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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원일기] 강상면 일곱 마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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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원일기
강상면 일곱 마을 이야기
세월리로 내려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되었다. 그동안 마을 주변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또 마을 어른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 이 마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쥐꼬리만큼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고, 가 본 곳보다는 가 보지 못한 곳이 더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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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살지도 않아 세월리에 대하여 다 알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듯이, 마을의 겉모습만 보고 그 마을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세월리의 참모습을 보기 위한 첫 단계로 세월리의 주변 이야기부터 하기로 한다. 그림을 그릴 때 현실감이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원근법을 쓰듯이, 주변의 이야기에서부터 중심의 이야기로 이동하는 것도 세월리를 더욱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세월리는 양평군 강상면에 있다. 양평군은 1908년 양근군과 지평군이 합쳐져 양평군이 되었다. 그 당시 강상면은 남시면(南始面)으로, 현재의 강하면인 남중면(南中面), 1914년 광주군으로 이속된 남종면(南終面)과 더불어 남한강 남쪽에 있는 3개 면을 이루었다.
그러고 보면 남시면이란, 양평군의 남쪽 시작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다. 실제로 광주의 곤지암 방면이나 여주의 이포 방향에서 올 때, 남한강의 남단에서 만나는 첫 마을이 바로 대석리와 세월리로 남시의 의미가 살아 있는 곳이다.
이러한 강상면은 북쪽으로부터 병산리, 송학리, 교평리, 신화리, 화양리, 세월리, 대석리 등 7개 동리가 양자산 줄기와 남한강 사이를 따라 거의 일직선으로 놓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제일 북쪽에 있는 병산리는 백병산 밑의 마을이라는 의미로 강하면과 접경해 있으면서 양평읍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백병산은 양자산이 남한강 쪽으로 뻗으면서 형성된 산인데, 이 산을 중심으로 골짜기마다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농업을 주로 하지만 현재에는 마을 앞을 지나는 88번 도로를 따라 발달된 상업에도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병산리에는 고려 초기 석물인 돌거북상이 있다. 이 돌거북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삼한을 통일할 때, 이 고장 출신인 함규 장군의 전승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 상은 높이 1.24미터, 길이 2미터, 폭 1.4미터로 고려 초기 석조물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동요인 《반달》의 작곡가인 윤극영 선생의 묘소가 있으며, 더 멀리로는 조선왕조 선조의 딸인 정근옹주의 묘와 광해군 때 벼슬을 지낸 김이원의 사당과 신도비가 있다.
송학리는 병산리에서 양자산 골짜기로 들어가 있는 마을로 양자산과 백병산 사이에 있으며, 송산리와 학곡을 합친 이름이다.
이곳에는 예부터 유명한 구사곡(九寺谷) 약수터가 있는 마을이다. 구사곡이란 구절골로도 불리웠는데, 양자산과 백병산 사이에 있는 아홉 골짜기마다 절이 있는 데서 유래하였다. 약 600여 년 전에 지어진 사찰들로 알려진 이 절들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으나, 이 골짜기에서 나오는 약수는 그 효험이 아직도 많이 알려져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송학리에는 오이와 팽이버섯 작목반이 있어 농가 소득을 높이는 데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강하면 성덕리로 넘어가는 곳에 길마재라는 고개가 있다.
교평리는 교암과 평리를 합친 이름이며 강상면의 소재지다. 양평대교를 건너면 바로 닿는 곳이 교평리인데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농협 등이 있어 이 면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교평리에도 표고 작목반이 있어 특수작목 재배가 활기를 띄고 있는데, 송학리에 있는 팽이버섯 재배와 더불어 양자산과 남한강이 어우러져 형성되는 신선하고 맑은 공기와 환경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곳에는 강가에 봉의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이 정자는 조선시대 윤승훈이 지었다고 한다.
신화리 신당리와 내생화를 합친 이름이며, 양자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서 교평리에서 양자산 쪽으로 약 15분 정도 걷는 거리에 있다. 이곳에는 약 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강상초등학교가 있다.
지금까지 약 43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강상초등학교는 충효예를 강조하는 인성교육과 가정보다 더 좋은 학교 환경 조성에 그 교육적 특성을 두고 지역사회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 육성에 교육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평리를 지나 곤지암 방면으로 가는 강기슭과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 화양리이다. 화양리는 외생화와 양곡을 합친 이름이며, 대체로 강과 산이 잘 어우러져 있는 곳으로서 볕이 잘 들어 꽃이 환하게 잘 피는 마을이라는 뜻도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조선왕조 시대 명종 때 태어나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봉의정을 지은 윤승훈의 묘가 있다. 그리고 한국방송공사 남한강 연수원이 자리잡고 있는 앞강에는 도러소라는 깊은 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화양리를 지나 짧지만 경사가 꽤 높은 사실고개를 넘으면 세월리다. 그리고 세월리를 지나 왼쪽으로 가면 여주군 금사면이 나오고 오른쪽 방향으로 돌아나가면 대석리가 나온다.
대석리는 대감리와 백석리를 합쳐서 지은 이름이다. 백석리는 흰돌이 많은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대감리는 대감이 살던 곳이라는 이름이다.
그런데 대감리에 대한 유래는 두 가지로 하나는 조선 전기 권근의 후예인 권일신, 권철신 두 형제가 살았던 곳이라는 설과 양근 김씨의 시조인 김인찬이 살던 곳이라는 설이 있다. 어느 설이 정확한지는 기록으로 보아서는 분간할 수 없으나, 이 두 설이 지닌 시대가 400여 년 정도 차이가 있으므로 다 맞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곳에는 지석묘가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마을 입구 100여 미터 전방 밭두렁에 있는 이 지석묘는 모두 6개이며 남방식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 지석묘로 보아 이 주위에는 청동기 시대인 약 3000여 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강상면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강상면의 모든 동리 이름들은 수많이 존재하던 옛 마을들의 이름들을 합친 것이 특색이다. 세월리도 세심리와 월리를 합친 이름이 아니던가. 앞으로 이 옛 마을들의 유래를 찾으면 더 풍성한 역사가 나오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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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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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三道)의 풍광이 만나는 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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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에 살어리랏다
삼도(三道)의 풍광이 만나는 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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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의 꿈이 영그는 자생화마을을 만들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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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을
처음에 만났을 때, ‘펜션을 운영하고 싶다’는 동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마을에서 추진하는 양로원의 신축 비용을 80퍼센트 가량 지원하기로 이미 약속을 한 상태인데다 앞으로 해야 할 봉사활동도 많아서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부인이 서울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버는 소득과 일부 임대소득을 합쳐도 봉사활동을 하기에는 부족하다.
현재 1만 평의 밭에 고추농사를 지어 서울의 지인(知人)들에게 직거래로 팔고 있지만, 일반 출하가격보다 두 배나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득이 600만 원을 갓 넘는 정도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펜션을 운영해 소득이 나면 봉사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강원도와
경상도 사이에서 절묘하게 충청도로 자리잡은 제천. 북으로는 강원도 원주와 영월이 접경이고 남으로 충주호를 돌아 단양팔경을 지나면
인삼으로 유명한 경상도 땅 풍기가 내려다보인다.
부근에는 월악산 조령고개며 박달재가 있고 강원도로는 치악산이 있는 분지의 교통도시다.
제천은 삼도(三道)의 산세를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는 맛에다 자전거로도 어디든 힘껏 달리면 20분도 안 되는 거리에 푸른 강이
사방으로 흐르는 관광의 고장이다.
따지고 보면 팔도의 이름난 산하를 여기에다 모두 모아놓은 듯한 경치는 아마도 제천에서만 볼 수 있을 게다.
내가 대학에 다니려고 도회지로 떠나면서 시작한 객지생활이 벌써 이십사오 년이 지났다.
