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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션, 그것이 알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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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션, 그것이 알고싶다
문답으로 알아보는, 펜션의 모든 것
Q1 펜션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나?
A 고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여행자에게 빵과 와인을 무료로 제공하는 간이식당이라는 뜻에서 생성됐다. 최초의 민박은 호혜를 베푸는 환대정신에서 출발하였으나 6세기경 화폐가 출현하고 상업무역이 발달하면서 경제생활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자, 언제부터인가 민박은 간이숙소 영업으로 변질됐다.
Q2 펜션의 뜻은 무엇인가?
A 펜션의 의미는 연금(年金)·은급(恩給)이라는 뜻으로 유럽의 노인들이 연금과 민박경영으로 여생을 보내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서양의 간이숙소영업은 프랑스의 '팡숀'(PenSion)을 들 수 있는데, 팡숀은 이태리어로는 '팽쇼네', 독일어로는 '펜죤'이라 발음하며, 운영주체가 농어촌 지역에 살고 있는 거주자들이다.
Q3 펜션은 어떤 숙박시설을 말하는가?
A 경제용어사전에는 펜션은 호텔 정도의 시설을 갖추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살린 소규모 숙박시설로 기재되어 있다. 선진국에서는 정년퇴직한 부부가 10실 정도의 객실을 자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요금이 싸고 가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규모 고급숙박시설을 말한다. 개인별장과 같은 아늑함과 가족적인 분위기의 새로운 스타일의 레저용 숙박시설이다.
프랑스풍의 팡숀은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산촌이나 호수가 및 바닷가에 입지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전지역에 걸쳐 보편화된 민박시설이며, 일본의 경우 1970년대에 처음으로 도입되어 전국의 유명관광지에 약 3000여 개가 성업 중에 있다. 펜션에는 개별 화장실과 주방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주인이 제공하는 가정식 식사도 즐길 수 있다.
Q4 펜션을 처음 도입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A 1998년 10월 탐라대 양영근 교수가 제주도개발특별법 개정 시안에 '특별개발우대사업 중 지역주민의 소득증대에 기여할 수 있는 농어촌분양형펜션을 추가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주도지사에게 제안한 게 시초다. 제주도 내 중·소자본을 가진 농·어민 스스로 소규모 관광숙박업에 참여케 함으로써 농어촌 지역경제를 살리고자 했다. 또 최근 관광객의 욕구가 자기들만의 공간과 자연환경친화적인 새로운 숙박개념으로 변화하는 추세로, 이들의 욕구 수용 측면과 21세기 제주 비전에 다가서는 도민주체 개발을 일부 실현하도록 기존에 없는 새로운 발상으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Q5 펜션업은 사회적으로 어떤 효과가 기대되나?
농가 개별 단위별로 체류형 체험 숙박업을 하는 것으로 농어촌 지역주민이 주체가 되는 사업이다. 그리고 도시민의 다양한 체험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자연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며, 관광산업이 농·어·축·임업과 연계한다. 또한 주변관광지와 유기적인 연계성을 확보하여, 농어촌 지역주민의 소득을 증대하는 효과가 있다. 여기에 기존의 관광객 수요와는 다른 새로운 관광객 수요를 창출시키는 효과도 있다.
Q6 펜션의 건축물 규모와 객실의 구비 요건은 어떤가?
제주도에서는 농어가의 재정 능력에 알맞게 10실 이내로 시설하여 가족단위 운영·관리하게 했다. 또한 농·어촌지역에 입지하므로 난개발 방지와 경관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2층 이하로 정했다. 객실 규모는 주로 가족단위 개별 관광객들이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최소 규모 25제곱미터(7.5평)을 확보토록 하였다. 제한이 없으면 호화시설이 입지하면 위화감이 조성됨은 물론 난개발될 소지가 있다. 객실 규모를 소규모로 제한시 분양 또는 회원모집과 관련하여 타 시설보다 경쟁력에서 뒤떨어지게 됨으로 최대 100제곱미터(30평)로 정했다. 객실은 하나의 방이 아니고 숙박과 취사에 적합한 거실(방포함)·현관(출입구)·욕실·화장실 및 취사시설을 갖추어야 하며, 1개 객실 출입구는 현관 1개소로 했다.
반면 문광부가 입법 예고한 관광진흥법시행규칙중개정령안에는
(1)자연 및 주변환경과 조화되는 3층 이하의 건축물일 것
(2)객실이 30실 이하일 것
(3)취사 및 숙박에 필요한 설비와 바비큐장 및 캠프파이어장 중 주인의 환대가 가능한 1종류 이상의 시설을 갖추고 있을 것. 다만, 수 개의 관광펜션으로 단지를 이룰 경우에는 공동으로 설치할 수 있다.
(4)숙박시설 및 이용시설에 대하여 외국어 안내표기를 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Q7 현재 국내에는 펜션이 몇 곳이 있나?
A 기존 콘도나 민박의 대체 숙박시설로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2002년 초 100여 채 미만이던 것이 연말에는 500여 채에 달할 정도로 양적으로 팽창했다. 여기에 기존 민박까지도 리모델링 후 펜션으로 간판을 바꿔달기 시작하는 추세인데, 이것까지 합치면 전국적으로 1000여 채에 육박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현재 오픈을 준비 중인 펜션의 수도 전국적으로 500여 채에 이른다.문관부가 ?관광펜션업법?을 시행하면, 펜션의 건축 추세는 다소 하강할 것으로 보인다. 펜션업도 이제는 세금을 내어야 하는 업종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추산되는 1000여 채 가운데 절반 이상이 관광펜션업에 등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Q8 국내 펜션은 어느 지역에 많은가?
주로 스키장이나 대규모 레저시설을 테마로 지역적에 군락을 이루며 대형화 내지는 전문화 되어가는 추세다. 특히 강원도 평창이나 경기도 가평, 청평, 태안반도 등이 대표적인 펜션 군락지다. 이들 지역은 여타 지역에 비해 앞선 입지 요건과 다양한 테마, 대규모 단지형 펜션의 잇따른 개발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어 펜션 예비창업자들의 관심지역이다.
Q9 펜션의 유형은 어떻게 분류하나?
전원형 펜션 :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펜션이다. 대개 300평 이상의 대지에 60평 안팎의 건물을 지어 전원에서 노후를 즐기려는 분들에게 적당하다. 여분의 방들을 여행객들에게 잠자리로 제공해주는 전형적인 펜션이다. 이용자들은 텃밭과 자연 경치를 만끽하면서 고향의 포근함과 집주인의 섬세한 손길과 다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농원형 펜션 : 약 1천 평 이상의 관광농원이나 수목원, 과수원 등과 같이 특화된 농촌 상품이 있는 펜션이다. 여행자가 농촌을 직접 체험할 수 있고 운영자는 생업을 그대로 유지해서 좋다. 건축 규모는 전원형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특산물을 재배하면 관심을 끌 수 있고 지역 홍보에도 도움이 된다. 최근에는 산채 등 야생식물 재배 판매와 어울려 고소득을 올리는 형태의 펜션도 늘고 있다.
콘도형 펜션 : 1천 평 이상의 대지에 300평 이상의 건축물과 부속 건물을 두고 다양한 형태의 사업을 동반할 수 있다. 가족호텔(30실 이상)이나 콘도미니엄(50실 이상)으로 허가를 받아서 분양이나 회원제로 운영하는 대형 펜션 사업이다. 건축양식을 펜션의 분위기를 살려서 목조로 짓는 것이고 운영은 호텔이나 콘도 방식을 따른다. 이 경우 관련 법규에 따라 허가 여부를 고려해야 한다. 초기 투자 규모로 보아 기업형 사업이다.
카페형 펜션 : 500평 이상의 대지에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적정 규모의 카페나 레스토랑과 같은 사업장을 가지고 펜션을 함께 운영하는 형태이다. 이 펜션은 사업장과 함께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사업은 교통이 편리하고 유동인구가 많은 입지 조건을 고려하여야 한다. 고객 위주의 서비스 사업이 되도록 인테리어나 음식 맛 등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활동 능력이 있는 젊은 사업가에게 어울리는 펜션이다.
별장형 펜션 : 단지처럼 여러 채의 펜션이 들어선 형태로서 소유자들은 상주하지 않고 주말 별장으로 사용하는 펜션이다. 따라서 관리인을 별도로 두어 사용하지 않을 경우 타인에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 수익을 창출한다. 이 경우는 개인이 운영하기보다는 관리업체에게 임대 또는 위탁하는 것이 좋다.
방갈로형 펜션 : 말 그대로 방갈로형의 이동형 소규모 건축물을 이용한 펜션이다. 우선 운영자는 건축비의 부담이나 건축허가의 문제를 덜 수 있어 좋고, 이용자는 작지만 독립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좋다. 특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의 경우 간섭받지 않아서 좋다. 방갈로는 일정한 규격으로 주문 제작이 가능하고 그 비용도 일반 건축비의 절반 수준이다.
절충형 펜션 : 여러 가지 형태의 펜션들이 복합적으로 접목된 경우이다. 전원주택형에 방갈로 몇 동을 추가한 것을 들 수 있다. 고객의 증가로 객실을 추가로 증축할 경우, 적절한 형태로 결합하는 경우도 해당된다.
Q 펜션, 정말 돈버는 사업인가?
A 수익률은 객실가동률과 관계가 있으며, 이것은 다시 테마와 조망권 및 부대시설과도 관계가 있다. 민박이 20∼30퍼센트의 객실가동률이라면, 펜션은 위치나 조망권에 따라 다소 편차가 있겠지만 40∼80퍼센트의 객실가동률을 보인다.
조사한 바로는 객실 가동률은 테마가 있는 펜션과 조망권이 좋은 펜션이 그렇지 않은 펜션에 비해 10∼20퍼센트의 가동률 차이를 보였다. 또한 부대시설이 있느냐 가령 바비큐, 텃밭, 농구장이나 족구장, 수영장, 세미나실, 식당, 선착장 등 직원 연수나 그룹 이용시설 유무에 따라 평일과 객실 가동률은 10~20퍼센트의 차이를 보였다.
