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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집] 포인트 벽지로 밝고 화사하게 꾸민 용인 58평 복층 목조주택
- 시멘트 사이딩에다 방부목과 인조석을 외부 마감 포인트로 활용한 연면적 58평(1층 40평, 2층 18평) 경량 목조주택. 아스팔트 슁글을 얹은 가파른 지붕과 꺾인 면이 많은 입면이 눈길을 끈다. 실내는 개방감을 살린 인테리어가 돋보이고, 특히 포인트 벽지를 활용한 벽면 장식이 밝고 아름다움을 더한다. 석성산을 배경으로 정남향으로 자리한 이 주택은 건축주 부부가 노후를 보낼 요량으로 마련했다. 건축정보 ·위 치 : 용인시 처인구 유방동 ·건축형태 : 복층 경량 목조주택 ·대지면적 : 200평 ·건축면적 : 58평(1층 40평, 2층 18평) ·외벽마감 : 시멘트 사이딩, 방부목 사이딩, 인조 파벽돌 ·지 붕 재 : 아스팔트 이중그림자 슁글 ·내장 마감 : 실크벽지, 무늬목(월넛) 몰딩, 적삼목 루바 ·바 닥 재 : 온돌 강화마루 ·창 호 재 : 시스템창호(미국식), 시스템창호(거실, 독일식) ·계 단 재 : ASH 집성목 ·난방형태 : 심야전기보일러 ·설계 및 시공 : 두원하우징, www.doowonhousing.co.kr, 031-338-0425 영동고속도로 용인 나들목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용인시 유방동 송경이·박경자 부부의 목조주택. 송 씨는 은퇴를 계기로 지난해 10월 부인 박 씨의 고향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영동고속도로와 용인시청에서 에버랜드를 잇는 용인-포곡 간 도로가 마을 앞을 지나고 어정-전대 간 도로도 개통 예정이라 교통 여건이 좋은 편이다. 또한 동백지구, 고림지구, 역삼지구, 용인시내 상업지구 등과 가깝고, 용인세브란스병원, 용인중앙병원, 용인서울병원 등도 인근에 위치해 있어 생활·의료 기반시설도 나무랄 데 없다. 개방감 살린 1층 인테리어 배산背山인 석성산을 중심으로 동·서쪽으로 뻗어 나온 언덕들이 마치 날개를 펼친 듯 감싸고, 그 가운데로 실개천이 흐르는 고즈넉한 마을. 이처럼 양지 바른 마을에 이 주택은 좌향을 정남향으로 잡은 데다 큼직한 거실 전면창으로 햇살을 한껏 끌어들여 따뜻한 기운이 넘친다. 시멘트 사이딩에다 방부목으로 포인트를 주고, 전면과 양 측면에는 은은한 색상의 인조 파벽돌로 마감했다. 가파른 박곡지붕에 앞쪽으로 꺾인 면을 많이 내어 입면이 아름답다. 또한 정원으로 꾸밀 부지를 낮게 잡아 조망권을 확보한 점이 눈에 띈다. 1층 내부 인테리어 특징은 ‘개방감’으로 표현할 수 있다. 복도와 거실, 주방에 이르는 동선에 벽을 설치하고 않고 2층을 받치는 기둥만 남겨 놓았다. 이로 인해 거실이 실제보다 넓어 보이고 거실 전면창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막힘없이 집 안 구석구석을 훑는 듯하다. 거실과 연결된 주방은 외부 덱과 통하는 문을 설치해 이동의 편의성을 도모했다. 이와 더불어 기둥과 벽을 잇는 선을 아치형으로 꾸며 단조로움을 보완했으며 TV 뒤편으로 설치한 목재 아트월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조형미가 훌륭하다. 특이하게 이 집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현관 맞은 편이 아닌 좌측 정면으로 냈다. 햇살이 좋은 주변 여건상 보다 좋은 채광과 단열 효과를 누리도록 설계한 것이다. 남쪽으로 낸 계단 벽면에 큰 창을 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다 보니 2층이 1층보다 더 따뜻해 보인다. 보일러 작동을 멈춘 오후 시간임에도 훈훈한 기운이 남아 있을 정도다. 남향으로 낸 계단, 단열 채광 효과 높여 이 주택의 특징은 무엇보다 포인트 벽지를 많이 사용한 점이다. 단조롭기 쉬운 벽면을 보완하고자 포인트 벽지를 활용하는 것이 요즘 추세라지만 그 면적이 너무 넓다. “60이 넘은 부부가 사는 집이라 밝고 화사하게 보이고 싶었다”는 건축주 송이경 씨. 그는 시공사에 여러 가지 벽지로 마감할 것을 주문했다고. 포인트 벽지를 방, 복도, 계단, 거실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인테리어 효과를 낼 만큼 무늬와 색상이 다양하다.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지난해 10월 이곳으로 입주한 건축주 부부. 땅을 밟으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은 마음에 곧바로 전원행을 결심했다. 3개월간 전원에서 생활하다 보니 무엇보다 답답하지 않은 생활 여건이 너무 좋다고 한다. 요즘 운동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는 송이경 씨는 벌써부터 봄이 기다려진단다. 겨울을 앞두고 입주한 터라 제대로 정원을 가꾸지 못했기에 올봄에는 나름대로 정월을 가꿔 볼 요량이다. “정원에 잔디도 깔고 갖가지 야생화도 심고… 이것저것 계획한 것들이 많아요. 지금은 나무 몇 그루만 덩그렇게 심어 놓았는데 봄이면 이놈들과 어울릴 만한 친구들을 소개시켜 줄 겁니다. 그리고 남으면 텃밭도 일궈야지요. 그게 다 전원에 사는 맛 아니겠습니까.” 글 홍정기 기자 · 사진 박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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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집] 포인트 벽지로 밝고 화사하게 꾸민 용인 58평 복층 목조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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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동에서 그대로 옮겨온 한옥 ‘민들레울’
- 건축주가 직접 쓴 건축일기 4 천연동에서 그대로 옮겨온 한옥 ‘민들레울’ ‘민들레울’은 본채와 사랑채, 교육관, 측간 등이 초가와 기와 돌기와 등으로 구성되었다. 다도와 식문화를 위한 공간인 본관은 팔작집 형태이고, 서예나 전통문화강좌 등 전통문화의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다린 초당’은 고가(古家)에서 헌 목재를 구해 임의로 지은 초가이다. 그리고 객을 위한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작은 기와집은 구들을 들인 맞배집 양식이다. 한정식집으로 재 구성되어 일부 실내 인테리어 등에 현대적인 소재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민들레울’의 기본 골격과 형태에 있어서는 전통한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옥’이 사라져가고 있다.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사고로 오늘날 한옥은 그 설자리를 잃었고, 5천년 우리전통문화도 함께 사라져 가고 있다. 집은 인간에게 단순히 생활을 위한 공간만은 아니다.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요, 삶을 투영하는 거울이다. 따라서 한옥은 우리조상의 삶의 지혜가 묻어있는 문화유산이며, 때문에 이러한 한옥을 보존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정순오씨는 사라져 가는 한옥을 안타까워하며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는 철거 위기의 한옥을 옮겨 자신의 생활터전 ‘민들레울’을 꾸몄다. 전통문화의 공간으로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다는데, 그의 한옥 이야기를 실었다. 펑펑 눈이 내린다. 소복소복 눈 내리는 소리에 방문을 활짝 여니 누리가 온통 눈부신 빛으로 아우성이다. 군불지핀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용마루와 기와골, 처마와 그 너머 나무위로 다복다복 쌓이는 눈을 바라보니 마음에는 어느새 평화가 내려앉는다. 흙내음, 숨소리, 바람소리 이곳에 둥지를 틀고 집을 지은 이후 모처럼 느끼는 아늑함이다. 한옥목수도 아니요 그렇다고 건축가도 아니며 한옥에 대한 식견도 거의 없던 내게 한옥이 그 어떤 건축물모다도 아름답고 위대하게 다가온 것은 환경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하면서다. 한옥은 환경과 생명, 주변과 자연적 본능에 충실하다. 옮겨다닐 수 있는 한옥 집을 옮길 수 있음은 한옥이 가지는 또 하나의 커다란 장점이다. ‘집을 옮긴다. 사람만 이사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아예 통째로 옮긴다는 것’, 현대 건축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치의 빈틈도 없이 치목하여 기둥과 도리, 보 등이 서로 맞물리므로 못을 사용치 않고도 수백 아니 수천 년을 견딜 수 있고, 또 필요하다면 그대로 해체해 다른 곳으로 옮겨 지을 수 있는 것이 한옥이다. 전통양식을 살리려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던 한옥을 옮겨 지은 ‘민들레울’은 가능한 옛 방식을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일부 실내 인테리어 등에 현대적인 소재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기본 골격과 형태에 있어서는 전통한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했다. 우선 옛 기와와 집의 기본 골격이 되는 기둥, 보, 도리, 서까래 등을 그대로 살렸고 지붕은 서까래 위에 산자를 엮어 흙을 올렸으며, 담벼락도 흙벽돌과 옛날 적벽돌을 구해 마감했다. 그리고, 이실집인 ‘민들레울’은 본채와 사랑채, 교육관, 측간 등이 초가와 기와 돌기와 등으로 구성되었다. 다도와 식문화를 위한 공간인 본관은 팔작집 형태이고, 서예나 전통문화강좌 등 전통문화의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다린초당’은 고가(古家)에서 헌 목재를 구해 임의로 지은 초가이다. 그리고 객을 위한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작은 기와집은 구들을 들인 맞배집 양식이다. 그러나 주건물인 본관은 한정식집을 구상했기에 이에 맞도록 실내구조를 많이 변경하였다. 우선 대청을 기존의 네 칸에서 여덟 칸으로 늘리면서 고주를 하나 없앴고 대들보를 하나 더 들였다. 그리고 출입구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다기 전시실을 만들었으며, 벽면을 전면창으로 처리한 전통차실을 하나 더 마련했다. 그런데 다른 곳은 모두 띠살문이나 완자창 등 우리 전통 문을 달았지만 이 부분만큼은 실내에서도 바깥 풍광을 음미할 수 있도록 현대적 소재인 유리를 도입, 전면창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고심 끝에 결정한 것이지만 전통한옥에 현대소재를 도입한 것이 그리 탐탁치는 않다. 사람을 위한 집, ‘한옥’ 집은 사람의 기를 만나 생명을 얻게 되고 사람은 다시 집의 기를 통해 건강한 생명력을 얻게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수 있는 집,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집, 얘기 거리가 있고 사람을 보듬고 쓰다듬어줄 수 있는 집은 한옥이다. 한옥이 현대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사라진 원인을 생각건대 이는 집이 갖는 여성성을 중요시하지 않음에 있다. 이는 ‘한옥의 현대화’, ‘오늘날의 한옥’에서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사고는 친환경적이고 생명을 중시하는 한옥의 가장 큰 장점인 자연과의 교감에 둔감하게 만들었다. 전통문화의 공간으로 ‘민들레울’은 단순히 영업집으로 쓰여지기 위한 것은 아니다. 전통문화의 공간으로 그 자리를 마련하고자 구성했다. 우선 건물로서의 ‘민들레울’은 전통에 바탕을 두고 옛것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건물로서의 가옥에서 나아가 집이 갖는 문화성을 고려하였다. 즉, 생활문화공간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다. 정월대보름 놀이, 단오제, 다린 초당에서 매주 강습되는 서예교실, 필요에 따라 열리는 전통문화 강좌 등이 그것이다. 전통생활문화의 열린 마당! 이는 전통문화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정착되어지길 바라는 취지에서다. 초가와 돌담이 문화와 예술이 됨을, 마루와 마당이 훌륭한 무대와 한바탕 어울림의 장이 됨을 굴뚝과 창살이 삶에 녹아 든 영혼의 표현임을 내 삶의 둘레에 스르르 녹아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田 ■ 글 정순오 / 사진 김성용 ■ 건축정보 위치: 경기 포천군 소홀읍 직동리 부지면적: 4백평(준농림 전, 답) 건물형태: 한옥(본채-팔작집, 별채-초가, 사랑채-맞배집) 건축면적: 본채 45평, 별채(초가) 19평, 사랑채 4평 공사기간: 6개월 실내구조: 본채(대청, 부엌, 방 2), 별채(방1, 홀1), 사랑채, 측간 골조(보, 도리, 서까래 등): 소나무 육송(천연동 한옥에서 옮김) 벽체구조: 본채, 사랑채-흙벽돌, 별채-황토(맞벽치기) 외벽마감: 황토미장 내벽마감: 한지 바닥재: 비닐장판 지붕마감: 전통기와(천연동 한옥에서 옮겨 얹음) 난방형태: 석유 보일러 식수공급: 지하수 ■ ‘민들레울’ 031-544-0082 ■ 미니사전 고주(高柱): 높은기둥. 용-마루: 지붕 위의 마루. 옥척(屋脊). 치목(治木):목재를 다듬고 손질하는 것. 치목-하다 (자) 산ː자(子): 지붕 서까래 위나 고물 위에 흙이 떨어지지 않도록 나뭇개비 또는 수수깡을 가로 펴서 엮은 것. ∼를 엮다. 팔작-집 (八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아 지은 집. 합각-집(合閣-). 다린: 차(茶)의 벗(友) 초당(草堂): 집의 원채에서 따로 떨어진 정원에 억새·짚 등으로 지붕을 인 작은 집채. 맞배-집: 맞배(박공)지붕으로 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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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동에서 그대로 옮겨온 한옥 ‘민들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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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범 시인의 시로 짓는 집] 정월의 집
