림으로 인해 인적 없던 마을에 찾는 사람이 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처음에는 '이런 낙서를 우리 집에 왜 그리느냐'며 반대했던 분이 나중에 연락이 와 '하고 나니 아주 좋다'고 감사의 말을 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 기분이 좋았죠."그리고 그는 벽화 작업을 하면서 주민이 커피 타 주고 라면 끓여주고 재료 제공하고 했던 일들을 소개하며 평생 잊을 수 없는 좋은 추억이라고 말했다.한편 전국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난 벽화 마을에 대한 우려의 말을 꺼내기도 했다. 지자체에서 적은 예산으로 하다 보니 특징이 없는, 이도 저도 아닌 그림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벽화는 비바람 맞으면 금방 망가진다'는 말을 하는 분이 있는데 그 이유가 재료의 특성도 모른 채 그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봉사 차원에서 그려서 그래요. 전문가들은 자신이 쓰는 재료의 물성을 잘 알기에 한 번 그린 그림은 적어도 십 년이상 갑니다."돈 안 되는 일에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어느덧 마을 벽화 전문가 소리를 듣게 된 백 대표. 그는 긍정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더니 얼마 전 중소기업청에서 지원하는 1인 창조기업에 선정됐다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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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기만 해서는 안돼요. 이야기, 역사가 담겨야지요” , 마을벽화 그리는 ‘공공벽화연구소꺼리’ 백혜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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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고재 안영환의 한옥 예찬 _ “한옥은 명품입니다”
- 4년 전 내로라하는 20명의 독일 건축가들이 락고재에 묵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각국을 돌며 세계의 건축을 탐색하는 이들이었다. 별채에서 한창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나를 중심으로 빙둘러 앉으며 물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편안한 걸까요?"그 푸른 눈들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한국인의 DNA에 한옥을 편하게 여기는 특유의 정서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게 아닌 듯했다. 그 후로 한옥의 매력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 안영환글 박지혜 기자 사진 백희정 기자 취재협조 ㈜락고재 054-857-3410 www.rkj.co.kr 안동 하회마을에는 민박 대신 호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한옥 숙박업소가 있다. 바로 락고재갪古齋. 그만큼 콘텐츠와 서비스에 자신 있다는 뜻이다. 락고재가 국외에까지 이름을 알린 것은 2003년 서울 북촌 한옥마을 락고재를 개방하면서부터다. 당시만 해도 서울 한복판에서 한옥을 구경하는 일은 특별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었다. 한옥에서 자보고 체험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고 많은 비용을 들이게 될 줄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20만~30만 원 호텔에 버금가는 숙박료를 지불하고 한옥에서 휴식한다. 뒤안길에 쓸쓸하던 한옥이 고급 호텔 못지않은 대접을 받게 됐다.한옥을 브랜드화하고 가치를 격상시키는 데 락고재는 톡톡히 제 몫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끈 장본인은 안영환(54세) 락고재 대표다. 건축 기술 전수를 통해 한옥을 계승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안 대표처럼 한옥을 상업화함으로써 한옥의 가치를 국내외에 퍼뜨리는 이가 있다. 그는 한옥과 대중이 서로 만날 수 있게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한옥에 대한 관심은 20년 전 서울 마포 구옥 철거 현장에서 시작됐어요. 보통 집도 아닌 마포 황부자가 살던 집이었어요. 그 집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기존 마감 위에 겹겹이 외피를 감싸고 있었는데 철거하다 보니 한옥 뼈대가 드러났어요. 그 선線에 반한거지요."안 대표는 그렇게 한옥을 그의 사업 영역 안으로 가져왔다. 1994년 고택체험여행 상품을 개발했고 2003년 한옥 숙박업을 경영하기 시작했으며 한옥을 지어 한정식당을 열었다. 지난해 목재가공유통업을 시작해 한옥 건축 분야에까지 발을 넓히고, 올해 3월에는 안동 한옥학교를 열었다. 끊임없이 한옥에 노크하다안 대표는 그의 한옥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다."서울 락고재를 계획할 당시 한옥의 현대화에 대해 고민했어요. 예전 진단학회 근거지였던 130년 된 한옥을 리모델링하면서 한옥의 단점인 욕실 사용의 불편함을 해결했어요. 바로 한옥 방 수납공간인 반침을 개조해 현대식 욕실을 넣은 거지요."그리고 두 번째 시도는 서울 명동 콘크리트 건물 위에 한옥을 올린 것. 한정식당 진사댁은 도심에서 그것도 비좁은 골목 안에 한옥이 들어섰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물이 됐다. 3층 콘크리트 건물을 3층만 헐고 2층 위에 30평 한옥을 개축한 것인데 한옥을 올린 후 무려 매출이 3배나 뛰었다고 한다. 예약도 3층 한옥부터 마감된단다.한옥 식당은 음식 값을 아래층보다 더 비싸게 받는데도 이처럼 더 선호되는 것은 맛도 맛이지만 사람들이 한옥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고 안 대표는 말한다. 그리고 하회마을 락고재다. 경북 안동 풍천면 하회리에 위치한 하회마을은 조선시대 주거문화와 마을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민속문화재 122호로 지정됐고 지난해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귀중한 민속자료다. 마을에 속한 것을 마음대로 고치거나 훼손할 수 없다. 그런데 안동 락고재가 리모델링이 아닌 신축한 한옥이라니 놀랍다. 다르게 표현하면, 조선시대 한옥을 제대로 재현했다는 소리다.2년 전문을 연안동 락고재는 건축허가에 꽤 많은 노력을 들였다. 