이제는
도회지에서의 삶이 고향에서의 그것보다 더 길어져서인지 도회지가 완전한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았지만, 그래도 애틋한 낙향에로의 꿈이
커져만 가는 것은 시골에서 나고 자란 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
십삼 년 동안 통나무와 목조주택업의 외길을 걷다가 D.I.Y 통나무 집짓기 학교와 모델하우스를 만들기 위해 낙향한 지도 벌써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전원주택을 지으려고 맨 처음 생각한 곳은 나의 고향인 제천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는 강원도 영월이다.
주소지야 영월이지만 사실 원주시 신림면에서 더 가까운 이곳에 1996년 통나무집 네 채를 지은 황대석 사장과 인근에 유병국박사
댁이 있다.
지금부터 이곳의 경치와 전원주택, 그리고 이 두 분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두 스승님과의 만남
우연히도 나의 아버님과 연세가 같으신 황 사장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철골구조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다.
평생을
그 분야에서만 일하다가 노후에 통나무 주택에서 전원을 벗삼아 살고 있는데, 나는 때때로 회사일로 자문을 구하곤 했고 언젠가 내
회사의 고문이 돼 주십사 부탁드리려고 늘 마음먹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분으로 하여금 그동안 내가 쌓아 온 경력과 세월을 고향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왔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사업만이 아닌 순수한 동기에서 말이다.
꼭 전원주택만이 아니더라도 그는 나에게 인생의 스승이기도 했다. ‘제천시 문학회’ 회원들이나 여러 훌륭한 분들을 소개시켜 주며
나의 무지함을 하나씩 깨우쳐 줄 때마다 진작 이곳에 오지 않았던 자신이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 정도다.
막상 10여 년 이상을 경치 좋고 물 좋은 곳에다 통나무주택과 목조주택을 지으며 살아왔음에도 말이다.
도회지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에 돌아와 가만히 둘러보니 도회지로 나가버린 옛 동창들은 아직도 시내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늦게까지 남아 있던
친구들도 결국 도회지로 모두 가 버렸다고 하니, 그 친구들보다 내가 훨씬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곳은 그가 오랜 세월을 찾아다닌 끝에 찾아낸 땅으로 처음에는 동호인들을 위해 지은 단지라고 한다.
당신의 아들과 나이가 같은 자생화 스승을 모시고 자생화 키우기에 몰두하고 있고, 제천시 문학회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나는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가끔 그 댁에 머무르곤 했는데, 그 때마다 편안하면서도 정열적인 전원생활이 부럽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전원경력(?)은 이미 8년째 접어들었다. 농촌생활이란 것이 소득은 없기에 평생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그도 그간 모은 약간의
돈에 퇴직금까지 모두 다 써버리고, 이제는 취미로 가꿔왔던 자생화와 동산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남아 있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고 한다.
그의 통나무 자생화 단지는 마치 강이 굽이쳐 흐르는 가운데로 섬처럼 솟아 있는 모양새에 뒷산에 마련해 놓은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아늑한 맛이 일품이다.
‘들뫼꽃농원’이라 칭한 이곳은 나중에 자생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자생화 마을을 만들려는 그의 작은 소망으로 손수 하루
200톤이 넘는 지하수를 퍼 올릴 수 있는 시설까지 해놓았다.
들뫼꽃농원에서 빤히 보이는 운천천을 건너면 나지막한 야산 중턱에 유병국박사님 댁이 있다.
그는 의학박사로 내외 모두 의사로서 서울에서 평생을 의료계에 몸담고 있다가 지금은 이곳으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간다.
이분들을
처음에 만났을 때, ‘펜션을 운영하고 싶다’는 동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마을에서 추진하는 양로원의 신축 비용을 80퍼센트 가량 지원하기로 이미 약속을 한 상태인데다 앞으로 해야 할 봉사활동도 많아서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부인이 서울의 병원에서 버는 소득과 일부 임대소득을 합쳐도 봉사활동을 하기에는 부족하다.
현재 1만 평의 밭에 고추농사를 지어 서울의 지인(知人)들에게 직거래로 팔고 있지만, 일반 출하가격보다 두 배나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득이 600만 원을 갓 넘는 정도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펜션을 운영해 소득이 나면 봉사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평생 쌓은 경험과 지식, 재산을 남에게 봉사하는 데 사용하는 이들의 따뜻한 마음에 나는 절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들이야말로 노후의 인생을 가장 멋지게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사를 맡은 나 역시 이 대열에
동참한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했다.
자생화 만개한 꿈의 전원 마을
두 분들의 단지는 운천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다리를 건너면 다가서기 쉽지만, 나는 야산의 등산로를 따라가다 나룻배로
강을 잇는 펜션단지를 구상해 보기로 했다.
설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기로 했는데, 우선 철저히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이들을 위해 마을의 식수를 일단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또한 펜션단지를 가꾸고 소형 주택으로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분을 위해 소소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도 필요했다.
유 박사의 펜션은 건평 200여 평인데 10평과 15평, 20평, 25평으로 각각 나눠 독립형과 메인하우스로 구성하고, 별도로
100여 평의 수변(水邊) 덱(Deck)을 기획했다.
이 부근에는 야외 캐빈사우나와 야생화동산도 기획해 전원생활의 아기자기한 맛을 한층 더 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지금 형질변경과 농지전용이 진행중이고 주문한 핀란드산 통나무가 5월 중순에 부산에 도착하면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다.
전원주택뿐만
아니라 두 분과 함께 나는 ‘통나무 집짓기 학교’도 이곳에서 시작할 예정이다. 이 학교는 통나무집을 내 손으로 직접 지어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간단한 기초지식과 실습을 가르쳐 주는 곳으로 내 평생의 작은 소망이기도 했다.
지금 운천천 변에는 봄을 알리는 온갖 꽃들이 만개(滿開)한 사이로
우리 ‘전원 삼총사’는 앞으로 만들어질 전원마을을 구상하는데 오늘도 머리를 맞대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집을 지었다 허무는 상상에
빠져 있다.
내가 집을 다 지을 때쯤이면 이 두 분은 야생화동산을 완성시켜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전원풍경을 만들어 낼 것이다. 삼도의 풍광이
만나는 이곳 제천변에 우리 세 사람의 꿈이 담긴 전원마을을 말이다. 田
■ 글 강석찬 <유로하우스 대표 043-643-1161, www.kbshome.com〉
■ 사진 김혜영 기자
글쓴이는 충북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고 통나무 목조주택회사 ‘정일품송’을 운영했다. 통나무 개인주택 및 국립공원 내 관공사를
설계했으며, 국내에 펜션형 통나무 키드캐빈과 소형주택을 개발 보급했다. 현재는 펜션 및 테마 기획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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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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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원일기] “그래도 임철승 씨는 나무를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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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원일기
“그래도 임철승 씨는 나무를 심는다”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단순히 식물 하나를 땅에 심는 것이 아니라 자연 사랑과 인간 사랑의 정신을 심고 키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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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숲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 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나무와 숲이 없는 산을 한번 상상해 보자. 그것으로 인해 물질적 곤란을 겪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황폐함이 인간에게 주는 정신적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단순히 식물 하나를 땅에 심는 것이 아니라 자연 사랑과 인간 사랑의 정신을 심고 키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월리에 본격적인 봄이 찾아 왔다. 봄이 오면 꽃들이 만발하는 세상을 그리기도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어떤 나무를 심어야 할까’ 하고 궁리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인 1960년대부터 대대적으로 나무심기 행사를 벌여온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식목일 행사를 꾸준히 한 지가 오래되어 그런지 식목일이 되었는데도 동네가 조용한 것이었다.
하도 이상하여 이장님께 물어보니 연례적인 마을 차원의 식목 행사는 이제 없어진 지 오래고, 다만 상급기관에서 묘목을 주면 마을에서 가끔씩 심는 경우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실 심을 데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내가 의례적인 식목 행사에 길들여져서 그런가, 아니면 이제 누구도 식목 행사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현실이 올바른 것인가. 한동안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국민들 중 40대 이상 정도 되는 사람들은 식목일에 관한 특별한 추억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쯤의 식목일에는 누구나 다 삽과 호미를 들고 학교로 나와 그 주위에 나무를 심었으며, 오후에는 마을로 돌아가 마을 이장들의 선도 하에 너도나도 나무를 심었다.
