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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인들이 직접 설계 시공한 캐나다산 목조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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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은 전원주택
캐나다인들이 직접 설계 시공한 캐나다산 목조주택
가끔씩 들리는 곳이기에 이 집에 대한 느낌은 더욱 각별하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마당에 내려서면 경안천이 내려 보이고 우측 먼 시선으로는 중부고속도로도 한 눈에 들어온다. 잔디도 잘 자라 맨발로 내려선 느낌마저도 특별하다. 이러한 풍경은 집안에서도 창문과 발코니를 통해 그 느낌 그대로 전달된다.
앞쪽으로는 경안천이 가로질러 흐르고 동쪽으로는 무갑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광주 시내로 가는 길도 10분이면 족하니 환경, 문화, 교육 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다. 전원생활을 위한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이 곳 캐나다산 목조주택은 안병선 신정자씨 가족이 주말주택으로 이용하는 곳이다.
짧게는 하룻밤, 길게는 며칠씩도 묵고 가는데 분당에서도 먼 거리가 아니어서 오가는데도 큰 불편이 없다. 아들 안대환씨 가족도 주말이면 이 곳에 들리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은 온 가족이 시골의 여유로움을 함께 나눈다.
안병선씨 가족은 분당에서 아들 내외, 손자 손녀를 지척에 두고 살고 있다. 아예 이 곳에 눌러 살고 싶은 생각도 있으나 눈에 어리는 손자 손녀 모습에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가끔씩 들리는 곳이기에 이 집에 대한 느낌은 더욱 각별하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마당에 내려서면 경안천이 내려 보이고 우측 먼 시선으로는 중부고속도로도 한 눈에 들어온다.
잔디도 잘 자라 맨발로 내려선 느낌마저도 특별하다. 이러한 풍경은 집안에서도 창문과 발코니를 통해 그 느낌 그대로 전달된다. 실내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가구다. 벽난로에서부터 침대, 식탁, 장식장 등 대부분의 가구가 옥으로 마감돼 고급스런 분위기를 연출한다. 마당 한 쪽에 마련된 미니 풀장도 옥으로 마감됐다.
안병선씨 가족은 옥가구 공장을 운영한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고 아들 안대환씨가 가업으로 물려받았는데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옥을 가구에 접목시킨 경우라 한다. 올 들어 벤처기업으로 지정된데 이어 미국으로의 수출길도 열려 외화획득에도 한 몫하고 있다.
옥가구가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한 때는 이 곳을 옥가구 전시장으로 활용했었다. 일반 매장에 전시된 것 보다 식탁은 식탁자리에 침대는 침대자리에 자연스럽게 배치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집이 지어진 것은 재작년 가을이다. 그러나 안병선씨 가족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아들 안대환씨가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 받게 되자 2억4천만으로 계산해 대신 이 집을 받았다.
안병선씨 가족은 이후 잔디도 심고 조경도 하고 옥돌로 시공한 소형 풀장도 하나 만들어 목조주택에 걸맞는 고급스런 분위기를 연출했다. 정원을 꾸미는데 3천5백만원이 추가됐고 실내외 추가 인테리어 비용 2천5백만원을 포함해 모두 6천여만원을 더 들였다. 울타리는 나무가 아닌 알루미늄 울타리를 쳤는데 나무처럼 칠이 벗겨져 나무가 상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대지 2백평에 건평은 40평으로 방 3개에 거실이 있다. 캐나다산 목재로 지어졌는데 목재만도 40컨테이너 분이 소요됐고 설계는 물론 시공도 캐나다 사람들이 직접 와서 지었다고 한다.
