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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사람으로 사는 즐거움』의 작가 유승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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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을 멀리하며 나는 살아왔다. 아침이야 아침이야 네가 햇살보다 먼저 찾아와 창문 앞에서 나를 불러 아침을 안겨주었듯 저기 저 산, 네가 사는 숲에 들어가 나도 너의 둥지 옆에서 너의 이름을 불러, 막 잠에서 깬 너의 눈이 나를 보는 것을 보고 싶다.
그때 너는 놀라며 나의 이름을 부르겠지…승도야
유승도 중에서
서울에서 4시간 반을 달려 영월읍에 도착해 전화를 넣다. 여기가 지금 어딘데, 이제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고씨동굴 지나서 옥동리로 들어오세요, 한다. 서울에서 4시간 반을 달려 영월읍에 도착헤 영월읍에서 15km를 더 가 옥동리에 들어와 다시 전화를 넣다. 옥동리에 왔는데 이제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면사무소 지나서 고개 넘지 말고 만경사 길로 곧장 올라오세요, 한다. 마을 하나 지나쳐서 산으로 접어들면 좌측으로 샛길이 하나 나오는데, 그 쪽으로 들어와 언덕 위 첫 집이란다. 옥동 온거면 이제 다 왔어요, 마지막 말에 뛸 뜻이 기뻐 달달거리는 늙은 자동차를 모시고(?) 마을을 지나 샛길로 들어서 언덕을 찾기까지 30여 분을 헤매며 해발 600미터를 올라 도착한 곳,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가 거친 풀 속에서 불쑥 걸어나왔다. 먼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성큼 성큼 앞장서 걷는 그의 어깨 위로 지는 여름, 정오의 햇빛이 뾰족하게 걸려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 또 다른 길, 귀농
강원도 영월 예밀2리에 사는 유승도는 농사꾼이자 시인이다. 98년 100일 된 아들과 아내를 앞세워 버려지다시피 한 농가를 사서 이곳으로 내려온 지 벌써 6년 째, 그동안 글도 쓰고 책도 내고, 고추농사, 배추농사, 포도농사에 자식농사까지, 벌여 놓은 일만해도 산더미다.
원래 고향은 충남 서산이지만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물 흐르는 대로 따라온 곳이 강원도 정선을 거쳐 지금의 소백산맥 자락이다.
메아리도 부딪혀 떨어질 것 같은 넓고 깊은 계곡과 이른 아침부터 올라온 안개 탓에 어스름이 보이는 삼봉산과 방미산이 두 세 뼘 앞에서 출렁이는 절경이 기막히게 아름답다.
고송(古松)이 허리를 구부리고 서있는 초가입구를 들어서니 10평 남짓한 마당과 제법 손태 나는 살림집이 앉아있다. 직접 손으로 마름해 건조시킨 통나무를 파고라처럼 이어놓고 안으로는 툇마루를 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집필실로 사용하는 방은 별도로 달아 낸 듯 반듯하게 돌출돼 있고, 듬성듬성 이빠진 기와 위에 슬레이트를 얹어 처마를 깊게 뽑은 모양도 인상적이다.
"사람을 사긴 누가 사. 재너머 사는 친구하나 꼬셔다가 망가뜨리면서 지은 거야. 집이라고 어디 사람 살게 해놨어야지. 그래도 우리네 사람들 집이 예나 지금이나 오지랖이 넓어서 붙이고 떼고, 얹고 큰 고생은 안했어"
귀농 당시 2,700평 농지를 2,400만 원에 사 두릅도 키우고 콩도 키우고 최근엔 표고버섯도 시작했다. 특히 석회암지대라 포도가 잘돼 도시에 사는 지인들이 한두 상자씩 올려다 먹고 있다. 농사로 얻는 수입은 일년에 200만 원 정도, 먹는 거야 밭에서 키워 먹으면 그만이니 세 식구 1년 생활비로 견딜 만하다. 거기에 글도 조금씩 쓰면서 6살 먹은 아들의 군것질거리를 댄다. 이왕 팔 걷고 시작한 농사, 규모를 좀 키워서 투자도 하고 돈도 벌고 하시는 게 어떠냐는 말에 그는 이제 막 초보농사꾼의 물을 뺐다며 손사레를 친다.
작년에는 그동안의 시골살이를 엮은 책 《촌사람으로 사는 즐거움》을 출간해 관찰자가 아닌 생활자의 눈으로 본 우리 농촌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그윽하고 청명하게 풀어내기도 했다.
길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 떠나다
6살배기 아들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마당을 깡총거리며 뛰어다니고 쫓는 아이나 쫓기는 강아지나 휙휙 신바람이 분다. 어떻게 이 오지까지 내려왔냐는 기자의 물음에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었다며 유승도는 처마끝 풍경만 올려다본다.
그의 컴컴한 방랑은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막노동판에서 등짐도 졌고, 제주도로 건너가 옥돔잡이 연안어선도 탔다. 탄광촌에서 몇 개월 막장생활도 했다. 그러다 흘러 들어간 곳이 강원도 정선 끝 구절리였는데, 드물게 마음이 갔던 탓에 그대로 또 얼마간을 주저앉았다. 도시를 탈출해 떠돈 세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구나 싶을 때, 그는 자연과 처음으로 마주보게 됐다고 한다. 그것은 끝이 아니었고 막다른 길도 아니었다. 그는 삶의 막(膜), 그 밖으로 나간게 아니라 막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때 쓴 시 로 95년 등단했고 사랑도 했으며 결혼도 했다.
"귀농이랄 것도 없어. 촌에 왔으니 농사짓고 사는 건 당연하지. 게다가 난 어디 취직해 출퇴근하고 승진도 하고 연봉협상도 하고 이런게 천성적으로 안맞는 사람이거든. 일부러 진흙탕만 골라 돌아 온거 아니냐고 그러는데, 아니야 내 몸 흐르는 대로 따라왔더니 여긴 거야. 사실 좀 애매하긴 했어. 오랫동안 도시에 적을 두고 살았기 때문에 그쪽 사람들은 내가 무진장 이상한 거야. 쟤 왜 그러나, 등단도 했으니 글이나 열심히 쓰면서 예쁘게 명함이나 찍으면서 살지, 왜 튀어? 그런다고. 또 여기 사람들은 도시물 먹은 멀건 놈이 농사랍시고 꼼지락대는 게 못마땅하고, 그런게 애매하긴 했지. 그래도 난 여기가 좋아. 참 잘 온거 같아".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당을 뛰어다니던 어린 아들은 어느새 마루 끝에 배를 대고 누워 손장난을 치고 아이의 막대기로 혼쭐난 강아지가 꾸뻑거리며 조는 산골의 늦여름은 벌써 가을에 쫓겨가고 있었고 서늘한 이마 위로 느리게 해가 지고 있었다.
비가 많이 와 작년보다는 덜 달다며 직접 키운 빛깔 좋은 포도송이를 내온 말수 적은 아내 김미숙은 어쩌다 예까지 끌려오셨냐는 말에 ꡒ싫은 척하고 온거지 끌려온 건 아닌데ꡓ라며 웃는다.
자연의 다정함을 배우는 즐거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유서깊은 질문, 아니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말이 살다보면 문득 가슴을 울릴 때가 있다. 낯선 오지까지 숨돌릴 새도 없이 찾아왔건만 뜬금없이 부끄러운 생각만 든다. 말갛게 젖은 하늘이 참 아름답기만 한데 괜시리 신경질만 잔뜩나 아무한테나 심통을 부리고 싶어진다. 그러다 맛있는 저녁 밥상에 금새 기분이 좋아져 손장난이 시시해진 아이와 잠깐 한눈을 팔았다.
어느새 유승도는 포도밭에 내려가 큼직한 송이들을 한 소쿠리 따왔다. 하나씩 포장해 상자에 담는 모습이 천상 농사꾼이다. 따뜻한 커피를 내오며 작년보다 실하진 않아도 서울에서 사먹는 포도하곤 틀리다며 말간 얼굴로 웃는 김미숙은 천상 농사꾼의 아내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서는데 벌써 아랫마을이 어둑하게 보인다. 출발 채비를 하는 기자를 보더니 아이는 옥동에 나가 아이스크림 사달라며 조르기 시작했다.
출입문 밖 가지런히 쌓아 놓은 장작 앞에서 그들의 작고 소박한 집을 한번 돌아보고, 고송의 굽은 허리도 다시한번 살폈다.
ꡒ먼길인데 자고 가지. 뭘 그렇게 서두르면서 살아ꡓ. 유승도는 뒷짐을 지고 선 채 먼산을 쳐다본다. 어느 날이고 불쑥 찾아오면 방 하나 내달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괜한 빈말인 거 같아 그만뒀다.
시인 유승도, 이제 농사꾼이기도 한 그의 책 《촌사람으로 사는 즐거움》이 뭘 의미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것은 낭만도, 여유도, 유희도 아니다. 그것은 정이며 인연이고, 자연의 다정함을 배우는 즐거움이다.
비록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없는 세상이라도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꿈꿀 권리가 있는 세상은 저절로 오는 게 아니다. 이 평범한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경애로운 자연은 행복을 꿈꾸는 데에 그치지 않고 열심히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우치길 바라고 있는게 아닐까.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행복해지는 것뿐 아니라 덜 갖고도 행복해 지는 것은 천성의 문제가 아니라 노력과 용기의 문제라는 걸 느낀다. 빛나지는 않지만 늘 푸른 고송처럼 자연의 평범한 진리로 살아가는 시인 유승도와 그의 가족을 통해 우리는 자연에서 배우고 꿈꾸는 자의 또 다른 노력과 용기를 본다. 田
글 사진/엄치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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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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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문화 유기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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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는 기능적인 것을 해결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기능적인 내용은 줄어들고 대신 의미론적인 요소가 덧붙여졌다. 그 변화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과거의 유물을 기능적인 면은 도외시한 채 의미론적으로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도구가 만들어진 기본 목적은 기능이므로 의미론으로만 이야기한다면 기본을 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집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자연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지어졌다. 그후 보호라는 목적을 달성하자, 자연이 아닌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른 목적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궁궐의 예를 들어보자. 궁궐은 단순히 자연환경으로부터 왕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것만은 아니다. 왕이 먹고 자는 생활공간을 마련하고자 지은 집임에는 분명하지만, 이러한 기본 목적 외에 사회적인 목적도 지닌다. 왕이라는 존재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것이 궁궐을 짓는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므로 당시 사회 구조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왕의 권위를 한껏 보여줄 수 있는 장치를 했다. 이것도 넓은 범위에서 본다면 집을 짓는 목적이 된다. 여기에 이르면 집을 짓는 행위나 형태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통치를 하는 왕의 행위에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하려고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집은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기능성이 덧붙여진다.
건축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넓힌 기술 발전
콘크리트와 철골구조가 발명되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 만드는 집의 구조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방의 넓이를 결정하는 경간(徑間: Span-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대 이집트 신전이나 궁전 그리고 페르시아 궁전의 유적을 보면 기둥이 많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평면을 보면, 그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았을까 할 정도로 기둥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러한 평면에서는 임의대로 집에 기능을 덧붙일 수 없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치(Arch)나 볼트(Vault) 구조다. 볼트 구조를 우리나라에서는 홍예(虹霓)라고 한다. 이 방식은 이론적으로는 무한대의 공간을 만들 수 있지만, 넓으면 넓을수록 재료와 인력, 장비 문제라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후 아치나 볼트 구조의 한계성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19세기 들어 발명된 재료인 철골과 콘크리트다. 이러한 재료의 발명과 함께 역학이론이 뒷받침되면서 건축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미래 건축물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넓힌 것이다.