그렇게 나무를 심는 동안 학교에도 마을에도 ‘내 나무 네 나무’가 자랐고, 모두들 자신들이 심은 나무에 애정을 가지는 동안에 학교 사랑도, 마을 사랑 정신도 스스로 자랐던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식목일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날이다. 역사적으로는 1910년 4월5일 순종황제가 친경제 행사 때에 나무를 심은 사실에서 비롯하여 식목일로 정하였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에는 4월3일로 되었다가 다시 해방 이후 4월5일로 환원되었는데 1949년부터 공휴일로 정해졌다.
또한 자연림이 울창한 남미나 오세아니아, 그리고 북미나 스칸디나비아반도 등의 국가들과는 달리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국토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우리나라의 경우 식목일은 오늘날의 우리 산야가 푸르게 된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말이다.
몇 해 전 산림청에서 개최한 시낭송회에 참가했다가 몇몇 산림 전문가들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식목일과 산림녹화 사업이 없었다면 근대화는 불가능했다고 한다. 대체로 수긍이 가는 이야기였다.
그 중에서도 1962년부터 정부는 체계적인 조림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그것에 관련된 일화 하나가 생각난다.
1960년대 후반 어느 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강릉을 방문한 자리에서 “산들이 왜 저렇게 헐벗고 있느냐”며 그 자리에 참석한 관계자들을 힐책하였는데, 그 소리를 들은 강릉시장이 “동해지방에는 바람이 하도 심해 식목을 한 효과가 반감된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때 박대통령은 “그렇다면 군대식 참호를 파서라도 묘목을 보호해야 한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그 지방에서는 나무 한 그루에 참호 하나씩을 파서 나무를 보호한 결과 오늘날 동해안의 숲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세기에는 독일이 유일하게 산림녹화 사업에 성공한 나라였다면, 20세기에서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산림녹화 사업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불과 삼사십 년 전에 산림녹화에 온갖 정성을 다했던 우리 자신들과 선배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과 정성에서 비롯된 나무 사랑의 정신이 이처럼 쇠퇴하고 만 것인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산림녹화 사업에 성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벌써 그것을 멈출 때는 아니라고 본다.
현재 1헥타르 당 축적을 보면, 뉴질랜드가 125㎥, 일본이 145㎥, 그리고 독일이 268㎥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겨우 63㎥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 중에서 20년 미만의 유년기 나무로 조성된 숲이 40퍼센트이고, 20∼40년의 소년기 숲이 50퍼센트로 전체 숲의 90퍼센트가 유소년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앞으로 적어도 일이백 년 동안에는 꾸준하게 나무를 심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나무와 숲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나무와 숲이 없는 산을 한번 상상해 보자. 그것으로 인해 물질적 곤란을 겪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황폐함이 인간에게 주는 정신적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단순히 식물 하나를 땅에 심는 것이 아니라 자연 사랑과 인간 사랑의 정신을 심고 키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생태 보존이니 자연친화 사상이니 하면서 어느 부문을 막론하고 환경 마인드를 강조하지 않는 데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구호나 슬로건을 외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도 없는 일이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듯 실천적 행동 하나 하나가 결국 그러한 정신을 구현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 심을 데도 없고, 이만 하면 굳이 나무를 심을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이른 속단이다. 그리고 정말 나무를 더 심을 필요가 없다면 나무를 가꾸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도 세월리 사람들이 나무를 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장님 사무실에서 대추나무를 심겠다고 자전거에 싣고 가는 사람도 있고, 자식 교육 때문에 일부러 이 곳으로 이사 온 앞집 임철승 씨가 오늘도 나무를 심고 있는 것이다.
어제는 서울 양재동까지 가서 어린 주목과 소나무 등을 사 와서 아침부터 묘목장에서 정성스럽게 심고 있다.
그렇게 심은 어린 나무들은 동형이와 동완이가 자라 듯 쑥쑥 자랄 것이며, 그리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이 세상을 같이 살아갈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서 말이다.
나무는 자라 숲이 되고 동량이 되듯이, 나무와 더불어 자란 동형이와 동완이는 앞으로 사랑을 나누어주는 천사가 되고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참다운 인재가 될 것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田
■ 글 이기윤<시인,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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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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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에 살어리랏다Ⅱ] 자생화 곱게 물든 산촌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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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에 살어리랏다Ⅱ
자생화 곱게 물든 산촌으로의 초대
이곳에서는 1차로 1000여 평에 수변시설과 편의점을 갖춘 새로운 개념의 펜션과 건축양식이 들어선다. 자연, 건축, 펜션, 테마, 운영에 대한 고민을 함께 풀어 가는 대화와 체험의 장이다. 누구나 편하게 방문하고 상담할 수 있는 펜션 실습운영프로그램과 통나무 주택을 함께 지을 수 있는 D.I.Y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자생화 통나무 주택단지(들뫼꽃농원)와 굽이치는 강줄기를 사이에 둔 영빈관마을(흙으로 만든 고추건조장과 옛 황토집을 영빈관이라 칭함)이 한 테마로 연결된다. 자한루(통나무주택 4동 있음)에서 오솔길을 따라 200여 미터 거닐면 굽이치는 강줄기가 나온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면 수변을 테마로 두산리-운학리를 잇는 펜션·주택단지 벨트가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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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있으면 자연이 그립고 도시를 떠나면 도시에 두고 온 사람들이 그립다”는 CF의 한 구절처럼 자연은 언제나 엄마 품속 같은 곳이다.
‘이제 농촌은 도시인의 삶을 리프레쉬(Refresh)하는 쉼터가 되고 유럽과 같이 도시인의 관광휴양지가 되어야 하는데……’ 하며, 다시 한번 도면을 보고 흐르는 강 앞에서 생각에 잠긴다. 7월 말이면 이곳에 펜션과 소형주택(15, 18, 20, 25, 27평)의 모델이 완성된다. 사계절 색깔을 달리하는 자생화와 어우러지는 통나무 전원주택·펜션단지다. 그 무렵이면 새로운 식구들이 찾아와 산촌에도 활기가 넘쳐날 것이다.
이곳에서 D.I.Y 통나무학교 프로그램과 펜션 모델 및 운영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함께 할 사람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싶다. 10여 년 이상 통나무·목조주택 한 분야만 팠던 노하우(Know-How)를 정리, 재창조하려 한다.
펜션 모델하우스 7월 말 1차 준공
서울에서 가까운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두산리와 운학리는 제천과 원주권에 속한다. 수도권에서 1시간30분 거리로, 영월군에서는 유일하게 인구가 꾸준히 유입되는 지역이다. 운학천(주천강 지류)의 합류 지점에서 굽이쳐 흐르는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두산리와 운학리로 나뉜다. 운학리는 80퍼센트 정도의 외지인이 마을을 형성하는 데, 펜션과 청소년 수련시설이 들어차면서 주말 여행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두산리 5000여 평과 운학리 강변의 1000여 평에 펜션과 테마기획, 휴양형, 주거형 단지를 기획중이다. 전원주택과 펜션 모델하우스 단지를 7월 말 1차 준공을 목표로 전용허가를 받아놓고 정지작업과 기초작업을 6월 초까지 마칠 계획이다. 6월 중순, 해외에 발주한 건축자재가 도착하는 대로 자생화를 테마로 한 전원주택과 펜션단지를 준공할 계획이다. 그동안 많이 소개됐던 멀티유닛(Multi-Unit)형이 아닌, 독립형으로 여유로운 공간의 게스트하우스나 별장 개념의 펜션이다.
