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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나무 산장 대신 지은 통나무 집 “통나무 동호인들이 모여 지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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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카페 짓기 통나무 산장 대신 지은 통나무 집 "통나무 동호인들이 모여 지었어요" 산을 좋아하는 이경수씨는 언젠가는 통나무 산장을 짓고 산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IMF로 잘 나가던 회사를 잃었다. 통나무 산장은 나중에 일이고 우선 당장은 먹고 살아야 했다. 그래서 30여년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서산으로 내려와 통나무 레스토랑을 지었다. 알프스 몽블랑이 바라보이는 조그마한 산간마을의 이름을 따 샤모니로 이름지었다. 서산시 읍내동 공원입구에 있는 통나무집 샤모니는 초겨울의 비스듬한 햇살에 은행잎과 같이 노랗게 익어 있었다. 그 곁에는 마악 시작한 겨울바람에 갈대들이 긴 허리를 흔들며 바람을 그네처럼 타고 있었다. 마지막 단풍이 한창인 야산과 들깨의 대궁이만 남아있는 텃밭을 사이에 두고 서산시내를 내려다 보고 서있는 샤모니는 앞에서 보면 날개를 접은 한 마리의 학이었고 옆에서 보면 등줄기 곧은 산이었다. 이렇듯 샤모니는 통나무의 웅장함을 잘 표한하고 있는 집이었다. 이곳 통나무집의 주인 이경수씨는 IMF전만 해도 유명 투자신탁회사의 지점장으로 서울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IMF사태로 투자신탁회사가 파산하여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먹고살기 위해' 30년 가까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이곳 서산으로 내려와 통나무집을 지었다. 회사가 파산하기 전 그는 산을 좋아해 시간만 나면 산을 찾아 다녔고 산악서적들을 구입해 공부하는 취미에 빠져 있었다. 퇴직하면 통나무산장을 짓고 산악서적을 읽으며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재 그는 산서(山書)동호인들의 모임인 한국산서회 회원이다. 그의 집 샤모니란 이름도 알프스의 몽블랑이 바라보이는 조그마한 산간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평소에 통나무 산장을 짓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에 회사가 파산하여 그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왔지만 그러나 산장을짓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통나무 산장은다음으로 미루고 '꿩대신 닭'이란 생각으로 통나무 레스토랑을 지었다.이 통나무집에는 집주인 이경수씨의 정성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수공식 통나무 전문가 두사람과 집주인을 포함한 통나무동호인들이 참여하여 6개월에 걸쳐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을 지을 때 통나무동호인으로 함께 참여한 것이다. 목재를 손수 구입해 직접 켜고 말리며 통나무 집짓는 방법에 대해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동호인들과 자신의 집을 지었다. 이 집은 2층으로 되어 있는 수공식 통나무집이다. 이경수씨가 이곳에 땅을 구입한 것은 올 1월이며 3백평 자연녹지를 평당 1백만원에 구입했다. 그리고 곧바로 공사를 시작해 올 7월 마무리 했다. 이 집을 지을 때 가장 신경쓴 부분은 주변 자연경관과의 조화였다. 주변의 경관을 실내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창을 크게 냈으며 특히 2층의 벽면은 전부 창으로 처리했다. 데크도 전면은 통로의 개념만 유도했고 경관이 좋은 측면을 넓게 처리했다. 부지에 있던 은행나무도 다치지 않고 살려냈다. 현관은 측면에 두고 건물의 전면 공간은 주차장으로 했다. 건물의 면적은 1층 60평, 2층 35평으로 총 95평이며 데크가 60평인 웅장한 집이다. 이 집을 짓는데 건축비는 데크 공사까지 평당 5백만원정도 들었다. 구조체의 경우 본체는 수공식통나무로 하고 주방 등 내실은 2×4, 2×6 등을 혼용했다. 바닥은 아카시아 쪽루바, 지붕은 적삼목재를 직접 가공해 마감했다.田 글·사진 김경래 알아보니…한국산서회 한국산서회는 산악도서의 발행인, 저자, 독자들의 모임이다. 한마디로 산을 좋아하고 산과 관련한 책들을 쓰고 수집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1986년 서울 마포에서 출판인 산악회 주최로 산악도서전시회가 열였는데 적잖은 호응을 얻었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하여 당시 산서를 출품했던 사람들 33명이 발기인이 되어 탄생했다. 현재 약 1백여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산악문화대상을 제정하였고 각종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있다. 건축정보 위치 : 충남 서산시 읍내동(문화회관 뒤) 상호 : 통나무 레스토랑 샤모니 (0455-681-3700) 대지면적 : 3백평 대지구입년도 : 1999년 1월 대지구입금액 : 자연녹지 평당 1백만원 건물형태 : 2층 수공식 통나무집 공사기간 : 99년 1월 ~ 99월 7월 건평 : 95평(1층 60평, 2층 35평) 데크 : 60평 실내구조 : 1층(홀, 주방, 창고, 화장실), 2층(홀) 방위 : 남서향 평당건축비 : 5백만원(데크포함) 구조체 : 본채-통나무수공식, 주방-2×4, 2×6목구조 오일스텐 : 미국 올림픽 지붕마감 : 적삼목 제재 사용 바닥재 : 아카시아 쪽루바 난방형태 : 1층 라지에이터, 2층 장작난로 온수 : 심야전기 보일러 식수공급 : 상수도, 지하수 주변환경 : 서산시 공원입구 자연녹지 설계 : 창조건축(0455-681-6333) 시공 : 건축주 직접 시공(수공식 통나무 전문가 2인 등 동호인을 구성하여 건축주가 직접 동호인으로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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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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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장까지 발벗고 나서서 챙겨주는 산골 인심에 빠져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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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의 집
면장까지 발벗고 나서서 챙겨주는 산골 인심에 빠져 지은 집
마을과 조금 떨어진 산속에 집을 짓다 보니 전기도 끌어야 했고 다리도 놓아야 했다. 그 시간들이며 공사비가 만만치 않았다. 마을과 떨어져 집을 지으려면 건축비 외에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집. 강원도 평창의 한적한 마을에 지은 철근 콘크리트주택을 소개한다.
영동고속도로 둔내나들목에서 내려 휘닉스파크로 향하다 보면 휘닉스파크를 좌측에 두고 오르막길이 있고 고개마루 쯤에서 비포장길이 나온다. 이 비포장도로를 경계로 횡성군과 평창군이 구분된다. 고개를 넘으면서 다시 포장길과 접하며 고개를 다 내려간 곳에 호수가 있는 마을이 있다.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란 이 마을은 강원도의 산간마을이 흔히 그렇듯 집들이 띄엄띄엄 눈에 띄는 한적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에 사는 김승원, 김경혜 씨 부부는 올 봄 이곳에 노후를 위해 집을 지었다. 치악산을 좋아해 이 동네를 자주 지나다 동네가 마음에 들어 96년도에 임야 1만6천여평을 구입했다.
현재 이곳 주변의 대지 가격은 평당 15만~20만원 정도며 매물은 많은 편이다. 이들 부부가 전원주택을 지을 목적으로 이곳 땅을 구입할 때 가장 고려하였던 사항은 전원주택에 어울리는 주변경관과 마을과 떨어져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부지를 구입할 당시 곤지암에서 전원주택을 짓기 위해 노력을 하였으나 허가를 받지 못한 채 5년여간 고생만 열심히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전원주택을 짓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세대수가 많지 않은 시골마을에 새로운 입주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는지 방림면의 면장님이 직접 나서서 집짓는 과정을 도와 주었다. 곤지암에서는 그렇게 높던 행정의 문턱이 이곳에서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98년 7월 2백60평을 대지로 전용하여 철근콘크리트구조로 집을 짓기 시작해 거의 10개월이 걸려 올 4월 마무리 되었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산속에 집을 짓다보니 다리공사부터 진입로공사 등 토목공사가 많아져 시간이 오래 걸렸다. 토목공사에 들어간 비용은 전기가설비 6백만원, 다리공사 1천2백만원을 포함해 총 8천2백만원정도 들었다. 건물의 총면적은 1층 42평, 2층 16평 등 총 58평이며 창고로 지하 23평을 별도로 두었다. 집을 지을 때는 산속집의 이미지를 살려내기 위해 주변경관과 어울리는 배치와 모양에 많은 신경을 썼다.