중요한 사실은 객실가동률이 높은 펜션일수록 뜨내기손님보다는 단골고객이 많다는 점이다. 이는 곧 펜션이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문화적인 커뮤니티나 인간적인 커넥션을 통해 문화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익률은 객실 가동률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으나, 객실의 수가 많다거나 투자비용이 많으면 전체 매출 규모는 커지겠지만, 그에 비례해서 수익률이 높지는 않았다. 오히려 객실 수가 많을수록 부대시설이나 테마 개발 등 추가 소요비용이 많아지므로 수익률은 떨어졌다.
객실 10개가 넘을 경우, 부부나 가족이 경영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현재 60∼80평 규모에 객실 5∼6개 정도로 부부가 경영할 경우 연평균 가동률이 80퍼센트 이상이고 투자비용이 3억∼5억 정도의 A급 지역의 A급 펜션인 경우, 순수익률은 25퍼센트 내외이고 제비용을 제외한 월 순 수입은 약 1000만원 정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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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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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석으로 살펴본, 일본 펜션업계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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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석으로 살펴본, 일본 펜션업계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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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펜션은 여타 숙박업체에 비하여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펜션은 ‘여관업법’ 가운데 ‘간이숙박소영업’의 적용을 받는데, 영업에 관한 독자적인 법률은 없다. 단지, 1986년(昭和 61년) 후생성 생활위생국에서 나온 ‘펜션 영업에 있어 위생 등 자주 관리 매뉴얼’을 통하여 국가가 생각하는 펜션의 시설기준을 명확히 밝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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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을 보면, “숙박 형태는 서양식 구조와 설비를 갖추고, 주인이 숙박자하고 교류의 기회를 갖는 등의 비교적 소규모 호텔영업이며, 가족여행자가 숙박 가능한 객실·라운지·플레이룸 및 식당을 갖춘 곳을 말한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객실은 10실 이상(그 가운데 80퍼센트 이상이 서양식 객실), 그밖에 플레이룸, 식당, 주방, 욕실, 화장실, 침대 등 구조와 설비에 대하여 세부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후생성은 이 펜션 매뉴얼에 의해 영업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 펜션의 특징으로, 지금과 같이 다양한 형태의 펜션이 등장하는 상황에서는 그 컨셉을 포괄하여 명확히 정의할 수 없다.
펜션의 기원은 유럽에서 찾을 수 있는데, 영국의 B&B(Bed & Breakrast)가 일반적이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침대와 아침식사, 즉 조식(朝食)을 포함한 1박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숙박시설이다.
유럽의 펜션을 원형으로 한 일본의 펜션은, 시대와 이용자의 요구에 맞추어 독자적으로 만들어졌다. 제1호 펜션은 1970년 군마(郡馬)현 쿠사쯔마찌(草津町)에 문을 연 ‘면관(綿貫)펜션’이다. 문을 열 당시는 아침식사만 제공하는 전형적인 B&B형태였다. 그러나 이것이 고객의 불평 요인이 되자, 결국 저녁식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후 석식 제공은 펜션의 상식처럼 됐다.
그후 1973년 펜션 시스템 디벨럽먼트(PSD; Pension System Development)라는 펜션 공급회사가 설립하면서 펜션이 급증하였다. PSD는 펜션촌 부지를 확보하여 시공, 경영주 모집, 교육 그리고 펜션 창업에 필요한 융자 알선까지 하는 일종의 프랜차이즈제 경영시스템이다. 다수의 펜션이 들어섰으나, PSD는 현재 청산법인으로 자취를 감췄다.
일본의 펜션 규모와 시장 추이
‘일본펜션연맹’의 조사에 따르면 1995년의 펜션 수는 3323채로 나타났다. 이는 호텔과 여관·민숙 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어엿한 숙박시설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PSD가 설립된 후, 15년도 지나지 않아 2000채를 넘어섰으며, 그후에도 꾸준히 증가하여 1987년까지 전년에 비하여 20퍼센트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그후 증가율은 둔화했지만, 여전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버블(Bubble) 말기인, 1991년경에는 부동산 시장에 팔려고 내놓는 펜션과 문을 닫는 펜션이 증가하여 일시적으로 감소했다.
펜션 수의 증가와 함께 그 시장도 확대되어 1975년 이후 매년 20퍼센트의 성장률을 보였다. 그러나 1985년에는 전년대비 17퍼센트의 증가율을 나타낸 것을 정점으로 둔화됐다. 그럼에도 1989년에는 숙박객 수와 함께 객실요금도 증가하여 전년대비 15퍼센트 증가한 450억¥(엔)대 시장 규모로 확대됐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전년대비 5퍼센트 감소한 420억¥으로 처음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펜션의 연 숙박객 수는 1985년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다가 다시 다소 회복하는가 싶더니 1989년부터 1991년까지 3년 동안 큰 폭으로 감소했다(전년대비 14퍼센트 감소). 그 이유는 경기 침체의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 펜션의 일손 부족으로 객실 가동률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수요의 감소가 아니라 펜션 운영자가 의도적으로 가동률을 낮춘 것이다. 자연 매출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1992년에는 3년간의 반동도 있고 해서 10퍼센트 증가한 470억¥의 매출액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를 정점으로 1993년 460억¥(2퍼센트 감소), 1994년 420억¥(8퍼센트 감소)으로 다시 떨어졌다. 이 기간 매출액이 감소한 요인은 숙박객 수의 감소와 객실요금을 낮춘 데 따른 것이다.
1995년에는 약간 회복하여 440억¥(4.8퍼센트)으로 늘어났다. 그 이유는 객실요금을 낮췄음에도 불구하고 숙박객 수가 증가했고, 또 펜션 수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블 붕괴 후, 시장 규모는 점점 축소했음을 알 수 있다.
펜션 이용자 수와 평균 객실요금
펜션 이용자는 1990년까지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였으나 1991년에는 급격히 감소했다. 그후 1992, 1993년에는 회복하는 듯했으나 1994년에는 다시 전년대비 2퍼센트 감소한 511만 명이 이용했다. 그러나 1995년에는 다시 10퍼센트 증가한 566만 명으로 늘어났다.
펜션 1채당 숙박 연인원 수는 1990년 1987명에서 1994년에는 1612명으로 줄었다. 그러다가 1995년에는 1703명(5.6퍼센트 증가)으로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1인당 평균 객실요금은 1992년까지는 계속 상승하였다. 이 무렵 펜션들이 고급을 지향하면서 등급을 상향조정했고, 객실요금도 대폭 인상하여 리조트호텔과 비슷한 계절요금을 받는 곳이 부쩍 늘어났다. 이전까지 펜션은 저렴한 가격을 주무기로 했으나, 객실요금을 대폭 인상함으로써 경제적인 요금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86년 6889¥이던 1인당 평균 숙박 단가는 다음해에는 7000¥대에 이르러 1989년에는 8000¥대를 돌파하였다. 1992년에는 최고 8922¥까지 올랐다. 그러나 1993년에는 3.4퍼센트 감소한 8621¥, 1994년에는 4.7퍼센트 감소한 8220¥, 1997년에는 6.5퍼센트 감소한 7687¥으로 7000¥대까지 떨어졌다.
펜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는 요금을 떨어뜨리지 않고는 고객을 불러들일 수 없는 경영환경에 빠졌다. 경기 침체로 어쩔 수 없이 객실요금을 내리는 추세이며, 계절요금을 아예 없애거나 평일 할인요금을 채택하는 곳이 늘어났다.
펜션 이용객의 변화
1985년까지 펜션 이용객은 ‘젊은 여성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가족’의 증가가 두드러져, 1986년 이후 역전되어 1990년부터는 이용객의 반수를 가족이 차지했다. 1992, 1993년에는 가족이 80퍼센트를 차지하였다.
이용객(여성)의 연령은 1985년경까지는 20세 전후가 반수 이상을 차지하였고, 25세 이상의 성인은 30퍼센트정도였다. 그후 비율이 역전되어 20세 전후가 감소하고 25세 이상이 증가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간 25세 이상의 비율이 점차 증가하여, 1995년에는 68퍼센트에 달했다. 또한 18세 이하의 저연령층 비율은 낮아지는 추세를 나타냈다. 갈수록 중심 고객층이 젊은 여성에서 가족이나 25세 이상의 성인으로 옮겨가고 있다.
펜션의 수지(收支) 상황
일본 펜션은 매출액의 감소로 수지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영업 이익은 1990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1995년에는 328만¥의 마이너스를 나타냈다.
펜션의 평균 1채당 연간 매출액은 1990년의 1621만¥을 정점으로 감소하여, 1995년에는 1371만¥으로 나타났다. 총 투자액대비 매출액이 높지 않은 편이다. 어쩔 수 없이 매출원가, 인건비, 일반관리비 등을 비교적 낮게 억제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감가상각비, 차임금의 지불이자 등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또한 일반관리비 중에는 광고선전비의 비율이 높아(매출의 10퍼센트정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막대한 차입금과 상환 규모
펜션 경영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상당수의 펜션이 막대한 차입금을 가지고 있어 상환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펜션을 창업하려면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므로 차입금 규모도 큰 편이다.
버블기에는 소비자의 다양하고 수준 높은 요구에 맞추어 호텔과 유사한 시설과 설비로 등급을 상향조정했다. 이 때문에 창업자금도 급격히 상승했다. 1975년대에는 7000만¥대였던 1채당 평균 창업자금이 1985년에는 8000만¥, 1988년에는 1억¥대를 넘어, 1991년에는 정점에 달해 1억2900만¥까지 증가하였다(일본펜션연맹조사).
버블 붕괴 후에는 창업자금이 하락했지만, 버블기에 개업한 펜션 다수는 1억¥이 넘는 투자를 하였다. 자기자본이 일시에 반으로 줄었지만 상환이 어려운 형편이다.