문화재청심의 통과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가옥 형태를 따른다는 조건으로 심의를 거쳤고 그 대신 편리한 현대 주거양식에 맞춰 내부 길이를 칸당 30㎝ 늘이고 서울 락고재처럼 욕실을 방 안에 드리되 욕조를 설치한 보다 넓은 욕실로 만들었다. 애초 초가를 계획한 건 아니었다. 하회마을 가옥 배치 상 마을 입구에 초가가 늘어서 있는 전통을 따라야 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 사람들은 한옥을 짓는다 하면 기와집을 지으려 하지 초가를 지으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해마다 지붕을 교체하는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덮는데 요즘은 이엉 엮는 일도 어려워졌다. 기술자가 귀할 뿐 아니라 현재 보편화된 개량종 벼는 길이가 짧아 지붕 재료로 쓸 수 없다는 것. 재래종도 기계로 베면 길이가 짧아지므로 낫으로 베야 한다.안대표가 문화재마을에 건물을 신축할 수 있었던데는 내력이 있었다."하회마을은 600여 년 전 류운룡·성룡 형제 대代부터 번창한 풍산류씨 씨족마을인데 그 전에 우리 선조인 광주 안씨가 이곳에 일가를 이뤘다고 해요. 그리고 우연히 문서를 살피다 고조할아버지께서 조선 선조 때 재상 류성룡을 향사한 서원인 병산서원屛山書院원장을 지낸 사실을 알게 됐어요. 문화재청 심사위원들이 이러한 사실을 참작해 어렵사리 건축 허가를 받을 수 있었어요. 그런 역사적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면 어려웠을 거예요."류성룡의 12대 손이자 탤런트 류시원의 아버지 류선우 씨와 친분을 쌓은 안 대표는 류 씨의 하회마을 집 담연재를 고택체험여행의 중심으로 삼기도 했다.그의 한옥사업 네번째시도는 전통누각의 현대화다. "한옥은 처마가 길게 뻗어 나와 200평 대지에 건폐율 20%만 넘어가면 답답해 보여 실내가 좁아지게 된다"는 안 대표는 개방감 넘치는 한옥 공간을 고민하다 누각을 떠올렸다. 기둥을 복층으로 세우고 1, 2층에 유리 접이문을 달아 누각의 느낌을 살리면서 현대 공간의 편리함을 접목했다. 한옥 보급 확대를 위한 안동 한옥학교"지난 18년 동안은 한옥 사업을 위한 준비 기간인 것 같아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라는 안 대표는 지난해 목재가공유통 사업을 등록하고 본격적으로 한옥 건축에 뛰어들었다. 현재 12명이 교육 받고 있는 락고재 부설 안동한옥학교는 한옥의 저변 확대라는 대의적 명분도 있고 한옥 건축현장 인력 공급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다른 한옥학교에 비해 교육기간이 6개월로 긴 편인데 과정을 수료하면 3개월 인턴 과정을 제공한다."한옥 한 채 지으려면 평당 1,000만 원 내외 부릅니다. 일반 주택의 두 배 혹은 그 이상이지요. 한옥이 널리 보급되기 위해선 건축비를 내려야 하는데 기계 가공과 모듈화도 한 방법이겠으나 인건비가 비싸다는 점도 무시 못해요. 그래서 인력 양성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교육생들은 수료 후 인턴십의 특전을 얻게 돼 한옥 현장에 투입됩니다. 인턴 목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어 좋고 공급자와 건축주는 인건비를 낮출 수 있어 서로 윈-윈 할 수 있습니다."문화재 관리국 수리 기능자(대목수) 제 3053호이자 건축목공기능사, 전통한옥시공기술자인 황칠봉 씨가 락고재의 한옥 교육 및 건축을 총괄한다. 일주일에 5일 진행되므로 1개월 50만 원의 교육비는 거의 숙식비로 들어가는 셈이다.안 대표의 한옥 사업은 그 끝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올해도 벌써 알려진 곳만 두 곳 착공 준비 중이다. 그 중 하나가 하회마을 외곽 상업지구에 조성할 한옥 호텔. 2700평 부지에ㅁ ㄷ 등 다양한 형태의 초가와 기와집을 조화롭게 건축할 예정으로 두바이 칠성급 호텔 못지않은 고급콘텐츠를 담을 예정이다. 타 문화권 고객을 배려해 거실만큼은 입식, 최첨단 시스템을 적용할 방침이다. * 풀어내기에 그리 만만치 않은 한옥이라는 한 가지 테마로 락고재라는 성을 이룬 그에게, 성공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 맨땅에 헤딩하라."일초의 주춤거림도 없이 단호하게 말해 귀가 쫑긋 솟는 줄 알았다."노매드Nomad(유목민) 정신이 나를 긍정으로 이끄는 힘이에요. 이것저것 재지 않고 거칠 것 없이 일을 진행하다 보니 성공했다 소리 듣게 된 거지요."그의 호號는 몽중夢中이다. 도를 닦던 몽중이라는 호를 가진 선배가 "너야말로 드리머Dreamer"라며 물려준 이름. 호가 그를 대변하는 듯 그는 꿈을 말하는 데도 주저없다. 한옥콘도를 세우는 것이 앞으로 이룰 꿈이다."한옥이야말로 명품 관광산업입니다"라고 재차 강조한 몽중 안영환의 단호한 목소리에서 전통은 지키는 것을 넘어 퍼뜨릴 때 그 가치가 빛을 발함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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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고재 안영환의 한옥 예찬 _ “한옥은 명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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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글밭을 일구며3] 그 집
- 한 길가에 나란히 터를 잡았는데도 오른편의 집을 윗집이라고 불렀다. 우리 집보다 지대가 조금 더 높았기 때문이다. 정작 왼편 북쪽의 집을 아랫집이라 불렀으니, 언뜻 보기에는 똑 같은 평지인 듯 잘 가늠이 되지 않는 데도 어른들은 그렇게 지대의 높낮이를 정확하게 대우해 주었다.윗집은 위채와 아래채가 모두 네 칸인 기와집이었다. 사랑채에 달린 두 짝 대문은 고개를 들고 올려다봐야 끝이 보였으니, 어린 눈에는 동네 재실만큼이나 큰 집으로 보였다. 기둥이 한아름이나 되고 높은 기단(基壇) 위에 대청마루가 훤하니 크던 집. 호호백발 증조할머니는 안채 대청마루에서 늘 긴 담뱃대를 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들을 호령했다.명절이면 번들번들한 대청마루에 큰 제상이 차려지고 두루마기에 갓을 쓴 후손들이 멍석을 펴놓은 마당까지 줄지어 늘어서 예를 올리던 모습이 담 너머 보였다. 마당 그득하니 남자가 많던 집, 아들이 많아서 부자였을까. 동네에서 제일 크고 무서운 황소가 있는 집도 그 집이었다.윗집 아제는 아들들을 데리고 황소를 몰아 부지런히 일을 했다. 동네에서 억척 일꾼으로 소문난 것만큼이나 가을걷이를 할 때면 마당 가득 곡식들이 들어찼다.우리 집 사랑채에도 기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알매를 올리고 기왓장을 이어 주었다. 가마솥 가득 쇠고기 국을 끓이고 쌀밥을 지어 사람들에게 대접하며 용마루가 늘씬하게 이어진 지붕을 올려다보는 부모님의 표정이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 두 짝 대문도 달았다. 