이 집의 벽체는 철근 콘크리트며 붉은 벽돌로 외벽을 마감했고 실내는 벽돌을 붙인 후 석고보드위에 벽지와 페인트로 마감했다. 방바닥은 온돌 마루판 혹은 황토장판으로 지붕은 경사슬라브 위에 칼라 아스팔트 싱글로 마감했다. 순수한 건축비는 평당 3백만원 정도(지하 23평 포함) 들었으며 그외 지하수 5백만원, 심야전기 1천2백만원 등이 더 들어갔다. 현재 연못을 비롯한 조경공사가 한창인데 2천4백여만원의 공사비를 예상하고 있다.
글·사진 김경래
작은 인터뷰·건축주 김경혜 씨 “물이 너무 좋아 빨래가 잘 돼요.” 첫얼음이 얼 정도로 기온이 떨어졌다며 매스컴들이 호들갑을 떨던 날 강원도 평창의 산간마을에 있는 집을 찾았다. 산 속의 바람은 도시에서의 그것보다 더 매서웠다. 이 집의 안주인 김경혜씨는 그 추위속에서도 계곡에 나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고무장갑에 겨울 외투로 중무장을 했어도 코끝이 빨갛게 얼어있었다.
“계곡물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때가 쏙 빠지거든요.” 빨래 바구니를 들고 마당을 들어서며 그녀는 그렇게 웃었다. 그 억양에는 강원도의 사투리까지 배어있었다. 산골에 빠져 사는 모습이 역력하다.
흰 살결의 고운 얼굴이 아니라면 영락없는 시골 아낙의 모습이지만 그러나 김경혜씨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며 지금도 논현동에서 살고 있는 한마디로 ‘손에 물 한번 안묻히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이곳에 올 때면 마당에 잡초를 뽑고 계곡에 나가 빨래를 한다. 강원도의 산골 아낙으로 변하는 것이다. 때로는 동네 배추밭에 나가 팔고 남은 배추를 뽑아오고 그 고신 맛을 못 잊어 서울의 친구들까지 불러 내려 배추축제를 연다. “저희집이 해발 7백m인데 이 고도가 사람들 건강에 좋대요.” 그녀의 웃음은 산만큼 넉넉하고 건강하다.
건축정보
주택의 위치 :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
부지구입 연도 : 1996년
공사기간 : 1998년 7월 ~ 1999년 4월
부지면적 : 8백90평(대지 2백60평, 목장지 5백평, 밭 1백30평)
건축연면적 : 58평(1층 42, 2층 16평), 지하 23평
벽체구조 : 철근콘크리트
외벽마감 : 철근콘크리트 위 붉은 벽돌 치장쌓기
내벽마감 : 벽돌위 석고보드 마감 벽지 또는 페인트
창호재 : 내부 목재, 외부 샷시 마감
단열재 : 80㎜ 또는 50㎜ 압출 폴리스틸렌
지붕마감 : 칼라 아스팔트 싱글
바닥재 : 온돌 마루판 또는 황토 장판
부지 토목공사비 : 7천1백20만원(평당 8만원×8백90평)
전기가설비 : 6백만원
다리공사 : 1천2백만원
지하수공사 : 5백만원
심야전기 : 1천2백만원
연못조성 : 1천8백만원
조경 : 6백만원(벗나무, 단풍나무, 잔디 식재 등)
건축비 : 2억1천3백만원(평당 3백만원×71평-지하포함) 총 3억4천3백20만원
■ 시공 ·(주)새한파라다이스건설(02-538-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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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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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축권 구입해 그린벨트 지역에 침목으로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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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재 이런 주택
이축권 구입해 그린벨트 지역에 침목으로 지은 집
시간이 지나면서 침목이 갖는 좋은 점도 발견하게 됐다. 침목주택의 특징은 우선 해충의 접근을 막아준다는 점과 건축 후에도 나무가 갈라지거나 뒤틀릴 염려가 없다는 점, 그리고 자체적으로 단열성능을 가졌다는 점이 꼽힌다. 흰색 사이딩이 빛나는 그림 같은 집은 아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나름대로 분위기와 특색 있는 집이 될 것이란 기대감도 가질 수 있다.
침목으로 집을 짓는 다는 것 자체가 건축주 입장에선 모험이나 다름없는 일. 흔히 사용되는 건축자재가 아닌데다 침목주택의 좋고 나쁨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 자료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김진오 김애순씨 부부도 처음 얼마간은 침목주택을 놓고 다소 망설였다. 우선 외관은 특별해 보일지언정 사이딩으로 단정히 마감된 일반 주택처럼 화사한 분위기는 기대할 수 없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또 실내에서 고약한 침목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앞섰고, 그렇다고 건축비가 일반 목구조 주택보다 저렴하지 않다는 점도 결심을 망설이게 했다.
그러나 침목주택을 마음에 둔 이후부터는 다른 주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침목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단순한 ‘관심’ 차원이 침목에 대한 ‘애착’으로 발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침목이 갖는 좋은 점도 발견하게 됐다. 침목주택의 특징은 우선 해충의 접근을 막아준다는 점과 건축 후에도 나무가 갈라지거나 뒤틀릴 염려가 없다는 점, 그리고 자체적으로 단열성능을 가졌다는 점이 꼽힌다. 흰색 사이딩이 빛나는 그림 같은 집은 아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나름대로 분위기와 특색 있는 집이 될 것이란 기대감도 가질 수 있다.
결국 침목을 이용해 주택을 짓기로 했다. 건축은 지난 7월부터 시작됐다. 30평 규모로 짓되, 20평정도의 별도 부속건물을 들이기로 했다. 이 곳 과천시 주암동 일대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곳이어서 외지인의 경우 30평 이상은 지을 수 없었고 다만 20평 규모의 부속사만을 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제 구입에서부터 설계, 시공 일체는 운봉산업개발에 의뢰했다. 본체 실내 구조는 방 3개에 거실, 주방, 화장실 등으로 설계했는데 천장을 높여 공간감을 강조했다. 내벽은 침목위에 타이벡을 붙이고 단열재를 대고, 그 위에 다시 합판을 댄 다음 석고보드로 마감, 핸디코트로 마무리했다. 외벽은 침목이 그대로 노출되도록 했다.
부속건물도 비슷한 방식으로 시공했다. 다만 주거용인 아닌 부속사이기 때문에 난방을 설치할 수 없었다. 원룸식으로 꾸며 창고로 쓰되, 내부마감에 신경을 써 휴식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소요된 침목은 모두 7백여개 정도. 본건물에 4백50여개, 부속 건물에 2백50여개가 각각 쓰였다. 침목의 평균 무게는 약 80kg 정도로 길이는 2.5m, 각변은 15cm, 24cm 정도다. 개당 가격은 약 3만5천원. 침목을 일일이 인부들이 들어올려 쌓아야 하기 때문에 작업과정이 수월한 편은 아니었다.
건축은 9월 초순에 완공됐다. 당초 고약한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는 선입견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사라졌다. 민트향을 연상시키는 아주 은은한 냄새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분명 침목 냄새임에도 결코 나쁜 느낌이 아니었다. 서울 반포의 아파트에서 생활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시끄러운 차 소리도 여름철이면 날아드는 까만 먼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더욱이 이 일대가 개발제한구역이다보니 자연경관도 그만이었다. 오히려 창문을 열면 신선한 바람과 함께 짙어 가는 가을색이 제격이다.
사실 이 땅은 지난 81년에 평당 2만3천원씩을 주고 사두었던 땅이다. 당시 부동산에 문외한이었터라 개발제한구역인지도 모르고 경관에 반해 덜컥 구입했던 땅. 게다가 2만3천원이란 가격도 당시엔 시세보다 비싼 금액임을 나중에 알고 적잖이 속을 아파해야 했던 그런 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전화위복이 됐다. 과천, 사당, 양재동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그 곳들과는 전혀 다른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천혜의 주거공간. 모두가 부러워 하는 그런 곳이 된 것이다.