사업하는 사람 입장으로 우선 급한 게 현금인지라 당시엔 다소 아쉽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다. 안병선씨 가족은 틈틈이 와서 정원도 손질하고 텃밭에 고추, 상추, 쑥갓도 심는다. 매주 무럭무럭 자라는 상추, 쑥갓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직접 재배한 야채를 먹는 재미도 솔솔하다. 내년엔 간장, 된장도 담글 생각이다. 물 좋고 햇볕 잘 들고, 바람마저 신선하니 아주 맛있는 장맛이 우러나올 것이란 기대다. 田
■ 글·사진 / 류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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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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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86평에 지은 27.4평의 사각 통나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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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집 넓게 살기 대지 86평에 지은 27.4평의 사각 통나무집"탁 트인 전망...100평의 느낌으로 산다" 청학동 어귀, 경남 하동군 청암면 금남부락에 있는 권판근 이정자씨 댁에는 커텐이 없다. 주변의 경관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그 경관들을 가리는 것이 아까워 안주인 이정자씨는 커텐도 달지 않았다. 창밖의 풍경, 사철 푸른 대나무숲과 숲에서 이는 성성한 바람소리 그리고 멀리 내려다 보이는 하동호의 잔물결, 청학동으로 드는 길들이 만들어 내는 유연한 곡선.... 그런 모습들 그대로가 커텐이 된다. 진주시내에 살던 경상대학교 권판근 교수와 초등학교 교사인 이정자씨 부부가 전원주택을 짓기로 마음먹은 것은 오래전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적당한 곳을 찾아 다녔지만 딱 맞아 떨어지는 곳이 없었다. 좀 괜찮다 싶으면 경제적인 부담이 컷고 예산에 맞추다 보니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주변의 소개로 이곳 청학동 초입에 있는 금남마을의 대지를 소개받게 되었다. 지리산의 끝자락으로 자연경관이 좋으면서 대지 평수도 작아 경제적인 부담이 되지 않았다. 특히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어서 마을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도 좋을 듯 싶었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96년 이곳의 86평 대지를 7백50만원에 구입했다. 구입당시에는 볼품없은 곳이었다. 부지는 푹 꺼져 있었고 다 쓰러져가는 빈농가가 한 채 있었다. 96년 말 빈농가를 헐고 대지를 1m정도 높여 27.4평의 소박한 사각통나무(라미네이팅)주택을 지었다. 평당 건축비는 3백만원정도 들었다. 이 집은 2층으로 되어있다. 1층은 16.94평이며 2층은 8.47평이다. 좁은 대지를 이용해 집을 지어 마당이 좀 좁지만 거실에서 내다보는 전경은 탁 트여 있어 대지가 86평이란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특히 평수로만 보았을 때 좁은 집이지만 탁 트인 전경 덕분에 실내에서도 전혀 좁다는 느낌이 없다. 8.47평에 불과한 2층의 경우 하동댐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전면으로 창과 데크로 처리하여 시원한 느낌을 준다. 이 집에는 내부 인테리어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나무 그 자체가 인테리어란 것이 안주인 이정자씨의 생각이다. 나무결이며 나무냄새가 모두 인테리어의 소재가 되었다. 집의 구조재는 사각(라미네이팅)통나무로 하였고 천정재는 소나무로 마감했다. 지붕은 아스팔트 슁글로 했다. 이 집을 지을 당시 부인 이정자씨는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집을 짓고 얼마간은 교사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주말주택으로만 이용하다 올해 초 명예퇴직 하고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다. 권판근 이정자씨 부부는 이곳에서 한해 여름을 났다. 여름 내내 통나무집의 좋은 점들을 몸소 체험하며 살았다. 바깥은 비가 내려 추적거리는데 집안으로만 들어오면 뽀송뽀송 했다. 밤에 잠도 잘 오고 자고 나면 아침에 몸이 개운했다. 나무 향기가 좋았고 한여름에도 선풍기 없이 살 수 있을 만큼 시원했다. 이곳 금남마을에는 현재 작은 평수의 대지매물이 싼 가격에 나오고 있다. 2백평 정도 대지를 2천만원정도에 골라 살 수 있다. 이들 부부는 이곳의 밭 5백평을 별도로 구입해 농사도 짓고 있다. 각종 채소를 심었고 밭에서 따온 붉은 고추는 지금 가을볕에서 한창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글·사진 / 김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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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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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당 220만원에 지은 목조주택 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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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함이 있는 집
평당 220만원에 지은 목조주택 세채
“처남과 처제와... 우린 모여서 함께 산다.”