그러나 어린 눈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윗집보다 우리 집이 못해 보였다. 마루도 기둥도 작았고 대문의 송판도 얇아 보였다.세월이 흘러도 그렇게 좋아 보이던 윗집이 몇 해 전 오랜만에 고향집에 들렀을 때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대신 커다란 양옥이 방향을 바꿔 턱 하니 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다니! 한동안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토록 용마루가 웅장하던 기와집. 우람하던 기둥과 훤하게 반들거리던 대청마루와 고개 들어 올려보았던 대문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아제의 대문 여는 소리에 잠을 깨던 새벽, 동녘에 해가 솟아오르면 마당 가득 햇살을 품고 위엄스레 터를 지키던 집. 큰 대문으로 눈알이 무서운 황소가 센 콧숨을 쉬며 외양간을 드나들던 기와집. 몇백 년을 이어가도 끄떡없을 집을 허물어 버리다니!새 양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토록 부지런하고 알뜰하던,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아제와 아저매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집을 이루는 나무와 흙은 그냥 나무가 아니고 그냥 흙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이 스며 있다. 오랜 날을 벼르고 별러, 온 힘을 다하여 기울인 정성이 집이 되기 때문이다. 집의 주인이 누구였던 오래된 집일수록 그 앞에 서면 경건해지는 것도, 사람의 손길이 구석구석 묻어 나는 집에서 영혼이 뿜어내는 기운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물며 조상이 지은 집이면 더욱 그럴 것이다.우리 마을 들마의 정 교수도, 이웃 온막리의 윤 교수도 오래 전에 구입한 시골집을 그대로 지니고 산다. 상한 곳은 적절하게 손질하고 불편한 것은 쓸모 있게 다듬어 편안하게 지낸다. 옛것을 닦고 다듬어 정성을 기울이는 주인을 만난 집들은 참으로 아늑하고 편안한 집으로 아름답다. 현대식 양옥만이 보기 좋고 편리한 것은 아니다.길에서 만난 윗집 올케를 보고, '그 좋은 집을 왜 그렇게 없애 버렸느냐'고 안타까이 물었다."큰일은 많고, 손도 많이 오고… 큰일 칠 때 불편해서 그랬다 아이가."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사람까지도 낯설어서.田글 장문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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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글밭을 일구며3] 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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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의 아이들 교육 “좋은 점이 더 많아요”
- 언덕에 지은집 시골에서의 아이들 교육 “좋은 점이 더 많아요” -------------------------------------------------------------------------------- 한옥이 사라져가고 있다. 사회가 급변하면서 서구의 편리함을 극대화한 건축물들이 들어오고 우리네 조상의 숨결이 묻어있는 한옥은 그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자연과 융화되고 수많은 삶의 지혜를 담고있는 한옥은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서구의 주택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민들레울이 지어지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한옥이 갖고 있는 미를 최대한 살려보려 노력했고 한옥에 담긴 조상의 지혜를 얻으려 애도 썼다. 그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한옥에 대해 알게 되었고 우리의 것, 한옥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짧은 소견이지만 참된 주가(柱家)문화가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민들레울이 지어지는 과정을 통해 한옥의 아름다움과 그 조영사상을 소개하고자 몇 차례에 걸쳐 글을 싣는다. -------------------------------------------------------------------------------- 집을 왜 짓는가? 집을 어떻게 짓는가? 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집짓기의 주체는 누구인가? 집을 짓고자 하면서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물음표가 만들어진다. 요즘은 집이 재산 증식에 큰 몫을 하면서 마치 아파트 하나 장만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양 매달리고 있지만 정작 집에 대한 본질적 의미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규격화된 집에서 틀에 박혀 살다보니 철학과 감정이 깃들 지 않은 메마른 집처럼 인간도 황폐화되어 가는 것이다. 집을 왜 짓는가? 이는 단순히 집짓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한 통찰의 문제이다. 인간이란 여럿이 함께 사는 사회성을 지닌 동물이므로 집이란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단순히 건축적인 면으로 들여다 볼 때 그 집은 삶과는 상관없는 사물로 그치는 것이다. 집의 참다운 가치와 아름다움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철학과 감정이 깃드는 데서 나온다. 사람이 주인이 된 건축, 주인의 땀과 정성이 재어져 삶의 진솔함이 베어나는 집이야말로 이상성의 집이다. 한옥에 대한 관심 건축에 대한 관심과 일가견은 물론 조그만치의 상식도 없다. 건축은 그저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나 관여하는 것이라 치부하고 일별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건축양식이니 건축에 조영된 사상, 숨은 뜻 따위엔 아예 문외한 일 수밖에... 거처하는 집조차 지어진 집이니 그저 그 안에 들어가 ‘살아주고’ ‘살아가는’ 것이 그저 당연하다 여길 뿐이었다. 일반적인 집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이니 ‘한옥’에 대해서는 새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한옥과 양옥의 구분, 또 집과 건축의 구분은 무엇일까? 