글·사진 류재청
김진태/운봉산업개발 사장 침목은 부후 및 뒤틀림 염려 없는 고급 자재
침목주택은 흔히 접할 수 있는 일반적인 건축물은 아니다. 카페 정도가 고작이고 주거용의 경우는 더욱 드문 편이다. 이는 침목의 공급이 한정적인데다 ‘건축자재로써의 침목’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목으로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침목 주택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일부 외관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꺼리는 경우도 있지만 살다보면 좋은 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침목은 철도청이 일년에 한 번 정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경매에 부친다. 과거 몇 천원 하던 것이 지난해 2만원대를 형성하더니 올핸 3만원대로 올라섰다. 수요가 느는데 비해 공급은 한정적이어서 가격이 매년 뛰고 있다.
경매에 나온 침목들은 대부분 시멘트 제품으로 대체되면서 빠져나온 침목들이다. 새 침목이 아니라 기름성분과 고약한 냄새가 적당히 제거되어 주택자재로 쓰기에 안성맞춤이다. 실제 침목으로 집을 경우 여러 가지로 좋은 점이 많다. 우선 각종 해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고, 내부적으로도 자생하기 힘든 조건을 갖추게 된다. 또 침목 자체가 오랫동안 기름에 절여진 상태여서 일반 목재와 달리 부후의 염려가 없다. 자연스레 방부목이 된 셈이다. 자체 단열 성능이 뛰어나고 건축후 뒤틀리거나 갈라질 염려가 없다는 것도 장점에 속한다.
건축정보
위치: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그린벨트지역)
부지면적: 6백93평(준농림전 5백93평, 대지 1백평)
부지구입년도: 81년
부지구입금액: 평당 2만3천원(준농림전)
현재 주변시세: 평당 70~80만원선
건물형태: 단층 침목주택
공사기간: 99년 7월~9월초
건평: 건물면적 30평(별도 부속건물 20평)
실내구조: 본건물(방3, 화장실, 거실, 주방) 부속건물(원룸, 화장실)
방위: 남향
평당 건축비:3백40만원
구조체 및 외벽마감: 침목
사용된 침목수량: 7백여개
침목 가격: 개당 3만5천원
단열재: 스티로폼 50mm쪾내벽마감: 타이벡-단열재-합판-석고보드-핸디코트
지붕마감: 아스팔트싱글
바닥재: 코르크 바닥재(호주산)
창호재: 알루미늄 이중창
난방형태: 가스보일러(LPG)
식수공급: 지하수
주변 가구수: 15세대.
입지여건: 과천 경마장 뒤쪽 그린벨트지역
생활권: 과천, 사당, 양재 근거리
■ 설계 및 시공: 운봉산업개발(02-2646-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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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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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나무와 황토가 어우러진 ‘2층 목구조 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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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다른 전원주택
조선소나무와 황토가 어우러진 ‘2층 목구조 흙집’
건축 역시 이규학씨가 손수 진행했다. 인부들을 불러 직접 진두지휘를 했는데 기둥이나 보 등 기본 골격만 목수인 아버지의 도움을 얻었다. 골조로 사용된 소나무는 원주일대를 헤매 다닌 끝에 어렵게 구한 오대산 조선소나무. 벽체는 황토와 통나무를 이용해 쌓았다. 외벽은 황토와 통나무 단면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했고, 내벽엔 스티로폼으로 단열을 한후, 석고보드로 덮고 다시 황토로 마감했다.
주거용 주택이라기 보다는 카페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느낌은 내부에 들어서서도 마찬가지. 어느 것 하나 집주인의 손길과 의도가 숨어있지 않은 게 없다. 집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 일대에서는 아주 독특한 집으로 통한다.
이규학씨 집은 겉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는 물론, 건축 자재에서부터 시공방법, 내부 구조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점이 아주 많다.
특히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이 집의 몇 가지 독특함 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거리. 임시로 걸쳐놓았던 통나무가 지금까지 그럴듯한 계단 역할을 톡톡히 한다. 불안해 보이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쓰다 남은 통나무 조각을 세워 징검다리식으로 만든 진입구도 특별한 느낌이다.
벽난로 역시 소박한 옛 멋이 그대로 묻어 있다. 이 벽난로의 굴뚝은 2층 아이들 방으로까지 이어진다. 안방에 바닥에 깔린 솔잎도 방문객에게는 이색적인 풍경. 한마디로 집주인의 고집스런 철학, 뚝심, 의지 등이 아주 잘 나타난 그런 집이다. 이 집의 모티브는 지은지 4백년이 넘은 전통 한옥. 이규학씨는 이 집을 짓기 전까지만 해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여주군 대신면 전통한옥에서 생활했다. 바로 이 전통한옥에서 살면서 느낀 구조와 장단점이 바탕이 되어 지금의 집이 탄생한 것이다.
이규학씨가 여주군 여주읍 연라1리에 지금의 땅을 마련한 것은 지난 95년. 주위 사람의 소개로 아내 민경숙씨와 한 번 와서 보고는 이내 결정을 내버렸다. 준농림답 1천25평으로 평당 1만5천원씩 주었다.
본격적인 건축은 이듬해부터 시작됐다. 자신의 생각이 담긴 설계대로 집을 짓기로 했다. 시멘트집이나 멋을 한껏 부린 현대식 전원주택은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작업의 우선 순위는 토목공사. 과거 논이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지반 다지기는 필수였다. 논흙을 모두 퍼내고 모래와 자갈을 1m높이로 다지고 다시 그 위에 콘크리트를 쳤다. 다행히 이 일대 지반이 마사토여서 논흙만 퍼내면 물이 스미거나 지반이 내려앉을 염려는 없다는 게 주위의 얘기였다.
건축 역시 이규학씨가 손수 진행했다. 인부들을 불러 직접 진두지휘를 했는데 기둥이나 보 등 기본 골격만 목수인 아버지의 도움을 얻었다. 골조로 사용된 소나무는 원주일대를 헤매 다닌 끝에 어렵게 구한 오대산 조선소나무.
벽체는 황토와 통나무를 이용해 쌓았다. 외벽은 황토와 통나무 단면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했고, 내벽엔 스티로폼으로 단열을 한후, 석고보드로 덮고 다시 황토로 마감했다. 벽체 두께는 30cm정도. 밖에서나 안에서나 온통 황토 빛이다.
96년 10월경 시작된 건축은 이듬해 5월경에 끝났다. 약 7개월 가량이 소요됐는데 처음 지어보는 집인데다 겨울에는 황토작업을 할 수 없어 공사기간이 다소 길었다. 총 건축비는 1억원 정도. ‘창호를 좀더 좋은 것을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지만 대체로 자신의 생각이 많이 반영된 집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그동안 살아본 결과, 흙집의 좋은 점은 바로 쾌적한 실내 환경 유지. 지난 2년간 생활하면서 느낀 가장 큰 놀라움은 탁월할 습도조절 능력이었다. 내내 습도계를 달아 놓고 생활했는데 장마철 70%정도로 올라가는 것을 제외하면 1년 내내 거의 50%정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곳은 주변에 민가가 없는 데다 나지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여 외부 환경 역시 호젓하기 이를 데 없는 곳. 주변 분위기와 황토집이 잘 어울린다. 이규학씨가 원하던 그런 곳이다.
이규학씨는 과거 농민운동에 관여했었고, 여주군 농민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도 지내 농촌 생활에 대한 철학이 남다른 편이었다. 그가 이런 집을 짓고 사는 것도 ‘독특한 집을 짓겠다’는 단순한 발상이 아니라 분명한 철학적 무게가 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글·사진 류재청
솔잎을 방바닥에 깔아보세요 이규학씨는 소나무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특히 조선소나무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이 집 역시 조선소나무들이 떠받치고 있다. 이규학씨의 기억으로는 어려서 군불을 땔 때 스며 나오는 조선 소나무와 솔잎의 향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또 목수가 소나무를 켜거나 대패질을 할 때 풍기던 솔 향기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방박닥에 솔잎을 깐 것도 바로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 반신반의하며 시험삼아 깔아본 솔잎이 방안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은은한 솔잎향기가 상쾌하다. 적당한 쿠션 역할도 나쁘지 않은 느낌.