철골과 콘크리트의 역학이론을 바탕으로 근대건축사에서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르꼬르뷔지에라는 건축가는 1914년 근대 건축의 본보기가 된 도미노(Domino)시스템을 발표했다. 이 시스템은 외벽의 독립, 자유로운 실내공간의 구성, 무한한 적층(積層)구조를 핵심으로 한다. 당대에 개발된 재료와 기술로 가능한 건축을 간단한 그림으로 함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의 완성은 재료와 기술의 발전 없이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건축 기술 발전과 집의 대량 생산
이처럼 기술은 집을 다양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기술 발전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넓게 열어 놓았다. 요즈음 지어지는 집들이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많은 부분 기술의 발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은 앞에서 말한 구조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각종 재료의 발전은 집의 여러 부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과거의 집과 현재의 집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 이전의 집은 대부분 현장에서 기능인에 의해 지어졌으므로 집이 잘되고 못되고는 그의 솜씨에 의해 거의 결정됐다. 그러나 현재의 집은 재료의 대부분을 공장에서 생산하므로 현장 기능인의 솜씨는 과거보다는 중요성이 덜하다.
전통한옥의 경우, 엄밀한 의미로 공장에서 생산한 것은 기와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재료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가공해 시공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지어지는 집을 보면 현장에서 가공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콘크리트 타설을 위한 거푸집이 현장에서 제작 조립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대형 건물뿐만 아니라 소형 건물까지도 공장에서 제작된 거푸집을 조립하는 정도의 작업만을 하고 있다.
근․현대에 와서 공장에서 생산된 재료가 주로 사용되는 이유 중 하나는 집의 대량 생산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인구의 도시 집중과 1,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파괴된 집을 단시일 내에 공급하기 위해 건물의 대량 생산은 필수적이었다. 그에 따라 과거와 같은 수공업적 방법으로는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기에, 결국 공장 생산을 통한 대량화가 대세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러한 사회 변화 역시 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건축 시스템을 촉발했다. 설계와 시공이 점점 세밀하게 분리되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한옥에서 설계 부분의 발전이 거의 없었던 것은 삶의 형태가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형태의 집을 만들려는 요구가 없다 보니 집을 짓는 데 있어 재료와 공법이 거의 결정되다시피 했으며, 자연 현장 기능인의 능력이 무엇보다도 중시됐던 것이다.
집의 대량생산과 미감의 변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사회적 요구에 의해 주거가 대량 생산됐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건축문화환경을 만드는 기반이 됐다.
공장제 재료의 적극적인 활용은 결국 미감(美感)의 변화까지도 이뤄 냈다. 공장에서 생산하는 자재는 효율성 때문에 모듈화를 요구했고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직선을 많이 이용할 수밖에 없다. 직선의 사용이 증가하면서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켰다. 직선이 눈에 익음에 따라 그것이 새로운 미감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에 따라 과거처럼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은 사라지고 차가운 직선이 새로운 미감으로 대두됐다.
또한 기계류의 발전은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 문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실내․외의 환경이 인공적으로 조성되면서, 집 발생의 기본적 명제인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이라는 문제가 집의 구조를 결정하는 우선 순위에서 뒤쳐졌다.
이러한 변화는 건축을 보는 눈에까지 영향을 미쳐 새로운 사조를 탄생시키는 모태가 된다. 즉, 근대건축에서 국제주의양식(國際主義樣式: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전제 하에 공통 분모의 미감과 삶의 방식을 찾아내 어느 곳에나 적용하려는 형태를 설계하려는 사조)의 탄생을 촉발했다.
문화 요인의 복합체, 집
최근 건축이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모으면서 그것을 건축가의 창작물로 이해하려는 성향이 짙다. 또한 같은 관점으로 과거의 건축물까지도 해석하고 있다. 최근에는 과거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건축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이 잘못됐다고 볼 수만은 없다.
지금은 디자인하는 데 아무런 제약 조건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가의 상상력이 디자인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됐다. 그러나 그 배경을 따져보면 기술 발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술 발전이 없었다면 건축가들이 지금처럼 자유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자유는 최근에야 우리에게 부여된 것이지 과거에도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또한 건축가의 역할이 다른 상황에서 과거의 건축물을 지금의 잣대로 파악하려는 것은 문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집이란 여러 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로 인하여 다른 부분이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여러 문화 요소 중 하나만 가지고 집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방법이다. 집이라는 것은 하나의 문화적 요소만이 아닌 모든 문화 요소가 어우러져 나타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담고 있는 도구이기 때문에 삶의 다양함만큼이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과거의 한옥이 현재의 집만큼 다양한 형태를 보이지 못하는 것은 그 시대의 삶이 지금보다는 단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현재의 집이 다양한 형태와 내용을 보이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집은 문화의 여러 속성들의 서로 영향을 주며 변화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다음 호에서는 집을 결정하는 요소들을 분류하여 어떻게 집에 반영됐는지를 한옥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田
■ 글 최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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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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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母情)으로 지은, 평창 60평 단층 동그라미 황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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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도시공간의 지나친 과밀과 혼잡, 공해로 인한 주거환경의 질적 저하를 이유로 꼽는다. 시골에서 성장한 후, 도시에서 중·장년기를 보낸 사람들일수록 더하다.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으로 친구와 함께 나란히 황토집을 짓고 이주해 사는 정영순 씨(57세)가 그러하다.
정영순 씨는 음성의 평범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 학업을 마치고 출가해 가족들 뒷바라지를 하면서 여느 사람들처럼 살았다.
나이 쉰이 되던 해, 자꾸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시골에 내려가 살아야지 하고 맘먹었다. 몇 번이고 곱씹어 생각해도 병약한 다 큰 아들을 위해서라도 도시보다는 시골생활이 더 바람직했다. 그렇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남편에게는 차마 시골에 내려가 살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오랜 친구인 최금순 씨(57세)가 몇 년 전부터 전원주택을 지을 만한 땅을 찾아다닌다고 얘기했다. 고향이 강릉인 친구는 거주지인 서울하고 중간쯤에 전원주택을 지을 요량으로 주로 평창과 영월지역의 땅을 물색했다. 그는 친구에게 남편에게조차 드러내지 못한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친구도 그가 몸이 약한 아들이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고민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지냈다. 그런 터라 이왕 맘먹고 나선 길이면 함께 전원에서 살자고 했다.
평탄하고 원만한 삶을 바라는 모정(母情)
1998년 봄, 마침내 친구에게서 평창군 평창읍 대하리에 서로 이웃하며 살 만한 땅을 봐뒀다는 연락이 왔다. 며칠 후 친구와 함께 찾은 부지는 황토밭이었는데 뒤로는 야트막한 언덕이 감싸고, 앞으로는 폭 50미터의 평창강이 시원스레 흘렀다.
중앙고속도로 신림I.C에서 주천 방면 88번 국도와 평창 방면 82번 국도를 번갈아 탈 정도로 교통이 불편했지만 그만큼 때가 덜 탄 곳이라 맘에 와 닿았다.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터라 자칫 적적하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친구가 이웃에서 함께 산다니 위안이 됐다.
그렇게 해서 평당 10만 원에 350평의 땅을 매입했다. 건축을 시작한 것은 부지를 매입한 지 3년이 지난 2001년 말부터였다. 오랫 동안 남편을 설득하다 힘에 부쳐 포기했다가 정년퇴임을 하자, 아들을 위해 더 이상 전원행을 미룰 수 없어 단독으로 강행한 것이다.
정영순 씨는 부지를 매입하기 전부터 이미 맘속으로 황토집을 짓고 있었다. 아들의 건강을 염려한 전원행과 황토집은 동시에 진행됐다고 볼 수 있다. 그때부터 전원주택과 황토 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수백 장의 모눈종이에 황토집을 지었다 허물었다를 반복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 3월, 연건평 60평의 집을 지어 ‘동그라미 황토집’이라 명명한 이 집은 모정(母情)의 결정체인 셈이다. 동그라미 황토집 옆에는 친구 최금순 씨의 ‘황토사랑 후암’이 나란히 자리한다.
황토집 두 채가 앉혀진 부지 자체가 황토라 집을 짓는 데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땅이 젖으면 워낙 질퍽거려 기초공사를 할 때 트럭 20대 분량의 마사토를 깔았을 정도다. 두 집 모두 하나 하나 손으로 빚어 만든 황토벽돌을 쌓고 황토로 벽을 바른 전통 흙집이다.
설계는 친구하고 함께 했는데 흔한 직벽이 아닌 특이하게 지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직벽 구조인 본채와 원벽 구조인 별채가 좌우 대칭을 이루는 동그라미 황토집과 황토사랑 후암이 앉혀졌다. 모양세가 워낙 특이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활짝 열린 전원에서 평탄하고 원만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서까래 맞물려 기둥 없앤 별채
원벽의 별채는 거실을 겸해 사용하다가 친인척들이 찾아오면 맘껏 머물다 가라고 독립시킨 것이다. 정영순 씨는 “사실 본채도 별채처럼 특이하게 지으려고 했으나 그것만큼은 남편의 고정관념을 깨지 못해 아파트처럼 평범하게 지었다”고 귀띔한다.
단이 낮은 마당에서 침목을 딛고 별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몇 차례 놀라게 된다. 먼저 30평의 넓은 원룸형임에도 7미터로 높은 천장에다 기둥 하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강원도 진부 삼판에서 구입한 목재를 이용, 서까래를 맞물려 노출시키고 경상남도 함안산 대나무로 마감했다.
원래는 한 가운데 큼지막한 기둥을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읍장이 외지인 그것도 여자 둘이서 집을 짓는다고 하자, 둘러보러 왔다가 기둥을 세우면 답답하고 공간 활용도가 떨어진다고 조언했다. 그리곤 설계사를 보냈는데 그가 맞물림공법을 이용해 기둥을 세우지 않고도 집을 짓는 방법을 일러준 것이다.
두 번째는 실내에 서구식 벽난로가 아닌 전통 아궁이를 마련해 불을 때게 한 점이다. 처음에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불길이 잘 빠져나간다고 한다. 아궁이는 보조난방 기능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이나 여름 장마철 고기를 구워 먹는데 안성맞춤이다.
세 번째는 철근콘크리트 기초 위에 한 뼘 정도 황토를 다진 후 그 위에 대나무 돗자리를 깐 점이다. 돗자리를 거둬내면 쩍쩍 갈라진 황토바닥이 드러나는데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여러 가지 바닥 마감재를 생각했지만 황토기운을 살리는 데는 대나무 돗자리만큼 좋은 게 없었다고 한다.
넓은 거실에 다락이 딸린 온돌방 2개와 샤워부스가 마련된 화장실 2개를 들인 별채라 모든 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낯설기만 한 평창 땅에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려고 현지인을 구하려고 했으나 흙집을 짓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렵사리 구한 사람들도 벽체가 원형이다 보니 쌓다가 허무는 시행착오를 수 차례 반복했다. 또한 집이 지어진 후에는 싱크대며 책상, 피아노, 가전제품 등이 모두 직선이라 살림살이 들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흙 냄새 속에 되찾은 행복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를 향해 난 창을 열면 그야말로 12폭 병풍이 펼쳐진다. 물안개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날의 풍경은 진경산수화 그 자체다. 정영순 씨는 이곳에서 주로 서예를 하며 보내는데 요즘은 방문객들에게 내주는 날이 더 많아졌다.
평창강을 찾은 여행객들이 집이 아름다워 들렀는데 어떻게 하룻밤 묵어갈 수 없냐는 성화 때문이다. 그럴 때면 책상 위에 늘어놓은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방문객에게 그대로 내준 채 몸만 빠져나온다.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은 전원행을 급구 반대했던 남편의 맘이 돌아선 것이다. 별채 창가에는 그가 빚은 도자기와 함께 남편이 수집한 수석(壽石) 몇 점이 놓여 있다. 미안한 마음을 씻지 못했는데 “이제 내 것도 진열해야지” 하는 남편의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고.
방문객들은 저마다 아름답고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마음의 평온을 찾으러 들렀다가 예쁜 추억을 하나 달고 간다고 말한다. 그는 야채며 과일 가꾼 것을 나눠 먹으면서 방문객들이 친정에 온 기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한다. 방문객이 하도 잦자 급기야 딸이 동그라미 황토집이란 홈페이지(http://ohwangto.com)를 만들었을 정도다.