- 정월의 집 김창범 아직 밀풀 냄새가 풍기는 방, 새 문종이로 말끔하게 도배한 사랑방에 정월 햇살이 쏟아진다. 콩기름 먹인 따끈한 장판 위에서 아버지는 이른 점심을 준비하신다. 발갛게 숯불을 피운 풍로 위에 작은 솥을 올려놓고 찬밥에 김치를 썰어 얹는다. 몇 방울 참기름을 곁들여 볶는 정성에 고소한 냄새가 온 방에 넘친다. 팔랑대는 문풍지 사이로 흰 눈 쌓인 마당이 문득 내려다보인다. 소반 가득히 내려앉는 햇살을 받아들고 아버지와 마주 앉는다. 아버지는 도란도란 새해 새 집을 지어 가신다. 내 등을 다독이며 들려주시는 목소리에 툇마루 참새들이 호르르 날아오른다. 나도 활짝 방문을 열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 낮달을 바라본다. 올해도 우리 집은 마음 높이, 높이 지어져간다. *시작 노트 _ 보이지 않는 집을 지어가며 음력 설을 기다리던 새해 어느 날,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홀로 점심을 준비하신다. 어머니는 이웃집에 일보러 가시고 참 한가로운 낮이다. 안동에서 팔십 리를 더 들어간 낙동강 강변의 작은 마을은 비록 가난하지만, 나에게는 행복한 곳이다. 작은 기와집에서 한약방을 운영하시는 아버지는 가끔 나에게 살아가는 얘기를 들려주시곤 하셨다. 집이란 겉으로 보이는 집보다는 보이지 않는 집이 더 따뜻하다.“정월의 집”은 아버지와 함께 마음으로 지어가던 우리 집, 희망의 집이다. 또다시 새해 정월이 왔다. 저마다 마음의 새 집, 따뜻하고 아름다운 집을 지어가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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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범 시인의 시로 짓는 집] 정월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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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집을 찾아서 03_노무현 태통령 생가
- 그리운 바보, 노무현을 만나다 벚꽃이 만개한 4월 중순,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 대통령 생가를 찾았다. 낮은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아담한 초가집 한 채가 바보 노무현 대통령의 소박한 미소와 그대로 닮았다. 그리운 사람, 그리운 대통령 노무현. 그의 삶이 시작된 곳을 들여다본다. 글과 사진 | 박치민 자료제공 |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www.knowhow.or.kr "생가 기억 그림입니다. 형님과 누님이 작성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꼭 정확한 것 같지 않습니다만 비슷합니다. 과거 그대로 사실적인 복원도 중요하겠습니다만, 지금 보아서 아름답고 균형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머지는 적당하게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화장실은 아래채 안으로 배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벌 수고 끼쳐서 죄송합니다." 김해 봉하마을의 가장 맨 끝에 있는 초가집. 노무현 대통령의 삶은 이 집에서 시작됐다. 노 대통령은 1946년 9월 1일 이곳 초가집에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 씨와 어머니 이순례 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을 끝에 있는 과수원집이라 당시 동네에선 노 대통령을 경상도 사투리로 ‘끄티집 막내아들’ 혹은 ‘과수원집 막내’로 불렀다고 한다. 검박한 초가집 형태의 생가 지금의 생가는 대통령 퇴임 후 김해시에서 철저한 고증과 자문을 통해 원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생가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노 대통령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생가 모습에 대해 자문하는 등 어떻게 되면 좋을지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이때 그는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되, 생가를 방문한 사람들의 쉼터가 되기를 바랐다. 단지 보여주기 위한 집이 아닌 사람들의 향기가 묻어나는 공간이 되길 원한 것이다. 2008년 말 생가 복원 설계가 마무리되고, 2009년 2월 착공, 7개월만인 그해 9월에 완공했다. 후면에서 바라본 사랑채.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단출한 초가집으로 이곳에서 노 대통령의 조부모님을 포함해 총 9명의 식구가 살았다. 노 대통령의 생가는 2009년 9월에 복원이 완공됐다. 노 대통령은 복원된 생가를 끝내 보지 못하고 서거했다. 줄곧 봉하마을에 거주한 어르신들은 복원된 생가를 보며 “너무 똑같이 지었다”라며 본래 생가 모습과 닮았음을 증언한다. 복원된 생가는 건축면적 37.26㎡(11.29평)인 본채와 건축면적 14.58㎡(4.42평) 규모의 아래채로 구성됐다. 두 채 모두 초가 형태의 집으로 가족의 주 생활공간인 본채는 방 2칸과 마루, 부엌이 있고, 4평 남짓한 아래채에는 헛간과 옛날식 화장실이 조성돼 있다. 이 작은 집에서 노 대통령의 조부모님을 포함해 부모님과 3남2녀의 형제자매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김선옥 김해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생가의 본채는 전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구성된 단출한 형태의 초가집”이라며 “대통령은 이 본채의 방에서 천자문을 외우기도 하고, 마당에서 놀며 멀리 뱀산을 바라보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노 대통령은 이곳 생가에서 8살 때까지 살았다. 이후 형님의 학비 문제로 생가를 팔고 인근에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이후로도 2번 더 이사를 하며 봉하마을에서만 생가 포함 4군데 집에 살았다. 1973년 권양숙 여사와 결혼 후 마지막 집에 살 때 뱀산 중턱에 흙으로 된 ‘마옥당(磨玉堂)’을 짓고 고시공부를 했으며,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부산으로 이사했다. “태어나고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여기(생가) 살다가 형님 대학교 간다고 아버지가 집을 팔아 작은 집으로 이사 가고, 그 다음은 더 작은 집으로 이사 가고. 그렇게 주민등록초본 칸을 다 메우고도 모자라 한 장 더 붙일 만큼 이사를 많이 다니다가 청와대 갔더니, 집이 엄청 크대요. 하하 참.” 복원 전의 생가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 생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상량문 2개가 발견됐는데, 그중 5m 크기의 상량문에 ‘소화 14년 기묘 음 5월 15일 오시 입주상량’이란 붓글씨가 새겨져있었다. 이를 통해 생가가 처음 건립된 것은 노 대통령이 태어나기 이전인 1938년인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또 다른 상량문은 3m 크기의 나무판으로 ‘단기 4305년 임자 정월 21일 병신 오시 상량’이란 글이 적혀 있어, 1972년 당시 생가를 슬레이트 형태로 재건축할 때 올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생가 내부에는 반닫이와 앉은뱅이책상(서안), 물레, 쌀독 등 당시 생활상에 가장 가까운 소품들을 함께 비치했다. 사랑채 안방. 노 대통령은 이곳 안방, 서안이 위치한 자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부엌 내부. 방 밑으로 2개의 아궁이가 놓여있으며 도자기식기류와 철체도시락, 쌀항아리, 짐을 머리에 일 때 머리에 받치는 똬리 등이 함께 복원돼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대통령 퇴직 후 고향으로 돌아온 노 대통령. 그에게 고향인 봉하마을과 생가는 어떠한 의미였을까. 아마 어릴 적 막내로서 사랑받았던 행복한 추억과 동시에 가난으로 인한 설움, 그리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장소로써 기억되지 않았을까. 노 대통령은 해방 후 이듬해인 1946년에 태어나 전란 통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유년 시절을 보낸 세대에게 가난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사회는 혼란과 공포로 가득했고, 먹을 것은 늘 부족했다. 봉하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가 많이 오면 범람한 낙동강 물이 농작물을 쓸어가 마을 사람들은 산으로 계곡으로 먹을 것을 찾아다니기 바빴다. 가난은 공기처럼 만연했고 빈촌 살림살이는 다 고만고만했다. 그래서일까. 막내로 사랑을 독차지했던 소년 노무현에게 가난은 오히려 대수로운 게 아니었다.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봉화산과 자은골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칡을 캐고, 진달래 먹고, 물장구를 쳤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읍내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가난은 다른 관점으로 다가왔다. 당시 읍내의 학교에선 시골과 읍내 아이들이 현저하게 구별됐다. 옷차림과 학용품부터가 달랐고, 일부 선생님들은 읍내 아이들을 편애했다. 시골 아이였던 소년 노무현은 이때 경험한 빈부 차이로 인해 가슴에 많은 상처가 남게 된다. 그리고 이는 곧 열등감과 동시에 반항적 태도로 이어졌다. 자서전에서 그는 초등학교 시절 급우의 새 필통을 자신의 헌 필통과 바꿨다가 들켜 망신당한 일과 읍내 부잣집 급우의 책가방을 면도칼로 찢어버린 일들을 고백한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에게 가난에 대해 많은 생각을 안겨주었고, 가난은 곧 극복해야 할 대상이자 삶의 의지로 작용했다. 1965년 부산상고 3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해운대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 앞줄 왼쪽이 노 대통령. 고등학교 졸업 후 노 대통령은 어망 제조업체에 잠시 근무하다 그만두고 건설현장에서 노동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노 대통령은 자전 에세이집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가난의 상처는 나의 잠재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동시에 심어줬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성적이 우수했는데도 가난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도, 대학도 포기해야 했던 노 대통령.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홀로 공부해 인권변호사가 된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늘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서민을 위해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 바보 대통령 노무현. 초라하지만 따뜻한 그의 생가를 바라보니 그가 더욱 그립기만 하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제가 생각하는 사회는 사람들 모두가 먹는 것과 입는 것 걱정 하지 않으면서 하루하루 신명나게 사는 것입니다." 문의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1688-0523 / www.knowhow.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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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집을 찾아서 03_노무현 태통령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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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으로 가는길] 전원에 살려면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라(1)
