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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남양주 수동에서 살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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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남양주 수동에서 살아 보기
수동에서 살고 싶다는 뜻은 지녔지만, 막상 들어서려니 덜컥 겁이 나는 분의 편지를 받고 이 글을 씁니다.
그 분의 글을 읽으며, 처음 뵙지만 처음 같지가 않았습니다. 예전의 저희들 모습과 꼭 빼 닮았으니까요. 몇 가지 걱정하시는 점들은 지극히 정당한 걱정이며, 그런 점에 대해 먼저 살아본 사람으로서의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양평, 이천, 용인 등지를 돌아보셨다니 아마도 전원과 도심을 걸치는 수도권 교외를 선택하려는 듯합니다. 우선 수동은 그러한 수도권 지역에서는 가장 땅값이 싸며, 그에 비해 생태환경이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우선 땅을 고를 때는 말씀하신 것처럼 첫 인상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 인상이란 것도 사람과 같아 첫눈에 반하는 땅이 있는가 하면, 두고두고 우러나오며 정이 드는 땅도 있지요. 그래서 땅을 고를 때는 서두르지 말고, 몇 번이고 되살펴 보아야 합니다.
제 경우에도 다 쓰러져 가는 폐가가 있는 땅에 반하여 안 팔겠다는 주인에게 사정을 하며 팔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소개한 복덕방 사람이 말려서 아쉽게 그만 두었는데, 지금은 그 땅을 지나칠 때마다 내가 왜 저 땅에 그리 마음을 빼앗겼을까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체로 땅을 구하는 사람은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밑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인상을 주는 땅이면 단숨에 마음을 빼앗긴 채 이런, 저런 단점들을 스스로 덮어가며 제대로 보려 하지 않습니다.
물레방아 도는 개울가 집을 머릿속에 그린 분이 있다면, 실개천이 흐르는 땅만을 고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물에 씻겨 내려갈 낮은 지형이라든지, 북향의 습한 지질이라든지 이런 단점들은 땅을 돋우면 된다느니, 요즘은 난방재가 좋아 북향도 따지지 않는다느니 이런 핑계를 둘러대며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땅은 마음이 급할 때일수록 조금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여름, 겨울의 모습을 다 보아야 하고, 하루에도 아침, 저녁의 모습을 다 살펴야 합니다. 또한 주변의 도로 계획과 공장, 축사 등의 입주 여지도 예측해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조심스러움이 지나치면 시골이란 모두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함정 투성이로 여겨 벌써 시골로 오기도 전에 마음만 고달퍼져 그냥 살기 편한 아파트에 눌러 앉는 분들도 많지요.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지요. 시골 땅에서 특히 주의할 사항만 살펴보면, 우선 도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천에 너무 접한 땅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물가에서 가까우면서도 약간 경사가 있는 높이의 땅이면 좋겠지요.
셋째로는 기존 마을 속이거나 지나치게 외따로 떨어지지 않아야 좋겠지요. 가능하면 옆의 다른 개발 가능성이 있는 땅에 접하는 것보다는 보존림 등의 임야로 둘러싸인 땅이면 더욱 좋겠지요.
이 정도만 유의하시고, 나머지는 본인의 취향과 주거 목적에 따라 선택되어지면 되겠습니다.
수동은 일직선의 차도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골짜기로 이루어진 분지입니다. 따라서 도로변은 땅값도 비쌀 뿐만 아니라, 각종 식당 등의 근린시설들이 들어서고, 도로 이면에는 영세한 공장들이 최근 많이 들어서고 있어 조금은 드나드는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골짜기 상류로 들어서는 편이 좋습니다. 적당한 곳으로는 외방리 불당골, 파위리의 원적사 부근, 수산리, 지둔리 등지가 그러합니다.
땅을 고를 때, 지나치게 세심한 분들은 이거저거 따지다가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볼 때에는 땅에도 완벽함은 없다는 것이며,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을의 진입로가 넓고 좋은 곳은 통행이 좋지만 바로 그런 점으로 인해 물류조건을 따지는 공장들의 입주가 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길이 좁으면 통행에는 불편하더라도 공장이나 대규모 축사 등은 쉽게 들어서지를 못하지요.
그 다음으로 걱정하신 교육문제는 크게 걱정할 바가 없습니다.
수동초등학교가 중심에 있고, 3학년까지 다니는 송천 분교가 있고, 수산리 방면에는 가양 초등학교가 있지요. 작은 규모의 학교를 걱정한다면 그것은 실정을 잘 모르시는 것입니다.
가양초등학교의 경우만 봐도, 전교생이 적다 보니 큰 학교 학생들은 몇 십 명이 한 대 꼴로 구경만 하기 쉬운 컴퓨터도 한 사람이 한 대로 배치되고, 선생님들도 거의 일대일의 정성을 기울이시니, 그 좋다는 외국 사립학교가 따로 없지요.
중학교는 수동중학교가 수동초등학교 곁에 있으며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지낸 친구들이 모여 다니게 됩니다. 고등학교는 마석으로 30분 정도 통학을 하거나, 학력과 진로에 따라 1시간 거리의 구리시나 도농동 지역의 학교 등으로 통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말씀하신 텃세나 보안 방법 등의 문제는 거의 상식적인 것으로 흔히 절도범이나 빈집털이들이 시골집보다는 연립주택, 아파트 등의 고밀도 집약거주지에 빈발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주십시오.
도둑도 털어 갈 것이 있고, 달아나 몸을 숨길 데가 있는 곳에 꼬인다는 점입니다. 낯선 사람만 지나가도 밭에서 일하던 마을 사람들이 검문소 경찰관처럼 유심히 살펴보는 시골에서 남의 집 들어가 물건을 싸고 나오는 어리석은 도둑은 드물 것입니다.
처음 수동을 찾는 분들은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로 상당히 깊게 느껴지지만, 살아 보면 수동은 1시간 이내에 서울에 들어서며, 가까운 마석을 다운타운으로 두고 3, 8일마다 열리는 재래시장과 킴스클럽 등의 상설 대형할인점을 두고 있고, 구리한양대 병원의 의료기관, 엘지백화점과 롯데마그넷을 가깝게 두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도로 사정은 중장기 교통망이 계획되어 있고, 겨울철 눈과 여름철 큰물이 문제가 되지만 매년 그렇게 큰물과 큰 눈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폭설로 교통이 나빠질 경우라면 도심도 마찬가지이므로, 그것은 전국적인 상황에 준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집짓기에 대한 걱정은 현실적인 문제이지요. 싼 가격으로 멋지고, 튼튼한 집을 짓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겠지요.
물론 돈에 관계없이 호화로운 저택을 짓는 분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원주택과는 거리가 멀겠습니다.
저 자신도 그랬지만, 전원생활이란 것을 돈 많은 이의 호화로운 별장 수준에 제한하기보다 그것을 넘어 정말 시골에 돌아와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분들의 마음을 채워 줄 수 있는 전원주택의 모델이 시급히 요청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몸담고 있는 수사모(수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최근 전원주택의 주류로 자리잡고 있는 목조주택을 평당 2백만원으로 낮추고, 그러면서도 제대로 된 자재와 시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건축시공자를 찾으려 노력하여, 적게나마 수동에서 살고자 하는 분들에게 작은 길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이런 글만으로도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한 달에 열리는 수사모 모임에 참여하여, 수동에 먼저 들어와 사는 사람들과 만나 이런 저런 체험담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신다면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 물골안에서 이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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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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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장작난로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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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장작난로 고르기
시골생활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집안에 난로 불 피우는 거 아닐까요.
여유 있는 분들은 벽난로가 좋겠지만, 보기에는 좋아도 열효율이나 가격을 따져보면 아무래도 무쇠난로보다 덜하지요. 벽난로라는 것이 300~400만원을 웃도는 데 비해 주물난로나 화목난로는 30~40만원이면 가능하니 우선 주머니 사정을 덜 수 있지요.
저의 집 것은 주택거실용으로 가장 저렴한 철판화목난로인데, 그래도 전문적인 공장에서 만든 것이라 제법 유리창도 달려 있고, 디자인도 아름답습니다.
거실이 넓거나, 카페나 작업실처럼 공간이 넓은 곳에서는 별도로 주문하여 제작하거나 우리 동네 도예원 하시는 분처럼 산업용 보일러 기름 탱크를 이용하여 멋지게 만들어 쓰는 분도 있습니다. 그 난로는 얼마나 크고 열량이 좋은지, 60평의 작업실을 단숨에 덥히는데, 쪼개지도 않은 통나무를 쑥쑥 던져 넣어도 활활 잘 탑니다.
전원주택에서 난로의 경우는 대체로 겨울철 보조난방용으로 많이 쓰입니다. 기름값이 오르고, 심야전기보일러 시공비가 오르고, 앞으로 심야전력비용도 오를 것으로 예상이 되니 아무래도 보일러만으로 난방을 쓴다는 것은 부담이 큽니다. 난방의 경우 외에도, 난로는 무언가 전원생활에서 정서적인 아름다움을 주는 듯합니다.