이규학씨 얘기로는 솔 향기가 2~3년은 지속된단다. 그리고 예전 우리의 선조들은 실제 이러한 솔잎을 깔고 생활했다고 한다. 요즘 찜질방이나 사우나에 솔잎이 활용되고, 음료까지 등장한 것을 보면 선조들의 지혜가 새삼 되새겨진다는 게 이규학씨의 얘기다.
건축정보
위치: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연라1리
부지면적: 준농림답 1천25평(이중 2백평 대지전용)
부지구입년도: 95년
당시 부지구입금액: 평당 1만5천원(준농림전)
현 주변부지 시세: 평당 6만~8만원, 대지 20~30만원
건물형태: 2층 목구조 흙집
시공: 직접 시공
공사기간: 96년 10월~97년 5월
건평: 55평(1층 33평, 2층 22평)
실내구조: 1층 방2, 주방, 욕실, 거실 2층 방3, 욕식, 거실
방위: 남서향
총건축비: 1억원
골조: 조선소나무
벽체 및 외벽마감: 황토, 나무
단열재: 스티로폼 80mm
내벽마감: 석고보드, 황토
지붕마감: 시멘트 기와
난방형태: 기름보일러
식수공급: 지하수(비용 2백만원)
주변 가구수: 주변 4백m이내 없음(연라1리는 1백30가구)
생활권: 여주읍(5Km, 승용차 10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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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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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꾸민 정원이 있는 벽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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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아름다운 집
20년간 꾸민 정원이 있는 벽돌집
대개의 손님들은 ‘정원을 꾸미는 데 돈이 많이 들었겠다’며 넌지시 혼잣말인양 물어온다. 그러나 이 정원은 돈을 들여 조성한 것이 아니다. 20여년전 부터, 그러니까 정두환씨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무렵부터 한 그루 두그루 심은 것이다. 92년 옛집을 헐고 지금의 집을 다시 지을 때도 나무들이 다치지 않도록 고스란히 살려 집을 지었다.
가끔 지나던 사람들이 기웃기웃 하는 걸 보면 ‘열에 아홉’ 정도는 정원 때문이다. 지난달엔 일제히 가을 옷으로 갈아입으며 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켰다. 녹음이 우거지는 여름에도 제법 볼만하다는 게 집주인의 설명이다.
강원도 춘천시 신매3리 정두환씨 댁. 잔뜩 머금은 가을색이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둔다. 사시사철 붉은 색을 자랑하는 단풍이며, 주목, 목련 라일락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작은 숲속을 연상시킨다. 바로 옆에 있는 의암호와도 제법 조화롭다.
대개의 손님들은 ‘정원을 꾸미는 데 돈이 많이 들었겠다’며 넌지시 혼잣말인양 물어온다. 그러나 이 정원은 돈을 들여 조성한 것이 아니다. 20여년전 부터, 그러니까 정두환씨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무렵부터 한 두그루씩 심은 것이다. 92년 옛집을 헐고 지금의 집을 다시 지을 때도 나무들이 다치지 않도록 고스란히 살려 집을 지었다.
정두환씨는 이 곳 토박이. 할아버지 아버지 대를 이어 정두환씨대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한 번도 춘천 땅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의 집은 92년 옛 집을 헐고 지은 것. 당시 건축비는 평당 1백50만원 꼴로 모두 7천5백만원 가량이 들었다. 담장이나 기타 부대비용을 포함하면 9천만원 가까운 돈이 소요됐는데 당시 금액으로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설계는 춘천의 설계사무소에 의뢰했고, 건축은 시공회사를 운영하는 친구에게 맡겼다. 외벽은 적벽돌로 쌓고 100mm 스티로폼으로 단열을 한 다음 다시 일반벽돌로 쌓고 미장 마감후 벽지로 마감했다. 지붕은 당시만 해도 신식 자재에 속했던 아스팔트싱글. 난방은 당초 기름보일러를 설치했으나 세월이 지나 지금은 심야전기 보일러로 대체됐다. 식수는 지하수.
잘 지어볼양으로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러나 90년대 초반만 해도 지금처럼 다양한 건축자재가 일반화되지 못했다. 지금은 예쁘게 잘 지은 집들이 많다보니 어느새 구식집이 됐다.
이 곳 신매3리는 교통도 좋은 편에 속한다. 더욱이 이달중엔 신매대교가 완공돼 개통을 앞두고 있어 춘천간 왕복시간은 더욱 단축될 것으로 보인다. 승용차로는 10분 거리요, 버스만도 하루 10번 이상 왕복한다. 배편도 오전 4회정도 왕복하는데 육로가 발달하면서 운항횟수는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지고 아무리 좋은집이 많이 생겼어도 세월의 때 만큼이나 집에 대한 정은 더욱 깊어만 간다.田
글·사진 류재청
건축정보
위치: 강원도 춘천시 신매3리
부지면적: 대지 2백40평(별도의 밭 3천평)
입지조건: 의암호변 자연녹지지역
건물형태: 조적조 2층집
시공: 호반건설
건축시기: 92년
건평: 49평(1층 31평, 2층 18평)
실내구조: 1층 방3, 화장실 2, 거실, 주방 2층 방2, 거실, 화장실
방위: 남향
총건축비: 9천만원
벽체구조 및 외벽마감: 적벽돌, 블럭
단열재: 스티로폼 100mm
내벽마감: 미장후 벽지마감
지붕마감: 아스팔트싱글
난방형태: 심야전기 보일러
식수공급: 지하수
주변 가구수: 60여세대(신매 3리)
주변환경: 의암호 인접
생활권: 춘천(5Km 거리, 승용차 10분 소요)
교통편: 춘천(버스 10회 이상 왕복, 배 오전 4회 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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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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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옹벽 골조, 내부목재 마감 평당27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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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속있는 전원주택
콘크리트옹벽 골조, 내부목재 마감 평당270만원
평당 1백80만원 정도를 계산했던 건축비는 나중에 2백70만원 정도로 수정됐다. 건축은 서울에서 빌라를 전문적으로 시공하는 사람이 지어 빌라분위기가 풍기는데 튼튼하고 실속 있게 지어졌다. 콘크리트 옹벽으로 처리해 내부는 목조주택 형식을 취했다.
최기준 서길자씨 부부는 90년 남편 최기준씨가 병원에 입원하고부터 전원주택에 관심을 갖게 됐다. 퇴원 무렵 의사는 건강을 위해 전원생활 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서씨는 남편 건강을 위하고 청주에 홀로 계신 친정엄마와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전원주택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동안 몇 번이고 모시려고 했으나 도시에서는 못 살겠다며 극구 사양하시던 어머니였던 터라 전원주택으로 옮기면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동산중개소를 운영하는 시누이에게 부탁해 용인시 원삼면 두창리에 농가가 달린 대지 1백43평을 구입했다. 서씨는 이 농가를 리노베이션해 건평 37평의 현대식으로 개조해 청주에 거주하던 친정엄마를 모셔오고 남편과 함께 생활했다.
처음 전원생활을 할 때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외지인이 농가주택을 사서 이사를 하면 모두 투기꾼으로 몰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대였다. 텃세가 무척이나 심했던 것이다.
씨족중심의 신씨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삿짐이 못 들어오게 길을 막는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서길자씨는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했는데 정착하는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씨는 이 곳에서 사는 동안 친정엄마와 함께 텃밭 가꾸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 최기준씨 건강도 어느새 회복됐고 그렇게 그 곳에서 7년 보냈다. 그 곳을 떠나 새로 둥지를 튼 곳이 지금의 여주군 점동면 뇌곡리란 곳이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여주군에 속하지만 생활권은 여주보다 장호원쪽에 오히려 가깝다.