필자는 많은 펜션 컨설팅과 시공을 해 왔다. 언론 매체에 소개된 날이면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반복해야 했다. 시간에 쫓겨 답변에 충실하지 못하면, 이 사람은 불친절하므로 펜션 운영을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하루저녁 머무르면서 체험하면 더 많은 정보와 조언을 해 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곳에서는 1차로 1000여 평에 수변시설과 편의점을 갖춘 새로운 개념의 펜션과 건축양식이 들어선다. 자연, 건축, 펜션, 테마, 운영에 대한 고민을 함께 풀어 가는 대화와 체험의 장이다. 누구나 편하게 방문하고 상담할 수 있는 펜션 실습 운영 프로그램과 통나무주택을 함께 지을 수 있는 D.I.Y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필자는 영덕의 삼사해상테마랜드 펜션과 레스토랑, 축령산의 깊은 산속 옹달샘, 홍천의 유로펜션, 카타마린 빌리지, 한방요양펜션, 산과 바다 사이 등을 건축해왔다. 이곳은 그동안의 건축과 운영 경험을 집약한 일생일대의 전원주택·펜션단지가 될 것이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는 수변 테마
자생화 통나무 주택단지(들뫼꽃농원)와 굽이치는 강줄기를 사이에 둔 영빈관마을(흙으로 만든 고추건조장과 옛 황토집을 영빈관이라 칭함)이 한 테마로 연결된다. 자한루(통나무주택 4동 있음)에서 오솔길을 따라 200여 미터 거닐면 굽이치는 강줄기가 나온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면 수변을 테마로 두산리-운학리를 잇는 펜션·주택단지 벨트가 형성된다.
영빈관 수변 테마펜션을 먼저 오픈하기로 하고 5월12일에 전용허가를 받았다. 5월19일부터는 가설재를 반입하여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선행한 것이 심야전기다. 7월 휴가철에 펜션을 열려면 심야전력이 지역에 따라 한두 달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토목공사는 자연배수가 되도록 경사면을 완만하게 하여, 그곳에 학교 교정처럼 자생화와 잔디, 키 작은 수목을 심어 수변 테마와 어우러지도록 할 계획이다.
7월호에는 토목 현황 도면과 배치 계획도, 단지 투시도를 간단히 소개할 생각이다. 또한 공사장면과 통나무 학교의 운영 모습도 함께 선보이겠다. 田
■ 글·사진 강석찬 <유로하우스 대표 043-643-1161, www.kbshome.com〉
글쓴이는 충북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고 통나무 목조주택회사 ‘정일품송’을 운영했다. 통나무 개인주택 및 국립공원 내 관공사를 설계했으며, 국내에 펜션형 통나무 키드캐빈과 소형주택을 개발 보급했다. 현재는 펜션 및 테마 기획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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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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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촌에서 띄운 편지] ‘산 속에 살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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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촌에서 띄운 편지
‘산 속에 살다 보면’
산 속에 살다보면 산이 일터요, 산이 놀이터요, 산이 쉼터다. 즐거워도 산에 오르고 울적해도 산에 오른다. 어느 때고 산은 다 받아들인다. 산은 함께 즐거워하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준다. 산은 기를 준다. 나무와 풀꽃들도 기를 준다. 기를 서로 교환한다. 산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산을 헤매다 보면 마음이 정화된다. 산에 가면 사악한 마음도 욕심도 사라진다. 마음을 순화시킨다. 그래서 산행을 할 때만은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감을 느꼈을 게다. 이처럼 산은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시가 있고 산문이 있으며 깊은 사색에 빠져들게도 한다. 비례, 균형, 대조, 하모니, 색감, 질감 등 모든 조형 감각을 깨우쳐 주고 온갖 음색도 다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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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한 친구가 이사를 갔다. 이삿짐 거들어 주러 갔다가 새벽 산책길에 뒷산에서 산삼을 찾았다. 노송 밑 정갈한 자리에 특이한 풀 한 포기가 확 눈에 들어오는 순간 ‘아! 산삼이구나.’ 육감으로 느꼈다. 책에서만 보았지 실물은 처음인데 신기하게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일곱 개의 소엽(小葉)으로 된 장상의 잎사귀 네 장이 줄기 끝에 윤생으로 달렸고 그 가운데 꽃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산삼은 영물이라 오랜 채취 수련과 경험을 터득한 심마니들이 목욕재계 후 찾는 그들의 전유물인줄 알았는데, 나 같은 문외한의 눈에 쉽게 띄다니 정말 희한한 일이다.
인가가 멀지도 않고 부근 산소도 여럿 있어 인적이 드문 곳도 아닌데 수십 년 간 사람들의 눈에 안 띈 것도 이상하다. 산골에 들어와 몇 년이 지나도록 자생하는 산송이 하나 구경 못한 터라, 초가을 송이철이 와도 나와는 인연이 없다 생각하고 아예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작년 추석 전에 대여섯 개를 채취하고는 여간 흐뭇하지 않았다. ‘내 눈에도 송이버섯이 보이는 구나!’ 하고. 역시 초보자라서 처음에는 갓이 활짝 핀 갈색의 버섯을 발견하고 자세히 관찰했더니 향기로 송이버섯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주위를 자세히 살피는데 솔잎 낙엽이 볼록한 곳을 헤치니 감자잎만한 커다란 송이머리가 봉긋이 솟고 있었다.
‘궂은 날 버섯 따기 좋다’기에 이슬비 오는 날, 밤버섯을 찾으러 참나무 숲을 헤매는데 작은 솥뚜껑만큼이나 큰 시커먼 버섯이 눈에 띈다. 일행을 불렀더니 능이버섯이란다. 앉은자리에서 여섯 개나 채취하는 행운을 얻었으니 이 기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리요.
올 초봄엔 앞산에 엄나무 묘목을 심으려 구덩이를 파기 위해 낙엽을 헤치는데 연녹색의 앙증스런 잎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봤더니 애기사철난이 아닌가?
다시 주변을 조심스럽게 뒤지니 두어 평 면적에 큰놈은 개화주부터 작은 놈은 생강근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애기사철난의 군락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애기사철난은 수십 년 산행을 하면서도 겨우 몇 촉을 찾기 힘든 희귀식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집 앞이 바로 그들의 군락지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 환경이 아주 적합한 모양이다. 오솔길 옆이라 산나물 채취꾼의 발에 밟힐까 염려되어 적당한 보호조치를 해 두었다.
산행은 가을 산도 좋지만 신록의 계절 산행시는 요란한 먹거리 준비가 없어 좋다. 밥과 고추장만 있으면 다른 반찬은 준비할 필요가 없다. 잔대 싹, 더덕 싹, 삽주 싹, 참나물, 곰치, 당귀 등 심심한 산채로 쌈을 싸거나 고추장에 그냥 찍어 먹으면 그렇게 고소하고 향기로울 수 없다. 또한 가을 산행의 부산물인 버섯장아찌, 산초절임, 더덕장아찌, 머루술, 다래술, 오미자술, 오갈피술 을 어찌 도시의 인스턴트식품과 비교 할 수 있겠는가.
산 속에 살다보면 산이 일터요, 산이 놀이터요, 산이 쉼터다. 즐거워도 산에 오르고 울적해도 산에 오른다. 어느 때고 산은 다 받아들인다. 산은 함께 즐거워하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준다. 산은 기를 준다. 나무와 풀꽃들도 기를 준다. 기를 서로 교환한다. 산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산을 헤매다 보면 마음이 정화된다. 산에 가면 사악한 마음도 욕심도 사라진다.
마음을 순화시킨다. 그래서 산행을 할 때만은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감을 느꼈을 게다. 이처럼 산은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시가 있고 산문이 있으며 깊은 사색에 빠져들게도 한다. 비례, 균형, 대조, 하모니, 색감, 질감 등 모든 조형 감각을 깨우쳐 주고 온갖 음색도 다 들려준다.