전원주택의 경우, 대체로 벽난로를 쓰는 데 가격 부담이 크고, 열효율이 떨어져 자칫 장작 값이 기름값 이상으로 들 수도 있다더군요. 대개 노출식이나, 매립식이나 한쪽 면만 실내로 향하고 나머지 3면은 벽으로 둘러싸여서 많은 열손실이 있지요.
대안이 장작난로인데 화목용 난로는 주물난로와 철판난로로 나뉩니다. 주물난로는 모양이 아름답고, 집안의 장식적 효과가 크지만 대개 갈탄용이 많고, 화목갈탄 겸용의 경우에도 화구가 좁아 자유롭게 장작을 쓸어 넣기가 불편합니다.
또한 정교하게 만들었다 해도, 주물난로의 경우 거푸집에서 찍어내 단면을 붙이고, 그 사이에 흑연재 등으로 메운 것으로 사용하다 보면 쉽게 그 틈새가 벌어지게 되어 그 틈새로 연소 시 발생하는 일산화탄소 등 유독가스가 발생하여 실내건강에 해롭고, 연기나 그을음도 많이 새어 나오지요.
그래서 요새는 철판을 용접하여 붙여 만든 화목난로가 나오고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상품으로 제작되어 판매되는 것은 드물고 동네 함석가게서 제작하거나, 군고구마 장사용, 통닭장사용으로 만들어지는 듯합니다.
가정용 철판난로는 최근 몇몇 업체에서 생산하고 있는데 대체로 황학동 뒷골목에 몇 개 업체가 있고, 광주군에 전문적인 공장이 한 군데 있습니다.
철판난로는 열효율이 거의 90% 이상으로 높고, 화구도 비교적 넓은 편으로 큰 나무도 편리하게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또 용접으로 이어져 거의 틈새가 없어 연기나 그을음이 새어 나오지 않고, 연통만 잘 설치하면 역풍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벽난로 기분이 나게 내화 유리(업체 말로는 700℃ 정도)를 붙여 안의 불꽃이 보이게 하고, 위에는 군고구마를 구워 먹을 수 있도록 뺏다 넣었다 하는 반원형의 원통이 끼어 있군요. 밑에는 통풍조절기, 재 처리구가 달려 있습니다. 내화유리는 지나치게 앞부분에 과열되지만 않게 하고, 또 찬물이나 찬 것이 유리창에 닿지만 않는다면 깨어지지 않는답니다.열량은 제가 직접 설치된 집에 가 보았는데 엄청나더군요. 나무는 플라스틱 우유 박스로 한 4통이 든답니다.
철판난로는 사방이 노출되어 열량이 그대로 실내에 전달되는 장점과 또 그 반면에 아이들의 화상과 화재 예방에 신경을 써야 하겠지요.
가능한 집구석으로 설치하되 벽면에 일정한 거리를 띄우고 내화벽돌이나 이게 비싸면 은박지를 벽면에 붙이고, (이 은박지가 상당한 내열효과가 있다는군요.) 일반 빨간 벽돌로 쌓아도 될 것 같습니다. 벽에 고정되게 붙일 필요가 없이 그냥 벽에 기대어 쌓아 두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한 장에 50원짜리 시멘트벽돌을 백장 정도 사다가 난로 뒤편의 벽에 몇 센티정도 띄우고 그냥 쌓아 두었습니다.
화상 방지는 옛날 초등학교에서처럼 사각 철근으로 보호대를 세우고, 철망 같은 걸로 막아 놓으면 좋을 듯 하구요. 이런 안전망도 팔더군요.
시공은 가능하면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좋은데, 무엇보다 연통이 뜨거워서, 지나가는 벽면과 지붕의 목재와 충분한 거리를 떼고, 유리섬유와 내화재로 마감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연기의 문제는 가로로 지나가는 연통의 길이에 비해 위로 올라가는 연통의 길이가 세 배가 되어야 하며, 역풍 방지기를 달아야 한답니다.
저의 집에 들여온 화목 철판난로는 내화유리가 벽난로처럼 앞에 붙은 것인데 참고로 가격을 알려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2000년 2월에 구입한 가격인데, 올해에 보니 가격이 조금 인상되었더군요. 급하시지 않다면 저처럼 봄에 구입하시면 어떨까요)
난로 값은 23만원이고 연통, 앨보, 가스킷 링, 바닥판, 연도조절기, 연통보호망, 역풍방지기 등 부속품이 16만4천원, 도합 39만 4천원이 들었습니다. 소매가로는 46만4천원인데, 도매가로 해주고 스페어 내열유리 1장, 부삽을 서비스로 받았구요.
무엇보다 우리 집까지 싣고 와서 설치까지 해 주었습니다. 성수기 때는 못하지만, 겨울이 다 지난 무렵에 한가한 철이라 직접 사장님이 인부와 함께 우리 집까지 와서 벽을 뚫고 시공을 했지요.
내가 사다가 하려고 했는데, 막상 공사하는 걸 보니 맡긴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통까지 내열페인트로 검게 칠해서 중후한 멋이 있고, 처음의 우려와 달리 연기나 그을음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윗 부분에는 고구마 구워 먹는 통까지 들어 있는데, 타지도 않고 고구마가 노릇하니 구워지는데 기가 막히더군요.
무엇보다 저의 집 거실이 높아서 아무리 기름보일러를 돌려도 실내온도가 20℃가 되기 어렵더니, 화목난로를 피우니 단숨에 20℃를 올라갑니다. 그래서 요즘은 아침, 저녁으로 난로를 피우니 난방비도 훨씬 절감되고 있습니다.
탁탁거리는 주황빛의 난로 불 소리와
알밤과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바라보던
눈 내리던 저녁 날의 풍경은
하이야트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바라다보던
서울의 야경보다 훨씬
아름답고 포근하였습니다.
■ 물골안에서 이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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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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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의 詩로 쓰는 전원풍경] 눈온 날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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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의 詩로 쓰는 전원풍경
눈온 날의 아침
모두들 바람이 되어
거리로 나설 때
나 홀로 고요하였다
바위처럼 땅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승천하던 꿈들
서녘 하늘 노을 지는 언저리
새순처럼 자란 날개를 접고
아무 골짜기 아무 산등성이에서
밤 새워
잎새가 되고 꽃잎이 되어
풀처럼 나무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수없이 추웠던 밤
꿈이 되어 오르다
사람 사는 골짜기 아침나절에
홀로 내려
내리고 내려
사람처럼 풀처럼
뿌리를 내려두고
이제는 생명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글 김경래(인터넷 웹진 ‘OK시골’ 발행인 www.oksig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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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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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일의 건축일기] 명달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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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일의 건축일기
명달리 이야기
건축주와 시공사로 만나면 집을 어떻게 지을지, 공사금액은 얼마인지, 어떤 자재를 쓸지 의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공사가 한 참 진행되면 이건 어떻게, 저건 어떻게 하는 실랑이가 있고, 입주가 끝나면 서로 남남이 되거나 아니면 친분이 두터워지거나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명달리 두 내외는 만남의 과정이 특수해서인가 몇 번의 만남 속에 건축주와 시공사라기 보다는 인생 선배로서의 매력에 점점 더 끌려 들어간다. 두 내외 모두 의사였다는 신분 때문일까? 다 버리고 산 속으로 묻힌 인생사에 대한 호기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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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경인가, 주 5일 근무제 시행에 따른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 펜션 전원주택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가 있었다. 우리는 유럽형 펜션하우스에 대응한 한국적 황토 민박 모델을 제안했고 이 내용이 각종 일간지에 기사화 된 적이 있었다.
몇 십통의 문의전화를 받던 중 ‘아 - 세상에 이런 일이’ 하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여기는 양평 서종면 명달린데요, 건물 평수는 약 25평정도 되고요, 5년 전에 지은 집을 부수고 새로 집을 짓고 싶은데 흙집으로 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된다면 찾아 가구요.....”
잠깐을 망설였다. ‘25평 건물을 지으려고 사무실에서 2시간여 걸리는 곳에서 공사를 한다. 일반 관리비도 안 나올텐데......’
그러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뭔가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예, 오세요. 만나 뵙고 정하지요” 하고 말았다.
5년 전 지은 집을 부수고 흙집을 짓고 싶다
안주인이 운전을 하고 두 내외가 사무실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 안성 죽산 용설리의 마감공사가 한창일 때라 그쪽 현장으로 방문토록 주선했고, 바로 상담이 이어졌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중 우리가 짓고 있는 목구조 흙집에 대해서 - ‘다 좋은데 나는 이렇게 짓고 싶어요’ 하는 생각을 드러냈다.