이천에서 3번 국도를 따라 가면 장호원이 나오는데 장호원하면 사실, 경기도와 충북 음성군 감곡면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도가 바뀌는 곳이다. 그래서 에피소드도 많은 지역이다. 80년대 초까지 만해도 이 지역에는 통행금지가 있었지만 다리 건너 감곡으로 넘어가면 통행금지가 없었다. 12시가 가까워 오면 모두들 다리를 건너 여흥을 즐기는 진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뇌곡리에서 뇌곡초등학교 뒤 하천을 따라 골짜기로 오르면 오갑산을 타고 1급수가 흘러내리는데 다슬기와 가재가 아직도 서식하고 있다. 개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개울옆 야산을 끼고 집 세채가 나란히 사이좋게 서 있다. 한집은 여주에서 이사 온 사람이고 가운데집은 서길자씨가 동서에게 주려고 지은 집이다. 그리고 아래쪽 집이 최기준 서길자씨 부부가 사는 집이다.
이들 부부는 당초 평당 1백80만원 정도로 평범한 집을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계획을 세우고 집을 지으려고 보니 욕심이 났다. 이왕 지을 바에야 잘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당 1백80만원 정도를 계산했던 건축비는 나중에 2백70만원 정도로 수정됐다. 대지는 1백20평과 밭 3백53평 등 모두 4백73평에 이른다. 1층은 47평으로 방 2개와 거실, 주방, 욕실이 있고 2층은 10평 규모이며 지하는 22평이다. 건축은 콘크리트 옹벽으로 처리했고 내부는 목조주택 형식을 취했다. 건축은 서울에서 빌라를 전문적으로 시공하는 사람이 지어 빌라분위기가 풍기는데 튼튼하고 실속 있게 지어졌다.
서길자씨와 최기준씨는 각각 초등학교 양호교사와 중학교 서무과장을 지냈다. 당초 계획보다 3년정도를 앞당겨 명퇴신청을 했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늘 전원생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전원주택 관련 신문기사를 모조리 스크랩하고 잡지와 관련 서적도 거의 다 구입해 몇 번씩 읽어볼 정도였다. 또 주말마다 전원주택지를 찾아다녔고 방학 때에도 틈만 나면 도시락을 준비해 경기, 강원, 충청 등지를 돌아보았다.
젊어서야 몰라도 이제부터는 넉넉한 시골생활이 더 좋을 것이란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오며 노후를 대비한 준비를 진행해 왔던 것이다. 앞마당에서 잔디를 다듬는 부부의 모습이 넉넉해 보인다. 田
글·사진 / 류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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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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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성지가 있는 마을에 지은 목조주택 “집짓던 중 업체 부도로 고생 많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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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 국도따라 전원주택따라
안성에 지은 집
미리내성지가 있는 마을에 지은 목조주택 “집짓던 중 업체 부도로 고생 많이 했어요”
수원에서 자영업을 하는 강훈규씨는 전원주택을 짓기로 마음먹고 3년동안 구상을 했다. 어느 곳에 어떤 집을 지을까? 그러다 안성의 양성면 노곡리를 택해 내려와 부지 2백50평 연면적 47평의 목조주택을 지었다. 이곳을 택한 것은 우선 사업장이 있는 곳에서 1시간이내라는 것이며 평수도 두 부부와 아들, 딸 네가족이 살기에는 가장 적당하다는 계산에서 정했다.
용인에서 평택으로 행하는 45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안성군 양성면을 지나게 된다. 이곳 양성면의 외진 곳 얕은 골짜기에는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신부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미리내성지가 있다.
도로에서 미리내성지로 드는 진입로변에는 숲으로 우거진 아늑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수원에서 24시 편의점을 운영하는 강훈규씨가 이곳 마을에 내려와 집을 지은 것은 작년이다. 그는 평소 전원주택에 관심이 많아 그동안 관련 책들을 사보며 공부를 많이 했다. 그러다 3년전부터 전원주택짓기에 대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아내와 함께 전국의 잘 지었다는 전원주택들을 찾아 다니며 구경도 하였고 마음에 드는 땅을 찾아 여러 곳을 쫓아 다녔다. 그러다 만난 곳이 이곳 양성면 노곡리 마을이다. 강훈규씨가 집지을 터를 마련하면서 가장 신경쓴 부분은 사업장이 있는 수원과의 연계성이었다. 수원에서 한시간 이내에 닿을 수 있는 곳에 집을 지어야 사업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지역은 용인이었으나 마음에 드는 곳은 가격이 이미 많이 올라 있어 경제적인 부담도 컷고 또 투자적인 측면에서도 이득이 없을 듯 했다. 그래서 용인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인 안성을 찾게 되었다. 안성은 용인의 인기에 눌려 이렇다할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지역이지만 주변경관도 좋고 가격도 용인과 비교해 평가절하된 지역이 많았다.
그렇게하여 재작년에 노곡리 마을 한쪽의 준농림지 2백50평을 평당 16만원에 구입했다. 이렇게 작은 평수의 땅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평수의 땅을 필요로 하는 크기만큼 잘라서 파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용허가를 받아 총 47평을 짓기로 하고 지금은 부도나 사업을 하지 않는 통나무주택업체와 평당 2백80만원에 건축계약을 맺었다.
부지 2백50평에 47평크기의 주택은 강씨 부부와 아들과 딸 등 네가족이 살 공간으로 가장 적당하다는 판단에서 정했다. 욕심이 앞서 너무 큰 평수의 땅을 구입하거나 집을 지어 입주후 힘들어 하는 경우를 보았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실속있고 경제적인 전원주택을 염두에 두었다.
그렇게하여 IMF가 막 시작되던 작년 1월 건축을 시작했다. 나름대로 철저하게 준비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건축을 시작하고 나니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고생도 많이 했다.
우선 시공업체를 잘못 선정한 것이 문제였다. 선정한 업체는 자금사정이 안좋아 부도직전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업체는 현장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건축계약을 할 때 이행보증보험을 받아두었지만 불안했다.
이행보증보험은 대한주택보증(주)(건설공제조합이 바뀜)나 보증보험회사에서 취급하는 보험상품으로 업체에 주택시공을 맡겼다 마무리 짓지 못할 경우 손해를 보장해 주는 제도다. 이런 안전장치를 미리 해두었는데도 IMF로 인해 많은 피해를 봤다. 특히 캐나다산 목재를 자재로 썼는데 환률이 인상되면서 부담이 커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공업체는 중도에 부도가 나버렸고 그래서 강훈규씨 본인이 현장소장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직접 집짓는 것을 챙기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좀 더 좋은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애초에는 데크를 생각지 않았다가도 데크를 시공했고 내부도 석고보드로 마감하려 계획을 했으나 원목으로 바꿨다.
이렇게 하다보니 애초 건축비를 2억2천만원 생각했으나 2억6천만원이 들었다. 강훈규씨 가족은 현재 수원에 살고 있다. 가족들은 이따금 이곳을 이용하지만 강훈규씨는 매일 내려온다. 그가 편의점 일을 끝내는 시간은 새벽이다. 이 집을 짓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 집을 짓고 부터는 새벽에 이곳으로 내려와 집도 가꾸고 텃밭도 돌본다.
여러모로 그는 이곳에 집짓기를 정말 잘하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나서 두 부부만 적적하게 사는 모습들을 많이 보는데 강훈규씨는 이런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것같아 매우 흡족하다.
아이들이 이곳 집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이들이 결혼해 분가하여 살아도 주말이나 휴일을 택해 놀러오듯이 이 집을 다녀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한다. 그래서 2층은 아들과 딸의 방을 각각 하나씩 꾸몄다. 나중 결혼해서도 다녀갈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에서 신경을 많이 썼다.
이 집을 짓기위해 강훈규씨는 3년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손수 땅을 사고 전용허가를 받았다. 시공업체에 건축을 맡겼으나 중도에 부도나는 바람에 직접 현장을 챙겼다. 이렇게 집을 짓고 나니 그는 집짓는 일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그래서 전원주택을 짓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처음서부터 끝까지 자문을 해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田
글·사진 / 김경래
미리내 성지 매년 9월 현양대회에 참배객 3~4만명
안성시 양성면에 있는 미리내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였다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천주교 박해때 신자들이 숨어살던 곳으로 1895년 천주교회당이 설립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후 1896년 강도영 신부가 부임해 현재의 돌성당을 건축했다.