어느 정도 고액의 설비투자를 하였으나, 원래 이코노믹한 요금을 나타내는 문구처럼 높은 객실요금을 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호텔이나 여관에 비해 객실도 작고 이윤도 적어 투자금액에 부합하는 채산성을 기대하려면 객실 가동률 상당히 높여야만 한다. 그래도 경영이 가능한 이유는 가족이 경영의 주체가 되어 인건비가 그다지 많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변화하는 일본 펜션
과다한 노동력 투입(Over work)
일본 펜션의 대부분은 10실, 30명 정원 정도의 규모다. 7∼8월이나 연말연시 등 성수기에 객실을 일시에 가동하는 경우, 부부 두 사람의 일손만으로는 힘들다. 최근에는 펜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는 젊은이도 줄었기에 일손이 바쁜 시기에 노동력을 구하기 어렵다. 일손 부족으로 성수기에도 부득이하게 객실 가동률을 낮추는 펜션이 많다. 1991년에 펜션시장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10실, 30명 정도의 수용력은 가족만으로 운영하기에는 벅차다. 따라서 과중한 노동으로 주인 부부가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고급화보다는 소프트로 승부
버블기 이전까지는 아트홈(Art-Home)한 분위기에 미식가(美食家)를 지향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이용객을 불러오지 못하자 거주의 향상에 무게를 두어 건물이나 인테리어를 고급스럽게 하고, 객실을 넓히고, 욕실·화장실을 설치하고, 텔레비전을 설치하는 등 호텔에 버금가는 설비를 경쟁적으로 설치했다. 요리도 미식화하여 고객의 입맛에 맞추려고 요리학원에 다니는 등의 노력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급화를 추구한다 해도 뷰티호텔, 혹은 오베르쥬(교외숙박시설에 딸린 레스토랑)밖에 될 수 없다. 이런 형태라면 대기업이 펜션에 참여하면 다른 것으로 전환해야만 한다. 더욱이 소규모 숙박시설이라는 점에서는 같아도 뷰티호텔 등은 일류 프로를 내세워 최고급 상품으로 요리나 서비스를 제공한다. 펜션과 같은 가정적인 분위기하고는 이질적이다. 표적시장이나 고객의 숙박 목적도 다르기에 펜션이 기를 쓰고 업그레이드해도 싸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펜션은 차라리 다른 쪽에 어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객이 펜션을 다시 이용하는 데는 주인부부의 정성이 담긴 소박한 요리 등이 크게 작용한다. 더욱이 주변의 독특한 관광·레저정보를 제공하는 친절한 서비스도 중요하다. 결국 하드보다는 소프트한 부분에서 세심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승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펜션 규모의 축소로 노동력 부족 해소
시설의 규모를 축소함으로써 주인 부부, 혹은 부인 외의 노동력으로도 충분히 운영할 수 있는 미니펜션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펜션의 객실은 호텔 등과 비교할 때 다소 좁으므로 객실을 넓히는 대신 객실 수를 반으로 줄임으로써 이용객 수를 줄일 필요가 있다. 즉 정원 규모를 5실 10명 전후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이전까지 2인실을 중심으로 한 객실을 가족에 대응한 4인용으로 전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정원을 억제하는 것보다는 방을 넓혀 거주성을 높이고 숙박객이 쾌적하게 지내도록 하는 것이다. 자연 노동력도 줄이고 질 높은 서비스 제공이 가능하다.
일본식 펜션, 게스트-인과 패밀리-인
외관과 실내도 하드면에서 전체적으로 일본식 스타일, 식사도 일본식인 펜션이 증가하고 있다. 일본식이라는 점에서 민박이나 여관에 가까워 ‘펜션=서양식’이라는 컨셉도 무너지는 추세다.
또 중고령층에는 지명도가 낮고 젊은 여성층 외에는 경원시되므로 표적시장을 중고령층에 맞춘 ‘게스트-인’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의 기호에 맞춘 객실은 양식이 많고 식사도 양식 중심으로 한다. 한편 가족손님을 타깃으로 한 ‘패밀리-인’은, 가족이 묵을 수 있는 넓은 방, 식사도 푸짐한(대형) 요리를 중심으로 제공하는 등 패밀리층의 요구에 맞추고 있다.
석식을 제공하지 않는 B&B형 펜션
펜션에서 석식을 제공하는 것은 재료 준비부터 식사의 준비, 뒤처리까지 여기에 들어가는 노동량은 상당하다. 이것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노동량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물론 매출은 떨어지겠지만 주인 부부는 무리하지 않고 숙박객하고 대화의 시간을 늘릴 수 있다.
이용자 측에서도 경제적인 요금을 추구하는 추세이므로 환영한다. 근처에 레스토랑이나 향토요리 등의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의 정보를 숙박객에게 제공하면 된다. 자가용을 이용한 숙박객이 늘어나면서 외식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메뉴를 선택할 수 없었던 식사보다 그게 좋다고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여행에 익숙한 최근의 젊은층 가운데는 체재일 수를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식사를 편의점에서 해결하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사람도 있다. 여행 목적 등에 따라 식사도 다양한 스타일이 있음은 당연하다.
농원이나 과수원에 딸린 컨트리 펜션
리조트지나 관광지와는 달리 한적한 전원에 입지하여, 자연을 주요 테마로 하는 것이 ‘컨트리펜션’이다. 주로 농원이나 과수원에 자리하는 게 큰 특징이다. 여기에는 기존의 관광지와는 달리 맛좋은 물과 농산물, 풍부한 자연이 있다. 지가(地價)가 저렴하기에 투자금액이 적고 차입금의 상환도 비교적 쉽다는 게 장점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펜션을 경영하면 부수입도 얻는다.
최근 지방 재정 수익을 늘리고 농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지차체와 농협이 펜션을 유치하려고 적극적이다. 농협으로부터 토지를 빌려 농업과 펜션 경영을 병행하는 ‘팜인’에는 거기서 나오는 농산물로 요리함으로 경영 성적도 양호하다. 숙박객으로 하여금 농사를 체험하게 하는 것도 좋은 상품이다. 전원에 대한 동경심을 가진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유난히 농업 체험에 대한 욕구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연 지향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 ‘컨트리 펜션’이다.
다양하고 새로운 유형의 펜션이 등장하면서 펜션의 컨셉도 달라졌다. 물론 가족 경영, 소박, 친밀하고 저렴한 세일즈 포인트, 경제적인 요금 등 본래의 특징에는 변함이 없다. 앞으로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체재형 숙박시설의 성장성이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일본에는 그러한 시설이 완비되어 있지 않다. 펜션이 그러한 시설에 가장 가까운 지위를 차지했다고 확신한다. 새로운 펜션의 모습은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무리 없는 경영이 지속되고, 여가를 즐기는 이용자의 요구에 맞추어 변신한다면 새로운 펜션의 장래는 밝을 것이다. 田
■글 강신겸<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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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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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부역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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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부역 나와요!
처음 시골로 이사와 살 때입니다.
있는 돈 없는 돈 죄다 털어서 땅을 장만하고 나니 집 지을 돈이 없어서 농가를 7백만원
전세로 빌어 살 때입니다.
이사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새벽 6시에 누군가 방문을 마구 두들기며 소리를 칩니다.
기겁을 해서 깨어 보니, 뒷집 아줌마가 무어라 소리를 칩니다.
“부역 나와욧!”
미처 잠이 덜 깬 상태로 부역이라는 외침을 들으니, 이게 무슨 전쟁이 난 건가?
나는 부역이란 게 육이오 전쟁 때나 일제시대 때의 강제 노역으로 알고 있는데 그걸
나오라고 방문을 마구 두드리니 놀랄 일이었지요.
그래서 나가 부역이 뭐냐고 물으니, 뒷집 아줌마는 참 딱하다는 얼굴로
“부역도 몰라요? 마을 길에 풀 베는 거 말예요. 빨리 낫이나 들고 나와요.”
영문을 모른 채 나는 아주머니가 일러주는 대로 낫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이 내 낫을 보더니 혀를 찼습니다.
아니, 그 낫은 뭐하러 들고 나왔수?
마을 반장이란 분이 야단을 치는 이유를 몰라 멀거니 서 있으니, 내 낫은 나무 자르는
조선낫이랍니다.
얼마 전 시골생활 기념으로 철물점에서 산 것인데, 날이 두텁고, 자루가 투박한 나무로
박아 제법 터프하고 고풍스러워 일부러 고른 것입니다.
다른 이들 낫을 보니 정말 맵짜하고 날이 얇은 것들로 왜낫이라는 거더군요.
구박을 받고 남들보다 앞서 풀들을 날랜 검객처럼 베어나가는데, 또 반장이 소리칩니다.
“아니, 무슨 풀을 그리 베오? 낫질 안 해 봤소?”
“안 해 봤는데요.”
“벌초도 안 해 보았수?”
“예초기로 하는데요.”
반장은 혀를 차며, 몸소 시범을 보입니다. 한 쪽 손으로 풀단을 잡아 들고 밑둥을 싹싹
자르는데 거의 신의 경지입니다.
이제껏 한 손으로만 조선 검객처럼 풀들을 허공에서 베어가던 내 뒤편으로는
허리가 잘린 채 뒤숭숭히 남아 있는 풀들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구박과 조롱을 받으며 부역을 열심히 하는데, 멀리서 또 반장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놀라서 보니, 이번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먼 거리에서도 그 이도 부역에는 초보로 뵈는 얼굴 허연 사람이었습니다.
“나, 오늘 참 죽갔네. 그건 또 뭐하러 들고 나왔수?”
반장의 말에 다가가 보니, 얼굴 허연 사람은 내가 보기에도 얼토당토한 걸 들고 있었습니다.
그건 나뭇가지나 향나무 다듬을 대 쓰는 커다란 전지가위였습니다.
그날, 부역이 끝난 뒤 마을 사람들이 막걸리 마실 때,
한구석에서 그이와 나는 서로 통성명을 하며 시골생활의 설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아, 부역은 고달픕니다.
물골안에서 이시백
글쓴이 이시백씨는 중학교 교사이며 소설가다.