정영순 씨는 얼마 전 650평의 밭을 구입했다. 상추며 고추, 마늘, 배추 등 가꿀 수 있는 것은 이것저것 다 심기 위해서다. 시골생활에 적응하면서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는 반증과도 같다. 1년 넘게 시골생활을 하다 보니 아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고 체력도 좋아졌다면서 행복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도 두통을 늘 달고 다녔는데 말끔히 사라졌다고 한다.
눈을 뜨면 하루가 다르게 자란 밭의 풀들을 뽑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른다는 정영순 씨. 진한 흙 냄새에 젖은 그에게서 모정과 함께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田
■ 글·사진 / 윤홍로 기자
■ 건축정보
·위 치 :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대하리
·부지면적 : 350평(밭 650평)
·건축형태 : 황토벽돌주택
·건축면적 : 60평(본채 30평, 별채 30평)
·내벽마감 : 황토벽돌 위 황토 모르타르
·외벽마감 : 황토벽돌 줄눈마감
·지붕마감 : 아스팔트슁글
·창 호 재 : 수공 목조창호
·건 축 비 : 평당 350만 원
■ 설계·시공 : 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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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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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하게 지은, 오산 44평 2층 목조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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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수준의 향상과 교통여건 개선, 여기에 주5일 근무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최근 2∼3년 간 꾸준히 확산되던 전원주택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도는 더욱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전원주택 전문업체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 3년 안에 전원주택으로 옮겨가겠다고 답한 사람이 응답자의 60% 이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깜짝 놀랄 결과이고, 거대도시 집중이 불러오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감안할 때, 매우 고무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수요가 늘어나면 자연히 공급의 질도 높아진다. 소비자는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얻게 되고, 서두르지 않더라도 정직하고 경험많고 또 믿을 만한 업체 중, 자신에게 꼭 맞는 곳을 선택하는 여유도 부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와 논의에 있어, 전원주택 시장의 급성장과 부가산업 확대라는 제도적, 물리적 쟁점만 부각될 뿐 정작 그것의 원인이자 결과인 전원생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대안 등이 빠져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삶의 질이나 교통 여건의 개선 등은 성공적으로 전원에 정착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원은, 혹은 전원생활은 그 자체로 건강하고 낭만적이면서도 에너지 넘치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걸 주고자 한다고 해서, 그 모두를 우리가 꼭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전원생활은 먼저 기대하기보다는 먼저 찾고 다가서는 것이며,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때문에 땅사고 집짓는 일은 전원생활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엇으로 시작하느냐’보다는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오산에 목조주택을 짓고 사는 이환묵 씨는 전원생활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자연은 어떻게 사귀는 것이며, 전원생활이란 어떻게 시작하는 것인지, 전원과의 조화와 화합은 어떻게 만들어 가는 것인지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모던하면서도 단아한 느낌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오산I.C로 나가 시끌벅적한 시내를 지나 정남방향으로 들어가다 보면 한적한 외곽마을이 나온다. 듬성듬성 개발의 흔적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편도 2차선 도로 주변에 드물게 보이는 민가들은 낯익은 초야(草野)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산시 서동, 넓직히 터를 잡은 집들이 가을의 풍성한 햇빛을 마당 가득 품어 안고 있는 곳, 그곳에 이환묵 씨의 전원주택이 있다.
거친 풀 사이로 화목난로의 연통과 오렌지색 파라솔이 봉긋하게 보일 뿐,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지만 잘 정리된 조경과 경사지붕의 완만한 곡선은 전통목구조의 단아한 느낌을 준다.
또 대부분의 목조주택이 주는 깔끔하고 경쾌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지붕처마, 벽체코너, 창문테두리까지 같은 색상으로 처리해 통일된 이미지를 주며, 전면창을 낸 중앙 벽면과 지붕 위 연통 부분에 인조스톤을 사용해 안정감 있고 중후한 분위기다. 처마를 길게 뽑아 출입구를 독립적으로 강조하고 강화 플라스틱으로 된 데크와 방부목의 펜스도 인상적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기본에 충실하게
이 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조경인데, 건축주 이환묵 씨가 직접 조성했다. 나무도 꽃도 잔디도 모두 이환묵 씨가 가꾸고 보존한 원시림의 일부로, 건축 당시 다치지 않게 조심하느라 애도 많이 먹었다고.
보통 3,000∼4,000만원이 든다는 전원주택 조경이지만, 이환묵 씨가 정원 조성을 위해 목돈을 들인 것은 조경석 외엔 거의 없다. 이것도 크레인으로 직접 사다 옮겨와 석공을 불러 손질한 것이다.
아치게이트나 쉘타, 정자나 연못같은 그럴듯한 조경시설물 하나 없지만, 줄기뽕나무가 자라는 파고라나 자연석과 원목을 활용한 디딤돌, 작은 호박돌담으로 경계 지은 정감 있는 화단 등은 모두 그의 솜씨다. 농고 입업과를 졸업한 그는 전원생활을 결심하면서부터 꾸준히 조경공부를 해왔다. “내 손으로 했다고 하면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더군요. 그렇다고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99% 노동이예요. 엄청난 노동이죠. 저한테는 그게 이 일을 해보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였어요. 정성들여 생명을 키우는 기쁨이야 말도 못하죠. 사심도 없어지고 마음이 참 맑아지는 것 같아요.
자연은 빈손을 내미는 법이 없어요. 노력한 만큼 돌려주거든요. 그래서 여름 내 여기서 흘린 땀이 저렇게 단풍으로 드는 거잖아요.”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정원 한쪽에 자리한 공작단풍이 유난히 붉어 보인다.
실내 공간은 방을 넓게 빼 공용공간을 좁혔지만 직장다니는 자녀들의 사생활을 배려해 가족실의 규모는 크게 잡지 않았다. 오픈된 주방은 현관과 동선을 잇고 주방 입구 맞은편에 있는 다용도실 겸 창고 옆으로는 바로 부출입구를 만들어 후정과 연결시켰다.
경사지붕을 이용한 다락방은 직장다니는 딸의 2층 침실에 부속시키고, 뻐구기창과 작은 덱을 내어 아늑하면서도 개인적인 공간의 느낌을 유도했다. 또 2층 복도의 고창(高窓)과 거실 안쪽에 위치한 천창을 통해 채광과 환기를 확보하고 실내 분위기를 밝게 계획했다.
목조의 내구성을 고려해 나무의 변형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북미산 각재로 골조시공하고 몰딩재나 실내 문에 모두 원목을 사용해 질감을 살렸다. 또 하수배관의 냄새와 소음을 줄이고 배수가 원활히 되도록 스톡벤트를 설치했다. 건축비는 심야전기보일러를 직접 설치한 것을 빼면 평당 320만 원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기본에 충실하게 지어진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전원생활, 행복한 보물찾기
건축주 이환묵 씨는 원래 오산이 고향으로 30년 가까이 도시에서 생활하다 얼마 전 32년 공무원 생활을 정리하고 명예퇴직 후 이곳으로 옮겨왔다. 흙과 나무, 논밭과 살고 싶어 오랫동안 전원생활을 갈망했다는 그는 94년 부지를 매입했다.
농지였던 땅을 평당 15만 원에 300평을 샀는데, 108평은 밭으로 남기고 160평만 대지로 용도변경했다. 대지법상 자연녹지라 건폐율이 20% 밖에 안돼 건축 면적이 좀 부족한 듯 싶었지만, 네 식구 지내는데 불편함은 없다고.
“도시 살 때 정기적으로 매달 이비인후과를 다녔어요. 귀도 멍멍하고 코도 답답하고 만성이었죠. 9급 공무원에서 시작해 32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더니 오십 넘어 몸이 여기저기 삐걱거리더라고. 작년 12월에 여기 내려와서는 지금까지 병원 한번 안갔어요. 너무 바빠서 앓아 누울 시간도 없지만, 이젠 귀도 맑아지고 갈 필요가 없는 거죠”.
말단 공무원에서 시작해 오산시청 행정국장 출신의 고급 공무원이 되기까지 그가 겪은 세월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겠지만 자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며 전원생활에 불만은 손톱만큼도 없다고 한다. 이환묵 씨의 가족은 다행히 아내와 아이들이 아빠 마음을 이해해준 덕분에 가족들의 만장일치로 전원생활을 결정했다. 게다가 출가한 큰딸 내외까지 자주 찾아와 온가족이 함께 지내는 시간도 월등히 늘었다고.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이들은 많지만, 전원생활을 진정으로 즐기며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직접 키운 옥수수를 쪄내며 올해는 비가 많이 와 실하지 못하다고 사람 좋게 웃는 이환묵 씨의 전원생활은 매일 매일이 자연속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보물찾기 같다.
평생 고생하셨으니 좀 편하게 쉬시지 왜 여태 바쁘게 사시냐는 말에 “농사꾼의 아들이 돌아와야 할 곳으로 제대로 찾아 온거죠.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예요. 이렇게 좋은 곳이 세상에 또 어디 있어요”라며 맑은 얼굴로 웃는 그에게서 진한 흙냄새가 나는 듯했다. 田
■ 글 엄치언 기자, 사진 박일 기자
■ 자료협조/푸른나이테
■ 건축정보
·위 치 : 경기도 오산시 서동
·건축형태 : 경량목구조(내·외벽 2″×6″)
·대지면적 : 300평
·건축면적 : 44평
·내부마감 : 석고보드, 벽지
·외부마감 : 시멘트사이딩 +인조스톤
·지붕마감 : 이중그림자슁글
·바닥마감 : 온돌마루
·창 호 재 : U-PVC시스템창호
·난방형태 : 심야전기보일러
·식수공급 : 상수도
·건축비용 : 평당 320만 원
■ 설계/시공 : 푸른나이테 (031-902-3123,
www.greenannualr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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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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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관보다 합리성 우선한, 고양 푸르메마을 단지 내 55평 목조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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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메마을은 단지 조성 후 6년째 접어드는 동호인단지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규모에 단지 전체가 목조주택이라 그런지 단아하고 깊이가 있다. 대지는 가구당 200평 씩, 32세대 6400평이다.
동호인단지가 전원주택 단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보다 친목과 동질감이다. 그 동질감은 누가 강요한다고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은 코흘리개들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단히 마음먹고 내려와도 6개월을 못버티고 줄행랑을 치는 곳이 바로 시골이다. 어쩌다 한번 여행삼아 들르며 전원이다 뭐다 하며 호들갑을 떨던 사람들도 막상 흙집하나 짓고 내려와 살라고 하면 혼비백산한다.
그래서 시골을 선호하는 좀 유별난 취향의 사람들끼리는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또 존중할 준비가 돼있다. 동호인단지가 일반 전원주택 단지와 또 다른 점은 일괄적으로 한 업체나 업자가 단지조성을 마치면 필지를 분양받고, 알아서 지어주는 집에 들어와 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란 거다.
동호인단지는 부지 매입에서 각종 인·허가 절차, 전기, 배선까지 대부분 자체적으로 의견을 모아 발주 경로를 투명하게 하는 등 자체적으로 담당해야 할 몫이 크다. 물론 전반적인 단지 조성 단계를 경험많은 개발업체에 맡겨 진행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입주자 간 상호협력이나 교류가 월등히 많고, 서로에 대한 돈독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삼성에버랜드에서 단지 조성과 시공을 책임지고 (주)스튜가에서 개별 주택의 건축을 맡은 고양 푸르메 마을은 전체가 32세대로 이루어져 있고 대부분의 입주자들이 인접한 도시를 일터로 삼고 있는 메인형 전원주택 단지다.
기존의 등고선과 수목을 최대한 유지하고 있는 환경친화형 단지인 고양 푸르메 마을에서 55평 목조주택을 짓고 사는 전면, 박인화 씨 부부의 전원생활을 통해 동호인 단지의 또 다른 사례를 살펴봤다.
전원의 장점과 신도시의 이점을 조화롭게 활용
자유로를 타고 장항I.C로 나가 호수공원을 끼고 직진하다 보면 307번 국도와 만나는데 이 국도변 안쪽으로 푸르메 마을이 있다. 야트막한 구릉지 위에 알맞게 터를 잡고 잘 닦아 지은 단정한 목조주택 단지인 푸르메 마을은 건축에 있어서 특히 조망권과 일조권 확보, 사생활 보호에 중점을 두었다.