- 시골에서 살려면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도록 작으나마 헌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시골 사람은 도시민에 비해 때가 묻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실제로 겪어 보니 배타적일뿐더러 도시인 뺨칠 정도로 똑똑하다는 것에 많이들 놀란다. 또한 도시인에 비해 비사교적이고 약간은 폐쇄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기란 쉽지 않다. 적잖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우선 내 마음을 먼저 열어야 한다. 그리고 직접 가서 두드려야 한다. 시골 사람의 마음을 두드려라 “시골에 살려면 내 마음을 먼저 열라”는 말 대신 필자는 “열고만 있지 말고, 직접 가서 두드려라.” 이렇게 외치고 싶다. 전원에서 처음 생활하다 보면 토박이들의 살가운 정(情)은커녕 오히려 배타적이라는 걸 금새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순박하고 정도 많던 사람들이었다는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고도로 발달된 매스미디어가 도농(都農) 간의 격차를 좁혀 놓은 탓일까! 시골 사람은 도시민에 비해 때가 묻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실제로 겪어 보니 배타적일뿐더러 도시인 뺨칠 정도로 똑똑하다는 것에 많이들 놀란다. 아니, 시골 사람이 똑똑하고 아는 게 많다기보다는 시골 사람이라고 무시한 때문이 아닐까! 특히 부동산과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다. 도시민보다는 경험이 많기에 부동산과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말조심, 입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알아도 모르는 척 조심하고 시골 사람에게 한 수 배운다는 마음으로 임해 주길 바란다. 또한 도시인에 비해 비사교적이고 약간은 폐쇄적인 것도 사실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도 처음 내려왔을 때, 보는 사람마다 먼저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네려고 여러 번 노력했다. 그러나 반응은 ‘웬놈이 인사를 하는 거야’하는 식으로 의아스런 표정들뿐이었다. 나이가 한참이나 적은 사람들한테도 얼마나 깍듯한 인사를 많이 했던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서로 위아래를 찾고 허심탄회한 사이가 되었다. 다음은 필자가 이곳으로 처음 이주했을 당시 대화 내용의 일례다. 부근에 사는 아저씨께 “고추는 언제 심으면 되죠?” 하고 물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남이 심을 때 심어.” 그것이 대답이었다. 남이 똥장군 지면 너도 지라는 뜻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리 기분 좋은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오래 살다 보니 그 말뜻을 통감(痛感)하게 되었다. 얼마나 함축성 있는 대답인지 다시 한번 잘 음미해 보자. 고추는 몇 월 며칠쯤에 심으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어떨 땐 기후 탓으로 며칠 차이가 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경험 있는 우리가 심을 때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심으라는 그런 뜻이었을 게다. 그렇지만 그 때는 무척이나 불쾌했던 게 사실이다. 시골 사람은 책임지는 말을 잘 하려들지 않는다. 공연히 안 해도 될 말을 했다가 쓸데없는 구설수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는 마음에서일 게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지나다 보니 ‘너는 너’ ‘나는 나’ 서로가 시큰둥하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의 심중을 조금씩 알고부터는 도타운 정으로 변해 갔다. 그래서 나중에 온 사람들이라면 이 고장에서 대대로 살아 온 이들에게 먼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한 발짝 다가가도록 마음의 자세를 낮추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마을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아라 시골에서 살려면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도록 작으나마 헌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가볍게 생각하면 토지나 전원주택을 취득 또는 처분할 때에는 주위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을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지 못할 때의 불이익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집 지을 때는 물론, 땅을 구입한 후라도 바로 돼지 한 마리쯤 잡아(돼지는 값도 싸고 여럿이 먹을 수 있어 좋다) 동네잔치를 벌이면 좋다. “어떻게 돼지를 잡느냐” 라고 물을 필요는 없다. 그쯤은 큰돈을 안 들이고 다 해결할 수 있으며 마을 사람들 중에는 그 방면 전문가가 꼭 한두 명씩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마을의 경조사도 가능하면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이 주민들과 유대 관계를 넓히는 길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시골마을에는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이른 아침에 마을 확성기에서는 이미자 씨나 주현미 씨 노래가 귀 따갑게 흘러나온다. 그것은 이장님이 지금부터 공지사항을 안내하려고 하니 들을 준비를 하라는 예고 방송이다. 여름철에는 창문을 열고 지내므로 잘 들리지만 위치에 따라서는 띄엄띄엄 들리기도 한다. 주로 문을 닫고 생활하는 겨울철에는 더욱더 안 들린다. 방송을 잘 듣지 못했다면 꼭, 마을회관이나 이장님한테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바란다. “오늘은 ○○어른의 생신이니 아침 들러 오세요.” “마을 대동회 날이니 점심을 같이 합시다.” “정월 대보름날 척사대회를 하는데 주민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비료(또는 씨앗)을 타가세요.” 이 모두 전원생활을 하는 데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일이다. ‘전원일기’라는 드라마에서 많이 접했지만 실제 전원생활을 하고 보니 절대로 무시해선 안 되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을 땐, 간단한 선물이라도 가져가서 예를 갖추는 것이 전원생활을 하는 데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박카스 한 상자면 어떻고 싼 소주 몇 병이면 어떤가. 모든 것이 다 성의인 것을…. 옛말에도 “코밑에 진상이 최고” 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하찮고 조그마한 선물이 (필자는 선물이란 표현보다는 관심이라 하고 싶다) 얼마나 커다란 인정이 되어 돌아오는지 곧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공짜란 없는 법이다” 라는 말이 생긴 것일까. 전원생활은 품앗이 생활이다 ‘품앗이’란, 국어사전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힘드는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면서 품을 지고 갚고 하는 일.” 전원생활은 아파트 생활하고는 많이 달라서 ‘이웃과 어떻게 융화를 잘 이루느냐’ 하는 것이 필수 관건이 될 수 있다. 아파트에서는 서로 조금 섭섭한 일들이 있다 해도 문을 닫고 들어가 각자 생활하면 그뿐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나 가끔 마주칠까, 별로 만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이 그리운 전원생활은 전혀 다르다. 집도 띄엄띄엄, 사람도 드문드문 그래서 시골은 적적하기 마련이다. 우선 이웃이 많지 않기에 서먹한 감정을 오래 지니고 있으면 그만큼 더 외롭다. 또한 무거운 짐이나 가구를 옮길 때, 특히 농사지을 때는 이웃의 아쉬움은 말할 수 없이 크게 다가온다. 이렇듯 전원생활은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일상이라 사는 맛이 절로 나는가 보다. “갓 담근 거야, 한번 맛봐.” “요번에 동해안에 갖다 사온 덜 마른 오징어야.” 이처럼 인심이 넘쳐나는 곳이 시골이다. 시골에선 한 해에 적어도 서너 차례 동네잔치가 벌어진다. 그런데 사실 외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남의 집 불 보기’다. 이제부터라도 주민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도 자주 참석하여 작은 성의라도 표하면서 서로 사이를 좁히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그 자체가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와 내 가족만 살려고 이주해 왔다면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전원생활이다. 주민들하고 사귀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 전원생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왜냐면 주민들은 나름대로의 멋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여러 가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대화에 적극 나선다면 풋풋한 시골 인심을 맛볼 수 있고, 또한 여러 가지 유익한 지식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재차 말하지만 그건 반쪽 전원생활임에 틀림없다. 田 ■ 글 양정일 ∴ 글쓴이 양정일은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있는 한국전원 부동산 컨설팅에서 전원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컨설팅을 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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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으로 가는길] 전원에 살려면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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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린초당과 공동체 문화의 열린공간 ‘마당’
- 다린초당과 공동체 문화의 열린공간 ‘마당’ -------------------------------------------------------------------------------- 요즘 귀농 희망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IMF를 만난 시대적 산물이라 약간은 씁쓸하지만... 아무튼 반가운 일이다. 나 자신도 앞으로의 희망이 농사짓고 이름 없는 한 촌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귀농이 ‘환상적인 전원생활’이나 단순히 시골로의 도피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귀농을 결심한 이들이 손수 집을 자신의 집을 지으려는 자세도 한번쯤 가져 주었으면 한다. 이는 번듯한 집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지은 집’은 귀농을 일회성이 아닌 평생 동안의 생업으로 이끌어 줄 시금석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집은, 집다운 집은 몸뿐만 아니라 제 영혼까지 담는 또 하나의 작은 우주일 테니까.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민들레울이 지어지는 과정과 함께 나 자신이 이 속에서 얻게된 조상의 삶의 지혜를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너무도 짧은 지식으로 출발한 것으로 얼마나 조상의 삶의 지혜를 이끌어냈는지, 아니 오히려 조상의 사고에 누를 끼치지나 않았는지 걱정하며 이제 마지막으로 본관 민들레울과 더불어 지어진 초가, ‘다린초당’을 통해 우리네 조상의 집을 다시금 이야기하고 또 마당이라는 것이 우리네 조상의 살림집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집에서는 어떠한 의미를 부여받는지를 살펴보며 한옥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 ■ 연재순서 1 조상의 삶이 담긴 우리네 살림집 ‘한옥’ 2 규모설정에서 기둥 세우기까지 ‘작은집이 길하다’ 3 입주상량과 수장 “평당 얼마 들었소” 4 흙일과 담벼락 ‘자취를 감춘 흙일’ 5 다린초당과 공동체 문화의 열린 공간 ‘마당’ 초가 초가삼간이라는 말이 있다. 궁핍한 생활의 대명사로 쓰이는 말이다. 이는 초가가 우리에게 있어서 궁색한 모습으로 각인 되어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초가가 그 만큼 서민적이라는 말이 된다. 초가는 우리네 조상의 가장 서민적인 삶을 담고 있다. 때문에 정겨움으로 우리의 정서에 아직도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초가지붕의 외형은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소박한 심성의 우러나옴이다. 이는 우리 문화의 바탕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자연 친화의 마음이 산의 형상을 집의 형상에 담아낸 것이다. 즉 자연 속에서 함양해 온 인격이 마을 주변의 산봉우리와 닮은 근사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옥에 있어서 초가는 매우 꺼리는 입장이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궁핍한 생활의 대명사격인 초가가 주는 이미지가 물질만능주의의 오늘날 일고의 가치도 없음은 당연하거니와 또 한편으로는 관리와 유지보수의 어려움 때문이다. 