처남네와 처제네 식구들이 ‘합류하고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최영환씨에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씨 가족만 산다는 것이 다소 적적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쾌히 승낙했다. 우선 준농림답 4백50평중 3백50평을 대지로 전용하고 필지를 분할했다. 그리고 분할한 대지중 처남네와 처제네에 각각 1백평씩 나눠주었다.
수원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최영환씨는 최근 전원생활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다. 지난 6월부터 짓기 시작한 전원주택이 최근 완공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처남네 식구와 처제네 식구들까지 같은 장소에 집을 지어 함께 살 수 있게 돼 더욱 마음이 설렌다. 최씨가 이 곳의 땅을 구입한 것은 지난 97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의 준농림답 4백50평을 평당 10만원씩 주고 구입했다. 야트막한 산들이 감싸고 있는 데다 주변이 국유지여서 전원생활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뒤인 올 들어서야 비로소 집을 짓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엔 혼자 들어와 살려고 했는데 이런 소식이 알려지면서 처남네와 처제네 식구들이 ‘합류하고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최영환씨에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씨 가족만 산다는 것이 다소 적적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쾌히 승낙했다.
우선 준농림답 4백50평중 3백50평을 대지로 전용하고 필지를 분할했다. 그리고 분할한 대지중 처남네와 처제네에 각각 1백평씩 나눠주었다. 시공은 영진미라클주택에 의뢰하기로 하고 세채의 집을 각각 짓기로 했다. 집집마다 가족 구성원이 다르다는 점에서 각각의 의견과 취향을 반영해 설계하고 마당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집의 위치를 잡았다.
최영환씨의 집은 건평 30평으로 방2개와 화장실, 주방, 거실 등으로 이뤄졌다. 자녀들이 성장한 만큼 노후 생활에 어울리게끔 단층 구조로 거실을 최대한 크게 설계했다. 거실은 기존의 높이와 다르게 오픈형으로 처리해 공간감을 최대한 강조했고 천정마감도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사각 오크 무늬목으로 했다.
현관 앞으로는 데크를 만들었고 벽체는 영진미라클주택의 목조우레탄패널을 사용했다. 외벽 마감은 비닐 사이딩으로 처리했다. 시공비는 평당 2백20만원이 소요됐다. 최영환씨의 처남 윤영환씨의 집은 23평으로 1층이 20평이고 다락방이 3평이다. 윤씨의 직장과 아이들 학교문제로 당장 내려올 수 없어 당분간 주말주택으로 이용할 예정이다. 큰방 1개에 거실, 세평 남짓한 다락방 구조로 설계됐는데 다락방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시공비는 평당 2백30만원으로 다락방 때문에 시공비가 조금 올라갔다. 처제 윤영복씨의 집은 25평.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생활 반경을 작게 설계했다. 거실과 화장실, 드레스룸을 한 공간에 설치해 이동거리가 짧고 편리하도록 했다.
안방의 화장실도 기존 화장실보다 크게 설계해 욕실을 하나의 휴식 공간 개념으로 인식해 설계했다. 거실 바닥은 짙은 갈색온돌마루로 설치해 천정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된 건축은 지난 6월말 시작해 8월 중순경 마무리됐다. 집이 완공되고 한두 개씩 살림이 들어오던 날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고 아이들은 마당 끝에서 끝까지 뜀박질을 하며 신나는 하루를 보냈다.
사실 최영환씨는 처음 집을 지을 당시만 해도 이 곳을 주말주택으로 이용할 셈이었다. 그러나 몇 번 오가다 보니 조용한 시골 분위기에 반해 더 이상 서울에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조만간 서울집을 처분하고 이 곳에 눌러 앉을 생각인데 직장이 있는 수원까지도 50분 정도면 가능하다.