우리의 집이 자신이 생각하는 모양과는 조금 다르다고......, 현장을 와서 보면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거라고...... 그래서 또 일단은 현장 답사를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나는 동안 우리는 계속되는 상담에 지쳐 겨를이 없었고, 언론사들의 취재 요청도 계속되어 정신이 없었다. 더구나 시공중인 현장들의 마감공사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약속을 두 번 어기고서야 현장을 방문했을 때..... 5년 전에 지은 사각 통나무(소위 팀버하우스)주택은 외형에서 보기엔 멋져 보였다. 저 집을 헐자고? ‘돈 많은 사람들의 사치’가 아닐까.
겸손한 집
기존의 집은 그야말로 ‘그림 같은 집’이었다. 거실과 주방이 터져 있으며 동남향의 산을 향해 열려 있었고, 거실에서 올라가도록 되어있는 다락방은 천장고도 높고 서재로 활용하기엔 그만이었다. 밤하늘의 별을 셀 수 있다는 꿈을 충족하기 좋은 집이었다.
두 내외가 주장하는 내용은 두 가지였다.
“집이 그림 같으면 뭘 해요, 겨울에 너무 춥고, 밤에 자는데 ‘딱-딱’ 나무 터지는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가 있어야지요..... 남들한텐 말도 못했어요, 집 없는 사람도 많은데 성한 집을 부수고 다시 짓겠다니, 남들은 욕할 거예요. 하지만 이제 살면 얼마나 산다고, 버릴 거 다 버리고 내려왔는데...... 욕심 없어요, 그저 편안한 삶터만 있으면....., 내 손으로 농사짓고 산에 다니고.......”
그러면서 바깥 주인장이 손수 그린 밑그림을 내 놓았다. 그것은 예사 사람의 솜씨가 아니었다. 옛 집처럼 토방이 있고, 나즈막한 기초에다 창문은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크기며 위치 지정, 그리고 지붕은 초가 지붕을 닮은 모습이었다.
두 내외가 머물 안방과 거실. 주방, 그리고 하나인 자식을 위해 마련한 구석방(구들방)에 재래부엌 같은 아궁이...... 그 그림을 보면서 나는 울컥하는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소망이 담긴 집’이었다.
5년 전 처음 전원으로 내려올 때는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팠지만...... 살아보니 노년의 인생을 담는 그릇은 천장이 높지 않아 아늑하고, 마당에서 집에 들어서는 턱이 낮은 집,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집이 그리운 것이다.
‘겸손한 집’
이 분들을 만나며 나는 한국건축의 자긍심에 대해 생각했다. 자연과 이웃에 거스르지 않는 겸손한 집, 바로 한국의 건축미가 아닐까. 밑그림으로부터 시작한 이 집이 완공되는 날 우리는 한국적 조형미가 살아나는 겸손한 현대 흙집을 만나게 될 것이다.
화려함을 부수고 겸손함을 채득한 이 부부에게 진정 편안한 안식처를 만들어 드려야 할텐데...... 2002년 2월 25일 드디어 철거작업과 착공에 들어갔다.
의사로서의 영화를 버리고...
건축주와 시공사로 만나면 집을 어떻게 지을지, 공사금액은 얼마인지, 어떤 자재를 쓸지 의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공사가 한 참 진행되면 이건 어떻게, 저건 어떻게 하는 실랑이가 있고, 입주가 끝나면 서로 남남이 되거나 아니면 친분이 두터워지거나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명달리 두 내외는 만남의 과정이 특별해서인가 몇 번의 만남 속에 건축주와 시공사라기 보다는 인생 선배로서의 매력에 점점 더 끌려 들어간다. 두 내외 모두 의사였다는 신분 때문일까? 다 버리고 산 속으로 묻힌 인생사에 대한 호기심일까?
바깥양반은 이렇게 말을 한다.
“나도 목수여, 하루종일 다리 부러진 놈 뼈 맞혀주는 것부터 두들기고 꿰어 맞추고...... 정형외과 의사가 목수지 뭐야, 그래서 이곳에 와서는 진짜 목수가 되었지. 여기 있는 책꽂이, 가구, 창문까지 내가 다 만들었지, 판화도 만들고.....”
“내가 의사로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 있었지. 일주일에 한 번 자원봉사를 나가던 곳이 있었는데 하루 동안 환자를 한 2백명 쯤 보았을 거야. 자원봉사 의사라고 소홀히 한다는 소릴 들을까 봐 정말 열심히 했어.
하루도 안 빠지고...... 그곳에서 개근상 준다고 했다니까? 이곳에 내려와서도 나갔는데 건강에 자신이 없어 자원봉사를 그만 둔 다음 날, 글쎄...... 벼락이라도 치듯이 한쪽에 풍이 온 거야...... 힘이 쑥 빠져나가면서 내 몸을 내가 가눌 수 없더라니까.
자원봉사 그만두었다고 벌을 내린 건지.......허.....허.....허, 내 의사 생활동안 가장 신나던 때였는데...... 아무 대가 없이 의사로서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거 그거 신나는 일인데......”
“진짜 의사는 이 사람이었어 - 부인을 가르킨다- 피부과였는데, 잘 나갔지. 개인 병원을 연지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었어.
환자 한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거 다 들어 주는 거야. 나는 그저 째고, 맞추고, 꿰매는 일...... 면담은 1~2분에 끝내지, 똑같은 일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런데 이 사람은 피부만을 보는 게 아니고 피부병이 생긴 원인을 환자가 이야기하는 속에서 찾아내고, 환자 스스로 스트레스를 풀어 내 스스로의 병 치료를 반쯤은 하게 만드는 거지. 한 30분쯤 면담을 하는 거야. 그 때 알았지. 병은 저렇게 고쳐야 하는 건데...... 왜, 옛말에 심의(心醫)라고 하잖아......”
나는 끝내 묻지 않았다. 아직도 일할 나이에 그것도 의사라는 화려한 직업을 두고 산으로 숨어버렸냐고 묻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했던 두 부부가 ‘똑같은 일의 반복 속에 기계화되고 황폐화 된 자신들의 삶’을 자연 속에 의탁하고 싶었던 열망을...
숨어 지낼(?) 은신처에 집을 지었는데, 의사라는 직업이 그랬던 것처럼 또 처음의 집은 그림 같은 집이었을 것이다. 살아지다 보니 자연에 의탁한 삶의 그릇으로서는 맞지 않았을 것이고 이제야 정말 천리(天理)에 순응하는 삶을 위해 그들은 자신이 지었던 집을 부수는 것 일게다......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단오날 새벽 쑥을 뜯는 남자
양평군 서종면 명달리, 명달리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밝은 달동네’라는 느낌을 받았다. 밝을 명(明)자에 한글로 ‘달’자..... 뭔가 문법상 맞지는 않지만 밝은 달 아닌가, 나중에 들으니 ‘달’자가 다다르다라는 ‘달’(達)자란다. ‘밝음에 다다르는 동네.....’ 이 보다 더 기막힌 이름이 있을까?
두 내외를 보며 동네 이름과 너무도 일치한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밝음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산으로 찾아든 것일까? 집을 방문했을 때 손 수 키운 고구마로 튀김을 만들어 주셨다. 조촐한 저녁상 뒤로 나온 쑥차는 그야말로 신선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쑥차라......, 그 향기에 취해 물었다.
안주인이 말을 받는다.
“글세 이 양반이-남편을 가르킨다-올해 단오날 새벽에 뜯은 쑥인데 향도 좋고 뒷맛이 너무도 깔끔해요. 꼭 단오날이 아니라도 그 시기에 쑥을 뜯으면 되는데, 이 양반은 꼭 단오날 새벽에 나가서 해뜨기 전까지 어제 나온 쑥 대공 끝만 따는 거예요. 새벽이슬 머금은 가장 신선한 것으로만요...... 아마 자기 최면일 거예요. 그 날은 꼭 미친 사람 같아요....하하하......”
벙거지 모자 하나 쓰고, 산으로 들로 나가면 그는 자연인이다. 그렇게 이슬 맞고 스러지면 아마도 밝음에 이르려는 그의 소망이 이루어질지.
“집은 땅에 바짝 붙여서 낮게 하고, 기둥도 9자는 높아요, 8자 정도로 야트막한 초가집 같으면 좋겠어요.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 볼 수 있도록 창도 낮게 해 주세요”
두 부부는 아마 하늘과 땅,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이미 깨달아 밝음에 도달한 것인지 모른다. 더 높고, 더 화려하고, 욕심부려 자연을 가두려는...... 가짜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 두 내외는 스승이다.田
글쓴이 이동일은 전통 방식의 목구조 황토주택을 전문으로 시공하는 ‘행인흙건축’의 대표다. 이 글은 자사 홈페이지에 ‘이동일의 건축일기’라는 이름으로 연재되고 있는 글을 옮겨 실은 것으로, 예비 건축주들과의 상담과 시공 과정에서 보고 느꼈던 잔잔한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다. ‘행인흙건축’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더 많은 내용은 볼 수 있으며 본지에서는 글쓴이의 동의를 얻어 가감없이 이 글을 연재한다.