그리고 한옥이라 하면 도대체 어디까지를 일컫는가? 단순히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기와집, 초가, 너와집, 귀틀집 등으로만 구분하는 것이 한옥의 범주일까? 그렇다면 이런 유형의 집들은 과연 언제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이 땅위에 정착되었고 또 어떤 이유로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가기 시작했는가? 집에, 구체적으로 우리의 ‘한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마자 이런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한옥에 관련된 책들을 들춰본다. 이 방면의 자료들을 수집하여 상식의 범위를 넓혀간다. 집 구경도 다니기 시작한다. 이 방면에 아무런 식견이나 공부가 안된 상태이니 그야말로 코끼리 발가락 만지는 식이다. 이따금 한옥에 관련된 강좌를 듣기도 하여 견문을 넓혀간다. 그 중 가장 도움을 받은 것은 신영훈님의 강좌와 그의 저서들이다. 목수(木手)신영훈님에 의해 한옥의 미학의 우수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네 살림집 ‘한옥’ ‘집’이라는 개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단순히 외형적인 건물로써의 ‘집’과 삶의 공간으로서의 ‘살림집’, 가족과 가문으로의 집 혹은 ‘집안’ 등으로 구분되어 지고, 건물을 의미하는 집은 우리의 주거문화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문화를 달리하는 민족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살림집을 가지게 된다. 한국인들이 즐겨 입었던 의복을 한복(韓服)이라 부르고 전래의 우리 음식을 한식(韓食)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또 우리는 우리네 조상이 살았던 집, 살림집을 한옥(韓屋)이라 부른다. 이는 다른 민족과 구분되어 우리만이 갖는 독특한 생활문화의 반영인데, 특히 우리네 살림집 ‘한옥’은 그 어떤 형태의 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 독특한 구조로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지혜를 보여준다. 온돌과 마루를 취한 구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정형화된 한옥은 온돌과 마루를 함께 취한 이상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방에서 시작된 원두막 형태의 집들이 북상하면서 지상으로 낮아져 마루로 발전하였고, 주로 북방에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들인 화덕의 형태가 구들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두가지 요소가 한반도에서 결합해 독특한 주거 문화로 정착된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유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특징이 내재된 한옥이 지금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집을 옮길 수 있음은 한옥의 큰 장점 민들레울의 기와집(본채와 사랑채)은 ‘이실집’이다. 즉 다른 곳에서 옮겨서 지은 집이라는 의미인데, 집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은 한옥의 또 하나의 큰 장점이다. 이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사개를 맞춰 나무를 조립하기에 가능한 것으로, 한치의 빈틈도 없이 치목하여 기둥과 도리, 보 등이 서로 맞물리므로 못을 사용하지 않고도 수백 수천년을 견딜 수 있으며 필요하면 그대로 해체하여 옮겨서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이 집이 세워졌던 곳은 서대문구 천연동이다. 지금의 독립문 근처로 남향의 야트막한 둔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주변여건 때문인 듯 대문이 북쪽으로 나있었다는 것과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전각이 한칸 돌출 된 형태의 출입구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본래 우리의 전통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유형이다. 이 집이 조성된 연대가 소화 14년(서기 1939년), 일제 강점기가 막바지 기승을 부릴 때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형성된 것이다. 시대적 산물이라고나 할까? 집을 옮기면서 이 부분을 없앨까도 생각했지만 위치만 바꾸어 그대로 살렸다. 땅에는 터의 영기가 있다. 땅에는 터의 영기( 氣)가 있다. 그 터에 신이 있다는 설정이다. 우리는 이를 토신(土神)이라 부른다. 농사를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땅은 경배와 소출의 대상이었지 물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터를 사용하는 이의 마음이다. 등기상의 주인은 후손들에게서 잠시 터를 빌려 사용한다는 마음으로 가꾸고 보존하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 민들레울이 들어선 이 터는 좌향이 썩 훌륭하다. 알맞은 정도의 배산(背山)과 적지만 임수(臨水)했다. 뒤쪽의 산은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편안한 높이이며 앞쪽으로는 수목원 삼림욕장과 광릉을 감싸안은 죽엽산 줄기아래 논과 맞닿은 곳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터는 이쯤이면 썩 괜찮은 것 같다. 완성하는 지기(地氣)가 발현한다고까지야 장담할 수 없지만 시원스런 눈맛이 그만쯤이면 됐다. ‘민들레울’이 지어진 까닭 민들레울은 몇 가지를 지향하며 조형되었다. 우선 건물로서의 민들레울은 전통에 바탕을 두어 옛 것을 재현하고자 했다. 민들레울을 구성한 본채와 사랑채, 교육관, 측간 등이 초가와 기와, 돌기와 집으로 이루어졌다. 실내재료와 인테리어 등은 현대적인 소재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골격과 형태는 전통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민들레 울은 전통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자 조성되었다. 건물로서의 전통 가옥에서 나아가 집이 갖는 문화성을 나타내기 위해 생활문화공간으로 꾸며졌다. 민들레울 본관은 살림집의 구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전통 차실과 한식집으로 마련되었다. 