적당히 굽은 단지 내 도로에 잘 정리된 조경과 변화가 있으면서도 통일된 이미지를 주는 베벨사이딩의 외관이 목재의 풍성함을 느끼게 한다. 또 전원주택의 정면에서 흔히 보이는 박공벽과 까치지붕을 절제하고 한쪽 방향으로 중첩되는 경사지붕으로 모던한 느낌과 동시에 안정감을 살렸다. 뿐만 아니라, 도로와 대지간의 적절한 레벨차이로 조성된 완만하고 자연스러운 경사를 이용해 주변 부대시설과 단지간, 단지 내 주택간의 영역을 구분하고 소음도 최소화했다.
이와 같은 단지설계와 건물배치 외에도 푸르메 마을은 일산신도시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앞마당처럼 가까이 있어 교통, 교육, 생활권이 매우 편리하다.
만족할 만한 입지와 주거조건은 전원주택 단지의 실질적인 이용가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 대부분의 전원주택 단지가 20∼30세대 규모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동차의 진출입이나 단지 내의 막다른 도로, 인근 부대시설의 협소 등으로 입지조건이 저하되고 여기에 단지 조성과 건축설계 과정에서 입주자의 가족구성원, 개성, 취미 등이 반영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많은 전원주택 단지가 효율성과 실리성에서 수요자의 외면을 받고 있다.
이와 달리 전원이 주는 장점과 신도시의 이점을 모두 갖고 있는 푸르메 마을은 상담에 의한 상세계획의 변경과 마감자재 선택등을 시공과정에 반영한 성공적인 동호인 단지의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합리성과 실용성에 중점 둬
푸르메 마을의 시발점은 1997년 공항에서 근무하는 경찰과 세무공무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그들만의 작은 모임이었다. 평소 전원생활의 희망을 키워가던 이들은 혼자가 아닌 둘 이상이 뜻을 모을 때 그 희망이 조금 더 가까워지리란 생각을 가졌고 여기에 당시 세무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던 박인화 씨의 남편 전면 씨도 참여해 힘을 보탰다.
하지만 현재의 부지를 구입하고 구체적인 단지 조성을 시작할 무렵인 98년 I.M.F가 터졌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동호인들이 하나 둘 흩어지게 됐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은 처음의 결심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지금의 푸르메 마을이 만들어 졌다.
떠난 동호인들의 자리는 뒤늦게 전원주택 단지 소식을 듣고 이들에게 부지를 매입한 일반인들로 채워졌는데, 전체 32세대 중 2/3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들과도 특별한 잡음 없이 잘 지내는 편이라고.
재작년 봄부터 공사를 시작해 5개월 여 만에 완공한 전면, 박인화 씨 부부의 목조주택은 미국식 경량 목구조 방식으로 공유지를 제외한 137평의 대지에, 건평은 55평, 건축비는 평당 380만 원이 소요됐다. 건축양식은 동호인 규약에 따라 목조주택으로 결정했지만 그렇다고 불만은 없다. 시공이 용이하고 건축비가 저렴해 여러모로 경제성이 높은 점도 그렇지만 돈이나 수고로 투자한 것에 비해 과분할 만큼 외관이 아름답고 소재의 품질이 좋아 크게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 집의 장점이자 특징은 무엇보다 합리성과 실용성이다.
“사실 우리 집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선 어느 정도 무관심했어요. 미관에 신경 쓰다 보면 내부에는 쓸 수 없는 자투리 공간이 생기기 마련인데 실속 있고 알차게 구석구석 사용하고 싶은 욕심이 들더라고요. 목조가 워낙 깔끔하고 그 자체로 멋스럽잖아요. 그래서 외관이야 어느 정도 남 보기 싫을 정도만 아니면 되지, 생각했죠. 우아하고 세련된 집들 보면 가끔 부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전 우리 집이 더 좋아요. 속이 꽉 찼잖아요”. 집 자랑에 한창인 박인화 씨 얼굴이 활짝 핀다.
방을 모두 넓게 빼 실내가 다소 좁은 느낌이지만, 이는 독립적인 생활을 원할 나이의 자녀들과 메인침실을 두 사람만의 작은 응접실의 역할로도 겸하고 싶은 부부의 바람 때문이다. 그래서 1층 거실은 대부분의 목조주택이 선호하는, 시원하게 올린 천장과 넓게 얹은 원목마루에 비교해 서민아파트를 연상케 할 만큼 아담하고 소박하다.
또, 지붕처마, 벽체코너와 창문테두리 몰딩 등을 외벽사이딩과 같은 색상으로 처리하고 지붕색상도 이에 맞춤으로써 지붕선과 함께 중후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등 깔끔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일반적인 경량목구조주택과도 대조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전원생활의 성패는 여성의 몫
전면, 박인화 씨 부부는 단지조성이 끝난 후 동호인들 중에선 후발주자로 입주했는데, 부인 박인화 씨는 15년 넘게 생활한 삶의 터전과 도시에 길들여진 일상의 리듬자체가 바뀐다는 것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시골생활이란 게 뭔지 전혀 모르니까 그냥 겁이 좀 났어요. 태어나진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시골에 대한 추억이나 미련 같은 게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몰라요. 친구도 친지도 이웃도 모두 도시에 있는데 거기 가면 너무 외롭겠구나, 걱정만 앞섰죠. 그래서 시골 가서 살자며 집 지을 땅도 마련해놨다는 남편 말이 처음엔 야속하더라고요.
부지 매입해 두고 한 3년 정도 지났나, 한번 가보기나 하자고 그래서 따라나섰죠.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 500배는 좋더라고요. 먼저 들어와서 집 짓고 사는 동호회분들 만나서 얘기도 듣고 그러니까 두려움이나 걱정이 시시해지더라고요. 공기 참 좋다, 집 정말 예쁘다, 우리도 여기 와서 살자, 남편한테 그랬지 뭐예요”.
박인화 씨는 자신을 설득해 준 남편과 싫은 소리 한번 없이 잘 따라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한다. 잠시라도 손을 놓으면 금새 티가 나는 게 집안 일이라, 정원의 꽃이며 텃밭이며 잔디며 청소며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일거리에 지칠 만도 하지만 전면 씨 부부에게 일이 많다는 건, 곧 즐거움이 많다는 거다. 매일 인천으로 출퇴근하는 남편에게도, 통학거리가 길어진 아이들에게도 전원은 오히려 도시가 줄 수 없는 휴식과 여유를 되찾게 해준다는 그녀의 말속에 흐뭇한 만족감이 묻어난다.
“몸이 아파 그동안 나도 고생하고 가족들도 고생시키고 그랬는데, 여기 내려와서 3년 살아보니 이젠 정말 아픈 데가 없어요. 이런 얘기하면 못믿겠다는 분들 많은데, 나로서는 믿게 할 방법이 없거든요. 그냥 한번 살아보면 알 거라고, 아파트에서 시루떡처럼 끼여 살지 말고 내려오라고 그래요. 이런 내가 무슨 장날 약장사같지만 좋은 건 나눌수록 배가 된다잖아요. 그리고 이거 알아요. 전원생활의 성패는 여성의 몫이 크다는 걸”.
전면, 박인화 씨 부부는 자연 속에서 겸손해지고, 욕심부리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방법을 배운다고 한다. 부부의 보금자리인 단아하고 소박한 전원주택도 이들을 닮았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담아낼 것인가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곳, 그들의 화목하고 따뜻한 둥지가 새삼 부럽게 느껴진다. 田
■ 글·사진/엄치언 기자
■ 자료협조/(주)스튜가(031-846-6166, www.stuga..co.kr)
■ 건축정보
·위 치 : 경기도 고양시 성석동
·건축형태 : 경량목구조(내벽 2″×4″, 외벽 2″×6″)
·대지면적 : 200평
·건축면적 : 55평
·내부마감 : 천연페인트, 루바
·외부마감 : 시다베벨사이딩
·지붕마감 : 아스팔트슁글
·바닥마감 : 목재온돌마루+비닐장판
·창 호 재 : U-PVC시스템창호
·난방형태 : 기름보일러
·식수공급 : 지하수
·건축비용 : 평당 380만 원
■ 설계 : 시건축(02-6230-3141)
■ 시공: 삼성에버랜드, (주)스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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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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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자연환경과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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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 지붕과 벽, 난방시설 등이 자연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다. 지붕의 경사나 처마가 나온 정도는 강수량이 얼마나 되는가에 따라 결정되고, 벽은 외기로부터 실내를 보호하기 위해 두께, 창문의 크기 등이 결정된다. 또한 난방시설은 추위에 견디기 위해 필수로 설치하는 것인데, 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취사와 난방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화로와 난로, 벽난로 그리고 우리의 온돌 등과 같이 난방 방식에 따라 집의 구조가 결정된다.■ 글 싣는 순서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2. 집은 문화 유기체다3. 자연환경과 집4. 기술 발전과 집5. 사회환경과 집6. 생활과 집7. 사고변화와 집8. 사람과 집-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집은 사람을 만든다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는 기능적인 것을 해결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기능적인 내용은 줄어들고 대신 의미론적인 요소가 덧붙여졌다. 그 변화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과거의 유물을 기능적인 면은 도외시한 채 의미론적으로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연환경은 모든 문화의 출발점이다. 문화는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자연환경이 달라지면 문화의 발전 방향도 바뀐다. 바닷가에서 살던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얻기에 바다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산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것이다.이러한 생각의 차이가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낸다. 곰과 호랑이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곰과 호랑이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상어나 고래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상어나 고래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런가 하면 바다에서 배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은 일찍 바다를 이용해 다른 문화와 접촉했을 것이고, 육지의 사람들은 말이나 기타 운송 수단을 이용해 다른 문화와 접촉했을 것이다. 이처럼 자연환경은 사람의 사고와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생활과 문화 환경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자연환경과 경제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먹을 것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급자족이 이루어졌기에 다른 종족과 교역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땅이 척박한 곳에서는 교역을 통해 물자를 조달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전쟁을 일으켜 다른 부족의 것을 취하거나 일찍부터 상업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비교만으로도 문화가 결국 자연환경에서 비롯됨을 쉽게 알 수 있다.집 역시 문화를 이루는 한 갈래라고 보았을 때 자연환경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집은 자연환경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각 지역의 전통 가옥에서는 자연에 적응하는 모습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일본의 다다미를 보면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겨울에 그리 춥지 않은 기후에 알맞은 구조라고 생각한다. 다다미 속에는 짚을 넣고 겉은 왕골 등으로 짠 돗자리로 감쌌다. 보온성이 뛰어나 그리 춥지 않은 곳에서는 다다미만 깔고도 지낼 만하다. 특히 여름에 습한 곳에서 좋은 촉감을 유지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름에는 바닥에 화문석 같은 깔개를 깔아 밑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눅눅함을 방지하고 있다. 따라서 다다미는 여름이 고온다습한 일본에 적당한 재료라고 생각한다.이렇게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한옥도 마찬가지다. 지역마다 집의 특징이 있는데, 철저하게 지역의 자연조건에 맞추어 발전했기 때문이다. 자연조건은 단순히 춥거나 더운 기후로 시작해 자연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와 자연으로 인한 재해를 어떻게 방어하는가의 문제까지를 포함한다.한옥의 구석구석을 보면 자연에 어떻게 적응하고 발전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자연에 적응한 대표적인 예는 기단, 기초, 온돌과 대청, 지붕과 처마, 굴뚝, 부엌 등이다. 자연에 적응하는 모습은 앞에 예로 든 집의 구성 요소들뿐만 아니라 건축 재료, 집의 형태, 평면 구조 등 집의 모든 요소에 골고루 나타난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오히려 사회·문화적 요소가 더 강조된 것도 많다. 그러나 이런 부분도 출발점은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것이었으므로 먼저 자연환경의 요소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집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 지붕과 벽, 난방시설 등이 자연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다. 지붕의 경사나 처마가 나온 정도는 강수량이 얼마나 되는가에 따라 결정되고, 벽은 외기로부터 실내를 보호하기 위해 두께, 창문의 크기 등이 결정된다. 또한 난방시설은 추위에 견디기 위해 필수로 설치하는 것인데, 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취사와 난방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화로와 난로, 벽난로 그리고 우리의 온돌 등과 같이 난방 방식에 따라 집의 구조가 결정된다.자연을 품은 한옥온돌, 한국 문화의 원류온돌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근한 단어다. 이미 여러 책에서도 상세하게 소개했기에 여기에서는 일반적인 설명은 생략하고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관심하게 넘어가는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째는 언제부터 온돌이 완전하게 자리 잡았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난방의 효율에 대한 문제이고, 셋째는 온돌과 부엌 구조와의 상관관계다. 넷째는 온돌이 한옥의 2층 구조에 끼친 영향, 마지막으로 온돌이 우리 생활 문화와 정서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다.우선 온돌이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난방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온돌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우리보다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닥 난방만을 하는데 비해 로마 시대의 온돌은 벽에도 난방을 하고 있다. 이것은 집을 짓는 재료가 우리와 달랐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는 벽돌이나 돌로 집을 지어 벽을 이중으로 만들 수 있었기에 벽 사이로 열기를 보내 난방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난방 시스템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중세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그 후 사라졌다. 어떻게 보면 문화가 퇴보한 것이다. 문화란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에 쉽게 고유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무리다.온돌의 전파 시기다시 우리 얘기로 돌아와서, 첫 번째로 언제부터 온돌이 우리의 대표적 난방 시스템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자.고구려의 쪽구들에서 시작된 온돌이 바닥 전체에 설치되는 것은 고려시대 중엽부터라고 한다. 학자에 따라 온돌의 전파시기에 대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신영훈 씨의 견해로는 고려시대까지는 한강 이북까지 전파되었고,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는 문경새재까지 남하했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란을 전후해서 남부 해안 지방으로 전파됐다고 하며 제주도에는 17세기경에서야 전파됐다고 했다. 또한 온돌은 고구려에서 발달한 문화이므로 고구려의 영향이 강했던 영동 지방에서는 더 일찍 남하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어쨌든 온돌이 우리나라 전체에 완전히 정착하는 것은 제주도를 제외하고 16세기에 이르러서다.