그런데 요즘은 산을 너무 파헤친다. 산이 노할까 두렵다. 우리나라 산골짝마다 오래된 산사들을 보면 별로 자연 훼손 없이 지형의 형편에 맞게 당우를 배치하며 자연 경관에 어색하지 않게 처리했다. 선진국들의 소위 전원주택들은 산을 크게 다치지 않고 최소한의 훼손으로 매끄럽게 처리했다. 우리의 명승지를 찾아 풍광을 감상하노라면 주위에 조잡하게 난립한 인간이 만든 구조물들이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 세대가 이 땅을 잠시 임대해 살 뿐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므로 후손들도 그대로 즐길 수 있도록 잘 보존할 필요가 있다. 강원도 산은 대부분 장년기 산이라 경사가 급하고 산세가 험해서 산행에 조심해야 한다. 얼마 전 절벽에서 할미꽃 씨앗을 채취해 봉투에 넣는 순간 균형을 잃어 3미터 가량 미끄러지다가 천만 대행으로 줄댕강나무에 댕강 걸렸다. 더 큰 위험은 모면하고 일주일정도 병원 다닐 상처만 입었지만 정말 산신께 감사한다. “오늘 네 발로 걸어서 돌아가도록 용서할 테니 다음은 주의하라”는 경고로 받아들였다.
산은 품이 넓고 포용력이 크며 관대해서 누구나 받아들인다. 그러나 한번 노하면 커다란 재앙을 준다. 산은 언제나 겸허하게 대해야 한다. 마치 인자하면서도 엄격한 어버이 같고 스승 같다. 깊은 산 속 산사에는 으레 산신각이 있다. 불교의 교리상 필요 불가결한 존재인지 견문이 짧아 의문이지만 산의 품속에 살면서 어찌 산을 소홀히 대하겠는가? 산을 외경(畏敬)스럽게 여기라는 증표로 받아들이고 싶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 그 순응하는 지혜는 자연이 가르쳐 준다. 田
■ 글 황대석<들뫼꽃야생화농원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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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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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원일기] 대를 이어 농사짓는 심재욱, 심익보 부자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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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원일기
대를 이어 농사짓는 심재욱, 심익보 부자의 미소
오월 초순까지 유난히 많은 비가 내리더니 중순 들자 가물기 시작한다. 가문 날씨야 물이 부족하지 않아 견딜 만하지만 일찍 찾아 온 더위는 농사일을 하는 데 어려움을 더한다. 날씨가 어디 농군 마음에 딱 맞아떨어진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할말이 없지만 그래도 때 이른 더위에 농사일이 즐거울 리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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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면 세월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그 곳은 유형근 씨가 공인중개사 일을 주로 보고, 이장 심재준 씨가 마을 일을 보는 일종의 합동사무실이다. 마을회관과 길 하나를 두고 마주하는데, 길가에 있는 옛날 새마을탑에 ‘부동산’이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을 뿐 아무런 간판도 없고, 농촌의 구옥을 그대로 쓰고 있어 흙바람 벽이 유난히 눈에 띄는 정겨운 곳이다.
오늘도 일을 마친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청년회장인 심은섭, 청년회 총무 심충섭 그리고 청년회원들인 심재만, 심익보, 심용보 씨 등이 그들이다. 총무를 제외하고는 모두 40대인 이들은 하루 일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언제나 이곳으로 오면서 너나할 것 없이 소주와 안주거리를 챙겨 들어온다. 술잔이 돌아가면 그들은 노동의 고단함도 잊은 채 농사에 대한 이야기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우리집 골목 입구에 사는 심익보 씨의 말이 저녁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비가 좀 왔으면 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불만이라는 것이다. ‘비를 기다리는 이유야 가지 모종을 냈으니 비가 오면 가지가 뿌리를 내리는데 좋아서겠지’ 짐작한 내 생각과 달리, 심익보 씨의 속뜻은 비가 오면 좀 쉴 수도 있을 거란 의미였다. 참 정직하면서도 농민의 고단함이 스민 말이라,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심익보 씨는 오늘 가지 모종을 냈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모종을 노지로 옮겨 심은 것이다. 물론 가지 농사뿐만 아니라 오이, 배추, 상추, 고추, 파 등 특용작물을 재배하면서 논농사도 곁들여 짓는다. 밭농사 8000여 평, 논농사 3000여 평을 지으니 중농이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5일장인 양평장에도 고정 가게를 두고 내다 팔며, 서울의 가락시장과 청량리시장에도 출하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농협빚 3000만 원은 갚을 길이 요원하다며 검은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의 모습에서 순진함과 현실의 고달픔이 겹쳐온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결혼하지 않은 남동생과 더불어 한 집에 산다.
그의 아버지 심재욱 씨는 세월리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농사일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지금은 장남 찬보 씨와 4남 문보 씨 그리고 딸인 선미 씨는 출가했고, 차남인 익보 씨가 아버지를 거들어 농사일을 하며 산다. 대를 이어가며 농사일을 하는 셈인데, 이런 건 세월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심재욱 씨는 키가 별로 크지 않다. 반면에 아주 단단한 체구를 지니고 있다. 한평생 농사일을 천직으로 여기고 살아온 사람의 모습이리라. 밭두렁에서는 밭두렁과 함께, 논두렁에서는 논두렁과 함께 살아온 세월의 모습이 그의 작으면서도 단단한 어깨 위에 앉아 있는 것만 같다.
그 분은 언제나 웃으며 살아간다. 이사 와서 얼마 안 돼 아직도 이 마을 분위기가 익숙지 않아 서먹서먹한 나에게도 만날 때마다 친절하게 웃으며 맞아 준다. 가끔 우리집 앞을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데, 내가 뭔가를 하고 있으면 언제나 오토바이를 멈추고 말을 건넨다. 나무를 심을 때는 나무 이야기를, 수돗가에 있으면 물 이야기를, 잔디를 심고 있으면 잡초 이야기를 하면서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하는 마음씨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 분을 볼 때마다 나는 고향에서 지금도 작은 농사일을 돌보며 살아가는 우리 아버지를 떠올린다. 한 때는 중농을 경영하면서 11남매를 키운 우리 아버지의 작고 단단한 몸맵시나 남을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아내나 자식들에게는 가끔 무섭게도 보였지만 남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진실한 농부의 마음이라는 것을 나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집안 식구들에게는 짜증을 내지만 남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코 우연하게 생긴 것은 아니다. 노동의 고달픔으로 인해 집안 식구들이기에 짜증을 낼 수 있는 것이고, 남들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은 바로 흙에서 배운 마음씨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집안 식구들에게는 고달픔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이고 남들에게는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그 정신이 바로 흙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요한 세월리의 밤하늘을 보며 생각하는 것이다. 심재욱 씨인들 5남매를 키우면서 몸과 마음이 편할 날이 있었겠는가. 나날이 발전해 가는 도시의 문명 따라 등록금과 물가는 해마다 치솟아 오르고, 가뭄과 수해는 한 해 걸러 돌아오는데 가난한 농부가 어찌 마음 편히 살 길이 있었겠는가. 그래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땅이요, 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한 생각하는 것이다. 땅만한 스승이 없고, 흙만한 가르침이 없는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면 이 고달픈 농사일을 오늘까지 해오면서 저렇게 미소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얼굴색이 검고 체구는 작지만 이 세상 누구도 지을 수 없는 미소를 심재욱 씨는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의 아들 익보 씨가 연신 팔뚝을 걷어올린다. 검게 탄 팔이 굵고 단단하게 보인다. 비가 좀 와서 쉬었으면 하는 말은 농담이라고 강조한다. 비가 온다고 해도 비닐하우스에서 할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도 좋다. 이른봄부터 지금까지 그만큼 일을 했으면 좀 쉰들 누가 뭐라 할 수 있으랴.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월리가 아니면 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심재욱, 익보 두 부자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미소와 고달픔이 아련하게 배어나는 그 농담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로 돌아오는 사람들이여,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맑고, 청산의 우거진 수풀도 아름답지만 진실한 농부의 웃음과 농담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할 따름이다. 田
■ 글 이기윤<시인,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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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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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낙엽 아닌 쓰레기를 태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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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낙엽 아닌 쓰레기를 태우면서
그래서 생각난 것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수필이다. 거기에는 낙엽을 태우는 냄새를 ‘갓 볶아 낸 커피 냄새’ 또는 ‘잘 익은 개암 냄새’라고 표현하고 있다. 어찌 보면, 농촌의 쓰레기는 낙엽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 시대상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생활의 핵심적 요소로 물과 불을 상정하면서 그것들의 상호 보완적 관계가 주는 인간생활의 윤택함과 멋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의 입장에서 볼 때, 그야말로 낭만의 극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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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슈퍼가 하나 있다. 바로 세월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는 ‘한창상회’다. 거기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다. 여름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빙과가 겨울에는 호빵이 김을 무럭무럭 낸다. 동네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은 거의 다 갖추고 있다. 동네에서 서비스 업종의 대표라고 할 만하다.