■행인흙건축(031-335-8133): www.hang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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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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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화목 장만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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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화목 장만하기
주로 화목으로 사용하는 나무는 참나무를 제일로 치는데, 연기도 적고 열량도 많을뿐더러 불꽃도 아름답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을음 같은 것도 적게 생겨 굴뚝이나 노즐이 막힐 염려를 덜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밖에 흔히 쓸 수 있는 나무로는 잣나무나 소나무처럼 송진류가 많은 종류인데 간벌이나 벌목하고 남은 것들을 쉽게 구할 수 있지요.
밤나무는 푸석거리고 잘 썩어서 열량도 적고, 잡목류는 단숨에 타 버려서 주로 불쏘시개용으로 사용하면 좋습니다. 저는 주로 솔방울과 갈비(솔잎이나 잣나무잎 마른 것)를 긁어모아 처음 불 붙일 때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목은 가을 볕 좋을 때부터 장만하여 별 바른 곳에 비 맞지 않게 쌓아 충분히 말려 두어야 합니다. 저는 겨울에 주워 오니 나무들이 벌써 속으로 얼어서 연기가 많이 나고 잘 타지를 않더군요.
한 마디 덧붙이면 남의 산에 쓰러진 나무라도 산 주인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할 필요가 있으며, 슬며시 산에 들어가 멀쩡한 나무를 엔진톱으로 잘라냈다가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는 점을 붙여 둡니다. 집에 트럭이라도 있다면, 여기저기 간벌한 나무들은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목으로 쓰기 위해서는 엔진톱으로 잘라낸 나무들을 도끼로 쪼개놓아야 합니다. 아이 손목만한 굵기라면 그냥 태워도 괜찮지만 지름이 10센티를 넘어가는 나무들은 도끼로 패어 두는 편이 속까지 말리기가 좋고 불에도 잘 탑니다.
공장이나 작업실에서 쓰는 커다란 철판 난로라면 그런 나무라도 던져 넣는 대로 말끔히 타겠지만, 대체로 집안의 벽난로나 화목난로에는 너무 굵은 나무들은 잘 타지를 않습니다.
도끼는 1만원 정도 하는데, 자루가 섬유질이 질긴 물푸레나무로 된 것을 쓰고, 날은 조선도끼날을 씁니다. 도끼가 오래 되면, 주로 자루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잘 빠지게 되는데 그럴 경우, 도끼 머리를 끼울 때 고무 끈 같은 것을 끼워 두면 좋습니다.
어떤 분은 자루가 쇠로 되고, 날도 면도할 정도로 예리한 서양 도끼를 사기도 하는데, 장작을 팰 때는 이런 날이 예리한 도끼들은 나무에 깊이 박혀 여간 애를 먹지 않지요. 그래서 날이 좀 무디지만 무게가 나가는 조선도끼여야 합니다.
처음 도끼질을 해 보니,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힘껏 내리친 도끼는 겨우 나무 껍질을 벗기기 일수였고, 보기 좋게 두 쪽으로 갈라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름이 15센티 정도 되는 나무토막은 산산조각이 나 이리저리 날아가 흔적도 보이지 않고, 모처럼 한가운데를 찍노라면 도끼 날이 박혀 두세 번 내리치고 손으로 잡아뜯어야 했지요.
영화에서 이대근씨가 할 때는 그리 쉽게 보였는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한참을 헤맨 끝에 겨우 영화처럼 장작을 쪼개게 되었는데, 그 요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나무를 바닥에 뉘우지 말고, 세워야 합니다.
나무는 죽어서도 자존심이 있는지 살았을 때처럼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나무토막은 길어도 30센티를 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나무를 세우고는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단숨에 내리찍어야 하는데, 나무에 찍히는 순간, 손목이 돌아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손목이 돌아가면 도끼날도 돌아가 장작을 가느다란 이쑤시개처럼 잘라내기 쉬우니까요.
굵기가 가느다란 나무의 복판을 내리치기가 어려울 때는, 도끼자루를 짧게 잡는 게 좋습니다. 20센티 이상의 지름을 가진 굵은 나무들은 둘로 쪼개고, 다시 둘로 쪼개어 사등분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도끼질을 할 때는 무엇보다 주변을 주의해야 합니다. 꼭 도끼질할 때면 옆에 쪼그리고 앉아 구경하는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뒤에 서 있는 아내를 비키게 하고, 옆에서 구경하는 아이도 피하도록 합니다. 바짝 마른 장작은 도끼날을 맞는 순간, 생각보다 멀리 튀어 날아가기도 하니까요.
엔진톱으로 잘라놓았다면 도끼질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아침 운동 삼아 조금씩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날 잡아서 하루에 해 치우려다가는 몸살이 나기 십상입니다. 저는 도끼질을 해 보고서야, 영화에서 이대근씨가 손바닥에 침 뱉어가며 도끼질을 하고서도, 마님, 어쩌구 하는 힘이 남아 있다는 게 참 신기하더군요.
도끼질은 도끼날이 자꾸 옆으로 돌아가고, 장작이 시원스레 쪼개지지 않는다면 힘이 다한 것이니 그만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항상 연장을 다룰 때는 힘이 빠졌을 때 다치거나 사고가 나는 법이니까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도끼질이 끝나셨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추녀 밑이나 광에다 차곡차곡 쌓아두는데, 껍질 부분이 밑으로 가고, 흰 속 부분이 위로 올라가도록 쌓습니다. 당장 쓰실 것은 일정량을 현관 안에 쟁여두면 얼리지 않고, 손쉽게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구슬땀이 흐르고, 두 손이 얼얼하겠지만 그래도 차곡차곡 쌓힌 장작더미를 보면 가슴이 뿌듯하시지요?
쌀가마가 있고, 장작더미만 쌓여 있으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옛말을 실감하실 것입니다.田
■ 물골안에서 이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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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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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시골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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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시골 개
이번에는 시골에서 개를 기를 때의 주의할 점을 말씀드리지요. 우선 개집을 지을 때는 개가 충분히 성장하였을 때를 대비하여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아지가 겨우 들어갈 집에 이리저리 쪼그리고 들어가 앉은 개를 보면 참 안되었지요. 개집은 더위보다 추위를 잘 막아야 하는데, 가능하면 지붕은 단열재가 들어간 조립식 패널 조각을 얻어다 쓰면 좋습니다.
또한 여름에는 마당에 나와서 햇빛을 막을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습기가 많고 통풍이 안 되는 곳은 피해야 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풀어 놓고 기르는 것이지요. 옆에 집이나 밭이 없다면 어려서부터 풀어놓고 기르면 개들이 의외로 차분해지고, 마구 헤집고 뛰어다니지 않습니다.
개집을 철물점에서 파는 플라스틱재나 고무합성재로 된 것을 쓰는 경우도 있는데 방수는 잘될지 몰라도 고무 특유의 냄새로 후각이 발달한 개들이 곤욕을 치르고, 통풍이 전혀 되지 않는 단점이 있어, 가능하면 각재와 합판으로 짓는 것이 좋습니다. 들어가는 입구는 가능한 작게 하고,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직사각형의 구조가 좋습니다.
암캐의 경우에는 새끼를 낳을 경우, 겨울철에 강아지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문턱을 적당히 두는 것이 좋습니다.
개는 습성적으로 바닥에 헝겊 등을 까는 것을 싫어하여 무조건 밖으로 물고 나오는 경우가 있으니 바닥은 충분히 지면의 한기를 막을 수 있는 두툼한 목재를 쓰거나, 아니면 까치발을 두어 지면으로부터 적당히 떼어 주는 것이 추위와 장마철의 습기를 막는 방편이 됩니다.
지붕의 추녀는 빗물과 직사광선을 막도록 충분히 길게 뽑고, 지붕에는 비를 막을 방수재로 덮는데, 버리는 비닐 장판지를 몇 겹으로 접어서 덮으면 좋고, 좀 여유가 있으면 집 지을 때 쓰고 남은 아스팔트 싱글로 덮어주면 미관상도 좋습니다.
강아지를 데려오면, 우선 가축병원에서 파는 종합 백신을 사다가 맞히는데 주사기를 준비하여 목덜미 가죽을 충분히 잡아 당겨 피하로 주사합니다.
개들이 주로 잘 걸리는 병은 홍역과 감기, 그리고 장염이 있습니다. 홍역에 걸린 개들은 거의 살아남기 어려우니 특별히 주의하고, 장염은 불결한 물이나 어린 강아지의 경우 과식이나 기름진 고기를 많이 먹여도 걸리기 쉽습니다.