처남 윤영환씨와 처제 윤영복씨는 모든 기반이 서울에 있어 당장 내려 올 수 없어 당분간은 주말주택으로 이용할 계획이다. 이제 주말이면 조용하던 시골 마을이 왁자지껄 아이들 떠드는 소리로 생기가 넘친다. 낮에는 들꽃을 따러 나가기도 하고 밤이면 온 가족이 데크에 모여 별을 세기도 한다. 세 가족의 전원 생활이 가을과 함께 깊어간다.田
글·사진 / 류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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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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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당 230만원에 지은 돌붙임 콘크리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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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알찬 전원주택
평당 230만원에 지은 돌붙임 콘크리트집
건축비는 평당 2백30만원 정도가 소요됐다. 건축업에 종사하는 동생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자재는 직접 구입해 주거나 회사와 제품명을 제시해서 사용하도록 했다. 지대가 높아 겨울에 바람이 심할 것을 우려해 단열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곤지암에서 양평쪽으로 향하는 44번 도로변은 지방도로이면서도 교통량이 꽤 많은 지역이다. 경강국도를 이용해 설악산이나 강릉, 속초를 다니는 사람들이 경강국도가 막히면 이 길을 자주 이용하기 때문이다. 또 경관이 수려하고 산새가 좋아 젊은이들이 드라이브 코스로도 자주 이용한다.
이 지역은 산을 사이에 두고 북으로는 양평지역이 되고 남으로는 여주가 된다. 과거 양평을 선호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주가 서울과 먼 지역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이 쪽을 좀처럼 전원주택지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곤지암에서 양평쪽으로 들어선 사람은 여주 산북면을 지나면 바로 양평 강상면으로 들어선다는 사실을 알고 전원주택지로 정하기도 한다. 박시황 이미자씨 부부도 비슷한 경우에 속한다.
박씨 부부는 서울 가락동의 아파트에 살면서 토요일 오후가 되면 광주와 양평을 돌며 전원주택지를 물색했었다. 그리고 이곳 여주군 산북면 백자리가 곤지암 나들목을 이용하면 결코 서울과 먼 지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이 곳을 전원주택지로 선택했다. 직장이 있는 천호동과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위치였다.
박씨 부부는 95년 5월, 3년간의 다리품을 청산하고 백자리에 준농림전 3백40평을 매입했다. 이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산북면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백자리란 이름은 옛날 남한강물이 이 곳까지 들어와 지나던 배들이 쉬었다 가곤 했는데 그때의 배자리가 지금의 백자리로 변형돼 불려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씨 부부가 매입한 땅은 길보다 다소 낮게 위치해 있어 매립 공사가 불가피했다. 매입 금액과 토목 공사비를 합하니 평당 30만원 꼴이란 계산이 나왔다. 본격적인 건축은 지난 3월부터 시작됐다.
우선 1백80평을 전용해 연건평 48평의 2층집을 지었다. 1층은 33평으로 방 2개와 주방, 거실, 화장실로 꾸몄다. 2층은 15평 규모로 일부를 오픈공간으로 처리했으며 역시 방 2개와 화장실을 들였다.
건축비는 평당 2백30만원 정도가 소요됐다. 건축업에 종사하는 동생의 도움을 많이 받아 저렴하게 지을 수 있었다. 자재는 직접 구입해 주거나 회사와 제품명을 제시해서 사용하도록 했다. 지대가 높아 겨울에 바람이 심할 것을 우려해 단열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벽체는 콘크리트옹벽에 다시 벽돌 쌓았고 외벽 마감은 인조석을 붙였다. 내부 마감은 목조와 조적을 적절히 구사했다.
박시황씨는 수석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 예전에는 주말만 되면 수석을 구하러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래서 집안 구석구석에도 기이한 형상의 크고 작은 수석들이 가득이다.
부인 이미화씨가 전원생활을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는 남편 박시황씨가 워낙 수석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시골로 내려가 살겠다는 말을 자주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을 좋아하고 시골 생활을 동경했던 만큼 언젠가는 시골로 내려가게 될 것이라고 여겨왔었다.