와박사를 불러 품을 들였던 기와지붕과 달리 농경생활이 주를 이루었던 시절, 추수가 끝난 후 이엉을 엮어 얹는 게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었으나 농경문화가 사라진 오늘날 초가는 기피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집이 지니고 있는 문화성을 생각해 볼 때 지붕의 변모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한옥이 홀대를 받아 명맥만 유지해 오고 있는 오늘 남겨진 집들이 대부분 기와집이지만 오늘날의 한옥을 살려낸다면 자연의 심성과 닮은 초가집을 권장하고 싶다. 이는 자연 친화적문화의 보존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최소한의 자연에 대한 배려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린 초당 예전의 초가는 반상(班常)을 가리는 계급사회의 한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신분상승을 꾀하는 이들에게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갖는 상징성은 대단했다. 그러나 신분에 대한 갈등이 타파된 오늘날 초가집이 지닌 고향의 품같은 포근함을 기필코 살려내야 할 과제이다. 민들레울을 두르고 있는 교육관은 초가집이다. 본관과 상랑채가 이실집이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이 기와집이 되었는데 이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다린초당은 초가로 지었다. 한옥을 살려야 한다는 당위성 하나로 건축에 대한 깊은 식견 없이 벌렸던 일인지라 어설픈 점이 많지만 일단 초가로 지을 수 있었음에 안위를 삼는다. 다만 아쉬운 점은 지붕의 물매가 싸지 못하고 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량집으로서 마루대공과 동자주 대공의 높이가 고려되어 서까래 자체의 물매는 적당한 편이지만 새우흙을 받을 때 물매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96년도에 지어져 현재까지 세 번 이엉을 올렸는데 본때가 나지 않는다. 이번에 새로 이엉을 올려 제대로 물매를 잡아볼 작정이다. 마당 우리 조상네 살림집은 대개 남향한다. 그리고 예로부터 마당에 나무나 꽃을 심어 정원을 꾸미지 않았다. 집안에서 바라보아 멀리 보이는 앞산과 시냇물, 수목, 흐르는 구름 등 자연 그대로를 마당으로 끌어들이는 천연스러움을 선호했다. 이는 양기(陽氣)를 받고자 함인데, 이처럼 건물이 양기를 받기 위해서는 마당의 존재가 필수적이었으며, 또 밝은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당이 비워져 있어야만 했다. 특히 한옥은 양옥과 달리 깊은 처마가 있어 직사광선을 받지 않으므로 마당의 밝은 기운이 필수적이었고, 마당의 밝은 백토에 반사된 햇볕은 대청과 집 전체를 명랑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햇빛을 받아들이는 안뜰, 백토가 깔린 마당은 자칫 침울한 집의 기운을 명랑하게 해줄 뿐 아니라 뙤약볕이 내리쬐는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에 안뜰과 뒤뜰에서 솔솔 상쾌한 바람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에대해 큰 나무가 마루 앞에 있으면 좋지 않고 뜰 가운데에 나무를 심는 것도 좋지 않다고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지적했다. 심지어 “뜰 가운데 있는 나무를 한곤(閑困)이라 하는데 뜰 가운데 오래 심어 놓으면 재앙이 생긴다”라고 경계했다. 마당은 또한 공동체 문화의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로서의 구실도하며 온 가족이 한 여름밤에 모깃불을 피워 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얘기꽃을 피우는 바깥의 사랑방이기도 하다. 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며 옛날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던 우리들만의 낭만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달빛 머무는 뒷뜰 살림집 앞의 마당은 햇볕을 받아들이는 공뿐 아니라 작업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곡물과 과실을 널어 말리는 적은 물론 탈곡과 수장공간의 역할도 한다. 곡물의 건조 및 이엉엮기 등의 작업공간으로서 마당은 중요한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안마당의 역할과 달리 살림채 뒤에 있는 뒷마당은 주로 수장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곡물과 농사도구 식료품 등 통풍과 채광이 필요한 물건들을 뒷뜰에 보관하였던 것이다. 신분이 높은 저택에서는 대부분 앞뜰에 정원을 조성하는 대신 뒷뜰이라고 부르는 후원에 동산을 조성한다. 그러므로 뒷뜰은 여인들의 호흡이 머무는 여성적 공간이며 시적 정취가 넘치는 곳이다. 여기에 앞뜰과 뒷뜰 한켠에는 장독대가 설치되어 안살림을 맡은 아낙네들에겐 더 할 나위 없이 소중한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마당- 민주주의 광장 마당이 갖는 또 하나의 놓치기 쉬운 의미는 민주적 광장이라는 점이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지신밟기를 하는 놀이의 마당이며 집안 대소사간 모든 일들이 마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동리의 중심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마을의 큰 일들이 결정되고 치뤄졌다면 집마당은 가족간의 의사소통과 정감을 나누던 열린 마당이다. 일과 놀이를 함께 즐겼던 민족이고 보면 마당은 이러한 신명을 풀어내는데 없어서는 안될 민주주의 광장인 셈이다.田 ■ 글·정순오 (민들레울 대표 031-544-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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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린초당과 공동체 문화의 열린공간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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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형(行舟形)은 행운의 터
- 풍수지리 옛날에는 배가 재물과 사람을 운반했기 때문에 배에는 사람과 재화가 모인다고 하여 배모양의 땅에 묘를 쓰거나 집을 지으면 동네는 물론 집안이 번창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강을 낀 마을이 크게 발전하였고 삼랑진, 청주, 공주, 제물포, 마포, 강화도 등 진, 주, 포, 도의 지명를 가진 마을이 크게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행주형(行舟形)은 행운의 터 배형(행주형)은 개인의 집터뿐만이 아니라 읍이나 도읍지와도 관련이 깊은데 경주, 부여, 평양은 모두 이 같은 형국이라고 믿고 있다. '진, 주, 포, 도'자가 지명의 끝에 붙은 고을 이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행주형(行舟形)의 집터는 행운을 불러오는 길지(吉地)로 여긴다. 그러나 조리형이나 삼태기형국은 차면 쏟아버리는 격이므로 돈을 벌면 이사해야 하듯이 행주형은 배의 성질상 항해를 요하기 때문에 떠나는 배를 잡아두려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배에는 많은 것을 싣는다. 어전에는 잡은 고기를, 상선에는 팔 물건을, 화선에는 온갖 잡화를 가득 싣는다. 따라서 항해하는 배는 부귀영화를 나타낸다. 그러나 배는 물에 떠 다니는 까닭에 언제나 위험이 뒤따른다. 예로부터 행주형 길지의 안전을 위해 어려가지 금기를 시키고 특별한 시설을 해 두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전북 고창군 흥덕읍에서는 뒤산이 배의 형국이므로 무거운 짐을 많이 실으며 위험하다고 여겨서 상류가옥 지붕에도 기와를 못 쓰고 반드시 짚을 덮었다.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을 뚫는 것이라 하여 이것도 경계하였다. 경북 안동시 남문 밖에 세운 철재 기둥이나 전남 나주시 동문밖에 세운 돌탑도 배의 안정성을 도모하기 위해 마련한 돛이다. 배의 형국이 길지라는 논리는 현대적 사고로는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배가 재물과 사람을 운반했던 문명의 이기로 배에는 사람들은 물론 재화가 모인다고 하는 뜻에서 배모양의 땅에 묘를 쓰거나 집을 지으면 동네는 물론 집안이 번창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강을 낀 마을이 크게 발전하였고 삼랑진, 청주, 공주, 재물포, 마포, 강화도 등 진,주,포,도의 지명를 가진 마을이 크게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강, 즉 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어서 현대의 도시건설에서도 제일 첫째는 사람이 생활 수 있는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강을 끼고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지형적인 조건에서는 얕고 평탄한 구릉지나 분지가 발달해 있어야 하고 세 번째로 교통 즉, 도로여건이 최우선으로 꼽힌다. 연화부수형과 겹친 하회마을도 행주형이지만 제일 잘 알려진 곳은 대동강변에 자리한 평양이다. 그리고 청주와 공주는 물론 전북 무주도 행주형으로 알려져 있다. 평양시 연광정 앞 깊은 물에 닻을 내려 놓았다는 말이 옛부터 떠돌았다. 1923년 가뭄 때문에 물이 줄어들자 큰 쇳덩이가 나왔으며 사람들은 이것을 강가에 건져 놓았다. 바로 그 해 평양에 큰 물이 나서 온시내가 물바다를 이뤘다. 사람들은 배의 닻을 건져 놓은 탓이라 여긴 끝에 다시 강에 집어 넣었다 한다. 그때서야 사람들이 연관정 앞에서 꺼낸 그 쇠덩이가 풍수지리의 비방으로 선조들이 만들어 넣은 행주형국의 닻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녀, 반지형국은 자손이 번성할 터 가락지는 여성의 대표적 장신구로서 꿈에 가락지를 보면 딸을 낳는다고 한다. 가락지는 여성의 전유물인 동시에 보물이요, 재산이고 여성 자체를 나타내며 우리네 설화에는 가계를 계승하는 상징 내지 인간과 인간을 맺어주는 수단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여성은 곧 다산을 의미하므로 금가락지나 금비녀들은 부귀영화를 예고하는 징표가 된다. 더구간 금은 악귀를 물리치고 재운을 불러들이는 물질인 만큼 집터나 마을로서 이상적인 지형이라 하겠다. 금가락지터로 널리 알려진 곳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와 금내리 일대로서 현지에서는 구만돌이라 부른다. 비기(秘記)에 이곳 어딘가에 금거북터, 금가락지터, 다섯보물터의 세 명당이 있다고 일컬어 왔던바 이 가운데 금가락지 터를 유씨네가 차지하고 부귀를 누린 사실이 알려지자 나머지 두 터를 차지하려고 구한말 무렵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이 때문에 다른 곳의 땅값이 내릴 때에도 이곳만은 오히려 오르기도 했다. 금비녀가 땅에 떨어졌다면 금속성을 내게 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게 마련이다. 이런 이치로 이런 곳에 자리를 잡으면 인물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행의 상생 이치로 따져도 금이 땅에 떨어졌다면 토생금(土生金)이 되어 많은 재화와 자손이 번영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여기서 혈장은 말할 것도 없이 비녀의 머리부분이 되는 것이다. 금체절각 낙지형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비녀의 머리 부분만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가락지터의 금환(金環)도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말한 것도 없다. 금고리, 즉 금반지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손가락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환은 프로이드의 학설을 빌리지 않더라도 여성의 상징이며 성교의 열쇠다. 옛부터 여인들이 성행위나 분만을 할 때는 반드시 비녀나 반지를 벗는 습속이 있다. 구례 오미동 운조루와 인접해 있는 환동의 박씨들은 이 곳에 이사와 집의 담장을 둥그렇게 쌓아 비기의 금가락지 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금거북터, 금가락지터, 다섯보물터의 세명당이 있다고 알려져 풍수지리적 연유로 아직도 이곳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삼태기, 조리, 반달형국은 이사해야할 터 삼태기, 조리, 반달형국은 처음에는 그 기가 일어나 운세가 뻗어 나가지만 세월이 가면 쇠퇴한다고 한다. 이런 형세들은 모두 재물을 긁어 모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처음에는 운세가 뻗어 나가지만 삼태기나 조리는 가득차면 한꺼번에 엎질러져 버리는 관행이 있어 망하게 되면 아주 망한다고 본다. 반달은 온달을 향해 점점 커가는 상태에 있으므로 융성하는 기운, 늘어가는 수명, 높아지는 벼슬을 나타낸다. 풍수지리에서 반달을 길지로 여기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반달은 만월이되면 더 이상 커지지 못하고 퇴락의 상태를 맞는다. 이는 반달이 차서 온달이 되었다가 다시 반달로 돌아가는 이치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충남 서산군 안면도 박씨집은 반달형의 집터인데 조부때에 흥했던 박씨대에 이르러 가세가 기울었는데 이는 반달이 차서 온달이 되었다가 다시 반달로 돌아가는 이치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경북 경산군 용성면 곡란동 최씨집은 조리형국으로 잘 알려진 집이다. 최씨집 앞산은 해발 435m의 용산. 