본관 바로 왼편에 있는 건물(달림방)은 사랑채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구들을 들인 전형적인 온돌방이다. 사랑채 앞쪽으로는 초가로 지은 교육관(다린초당)이 자리잡고 있다. 전통문화 강좌와 더불어 초중고 학생들의 전통문화교육 공간을 위해 세워진 공간이다. 이렇듯 민들레울에 들어선 건축물들은 제각각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갖도록 조영되었다. 민들레울은 궁극적으로 복합적인 어울림 터다. 그러므로 이 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열린 공간이다. 전통생활문화의 열린 마당! 이는 전통문화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정착되어지길 바라는 취지이다. 너무 설명이 장황하게 되었다. 아무튼 앞으로 민들레울이 지어지는 과정을 건물로서, 그리고 조상의 살림집으로서 한옥이 갖는 특성을 살펴보기로 하겠다.田 ■ 글·정순오 (민들레울 대표 031-544-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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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집 한옥, 정체성을 찾아서 아름자리 한옥마을
- 한복, 한식, 한옥. 요즘 한류, 한스타일이란 이름으로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인 의식주衣食住분야에서 우리 고유의 정체성 회복에 한창이다. 특히 한옥 분야에선 중앙정부와 지자체 모두 전통한옥에 현대주거를 접목한 21세기 개량보급형 한옥과 한옥마을 개발에 열중한다. 심지어 한옥의 최대 단점인 단열과 기밀 문제를 해결한 패시브 한옥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시대의 조류를 반영한 듯 민간 주도의 한옥개발 보급 사업도 왕성한 편이다. 그중 ㈜아름자리개발(대표 안승환)에서 경기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방아리에 여덟 가구로 조성중인 '아름자리 한옥마을'이 눈길을 머물게 한다. 튼실한 목재로 가구架構를 짜고 팔작지붕에 기와를 올린 한옥들이 저마다 대갓집의 위용을 자랑한다. 특히 전통 한옥의 심벽구조를 개량한 욋대가 압권이다.글 윤홍로 기자 사진 최영희 기자 취재 협조 ㈜아름자리개발 031-339 -1589 http://cafe.daum.net/armrdr505/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8가구, 고림동 7가구, 대대리 24가구, 운학동 11가구 그리고 최근 개발행위허가를 받은 세종시 27가구 등 이 모두가 ㈜아름자리개발(대표 안승환)에서 조성 중인 '아름자리 한옥마을'이다. 관이 아닌 민간에서 그것도 한옥 사업에 뛰어든 지 2년 남짓한 업체에서 대대적으로 한옥마을을 조성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울 뿐이다. 더욱이 남사면에 들어선 네 가구와 한창 시공 중인 한 가구를 꼼꼼히 살펴봐도 허튼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전통 결구結構의 백미인 사괘맞춤으로 짠 기둥과 도리와 보, 고풍스러운 기와를 정갈하게 올린 고래등 같은 팔작지붕, 기둥과 인방 사이를 채운 단열·방음·내구성이 뛰어난 욋대 벽체 그리고 현대 주거에 맞게 배치한 각 실과 기능성 설비 등은 아름자리 한옥을 돋보이게 한다. 세종신도시 아름자리 한옥마을 본격화| 안승환 아름자리개발 대표는 현대 건축에 전념하던 중 2010년 살림집의 주거문화경향이 한옥으로 바뀌기 시작하자 한옥건축으로 전환한다. 현재까지 한옥을 10채 가까이 지었으니 1년에 네다섯채씩 지은 셈이다. 안대표는 아름자리한옥의 진화는 지금부터라고 말한다." 한옥은 외풍때문에 춥고 불편하며 유지비가 많이든다는데 모두 옛말이에요. 현대한옥에서 살아보지않은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지요. 아름자리 한옥은 친환경 자재를 사용하기에 건강에 유익하며, 기둥과 기둥, 인방과 인방 그리고 합각合閣까지 욋대(숯단열흙벽)로 벽체를 구성해 단열성이 좋아요. 남사아름자리한옥마을에 현재 입주한 4가구 모두 지열보일러(5RT)만으로 난방하는데132㎡(약40평) 기준 겨울철 월평균 난방비가 15만 ∼18만원 정도밖에 안나올정도로 에너지 효율이 높아요. 아직 부족한점이 많지만, 현대한옥에 적합한자재, 시공법 등을 계속해서개발하기에 아름자리 한옥은 진화를 거듭할 거예요. 그동안 기초를 견고하게 다졌다면 지금부터는 굵고 튼실한 목재로 기둥을 세우는 단계라고 할까요. 내년 세종신도시 아름자리 한옥마을을 찾으면, 그 진가를 확인할 거예요." 한옥의 미, 여실히 드러내| 아름자리 한옥마을에 사용한 재목材木은 기둥과 보, 도리, 인방은 더글러스 퍼Douglas Fir이고, 서까래와 개판은 육송이다. 일부 보급형 한옥은 기둥과 기둥 사이, 또는 문이나 창의 아래나 위로 가로지르는 수장재修粧材인 인방이 보이지 않는다. 인방을 생략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 굵기가 가는 재목을 사용하기에 벽체를 구성한 후 내·외장하면 인방이 가려지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한옥의 멋이 줄어든다. 아름자리 한옥마을은 기둥은 9치(27.3㎝), 인방은 7치(21.2㎝)를 사용하기에 일반 황토벽돌(30㎝×15㎝×15㎝)로 벽체를 구성하고 내·외장하더라도 안팎으로 기둥과 인방이 여실히 드러난다. 특허받은 기능성 벽체 욋대| 아름자리 한옥은 황토벽돌이 아닌 특허받은 기능성 욋대로 벽체를 구성한 후 황토로 안팎을 미장하기에 단열성, 방습성, 쾌적성, 건강성 면에서 뛰어나다. 욋대란 수직, 수평, 좌굴 하중에 대응하는 보강재(대나무, 나무 등)를 사용해 틀(프레임)을 만들고, 내부에 왕겨숯을 채운 후 양쪽에 대나무 외를 부착한 것이다. 안성완 아름자리개발 관리과장이 말하는 욋대의 특징이다. "욋대는 숯, 대나무, 나무, 흙으로 만든 친환경 흙벽이에요. 단열성, 축열성, 흡취성, 방음성, 내구성 등이 뛰어나며 지진에도 강해요. 한옥 벽체에 적용하기 쉽게 두께가 다양하며, 중인방이 드러나 미관을 잘 살릴 수 있어요. 공장에서 현장에 맞게 맞춤형으로 생산해 공기工期를 단축하기에 경제적이에요."욋대의 단열성은 어느 정도일까. 방재시험연구원에서 올해 9월 8일에서 10일까지 두께 17㎝ 욋대를 시험한 결과 열관류율이 0.36W/㎡K로 나타났다. 이 수치는 콘크리트 20㎝ + 발포 폴리스티렌 10㎝(비드법 1호)로 이뤄진 벽체의 열관류율 0.33W/㎡K와 맞먹는다. 여기에 황토로 초벌, 중벌, 새벌 마감 후 내측은 한지 등으로, 외측은 회로 마감하면 전체 두께는 18∼20㎝에 이른다. 안 과장은 벽체뿐만 아니라 천장용 욋대도 현재 개발 중이라고 한다. * 우리네 살림집 한옥이란 무엇일까. 기와집, 초가집, 너와집, 귀틀집… 지붕재 또는 벽체만으로 단순 구분할 수 있을까. 한옥에 대한 정의는 명확하지 않으나 분명한건 한국인이 사는 집으로 양옥과 구별된다는 점이다. 아름자리 한옥마을에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을 떠올려 본다. 