봄철이면 광견병주사를 맞히고, 그 증서를 받아 두시면 나중에 혹 남을 물었을 때 상당한 비용의 치료비를 절감할 수 있습니다. 봄, 가을로 구충제를 먹이는데 개들이 풀을 뜯어먹거나 혈변을 볼 경우, 대개는 기생충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부병도 주의해야 하는데, 코나 발등에 털이 빠지는 증세가 보이면 가축병원에 데려가야 합니다. 또한 풀어서 기를 경우, 숲에서 진드기가 붙는 경우가 많은데 가축병원에 가면 1봉에 4천원 정도 하는 가루로 된 흡혈충약을 줍니다. 이 모든 질병의 경우, 대체로 주변의 환경이 지저분하거나 습한 경우에 발생하니 무엇보다 청결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수캐의 경우에는 이웃의 개들이 발정을 하면 꽤 먼 거리까지 집을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를 대비해 목걸이에 집 전화번호를 적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내 경우에도 ‘도치’라는 수캐를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아들과 나는 추운 겨울에 마을 곳곳에 개를 찾는다는 광고지를 붙이고 다녔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먹이는 어려서부터 사료 먹이기를 권합니다. 1포대에 8천~9천원 정도 하는 사료를 어렸을 때는 물에 불려서 먹이고, 이빨이 나면 마른 채로 주는데 사료 먹은 강아지들은 집을 며칠동안 비울 때도 듬뿍 주고 가면 상할 염려도 없고 때 맞춰 주지 않아도 좋아 걱정이 없지요.
그러나 사람이 먹던 음식 찌꺼기를 먹어 본 경험이 있는 개들은 사료를 잘 먹으려 하지 않는데, 이 경우 사정없이 굶기고 사료만 주면 됩니다.
개들의 짝짓기는 우리 집 개의 경우, 산 속으로 밀월 여행을 며칠째 다녀오곤 하는데, 시골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웃 개들과 혼혈이 되기 쉽습니다. 이러한 자유로운 교합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니 예전에 아파트에 살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이웃에 혼자 사시는 여자 분이 계셨는데 얼마나 개를 아끼는지 슈퍼에 갈 때나, 마실을 갈 때나 늘 품에 안고 다녔지요. 요크셔 테리어 종류로 보이는 개였는데, 사건은 금지옥엽처럼 품에 싸서 기르던 그 개를 잠시 용변을 보라고 혼자 문밖으로 내 보낸 순간에 벌어졌습니다.
옆집에서 기르던 누렁이가 춘향이를 본 이도령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짝을 지었으니,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요크셔의 친정 어머니께서는 기함을 하여 쫓아 나와 순결을 잃은 강아지를 품에 안고, 대성통곡을 하는데 더욱 가관인 것은 뒤늦게 나온 누렁이의 주인집 아저씨가 난감한 얼굴로 헛기침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뒤에 들으니 “우리 개가 어떤 개인데”라며 통곡하던 누렁이의 장모께서는, 가축병원에 요크셔를 데리고 가 임신진단 검사를 받고, 낙태수술을 시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시골에 와서도 이럴 분이 계시지는 않겠지만 정 걱정이 되신다면 발정기엔 암캐에게 정조대를 채우시고, 수캐를 풀어놓아 번을 지키게 하시기 바랍니다.田
■ 물골안에서 이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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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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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일의 건축일기] 명달리 이야기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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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일의 건축일기
명달리 이야기 Ⅱ
<이 글은 2002년 3월 명달리 이야기Ⅰ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경량목구조 주택이라 기초는 간단한 블록 기초인 줄 알았는데 막상 터를 정지하고 나니 바닥엔 통콘크리트 기초가 되어 있었다. 이 콘크리트 기초를 깨고 다시 기초를 하자면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생각보다 기초가 제대로 되어 있기도 했다. 현장 상황의 변화에 따라 우리는 기존의 콘크리트기초를 두고 그 위에 보강하는 방식을 택했다. 문제는 구들방과 재래부엌이 있기 때문에 그 바닥면을 낮추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기초면을 약 20cm 더 높이고 현재의 바닥면을 재래부엌의 바닥면으로 두되 건축물 외부를 약 20cm 성토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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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월 22일 예정일 보다 3일 앞당겨 철거 공사에 들어갔다. 아직 겨울인데 봄바람이 살랑이니 마음은 벌써 봄이다. 건축주도 마음이 급하고 우리도 급해지는 건 그만큼 2002년의 봄을 학수 고대해 왔던 탓일까?
겨우내 준비를 거쳐왔건만 새로이 시작하는 일은 언제나 긴장과 초조함을 동반한다. 하지만 현장 경험으로 깨우친 통박은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감과 당당함만이 거친 현장의 세파를 이겨 나가는 지혜이다.
다만 자만하지 말고 점검에 또 점검하여 다음 일을 미리 예상한 가운데 일을 진행하는 치밀함이 있어야 한다. 이 교훈을 다시 한번 가슴속에 새기며 드디어 2002년 봄 첫 현장의 막을 올렸다.
지을 땐 한참이더니 허는 건 잠깐이더라
철거작업의 핵심은 비용을 줄이고 공정을 단축하기 위하여 무작위로 부술 것인가, 아니면 재생할 수 있는 건축 자재를 고려하여 수작업으로 해체할 것인가 였다.
수작업을 통한 해체는 들인 품만큼 남는 것이 없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으나 그렇다고 다시 쓸 수 있는 자재를 폐기 처리하는 것은 죄받는 일이었다. 그런 정서가 한몫 거들어 결국, 우리는 죄 받지 않는 일을 택하기로 했다.
그 날, 명달리 산자락엔 아직 흰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었지만 바람만은 봄바람이었다. 회사 임원과 건축주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천신과 지신, 산신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제 남은 생의 편안한 쉼터를 다시 지으려고 하니...... 마음을 받아 주시어 공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사고 없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두 내외가 평생을 몸담을 삶터로 거듭나게 하시옵소서......’
그렇게 시작된 철거 작업은 8일에 걸쳐 진행되었고, 집의 형체를 이루었던 목재들은 재생 목재로 부활하였다. 예상보다 더 많은 품과 더 많은 폐기물(인슐레이션, 싱글, 기초 콘크리트)처리 비용이 들었지만 죄(?) 짓지 않고 무사하게 철거 작업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지을 땐 한참이더니 허는 건 잠깐이야......’, 포크레인 들여서 하루에 다 부수고 폐기물 처리했다면 어떤 말들이 나왔을까?
저 집을 지으면서 건축주와 시공사는 얼마나 많은 꿈과 공을 들였겠는가? 채 5년이 지나지 않아 원래의 터로 돌아 간 그 자린 ‘새로운 꿈과 일꾼들의 공’을 기다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인생’에 대해 반문한다. 인생도 잘못 지었다고 생각되면 저렇게 다시 헐고 지을 수 있을까? ...... 그래, 다시 지어야지..... 하지만 이는 다시 지을 여력과 용기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한 인간이 몸 담을 건축물을 제대로 짓고 있는 것일까? ......혹시 그 어느 날 모두 다 헐고 다시 짓자고 한다면...... 세상을 산다는 것, 건축을 하고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머리가 숙여 진다.
작지만 큰 꿈이 있는 집
3월 4일 기초공사가 시작되었다. 경량목구조 주택이라 기초는 간단한 블록 기초인 줄 알았는데 막상 터를 정지하고 나니 바닥엔 통콘크리트 기초가 되어 있었다. 이 콘크리트 기초를 깨고 다시 기초를 하자면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생각보다 기초가 제대로 되어 있기도 했다. 현장 상황의 변화에 따라 우리는 기존의 콘크리트기초를 두고 그 위에 보강하는 방식을 택했다.
문제는 구들방과 재래부엌이 있기 때문에 그 바닥면을 낮추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기초면을 약 20cm 더 높이고 현재의 바닥면을 재래부엌의 바닥면으로 두되 건축물 외부를 약 20cm 성토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기초공사시 설비 배관작업을 하여야 하는데 이때 마감 공사를 미리 계획하여 세면기와 양변기의 배치를 잘 잡아야 한다. 보일러실과의 난방 배관도 미리 설치하고, 화장실과 다용도실 등은 누수를 대비하여 약 10cm정도 낮게 바닥면을 처리하였다.
기둥이 설 자리엔 간이 주추돌을 시공토록 했는데 가로 세로의 폭이 30cm이다. 목재 기둥이 약 24cm정도이니까 앞면과 좌우면이 약 3cm정도씩 보이게 된다. 목재 기둥이 앉을 자리엔 홈을 팠는데 이는 목재 기둥이 돌고 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작업이다.
주추돌에는 구멍을 하단으로 하나 뚫었다. 이는 목기둥으로 타고 내린 빗물이 고여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주추의 목기둥이 앉을 자리엔 소금과 숯을 넣기로 하였다.