1976년 6성모성심수도회에서 성지관리 및 개발책임을 맡아 25만평의 부지에 수도원, 수녀원, 피정의 집, 예수수난 14처상, 겟세마니 동산을 건립했다. 맞은편 계곡에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치된 묘역이 있다. 연중 순례객들이 끊이지 않으며 특히 매년 9월 현양대회에서는 전국에서 3~4만명의 참배객이 모인다.
미리내성지로 가기 위해서는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안성나들목에서 공도면 소재지를 거쳐 18번지방도를 타고 양성면 소재지를 지난다. 그리고 용인 방면 45번 국도를 따라 장서리에서 미리내로 직진하면 된다. 또 영동고속도로 용인나들목에서 내려 남쪽 45번 국도를 따라 13㎞쯤 달리면 용인을 지나 송전(이동)삼거리가 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45번 국도와 헤어져 좌회전하면 미리내 성지에 갈 수 있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남부터미널이나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안성까지 이동한 후 시내버스를 타면된다. 안성까지 버스로 1시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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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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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는 벽돌, 내부는 목재로 마감 60평 농가주택을 평당 2백17만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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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 국도따라 전원주택따라
진천에 지은 집
외부는 벽돌, 내부는 목재로 마감 60평 농가주택을 평당 2백17만원에
해당 관공서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전용허가를 신청하기까지는 수월했으나 진입로 문제는 땅 주인들과의 이해관계가 얽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다행히 고향 친구들의 도움과 중재로 결국은 원만히 해결됐지만 당시엔 포기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진천에서 안성 입장방향 34번 국도를 따라 가면 백곡저수지가 나온다. 80년대부터 낚시인들의 발길이 분주히 오갔던 지역이기도 하고 전원주택 바람이 불 때도 관심과 이목이 모아졌던 곳이다.
진천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 이름 난 곳인데 ‘생거진천'이란 말이 이 같은 명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선 여기저기 공장이 들어서 주변환경이 예전과 같지 않고 그래서 ‘생거진천'이란 말도 옛말이 돼버린 느낌이다.
굳이 꼽는다면 백곡면, 초평면 정도가 명맥을 유지하는데 이들 지역은 비교적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지역이다. 이런 이유로 지가도 주변에 비해 다소 높게 형성됐다. 나병근씨가 살고 있는 곳은 백곡저수지 상단 면소재지 이르기전 야트막한 산 중턱이다. 풍수지리 상으로 보면 삼태기형 지세로 산을 등지고 시야도 멀리 앞산 너머까지 이른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진천군 백곡면 사송리에 속한다.
나병근씨는 89년 퇴직 이후를 대비해 평당 3만원씩 주고 준농림답 1천2백평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 뒤인 95년 2백평을 대지로 전용해 이 집을 지었다. 연건평은 모두 60평으로 1층이 45평, 2층이 15평이다. 1층에는 방 2개, 거실, 화장실 2개, 다용도실이 있고 2층에는 방 하나와 화장실이 있다. 콘크리트 옹벽으로 처리했고 외벽은 벽돌, 내부는 목재로 각각 마감했다. 외부 분위기와 달리 내부는 목재로 마감해 고급스런 분위기를 연출했다. 95년 4월 착공에 들어가 4개월만인 8월에 완공했다.
자재는 나병근씨의 동생이 건설회사에 근무하고 있어 좋은 자재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총 공사비는 1억3천만원이 들어 평당 2백17만원 정도가 든 셈이다.
완공후에는 주위사람들로부터 튼튼하고 단아하게 잘 지어진 집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이 정도 지으려면 평당 3백만원은 들었을 것이란 게 주위의 얘기였는데 그만큼 싸게 지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집을 짓기로 마음을 먹고 완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었다. 당초 집 짓는 것 자체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으나 진입로 문제로 한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해당 관공서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전용허가를 신청하기 까지는 수월했으나 진입로 문제는 땅 주인들과의 이해관계가 얽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다행히 고향 친구들의 도움과 중재로 원만히 해결됐지만 당시엔 포기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나병근씨는 현재 가족과 떨어져 혼자 이 곳에서 지내고 있다. 자영업을 그만두고 이제는 고향인 이 곳에서 논 다섯마지기와 밭 2천평을 경작한다. 가족들과는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학교 문제로 아직 내려올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곳에 들어온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이제는 오리식구들도 30마리로 늘어 제법 일 거리가 됐다. 잔디도 가꾸고 오리도 키우며 옛 친구들 만나는 고향에서의 시골생활이 나병근씨에게는 즐거운 일상이다.田
글·사진 / 류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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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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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동료 다섯이 모여 만든 양평 국수리의 거북마을 묘지 위에 지은 네채의 스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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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인 주택 만들기
직장동료 다섯이 모여 만든 양평 국수리의 거북마을
묘지 위에 지은 네채의 스틸하우스
직장동료 다섯명이 모였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시작만 하면 그저 끝날 것이란 뱃장으로 집짓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손수 현장일까지 챙겨가며 고생한 결과 네채의 집이 탄생했다. 그리고 봄꽃들이 만발한 화창한 봄날을 택해 이사를 했다. 동호인 중 한명은 나중에 집을 짓기로 하고 우선 조립식주택을 지어 주말주택으로 이용하고 있다. 양평 국수리의 거북마을, 땅의 모양이 거북의 등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동호인 단지에 지은 네채의 스틸하우스를 소개한다.
■ 글 / 김경래 사진 / 김경래, 류재청
전원의 꿈을 품고
"같이 집짓고 같이 살면 어떻겠어?"
애초에는 세명이 모였다. 김현중, 박동준, 서창교 이들 세 명의 총각사원은 광고회사의 입사동기로 비슷한 생각,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어 의기투합을 했다. 시도때도 없이 만나 소주를 마시고 그럴때면 세상이 안주가 되기도 했고 더러는 회사가 안주가 되었다.
그렇게 소주와 안주만으로 시간을 죽이기에는 자신들의 젊음이 너무 뜨거웠고 게다가 그동안 닦은 큰 배움(大學)도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말대로 거추장스런 지식만 연소시키지 못하고 부담스레 짊어지고 있다는 그런 회의가 생기기 시작할 즈음 셋중 누군가가 목청을 가다듬어 제안을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맹숭맹숭 만날 수는 없지 않은가? 거사 때 자금이 필요할 지도 모르니 지금부터 월급에서 각자 얼마씩 털어 적금이라도 들어놓는게 좋겠어."
“좋아 좋아…" 셋은 소주잔을 앞에 놓고 극비의 자금모의를 했다.
그후 시간은 바람과 같이 흘렀다. 김현중은 영어교사, 박동준은 소아과 간호사, 서창교는 수학교사와 그럴듯한 연애를 하고 장가도 가고 그리고 자신의 염색체를 나눈 또다른 가족도 생겼다. 덩달아 적금 탈 때도 되었다.
그런데 걱정이 생겼다. 막상 거금을 모아놓고 나니 그들을 기다려주는 거사는 없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야 영웅이 나는 법인데 ‘문민정부'의 태평성대는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세상은 그들에게 거사의 명분을 좀처럼 제공하지 않았다. 명분없이 나서면 민심을 잃는 법.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서글픔을 한타래씩 풀어 한동안 소주만 마셨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또 누군가가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닌 듯 하이.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모은 자금을 어디다 숨겨 놓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어."
“그럼 스위스 은행까지 갈 필요는 없을까?"
그때 김밥재벌의 꿈을 키우고 있던 박동준이 입을 열었다.
“땅덩어리가 좁은 대한민국에선 그래도 땅에 묻어두는 것이 최고란 생각이 드는데… 땅을 사두는 것이 어떻겠어?"
“좋아 좋아…"
내친 김에 박동준은 자신의 속내를 내보였다.
“그러지 말고 우리 땅을 같이 사서 그곳에 함께 집을 짓고 살면서 후사를 도모하는 것은 어떻겠어?"
셋은 모두 기막힌 생각이라며 손뼉을 쳤다.