새것은 늘 새것이 아니기에 옛것으로 바뀌기 마련이고, 그 속에서 전통은 계승된다. 허리 잘린 역사 속에서도 전주 한옥마을이 전통을 계승해 왔듯이… 새것은 그렇게 옛것을 바탕으로 한다. 전통이란 기본에 충실하며 현대 과학과 주거 문화를 접목해 나가는 아름자리 한옥마을에 눈길이 머무는 이유다. 아름자리 한옥마을에서 살아 보니…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방아리 아름자리 한옥마을에 'ㄱ'자형 목구조 팔작지붕 한옥을 지은 70세 동갑인 금병진 씨 부부. 수원에서 현대식 단독주택에 살다가 안사람이 위암 수술을 받은 후 기력이 쇠잔해 전원에서 요양 겸 건강한 여생을 보내고자 아름자리 한옥을 지었다고."안사람이 3년 전 위암 수술을 받았는데 어느 정도 기력을 찾았다지만, 몸에 칼을 댔으니 예전만 못할 밖에요. 그래 자식들의 권유로 아름자리 한옥마을에 집을 지었죠. 황토와 숯과 나무로 지은 집이라 그런지 요즘 안사람 얼굴에 화색이 돌아요. 남향받이라 온종일 볕이 잘 들어 마당에 화초도, 채소도 잘 자라고… 오늘은 텃밭에 재배한 배추 180포기로 김장까지 담갔어요. 아침엔 방죽에 오리가 30여 마리 노닐며, 낚싯대를 드리우면 팔뚝만한 메기와 탱글탱글한 붕어가 낚여 이곳에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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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원주택지/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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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집 한옥, 정체성을 찾아서 아름자리 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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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전원주택] 낙도 움섬의 기와집 을사오적 권중현家
- 오래 전. 지금의 시화간척지가 서해의 검은 물이 넘실대는 바다였을 때, 그곳에 움섬이 있었다. 서해의 여느 섬들처럼 가파른 해변 언덕 아래에 수십 채의 낡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어촌이 매달리듯 붙은 작은 섬이었다. 밀물 때는 바닷물로 둘러싸인 낙도(落島)지만, 썰물 때는 갯벌로 이어져 완전히 고립된 섬은 아니었다. 70년대부터 이곳이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곧 육지가 된다는 은밀한 예측성 정보가 투자자 사이에 나돌았다. 내가 아는 모 사장은 이런 정보에 항상 발 빠르게 움직였는데, 움섬의 많은 땅을 사들여 목장으로 만들었다(이 투자로 그는 지금 엄청난 부동산 부자가 됐다). 움섬 목장에 소를 수십 마리 사 넣고 휴식과 점검을 겸해 자주 찾았다. 덕분에 나도 그를 따라서 움섬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움섬을 처음 찾을 때, 밀물 때라 서신이라는 포구에서 물이 빠지기만을 기다리던 10여 명의 섬사람들과 함께 어선을 타고 들어갔다. 하룻밤을 농장 숙소 격인 집에서 자고, 이른 새벽 상쾌한 바다 공기 내에 저절로 눈을 떴다. 아침을 먹기까지 시간이 남아서 마을 주변을 산보 삼아 둘러보기로 했다. 해변에 면한 급경사지 여기저기에 낡은 집들이 모인 섬마을을 둘러보고는 뒤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섬 건너에 넓게 펼쳐져 있을 바다를 보고 싶어서였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숲 길을 조금 올라가다가, 나는 생각지 않은 광경에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곳에는 대숲에 가려진 낡은 기와집 한 채가 있었다. 서울 근교에서 볼 수 없던 대나무 숲도 신기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낡고 찌그러진 집들만 있는 낙도에서는 상상도 못할 품위 있는 기와집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기와집에 어쩐지 슬픈 적막감이 감돌았다. 행여 시골 동네에서 흔한 제각(祭閣)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엄연히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방과 부엌까지 갖춘 가옥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된 터라 집은 퇴락(頹落)했고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나는 뜨락에 들어서서 기와집을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서투른 동네 목수가 근처에서 베어 온 구부러진 잡목으로 엉성하게 지은 그런 시골형 기와집이 아니었다. 기둥과 서까래를 보니, 굵고 반듯반듯한 게 외지에서 제대로 고른 목재를 들여왔음이 확실했다. 게다가 나무 이음새나 마무리가 깎은 듯이 정확했다. 목수 역시 큰 도시에서 불러온 전문가인 듯했다. 가난한 섬마을에서 살림집을 고급스럽게 지은 사람에게는 필경 곡절이 있어 보였다. 외지에서 들여온 수준 높은 재료와 기술로 지은 기와집. 움섬의 다른 집들과 격이 확연히 다른 기와집을 짓고 산 사람이라면, 타지에서 들어온 재력가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 사람이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을까? 보길도에 자리 잡고 산 고산 윤선도가 생각났다. 그러나 움섬은 보길도처럼 낭만 있는 낙향 생활을 즐길 만큼 풍광이 명미(明媚)한 섬은 아니었다. 나는 가슴속에 뭉게구름처럼 일어나는 궁금증을 달래며 아침 산보를 마치고 돌아왔다. 아침 밥상에서 나는 목장 관리인에게 그 미스터리 기와집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그 기와집요? 뭐 구한말에 대감했던 사람이 숨어살던 곳이라고 하더군요.” “누구였는지 이름은 모르십니까?” “글쎄, 기억이 안 나네요. 하지만 그 후손되는 남매가 이 섬에 살고 있어요.” 나는 그들을 만나서 염치불구하고 내력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점심때부터 술을 좋아하는 모 사장이 바다에서 잡아온 생선들로 한상을 차려 놓고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거기에 휩쓸려 그럴 여유도 갖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 취기가 가시지 않은 기분으로 움섬을 빠져나왔다. 움섬에 다녀온 뒤 회사에 나가면서도 궁금증은 더해만 갔다. 서너 달이 지나고 이틀 쉴 기회가 왔다. 나는 열흘 전부터 모 사장에게 연휴에 그 섬에 가자고 졸라댔다. 