기초공사를 하고 보면 건물이 참 작아 보인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이렇게 작아서 어떻게 사나 할 정도이다. 하지만 건물의 기둥이 서고 공간이 만들어지면 집은 다시 커 보이게 된다.이제 건물의 뼈대 작업이 시작 될 것이다.
뼈대있는 집을 만드는 작업은 약 보름 정도 걸릴 것이다. 거실의 대들보와 마룻대가 앉고 지붕모양이 갖추어져 아스팔트 슁글 지붕이 덮여질 것이다.
우리가 이 집에 주목하는 것은 작지만 꿈이 담긴 집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생의 마지막 삶터를 꿈꾸는 이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슴 철렁한 상량, 전화위복의 계기
3월 8일부터 시작된 목수일은 일주일여에 걸쳐 진행되었고, 주추공사와 목재 기둥, 도리와 보가 돌고 거실의 대들보와 마룻대가 얹어지는 예상 일을 3월 15일로 잡아 상량 일을 정했다.
명달리의 집은 간이 주추를 세우고 틀어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추에 사각 홈을 따 그 홈 속에 나무 기둥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너무 반듯하여 우리 살림집의 맛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도리와 도리가 만나는 코너 쪽에 보 머리를 내기로 했다.
약 한자 정도의 보 머리는 도리와 도리의 홈을 따 끼워 맞추는 것으로서 2단 3단으로 구성되기도 하는데 하나로 단순화하여 아스팔트 싱글 지붕과 부조화스럽지 않도록 기획했다.
이번 목수팀은 남도 지방에서 올라온 팀이었다. 기존의 팀이 트러스 공법에 강한 현대 목수팀이었다면 이번에는 한옥의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한옥팀이기를 바랬고, 겨우내 준비하여 섭외한 팀이었다.
하지만 일꾼들이 지방에서 올라와야 한다는 점과 처음 대목이 장담하던 말들과 다르게 호흡이 맞질 않았다. 집을 세우는 기초가 목수 일일진데 조바심만 치며 지켜보던 끝에 끝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자신들의 일정에 쫓겨, 그에 맞추겠다고 상량일을 정하고는 막상 당일에 대들보가 오르질 못했다. 건축주와 동네 분들 모두를 모아 놓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다니..... 변화는 항상 위험을 동반한다고 했다. 2002년 하도급 시공팀들을 대폭 교체한 상태에서 맞는 첫 작업이기에 더욱 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곤혹스런 상량 일을 치르고 난 그 다음날, 목수팀은 상량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상량비로 술에 취했고 일을 나오지 않았다. 이 팀과는 일을 계속 할 수 없는 일이다.
곧 비상 조치에 들어갔다. 예비된 목수팀 중에서 긴급 수배된 또 하나의 한옥 목수팀을 긴급 투입키로 하고 기존의 목수팀을 타절 했다. 이틀 안에 결정되고 수습된 신속한 조치였다.
새 팀을 맞이한 현장은 또 하나의 변화를 맞게 된다. 서로가 일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공정과 자재가 변할 수밖에 없고 그에 맞춘 팀웍이 형성되기까지는 또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거실의 삼량구조는 정통 한옥 방식의 모양새를 갖추며 틀을 잡아갔다. 전화위복이라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집의 모양은 지붕이 결정한다
문제는 지붕선이었다. 건축주는 ㄱ자 형태의 초가 모양을 생각하고 있었고, 우리는 최대한 그에 맞춘 초가 지붕선을 만들어 내도록 작업 지시가 이루어 졌는데 막상 새 목수팀의 지붕선은 한옥의 기와 지붕선이었다.
팀이 바뀌면서 우리의 요구가 정확히 수용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집 전체의 느낌을 구성하는데는 거실의 삼량구조와 어울려 처마선이 살아났다는 데 안도 할 수 있었다. 지붕은 사람에게 있어서 머리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지붕선에 따라 집의 모양이 천차만별 느낌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지붕 모양을 잡기 위한 작업이 현장 책임자와 목수팀 간에 실랑이를 벌이다가 지붕 각도와 모양을 고려하여 목수팀의 생각대로 집의 윤곽이 드러났다. 거실 쪽과 현관 왼편의 ㄱ자형 지붕 각이 틀림으로써 생기는 문제가 초가 지붕선도 아니고 기와 지붕선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못내 아쉬웠다.
도면으로 그리고 캐드로 작업을 해도 막상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 지붕 모양선은 여러 가지의 변수를 내포하고 있다. 아마 가장 어려운 일이 지붕의 모양을 잡는 일일 것이다. 항상 최선을 다하지만 미흡한 것은 어쩌지 못하는 일이다.
원하는 지붕 모양을 찾기 위해선 지붕선을 먼저 잡고 그에 맞추어 평면 계획을 잡아야 하는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 건축물은 생긴 대로 지붕을 만들면 되지만 우리 살림집의 지붕 맛은 그렇지가 않다.
원형 서까래가 노출된 처마와 지붕의 두께 감을 높인 시공, 그리고 서까래에 비가 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동판 후레슁을 처마에서 5cm정도 내밀어 마감 짓고, 용마루 지붕선을 나름대로 살려내기 위하여 동판으로 용마루를 접었다.
한옥의 용마루 느낌은 아니지만 아스팔트 싱글 지붕에 우리식 용마루 동판을 시도한다는 새로운 의미도 담겼다. 싱글은 황금색으로 정했다. 황토 벽체와 튀지 않고 하나의 색감으로 묻어지길 바라는 건축주의 희망이 반영되었다.
집은 창작이다
현대 흙집의 정형화를 찾는 노력이 올 봄에는 보다 한옥의 맛을 살리는데 초점을 두고 진행하고 있다. 팀을 교체하고 한옥 목수팀의 지혜를 빌려 오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하나를 잘하면 또 하나가 비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쉼 없는 현장 판단이 요구된다.
밑그림 설계와 실체의 접근, 보다 발전된 하나의 건축물을 완성하기까지 집은 창작의 고통을 수없이 요구한다. 과연 언제쯤 현대 흙집의 정형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田
■ 글 이동일(행인흙건축 031-335-8133 : www.hangin.co.kr)
글쓴이 이동일은 전통 방식의 목구조 황토주택을 전문으로 시공하는 ‘행인흙건축’의 대표다. 이 글은 자사 홈페이지에 ‘이동일의 건축일기’라는 이름으로 연재되고 있는 글을 옮겨 실은 것으로, 예비 건축주들과의 상담과 시공 과정에서 보고 느꼈던 잔잔한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다. ‘행인흙건축’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더 많은 내용을 볼 수 있으며 본지에서는 글쓴이의 동의를 얻어 가감없이 이 글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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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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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원일기] 세월리(洗月里)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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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원일기
세월리(洗月里)로 간 까닭은
세월리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리적으로는 88번 지방도로와 44번 지방도로가 교차하는 곳이며, 마을 뒤로는 높이 710미터의 양자산이 수려하게 펼쳐져 있다. 마을 앞으로는 중부 지방의 젖줄이자 우리 역사의 산 증인인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이다. 특히 양자산은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과 더불어 광주산맥의 한 등뼈를 이루며 광주군 퇴촌면과 여주군 산북면의 경계를 만들어 경기도 남동부의 3개 군이 접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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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세월리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이 마을 앞을 지나게 되면서부터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육군사관학교 문학부 생도들을 봄이 되면 남양주 능내리에 데려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묘소를 참배하게 하였다.
다산은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사람이자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이를 본받고자하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던 중 1998년쯤 후배인 설경민 화백이 이천군 백사면 도립리 산수유 마을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능내리를 거쳐 도립리까지 돌아서 다녀오게 되었다.
세월리는 바로 능내리에서 도립리를 가는 중간에 있었다. 양수리를 거쳐 양평대교를 지나 십오리(6㎞)쯤 가면 곤지암 방면과 이포 방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 삼거리 마을이 바로 세월리였다.
이곳에는 전교생이 80명쯤 되는, 작지만 그 이름만큼이나 예쁜 세월초등학교가 있고 보건진료소가 있으며 초등학생들의 시장기를 달래주는 슈퍼도 있다.
세월리, 한자로는 洗月里라고 쓰는데, 그 유래는 양자산 다래골에서 발원하여 이 마을 앞을 지나는 냇물이 너무 맑아 달이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몸을 씻고 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물이 맑으면 선녀탕이니 용소(龍沼)니 하여 조금은 추상적인 이름을 붙였던 것에 비해, 밤이면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달을 매개로 하여 이름을 붙였다니 얼마나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가.
이 아름다운 이름에 마음이 이끌려 이 마을 앞을 지날 때면 마음과 몸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양자산 기슭에 있던 주어사(走魚寺)라는 절은 천진암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서학을 맨 처음 공부하고 토론하던 강학회가 열렸던 곳이라고 한다.