온돌의 전파시기에 대한 간접 증거는 사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 시설도 건축물이므로 당대의 생활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온돌의 전파는 생활이 좌식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조 1430년(세종 12년) 전라남도 강진에 세워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13호)을 보면 바닥 마감이 전(塼)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마루 바닥은 후대에 다시 설치한 것이다. 전으로 바닥을 마감했다는 것은 그 당시 전라남도 지역에서 좌식 생활이 일반화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처럼 전으로 바닥을 마감한 것은 불교 의식상의 문제도 있지만 사찰 건축도 생활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5세기 초만 해도 전라남도 지방까지는 온돌이 일반화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새로운 변화가 온전하게 자리 잡으려면 오랫동안의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주거 방식으로 완전하게 자리 잡은 아파트도 온돌이 바닥 난방으로 완전히 정착한 것은 1980년대 중반으로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초기의 아파트는 방만 바닥 난방이었고 기타의 부엌, 화장실 등은 라디에이터를 사용한 온수난방이었다. 이러한 혼합 난방 방식에서 전체를 온돌로 바꾸기까지는 2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처럼 하나의 새로운 체계가 정착하기에는 난관이 있어 우리의 것으로 삼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고유 전통으로 생각하는 온돌도 고구려시대로부터 전국에 보급되는 데 1000여 년 이상의 기간이 걸렸다.온돌의 난방 효율두 번째로 난방의 효율 문제를 살펴보자. 사람들은 옛날 집은 춥고 불편하여 살기 힘들다고 한다. 한옥에서 살면서 추운 겨울 코가 찡하게 시려 오는 외풍에 시달려 본 경험이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많은 사람은 불편한 것은 놔두고라도 너무 추워 집으로써 가치가 없다는 듯 말한다. 그러면 과연 우리나라의 집만 유독 추워서 집 구실을 못했다는 이야기인지 또는 현대의 집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춥다는 것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다른 나라의 집과 비교할 때 한옥이 특별히 추웠는가 하는 점이다. 정확하게 과학적 수치까지를 들먹이며 비교 검토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해 보자.집이 따뜻하려면 우선 단열 성능을 확보해야 하고 다음으로 난방 연료를 풍족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서구 여러 나라도 이러한 점에 만족해했던 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다. 더욱이 단열이라는 개념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을 넘어서 이야기다.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사람이 지금처럼 따뜻한 집에서 살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단열 성능을 높이자면 기술의 발전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때 단열 성능을 좌우하는 것은 단열재와 기밀성이다. 목재와 흙을 주재로 심벽구조(心壁構造)로 만들어진 한옥은 단열 성능은 우수하나 상대적으로 기밀성이 많이 떨어진다. 그것은 창문과 문의 틈새, 벽의 틈새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결정된다. 심벽구조라는 한옥의 특징은 기밀성에서 매우 취약한 구조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최근 기술의 발전으로 거의 해결되고 있다. 최근에 지어지는 한옥은 현대적 기술을 응용해 단열 성능과 기밀성을 대부분 해결했기에 결코 춥지 않다. 집의 따뜻함은 난방 연료를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가와 단열 성능을 얼마만큼 높일 수 있는가의 문제다. 따라서 특정한 양식을 지닌 한옥만의 문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기밀성이 사람들에게 무조건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환기가 되지 않는 공간이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인가는 따져 볼 문제다. '움직임과 흐름이 없는 공기는 고인 물처럼 깨끗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주 환기를 시키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닌가. 약간은 춥지만 늘 맑은 공기가 실내에 흐른다면 흐르는 물처럼 우리에게 쾌적하고 맑은 환경을 제공해 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화석 연료의 남용으로 공기는 이제 맑지가 않다. 결국 현대에 사는 사람들은 따뜻함을 얻은 대신 쾌적함을 잃었다.온돌과 부엌의 관계세 번째로 살펴볼 문제는 온돌과 부엌의 관계다. 가끔 여성들이 한옥은 여성들을 힘들게 하려고 만든 집인 양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한옥에서 여성이 움직이는 동선만으로 보면 문제가 있는 집이라는 것이 맞는 말로 생각된다. 그러나 집을 단순히 여성의 움직임만으로 보는 것은 단편적으로 보는 시각이다.부엌의 문제는 자연환경에 맞춰서 집 구조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에 달린 문제다. 온돌을 들이려면 그 구조에 적합한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 온돌은 불을 때는 아궁이와 방바닥 면이 최소한 3∼4자(약 90∼120cm) 정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궁이가 있는 부엌과 방은 당연히 높이가 다르다. 또한 부엌이 방과 붙게 된 것은 연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난방과 취사를 같이 해결하려는 지혜에서 생겨난 구조다. 난방이 필요 없는 지역에서는 취사를 위한 장소가 생활하는 집과 별도로 설치돼 있다.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 이전의 부엌은 건물과 관계없이 반빗간(찬간; 饌間) 형식의 별도 구조로 독립돼 있었다. 당시의 생활은 온돌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지 않아 난방과 취사가 별도로 이뤄졌던 것이다. 또한 온돌의 원조인 쪽구들은 걸터앉도록 돼 있어 주로 생활하는 건물의 바닥은 외부와 높이 차이가 없다. 이러한 집이 연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난방과 취사를 같이 해결하는 구조로 발전하면서 부엌이 건물에 붙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온돌의 구조 문제로 부엌과 방 사이에 높이 차이가 생긴 것이다. 그 변화는 몇 달 가까이 난방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 연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취사와 난방의 겸용이라는 선택은 매우 합리적인 결정인 것이다.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우리의 자연환경에서 난방의 효율을 위해 불편을 선택했던 것뿐이다.부엌에 대한 다른 불만 가운데 하나는, 통풍이 너무 잘되어 겨울을 지나는 데 불편하다고 한다. 이 문제는 옛 살림을 맡아본 여인의 증언을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겨울 추위보다는 음식이 쉬 상하는 여름나기가 더욱 힘들었다."라고 한다. 여름에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통풍이 잘되는 부엌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부엌에서 불을 때기에 연기를 배출하려면 환기가 필수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로 부엌에 환기가 잘 되도록 한 것이다. 옛 한옥의 부엌을 현재도 사용하는 집에 가보면 창문을 대부분 유리 또는 비닐로 막아 놓고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변화가 있는 집은 취사 연료로 가스나 기름 등을 사용한다. 취사를 위한 연료와 도구가 바뀌면서 이제 아궁이의 활용도가 낮아져 예전과 같은 환기가 필요 없게 된 결과다. 결국 부엌의 구조 역시 생활 방식에 있어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어떠한 선택을 하는가에 대한 문제다.온돌은 2층 건물이 왜 없을까네 번째로 온돌이 한옥의 2층 구조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자. 많은 사람은 한옥에는 왜 2층 건물이 없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옛 건물에 2층 이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로 누각의 건물과 성문 등이 2층 이상으로 구성돼 있다. 개인 집에서는 일반적으로는 2층 이상의 건물을 보기 힘들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2층 건물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살림집에 2층 이상의 건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살림집으로 2층인 건물은 상주의 '양진당'(養眞堂), 경주의 '수봉정'(秀峯亭 ; 현재는 개조되어 단층임) 정도일 것이다. '화수루'(花樹樓 ; 경북 영덕)가 있지만 이곳은 살림집이 아니고 문중의 공부방으로 쓰인 재사(齋舍)다. 따라서 순수한 2층 건물은 양진당 정도가 맞을 것이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중층의 건물이 사라진 이유 중에 하나가 온돌의 보급이라고 생각한다. 온돌을 들인 상태에서 중층의 건물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수루도 중층의 건물이고 2층에 온돌을 들였지만 온돌을 들인 아랫부분은 방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중층 건물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2층에 온돌을 들이기 위해서는 1층의 층고가 높아야 하는데 온돌 자체가 돌과 흙으로 구성돼 있어 무게가 만만치 않아 목구조로 받치기에는 문제가 있다. 또한 불을 때는 것도 쉽지 않기에 2층 방을 온돌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온돌의 보급으로 2층 이상의 집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게 됐다.온돌이 우리네 생활에 끼친 영향마지막으로 온돌이 우리의 생활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온돌의 선택은 우리의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입식 생활에서 좌식 생활로의 변화는 모든 면에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생활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이나 중국의 집을 보면 입식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집에서 생활하려면 갖가지 가구가 필요하다. 바닥에 앉을 수 없다 보니 의자가 필요하고 물건을 올려놓거나 손님을 대접할 그릇들을 놓기 위한 탁자도 있어야 한다. 또한 바닥에서는 잘 수 없으므로 침대를 들여놓는다. 이처럼 의자와 탁자, 침대 등은 입식 생활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구도 유목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기에 이들에게는 이러한 가구들이 없다. 따라서 가구라는 것은 정착한 민족이 필요에 따라 만든 도구일 뿐이다.집의 기능이 분화 발전함에 따라 그에 필요한 가구를 만들고, 가구가 어느 곳에 놓이는 가에 따라 방의 기능이 나뉜다. 손님을 맞이하는 곳에서는 탁자와 의자가 필요하고 잠을 자는 곳에서는 침대가 필요하다. 이렇기에 침대가 있는 곳은 잠을 자는 공간으로 인식해, 침실은 사람들에게 개인적 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부부 침실인 경우 그곳은 내실의 개념이 돼 함부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의 기능 분화는 집의 규모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구를 많이 들여놓는 경우 가구가 차지하는 면적과 그 주위로 사람들이 통행할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만큼 당연히 방이 커지게 된다.이러한 생활에 비해 한옥에서는 침대가 비효율적이다. 바닥 전체를 난방하기 때문에 침대를 설치할 경우 설치되는 곳의 면적만큼 열이 낭비된다. 또한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바닥에 요만 깔고 자면 오히려 따뜻한 온기를 그대로 느끼게 되어 쾌적한 수면을 취할 수 있다. 온돌의 특성 때문에 열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잡다한 가구를 들이지 않는 구조로 변했다. 이러한 변화로 한옥에서는 가구보다는 벽장이 발전했다. 가구가 없는 한옥의 방은 보다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손님 접대, 식사, 취침, 오락 등 모든 생활에 필요한 기능이 한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서구의 방과는 전혀 다른 다목적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서양의 방은 그 목적에 따라 침실과 거실, 응접실, 식당, 서재 등으로 나뉘지만 한옥에서는 사용하는 사람 또는 위치에 따른 방의 명칭이 있을 따름이다. 사랑방과 안방, 건넌방, 문간방 윗방, 아랫방 등의 이름에서 보듯이 기능에 따른 구분은 없다.온돌로 인해 일어나는 생활의 변화는 가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온돌에서는 예전과 같이 신을 신은 채 방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온돌이 설치된 방에서는 신을 신고 들어가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신을 신고 벗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이러한 불편이 하루에 수없이 일어나기에 신는 신발도 형태가 바뀌게 된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일상의 신은 발목까지 오는 장화와 같은 형태였다. 이러한 형태의 신은 기마 민족의 경우 거의 같다. 그러나 목이 긴 신발은 신고 벗는 데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따라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을 타지 않는 경우 신발은 벗기 편한 형태로 변화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좌식 생활을 하면서 신발을 신고 벗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신발의 형태가 달라진 것이라고 생각한다.이러한 습관은 일상의 예절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양에서는 아직도 실내에서 신을 벗는 것은 결례라고 한다. 이러한 예절이 생긴 것은 신을 자주 벗을 수 없어 신을 벗을 때 냄새가 심하게 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신을 벗는 것이 일상화되어 신고 있는 것을 오히려 불편하게 느낀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이 사무실에서도 별도의 실내화를 비치하고 근무하는 동안 신을 벗고 실내화를 신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온돌을 들인 뒤에 일어나는 변화의 극히 일부분이다. 온돌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 중 중요한 것은 정서의 변화다. 온돌 문화는 우리의 정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온돌로 인한 가구와 같은 외형적 요소의 변화보다는 정서적 요소의 변화가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서의 변화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田글 최성호<산솔 도시·건축연구소 대표, 전주대 건축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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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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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돌, 산과 물이 있는 광주 2층 통나무카페 ‘석천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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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설계 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전통적인 한옥식 구조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처음 의도했던 웅장하고 수려한 비행기 모형에서 봉황의 기품 있는 형상을 모델로 했다. 용마루 처음 부분을 새머리모양으로 조각해 마치 한 마리의 봉황과 같이 재현한 것이 그것. 공사기간은 2년을 꼭 채워 1998년에 준공식을 가졌다. 건축은 올 나취(All-Notch) 방식으로 통나무를 옆으로 눕혀서 맞춤을 통해 우물정(井)자로 쌓았다. 목재는 쉽게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미국산 햄록 소나무를 사용했다.