세월리에서 이렇게 중요한 한창상회는 주인이 하루에 한 번씩 바뀐다. 낮에는 언제나 부인인 전금자(61) 씨가 가게를 보고, 밤이 되면 남편인 한천규(62) 씨가 본다. 그 이유는 한천규 씨가 낮에는 들에서 주로 농사일을 하기 때문이다. 교대로 가게도 보고, 또 농사일을 해 가며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 부부의 모습은 요즘 농촌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답게 보인다.
그런 한천규 씨가 요즘 들어 쓰레기 이야기만 나오면 열을 올린다. 농사일에다 가게까지 보다 보니 생활폐기물이나 쓰레기가 어느 집보다 많이 나오기 마련인데, 얼마 전에 그것을 임의로 태우다가 적발됐기 때문이다. 물론 적발되면 해당 기관으로부터 고지되는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오늘밤도 담배 사러 가는 길에 ‘쓰레기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슬쩍 물었다. 물론 한천규 씨를 또다시 열 받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나의 문제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적발되고 난 뒤 어떻게 됐냐’는 질문을 하자,
“어떻게 되긴요. 벌금 20만 원을 물 수 밖에요. 그렇다고 나 혼자 낸 것은 아니고, 과자장사하고 반반씩 냈지 뭐에유.”
라고 말한다.
“아, 그것은 알겠는데요. 도대체 어떤 법을 위반해서 벌금을 낸 것이데요?”
라고 재차 묻자.
“글쎄요. 아마 태우지 못하게 돼 있는 모양인데……. 아, 그 놈이 문제지요. 고발한 그 놈 말이유. 그 놈이 그런 놈이더라고요.”
쓰레기 소각에 대한 정확한 관련법규나 규제사항에 대한 해명에 앞서 소각 사실을 고발한 사람에 대한 원망이 앞섰다. 그리고는 ‘농사에다 가게에서 나오는 이 많은 쓰레기를 봉투 하나에 1700원씩이나 하는 것을 어떻게 사다 대느냐’는 말을 덧붙였다.
여기에서 쓰레기를 소각하는 일은 다반사인데 자신만 고발당해 억울하다는 심정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다 안다. 이제는 환경보전이 어떤 가치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이곳은 한강유역으로 상수원보호구역이 아닌가. 거기에다 양평군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친환경농업에 대한 홍보는 마을 이장의 임무 중 하나로, 개개인이 알아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사실, 고백하건대 나도 어제 쓰레기를 태운 사실이 있다. 오랜만에 이곳저곳을 청소하다 보니 이사 온 뒤로 미처 치우지 못한 쓰레기들이 상상외로 많이 나왔다. 그것을 대문 앞 공터에 쌓아놓고 보니, 막상 처리할 방도가 막막했다. 물론 재활용 가치가 있는 것들, 즉 빈병, 깡통, 페트병 등은 따로 모아 처리하기로 했지만 못쓰는 책이나 종이류, 더구나 옷가지 등은 당장 처리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묻자니, 묻을 만한 공간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곧 토양오염으로 직결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태우자니 대기 오염이 될 것이 뻔했던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재활용품만 골라 따로 놓은 뒤 이리 쌓고 또 저리 쌓아보고 있는데, 뒷집아주머니가 와서 태우는 게 상책이라고 은근히 종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나도 처음에는 거기에 찬성할 수 없어서, 매주 목요일 재활용품은 가지고 간다는데 박스나 종이 같은 것들은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재활용품 외에 다른 쓰레기들은 태우는 것이 최선이라고만 강조했다. 쌓아두면 여름장마에 섞어서 흉하게 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런 말을 한참 듣고 있노라니 유혹이 일어났다. 그래, 잠깐 태우면 그만이지 하고 말이다. 그래서 아주머니하고 둘이서 이것저것 모아다 쌓아놓고는 불을 붙였다. 그러자 날씨도 눅눅한 데다 물기가 채 마르지도 않은 잡동사니들이 타면서 나는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이거 안 되겠다며 바로 불을 끄려는 나를 그녀가 말렸지만 이내 반도 타지 않은 상태에서 불은 멈추었다.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바람에 양심이 또 한번 흔들렸기 때문이다.
결국, 농촌의 쓰레기나 생활폐기물은 현재에서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환경 관련 규제 사항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런 취지를 살리기에는 농촌의 실정이 아직은 열악하다는 것이다.
한천규 씨의 말대로 농촌의 쓰레기 양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을 폐기물 봉투를 유료로 사서하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다 소각 시설이 마을마다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농촌사람들의 폐기물 처리 실태를 무조건 잘못됐다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진퇴양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수필이다. 거기에는 낙엽을 태우는 냄새를 ‘갓 볶아 낸 커피 냄새’ 또는 ‘잘 익은 개암 냄새’라고 표현하고 있다. 어찌 보면, 농촌의 쓰레기는 낙엽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 시대상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생활의 핵심적 요소로 물과 불을 상정하면서 그것들의 상호 보완적 관계가 주는 인간생활의 윤택함과 멋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의 입장에서 볼 때, 그야말로 낭만의 극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하면 낭만과 멋은 인생에서 하나의 목적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위해 생활의 수고로움과 애달픔도 참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농촌사람들이 그것을 더 깊이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진정한 물과 불의 현대적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농촌 사람들의 순박한 양심이 한낱 연기에 날아가 버리지 않게 말이다. 田
■ 글 이기윤<시인,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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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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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에 살어리랏다 Ⅲ] 전원의 꿈이 익어가는, 통나무 펜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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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에 살어리랏다 Ⅲ
전원의 꿈이 익어가는, 통나무 펜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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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짓고 있는 통나무마을은 필자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펜션단지다. 이 일을 추진하면서 실로 많은 사람들과 만났고, 머리를 감싸
쥐고 수많은 세월과 씨름한 듯하다. 비로소 첫 삽을 뜨게 되었으니 내 마음은 마냥 날아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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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는
좁다는데도 막상 서울에서 가까운 이곳 만큼은 늘 한적하기만 하다. 밤이면 낚시인들의 야광찌만이 집 앞 강가를 빛낼 뿐이다.
이곳도 사시사철 도시인들이 마음의 수양을 하고 가족끼리 휴가와 주말휴식을 위해 첫 삽을 뜨기 시작했다.
아직도 작년의 수해 복구가 끝나지 않아 굴삭기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 데다 조금있으면 장마도 시작된다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그래도 7월말까지 10동의 통나무 펜션마을이 지어지겠지.
지금 짓고 있는 통나무마을은 필자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펜션단지다. 이 일을 추진하면서 실로 많은 사람들과 만났고, 머리를 감싸
쥐고 수많은 세월과 씨름한 듯하다.
비로소 첫 삽을 뜨게 되었으니 내 마음은 마냥 날아갈 것만 같다.