서울서 생활하다 현재 남양주시 수동면 물골안이란 동네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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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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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의 詩로 쓰는 전원풍경] 겨울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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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의 詩로 쓰는 전원풍경
겨울의 호수
내 심장 굽이쳐 발가락으로 손가락 끝으로 핏대 선 눈 빛
그 아득한 끝으로 흘러가는 피는 허기진 종놈의 피였을지도 모르겠다
속 터지게 켜켜이 쌓여도 속으로만 썩고
그러고도 터질 수 없어 고여있는 한(恨)
차라리 머리끝서 터져 반신불수가 되어 눈도 말도 잃고
세상 더듬이도 없이 더듬어 살아도 될 것을
차라리 심장 한가운데가 터져 동학(東學)이 되고
황토들판 흥건히 쓸고 가는 바람으로 살다
저자거리 한가운데 목이 걸려
아! 그렇게 살아도
눈 쌓이는 겨울
바람 끝서 맨살로 얼어붙는 고요보다 좋았을 것을…
■ 글 김경래(인터넷 웹진 ‘OK시골’ 발행인 www.oksig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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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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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시골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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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학교
시골생활에 뜻을 둔 분들의 발목을 잡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육 문제가 아닐까요.
어디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분들도 막상 아이들의 교육을 생각하면 그 단단하게 먹었던 마음도 슬며시 물러지게 되나 봅니다.
우리 교육의 문제가 여러 가지겠지만, 실제로 학부모들이 겪는 건 사실 교육이 아니라 대학입시 문제가 아닐까요. 정말로 아이들의 교육적 성과를 이야기한다면, 어린 아이들에게 치열한 성적 경쟁과 온종일 학교와 학원에 묶어 놓는 도시의 교육환경보다는, 들꽃과 반디불이와 천렵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 훨씬 교육적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법합니다.
몇몇 앞서가는 분들이 풀무학교나 간디 학교 같은 대안학교를 만들고, 또 그곳에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현실은 자녀들을 대학이라는 괴물로부터 떼어놓게 하기 어려운가 봅니다.
학력이라는 하나의 잣대만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그 경쟁의 분위기가 뜨겁고, 교육활동이 주로 성적 평가에 집중되는 도시학교들이 시골학교를 능가하는 건 현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적 올리기 경쟁을 토대로 또 하나의 경쟁인 대학 입학에서도 유리한 결과를 얻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을 젖히고, 앞서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싸움판이 아니라, 서로의 모자람을 채워나가며 더불어 사는 세상이기를 바란다면, 아이들의 교육 문제는 오히려 시골 학교의 성과가 올바르다고 봅니다.
교육정책이 다양한 입시 방안을 마련하고,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가 명문 학력 중심, 많이 배운 이들끼리의 기득권을 주장하고 있는 분위기에서는 부모들은 선뜻 아이들을 그런 낭만적인 시골 학교의 교육에 내맡기기 어려워하는가 봅니다.
말로는 인성이 제일이고, 성적보다 올바른 인격이 중요하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막상 내 아이의 성적표를 받아들면 행동발달보다 성적 석차부터 살피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이런 공부를 시키면서도 이게 아닌 데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고심하는 분들도 많지요.
제가 아는 분이 딸을 풀무학교에 보냈는데, 첫 수업이 분뇨 치우기였답니다. 동장군을 나르며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아마 불평을 했겠지요. 그러나 아이들은 그 인상적인 첫 수업을 통하여 자연과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분뇨를 치우는 일이 대학 입시에 어떤 평가에도 반영되지 않고, 어느 시험에도 출제될 문제는 아니지만 아이들에게는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지혜와, 노동의 신성한 즐거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어 단어 몇 개와 수학 공식 몇 개 차이로 줄을 세우는 우리의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가르침은 당장은 드러나지 않아도, 아이들을 전혀 다른 삶의 길로 인도해 나갈 것입니다.
우선 시골학교는 규모가 적어서 선생님들의 정성어린 가르침과 세심한 지도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또 학교가 적다 보니 아이들끼리의 만남도 인간적이고, 충분히 깊이 있는 교제를 키울 수 있습니다. 대규모 도심학교의 경우, 같은 반이 아니면 말 한마디 못하고, 같은 학교 다니는 지도 모르는 아이들 사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요.
또한 소규모의 시골학교는 지역의 어른들도 손바닥 보듯이 아이들 하나 하나의 행동을 살피게 됩니다. 누가 누구하고 싸움을 하고, 누가 공부시간에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죄다 알려지지요, 도심의 아이들이 길에서 담배를 피워도 남의 일처럼 외면하는 거와는 비교가 되는 장점입니다.
또한 읍면 단위의 경우,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등록금이 면제되고, 고등학교도 상대적으로 수업료가 저렴하지요,
물론 농어촌 학교의 재정이 어렵다 보니 교육시설이 떨어지고, 지역에도 극장이나 전시장과 같은 문화공간이 미흡하긴 하지만 그 대신 운동장까지 노루가 내려오는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친구들과 여름이면 개울에서 천렵을 하고, 겨울이면 산토끼를 몰러 뛰어 다니는 자연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 훌륭한 문화공간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시골에도 최근 잘못된 도심의 교육열이 강박적으로 밀려와 오히려 도심의 아이들이 다양한 특기적성교육에 열중하는 반면 뒤늦게 입시 학원이 성황을 누리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선 어중간한 도농 복합의 교외지역보다는, 아주 깊은 오지의 학교들이 교육적으로는 더 훌륭하다고 봅니다.
대개 이런 학교의 경우, 선생님들도 학교 부근에 사시며 한 곳에 머물러 계시는 곳이 많기 때문에 방과후에도 지속적인 지도가 이뤄지지요, 대개 분교의 아이들이 본교보다 더 학력이 우수하다는 것도 눈 여겨 볼만한 일입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도 학교 폭력, 왕따, 신문에 보도되는 각종 청소년 비행, 그리고 하루에도 서너 번씩 들려오는 교통사고에 노심초사하는 도심의 학부모들보다 아카시아 하얀 꽃잎이 떨어지는 교정에서 선생님과 풍금을 내다 놓고 노래를 부르는 시골학교의 아이들.
시간이 나면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학교 앞개울에 나가 집에서 한 숟가락씩 가져온 고추장을 풀고 쉬리나 피라미를 끓여 먹으며 웃음꽃을 피우는 학교, 삼삼오오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넘어 오며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정말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행복을 가져다 주어야 할지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야간자율 학습과 보충, 그걸로도 모자라 특별보충이라는 이름으로 밤 열시까지 딱딱한 학교 의자에 붙잡아 놓고, 그걸로도 모자라 학원에다 과외공부로 한창 뛰어 놓아야 할 아이들의 발목을 붙잡아 놓는 진흙탕 속에 우리의 사랑스런 아이들을 떠밀어 넣어야 할 것인지 고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명문대학이 곧 인생의 행복을 보증하는 인증서인지도 깊이 있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시골생활에서 교육문제는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는 걸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田
■ 물골안에서 이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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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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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달리 이야기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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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달리 이야기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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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주가 밑그림을 그렸을 때 가장 강조한 부분이 창이었다. 거실 창은 이렇게, 안방 창은 이렇게, 흙벽돌 몇 장 위의 높이로, 크기는 얼마 하는 식으로 지정된 창호 위치와 크기, 모양은 각별한 주의 속에 시공되었다. 의자를 놓고 앉았을 때 밖의 자연이 그대로 느껴지는 높이, 집의 규모에 따라 작은 창들을 열었을 때 한쪽 미닫이로 전망이 가리지 않도록 내부 목창은 안으로 열어 고정할 수 있는 여닫이 창, 조선살에 창호지를 바르는 한지창. 작지만 모든 것을 담아내는 각 부분의 창들은 거실의 삼량 대들보 천장과 함께 거실과 방의 분위기를 한층 바꾸어 놓았다. 재질은 모두 하자가 가장 적다는 나왕으로 실측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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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벽을 만들고 미장을 하고
한 달 여에 걸친 기초작업, 골조 지붕공사가 끝난 후 본격적인 흙일이 시작되었다. 나무 기둥과 흙벽 사이는 틈이 벌어지는 것을 예상해 새로 나온 슈퍼 단열재를 두 겹으로 접어 보완하고 창의 처짐을 방지하기 위해 목재 인방을 걸었다.
웅장해 보이던 나무 골조 집에 흙벽돌 벽체가 섬으로써 소박하고 아늑한 느낌으로 변해갔다. 서까래와 서까래 사이의 공간은 작은 흙벽돌과 황토로 채워지고 물 쓰는 공간은 시멘트 벽돌과 조적으로 보완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은 흙집들은 모두 문양 흙벽돌을 노출하여 줄눈으로 외부를 마감하였으나 한옥의 단정한 맛을 내기 위해 벽체 창틀 하단부는 돌을 넓게 박아 넣은 것처럼 인조석으로 마감하고, 창틀 상단은 황토 미장으로 마감했다.
노출 콘크리트 기초면과 창틀 하단부의 인조석은 집의 균형과 안정감, 그리고 한옥의 맛을 한층 현대화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상단부를 황토미장 하고 나니 황토색이 붉은 빛을 띠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가 쓰는 황토몰탈은 향나무 톱밥이 들어 있어 누런 황토색이 아닌 분홍빛을 띠기 때문이다.
그대로 흙벽돌 색깔이 좋았는데 어쩌면 좋으냐고 두 내외는 걱정이 앞섰다. 흙집 같지 않은 느낌이랄까......, 가짜 흙집이 진짜 같고, 진짜 흙집이 가짜 같은 이 상황에서 두 건축주는 황토물을 내어 한 번 바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 왔다.
시공 책임자와 건축주가 직접 흙물을 내고 바른 벽체는 흙집을 그려왔던 건축주의 본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하... 하... 하, 바로 이거야.....
한옥 살림집의 맛을 살리는 창과 대문
건축주가 밑그림을 그렸을 때 가장 강조한 부분이 창이었다. 거실 창은 이렇게, 안방 창은 이렇게, 흙벽돌 몇 장 위의 높이로, 크기는 얼마 하는 식으로 지정된 창호 위치와 크기, 모양은 각별한 주의 속에 시공되었다.
의자를 놓고 앉았을 때 밖의 자연이 그대로 느껴지는 높이, 집의 규모에 따라 작은 창들을 열었을 때 한쪽 미닫이로 전망이 가리지 않도록 내부 목창은 안으로 열어 고정할 수 있는 여닫이 창, 조선살에 창호지를 바르는 한지창.....
작지만 모든 것을 담아내는 각 부분의 창들은 거실의 삼량 대들보 천장과 함께 거실과 방의 분위기를 한층 바꾸어 놓았다. 재질은 모두 하자가 가장 적다는 나왕으로 실측 제작하였다.