원래 그 모양이 매와 비슷해서 매봉으로 불렀으나 이 산에 살던 구렁이가 하늘로 승천한 뒤로 용산으로 바뀌었다는 내력도 있다. 이 산줄기의 한자락이 최씨 집터를 향해 뻗어내려왔는데 바로 이 능선이 조리의 자루에 해당되고 최씨의 집터는 조리바닥이라는 것이다. 조리는 쌀을 일 때 쓰는 부엌용구로 물속에서 쌀을 담아 올리지만 엎으면 다 쏟아지게 되므로 한 세대에는 재산을 모으지만 다음대에서는 모두 써버리는 과정을 되풀이해 왔다는 것이다. 산세가 좁은 곳에서 좌청룡우백호를 따지다보면 조리형이나 삼태기 형국은 많을 수 밖에 없다. 광산촌 대부분 삼태기형을 이루고 있는데 광부들 중에 죽도록 벌어서 하룻밤 노름에 전 재산을 날리는 사람이 많다. 돈벌면 이사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들하고 있지만 쉽지않은 모양이다. 쌀을 이는데 쓰는 조리 또한 부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복조리라하여 정월 초하루날 새벽에 누구보다도 먼저 이것을 사서 엽전 몇닢을 담아 대청이나 안방머리에 걸어 둔 것도 조리가 재운을 불러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또 이것을 살 때 값을 깎으면 복을 그만큼 더는 것으로 생각하여 부르는대로 주었다. 해가 지난 새조리를 사는 경우에도 헌 것을 버리지 않고 덧걸어주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한편 조리는 한 번 엎으면 정성껏 걸러 낸 쌀이 모두 없어지므로 조리형 또한 재산의 탕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삼태기, 조리, 반달형국은 한 대에서는 재산을 모으고 다음대에서는 모두 써버리는 과정을 되풀이한다고 풀이한다. ■ 글·청운 김영운(풍수지리연구가 02-845-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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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상식】 ①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나무 이야기
- 집주인의 취향, 목적, 취미에 따라 심는 주택 정원의 다양한 수목은 저마다의 사연과 이야기를 갖고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로부터 사방신이라 하여 동물 형상을 한 수호신으로 동쪽에는 좌청룡, 서쪽에는 우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원에는 이 수호신들을 대신해 집을 지켜주는 나무를 심었는데 동쪽은 복숭아나무, 서쪽은 느릅나무, 남쪽은 매화나무 그리고 북쪽은 벚나무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더욱 쉽고 흥미롭게 정원을 꾸미도록 수목에 얽힌 여러 가지 전설과 풍수에 따른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글·사진 박윤구참고문헌 ≪궁궐의 우리나무≫ 박상진 지음, ≪우리나라 나무 이야기≫ 박영하 지음 북쪽의 수호신인 현무는 물의 기운을 맡은 태음신을 상징하는 짐승으로 거북이와 뱀이 뭉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벚나무는 이 현무를 대신해 기운을 보강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주로 집의 북쪽에 심었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무가 바로 벚나무입니다. 벚꽃은 일주일에서 열흘 동안 활짝 피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한꺼번에 집니다. 꽃이 질 때는 꽃비가 내리는 기분이 듭니다. 벚꽃은 다들 알다시피 일본의 국화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여기저기에 옮겨와 살며 벚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조선 사람들은 일본의 벚꽃놀이 문화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벚나무 중에 왕벚나무는 일본에서는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특산나무입니다. 벚나무에 열매‘버찌’가 열리면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벚꽃은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성질 때문에 더욱 화사함을 뽐낸다. 벚나무의 수피는 달여 먹으면 살균 작용을 통해 식중독 예방 및 육류나 어패류에 함유된 각종 유해 세균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벚나무는 공해에 약하고 병충해가 많이 발생해 빌딩에 조경수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작은 정원의 정원수로는 잘 어울립니다. 꽃이 지고 난 후 열리는 열매‘버찌’는 술을 담그거나 주스를 만드는 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벚나무의 껍질은 오래 전부터‘화피’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습니다. 그 이유는 활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군수 물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갑오년(1594) 2월 5일자에“화피 89장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을 겪고 중국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와 왕위에 오른 효종은 북벌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때 서울 우이동에 벚나무를 많이 심게 했는데 이유는 활을 만드는데 쓰려고 한 것입니다. 또한 벚나무의 껍질은 알레르기 체질의 사람이나 식욕 부진, 피로 회복을 낫게 하는 데에 쓰이기도 합니다. 벚나무는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목판 인쇄의 재료로서 독보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팔만대장경의 60% 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어졌음이 전자현미경을 이용한 조사에서 밝혀졌습니다.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 새콤달콤 맛이 아주 좋다. 동쪽에는 운雲, 목木기운의 태세신을 상징하는 푸른빛의 용을 형상화한 짐승, 청룡을 대신해 복숭아나무를 심었습니다. 복숭아나무는 중국에서 들어온 과일나무로 잎보다 먼저 흰색과 분홍색 꽃이 피고 흰색을 백도, 붉은색을 홍도라 부릅니다. 꽃이 아름답고 열매는 과일로 먹을 수 있으며 정원에서는 개량 수종인 능수홍도, 능수백도, 남경도 등을 주로 식재합니다. 열매를 먹을 수는 없지만 능수홍도와 능수백도의 길게 늘어진 가지에서 봄에 꽃이 피면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남경도는 꽃복숭아라고도 불리며 매화를 닮은 예쁜 꽃을 피워 관상수, 독립수로도 좋습니다. 남경도는 먹을 수 없는 작은 열매가 열리지만 붉은 꽃이 매우 아름다워 관상수로 많이 심는다. 분홍빛의 복숭아꽃이 수줍게 고개를 들었다.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색이 곱다. 복숭아나무는 전설과 민담이 많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조선 세종 29년(1447),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본 복숭아 숲의 경치를 화가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사흘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이‘몽유도원도’입니다. 또한, 중국 명나라 소설 ≪서유기≫에서는 먹기만 하면 불로장생할 수 있는 천도복숭아 밭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된 손오공이 어느 날 틈을 보아 9천년에 한번 열리는 열매를 몽땅 따먹고 나중에 삼장법사가 구해줄 때까지 5백 년 동안 바위 틈에 갇히는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4월에 잎보다 백색 또는 담홍색 의 꽃이 먼저 핀다. 오래된 나무일수록 향이 그윽하고 진하다. 이처럼 복숭아는 수많은 과일 중 신선이 즐겨 먹는 과일로 여겨졌습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가 잡스런 귀신을 쫓아내는 구실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나 집 안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으며, 제사상의 과일에도 복숭아를 쓰지 않습니다. 귀신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하는 제사에서 복숭아를 올려놓으면 귀신이 보고 도망 갈까봐 그러한 것입니다. 또한,복숭아나무는 씨와 열매 모두 약재로 이용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으며 월경불순, 자궁혈종, 맹장염, 변비 등에도 탁월한 효능이 있습니다. 한여름의 매실차는 갈증 해소는 물론 입맛을 돋우는 효과가 있다. 붉은 봉황을 형상화 한 남방을 지키는 화火의 기운을 맡은 신, 주작은 매화가 대신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매화는 꽃이 너무 일찍 피어 조매라고도 하고, 추운 날씨에 핀다 하여 동매하고도 합니다. 눈속에도 핀다고 설중매, 봄 내음을 전한다 하여 춘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매화를 두고 부르는 이름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매화나무의 키는 평균 5m 안팎으로 작은 정원에서 키울 수 있는 아담한 수형을 갖췄습니다. ≪고려사≫에 실려있는당악≪석노교곡파≫를보면,“ ……따스한봄바람에/ 매화는향기풍기고/ 버드나무는푸른빛띠었는데/ 상서로운 연기 아지랑이와 얕게 엉키었도다/ 때는 정월 보름날/ 백성들과 서로 정회를 풀어 가며 즐겁게 놀아 보세!”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고려 때부터 이미 매화나무가 친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왕조에 들면서 매화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에 꼽히게 됩니다. 매화나무가 사군자가 된 이유는 겨울이 끝나기 전에 잎보다 먼저 피는 꽃이 마치 엄동설한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고고한 절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품 있는 모양새와 향기가 일품인 매화에는 매실이라 불리는 열매가 달리는데, 매실은 주로 술을 담그는데 쓰이고, 잼이나 복통, 설사에 좋은 한약재로 쓰이기도 합니다. 느릅나무는 미방未方에 심으면 잡귀가 물러간다는 말이 있다. 서쪽을 지키는 지地, 금金기운을 맡은 태백신太伯神을 상징하는 백호는, 느릅나무가 대신했습니다. 느릅나무의 유래는 힘없이 늘어진다는“느른히”에서 온 말로, 벗겨서 물을 조금 붓고 짓이겨 보면 끈적끈적한 풀처럼 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느릅나무는 독립수로 심는 것이 풍치가 좋습니다.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평강공주가 온달장군에게 결혼을 청하러 가는 길에 온달장군은 배가 고파 느릅나무의 껍질을 벗기려 산 속에 다녀왔다는 이야기와, 박목월 시인의 아름다운 시에서도 느릅나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머언산청운사/ 낡은기와집// 산은자하산/ 봄눈녹으면//느릅나무/ 속잎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청노루> 뿐만 아니라 ≪고려사≫, ≪삼국사기≫ 등 옛 문헌 곳곳에서도 느릅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느릅나무 뿌리의 속껍질을 벗겨 햇볕에 말린 것을 유근피라고 합니다. 유근피는 위장의 열을 없애며, 부은 것을 가라앉히고 불면증을 낫게 해준다고 동의보감에서 설명합니다. 서양에서는 느릅나무를 엘름이라 하여 재질이 좋고 쓰임새가 넓은 나무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항암 효과가 있다고 소문이 나서 곳곳의 느릅나무가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또한 목재는 휘어짐이 좋아 흔들의자나 악기, 우산 손잡이, 가구재, 차량재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나무껍질과 뿌리에서 나오는 수액은 도자기의 광택을 낼 때 유용했고 피부에 바르면 뽀얀 피부를 만들어 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느릅나무 잎은 천연 수면제라고 불릴 만큼 불면증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나무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가 얽혀져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야기들과 나무만의 특성 및 효능까지 알게 되면 정원 꾸미는 일이 더욱 즐거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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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상식】 ①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나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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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 김치만 있으면 뚝딱 만들 수 있는 김쌈과 김치복쌈