운영주 오경환 사장은“흔히 통나무 주택의 단점은 바람이 불면 바람이 들어오고 벌레가 많이 낀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목재함량 수분이 빠져나갈 것을 생각하고 방부, 방충의 기초제에 신경을 쓰면 별다른 문제점은 발생하지 않습니다.”라고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높고 푸른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감이 익어 가는 계절, 배낭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용기가 그립다. 따스한 차 한잔으로 일상의 시름을 달래고 풀 향기 가득한 산열매비가 내리는 곳. 진실된 마음으로 정 깊은 이의 따뜻한 가슴을 느끼며 묻어 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곳은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통나무카페 ‘석천산방’이다.
곤지암 I.C를 나와 양평 쪽으로 난 자그마한 길을 2킬로미터쯤 달리다 보면 상열미 다리에서 좌측으로 난 계곡을 따라 오르자 그림에서나 본 듯한 통나무집이 보인다. 특히 이곳은 사방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위치해 있어 카페 내부에서 비치는 하늘은 더욱 파랗다.
맑은 공기, 적막함을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에게 차 한잔을 대접하고 싶은 주인의 마음이 대신 전해진다. 카페 입구에 이르면 자신의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신발장에 넣고 준비된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한다. 처음 방문한 손님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으나 잠시라도 내 집처럼 편히 쉬었다가기를 희망하는 건축주의 배려다.
전통적인 한옥식 구조를 완성하기 위한 건축
건축업을 하던 오경환 사장(52)은 1995년에 당시 전(田) 형태인 1200평을 평당 15만 원에 구입했다. 당시엔 ‘내 집 손수 지읍시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자연스레 통나무학교에도 학생들로 넘쳐났다. 오 사장은 포천 통나무학교에서 초·중급 과정을 수료한 뒤, 여러 차례 주택시공에 참여하며 시행착오를 겪었다.
10여 채의 집을 지으며 그동안의 데이터와 실수를 거울삼아 토지 480평을 형질변경해서 수공식 통나무집짓기에 들어갔다. 내력벽 없이 무게중심의 분산을 어떻게 해야하나를 고려했고, 누구나 그러하듯 설계 구상 시, 4∼5일에 집 한 채씩 부쉈다 짓기를 반복했다. 오 사장이 주택 설계 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전통적인 한옥식 구조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처음 의도했던 웅장하고 수려한 비행기 모형에서 봉황의 기품 있는 형상을 모델로 했다. 용마루 처음 부분을 새머리모양으로 조각해 마치 한 마리의 봉황과 같이 재현한 것이 그것. 공사기간은 2년을 꼭 채워 1998년에 준공식을 가졌다.
건축은 올 나취(All-Notch) 방식으로 통나무를 옆으로 눕혀서 맞춤을 통해 우물정(井)자로 쌓았다. 목재는 쉽게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미국산 햄록 소나무를 사용했다. IMF시기에 건축을 시작해 원목을 수입해 올 때 비용이 조금 많이 들어 건축비는 평당 600만 원 정도로 잘 꾸며진 잔디밭과 연못 등 조경비용으로 1억 5천만 원이 들었다.
오 사장은“흔히 통나무 주택의 단점은 바람이 불면 바람이 들어오고 벌레가 많이 낀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목재함량 수분이 빠져나갈 것을 생각하고 방부, 방충의 기초제에 제대로 신경을 쓰면 별다른 문제점은 발생하지 않습니다.”라고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카페의 1층은 마치 안방처럼 편안함을 주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장식된 ‘샘터’의 창간호를 시작으로 삶의 향기가 우러나는 1,000여 권의 아름다운 책으로 꾸며져 있다.
건축주는 2층 지붕에 아늑한 귀여움을 전하는 뻐꾸기 창을 냈다. 통나무주택에서 창을 낸다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며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2층 바닥은 일부를 유리로 장식해 1층의 실내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했다. 일부 손님들은 유리가 깨질까 다소 걱정스러워하지만, 10밀리미터 강화유리를 사용해 파손의 위험은 없다. 애초에 1층 천장에 올려다보는 어항을 만들어 물고기를 기를 계획이었으나, 어항 소독과 청결의 문제점이 있어 천창을 만들었다.
집터에 얽힌 이야기와 조형물 살피는 재미
카페 정원의 곳곳에는 여러 가지 조형물이 지나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집터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도 있다. 오랜 옛날, 주막이 있었던 이 장소는 근처 도기 굽던 장정들이 많이 찾아와 꽤 번성한 곳이었다. 이곳에 집을 지으려면 강해진 음기를 눌러야 한다고 하는 전문가의 권고에 따라 암수 용의 머리, 달마도, 남녀 상징 조각 등 곳곳에 의미 있는 조형물과 조각상으로 장식했다. 카페 옆으로는 가족이나 연인끼리 운동도 할 수 있는 족구장과 농구장이 준비되어 있다.
오 사장은 한가해지면 조경을 가꾸고, 견공들을 돌보며 포도밭을 손질한다. 경기도 광주에서 생활한 지 15년을 넘기며 전원생활을 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이 더없이 기쁘다.
그는 현재 지하 120평, 1층 60평, 2층 20평으로 설계된 카페와 함께 8개의 황토방펜션을 운영중이다. 1인당 2만 원(1박2식)의 실비만으로 쉬어갈 수 있어 학생들의 엠티, 직장인들의 야유회, 가족모임 등으로 많이 이용된다. 건물의 한쪽에는 황토방의 설계와 시공을 맡은 업체에 대한 감사패가 묻혀있다. 신뢰와 믿음으로 공사를 맡아준 업체에 대한 오 사장의 감사하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계곡이 못을 이루고, 황토벽을 따라 느긋한 걸음을 옮기는 장수하늘소의 넉넉함에서 자연의 겸손함을 배운다.
주변의 볼거리는 등산로를 이용해 천진암(天眞菴)에 오를 수 있고, 20분 거리에 이천온천이 있다. 또 10분 거리에 광주도자기 엑스포 전시장이 있어 체험학습과 교육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오 사장이 카페를 운영해 온지 4년째, 학생손님을 맞는데 한가지 규율이 있다. 학생끼리 여행을 와서 황토방을 이용하고자 할 때, 부모님과의 통화가 이뤄지고 여행에 동의가 있어야 만이 방을 내주는 까닭이다.
카페와 펜션의 운영은 오 사장의 아내, 동생 오두환(47) 씨 내외와 함께 하고 있다. 주말이면 아이들도 카페에 찾아와 부모님의 일을 거들고, 전원 속에서 인성교육을 배운다. 황토방 펜션을 찾아온 손님 중에는 가끔 보물찾기를 한다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야생화가 예쁘다며 뿌리째 뽑아 가는 사람들이 있어 아쉬움을 주기도 한다.
서울, 수원, 안산 등에서 이곳을 찾는 손님이 20명 이상이면 편의를 위해 버스를 운행하기도 한다. 최고 인원을 80명으로 제한했으며, 이는 손님들의 안락함을 위해서라고. 넓고 푸른 잔디정원은 야외결혼식을 치르는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솔 향기 가득한 숲 속을 지날 때, 우리네 예전 열녀문을 상징하는 듯한 통나무 기둥이 반기거든 지친 봇짐 풀어놓고 향긋한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는 건 어떨까? 田
■ 글·사진 김혜영 기자
■ 석천산방 (031-769-0366)
■ 건축 정보
·위 치 : 경기도 광주시 실촌면 중열미리
·건축형태 : 통나무 주택
·대지면적 : 1800평
·건축면적 : 200평
·외벽마감 : 미국산 햄록 소나무
·내벽마감 : 통나무
·바 닥 : 낙엽송
·지붕마감 : 아스팔트슁글
·식수공급 : 105미터 지하수
·건 축 비 : 평당 600만 원
·조경비용 : 1억5천만 원
■ 설계·시공 : 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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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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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기와 -최첨단 기술로 옛것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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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지붕재의 문제점 개선
㈜고령기와 김은동 대표이사는 “기존 현대식 건물용 점토기와인 S형 (Spanish type)기와의 디자인과 색상에 식상하고, 시공성에도 불편함을 느낀 소비자가, 외국에서는 가건물이나 축사에 사용되는 저급 지붕재(금속기와, 아스팔트슁글 등)를 사용하여, 주거환경이 황폐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저급 지붕재는 내구성이 떨어져 수시로 유지보수가 필요함은 물론, 지붕재로써 최소한의 요건인 소음차단기능과 단열성조차 없으며, 일부 지붕재는 불연재도 아닌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주)고령기와는 2대에 걸쳐 50년을 점토기와를 만들어온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3대째인 김은동 대표이사의 열정을 더해, 한식형 전통 기와의 품질과 명성을 평판형 유약기와로 이어나가고 있다.
11,000평의 공장부지에 2,500평 규모의 최첨단 설비로 자동화 제조시설을 확보하여, 연간 평판형 유약기와 360만 장, 한식형 유약기와 160만 장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모 기업인 고령기와는 한식형 그을림 기와를 연간 400만 장을 생산할 수 있는 자동화 설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 설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품질제일이라는 슬로건으로 생산에 매진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주택 도시연구원에서 인증한 환경친화업체이다. ㈜고령기와에서는 이러한 품질제일주의와 더불어 아래와 같은 장점들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1. 디자인이 우수성 : 현재 유럽과 일본에서 가장 선호하는 현대식 지붕재로써, 다양한 컨셉의 어떤 건축물과도 세련되게 조화되는 고급지붕재.