홍송문이니 사꾸라니 비싼 재질이 아니라 가장 저렴한 가격대의 목재로 한옥의 맛을 가장 잘 살려 냈다는 생각...... 그것은 어쩌면 시공사의 창작이라기 보다는 건축주가 한번의 집을 짓고 경험한 값진 산물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포인트는 거실의 분위기다. 거실 천장은 대들보와 마룻대가 노출된 대청마루의 거실 느낌이고, 창틀 하단부(사람이 앉았을 때의 벽 높이)는 루바로 마감하고 상단부는 황토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이 때 황토의 질감을 높이기 위해 흙물을 한 번 더 발라주었다. 확 트인 주방과 거실,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내리 비치는 전등까지...... 두 내외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선택으로 삶의 공간이 완성되었다.
색은 인생의 빛 깔이라더니
타일과 전등을 고르고 마감재 사양을 선택하는 기본 조건은 단 하나였다. 크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하자 없는 것...... 집 전체의 어울림을 헤치지 않는 것...... 그 결과물이 색의 조화였다.
집 전체의 느낌을 좌우하는 외양에 있어 목재 기둥과 흙벽, 한옥의 맛을 내는 인조석과 황토미장의 분위기를 잘 받혀주는 것은 목재 기둥의 질감일지 모른다. 오랜 세월 속에 때묻은 느낌처럼 약간의 검은색이 느껴지는 목재 기둥의 질감을 건축주와 시공자가 함께 만들어 냈다.
혹시라도 시공하는 사람이 귀찮아할까 노심초사하며 색을 배합하는 건축주의 모습은 신선해 보였다. 자신의 생각이 명확하고 그 생각처럼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전하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조바심 내지 않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시공자와 의논하고 조정하는 모습.....
OK 사인을 내면서 건축주는 시공자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혹시 참견한다고 뭐라고 그러면 어쩌나 했는데, 싫은 소리 한번 안하고 몇 번이고 다시 색을 만들어 낸다고......’, ‘혹시 청테 낀 목재에다 그냥 칠하면 어쩌나 했는데..... 저렇게 힘들여 다 갈아내고 해 준다고.....’
시공자가 그렇게 일을 하는 건 기본인데 건축주는 그렇게 일해주는 사람들이 고마운 것이다.
그 마음은 바로 시공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한 번 손 갈 곳에 두 번 가게 되고, 사람의 마음이 다 그런가 보다.
물길을 잡아 여백의 공간을 만들고
건축공사와 별도로 건축주가 가장 우려하고 심난해 했던 것이 집 앞을 흐르는 계곡 물이었다. 폭우로 물이 불어나 집으로 물이 들어오는 홍역을 한 번 치르고는 이렇게 저렇게 돌을 쌓아 보기는 했어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했다.
마침 시공을 책임졌던 회사의 이사가 조경을 전문으로 담당하고 있어 물길 잡는 일이 맡겨졌다. 나무와 돌로 박아 물길을 잡은 고랑은 나무에 뒤엉켜 분위기조차 스산해 보였었다.
택지 위로는 경사지 밭이 있고, 부지 맨 위쪽에 자연 연못이 있었는데 물이 들어차 연못이 없어졌다. 깊은 연못이 아니라 낮으면서 넓은 연못이 뒷산과 어울려 맑은 물소리가 넘치는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그곳으로부터 아랫집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군데 군데 작은 연못을 만들어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멋과 기능을 보완하고, U자형 콘크리트 흄관으로 연결지었다.
작은 연못과 물길 옆으로 건축주가 심혈을 기울여 돌을 골라냈던 밭이 있고, 어수선했던 뒤뜰은 저수조 통을 이용한 저장소와 장독대까지..... 집과 어울린 소품들이 풀과 나무와 어울려 하나의 덩어리로 자연이 되었다.
땅속을 들여다보면 연못과 저장소의 물탱크, 그리고 지하수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 왜 땅은 파헤치냐고..... 의아해 하다 보니 글쎄 이것들이 다 물길로 연결되지 뭐예요......”
‘조용히 살려고 했더니 이 연못에 손님들 많이 낄 것 같아 걱정’이라는 건축주의 칭찬을 들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성품이 이 집을 정말 집답게 만드는 구나.... 생각케 했다.
생각했던 대로야
집의 뒤쪽으로 배치된 구들방은 재래부엌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곳은 한쪽으로는 구들방, 한쪽으로는 다용도실과 연결되어 있다. 그곳에 마루를 놓고 아궁이 쪽은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겨울엔 제쳐놓아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여름엔 닫아놓고 마루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집을 짓다 보면 ‘이곳은 어떻게 하면 공간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또 멋을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집이 완성되었다. “생각했던 대로야...... 지붕 모양만 빼고..... 하, 하, 하.....” 밝은 건축주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작지만 이윤에 얽매이지 않고 건축주의 소망을 담아 완성하자던 꿈을 이룬 것이다.
어쩌면 이 집은 회사가 지은 것이 아니라 건축주의 ‘소망’으로 이루어진 집이다. 밑그림이 그렇고, 세부 디자인이 또한 그렇다. “김 선생님.... 앞으로 김 선생님이 설계하고 디자인하세요..... 이 집은 김 선생님이 지은 집입니다.”
자연은 쉬지 않고 일한다
일주일에 1~2번 공정이 새로 시작 될 때나 끝날 때 현장별로 점검을 한다. 그 잠깐의 시간에 건축주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명달리 두 내외를 만나는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들을 안고 돌아오게 된다.
“자연은 쉬지 않고 일해.....” 무슨 이야기를 하다 이 말이 나왔다. 새순이 돋고 자라나 열매를 맺고, 거름이 되고 또 새순이 돋고, 둑이 터지면 잡초가 뿌리내려 더 이상 무너지는 것을 막아주고...... 이 말엔 인간의 게으름을 빗대는 야유가 묻어나 있는지 모른다.
“늦가을엔 아무데나 땅을 파선 안 되겠더라고...... 처음 시골에 왔을 때였는데 땅을 파니까 개구리가 겨울잠을 자려고 땅속에 들어가 있더라니까..... 놀라서 다시 묻어 주었는데 그 개구리는 살 수 없데..... 자기가 들어간 공기 구멍만 있어야 하는데 집이 허물어 졌으니...... 시골에 살려면 자연의 법칙을 존중해야지.”
“농약 뿌리고 비닐치고...... 손으로 돌 다 골라내 고추를 심었는데..... 병이 돌아 동네 고추가 다 시들었는데 내가 심은 고추만 싱싱하더라고...... 검정 비닐 안 치고 잡초 다 뽑아주고, 농약 안치고 해서지, 풀 뽑아 주는 거 힘들어서 그렇지 자연 그대로 씨 뿌리고 잡초 뽑아주어 키우면 병 안 걸려......, 동네에서 모두 같이 해야지 나 혼자 그러면 동네 벌레들이 다 몰려들어.......하, 하”
순간 순간 듣는 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인생사에 빗대어 가슴을 파고든다. 자연처럼 살고픈 사람들의 소망, 누구나 꿈꾸는 소망 한 켠에는 이렇듯 자연의 순리에 순종하려는 인간의 마음을 담고 있으리라. 사람 잡는 일 아니면.....
“아니, 사장님까지 이렇게 뛰어다니면 이거 보통 일 아닌데요, 나는 집 짓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복잡하고 힘든지 몰랐어요......, 왜 이렇게 어렵게 일을 해요, 간단한 방식으로 지으면서도 흙집이면 되지, 지금처럼 이렇게 짓는 방식은 너무 힘든 일을 고집하는 것 아니예요, 어디 돈 남겠어요......”
“예전 병원에 있을 땐데 원무과에 무전기가 연결되어 있어요, 교통사고가 나면 제일 먼저 가는 차가 앰블런스예요. 사고를 알려주니까, 앰블런스가 가는 게 뭐 이상하냐고 생각하겠지만 가장 빨리 연락을 받고 환자를 자기 병원으로 실어 오려는 거예요. 현장에서 응급처치 잘하고 교정해서 환자를 이송하면 살아날 사람도 자기 병원으로 데려 올려는 기사들이 그냥 막 끌어내서 싣고 오니 옮기는 과정에서 환자는 거의 만신창이가 다 되더라고요......”
“다리 부러져서 오면 대부분 수술이나 그런 것을 해야 돈이 벌려요, 수술하지 않고 뼈를 맞추어서 깁스 해주면...... 수술하지 않아도 괜찮냐고 물어요. 모두들 수술을 하니까, 글쎄 나보고 저 의사는 수술할 줄 모르는 의사라고 수근거리더라고..... 돈벌이가 안 되는 거지”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일 아니라면 괜찮아요. 꼭 순수 황토라야 된다고, 접착제 섞으면 안 된다고 어렵게 어렵게 공사하지 말아요. 흙집이면서 보기 좋고.... 하자 없게만 만들면 되요.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 말을 들으면서 ‘너무 힘들게 애쓰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 들였지만 그 속에서 명달리 두 내외가 이곳에 묻힌 진정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 그렇게 내 몰리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 표정이 너무 쓸쓸해 보인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울컥 눈물이 난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연못가에 앉아, 담배 한가치 태울 시간 정도에 나는 물었다. ‘요즘도 화나는 일이 있으세요’ 이 물음은 자연에 묻혀, 다 잊고 사니 얼마나 좋겠느냐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랬더니 “그럼요, 가끔씩 옛날 생각하면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솟는데..... 한참을 가만히 있어야 분이 좀 삭히지.....”
그렇다. 인생의 거친 역정 다 겪고 나서 뒤돌아보며 산다는 것, 그래서 끝내는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 두 내외에게서 나는 그것을 본다.
계산하고 줄다리기 하고 협상하는 세태, 그게 싫어 내 방식대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언제나 빈손, 사장 얼굴 처다보고 있는 직원들 미안해 고민하다가...... 내가 이 일을 왜 했지....한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파김치가 된 지친 영혼, 아이들 앞에서는 피곤한 내색 않으려고 웃으며 뒹군다. 아침엔 회사 식구들 얼굴 보며...... 내가 지치면 안 되는데..... 반복되는 하루.