- 정월 대보름날 먹는 복쌈은 쌈을 싸듯이 복을 모은다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쌈을 싸는 재료는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어 이맘때 한창 맛이 좋은 김과 묵은 김장김치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 밥과 김, 김장김치만 있으면 되므로 반찬 없는 날 별미로 먹기에도 좋은 메뉴다.정리 백희정 기자 자료제공 농촌정보문화센터 02-3498-6533 www.cric.re.kr 재 료 오곡밥4공기, 김4장, 배추김치잎200g, 들기름적당량, 소금약간 만드는 법 · 김은 들기름을 발라 마른 팬에 앞뒤로 구운 뒤 맛소금을 약간 뿌려 간한다. · 묵은 배추김치는 잎만 준비해 찬물에 헹궈 물기를 꼭 짠 뒤 한 장씩 넓게 펼친다. · 김에 오곡밥을 한 숟가락 떠놓고 돌돌 말아 김쌈을 만든다. · 김치 잎은 오곡밥을 한 숟가락 놓고 양쪽을 아물려 돌돌 말아 김치쌈을 싼다. T I P 김은 입자가 곱고 구멍이 나지 않은 것을 선택하고 김치쌈을 만들 때는 단맛이 강한 시판 김치보다 집에서 담가 제대로 익은 김장김치를 사용해야 더욱 맛있는 쌈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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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 김치만 있으면 뚝딱 만들 수 있는 김쌈과 김치복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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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살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8) (1)
- 전원에 살려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라(1) 시골에서 살려면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도록 작으나마 헌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시골 사람은 도시민에 비해 때가 묻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실제로 겪어 보니 배타적일뿐더러 도시인 뺨칠 정도로 똑똑하다는 것에 많이들 놀란다. 또한 도시인에 비해 비사교적이고 약간은 폐쇄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기란 쉽지 않다. 적잖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우선 내 마음을 먼저 열어야 한다. 그리고 직접 가서 두드려야 한다. 시골 사람의 마음을 두드려라 "시골에 살려면 내 마음을 먼저 열라"는 말 대신 필자는 "열고만 있지 말고, 직접 가서 두드려라." 이렇게 외치고 싶다. 전원에서 처음 생활하다 보면 토박이들의 살가운 정(情)은커녕 오히려 배타적이라는 걸 금새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순박하고 정도 많던 사람들이었다는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고도로 발달된 매스미디어가 도농(都農) 간의 격차를 좁혀 놓은 탓일까! 시골 사람은 도시민에 비해 때가 묻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실제로 겪어 보니 배타적일뿐더러 도시인 뺨칠 정도로 똑똑하다는 것에 많이들 놀란다. 아니, 시골 사람이 똑똑하고 아는 게 많다기보다는 시골 사람이라고 무시한 때문이 아닐까! 특히 부동산과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다. 도시민보다는 경험이 많기에 부동산과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말조심, 입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알아도 모르는 척 조심하고 시골 사람에게 한 수 배운다는 마음으로 임해 주길 바란다. 또한 도시인에 비해 비사교적이고 약간은 폐쇄적인 것도 사실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도 처음 내려왔을 때, 보는 사람마다 먼저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네려고 여러 번 노력했다. 그러나 반응은 '웬놈이 인사를 하는 거야'하는 식으로 의아스런 표정들뿐이었다. 나이가 한참이나 적은 사람들한테도 얼마나 깍듯한 인사를 많이 했던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서로 위아래를 찾고 허심탄회한 사이가 되었다. 다음은 필자가 이곳으로 처음 이주했을 당시 대화 내용의 일례다. 부근에 사는 아저씨께 "고추는 언제 심으면 되죠?" 하고 물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남이 심을 때 심어." 그것이 대답이었다. 남이 똥장군 지면 너도 지라는 뜻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리 기분 좋은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오래 살다 보니 그 말뜻을 통감(痛感)하게 되었다. 얼마나 함축성 있는 대답인지 다시 한번 잘 음미해 보자. 고추는 몇 월 며칠쯤에 심으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어떨 땐 기후 탓으로 며칠 차이가 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경험 있는 우리가 심을 때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심으라는 그런 뜻이었을 게다. 그렇지만 그 때는 무척이나 불쾌했던 게 사실이다. 시골 사람은 책임지는 말을 잘 하려들지 않는다. 공연히 안 해도 될 말을 했다가 쓸데없는 구설수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는 마음에서일 게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지나다 보니 '너는 너' '나는 나' 서로가 시큰둥하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의 심중을 조금씩 알고부터는 도타운 정으로 변해 갔다. 그래서 나중에 온 사람들이라면 이 고장에서 대대로 살아 온 이들에게 먼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한 발짝 다가가도록 마음의 자세를 낮추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마을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아라 시골에서 살려면 마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도록 작으나마 헌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가볍게 생각하면 토지나 전원주택을 취득 또는 처분할 때에는 주위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을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지 못할 때의 불이익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집 지을 때는 물론, 땅을 구입한 후라도 바로 돼지 한 마리쯤 잡아(돼지는 값도 싸고 여럿이 먹을 수 있어 좋다) 동네잔치를 벌이면 좋다. "어떻게 돼지를 잡느냐" 라고 물을 필요는 없다. 그쯤은 큰돈을 안 들이고 다 해결할 수 있으며 마을 사람들 중에는 그 방면 전문가가 꼭 한두 명씩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마을의 경조사도 가능하면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이 주민들과 유대 관계를 넓히는 길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시골마을에는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이른 아침에 마을 확성기에서는 이미자 씨나 주현미 씨 노래가 귀 따갑게 흘러나온다. 그것은 이장님이 지금부터 공지사항을 안내하려고 하니 들을 준비를 하라는 예고 방송이다. 여름철에는 창문을 열고 지내므로 잘 들리지만 위치에 따라서는 띄엄띄엄 들리기도 한다. 주로 문을 닫고 생활하는 겨울철에는 더욱더 안 들린다. 방송을 잘 듣지 못했다면 꼭, 마을회관이나 이장님한테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바란다. "오늘은 ○○어른의 생신이니 아침 들러 오세요.""마을 대동회 날이니 점심을 같이 합시다.""정월 대보름날 척사대회를 하는데 주민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비료(또는 씨앗)을 타가세요." 이 모두 전원생활을 하는 데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일이다. '전원일기'라는 드라마에서 많이 접했지만 실제 전원생활을 하고 보니 절대로 무시해선 안 되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을 땐, 간단한 선물이라도 가져가서 예를 갖추는 것이 전원생활을 하는 데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박카스 한 상자면 어떻고 싼 소주 몇 병이면 어떤가. 모든 것이 다 성의인 것을…. 옛말에도 "코밑에 진상이 최고" 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하찮고 조그마한 선물이 (필자는 선물이란 표현보다는 관심이라 하고 싶다) 얼마나 커다란 인정이 되어 돌아오는지 곧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공짜란 없는 법이다" 라는 말이 생긴 것일까. 전원생활은 품앗이 생활이다 '품앗이'란, 국어사전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힘드는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면서 품을 지고 갚고 하는 일." 전원생활은 아파트 생활하고는 많이 달라서 '이웃과 어떻게 융화를 잘 이루느냐' 하는 것이 필수 관건이 될 수 있다. 아파트에서는 서로 조금 섭섭한 일들이 있다 해도 문을 닫고 들어가 각자 생활하면 그뿐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나 가끔 마주칠까, 별로 만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이 그리운 전원생활은 전혀 다르다. 집도 띄엄띄엄, 사람도 드문드문 그래서 시골은 적적하기 마련이다. 우선 이웃이 많지 않기에 서먹한 감정을 오래 지니고 있으면 그만큼 더 외롭다. 또한 무거운 짐이나 가구를 옮길 때, 특히 농사지을 때는 이웃의 아쉬움은 말할 수 없이 크게 다가온다. 이렇듯 전원생활은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일상이라 사는 맛이 절로 나는가 보다. "갓 담근 거야, 한번 맛봐." "요번에 동해안에 갖다 사온 덜 마른 오징어야." 이처럼 인심이 넘쳐나는 곳이 시골이다. 시골에선 한 해에 적어도 서너 차례 동네잔치가 벌어진다. 그런데 사실 외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남의 집 불 보기'다. 이제부터라도 주민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도 자주 참석하여 작은 성의라도 표하면서 서로 사이를 좁히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그 자체가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와 내 가족만 살려고 이주해 왔다면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전원생활이다. 주민들하고 사귀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 전원생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왜냐면 주민들은 나름대로의 멋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여러 가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대화에 적극 나선다면 풋풋한 시골 인심을 맛볼 수 있고, 또한 여러 가지 유익한 지식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재차 말하지만 그건 반쪽 전원생활임에 틀림없다. 田 글 양정일 <부동산컨설턴트> 글쓴이 양정일은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있는 한국전원 부동산 컨설팅에서 전원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컨설팅을 해주고 있습니다. <031-767-9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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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살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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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건강과 복을 부르는 대보름 음식 만들기