이 주변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처절한 삶을 살았던 당대의 젊은이들의 고혼이 서려 있는 곳이기에 느낌이 남달랐다.
지금은, 주어사는 물론 그에 딸린 암자였던 천진암과 곤지암도 자취는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있어 더욱 처연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또한 역사의 기록은 없으나, 세월리에서 주어사 쪽으로 가는 길에 대감마을이라는 곳이 있는데, 세월리 노인회 총무인 심재욱(67세) 씨에 따르면 권철신, 권일신 형제가 살았다고 하여 그렇게 전해진다고 한다.
전원주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지금 서울 근교 즉 남양주, 광주, 양평, 용인, 안성 등은 물론이고 멀리 여주와 강원도 일부까지도 전원주택 단지 조성 붐이 일고 있다.
그래서 전망이 좋다고 하는 산자락이나 산기슭은 예외 없이 붉은 흙을 드러내 놓고 있다. 도시에서 찌든 삶을 회복하기 위해 전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무어라 할 수는 없지만 훼손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점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먼저 자연 훼손이 그것이다. 특히 한강을 비롯하여 강줄기가 조금이라도 내다보이는 곳이면 전원주택 사업자가 산을 헐고 깎아 택지를 조성하는 바람에 치마 잘린 여인네의 모습으로 안쓰럽게 서 있는 산이 얼마나 많은가.
전원적 삶을 누릴 권리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자연을 보존할 의무는 더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아쉽기만 하다. 두 번째는 전원의 삶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업자들에 의해 선정되든 아니면 스스로 동호인들을 만들든 함께 무리 지어 모여든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보면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도시적 삶의 형태를 전원이라는 공간으로 이동한 데 불과하다.
전원이란 무엇인가? 이는 공간적 개념으로만 인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전원이란 바로 전원적 삶이 숨쉬고 있는 곳이며, 전원적 삶의 주체란 바로 지금까지 전원을 지키고 있던 농민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원적 삶의 주체들이 지켜 온 삶의 가치가 배어 있는 곳이 전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원적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이들이 지켜온 가치에 동화되는 것이며, 그들과 함께 숨쉬고 살아가면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생각 끝에 지난 여름 세월리로 가리라고 마음을 먹고 마을 노인회관 앞에 있는 부동산 소개소에 들렀는데, 마침 그곳은 공인중개사인 유형근(42세) 씨와 마을 이장인 심재준(42세) 씨가 마을 사무를 보고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서 이장님께 나의 생각을 말한 후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대지 165평의 농가주택을 하나 소개받아 구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추석이 지난 후부터 철근 조립식 주택(40평, 사업주:융성건업, 대표:김학덕)을 지었다.
앞집은 2년 전에 안양에서 이사 온 임철승(43세) 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두 자녀의 교육을 위해 도시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대부분 자녀 교육 때문에 도시로 몰려가고 있는 세태에 비추어 볼 때, 그 마음이 너무나 세월리라는 이름처럼 맑고 아름다워 보인다.
세월초등학교 1학년인 동형(8세)이와 이제 7살인 동완이가 새침떼기 흉내를 내며 자라고 있는데, 그 애들이 나중에 다 자라면 얼마나 깨끗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겠는가.
심권(沈權, 1643∼1697) 이래로 청송 심씨 일가들이 이 마을에서 300년 이상을 살면서 만들어 놓은 따뜻한 인심과 애정은 집을 짓는 동안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직장 관계로 매일 내려가지 못하는 데도 이장님이나 임철승 씨,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보여준 관심과 애정은 벌써 내가 이 마을 한가운데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이제부터 나는 이 마을에서 선조들로부터 내려오는 역사의 등뼈를 베개 삼고, 마을의 어른들과 주민들이 보내주는 따뜻하고 정겨운 인심을 이불 삼아, 전원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리라 굳게 다짐해 본다. 田
글 이기윤 <시인,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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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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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원일기] 이장님, 이장님, 세월리 이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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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원일기
이장님, 이장님, 세월리 이장님
세월리는 40대 초반의 이장이 이 마을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50∼60대라면 젊은이 취급을 받고 있는 곳이 우리의 농촌 현실인데 40대 초반의 의욕에 찬 청년이 이 마을을 위해 헌신 봉사하고 있다는 것은 세월리의 축복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203세대라는 마을이 어디 작은 공동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세월리 심 이장의 하루는 짧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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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년 7월 세월리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 맨 먼저 만난 사람이 이 마을의 이장인 심재준(42) 씨였다. 그의 첫인상에서는 시골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도회지 냄새가 물씬 풍겼다.
세련되고 자연스런 헤어스타일, 깔끔한 옷맵시, 절제된 대화 등에서 그렇게 느꼈다.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자신을 ‘세월리 쌍둥이’라고 하면 양평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라고 했는데, 다소 터프하게 보일려고 그런 말을 했는지 몰라도 말씨나 매너가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2002년 7월에 땅(164평)을 매입하고 10월에 착공에 들어갔는데, 그는 건축업자의 선정에서부터 토목공사, 이웃주민들에 대한 양해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다. 직장 관계로 현장에 자주 내려가지 못하는 사정을 배려하여 매일 현장 체크를 해 주었으며, 상량을 할 때는 많은 주민들을 독려하여 풍성한 자리가 되도록 힘써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우리 동네는 텃세가 없다’라는 말이었다. 이 말에는 주민들의 분위기를 마을의 이장이 좌우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포된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는 동네 사람들과 외지인들과의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과 그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 숙종 때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심권(1643∼1697)의 14대 후손으로, 심경섭(작고) 씨의 4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나 세월초등학교와 양평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 마을을 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군복무를 하기 위해 고향에 잠시 머문 뒤 다시 고향을 떠났다. 1980년대 초 이농현상이 극한에 달했을 때, 그도 도회지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농촌을 떠난 이농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 생활이 어디 말만큼이나 그리 호락호락한 것인가. 도회지의 변두리에서 서성이며 바라보는 도회의 네온사인 불빛이 어디 고향 마을을 비추는 별빛처럼 정답기나 했겠는가. 그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잠시 가내 공장을 경영하다가 본격적인 농군이 되었던 것이다. 2000여 평의 농지에 농사를 지으며 마을의 청년회장을 4년 동안 역임하기도 한 그는 지금까지 5년 째 마을의 이장을 맡고 있다.
세월리는 양평군에서 단일 마을로는 세대수가 가장 많은 동네이다. 총 203세대에 500여 명의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주민과 외지인이 각각 절반을 이루고 있다. 외지인들이 들어와 있는 곳은 갑을빌리지, 세월빌리지, 나루터전원주택, 통나무전원주택, 한울전원주택, 다랫골의 화가촌 등인데 이곳의 주민들이 마을 행사 등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심 이장의 노력 덕분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원주민과 외지인들이 화합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 외에도 이 마을의 큰 자랑거리는 세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마을 사람들과 동문회(회장 : 심재혁)의 단합된 힘으로 세월초등학교를 폐교 직전에서 저지한 일이다.
1990년대 말, 우리의 농촌은 극심한 이농현상으로 인해 취학 아동이 줄어들자 수많은 시골 초등학교들이 강제로 폐교를 당했다.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데에 또 하나의 어려운 점이 더해져 사실 시골의 공동화 현상이 더욱 가속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때에 세월리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세월초등학교 살리기 운동이 벌어졌는데, 인근 여주군의 폐교된 학교의 학생들을 데려오기 위해 스쿨버스를 구입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한 결과 지금은 85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는, 작지만 아름답고 알찬 학교로 거듭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젊은층인 30∼40대가 40여 세대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우리 농촌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사실이 이 마을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마을 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마을의 들녘을 무공해 청정지역으로 조성해 반딧불이와 메뚜기 등이 서식하는 곳으로 탈바꿈시켜 가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이곳은 도회에서 지친 심신을 주말을 이용하여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연학습장으로서도 그 역할이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바로 40대 초반의 이장이 이 마을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50∼60대라면 젊은이 취급을 받고 있는 곳이 우리의 농촌 현실인데 40대 초반의 의욕에 찬 청년이 이 마을을 위해 헌신 봉사하고 있다는 것은 세월리의 축복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203세대라는 마을이 어디 작은 공동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세월리 심 이장의 하루는 짧기만 하였다.
그는 오전 8시 전후로 자신의 사무실로 출근한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사무실은 유형근(42) 씨의 부동산 중개사무실과 함께 있는데, 마을 주민들의 민원도 수리하고 외지인들에게 마을의 현황을 친절하게 소개하는 데에는 안성맞춤이다.
집이 비록 낡아 현재는 새 사무실을 갑을빌리지 앞에 신축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안온한 분위기가 낯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 곳에서 두세 시간 마을 민원을 받고는 오전 11시 전후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강상면 사무소로 향한다.