하지만 세상이 아름다운 건 이처럼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 맘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허물은 덮고, 잘한 일은 더욱 더 칭찬하면서 격려하는 그 마음들이 있으니 세상은 또 살만한 것이다. 田
■ 글 이동일(행인흙건축 대표) 031-335-8133 www.hangin.co.kr
글쓴이 이동일은 전통 방식의 목구조 황토주택을 전문으로 시공하는 ‘행인흙건축’의 대표다. 이 글은 자사 홈페이지에 ‘이동일의 건축일기’라는 이름으로 연재되고 있는 글을 옮겨 실은 것으로, 예비 건축주들과의 상담과 시공 과정에서 보고 느꼈던 잔잔한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다. ‘행인흙건축’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더 많은 내용을 볼 수 있으며 본지에서는 글쓴이의 동의를 얻어 가감없이 이 글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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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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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움 가득한 공작산 ‘산중일기(山中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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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움 가득한 공작산 ‘산중일기(山中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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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직접 설계하고 내부 공간은 서로 상의하여 2층집을 짓고 도배, 장판, 창문, 샤시를 제외한 전 공정을 남편과 둘이서 1년 만에 완성하였다. 남편이 직장에서 배를 설계했던 데다 건축 분야에도 종사한 적이 있어 기술적인 어려움은 없었지만 인력이 한정되다보니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벽난로 역시 어려운 기술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재주가 많은 남편은 거뜬히 멋진 벽난로를 완성했다. 산골의 겨울은 길고 춥기 때문에 난방 효과를 높이고 여러 가지 먹거리도 구워 먹을 수 있어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과정이 힘들긴 했어도 매우 잘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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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홍 손미숙씨 부부는 6년전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강원도 홍천군 동면 노천 1리에 자리를 잡았다. 96년 황토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시작했으나 지난해 사정상 그 집을 허물고, 앞쪽에 새 집을 지어 ‘호수에 잠긴 공작산’이란 간판을 걸고 가든을 운영하고 있다.
주위로 민가가 없는 데다 산골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어 아직까지도 전기(지금은 자가 발전 시설로 전기를 이용하고 있음)와 전화가 들어오지 않는 지역인 만큼 그 간의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최상홍 손미숙씨 부부가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 같은 이 곳에 정착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느낌을 아내 손미숙씨의 글을 통해 들어 본다.<편집자 주>
공작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횡성 태기산 줄기와 홍천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화촌면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동면 수타사로 이어지는데 그 형세가 공작(孔雀)이 나래를 펼친 것 같다 하여 ‘공작산’으로 이름 붙여졌다.
이 곳은 홍천의 명산이며 군립공원(郡立公園)인 공작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사철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봄이면 철쭉이 동굴을 이루는 야생화의 보고(寶庫)이며,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여름밤에는 반딧불의 화려한 축제와 보석을 박아 놓은 듯 초롱초롱한 별님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그런 곳이다.
내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지난 98년 11월이다.
그 때까지 남편(최상홍)은 경남 거제도 삼성조선에서 배 설계를 하던 회사원이었고, 퇴사 후 잠시 삼촌의 레미콘 사업에 동참했으나 삼촌의 사업 실패로 지금의 집터인 강원도 홍천군 동면 노천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곳은 남편의 고향이기도 하고 지금의 땅은 아버님이 유산으로 물려주신 땅이다.
정착한지 5년여가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간의 과정 중엔 적잖은 고뇌와 어려움 그리고 즐거움이 있었다.
사계절, 아름다움이 머무는 곳 ‘노천리’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작업은 그리 쉽지 않았다.
우리 가족 모두는 한 겨울 허허 벌판에 가마솥을 걸고 개울물을 길어 나르며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통나무를 잘라 예쁜 흙집을 지었다.
지나가는 등산객이며 동네 분들이 올라오면 커피도 한잔씩 나누고, 소주 한 잔으로 추위와 피로를 달래며 4개월의 긴 공사 끝에 가족의 힘으로 아담한 황토 산장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산장을 운영하며 등산객들의 쉼터를 제공하고 동동주를 손수 빚고 국산 콩으로 만든 손두부로 등산객의 입맛을 돋우었다.
여기에 훈훈한 산골 인심과 정까지 듬뿍 얹어 주니 등산객들의 반응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봄에는 뒷산에 바구니 하나 들고 천연시장에서 채취한 새콤달콤한 달래 무침과 향긋한 쑥버무리, 진달래 꽃잎을 얹어 예쁘게 부친 부침 한 접시까지 내었다.
우리 가족의 생활도 산골생활 그대로였다. 살짝 데친 두릅 나물을 들기름 한 스푼과 돌나물을 넣어 고추장에 썩썩 비벼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고, 동동주를 곁들여 봄 내음 가득한 식탁에 둘러앉아 촛불을 밝히고 소쩍새 울음소리까지 곁들여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여름에는 수정같이 맑은 앞개울에 발을 담그고 어항을 놓아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물고기가 어항 가득 들어가면 수제비 넣은 매운탕을 한 냄비 가득 끓여 소주 한잔으로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잠재우고, 매미들의 합창소리와 함께 한적한 산골 생활의 정취를 한껏 누렸다.
앞산이 어느덧 진초록의 옷을 벗고 울긋불긋 화려한 단장을 하면 깊어 가는 가을엔 산밤을 주워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감자와 밤을 구으며 가족 회의를 열기도 했다.
또 하얀 눈 속에 파묻힌 겨울 산장에는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가 있어 바비큐를 돌려, 닭이며 돼지고기, 오리, 통감자까지 구워 도시에서 맛보지 못한 전원 생활의 여유와 느낌을 한껏 만끽했다.
부부가 함께 1년 간 손수 지은 집
소위 말하는 ‘별장’은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대문을 잠그고 살지만 전원 생활이나 산골 생활은 그렇지가 않다.
여기엔 별장에는 없는 직접 뽑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내 손으로 심어 흙 냄새를 맡으며 몇 년을 거쳐 한가지씩 어루어 나가는 기쁨이 있다.
이 곳에서의 인간 관계는 학벌도 재력도 아닌 순수한 사람으로서의 만남, 마음을 열고 상대방의 부족함을 함께 채우며 같이 사는 따뜻함 그 자체다.
우리 가족은 생각지도 못한 불가피한 돌발상황 때문에 안타깝게도 5년여의 그 통나무 흙집에서 살다가 그 곳을 허물고 지금의 집을 지었다.
1년여에 걸쳐 바닥 콘크리트 공사 후 ,벽난로를 자연석으로 11m 높이로 쌓아 올리고, 철근콘크리트조와 트러스 공법, 그리고 샌드위치 패널로 벽체를 세우고 사이딩으로 마무리해 집을 지었다.
남편이 직접 설계하고 내부 공간은 서로 상의하여 2층집을 짓고 도배, 장판, 창문, 샤시를 제외한 나머지 전 공정을 남편과 둘이서 1년 만에 완성하였다.
남편이 직장에서 배를 설계했던 데다 건축 분야에도 종사한 적이 있어 기술적인 어려움은 없었지만 인력이 한정되다보니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벽난로 역시 어려운 기술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재주가 많은 남편은 거뜬히 멋진 벽난로를 완성했다.
산골의 겨울은 길고 춥기 때문에 난방 효과를 높이고 여러 가지 먹거리도 구워 먹을 수 있어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과정이 힘들긴 했어도 매우 잘한 선택이었다.
얼마 전에는 집 옆에 황토 찜질방도 만들었는데 이 곳은 올해 여든이신 친정 아버님께서 손수 구들을 놓으시고 흙벽돌을 한 장 한 장 찍어서 말린 후 남편이 벽체를 쌓아 만들었다.
지붕은 볏짚으로 엮어 올리고, 찜질방 안에는 참숯과 소금 ,쑥을 베어 바닥에 깔고 대자리를 펼쳐 놓았다.
규모는 작지만 전통적인 방식에 근거해 지었기 때문에 찜질을 하고 나면 쾌적하면서도 개운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이 곳을 들려 본 사람들의 얘기다.
게다가 가스나 기름 보일러가 아닌 장작을 직접 지펴 열을 올리니 규모(4평)는 작지만 이젠 이 곳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찾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먹거리에 대한 특별한 경험과 생각
도심을 떠나 산골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고 느낀 부분은 먹거리에 대한 생각이다. 언젠가 부터 우리 식탁은 수입산 먹거리로 채워지고, 수입산이 왜 우리 몸에 좋지 않은지를 느끼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 차이가 있고, 이런 차이는 내가 도회지 생활과 달리 산골생활을 하면서 실제로 체험하고 느낀 부분이다.
나는 두부나 메주를 쑬 때는 항상 재래 시장에 나가 시골 할머니들이 조금씩 가지고 나온 콩을 산다. 수입산인지 국산인지를 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우니 그 확률에 선택권을 걸은 것이다.
굳이 국산 콩으로 장을 담그고 두부를 힘들여 직접 만드는 이유는 내가 먹지 못하는 음식을 손님들께 줄 수 없고, 겉으로 보기엔 깨끗하고 좋아 보여도 수입 콩으로 만든 장맛은 국산 콩과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하얀 벌레나 곰팡이가 전혀 살 수 없다는 건 바로 농약이 모든 생명체를 없애 버렸기 때문인데 시중에 유통되는 장들은 실온에 놓아두어도 전혀 변질이 없다.
물론 보존 기술의 발달에서 기인한 면도 없지 않지만 어쨌든 적잖이 께름칙한 일임에도 달리 방도가 없으니 어느 덧 그런 식생활에 대부분이 익숙해져 버렸다.