- 오는 9일(음력 1월 15일)은 올해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이다. 신라시대부터 지켜온 우리 명절 대보름에는 온 가족이 모여 앉아 9가지 나물에 고소한 잡곡으로 만든 오곡밥, 부럼, 약식 등을 먹으며 한 해의 길흉을 점쳤다. 그 가운데 먹으면 1년 내내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각종 나물과 또, 나물과 찰떡궁합을 이루는 고소한 약밥을 만들어 보자.대보름날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음식은 각종 나물이다. 나물을 볶을 때는 국간장을 사용해야 감칠맛이 나며 참기름과 식용유를 넉넉히 둘러 주는 것이 좋다. 무나물은 수분기가 있어야 잘 볶아지므로 멸치·고기 육수를 넣어 볶아주고 약간의 생강즙과 설탕을 넣으면 무의 비린 맛이 제거된다.찹쌀, 대추, 밤, 잣 등을 섞어 찐 밥인 약식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소지왕이 정월 보름날 까마귀떼 덕분에 역모를 꾀하던 무리들을 미리 처치할 수 있었고 그 후로 검은색을 띤 약밥을 지어 제祭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 미니 약식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만들되 단맛을 선호하지 않는다면 말린 과일 대신 호두나 잣을 넣어준다.나물 조리법재료(2인 기준)도라지나물 - 도라지 170g, 양념(국간장 1Ts, 다진 마늘 1ts), 식용유 2Ts, 다진 쪽파 2Ts, 참기름 1Ts, 통깨 1ts가 지 나 물 - 불린 가지 300g, 양념(국간장 2 1/2Ts, 다진 마늘 1Ts), 식용유 3Ts, 설탕 약간, 멸치 육수 4Ts, 다진 쪽파 2Ts, 참기름 3Ts, 통깨 1Ts무 나 물 - 무 150g, 양념(국간장 1ts, 소금 1ts, 다진 마늘 1ts), 식용유 1Ts, 멸치육수 4Ts, 생강즙, 설탕 약간, 다진 쪽파 1Ts, 참기름 1Ts, 통깨 1ts깻잎순나물 - 깻잎순 120g, 양념(국간장 1ts, 다진 마늘 1ts), 식용유 1Ts, 다진 쪽파 1Ts, 참기름 1Ts, 통깨 1ts고사리나물 - 고사리 170g, 양념(국간장 1Ts, 다진 마늘 1ts), 식용유 1Ts, 다진 쪽파 1Ts, 참기름 1Ts, 통깨 1ts취 나 물 - 취나물 170g, 양념(국간장 1Ts, 다진 마늘 1ts), 다진 쪽파 1Ts, 참기름 1Ts, 통깨 1ts* Ts : Table Spoon(큰술), 15㎖* ts : Tea Spoon(작은술), 5㎖ 1. 도라지는 우선 먹기 좋은 크기로 손질한다. 쓴맛을 제거하기 위해 소금물에 너무 무르지 않을 정도로 데친 다음 양념에 무쳐 살짝 재워 두고, 식용유를 둘러 볶아낸다. 다진 쪽파와 통깨, 참기름을 넣어 마무리한다.2. 무는 5㎝ 길이로 채 썰고 약한 불의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마늘을 넣어 향을 내며 볶다가 무채를 넣고 3분 정도 더 볶는다. 그리고 멸치 육수를 넣어 자작하게 볶아주면서 국간장과 생강즙,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마무리는 다진 쪽파와 통깨, 참기름으로 한다.3. 고사리는 6㎝ 길이로 정돈하여 양념에 살짝 재운 다음,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볶아 준다. 다진 쪽파와 참기름, 통깨는 마지막 단계에서 넣는다.4. 하룻밤 정도 물에 불린 가지나물을 양념에 살짝 재운 다음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볶는다. 가지나물은 수분을 많이 먹기에 멸치 육수를 넣은 다음 뚜껑을 덮고 약한 불에서 자작하게 볶는다. 나물이 보들보들해지면 다진 쪽파와 참기름, 통깨를 넣어 준다.5. 깻잎순 역시 양념에 살짝 재운 다음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볶아주고 마지막 단계에서 다진 쪽파와 참기름, 통깨를 넣어 준다.6. 취나물은 끓는 물에 소금을 넣어 데치고 찬물에 헹구어 물기를 제거한다. 그리고 준비한 양념을 넣어 손으로 조물조물 무친다.약식 조리법재료(2인 기준)불린 찹쌀 2컵, 밤 10개, 대추 8개, 잣 2Ts, 다진 열대과일(망고 2Ts, 파파야 2Ts)캐러멜 소스 - 흑설탕 3Ts, 찬물 3Ts, 더운 물 3Ts양념 - 진간장 1 1/2Ts, 참기름 1 1/2Ts, 계피가루1ts, 소금 약간 1. 찹쌀을 2~3시간 정도 불린 다음 찜통에 면 행주를 깔고 30분 정도 찐다.2. 캐러멜 소스는 팬에 흑설탕과 찬물을 넣어 끓으면 더운 물에 넣고 약한 불에서 조린다.3. 30분 정도 찐 찹쌀을 큰 볼에 덜어낸다. 여기에 밤, 대추, 잣, 열대과일과 양념을 넣고 골고루 섞어 찜통에 다시 넣고 중불에서 20분 정도 다시 찐다. 한 김 식었으면 참기름이 살짝 발라진 모양 틀에 약밥을 넣고 고명으로 돌려깎기 한 대추와 잣을 올린다. 정리 서상신 기자 자료협조 더디쉬 010-9009-9379 www.thedis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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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건강과 복을 부르는 대보름 음식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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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세시기] 새 생명이 움트는 정월, 자신만의 한 해 농사를 준비하자
- “도시에서 온 놈들은 겨울 들판을 보면 모두 죽어 있다고 그럴 거야. 하긴 아무 것도 눈에 뵈는 게 없으니 그렇기도 하겠지. 하지만 농사꾼들은 그 걸 죽어 있다고 생각지 않아. 그저 쉬고 있을 뿐이라 여기는 거지. 적당한 햇빛과 온도만 주어지면 그 죽어빠져 있는 듯한 땅에서 온갖 식물들이 함성처럼 솟아 나온다 이 말이네.”-김영현의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중에서 겨울철 들판의 모습은 언뜻 보면 김영현의 글처럼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죽은 땅이라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음력 정월부터는 달라진다. <농가월령가>에서도 “정월은 맹춘(孟春)이라 입춘(立春) 우수(雨水) 절기로다. 산중 간학(澗壑)에 빙설은 남았으나 평교 광야에 운물(雲物)이 변하도다.” 라고 노래했듯 산골짜기에 남아있는 눈과 얼음이 겨울을 붙잡고 있으나 들판의 모습은 조금씩 생명을 잉태하는 준비를 하고 있다. 들판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준비를 하는 이 시기엔 농부들도 그 생명을 잘 키우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한다. 해충을 없애기 위해 들판에 있는 풀을 태우고 1년 내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건강하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원도 한다. 이런 것들은 풍습으로 발전되었다. 바로 정월 대보름에 하는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들이 그것이다. 이런 행사들에 대해 <농가월령가>는“보름날 약밥 제도 신라적 풍속이라. 묵은 산채 삶아 내니 육미(肉味)와 바꿀소냐. 귀밝히는 약술이며 부스럼 삭는 생밤이라. 먼저 불러 더위팔기 달맞이 횃불 켜기 흘러 오는 풍속이요 아이들 놀이로다.” 라고 노래한다. 자연이 새롭게 움트는 음력 정월, 옛 사람들이 자연의 흐름에 맞춰 몸을 가다듬고 농사를 준비했듯이 이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벼려 자신만의 한 해 농사를 새롭게 준비해 보자 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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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세시기] 새 생명이 움트는 정월, 자신만의 한 해 농사를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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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울퉁불퉁 메주로 장 담그는 이야기
-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면서 도시에서 정착하게 된 사람이 있다. 그는 어릴 때 겪었던 사건과 추억들을 회상해 감칠맛 나고 구수한 이야기들을 참 잘 써낸다. 지금 30대 후반 나이까지는 시골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에 가슴 따뜻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나의 경우, 그런 감성을 동경하다가 서른이 넘어서 시골로 귀향해 이제야 그런 감성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내가 처음 만난 시골은 순박하지만 거칠어서 그 속살에 살갗을 베일 것 같은 연인과 사귀는 느낌이었다. 사랑하지만, 손을 잡고 포옹이라도 하려면 생채기를 감수해야 할 위험한 연인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계속 사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정이 들어서 발목이 잡혀버린 시골생활에서 우리가 처음 한 일은 장 담그는 일이었다. 콩대를 베는 일보다 보랏빛 쑥부쟁이가 살랑살랑 허리를 흔드는 밭둑에 더 자주 눈길을 주면서 서툰 손길로 수확한 콩으로 처음 메주를 만들었던 것이 벌써 5년 전이었던가. 그렇게 흐르는 세월 속에 이제는 쑥부쟁이 따위에 눈길을 빼앗기기보다 마른 콩깍지에서 튀어나가는 콩알에 더 신경이 쓰이는 시골아낙으로 변신을 했다. 계란말이와 소시지를 도시락 반찬으로 자주 먹던 세대였기에 된장찌개를 먹으며 성장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던 내게 장 담그는 일은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지금부터 장 담글 줄 모르는 요즘 여자들에 속했던 내가 장맛의 오덕(五德)을 읊을 정도가 된 이야기를 해 보겠다. 가마솥에 콩을 씻어 안치고 장작불을 때는 일은 지금도 재미있다. 남편과 나는 찬물에 콩을 씻는 일은 서로 미루면서도 불을 지피는 아궁이 앞에서는 주도권을 잡으려고 부지깽이부터 들고 설친다. “잠자리에 오줌을 싼다”는 어른들의 핀잔을 듣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불장난의 매력은 나이를 초월하는 모양이다. 마른 나무가 타면서 나오는 그을음내가 살짝 배서 구수한 냄새를 내며 콩이 다 삶아지면 나무절구에 콩콩 찧는다. 이 일은 재미있어 보이지만 힘을 쓰는 일이 장난이 아니다. 주로 남편이 절구질을 하면 찧어진 콩으로 네모난 메주로 만드는 일은 내 몫이다. 흔히 메주는 ‘못 생긴 것’의 대명사로 일컫는데 한 번도 메주를 만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비유를 쓸 자격이 없다. 내가 메주를 만들어 보니 메주는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만드는 데에 그 기술의 핵심이 있었다. 모양이야 대충 직육면체를 유지하면 되지만 단단하게 꼭꼭 뭉치지 않으면 짚으로 엮어서 말리는 과정에서 부서지고 갈라지기 때문에 자꾸 다지다 보니 일정하지 않은 들쑥날쑥한 모양이 되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았다. 그렇게 만든 메주는 그늘에서 표면이 꾸덕꾸덕해지게 이틀 정도 말린 후에는 짚으로 엮어서 눈과 비에 맞지 않게 처마 밑에 매달아서 햇볕과 바람에 벽돌처럼 단단해질 때까지 말린다. 이 과정이 보통 40일 정도 걸린다. 그 다음에는 메주를 ‘띄운다’고 하는데 이 과정이야말로 장맛을 좌우하는 첫 번째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 음식 문화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발효 과학의 기술이 바로 이 ‘띄우기’에 집약되어 있다. 코끝을 자극하는 청국장이 바로 이 띄우기의 기술을 적용해 햇콩 맛을 볼 수 있게 만든 인스턴트 장이다. 흔히 백태라고 하는 메주콩은 밥에 넣어 먹거나 요리에 응용해도 그 자체로는 별 맛이 없지만 이렇게 띄워서 청국장을 만들거나 된장을 담가야 그 깊은 속 맛을 보여준다. 잘 마른 메주는 따뜻한 온돌방에서 짚을 깔고 켜켜이 쌓아 놓은 다음에 이불을 덮어서 놔두면 구수한 냄새가 나면서 하얀 곰팡이가 메주의 표면을 감싸게 되고 메주 속이 고약처럼 찐득하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 이 때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지 못해서 띄우기가 잘못되면 장맛이 없고 역하고 쿰쿰한 냄새가 난다. 된장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런 잘못 띄운 메주로 담근 장을 먹으면서 생긴 냄새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친 메주야말로 정말 메주다. 조금씩 갈라지고 거친 피부에 거뭇한 곰팡이까지 핀, 간신히 직육면체의 형태를 유지한 메주의 모습은 파란만장한 한 세월을 이겨낸 팔자 드센 여인을 닮았다고나 할까? 메주를 못생겼다고 타박하기 이전에 곰삭은 생의 뒷 힘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야 말로 장맛을 논할 수 있으리……. 이렇게 완성품 메주가 되기까지 약 70일 정도 걸리는 동안 비바람에 묻어 온 먼지와 짚에서 붙은 검불들을 물로 싹싹 씻어내고 나면 비교적 우아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여기까지의 과정이 농경사회에서는 한 해 농사의 끝이었다. 다시 새해가 돌아와 설을 쇠고 나면 여자들은 겨우내 말리고 띄운 메주로 장을 담을 준비에 들어간다. 말(午)날이나 양(未)날로 날을 잡아 소금을 준비해 놓는다. 정월 첫 말날을 장 담그는 날로 정한 우리는 설을 지내는 것보다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우리 집 장 담그기에는 전통 방법을 준수하면서도 특별한 비법이 있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먼저 굵은 대나무를 잘라다가 가마솥에 물을 붓고 끊인 물에 죽염을 풀어서 가라앉힌 물을 장 담그는 물로 사용한다. 손이 많이 가지만 대나무의 유효 성분이 잡균의 번식을 막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이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는 24절기를 상징하는 24가지 한약재를 사다가 분말로 만들어 놓은 것을 면주머니에 담아놓아야 한다. 24절기의 기운이 들어간 약재들은 장이 익는 한 해 동안 그 효능을 유감없이 발휘해 더 나은 장맛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장을 담가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떠돌이 스님의 믿거나 말거나 한 말을 새겨들은 실험 정신이 강한 남편의 밀어붙이기가 우리 집 장맛의 비밀이 된 지 벌써 여러 해를 나고 있다. ‘왜 시골에 사느냐?’ 고 물으면 그냥 웃을 수 있는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제 시골에 사는 재미의 한 가지에는 울퉁불퉁 못생기고 곰삭은 메주로 장을 담가 친구들을 불러들여 끓여 먹인 후에 ‘기가 막히게 맛있다’는 옆구리 찔려서 아부하는 말을 듣는 재미도 추가된다. 田 ■ 글·오수향(주부) 글쓴이 오수향은 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 폐교에 살면서 글쓰기의 꿈을 쫓아가고 있는 주부입니다. 공주 KBS,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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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울퉁불퉁 메주로 장 담그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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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부터 대보름까지