2. 뛰어난 기능 : 휨과 뒤틀림이 전혀 없는 평판형 구조에, 기와 한 장 한 장 안에서 맞물려 잠기는 INTER-LOCKING 방식을 채택하여, 기종의 S형 유약기와의 취약점인 시공성과 시공 후 태풍 등의 악천후로 인한 기와 벗겨짐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제품.
3. 자연스러운 기와 색상 : 가장 자연스럽고 세련된 COLOR TONE을 만들기 위해, MATT COLOR GLAZE를 도입하여, 기존의 유약기와는 차별화 된 고품격 COLOR를 구현.
4. 비교할 수 없는 물성 : 순수 고령 산 점토만 100% 사용하고, 유약을 시유하여 1,100℃ 이상의 고온에서 소성한 제품으로, 함수율 5.5% 미만의 치밀한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어 휨 파괴하중 450kg/f의 높은 강도를 보유함은 물론, 소음 차단성, 방수성, 단열성, 동파 방지 등 고급 지붕재에 반드시 필요한 고도의 물성을 보유.
5. 친환경적 제품 : 기타 지붕재인 ‘금속기와’나 ‘동기와’는 얇은 금속판으로 만들며, ‘시멘트기와’는 말그대로 시멘트로만 제조되나 그 외 지붕재로 쓰이는 ‘아스팔트슁글’은 저급 석유 제품이다. 고령기와의 모든 제품은 100% 점토로만 만든, 주거 환경을 최우선으로 하는 고급 지붕재로, 불에 타지 않을 뿐 아니라 별도의 유지보수가 필요없는 친환경 제품이다. 국내 최대 기와생산 기업으로서, 고급 지붕재인 점토기와의 국내품질수준을 선도해 왔으며, 가볍고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기와생산을 목표로 ㈜고령기와는 계속해서 매진하고 있다. 田
글·정리 박 일 기자
회사 연혁
1953. 5. 고령한와설립, 창업주 김영하사장 취임
1971. 1. 기와제조업자 등록 제1호 (문화재관리국
1982. 4. 국내최초 기와제조용 SUTTLE 가마 도입
1985. 4. 자체점토광산 채광 허가
1986.1고령기와로 상호변경, 제2대 김은동사장 취임
1986. 9. K.S.표시인증 취득 (공업진흥청)
1989. 7. 국내최초 한식형그을림기와 자동화설비 도입
1997. 3. 중소기업우수제품마크인증 취득 (중소기업청)
2001. 1. (주)고령기와설립(제2공장)
2001. 12. 국내최초 평판형유약기와 자동화공장 완공(제2공장)
2002. 6 제2공장 K.S.표시인증 취득(한국표준협회)
홈페이지 http://www.rooftile.co.kr/
전화 TEL:054-954-8000
FAX:054-954-5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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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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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 창을 낸, 경북 경산 2층 스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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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발 부산행 기차에 올라 대구로 가는 길, 오랜만에 얼굴을 드러낸 햇볕에 눈이 부시다. 창 밖으로 지나가는 황금들판의 곡식들은 얼마 전 태풍 ‘매미’의 흔적을 금새 씻어낸 듯 겸허한 미소를 드러냈다. 아담하고 정겨운 경산역의 평일 오후는 ‘여유로운 한때’라는 선물을 품안에 가득 안겨준다.
경상북도 경산은 사방이 성곽처럼 명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로부터 평화로운 고장으로 잘 알려졌다. 삼한시대 옛 압독국의 터전으로, 신라시대에는 김유신 장군이 군주로 있으면서 삼국통일의 전초기지가 되기도 했으며 효자, 효부를 많이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얼마 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됐고, 약 1,300여 개가 넘는 기업체와 학원도시로 교육과 산업이 절충된 발전을 이끌어 왔다.
경산의 북쪽 해발 1193미터 높이의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50평형 스틸하우스는 (주)흥진스틸건축에서 설계 및 시공을 맡아 완성한 집이다. 이미경 대표(32)는 독립된 2세대가 같이 사용하는 전원주택을 설계 컨셉으로 잡았다.
“미술을 전공한 제가 건축회사를 운영하게 되리라고 전엔 생각지 못했죠.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이 가장 큰 힘이 됐어요. 그리고 건축을 전공한 동생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죠.
자기개발에 힘쓰다 보면 언젠가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으로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며 건축을 시작한 계기를 차근히 설명했다.
(주)흥진스틸건축은 이 대표를 비롯해 젊은 직원들로 뭉친 회사다. 자못 ‘젊은 사람들’이라는 인식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2001년 창업이래 그들이 흘린 땀은 ‘속이 알차고 신선한 젊은 회사’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뛰어난 기능성, 예술성 더해 새로운 주택문화 완성
스틸하우스는 기존 주택이 지닌 장점에다 외관의 표현까지 자유롭다. 또 내구성이 뛰어나고 단열과 차음성이 뛰어난 장점이 있다. 이렇게 뛰어난 기능성과 예술성에 미술학도의 감각을 더해 21세기형 새로운 주택문화를 완성하는 것이 이 대표가 ‘스틸하우스’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남천면 산전리에 위치한 50평형 스틸하우스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의 포토밭에 위치해 있다. 주택의 설계는 병환 중인 시아버지를 위해 주안점을 두고 독립된 2세대가 함께 생활 할 수 있도록 했다. 편리하고 세련된 내부설계는 전원에서의 여유로움을 더한다.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이 대표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어김없이 남천을 찾는다.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고 있는 4살 박이 딸아이가 몸이 간지러워서 밤잠을 설쳤는데, 남천 주택으로 이주하면서 몸을 긁는 일이 사라졌다고 한다. 인근에는 각종 교육시설과, 병원, 문화마을이 인접해 있어 전원생활을 하며 느끼는 불편함은 거의 없다.
포토밭 자리였던 지형의 특성상, 130트럭 분의 흙을 부어 기초지반을 높여 옹벽을 쌓고 집을 얹혔다. 토지는 시부모님이 20년 전에 구입했으며, 인근에서 생활하고 있었기에 공사 중 주민들과의 마찰은 따로 없이 수월하게 진행됐다.
동남향을 향해 얹혀진 집은 채광을 위해 전면과 측면에 창을 여러 개 냈고, 디자인과 성능을 고려해 공동생활 공간인 거실의 천장을 높게 설계했다. 모든 설계는 3D 시뮬레이션을 통한 시공을 고려해 작업이 이뤄졌다.
1층은 41평으로 돌출형 티-스페이스(Tea-Space)를 가지고 있는 침실과 주방, 거실과 운동기구 방, 화장실과 다용도실로 구성돼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수납공간을 작은 방으로 꾸며 조상을 모시는 제단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2층은 16평으로 방 2개와 화장실, 지붕이 없는 발코니를 장독대로 이용하기도 한다. 전면에 위치한 넓은 발코니와 소형 거실은 2층에서의 독립된 휴식 공간 확보가 가능하다.
창호는 미국산 시스템 창호와 그린격자유리를 사용했고 내부마감은 실크벽지로, 바닥은 독일산 강화마루를 깔았다. 난방은 기름보일러를, 식수는 지하수를 이용한다. 주택시공 이후 1년 여 생활했지만 시어머님의 청결함과 별다른 관리가 필요 없는 스틸하우스의 특성상 항상 새 집 같은 느낌을 준다.
전망이 뛰어난 외관은 42평의 넓은 덱(Deck)이 있으며, 여러 방향으로 자리잡은 창은 해가 떠서 질 때가지 충분한 채광을 제공한다. 넓은 잔디밭과 정원수, 정자를 설치해 정원에서의 휴식과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인건비 줄이고 시공효과 높여
(주)흥진스틸건축은 현재 청도를 비롯해 여러 곳에 건축을 진행중이다. 최근 이 대표의 가장 큰 뿌듯함은 아름다운 강산으로 대표되는 이곳 청도에 교사부부의 멋진 전원주택을 시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근 주민의 마찰로 공사를 중단하는 위기까지 맞았으나, 현명하게 대처한 끝에 미술선생님인 건축주에게 화실을 갖춘 집을 선물할 수 있게 됐다.
아직 공사 초기진행상태이지만, 젊음을 뭉쳐 집을 짓는 이들이 당찬 주택으로 튼튼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몰딩 하나까지 직접 시공해 인건비를 줄이는 대신, 좋은 자재로 시공효과를 놓여 건축주와의 신뢰를 쌓고 있다.
스틸하우스는 내구성과 강도가 뛰어나 수명이 오래가는 주택으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구조부재가 경량이면서도 다루기 쉽고 벽체와 바닥, 지붕재를 미리 패널 형태로 제작한 후 현장에서 간단히 나사와 전동공구만으로 조립할 수 있어 시공이 간편하다. 스틸골조의 재활용이 가능하며, 재활용 후에도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 환경친화 소재이다. 스틸하우스가 튼튼한 골조와 긴 수명을 자랑하고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주택인 특징이 있는 반면, 결로 현상을 해결해야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온도차가 심한 한국 기후에서 겨울철 외부의 찬 기온에 쉽게 차가워진 처마 밑부분 등의 철골조는 얇은 천장이나 벽체를 통해 내부의 따뜻한 공기와 만나게 되면서 이슬 맺힘(결로) 현상이 생긴다. 이는 소음을 발생하고 방수의 문제점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에 (주)흥진스틸건축에서는 결로현상의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
이 대표는 현재 남천의 50평형 주택을 모델하우스로 분양을 계획 중에 있다. 자연, 사람,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을 만들어 가기 위한 (주)흥진스틸건축의 노력이 가족의 행복을 지켜주는 안전한 공간으로 탄생되는 날이 멀지 않은 듯 하다. 田
■ 글·사진 김혜영 기자
■ 건축 정보
·위 치 : 경남 경산시 남천면 산전리
·건축형태 : 경량철골구조(STEEL HOUSE)
·대지면적 : 297평
·건축면적 : 88평
·연 면 적 : 1층 41평, 2층 16평, 외부덱 42평, 방갈로 5평
·외벽마감 : 시멘트 사이딩, 방부목
·내벽마감 : 실크벽지
·바 닥 : 독일산 강화마루
·창 호 재 : 미국산 시스템 창호
·난방형태 : 기름보일러
·지붕마감 : 이중 그림자 아스팔트슁글
·식수공급 : 지하수
·건축비용 : 평당 340만 원
■ 설계·시공 : (주)흥진스틸건축
(053-956-1336∼7, www.steel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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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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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집 따라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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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싣는 순서
1. 집짓기 전에
2. 황토집 짓는 순서
1) 입지선정
2) 자금준비
3) 집터 장만하기
4) 주거의 평면구상
5) 건축 설계 및 허가
6) 토목공사
7) 자재구입
8) 착공신고
9) 건축공사
10) 준공검사 및 등기이전
11) 예상건축비용 산정 방법
3. 사진과 함께 보는 황토집 짓기 기술
1) 황토집 짓기에 필요한 도구들
2) 전통가옥의 각부 명칭
3) 전통방식 목구조 황토집 짓는 순서
건축에선 경험부족으로 인해 소비되는 비용이 꽤 높다. 이런 비용들을 낮추기 위해서는 경험이 풍부한 건축회사와 계약을 맺고 시공을 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싼 가격에 수주를 받아 공사를 하는 회사는 의심해봐야 한다. 싸게 수주를 받는 만큼 허술한 점도 많기 때문이다.