공사가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한 일은 산에 있는 400여 그루의 자작나무와 잣나무를 옮겨 심는 일이었다. 지금은 나무를 이식하는
시기가 아니므로 조경 전문가에게 의뢰했더니 경비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 할 수 없이 반 만 살린다는 생각으로 3일 동안
포크레인 한 대와 4명의 인력을 동원해 이식을 시작했다.
일단
뽑은 나무를 어디에 심을까 연구하다가 아직 대지로 전용이 안 된 임야에다 자작나무 동산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반
정도는 죽을 것 같아 간격을 좁게 심었다.
나머지 반은 대지가 나뉘는 경계선에 자작나무와 잣나무를 두 줄로 심어 물을 흠뻑 주고는 하단을 전지해 주었고, 나중에 조경할
잣나무는 두 곳으로 나누어 밀식했다.
처음에는 전지를 너무 많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랫동안 자생화와 수목을 가꿔온 황 사장님의 조언에 따라
상단부를 과감히 잘랐다.
마침 필요한 시기에 비도 와서 처음 생각보다 많은 나무들이 살아날 것 같아 기분이 좋다.
*
기초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대지 계획고를 잡으려고 레벨측량을 하다 보니 고민이 생겼다.
메운 땅에 건물을 세우면 장기침하로 인해 부동침하가 일어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절토하기로 하고 흙을 외부로
반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맨 위의 상단에서 시야확보를 위해 계획고를 1미터를 더 절토하고 나니 파낸 흙이 덤프트럭으로 400대 분량이다.
필자는 비가 오는 날이면 사업부지와 물길을 확인하고 토양조사도 다니곤 하는데, 여기는 점토성분의 토질에 4~5m 아래가 암반층을
형성하여 경사도를 따라 강으로 물이 흘러내리는 지형인 것 같다.
설령 비가 오더라도 점토질임에도 불구하고 배수는 매우 양호한 편이라 별 문제는 없다.
건물의
절토부분은 130미터 길이의 콘크리트 옹벽을 만들기로 하고 현재 공사가 진행중이다. 옹벽이 완공되면 이 부분은 재미있게 구성될
예정이다.
여기는 서울에서 가깝지만 분명 강원도 땅인지라 여름이면 바로 앞에 강이 시원하고 겨울 설경 또한 뛰어나다.
하지만 이때는 온도가 뚝 떨어지므로 기초공사를 더욱 튼튼히 해야한다. 우선 토목공사를 마치면 땅 속 1미터 깊이로 배관을 하고
기초거푸집 공사를 할 예정이다.
200미터
깊이에 수량이 풍부한 지하수가 있지만 물 사용량이 많은 여름에는 부족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두 곳의 지하수를 더 파서 각각
35톤 정도의 지하수를 확보했다.
게다가 심야전기는 한 달에서 길면 두 달이 걸리므로 미리 신청했다.
올해부터 심야전기는 한 가구당 50kW정도 밖에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100kW를 신청해 심야온돌전용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밖에도 펜션에는 늘 온수가 많이 소모되므로 기름보일러를 가동시키는 온수탱크를 별도로 설치하기로 했다.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지만 유난히 힘든 날이면 저녁에 앞 강에서 고기를 잡아 매운탕에 소주와 막걸리로 피로를 풀기도 한다.
오늘이 6월 중순이니까 펜션을 오픈하는 날이 이제 한 달 반 밖에 남지 않았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지금쯤 건물 윤곽이 드러나야할
시기인데 말이다.
더욱이
이번에는 통나무주택 교육생도 함께 참가할 예정이니 더욱 더 마음이 조급해진다.
지금은 공사가 지연되고 있지만 기초공사만 끝나면 본공사는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번 공사는 일정이 촉박한 관계로 토목과 기초, 설비 등을 종합건설토목회사에 외주를 줬다. 통나무 및 목공사는 목수 8명, 직원
3명, 그리고 현장체험교육생 5명과 함께 진행한다.
현장체험교육생들은 아궁이 군불을 때는 구옥이 있는 유박사님댁의 손님을 맞는 영빈관에서 함께 생활한다.
사람들은
보통 집짓는 것에 대해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는 이번 기회에 이들이 많은 자신감을 얻고 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집도 집이지만 펜션을 운영하는 이들이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이 더 많을 것 같다. 이를 위해 펜션에 관한 운영프로그램, 세미나도
함께 진행할 생각이다. 특히 펜션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장을 만들 것이다.
참고로 이곳의 일정표와 각 동간 평면도를 소개하고 명확한 계획 의도를 설명해 보겠다. 우선 전체 건물은 방갈로가 아닌 통나무
별장형 펜션으로 계획했다.
모델명 ‘정일품송 1403 프라임’으로 불리는 17평형의 경우는 모두 5동이 지어지는데, 손님들이 내집과 같이 편안하게 쉬도록
동당 간격을 넓게 계획했고 아늑한 정원이나 독립된 덱 등을 별도로 설치한다.
또한 내부는 독립된 거실과 넓은 방에 화장실과 다락방도 만들어 각각의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했다.
메인건물인 워크숍은 멀티유니트형 스타일이며 중간에 25평형 워크숍을 두고 좌우에 모델명 ‘정일품송 1302 프라임’인 15평형
2동을 배치하여 하나의 매스를 계획했다.
또한
소음방지를 위하여 동당 간격을 50센티미터를 띄웠고 지붕도 이중으로 처리해 소음을 차단하도록 설계했다.
모델명 ‘정일품송 R-3005’인 단체실은 35평형으로 일반 가정주택과 꼭 같이 설계해 장기체류나 가족단위의 휴양에 맞춰
설계했다.
이밖에도 근린생활시설인 소매점은 30평형이며 옥외 덱과의 연계 및 가변 증축을 고려해 전체 건물을 설계했다. 별도로 사무실과 두
개의 방, 주방과 매점, 화장실, 옥외덱을 설치했고 파고라 형이지만 겨울을 대비해 가변벽도 설치했다.
2단계 레벨과 3단계 레벨의 시야를 위해 3미터의 고저 차이를 확보하였으며, 3단 전면에는 브리지 덱과 화단을 기획해서 새로운
테마를 선보일 예정이다.
단지 좌우측에는 장애인을 위한 도로를 개설해 집 앞에까지 주차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일반고객은 전면에 위치한 주차장에 주차하도록
했다.
수변 공동덱과 사우나도 기획했지만 할 수 없이 겨울로 미뤄야 할 것 같다. 1000여 평의 공간이라도 독립형으로 10동이 들어서고
나니 꽉 찬듯하기 때문이다.
* 통나무주택 마을은 계속된다
필자는 지금 홈페이지의 도메인과 펜션의 이름 짓기에 고민하고 있다. 아마도 이 원고가 마감될 쯤이면 서울로 상경해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필자의 10년 이상 경험을 살려 통나무주택과 목조주택, 키트캐빈, 멀티유니트주택, 펜션컨설팅, 테마기획, 펜션운영에 대한
경험담을 빠짐없이 나열하고, 세미나와 펜션운영체험교실을 이야기하는 코너, 필자가 귀향할 때 많은 도움을 주고 이 펜션의 원래
주인인 유박사님의 된장과 시골이야기도 담을 것이다.
이외에도 지난 96년부터 이곳에 통나무 주택 4채를 짓고 살고 있는 황사장님의 자생화단지도 이야기 할 것이다.
물론 펜션과 그 지역에 관한 소개도 하겠지만, 우리마을의 존경하는 사람들 이야기와 생활을 최대한 보여주는 데 주력할 것이다.
유박사님과 황사장님은 어제 새벽 태백산에 자생화를 채취하려고 떠났는데, 필자는 어제 저녘까지 이들을 기다리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달에는 황사장님이 동강에서 자생화를 채취하다가 바위에서 떨어져 다쳤지만, 이에 아랑곳 없이 자생화 채취에 열성을 보이는 모습은
젊은 사람도 따라가질 못할 듯 하다.