-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올해도 설날이 오기 전에 눈이 참 많이 내렸다. 들판에도 산에도 또 얼어붙은 강물 위에도 눈은 많이도 쌓였다. 그래서 2003년 1월의 세월리는 온통 은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겨울 농사를 하지 않는 탓인지 논둑에 내린 눈은 저 혼자 쌓였다 녹았다 하고 있었다. -------------------------------------------------------------------------------- 그런데도 다행스런 것은 도로에 쌓인 눈은 금새 녹아버려 교통에 별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양리에서 세월리로 넘어가는 사슬고개를 걱정들 했지만 고갯길이 대부분 양지쪽으로 나 있어 그것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로가 나기 전인 30여 년 전만 해도 사슬고개가 하도 험해서 비가 조금만 내려도 버스가 다니지 못해 시오 리(十五里) 길을 걸어가곤 했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의 추억이다. 그래서인지 서울을 오르내리는 나에게 추억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은근히 걱정스런 말을 건네곤 했는데 생각보다는 불편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로가 잘 나 있으며 제설작업도 제때에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는데, 추억이란 이렇게 사람을 오래도록 가두기도 하는 모양이다. 세월리에서 처음으로 설날을 맞이하기 위해 섣달그믐날 세월리로 온 식구가 내려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동네가 조용하기만 하였다. 한길에는 동네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먼 고향으로 내려가는지 자동차만 분주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동네 청년들이 어디에 모여 있는지 수소문하여 찾아가 보니 마을회관 2층에 대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 명절 전날 고향의 어느 사랑방에 모여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것을. 그래서 달 없는 깜깜한 밤을 오히려 더 밝게 지새우는 것을. 그러나 그런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가지고 간 술도 마다 한 채 오락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들은 내가 그리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몇 마디 인사 끝에 되돌아 나오는데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가져야 한다며 한 사람이 뒤따라 나왔다. 그 사람은 이 동네에 살고 있지만 성남으로 출퇴근하는 바람에 동네 친구들과 정담을 나누기가 한 달에 한 번도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보니 그곳에는 도회지에서 고향을 찾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 위에는 주먹만한 별들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설날 아침도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설날 다음 날 아침, 서울에서 내려온 이명화 씨 부부와 함께 청송 심씨 입조인 심권의 신도비를 찾았다. 신도비는 아랫마을 야산에 있는데, 이 마을 출신으로 교육자이자 수필가인 심영구 씨에 의하면 이 비로 인해 이곳을 비석거리라 불렀다고 한다. 보학(譜學)에 상당한 조예를 지닌 이명화 씨는 신도비를 살핀 후, 이곳은 심권이 태어난 곳이 아니라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다 객사(客舍)에서 병사한 이 분을 선영이 있는 이곳으로 모셔온 것이라 한다. 그리고 보면 그의 선친인 심희세를 모신 이곳에 다시 심권을 모심으로써 그 후손 일족이 여기에 정착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300여 년 동안 14대에 걸쳐 청송 심씨 일족들이 이 마을의 중추를 이루면서 청주 한씨, 최씨 등과 어울려 살았던 것이다. 일족이 한창 번성을 이룰 때는 70여 세대에 이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20여 세대만이 남아 있다. 점심을 먹은 후, 마을회관 아래층에 있는 노인정을 찾았다. 미리 연락을 한 관계로 노인회 총무이신 심재욱 씨를 비롯하여 임덕재, 심재성, 이창호, 임준현, 전홍선 씨 등 여러 분이 나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설날을 맞아서 그런지 촌로답지 않게 모든 맵시가 세련되어 보였다. 이사를 한 후 아직 공식적인(?) 인사를 드리지 못해 송구스럽기도 하여 처음에는 서먹서먹했지만 차츰 분위기가 무르익자 서로 앞다투어 말씀을 해 주시는 모습들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가 이 마을의 물맛이 너무 좋다고 하자, 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은 아랫마을, 윗마을 그리고 다랫골 등을 합쳐 세월리라 통칭하지만 옛날부터 5·16 이후 행정정리가 되기 전까지는 세월천을 기준으로 강가 아랫마을은 세심리(洗心里), 산 쪽 윗마을은 세월리, 그리고 시냇물이 발원하는 골짜기는 다랫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세심리는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그렇게 불리웠고 골짜기에는 다래가 많이 열려 다랫골이라 불렀다 한다. 여하튼 씻을 세(洗) 자가 많이 들어간 것을 보면 예부터 이곳은 물이 맑고 깨끗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되기 전까지 이곳에는 양조장이 여러 개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물맛이 좋기 때문인데, 당시 주류에 관한 법에 의하면 1개 면에 막걸리 양조장 1개가 통상적인 원칙이었지만 이곳은 그것을 초월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면소재지도 아닌 이곳에 세워졌던 양조장에서 빚은 막걸리는 전량 세심리 나루터를 통해 서울로 직송되어 인기리에 판매되었다고 하니 이곳의 물맛은 알아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1984년에 21가구가 발의하여 설치한 간이 상수도는 다랫골 뒷산인 양자산 줄기 8부 능선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집에도 그 물을 사용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온천물로 착각할 정도로 비누가 잘 풀리는 것은 물론이고 생수로 마실 때는 단맛이 혀끝에 감돌기도 한다. 선인들이 말하지 않았는가. 물맛이 좋은 곳치고 인심 사나운 곳이 없다고. 그래서인지 10여 년 전에 다랫골로 들어와 살고 있는 전홍선(67) 씨는 “이 마을의 인심과 우애는 남다르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서로서로 믿고 도와가며 살기 때문에 담장도 필요 없다”고 하는 전홍선 씨의 안색은 뒤늦게 이곳에 들어 온 사람답지 않게 긍지와 자부심에 차 있었다. 그런데 정월 열 이튿날(양력 2월 12일) 조용하던 마을에 잔치 마당이 벌어졌다. 오전 11시쯤 갑자기 동네 마이크에서 트로트 풍의 흥겨운 노래들이 흘러 나왔다. 전달 사항에 앞선 전주곡이려니 했는데 음악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래서 마을회관 앞으로 나가보니 이게 웬일인가. 마을회관에는 ‘대보름 맞이 윷놀이 한마당’이라는 플래카드가 붙어있고, 마당에서는 마을 어른들은 물론이고 남녀노소 모두 나와 흥겹게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서는 청년들이 어른들을 대접하려고 삽겹살을 굽고 있고, 마당 가운데에서는 윷놀이가 한창이었다. 아, 그래서 설날에는 가족 중심으로, 대보름에는 마을 중심의 축제 행사를 하는 것이 이 마을의 전통이구나 하는 사실을 겨우 알게 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축제를 보면서 어울려 산다는 것의 의미를 또 한번 깊이 느낄 수 있었다. 田 이기윤〈시인·육군사관학교 교수〉 [글쓴이 이기윤은 시인이자 육군사관학교 교수이며, 현재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에 살고 있다. 1997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으며, 1999년 시집 《자전거와 바퀴벌레》 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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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라이프 2018년 1월호 발간 안내
- 2018년 1월호2018 JANUARY Vol.226 SPECIAL FEATURE 주택 에너지 다이어트, 단열 & 기밀건축물의 에너지 성능은 가로 1m × 세로 1m, 즉 1㎡당 연간 소비하는 난방 등유량으로 평가한다. 저에너지 건물은 1㎡당 연간 에너지(등유) 소비량을 기준으로 7ℓ는 저에너지하우스, 1.5ℓ는 패시브하우스, 0ℓ는 제로에너지하우스로 구분한다. 건물에서 사용하는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고 재생에너지를 적극 활용해야 비로소 제로에너지하우스를 지을 수 있다. 즉, 제로에너지하우스는 쾌적성을 중시하는 패시브하우스를 전제로 한다. 패시브하우스 실현을 위한 요소 기술인 고단열, 고기밀에 대해 살펴본다. 080 열, 공기, 습기 흐름 제어 건축물리학083 단열재의 종류와 특성087 목구조 내단열로 열교 최소화088 에너지 절감형 지붕, 웜 루프089 고기밀의 핵심, 공기와 습기 제어093 창호 성능 못지않게 기밀 시공이 중요094 세계가 인증한 인슐레이션‘ 존스맨빌’095 물에도 불에도 강한 단열재‘ 스카이텍’ HOUSE STORY전원 속 집들에 관한 행복한 이야기098 시댁 앞마당에 지은, 문경 햇살 품은 주택104 산과 바다 사이 배산임해, 고성 힐링캠프110 모든 공간이 복도로 연결되는, 파주 ‘一’자 주택116 바다사나이 주왕산에 안착, 청송 마도로스 주택122 북한강 동연재同然齋, 경기도 제로에너지 시범주택128 실속파를 위한 스타일리시 전원주택, 증평 자연이온빌리지 ARCHITECT CORNER134 비염과 피부염에서 해방, 광주 1.4ℓ 패시브하우스142 2개 동을 브릿지로 연결한, 청라 주택148 맞벽건축으로 일조권 완화, 연남동 클라인하우제 홍대154 2017 경기도건축문화상 동상, 양평 이벤트하우스 HOME & GARDEN162 원하는 스타일에 맞는 식재 디자인하기식물의 색과 질감, 땅과 하늘이 만든 오케스트라정원은 하나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원 디자이너는, 그 공간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우느냐는 과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한편, 정원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며 시간의 흐름을 담는다. 각양각색의 식물들은 그 모양만큼이나 생육 습성이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정원에서 각각의 고유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정원 디자이너는 식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사시사철 아름다운 정원을 연출해야 한다. HOUSING INFORMATIONSTYLING INTERIOR168 하남 일본식 스타일의 목조주택 인테리어 쾌적한家, 건강한家174 패시브·제로에너지하우스 바르게 알기 HOME PLAN178 가족을 하나로 엮어주는 34.48평 테이핑 하우스ARCHITECTURE DESIGN180 jd house-2 집도 쉬어갈 수 있는 누운 집184 역동적 분위기에 품격을 더한 디자인자재 가이드186 기밀 자재 종류 및 기능 FIELD REPORT188 스틸하우스 얼라이언스 KOSFA 출범기업 르포190 ‘기성화주택’과‘ 패널라이징’으로 거품 제거, 골드홈 TOWNHOUSE REPORT194 도시생활과 전원생활을 동시에, 용문 솔담채 마을사색의 공간196 집과 건축 Dwelling and Architecture김창범 시인의 시로 짓는 집078 정월의 집200 News & Issue160 애독자 사은 퀴즈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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