연휴 때 골프를 쳐야 한다고 난색을 표하던 그도 나의 끈질긴 부탁에 굴복하고 말았다. 점심에 송산면 서신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배로 일렁이는 파도를 가르며 움섬에 들어갔다. 도착해서 짐 정리를 끝내고 목장에서 일하는 현지인을 소개받았다. 환갑을 넘은 노인이라 동네의 내력을 잘 알듯했다. 나의 질문에 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서울 대감 이름은 잊어 먹었어요. 동네에 아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네…….” 나는 그 대감의 자손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여기엔 손녀만 살지요. 오빠는 서울의 유명한 모 건설회사에 다닌다고 합디다.” 나는 눈치 없이 물었다. “그 손녀를 만날 수 있을까요?” 노인이 주저하며 말했다. “어제 남편하고 육지로 나가던데… 개인 생활을 물으면 별로 안 좋아할 텐데요.” 나는 무안한 기분이 들었다. 대신 노인이 설명을 했다. “대감이 여기에 올 때 수발을 드는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어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대감과 한 몸이 되어 딸을 낳았지요. 대감이 죽고 모녀는 그 집에 살았는데, 그 딸도 결혼해서 아까 이야기한 두 남매를 낳았지요. 남매의 어머니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았는데, 자존심이 대단히 세서 섬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지요. 항상 대감 댁의 혈통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가난했지만 자식 교육도 잘 시켜서 아들은 대학을 마치고 지금 서울에서 유명한 모 건설회사 과장으로 있어요.” 집안 내력을 듣고 보니, 그 손녀뻘 되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사생활을 묻는 것은 실례가 될 듯했다. 나의 궁리하는 듯한 표정을 보자, 같이 온 모 사장 회사의 김 과장이 거들었다. 그는 목장을 열 때 이곳에서 서너 달을 지냈기에 동네 사정을 잘 알았다. “아, 몇 달 전 섬에 들어올 때 배 안에서 사장님과 말을 나누던 부부 생각나세요? 사우디에 같다왔는데 아직 직장을 못 잡고 있다던 사람 말입니다. 그 부인이 대감님 손녑니다.” 나는 금방 그 여자의 기억이 생생이 떠올랐다. 뱃머리에 앉아서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던 여자였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이목구비가 시골 여자 같지 않은 품위가 있어 보여서 기억에 남았다. 나는 그 날 대감에 대해서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단지 늙은 동네 어부 한 사람이 두어 가지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감이 이곳에 자리잡고 어장을 열었는데, 직접 나와서 확인을 안 하니까 아래 것들이 모두 도둑질을 해먹어서 실패를 봤지요. 그리고 해방 전에는 저 기와집에 골통품도 많았는데 도둑들이 들락거리며 모두 훔쳐 같지요.” 나는 그 이튿날 아침 언덕에 올라가서 기와집을 보았다. 비록 퇴락했지만 건축물은 사대부가의 별당처럼 기품이 있었다. 새 집이었다면 금방이라도 예쁜 규수가 문을 열고 내다볼 것 같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이런 외로운 낙도에서 어울리지 않은 기품을 가지고 태어나 쓸쓸히 사그라져 가는 그 모습에서 다시 한 번 연민의 슬픔이 느껴졌다. 나는 사극의 쓸쓸한 피날레의 무드를 느끼며 그 곳을 내려왔다. 목장으로 내려 왔을 때, 사장이 나를 불렀다. “이봐 자네 그 기와집을 지은 주인 이름 알고 싶다고 했지?” “혹시 아십니까?” “내가 알아냈지. 저기에 학교 있지? 거기 선생을 만났는데, 그가 알고 있더군.” 불과 수십 가호의 작은 섬마을이었지만 열 명 미만의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하나 있었다. 선생님 한 명이 전 학년을 담당하는 작은 학교였다. 나는 반가운 생각에 사장을 다그치듯 물었다. “누구랍디까?” “구한말에 농상공부 대신을 역임한 권중현이라는 사람이더군. 유감스럽게도 그는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래요.” “을사오적이라…….”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나는 외딴 섬의 기와집과 역사 속의 인물인 그와의 사이에서 가능한 여러 소설적인 연관 관계를 떠올리며 어떤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서울로 올라오자 말자 권중현이라는 사람의 인적 사항을 조사했다. 당시는 인터넷이 없던 세상이라 큰 도서관 두 곳을 방문해야 했다. 드디어 개략적이지만 그의 신상을 알아낼 수 있었다.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고종 때인 1854년 태어나서 1934년에 세상을 마감했다. 충북 영동 출생. 그는 일찍이 일본어를 배워 친일의 길을 내내 걸었다. 비록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힌 인물이지만 경력은 화려(?)했다. 일본공사와 농상공부대신·군부대신을 지냈고, 합방 뒤에도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고, 중추원 고문과 조선사편찬위원회의 벼슬을 얻었다. 그의 경력이 움섬의 기와집을 세련스럽게 지을 만한 지적인 수준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움섬의 기와집과 연결된 그의 경력에는 특이한 것이 있었다. 그는 망국적인 을사조약에 날인을 하고 암살단의 습격을 받았다. 을사오적 암살단 단원 이홍래, 나인영, 오기호 등의 총격을 받았으나, 악운이 세서인지 살아 남았다. 그는 이 암살 미수 사건 뒤에 합방이 되고 벼슬도 내놓게 되자, 식솔을 이끌고 고향인 영동의 추풍령 아래로 숨어들 듯 피신해서 숨죽이고 살았다. 그후 세상이 조용해지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지내다가 세상을 떴다. 짐작해 보건댄 그는 서울로 이사 온 뒤인 말년에 이 움섬에 자리를 잡은 듯했다. 경력을 보니 그의 움섬 이주에 짐작이 가는 바 있었다. 을사오적으로서 그가 세인들로 받은 비방과 증오는 대단했을 듯싶다. 사실 역사가 매질을 해댄 매국노 친일파 중에는 나중에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거나 심한 죄의식에 시달린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을사오적의 수괴 이완용도 그랬고 일진회 두목 이용구도 그런 후회의 행적을 남겼다. 모르긴 몰라도 권중현도 내내 그런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더구나 자신의 매국 행위에 대한 대가를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가는 위협도 받지 않았던가 말이다. 