“좋아 좋아…"
그렇게 하여 셋은 멀리 한강의 강바람이 씻겨가는 양평의 언덕배기를 찾게 되었다. 거북의 등모양을 한 땅. 일제시대에 이미 명당자리로 점지되어 임금이 난다는 소문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묘지로 도장이 찍혀 있는 땅에 이들은 집을 짓기로 마음먹고 그 언덕배기 위에서 셋은 다짐을 했다. 이곳에 우리들과 우리의 후손들이 백년이고 천년이고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갈 우리들의 도읍을 정하겠다고…
땅은 마련했는데
거북 등을 닮은 땅 1천98평을 평당 25만원에 구입
막상 전원주택을 짓기로 하고 땅을 결정했지만 구입하기에 셋에게는 너무 큰 땅이었다. 그래서 자신들과 생각을 같이할 수 있는 전원스런 동지를 찾아나섰다. 그것이 96년 7월의 일이었다.
직장 선배인 박정래 부장을 포섭대상으로 삼아 곰탕집으로 불러냈다. 멀리 긴 강이 흘러가는 양평의 넉넉한 마을 끝자락에 있는 언덕배기의 거북 등껍질을 닮은 명당지, 서울서 한시간정도 거리에 있고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져 있는 곳… 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박부장은 대답을 했다.
“그래 좋아. 같이 해보자."
“에이 어쩐지 너무 심심하네요. 형이 그렇게 빨리 결정해 버리니까… 근데 형 잘 결정했어요. 형도 가보면 깜빡할 거예요. 정말 좋은데라구요. 한 번 멋진 신세계를 열어보자구요."
동지가 한명 더 생기자 탄력이 붙었다.
곧바로 땅을 계약하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땅을 사겠다고 하니 땅주인이 한발 물러섰다. 애초 평당 19만원 얘기하였는데 21만원을 요구한 것이다. 동지들끼리 머리를 맞댄 후 그 가격이라도 사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주인은 또다시 25만원을 요구하여 결국 평당 25만원에 1천98평의 땅을 매입했다. 진입로가 없어 20평은 평당 35만원에 별도로 추가 매입했다. 여기에 부동산 중개 수수료로 4백만원이 추가되어 부지매입에 총 2억8천5백50만원 들었다.
개인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한사람이 더 필요했다. 백지장도 다섯명(?)이 들면 더 가벼워진다는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또다시 포섭작전에 나섰다.
김현중 동지와 같은 팀에 있는 김창렬 차장이 물망에 올랐다. 안사람이 삼성강북병원 의사인 그가 국수의 땅을 다녀온 후 의기투합했다. 단 곧바로 집을 짓지는 못하고 좀 기다렸다 짓겠다는 조건이었다. 다섯명의 동지가 모이자 무서운 것이 없었다. 8월 2일 계약금, 9월 2일 중도금 그리고 10월 15일 잔금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가구당 5천7백1십만원이 들었다.
남들은 제비뽑기를 한다고도 하는데 이들은 자신의 집터를 정할 때 직장의 최고참인 박정래씨의 의견을 따랐다. 부지의 가운데로 길을 내고 우선 박정래씨 자신이 문간을 선택했다. 단지의 초입에 자신이 살면서 단지를 지키는 문지기가 될 것을 자청하였고 나머지 동지들의 집터도 정해주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현중이는 맨아래 그 옆은 시간을 두고 나중에 집을 지어야 할 창렬이, 단지의 가운데는 동준과 창교가 사는 것이 좋겠어."
“좋아 좋아 …"
그렇게 불만 하나 없이 각자의 집터는 정해졌다.
어떤 집을 지을까?
수많은 방황 끝에 내린 결론 스틸하우스
땅은 이제 내것이 되었다. 한고개를 넘으니 또 고개가 나왔다.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그것이 고민이었다. 아는 것은 힘이다. 한수 배우기 위해 전원주택에 대해 한자락씩 한다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 모두들 자신이 최고라며 자랑만 늘어졌다. 요구하는 비용도 천차만별이었다. 누가 천사고 누가 늑대인지 구분이 안되었다. 그곳은 한눈을 팔다가는 아차하는 순간 잡혀가기 딱 좋은 정글속이었다.
각자 분야를 나누어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 통나무주택, 2×4목조주택, 조적조, 스틸하우스 등 각자가 스터디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토의한 결과 스틸하우스가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 와중에 해를 넘기고 97년을 맞았다. 새해 2월 15일 스틸하우스 시공업체인 H주택을 만났다. 그들의 사무실을 방문하면서 스틸하우스로 짓겠다는 결정은 굳혀졌다. 게다가 H주택은 토목 및 설계에 두루 능하며 경험도 가지고 있다 했다.
특히 H주택은 최초의 스틸전원주택단지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저렴한 건축비로 정성을 다해 지어주겠다며 적극성을 보였다. 그렇게 집지을 사람을 찾아 다니던 중 자신들이 그토록 아껴 사두었던 땅, 거북의 등껍질이 벗겨지는 사고가 났다. 동네 사람이 표고버섯을 재배하겠다는 욕심으로 부지에 있던 참나무를 새주인들의 허락도 없이 몽땅 베어간 것이다. 속들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외지인의 죄값(?)을 치르는 셈치고 참았다.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빨리 집을 지어 입주하자는 다짐만 서로 확인했다. 곧바로 경계측량과 현황측량에 들어갔다. 시공업체 선정을 서둘렀다. H주택과 또다른 업체 등 두 개의 스틸하우스 시공업체가 최종심에 올랐다.
두업체를 놓고 구체적인 평가에 들어갔다. 평가항목은 인허가, 토목, 건축, 경비, 민원, 신뢰도, 일정준수, 설계 및 감리, A/S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항목별 20점, 총 180점 만점으로 하여 점수를 매겼다. 그결과 H주택이 148점으로 점수가 높게 나왔다.
4월 16일 H주택과 전체 공사금액 5억원에 계약을 했다. 6월 1일 건축신고에 들어가 9일부터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0월 26일 토목공사가 완료되었고 일부 스틸작업도 완료되는 등 공사는 잘 진행되어갔다.
그런데 IMF로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히면서 거북마을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공사가 지연되는 일이 생겼다. 자재 수급에도 문제가 생겨 도급공사계약도 변경해야 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애초 생각했던 건축면적에서 각자의 취향에 따라 면적도 늘어났다.
애초 97년 11월 30일 입주계획이었던 일정도 98년 4월 25일로 약 6개월정도 연장해야 했다. H주택의 요구로 공사금액을 5억3천6백65만원으로 올려 계약을 변경했다. 해를 넘기면서 H주택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현장에도 문제가 생겼다. 결국 98년 3월 14일 H주택으로부터 공사포기 각서를 받았고 며칠후 H주택은 부도가 났다.
26일자로 도급계약의 해제를 통보한 후 직접 나서는 길밖에 없었다. 다행히 H주택의 이해수 현장소장이 집을 책임지고 마무리 지어주겠다 하여 안심은 되었으나 모든 것을 직영처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동호인 개인들의 신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다들 열심히 다니고 있는 회사는 IMF로 인해 경량으로 구조를 조정한다며 난리법석이었다. 동료들이 하나둘 목이 잘려 나갔다. 그런 살기등등한 회사분위기 속에서도 박정래 부장은 국장이, 김현중, 서창교씨는 차장이 되는 등 거북터의 사람들은 명당의 지기때문인지 숙청의 피바람이 비켜갔고 오히려 승진들을 했다.
박정래 씨는 집이 완성될 때까지 살겠다는 생각으로 아예 국수리의 월세집을 얻어 거처를 옮겼고 박동준 씨는 순전히 자의로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꿈에도 그리던 김밥체인점 사장이 되었다. 게다가 다들 빠듯한 예산으로 집을 짓다보니 자금마련에 그야말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그렇잖아도 신경 쓸 일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현장까지 챙겨야 하니 머리숱은 점점 줄어들었다.