하지만 시골에서 부모님이 보내주신 된장, 고추장은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으면 금새 하얗게 곰팡이가 번지고 만다. 이는 부모님이 보내주신 장에는 국산 콩으로 만든 메주이기 때문이며 나 역시 메주를 쑤면서 그 과정에서 수입 콩과 국산 콩에서 서로 다른 상황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전원 생활의 시작은 우리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의 첫 발걸음이다. 적어도 알게 모르게 접하는 수입 먹거리의 절반은 줄일 수 있다. 도심의 공해로부터 탈출해 시골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살 수 있어 나는 행복하다. 田
■ 글 손미숙(호수에 잠긴 공작산 016-222-9833) / 사진 류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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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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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부터 대보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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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부터 대보름까지
올해도 설날이 오기 전에 눈이 참 많이 내렸다. 들판에도 산에도 또 얼어붙은 강물 위에도 눈은 많이도 쌓였다. 그래서 2003년 1월의 세월리는 온통 은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겨울 농사를 하지 않는 탓인지 논둑에 내린 눈은 저 혼자 쌓였다 녹았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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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다행스런 것은 도로에 쌓인 눈은 금새 녹아버려 교통에 별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양리에서 세월리로 넘어가는 사슬고개를 걱정들 했지만 고갯길이 대부분 양지쪽으로 나 있어 그것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로가 나기 전인 30여 년 전만 해도 사슬고개가 하도 험해서 비가 조금만 내려도 버스가 다니지 못해 시오 리(十五里) 길을 걸어가곤 했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의 추억이다.
그래서인지 서울을 오르내리는 나에게 추억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은근히 걱정스런 말을 건네곤 했는데 생각보다는 불편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로가 잘 나 있으며 제설작업도 제때에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는데, 추억이란 이렇게 사람을 오래도록 가두기도 하는 모양이다.
세월리에서 처음으로 설날을 맞이하기 위해 섣달그믐날 세월리로 온 식구가 내려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동네가 조용하기만 하였다. 한길에는 동네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먼 고향으로 내려가는지 자동차만 분주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동네 청년들이 어디에 모여 있는지 수소문하여 찾아가 보니 마을회관 2층에 대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 명절 전날 고향의 어느 사랑방에 모여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것을. 그래서 달 없는 깜깜한 밤을 오히려 더 밝게 지새우는 것을. 그러나 그런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가지고 간 술도 마다 한 채 오락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들은 내가 그리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몇 마디 인사 끝에 되돌아 나오는데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가져야 한다며 한 사람이 뒤따라 나왔다.
그 사람은 이 동네에 살고 있지만 성남으로 출퇴근하는 바람에 동네 친구들과 정담을 나누기가 한 달에 한 번도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보니 그곳에는 도회지에서 고향을 찾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 위에는 주먹만한 별들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설날 아침도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설날 다음 날 아침, 서울에서 내려온 이명화 씨 부부와 함께 청송 심씨 입조인 심권의 신도비를 찾았다. 신도비는 아랫마을 야산에 있는데, 이 마을 출신으로 교육자이자 수필가인 심영구 씨에 의하면 이 비로 인해 이곳을 비석거리라 불렀다고 한다.
보학(譜學)에 상당한 조예를 지닌 이명화 씨는 신도비를 살핀 후, 이곳은 심권이 태어난 곳이 아니라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다 객사(客舍)에서 병사한 이 분을 선영이 있는 이곳으로 모셔온 것이라 한다.
그리고 보면 그의 선친인 심희세를 모신 이곳에 다시 심권을 모심으로써 그 후손 일족이 여기에 정착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300여 년 동안 14대에 걸쳐 청송 심씨 일족들이 이 마을의 중추를 이루면서 청주 한씨, 최씨 등과 어울려 살았던 것이다. 일족이 한창 번성을 이룰 때는 70여 세대에 이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20여 세대만이 남아 있다.
점심을 먹은 후, 마을회관 아래층에 있는 노인정을 찾았다. 미리 연락을 한 관계로 노인회 총무이신 심재욱 씨를 비롯하여 임덕재, 심재성, 이창호, 임준현, 전홍선 씨 등 여러 분이 나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설날을 맞아서 그런지 촌로답지 않게 모든 맵시가 세련되어 보였다. 이사를 한 후 아직 공식적인(?) 인사를 드리지 못해 송구스럽기도 하여 처음에는 서먹서먹했지만 차츰 분위기가 무르익자 서로 앞다투어 말씀을 해 주시는 모습들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가 이 마을의 물맛이 너무 좋다고 하자, 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은 아랫마을, 윗마을 그리고 다랫골 등을 합쳐 세월리라 통칭하지만 옛날부터 5·16 이후 행정정리가 되기 전까지는 세월천을 기준으로 강가 아랫마을은 세심리(洗心里), 산 쪽 윗마을은 세월리, 그리고 시냇물이 발원하는 골짜기는 다랫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세심리는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그렇게 불리웠고 골짜기에는 다래가 많이 열려 다랫골이라 불렀다 한다. 여하튼 씻을 세(洗) 자가 많이 들어간 것을 보면 예부터 이곳은 물이 맑고 깨끗한 곳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되기 전까지 이곳에는 양조장이 여러 개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물맛이 좋기 때문인데, 당시 주류에 관한 법에 의하면 1개 면에 막걸리 양조장 1개가 통상적인 원칙이었지만 이곳은 그것을 초월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면소재지도 아닌 이곳에 세워졌던 양조장에서 빚은 막걸리는 전량 세심리 나루터를 통해 서울로 직송되어 인기리에 판매되었다고 하니 이곳의 물맛은 알아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1984년에 21가구가 발의하여 설치한 간이 상수도는 다랫골 뒷산인 양자산 줄기 8부 능선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집에도 그 물을 사용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온천물로 착각할 정도로 비누가 잘 풀리는 것은 물론이고 생수로 마실 때는 단맛이 혀끝에 감돌기도 한다.
선인들이 말하지 않았는가. 물맛이 좋은 곳치고 인심 사나운 곳이 없다고. 그래서인지 10여 년 전에 다랫골로 들어와 살고 있는 전홍선(67) 씨는 “이 마을의 인심과 우애는 남다르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서로서로 믿고 도와가며 살기 때문에 담장도 필요 없다”고 하는 전홍선 씨의 안색은 뒤늦게 이곳에 들어 온 사람답지 않게 긍지와 자부심에 차 있었다.
그런데 정월 열 이튿날(양력 2월 12일) 조용하던 마을에 잔치 마당이 벌어졌다. 오전 11시쯤 갑자기 동네 마이크에서 트로트 풍의 흥겨운 노래들이 흘러 나왔다. 전달 사항에 앞선 전주곡이려니 했는데 음악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래서 마을회관 앞으로 나가보니 이게 웬일인가. 마을회관에는 ‘대보름 맞이 윷놀이 한마당’이라는 플래카드가 붙어있고, 마당에서는 마을 어른들은 물론이고 남녀노소 모두 나와 흥겹게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서는 청년들이 어른들을 대접하려고 삽겹살을 굽고 있고, 마당 가운데에서는 윷놀이가 한창이었다.
아, 그래서 설날에는 가족 중심으로, 대보름에는 마을 중심의 축제 행사를 하는 것이 이 마을의 전통이구나 하는 사실을 겨우 알게 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축제를 보면서 어울려 산다는 것의 의미를 또 한번 깊이 느낄 수 있었다. 田
이기윤〈시인·육군사관학교 교수〉
[글쓴이 이기윤은 시인이자 육군사관학교 교수이며, 현재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에 살고 있다. 1997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으며, 1999년 시집 《자전거와 바퀴벌레》 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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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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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주택의 좋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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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주택의 좋은 점
장상식(충남대 임산공학과 교수, 한국 목조건축협회 회장 02-574-9364)
목조주택이란 주요구조부가 목재로 이루어진 주택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흔히 외부에서 목재가 보이는 정도에 따라서 목조주택으로 분류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며 주택에 작용하는 하중을 지지하는 기능을 어느 재료가 담당하느냐 하는 것이 주택을 분류하는 기본이 된다. 따라서 목조주택이란 주택에 작용하는 하중을 목재 부재가 담당하는 주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약 10년전부터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한 목조주택은 이제 상당히 일반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목조주택에 대하여 알고 있고 목조주택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자신이 살고싶은 주택의 유형으로 목조주택을 꼽고 있다. 주택전시회나 자재전시회 등과 같은 건축 관련 전시회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품목 중의 하나가 목조주택이며 이제는 목조주택을 포함한 전원주택 전시회가 생기는 정도까지 발전하였다.
1. 안전하다
목조주택은 점탄성의 재료로써 외부로부터의 하중이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다. 특히 진동에 대한 저항력이 우수하며 이는 미국이나 일본 등의 나라에서 발생한 지진의 피해상황 분석에서도 사실로 증명된 바 있다.
목조주택은 주택 전체가 일체화된 구조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목재 부재 자체와 접합부가 반강 유연 성질을 지님으로써 충격과 진동을 흡수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2. 내구성이 뛰어나다
자손대대로 물려가며 사용하는 주택이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지는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과거의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수백년된 고택들이 많았으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주택을 잘 손질하여 곱게 보존하고 산다는 것이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에 목조주택이 사라지고 대신에 시멘트와 콘크리트가 주된 건축재료로 자리잡으면서 이러한 전통은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 원인으로는 한곳에서 평생을 살아가기 힘든 우리사회의 현실에도 원인이 있지만 콘크리트 주택은 내구성이 20∼30년에 불과하여 대를 물려가며 살기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의 조상이 지은 집에서 내가 아직도 살아가고 있으며 이 집은 앞으로도 나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살아갈 집이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에 다시 자리잡는 것은 먼저 목조주택이 우리 사회에 널리 보급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3. 육체 건강에 좋다
현대인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육체 건강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능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하며 그래서 운동도 하고 건강보조식품도 찾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면서도 사람의 건강에 가장 큰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주택에 관한 부분에는 큰 관심을 쏟지 않는다.
목조주택은 사람의 감각기관(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통하여 느끼는 느낌을 좋게 한다. 생활에 적당한 주거환경을 조성하고 생활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최소화 한다.
4. 정신건강에 좋다
현대인들은 직장과 사회 심지어 가정에서도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러한 스트레스는 발생 즉시 해소하지 않으면 몸안에 축적되어 정신건강을 해치고 더 나아가서 육체건강에까지 심각한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운동, 여행, 음악 및 영화 감상 등 각자가 나름대로의 대책을 가지고 스트레스의 해소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스트레스의 해소대책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 자연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람도 자연의 한 부분이므로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경관, 자연의 비, 바람, 새, 곤충 등의 소리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목조주택은 자연에서 자란 재료인 목재가 사용됨으로써 주택 자체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다. 목조주택에 들어서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긴장이 풀어지며 부드러운 느낌을 갖게 된다. 목조주택은 또한 주택 자체나 주변의 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의 발생이 매우 적다.