거의 매일 오는 면사무소에서 그는 먼저 마을 주민들이 부탁한 민원 등을 해결하고는 마을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면장을 비롯한 면사무소 직원들과 대화를 나눈다. 거기에서 그는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전달하기도 하고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기도 한다. 또한 강상면 이장협의회 총무를 맡고 있어 인근 마을의 이장들과 만나 강상면의 발전책을 진지하게 토론하기도 한다.
면소재지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그는 오후 두세 시경에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세월천 건너 강마을, 초등학교 인근의 본동네, 다랫골의 전원주택지, 도로가의 갑을빌리지 등을 한바퀴 돈다. 마을 곳곳에는 도로 수리 공사, 건물 신축, 부지 정리 등이 언제나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마이크를 잡는다.
“마을 주민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고속도로 건설 부지에 편입되는 땅을 가지신 분은 주민등본과 인감 도장을 가지고 5시까지 마을 회관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 …”
낭랑하고도 무게 있게 울려 퍼지는 심 이장의 목소리에 우리 집 앞 후박나무 가지에 있는 까치집으로 들어가던 까치가 날개를 멈칫거리고, 뒷집 저녁 연기가 잠시 몸을 낮추다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아내와 2녀(중학교 3학년, 초등학교 4학년)를 둔 가장으로서 자신의 일보다 마을 주민들의 복리증진을 위해 헌신하는 심 이장을 볼 때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소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田
글 이기윤<시인, 육군사관학교 교수>
사진 정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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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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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촌에서 띄운 편지] 산촌에서의 허튼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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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촌에서 띄운 편지
산촌에서의 허튼 소리
“벽촌의 소외된 계층들의 한숨소리도 들어 줬으면 좋겠다. 언젠가 방방곡곡 소리 없이 사는 사람들도 국법 지키고 세금 내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진실로 알아주는 정부가 되어 주길 기대한다. 사실 지방 일선 공무원들은 많이 발전했다. 적극적인 대민 봉사활동이나 친절한 자세는 전혀 옛날 같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직무수행에 너무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즉 중앙정부의 지시나 눈치에 얽매여 있다. 따라서 지방자치제가 하루속히 활성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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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동창회나 모임이 있어 서울에 가면 남보다 인사 한 마디를 더 듣는다. 그냥 “반갑다. 오랜만이다”로 끝나는 인사가 “멀리서 왔구나. 지낼 만 하니”라는 말이 더 붙는다. 서울서 살건 시골에서 살건 사는 것은 다 같을 텐데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러나 서울서 살지 않는 것을 비정상적이라든가, 혹은 신기하단 뜻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처음 낙향하려 했을 때는 희망에 부풀었으면서도 무슨 미지의 신천지를 개척하는 양 막연한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이제 산촌에 정착한 지 오륙 년 지나다 보니 생활도 안정되고, 철따라 변하는 새로운 느낌이 살맛 나는 생활의 활력소가 되어 ‘낙향을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편리 위주로 발달되어 온 도시생활과는 패턴이 다르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면 큰 어려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전국 어디나 인프라가 많이 구축되어 교통 통신도 큰 불편 없고 농가들도 소달구지나 지게 대신 소형 트럭이 필수품화 되어 있다.
스위치만 터치하면 온도조절이 자동화되어 계절감각도 못 느끼는 아파트생활이 편리하겠지만, 추우면 벽난로에 장작불을 피워 따뜻함을 느끼는 조그마한 행복감은 산촌생활의 즐거움이다.
문 밖만 나가면 온갖 생필품이나 호화찬란한 명품이 전시된 백화점은 없어도 삼사십 분 거리에 무슨무슨 마트하는 할인매장도 있고, 영월·평창·정선의 오일장 둘러보는 맛도 재미있다. 온갖 잡곡, 산채를 비롯하며 할아버지들의 투박한 솜씨로 만든 수공품들도 갖고 싶다.
장에 가면 빠트릴 수 없는 곳이 대장간이다. 평창 장터의 한 대장간 아저씨는 하도 자주 들리니까 나만 가면 ‘왕단골 손님 왔다’고 무척 반긴다. 그래서 조금 깎아 주는 인심도 베푼다. 일을 하다가 조금 편리한 연장이 없을까 싶어 찾아가면 입맛에 맞게 뚝딱 만들어 준다.
덤불을 헤치고 지나갈 정글낫, 돌밭을 파헤칠 두발 쇠스랑, 벌통을 파기 위한 특수 끌, 벽난로에 생선이나 고기 구울 때 걸칠 삼발이, 약초 캐는 곡괭이 등등. 주문만 하면 척척 만들어 주는 만능 재주꾼이다.
이렇게 정이 두터워지는 새로운 친구들이 늘어나는데 우리 마을엔 농한기에 짬을 내서 경로잔치다, 친목을 도모하는 윷놀이다 해서 즐거운 모임들을 자주 갖는다. 으레 농사일, 세상 돌아가는 얘기 등등을 나누는데 진솔한 얘기들이 많고 참 들을 만하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짚고 넘어 가야겠다. 지난 정부 오년 간의 치졸한 정책으로 오지주민들의 불편함은 가중되었다. 오지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과거에 설치했던 출장소, 파출소, 우체국, 분교 등등 주민들과 피부로 맞닿는 공공기관의 최일선 창구들을 대폭 폐지해 버렸다. 가뜩이나 서자 취급받던 벽지주민들의 불만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경영합리화인지 구조조정인지라는 명목으로 폐지된 우체국 예를 하나들겠다. 오지 우체국의 중요 기능은 우편업무보다는 금융업무의 비중이 훨씬 크다. 요즈음의 농촌은 자기 먹을 것을 자가 생산하는 자급자족의 형태가 아니라, 한 가지 종목을 선택해 집중 생산하는 환금작물재배 패턴으로 바뀌어서 일 년에 한두 차례 목돈이 생긴다.
이를 장롱 속에 넣어 둘 수도 없어 필연적으로 금융기관에 저금하고 필요시 인출할 수밖에 없다. 벽촌에 은행이나 농협의 개설은 경영상 무리고, 최선의 방법으로 간이 우체국을 설치하여 주민생활에 도움을 주어 왔다. 이처럼 중요 기관을 적자 운영이라고 폐지했다.
그것도 지역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 면 일 국(一面一局)만 잔존시킨다는 획일적인 원칙으로 말이다. 벽촌의 주민들은 거의가 노인층인데 집집마다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 두세 번 운행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사오십 리 길을 몇 푼의 저금 인출을 위해 인근 도시로 나들이하다 보면, 하루 일손을 완전히 소모해 버리고 만다. 일손 부족이 심각한 농촌에서 사소한 문제 취급하여 덮어 버릴 수 없다.
국민의 혈세로 운영하는 정부기관이 어떻게 수익성만 따진단 말인가? 그늘진 곳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소외된 국민들을 더욱더 살피고 찾아서 보듬는 정부라야 성숙된 정부일 텐데, 목소리 작다고 깔아뭉개는 행정을 지난 정부는 서슴없이 자행해 왔다.
소위 저속한 인기행정 전시행정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요는 소신도 없고 능력도 없으며 치졸한 정치권에 아부하는 일부 중앙관서의 고급관리들이 문제다. 구조조정을 제대로 하려면 중복 업무가 많은 중앙관서의 부서들을 통폐합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고 능률적일 텐데 제 밥 그릇 지키기에 급급했던 모양이다.
말로만 국민의 뜻이란 말을 자주 쓰는 정치인이 제일 꼴불견이다. 진솔한 민심의 향방을 간파하려는 성실함과 양심이 있는 지도자가 아쉽다.
국민은 전혀 공감하지 않는데 자기 개인의 생각을 국민들의 뜻인 양 거침없이 말하는 파렴치한 정치인들의 언행에 신물이 났다. 전원생활 얘기가 어쩌다 다른 방향으로 외도한 것 같은데 벽촌의 소외된 계층들의 한숨소리도 들어 줬으면 좋겠다.
언젠가 방방곡곡 소리 없이 사는 사람들도 국법 지키고 세금 내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진실로 알아주는 정부가 되어 주길 기대한다.
사실 지방 일선 공무원들은 많이 발전했다. 적극적인 대민 봉사활동이나 친절한 자세는 전혀 옛날 같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직무수행에 너무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즉 중앙정부의 지시나 눈치에 얽매여 있다. 따라서 지방자치제가 하루속히 활성화되어야 한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의 범주에서 농촌생활이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생활을 영위할 활력소들이 있어서 상대적 박탈감을 보상해 준다. 그것이 바로 자연이다. 나도 그 자연의 한 구성 요소로 동화되고자 노력함이 전원생활의 기쁨인 것 같다.
■ 글 황대석<뫼꽃야생화농원 경영>
글쓴이 황대석 씨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중견건설회사의 경영자로 근무하다 정년퇴임했다. 지난 96년부터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두산리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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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