화창한 봄날 봄꽃의 빵빠레를 받으며 드디어 입주
그동안 최고로 잘 나가는 광고회사에서 폼나게 살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건축공사장의 현장소장이 되었다. IMF의 농간이었고 작게는 시공회사를 잘못 선정한 책임이 고스란히 거북마을 사람들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일일작업일지를 쓰고 작업공정들을 점검해야 했다. 현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피곤했다. 박정래씨 가족은 아예 국수리로 이사를 했다. 국수리 마을 사람들과도 꽤 친해져 도움을 주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큰 무리없이 단지의 모양이 서서히 갖춰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완성된 집은 단지의 파수꾼 박정래 씨 집이었다. 근처에 처자식까지 데려와 살면서 시위를 하고 있으니 가장 빠를 수 밖에…
박정래씨는 5월 20일 집의 마루와 장판을 깔고 23일 드디어 입주를 했다. 초록 봄볕이 거북의 등껍질을 두툼하게 감싸던 화창한 봄날을 택해, 봄꽃들의 빵빠레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거북마을로, 꿈에도 그리던 전원주택으로 박정래씨 가족은 이사를 했다.
며칠후인 5월 30일 김현중씨 가족이 그리고 6월 2일 서창교 씨, 6월 5일 박동준씨 가족이 차례로 입주를 했다. 박정래씨 부부와 아들 딸, 김현중씨 부부와 노부모 그리고 아들 딸, 박동준씨 부부와 아들 딸, 서창교씨 부부와 아들 딸, 짜맞춘 듯한 가족 18명이 거북마을 주민이 되었다.
집들이에서부터 가족행사까지 서로 챙기고 그럴 때마다 집을 벗어나 마을로 나서는 크고 작은 웃음소리들. 단지는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살아보니 더 좋았다. 집의 평면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다 수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래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늘 불만이지만 스틸하우스 자체는 만족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집평면의 구조조정을 단행할 생각이다. 벽난로도 만들고 공간도 좀 더 효율적으로 꾸밀 생각이다.
거북마을에서 크는 애들은 단지의 모든 집이 자기집인양 몰려 다니며 한바탕씩 소란을 피우고 그런 소란함 속에서 텃밭에서는 옥수수며 토마토가 애들과 같이 익어간다. 정원에는 붉은꽃, 노란꽃, 하얀꽃들이 올해는 많이 피었다.
올 여름엔 유난히 더웠다는데 이곳 바람은 무척이나 시원했다. 매미소리도 유난히 맑았다.田.
■ 묘지에 전원주택 짓기
전원주택은 대지와 농지전용, 임야형질변경을 통해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잡종지나 특수지목 중 묘지, 유지 등의 경우에도 전원주택 건축이 가능하다.
묘지에 전원주택을 지으려면 우선 묘가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현장사진을 촬영해 두고 신문에 묘지 이장공고를 게재한 후 건축신청을 하면 된다. 이 경우 농지나 임야와는 달리 전용허가와 같은 절차와 개발부담금, 대체농지조성비 등이 없어 시간과 비용면에서 이득이다.
단 묘지의 경우 보통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 많으므로 주변보다 땅값이 비싸다.
■ 거북마을을 만든 사람들과 업체들
발의: 박동준(산들김밥 대표), 서창교(제일기획 차장), 김현중(제일기획 차장)
현재주인: 박정래(제일기획국장), 김창렬(제일기획 부장), 박동준, 서창교, 김현중
부지중개: 성기호(우신중개사무소 대표), 박화서(상록수공인중개사 대표)
건축: H주택(3월 17일 부도), 직영(이해수 소장)
설계: 다우SPC, 아키인
슁글: 창운산업
설비: 박래선
전기: 청한전기
도장: 강동상사
외장: 혜암건업
AL: 대명산업
조명: 우진조명
보일러: 한진
지하수: 이완배
토목: 국일중기
가구: 이해수
유리: 대성유리
온돌마루: 유송산업
시트: LG 아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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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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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4년만에 농가주택짓고 농지도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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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국도따라 전원주택따라
괴산에서 만난 사람
귀농 4년만에 농가주택짓고 농지도 마련...
올해로 귀농한지도 벌써 4년째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완전한 농부의 모습으로 탈바꿈했으며 올 들어선 영농후계자로 선정되는 기쁨도 맛보았다. 영농후계자로 선정돼, 지원 받은 영농자금으로는 1천8백평의 논도 구입했다. 처음으로 임철오씨 이름의 농지를 마련한 것이다.
막상 귀농을 결심하고 아내에게 처음 얘기를 꺼내던 날, 두 사람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가 흔쾌히 동의해 줄 것이라고는 애초부터 생각지 않았으나 귀농에 대한 부부간의 생각차이가 의외로 컸다.
처가쪽 반응도 만만치 않았고 본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본가에서는 서울집까지 찾아와 절대로 내려오지 마라며 귀농을 말렸다. 그러나 임철오씨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젊은이의 역할이 중요하고, 농업도 열심히만 하면 회사 생활보다 나을 수 있다고 꾸준히 설득했다. 한동안의 소란을 거쳤지만 주위의 반대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짐을 꾸려 시골로 향했다.
음성에서 516번 지방도로를 따라 괴산을 가다보면 목도강 닿기 전에 앵천리란 곳이 있다. 도로 옆에는 음성천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멀리 월악산 정상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괴산군 불정면 앵천리가 임철오 홍정의씨 부부의 귀농 보금자리다.
올해로 귀농한지도 벌써 4년째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완전한 농부의 모습으로 탈바꿈했으며 올 들어선 영농후계자로 선정되는 기쁨도 맛보았다. 영농후계자로 선정돼 지원 받은 영농자금으로는 1천8백평의 논도 구입했다. 처음으로 임철오씨 이름의 농지를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부부가 귀농에 성공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95년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이 곳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누구하나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고 부모님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들은 동네사람들 보기 창피하다며 마실도 한동안 가지 않았다고 한다. 동네사람들 반응도 마찬가지 였는데 '머잖아 다시 서울로 다시 갈 사람들'이라며 쉽게 정을 주지 않았다. 요즘 말로 ‘왕따' 였다.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아내 홍정의씨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대학까지 마쳤던 아내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며 농사일에 모든 것을 바쳤다. 부모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시작했다. 손에 물집이 생기는 일은 다반사였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참고 견디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
그러기를 2년. 두 해가 지나자 비로소 서울티가 벗겨졌다. 피부는 까맣게 그을렸고 옷차림도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이다. 어느새 동네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됐다. 그리고 농가주택을 지을 수 있는 자격도 부여됐다.
임철오씨 부부는 5.5%짜리 5년 거치 20년 상환 조건의 주택자금 1천6백만원을 융자받아 집을 짓기로 했다. 서울서 내려올 때 가져온 전세자금, 그리고 그동안 모은 약간의 돈을 합쳤다. 집 모양은 곤지암에서 보았던 한 방송인의 집에서 힌트를 얻었다.
콘크리트 옹벽을 치고 내외 벽면엔 태안 반도에서 생산되는 옹기 벽돌로 외장 마감을 했다. 보통 벽돌 보다 4배나 비싼 장당 8백원씩 주고 구입했다. 건평32평 단층에 방2개, 화장실, 거실, 주방 그리고 15평정도의 창고도 만들었다. 건축비는 평당 2백만원 정도로 모두 6천4백만원 정도가 들었다.
번듯한 거처가 마련되자 모든 것이 안정됐고 농사일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4년째에 접어들자 제법 경작 면적도 늘었다. 그동안 경작했던 4천평의 논에 올해 마련한 1천8백평이 더해져 모두 5천8백평의 논농사를 짓게 됐다. 게다가 1천평의 고추 농사와 함께 인삼도 2천평이나 심었다. 만만치 않은 노동력을 요구하는 면적이다.
인삼은 1평을 1칸으로 보는데 1칸당 3~6만원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수익성이 괜찮음에도 초기 비용이 많이 들고 3~5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서 쉽게 인삼에 손대는 농민들이 드물다. 하루하루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시간이 흘러간다. 지난 4년간의 세월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땅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됐고 이제는 땅을 떠나선 살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귀농이후 한달이 멀다하고 서울에 다니러 가던 아내 홍정의씨도 이제는 서울행 발길이 뜸해졌다. 농촌 일손이 바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시골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임철오씨 부부는 농촌도 열심히 하면 도시생활보다 나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도시생활보다 더 부지런해야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田
글·사진 / 류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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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