5. 아름답다
삭막한 느낌을 주는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자연의 재료인 목재로 이루어진 집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가장 적당한 주거환경이 될 것이다. 이에 덧붙여서 목재는 아름다운 재료이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보면 많은 목재들이 아름다운 환경을 꾸미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바닥의 장판에 목재 무늬를 새기고 가구 등의 표면에 무늬목을 붙인 제품들이 많으며 책상, 책장, 수납장, 부엌가구 등의 표면이 목재 무늬로 이루어져 있다.
목재의 무늬가 이렇게 생활 주변에 많이 사용된다는 사실은 바로 사람들이 목재의 무늬를 가장 좋은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목재의 무늬결은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으로서 같은 무늬가 없고 모든 무늬들이 비슷하면서도 색상이나 모양이 다르다. 자연스러운 곡선, 다양한 무늬, 따스한 색상, 부드러운 촉감 등이 조화되어 완벽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것이다.
6. 보수가 쉽다
주택은 사용 중에 여러가지 요인들에 의하여 피해가 생기며 이 경우에 수리를 하여야 한다. 다른 형태의 주택에 비하여 목조주택은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 해당 부분만 해체하여 쉽게 교체할 수 있고 다시 수리하여 완전하게 원상으로 복구할 수 있다. 예를들어 벽 속의 파이프가 터진 경우에 벽면 중에서 해당 부위만 뜯어내고 파이프를 교체한 다음 단열재를 갈고 해당 부위의 석고보드를 교체한 다음 마감도장 또는 벽지를 바르면 완전히 처음과 같아진다. 이때 필요한 장비도 망치와 톱이면 충분하고 못만으로 접합이 가능하다.
따라서 콘크리트 주택처럼 중장비가 필요하거나 수리 후에도 수리한 자국이 남지 않아서 하자 요인이 되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작업을 할 수 있으며 오랜 시간이나 많은 자재가 필요하지 않다.
7. 유지관리가 쉽다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주택에 대한 유지관리다. 목조주택은 3∼5년에 한번씩 외부에 페인트만 칠해주면 주택의 유지보수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다. 주택의 각부에 사용되는 자재의 수명도 정확하게 정하여져 있으므로 해당되는 기간 내에 해당 부위를 교체하면 주택의 수명을 길게 사용할 수 있다. 보일러, 배관, 전기시설 등의 수명은 일반 주택과 동일하며 문제 발생시 쉽게 수리가 가능하다.
8. 에너지 소비가 적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에너지의 사용을 줄이고 에너지 사용의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로 발전해 가고 있다. 에너지의 가격도 증가하기 때문에 에너지 사용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은 에너지 비용의 절감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 생활에 이제는 냉난방이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목조주택은 주택의 구조재료 자체가 단열성이 우수하며 단열재의 설치가 쉽고 개구부 주변, 부재와 부재의 접합부위 등에서 밀폐성이 뛰어나다. 에너지 소비의 절약은 각 가정의 경제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적으로도 크게 도움이 되며 지구 환경보호의 측면에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9. 사고에 대하여 안전하다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 주택 내에서도 많은 사고들이 발생함으로써 주택도 안전사고의 발생에 대하여 안전지대라고 할 수 없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있어서는 주택 내에도 많은 위험요소들이 존재한다. 성장기의 아이들은 마음대로 뛰어 놀기를 즐기기 때문에 집안에서도 뛰어다니며 이때에 벽이나 주택 구조부의 모서리 등에 부딪히게 되면 상처를 입을 위험이 크다. 목조주택은 이러한 경우에 아이들이 입게되는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10. 화재 위험성이 특별히 높지 않다
사람들은 불을 피울 때 나무를 사용한다. 일반인들은 나무가 불에 타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목조주택은 화재에 대하여 안전하지 못하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화재의 발생 시에 안전성 문제는 구조재가 불에 타느냐 또는 타지 않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화재가 났을 때 사람의 피해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조적 안전성의 문제는 목구조물보다는 철구조물이 더 심각하며 철구조를 보호하기 위하여 석고보드를 사용한다. 목구조에서도 목재 구조부재를 보호하기 위하여 석고보드를 사용하고 있으며 목재의 단열성능이 철보다는 매우 우수하기 때문에 오히려 높은 온도에서 목구조의 구조성능 약화가 철구조보다 늦게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11. 환경보호에 유리하다
목조주택은 재생산이 가능하며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다른 천연자원들에 비하여 환경의 파괴가 적다. 목재의 사용으로 에너지의 소비를 줄일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대기의 오염을 방지할 수 있다. 목재는 적은 에너지로 재활용이 가능하며 이를 통하여 폐기물의 양을 최소화 할 수 있다. 목재는 폐기할 때에 썩기 쉽고 태울 수 있기 때문에 처리가 용이하고 폐기할 때에 유독성 부산물의 발생이 거의 없다. 따라서 목재는 자원의 채취, 가공, 사용, 재활용, 폐기의 전 수명기간을 통하여 환경에 미치는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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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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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주택과 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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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주택과 자재
박찬규(나무와 삶 대표 02-578-9006)
뛰어난 내구성은 목조주택의 장점 중 하나이지만 그릇된 자재사용과 잘못된 시공 및 관리는 오히려 그 내구성이 콘크리트 주택보다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잘못된 자재선택은 목조주택의 수명을 감소시킬뿐 아니라 목조주택 소비자에게 목조주택 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고 결국에는 국내 목조주택의 발전에 큰 위해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목조주택의 자재에 대해 알아 본다.
1. 구조재
구조재는 북미산 Hemlock(미국솔송나무)과 S-P-F(Sitka Spruce, Angelman Spruce 등)가 쓰이며, 함수율 19%이하의 S-DRY등급을 사용해야 한다. 건조상태가 올바르지 못한 구조재를 사용하여 시공 후 건조과정을 거치게 되면, 비틀림 등의 건조결함이 나타나거나 또는 부후균에 노출되면 구조재 자체가 썩는(중량감소가 일어남) 경우도 예상할 수 있다.
구조재의 규격은 단면이 2×4inch∼2×12inch, 길이는 8feet∼20feet까지 그 용도에 따라 선택하여 사용한다. 구조재의 등급은 WWPA(Western Wood Products Association)에서 규정하고 있다.
2. 구조용 덮개 합판 (Rated Sheating)
OSB는 직사각형 모양의 얇은 나무조각을 서로 직각으로 배열해 제작한 목재 가공 패널이다. 따라서 베니어 합판과 마찬가지로 각 층이 겹쳐서 배열됨으로 인해 높은 강도와 경도를 유지한다. 북미에서 생산되는 OSB는 대개 4×8feet 규격으로 제작되며, 목조주택 용도의 가장 일반적인 두께는 벽체·지붕재의 경우 7/16inch(11.1mm)이고, 바닥재의 경우 23/32inch (18.2mm)이다.OSB의 등급은 APA(American Plywood Association)에서 규정하고 있다.
3. 방부목
콘크리트기초와 맞닿는 토대, 지면에 가장 가까운 바닥장선,외부에 노출되는 데크의 재료로 쓰이는 방부목은 부후균의 침입을 가장 효과적으로 저하시키는 재료이다. CCA방부목(Chromated Copper Arsenate)은 비소, 크롬, 구리의 성분으로 약품처리하여 방부와 방충효과를 나타내며 약품의 농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진다.
4. 도금못
철못에 아연을 도금하여 습기에 의한 부식을 지연시켜 준다.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여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종류는 못의 머리모양, 몸체모양, 끝모양, 길이, 등선경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으며 용도에 따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전기도금 못은 도금상태는 아연도금 못보다는 얇으나 마감이 깨끗한 장점이 있다. 주로 석고보드, 지붕덮개작업 등에 쓰이는 길이가 비교적 작은 못에 쓰이는 도금형태이다.
5. 방수·투습지
집안에서 발생된 습기가 구조물의 작은 균열 속으로 유입된 물이 수증기화 되어 지붕층 혹은 벽체 안으로 들어갈 경우 차가운 외부의 방수층에 결로가 생겨 단열재를 적시고 건물에 피해를 주는 현상을 막아주기 위해, 물은 막아주고 습기는 통과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방수·투습지를 벽체 안의 단열재와 외부 덮개 사이에 설치하여 발생가능한 결로로부터 사용자재의 손상을 피할 수 있다.
6. 환기구(Ventilation)
목조주택의 내외부의 온도차가 극심할 경우 벽체에는 온도층 때문에 결로현상이 생겨서 재료에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특히 지붕에 온도차를 완충시켜줄 수 있는 유동적인 공기층의 형성이 필요하다. 지붕용 환기구는 처마환기구(Soffit Vent), 박공환기구(Gable Vent), 서까래 환기구(Rafter Vent), 용마루 환기구(Ridge Vent) 등이 있고, 기초용 환기구가 있다.
7. 석고보드(Gypsum Board, Sheet Rock, Drywall)
내부벽체 및 천장마감자재로 석고보드를 사용하는데 일반석고보드와 내수, 내화석고보드가 있다. 일반적으로 4×8feet 규격에 두께는 일반석고보드가 1/2inch(12.7mm)이고, 방화석고보드는 5/8inch(15.9mm)이다. 석고보드는 1~1/2inch Screw를 이용하여 부착하며, 각각의 연결부위와 Screw자국은 Compound를 이용하여 마감한다.북미의 목조주택 내화법규에는 내부마감에 모두 석고보드를 처리하여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석고보드 마감이 가장 일반화되어 있다.
8. 후레슁(Flashing)지붕의 골, 굴뚝주위, 환기구 주위, 처마끝 등에 대는 방수판으로 그 재질은 알루미늄, 아연도금판, 동판 등이 있다.
9. 목조주택용 철물목조주택용 철물을 사용하면 시공이 간편하여 공정관리에 도움이 되고 구조물의 견고성을 확보하여 안전성을 도모할 수가 있다. 목조주택용 철물은 그 용도와 규격에 따라 약 100여 가지 이상의 자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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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