7월이면 이제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는데, 펜션을 계획하는 이들이나 집짓기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휴가를 겸하여 이곳을 꼭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단순 휴가는 물론이거니와 필자의 통나무 주택 시공 경험을 얼마든지 가르쳐 줄 계획이다. 또한 이 펜션의 운영자로서, 그리고 펜션
컨설턴트로서 말이다.
이 펜션의 주인인 유박사님은 처음에는 손님들과 물고기도 잡고 전원에서의 편안한 시간을 함께 보내려는 의도에서 계획했으나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당분간은 이런 일이 어려울 것 같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앞으로 3년간은 필자가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남의 집을 지어만 주던 필자가 이번에는 운영자가 되는
입장이다. 손님들과 함께 자연을 체험하고 펜션의 문제점들을 개선해볼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라는 생각도 든다.
유박사님은 원래 의사지만 건강 때문에 이곳에 와서 농사를 지으며 산지 3년이 되어가고 있다. 서울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부인이
주말이면 내려왔다가 상경하곤 했는데, 멀지 않은 장래에 병원을 제천으로 이전한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이렇다할 병원이 없어 멀리 원주나 제천으로 가야하는데, 마을 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제 7월에 펜션이 완공되고 가을에 하나 둘씩 통나무 집들이 들어설 때면 내가 늘 꿈꾸던 통나무 마을이 완성된다.
그런데 어제부터 필자는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제야 작은 꿈을 이뤘는가 싶은데 어느 순간부터 면 크기의 커다란
통나무주택단지를 만드는 꿈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바다는 메울 수 있어도 사람 욕심은 메울 수 없다 했던가?” 田
■ 글·사진 강석찬 <유로하우스 대표 043-643-1161, www.kbshome.com〉
* 글쓴이는 충북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고 통나무 목조주택회사 ‘정일품송’을 운영했다. 통나무 개인주택 및 국립공원 내 관공사를
설계했으며, 국내에 펜션형 통나무 키드캐빈과 소형주택을 개발 보급했다. 현재는 펜션 및 테마 기획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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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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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침은 대나무숲속의 바람소리와 함께 시작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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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산다. 그 꿈이 크든 작든 이루 어지길 바라면서…
외국의 영화에서나 본 '넓은 초원과 언덕위의 하얀집, 빨간지붕에 낮게 드리워진 흰 울타리, 장미넝쿨로 꾸민 대문, 그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 이런 집에서 한번 살아봤 으면 하고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의 아침은 대나무숲에서 스치는 바람소리로 상큼하게 시작된다. 상추며 고추, 토마토, 오이, 배추, 토란 등 갖가지 채소를 심어놓은 텃밭을 둘러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아침의 일과다. 가지가 부러진 고추는 없는지?
한달전에 뿌려놓은 상추는 왜 싹이 안나는 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묘목을 심어 놓은 과수원과 콩밭을 빙 둘러보고 나면 밥맛도 좋다. 오늘 점심은 뭘로 할까?
뚝배기에 끓인 된장찌개와 열무김치, 깻잎조림, 죽순무침, 상추, 치커리 등 온통 채소다.
우리가 손수 가꾸어온 열무김치에 된장으로 비벼먹는 그 맛이란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평상에 둘러앉아 가족들에게 자연식 밥상을 올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전원에 서 맛볼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다.
통나무집에서 하루를 시작한 지도 벌써 석달째. 직장생활을 하면서 회색빛 콘크리트만 왔다갔다 하는 도시의 생활에 몸 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그래서 3년전부터 조용한 시골에가 자연과 함께 살자고 가족들과 약속을 했다.
이런 마음이 생기자 곧바로 장소를 찾아나섰다.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경관이 좋으면 교통이 안좋고 교통이 좋은 곳은 도시에서 가까워 시끄럽고 오염이 되어 있었다.
환상의 장소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기를 일년 아주 우연한 기회에 지금 이곳 청학동으로 드는 입구의 마을을 소개받았다. 농가주택이 있는 대지였다. 폐가였던 집을 헐고 마당을 1m 높여 서 통나무집을 지었다.
울타리도 대문도 없지만 마음은 편안하다. 선풍기가 없어도 바람은 시원하고 나무냄새가 향긋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집안 어디에서나 시야가 열려 있어 하동댐이 훤히 들어온다.
이곳에 오면서 더욱 많은 것을 느꼈다. 자연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라고…
사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보면서 텃밭에서 가꾸어온 무공해 채소를 가족들과 함께먹는 기쁨. 게다가 온통 푸른 들을 보면서 한껏 평안하고 여유로워진 마음은 늘 부풀어 있다.
그리고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자연의 순리를 보면서 자연에 겸손해지는 방법을 배운다. 더욱 기쁜 것은 인심좋은 이웃들을 만나서 나누는 행복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변환경과 집이 어떻든 그속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편안하고 즐겁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나고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집이 행복한 집이 아닐까?
집은 꿈과 생활을 담는 그릇이다.
■ 글쓴이 이정자씨는 초등학교 교사로 30여년간 근무하다 명예퇴직 하고 청학동 어귀 하동댐이 내려다 보이는 경남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로 들어가 남편인 경상대학교 체육학과 권판근 교수와 함께 전원생활을 즐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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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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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시나무에 대한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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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간 뒤 추녀에서 떨어진 빗방울 자국이 아직도 선명히 고여있는 고궁에 나가 보았습니다. 강물처럼 흘러온 시간들의 기억과 흔적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낡은 회색빛 지붕끝으로 파랗게 걸려있는 하늘을 바라보면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바람에 잔잔하게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자지러질 듯 매미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여름의 한가운데에 와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기의 몸 크기만큼 드리워진 나무 그늘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조용히 바라봅니다.
호리호리한 나무는 애처로운 그림자를, 키 작은 나무는 나즈막한 그림자를, 우람한 나무는 몇사람이라도 품에 안을 듯 넉넉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모두 제 덩치만큼의 더도 덜도 하지 않은 자신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겠다는 아이를 데리고 이따금 학교 운동장에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텅 빈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서 있습니다. 운동장을 씽씽 신나게 돌고 있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플라타너스 그늘에 앉자, 스쳐온 많은 여름날들이 생각납니다.
인사동 학고재를 지나 비원쪽으로 꺾어돌면 바로 풍문여고로 건너는 육교가 보이고 육교 바로 앞에 키가 큰 플라타너스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그 잎을 손수건 흔들 듯이 나부끼고 있는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이 거리 모퉁이에 자주빛 페인트 자국이 군데군데 벗겨진 목조건물이 있습니다.
다.브.로.화.실
거칠 것 없이 유쾌했던 빛나던 십대.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소녀, 나.의.벗.춘.희.와 갈래머리의 내가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고 따갑던 여름날 다브로 화실의 삐걱거리던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갈 때, 누군가가 손으로 쭉 훑어다 뿌려놓은 플라타너스 잎사귀에서 나던 서늘하면서도 푸른 향기를 춘희와 나는 아직도 아름답게 공유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나는 생각합니다. 삶이 고단해질 때 힘이되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신앙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지나온 날들 속에서 가슴 한켠에 보석처럼 곱게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순간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비록 조각보처럼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운동장 맞은편 언덕에는 울타리삼아 심어놓은 은사시나무가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없지만 구름 한점 없는 하늘, 미세한 바람에도 물결처럼 흔들리는 나무입니다. 그 많은 종류의 나무중에서도 바람이 거세질수록 더더욱 아름답게 깃발처럼 흔들리는 나무입니다.
은사시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오래전에 내 안에 심었던 나무 한 그루를 드려다 봅니
다. 이제는 파도같은 세월을 가로질러 이런저런 상처를 견디며 담담하게 자랐습니다. 나의 인생이 폭풍속에서도 의연하게 흔들리는 은사시나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오늘도 은사시나무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바람.별.꽃.나무
아름다운 구수리에서 김해경
글·김해경
(글쓴이 김해경씨는 서울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다 작년 충북 진천 백곡면 구수리란 산동네로 이사와 남편과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과 함께 전원생활을 즐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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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