세상의 비난과 양심의 괴로움 그리고 생명의 안전에 대한 불안감에서 그가 피난처로 찾아 스며든 곳이 이 움섬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추측해 본다. 그의 불안한 심정은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심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암살의 위협을 받고 한때나마 모든 식구를 인솔하고 고향 땅으로 피신했던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어느 을사오적도 그와 같이 이렇게 외진 낙도를 피난처로 삼은 사람은 없었다. 나는 어쩐지 쓸쓸히 낡아 가는 이 낙도의 기와집과 그 주인의 인생을 알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대목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리라. / 전원이 더욱 거칠어 가니 / 내 어찌 아니 돌아가리오. // 이미 내 마음속 한 자락은 무거운 형벌되어 서서히 짓누르니 / 어찌 혼자 슬픔에만 젖으란 말인가. // 지난날 잘못이야 돌이킬 수 없는 일 / 닦아 오는 세월이야 잘해 보리라. // 아직 깊은 수렁에 빠진 게 아닐지니 어제의 잘못된 길 이제야 알았노라 권중현은 세상의 질타와 위협에서 자신을 숨겨 주고 감싸 준 이 외딴 섬의 기와집에서 자신의 한때 잘못 생각해 저질렀던 과오에 대한 반성하며 파고드는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지 않았을까?田 글 김창원 글쓴이 김창원 님은 공인중개사로서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에서 강, 바다, 호수 경관 전문 부동산 ‘물빛뜨락’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문의 : 02)749-0396. www.watervie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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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전원주택] 낙도 움섬의 기와집 을사오적 권중현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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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라이프 2017년 11월호 발간 안내
- <월간 전원주택라이프> 2017년 11월호 목차2017 NOVEMBER Vol.224 ■SPECIAL FEATURE 주택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지붕지붕의 의미는 지붕을 잇는 마감재부터 지붕 잇기 밑바탕(지붕널) 그리고 지붕틀까지 확대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지붕재는 그 종류가 많고, 그 성능과 장단점이 각기 다르다. 따라서 지붕재는 그 특성을 잘 파악하고 지붕 디자인이 갖는 미적인 측면을 고려해 선택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지붕재는 전통적인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에서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슬레이트지붕으로, 1990년대에는 전원주택이 보급되면서 아스팔트 슁글로, 2000년대에는 주택의 고급화와 외관을 중시하면서 이중그림자 아스팔트 슁글을 비롯해 금속기와, 유럽형 점토기와 등으로, 2010년대에는 지가地價가 비싼 택지개발지구에 모던하고 심플한 주택이 늘어나면서 유럽형 점토기와와 징크 등으로 변천해 왔다. 건축물의 위에서 눈, 비, 햇빛 등을 차단하는 덮개의 역할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건축적 공간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지붕에 대해서 살펴보자.080 한옥 초가와 기와집의 현주소084 건물의 패션을 완성하는 지붕088 고단열 고기밀, 고성능 주택의 필수 외기 통기 지붕092 우리 집에 어울리는 지붕재는097 천연 슬레이트 지붕재, 스페인 쿠파CUPA098 오랜 기술의 단단한 자부심, IEQSA 베로징크099 점토기와 지붕재, 로자ROSER100 불연 하우스랩 단열재, 스카이텍Skytech ■2017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KOREA WOOD DESIGN AWARDS목조건축의 우수성과 친환경성, 실용성과 주거의 쾌적함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산림청과 캐나다우드 후원으로 목재문화진흥회와 한국목조건축협회에서 주최해 온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올해의 대상(농림축산식품부 장관상)은 계획 부문은‘休 : 느긋하게 거닐다’(송이선)가, 준공 부문은‘단독주택 The CLT’(최삼영)가 차지했다. 여기에서는 준공 부문 8작품 중 두 채의 단독주택을 소개한다.102 대상 _ 단독주택 The CLT / ㈜가와종합건축사사무소110 본상 _ 도시형 2층 한옥 은평한옥마을, 청인당靑寅堂 / 모노그래프 건축사사무소 ■HOUSE STORY 전원 속 집들에 관한 행복한 이야기118 아파트 3번 옮긴 끝에 지은, 양산 개구쟁이 집124 경험을 바탕으로 지은 두 번째 집, 강화 주택130 마당을 열어 마을과 소통하는, 전주 주택136 소박한 마을에 앉혀진 다가구주택,‘시수재柿樹齋’142 데드 스페이스 없애 공간을 넓게 꾸민, 화순 주택 ■ARCHITECT CORNER 148 올망졸망 돌담과 어우러진, 제주 소소헌154 추억이 쌓이는 아이들의 행복한 놀이터, 수서 주택160 지평선을 닮은, 강화 주택166 저마다의 시선으로 만드는 풍경, 영종하늘도시 상가주택172 STYLING INTERIOR 은평 목조주택 인테리어178 사랑의 집짓기 독거노인을 위한 희망의 집짓기 ■HOUSING INFORMATION Home & Garden 184 정원을 위한 다양한 상상 생활정원 공모전‘식물과 놀자’188 동탄의 옛 정취가 담긴 느릿느릿 걷는 구부러진 길DESIGN POINT 192 방수, 잘 해야 본전이다ARCHITECTURE DESIGN194 flower house 우리 땅은 밟고 삽시다!198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을 간직한 복고 스타일의 어울재자재 가이드200 자연에 사는 듯한 착각이 드는 다양한 인테리어 합판기업 르포202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가치, 삼진벽난로204 NEWS & ISSUE182 애독자 사은 퀴즈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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