착공신고
농지 전용허가 시에는 토목공사가 완료되면 건축주는 시공을 하기 전에 반드시 시장·군수·구청장(읍·면사무소 경유)에게 오수정화조 설치신고를 해야 한다. (농지전용허가 시에는 별도의 착공신고 없이 오수정화조 설치신고만 하면 된다) 하지만 대지일 경우에는 일반국도 변에서 직선거리로 50m이내, 고속국도 변에서는 100m이내에 접한 대지는 신고대상지로서 건축신고(허가)후 신고필증을 교부 받아 착공신고서를 제출하고 건축공사를 해야 하며 이때 제출서류는 착공신고서, 건축허가 대상 건축물의 설계도, 오수정화조 설치신고서 등을 구비하여 제출하면 된다. 이때는 건축사가 서류를 구비하여 제출토록 한다. 하지만 위의 지역에 해당되지 않는 대지일 경우에는 별도의 착공신고는 하지 않고 오수정화조 설치 신고서만 제출하고 허가필증 교부 후 건축공사를 하면 된다. 이때 오수정화조는 건축면적이 100㎡~330㎡이하 단독주택으로 1가구 10인용, 100㎡이하인 단독주택일 경우는 5인용 정화조를 설치해야한다.
건축공사
건축공사는 건축주가 모든 자재 수급과 함께 목수 및 미장, 기타 기술인력을 동원하여 직영으로 하는 공사와 시공업체와 계약하여 진행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만약 시공 전문업체와 계약하여 건축공사를 한다면, 전원에서 황토집을 짓고자하는 건축주들의 입장에서 보면 시공업체를 선정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황토집을 짓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바램이 자연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무공해 주택을 원하기 때문에 과연, 자연친화적인 소재(돌, 나무, 흙, 물, 풀)만으로 튼튼한 황토집을 잘 지을 수 있을지, 또는 건축비용은 얼마나 투입되어야 할지, 황토집을 지어본 경험이 있는 업자인지, 혹시 부실시공이 되지 않을까 하는 등의 문제 때문에 망설여질 것이다.
하지만 건축주는 시공업체를 선정하기 전에 필자가 지적하는 내용과 같이 몇 가지 사항을 꼼꼼히 진단하여 추진한다면 황토집 짓기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선 황토집 또는 전통건축 관련 연구단체인 한국전통초가연구소나 고건축협회, 한국목조건축협회 등을 통해 업체를 추천 받아보는 방법과 시공업체를 선정하는 평가기준을 설정하여 건축주가 직접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따라서 시공업체의 평가방법 중 첫 번째는 대상업체가 황토집(전통건축)을 지어놓은 현장을 직접 찾아 다니면서 시공실적을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이때 황토집에 대한 별다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일일이 문제점을 체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시공자의 설명과 입주자의 경험담을 참고로 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때 건물의 외관이 아름답다거나 공사비가 저렴하다거나 하는 것은 평가기준에 큰 비중을 차지해서는 안되며, 기초를 얼마나 튼튼히 하였는지, 주택 내·외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였는지, 자재사용과 시공을 얼마나 양심적으로 하였는지가 평가기준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특히 중요한 사항은 작은 평수의 집을 단 한 채를 짓더라도 우리의 ‘전통흙집’을 보급한다는 사명감으로 완벽한 황토집을 지으려는 장인정신을 가지고있는 업주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전원주택(황토집)을 지으려면 각종 인·허가사항의 행정절차를 거쳐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민원업무는 토목 또는 건축설계사, 시공자가 건축주를 대신하여 인·허가업무를 대행하지만, 간혹 원활한 업무대행이 수행되지 않아 건축주의 계획에 차질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시공자가 수주실적에 급급해 무작정 공사계약부터 추진하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업체는 검토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설계사나 시공자는 건축주와 상담이 이루어지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건축주가 마련해놓은 부지에 대한 인·허가상의 문제점이 있는지를 사전에 관청의 해당 부서와 협의한 후 건축주와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부득이한 사항에서 신속한 업무추진을 위해 공사계약이 선행되는 일이 생길 경우에는 시공업체의 잘못으로 인한 문제 발생 시 해당 계약금 전액을 돌려 받을 수 있는 단서조항을 계약서에 명시하는 것이 좋다. 아무튼 건축주는 도면에서부터 인·허가 서류구비 및 허가, 착공, 준공, 입주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행정능력을 갖추고 있는 업체를 선정하는 것이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기간 내에 황토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세 번째로는 시공업체의 기술능력을 보아야 한다. 우선 현장에서 일하는 실무자의 설계도면 판독능력은 공사완료 후 관청의 사용승낙(준공검사)과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만약에 설계도면의 내용과 달리 건물이 지어졌다면 준공검사 시 지적을 받게된다. 지적 받은 건축물은 다시 고쳐 짓지 않으면 건축물 관리대장에 등재가 불가능하다. 이럴 경우 건축주의 부동산에 대한 재산권행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물론 설계도를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작성하였다면 설계사가 감리를 책임져야 하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건축자재(목재, 벽돌 등) 수급 및 관리능력과 현장기술수행(목수, 도목수, 현장기술경력자들의 숙련 능력 등)능력, 현장 민원 관리능력, 품질관리능력 등 현장을 총괄하는 책임자의 기술적 능력과 신용도가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정확한 적산능력으로 적정 공사비 산출능력을 갖추고 있는 업주라면 믿고 공사를 계약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은 건축주 직영으로 목구조집과 황토벽돌집을 지을 경우 참고해야할 몇 가지 방법을 간략하게 서술하기로 한다. 자세한 건축공사 기술은 다음 연재 황토집짓기 기술에서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 목구조집 공사는 크게 나누어 뼈대공사, 벽체공사, 지붕공사, 내부마감공사로 나누어진다. 그럼 먼저 뼈대공사는 전통가옥인 한옥을 지어본 경험이 있는 목수 또는 도목수를 시켜 일당(날일)제로 하던지 아니면 도급제로 하는 방법이 있다. 이때 일당제는 건축주가 목수의 일을 잘 모르면 공사비가 많이 지출 될 수 있으므로 가능하면 도급제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예를 들어 30평형 목구조집을 지을 경우 뼈대공사는 도목수(도편수)1명에 목수 2명, 목수 보조원(잡부)2명이 약15일에서 20일이면 마무리지을 수 있다.
그리고 목재수량은 평면과 목재규격에 따라 ±10%가량의 차이는 있지만 약 6,000사이에서 7,000사이가 소요된다. 집의 뼈대공사가 끝이 나면 다음에는 심벽치기(맞벽치기) 또는 황토벽돌 조적으로 내벽과 외벽을 쌓아 황토 미장재로 마감하면 된다. 이때도 역시 30평형에 사용되는 황토의 양은 심벽치기로 할 경우에는 15톤 덤프트럭으로 3차분이 필요하며, 황토벽돌 조적일 경우에는 벽돌 수량이 외벽용(300×200×140)이 약 2,500장, 내벽용(300×200×140)이 약 2,000장, 마감용 황토분(25㎏)이 약360포 소요되며, 필요인원은 조적공 3명, 미장공 2명, 보조공(잡부)3명이 4일에서 5일이면 가능하다.
지붕공사는 지붕의 소재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서까래 위에 대나무로 산자를 촘촘히 엮은 다음 알매를 올려 건조시킨다. 그 다음 방수시트를 바르고 아스팔트 슁글이나 적삼목등으로 지붕을 마감하면 된다. 만약 흙 기와로 마감 할 시에는 알매를 얹은 다음 기와를 올린다. 지붕공사까지 모두 마감되고 나면 내부 공사가 시작된다. 내부공사는 바닥온돌방 공사, 방문 달기, 마루판 깔기, 배관공사, 전기, 조명, 욕실, 부엌, 장판, 도배 등을 마치면 목구조 집짓기 공사가 끝이 난다.
둘째 : 흙벽돌집 공사는 목구조 집의 기둥 대신 황토벽돌 만으로 외벽을 쌓아 보와 도리를 흙벽체위에 걸치는 공법 이외에는 목구조 집의 기술과 동일하다.
따라서 흙벽돌집은 지붕의 하중을 흙벽만으로 지탱하는 것인 만큼 시중에 판매되고있는 제품을 구입하여 사용할 시에는 믿을 수 있는 흙벽돌을 사용해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 들어 황토(흙)집 바람이 불면서 황토벽돌과 황토 모르타르에 관한 제품들이 전국에 걸쳐 크고 작은 황토관련업체 20여 곳에서 생산되고있다. 하지만 이들 중 일부 업체에서는 시멘트, 본드, 화학수지 등을 첨가한 제품이나 압축강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제품으로써 건축용으로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불량 자재를 공급하고 있는 실정이므로 건축주들의 세심한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 : 건축공사 시 건축설계를 의뢰 받은 설계사가 감리자로서 공사의 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현장에 나와 감리를 하게 된다.
이때 감리자는 건축공사 기간 중에 발견한 문제사항을 시정, 재시공 또는 공사중지의 요청을 할 수 있다. 이때 공사 시공자는 감리자의 명령에 따라야 하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에는 시정 등을 요청할 때 명시한 기간이 만료되는 날로부터 7일 이내에 위법건축보고서를 시장군수·구청장에게 제출하게 되므로 건축주는 건축 허가서에 첨부된 설계도면을 준수하여 공사를 진행해야 부실공사를 막을 수 있다.
* 준공검사 및 등기이전
허가받은 건축물의 건축공사를 완료한 후 그 건물을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공사 감리자가 작성한 감리 완료 보고서를 첨부하여 시장·군수·구청장에게 사용승인을 신청해야 한다. 이때 사용승인신청을 받은 시장·군수·구청장은 그 신청서를 접수한 날로부터 3일에서 10일 이내에 건축주에게 사용승인서를 교부해야 한다. 단, 건축사 등을 감리자로 선정하지 않은 경우에는 담당공무원이 현장을 조사하여 사용승인을 위한 검사를 하게되면 7일 이내에 사용승인서를 교부하게 된다.
따라서 건축이 완공되고 사용승인이 떨어지면 관할 관청의 건물대장에 가옥을 등록해야 하는데, 이때 건축주는 건축물의 사용승인서를 교부 받으면 즉시 건축물대장 작성을 의뢰 받아 소유권 보전등기를 해야 한다. 건축물대장은 적법 건축물만을 대상으로 작성하고 건축물의 소재지, 구조, 용도, 층수, 건축물 연면적, 대지면적, 허가 년 월일, 사용승인 년 월일, 등재 년 월일 등 건축물 및 대지의 일반사항과 소유자 주소, 성명 등 소유권에 관한 사항 및 건축물의 이용상태 등을 기재해야 한다.
또 건축물을 취득해서 등기등록을 할 때는 관련 세법에 의해 취득세, 등록세 등의 세금이 부과된다. 부동산등기법에 의해 등기가 완료되면 등기소로부터 등기필증이 교부되면 건축주는 즉시 건축물대장을 열람하거나 등기부 등본을 떼어보고 기재내용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예상 건축비용 산정방법
대부분의 건축주는 시공업체에 견적을 의뢰할 때 평당에 공사비가 얼마나 됩니까 라고 물어본다. 필자에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똑 같은 상담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사비는 주택의 형태와 규모에 따라 또는 자재의 종류, 마감수준, 옵션자재, 시공법 등이 표기된 세부 설계도면에 의한 정확한 적산을 통해 전체공사비가 산출되는 것이며, 전체공사비에 시공평수를 나누어보면 평당 공사비가 산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건축주들은 업체 선정 시 평당 얼마에 집을 지어줍니까 라고 질문을 한다. 그리고는 평당공사비가 가장 낮은 업주에게 집을 잘 지어주세요 라고 부탁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결국 평당 200만 원에 집을 지어주세요 라고 하면 업주는 그 금액에 맞추어 싼 자재를 구입하고, 실내를 부실하게 마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건축주는 시공자와 상담할 때 평형과 집의 형태, 자재의 종류, 실내 마감수준 및 옵션자재, 시공방법 등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시공자는 건축주가 요구하는 사항에 따라 설계도를 작성하여 정확한 자재 수량 및 인건비를 산출하여 건축비의 낭비 및 추가지출을 방지하고 건축주가 원하는 훌륭한 황토집을 장만하도록 해야 한다. 아래 표는 30평형 현대식 황토집 예상 건축비용을 산출한 내용이므로 참고용으로만 사용하기 바란다. 田
■ 글 윤원태
〈한국전통초가연구소 소장 (052)263-2007, 3007 www.koreachog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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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