막상 내려오고 보니 전원생활은 이미화씨에게도 새로운 세계였다. 서울에선 자고 나도 머리가 무겁고 기분이 상쾌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머리가 개운하고 가슴도 탁트이는 게 답답한 감이 없어졌다.
이제는 남편보다도 오히려 이 곳을 더 좋아하게 됐다. 서울에선 경험할 수 없었던 정원을 꾸미고 집 주위를 가꾸는 재미가 이미화씨에겐 즐거운 일상이 된것이다.田
글·사진 / 류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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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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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가 아름다운 앞은 단층집 뒤는 2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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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에 지은 집
소나무가 아름다운 앞은 단층집 뒤는 2층집
결국 제독의 추천으로 김씨 부부는 준농림답과 전 그리고 임야를 구입했다. 동네가 마음에 들었던데 비해 가격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준농림답은 평당 1만3천원, 전은 1만5천원, 그리고 임야는 1만원씩이었다.
사람들은 이 곳을 ‘장군마을’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곳이 애초부터 ‘장군마을’은 아니었고 군 출신의 장군들이 하나둘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상택 김지운씨 부부의 경우는 최근에야 이 곳에 합류했다. 김상택씨 역시 대한민국 공군의 장군 출신으로 전원주택지를 알아 보던 중 지인의 소개로 이 곳에 적을 두게 됐다. 김장군을 이 곳으로 이끈 사람은 해군 제독 출신으로 김장군 집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먼저 터를 잡고 살고 있다.
그러나 김상택 김지운씨 부부가 이 곳에 터전을 마련하기까지는 그렇게 쉬운 걸음만은 아니었다. 백두산 근처가 고향인 부인 김지운씨는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이 간절했다. 고향은 못 가더라도 도심을 떠나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
남편 김상택씨가 전역을 하고 곧바로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전원주택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이런일 저런일로 미루며 몇 해를 보내야 했다. 도시생활보다 불편하고 고생스러울 것이라고 말리는 아들의 조언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김지운씨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알게 모르게 96년 이후 시골의 새보금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 다리품을 팔며 많이 다녀보았다. 그러나 마음에 들면 가격이 비쌌고, 가격이 맞으면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평소 알고 지내던 분의 초대로 이 곳 충주시 황산면 복탄리에 오게됐다. 김상택 김지운씨 부부를 초대한 사람은 먼저 전원생활을 시작한 해군 제독 출신의 지인이다. 그는 몇 해 살아보니 참 좋은 곳이라며 복탄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상택 김지운씨 부부도 그동안 다녀본 어느 지역보다 마음에 들었고 제독의 얘기를 듣고 보니 더욱 더 마음이 다가갔다.
아늑하고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결국 제독의 추천으로 김씨 부부는 준농림답과 전 그리고 임야를 구입했다. 동네가 마음에 들었던데 비해 가격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준농림답은 평당 1만3천원, 전은 1만5천원, 그리고 임야는 1만원씩이었다. 본격적인 건축은 지난 봄을 넘겨서야 시작됐다. 건평 60평 규모로 조적조에 내부는 목재로 마감했는데 평당 3백만원 정도가 소요됐다. 방 2개와 반지하식의 아래층에도 방을 하나 마련했다. 반지하식 아래층 방 때문에 정면에서는 단층집으로 보이고 후면에서는 2층집으로 보이는 재미있는 구조가 됐다. 내부 구조는 되도록 거실을 넓게 설계했으며 시골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창을 크게 내었다. 밖으로는 정원도 꾸미고 잔디도 심었다.
집의 위치가 나지막한 야산 자락에 위치해 있어 주변에 있던 소나무들이 자연스럽게 조경수 역할을 한다. 집 옆으로는 인공 폭포와 연못도 만들었다. 이 곳은 예전에 금광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폐광이 됐는데 입구를 잘 다듬고 인조석을 붙여 폭포와 연못이 있는 분위기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들어오는 입구 오른쪽으로는 천연 연못도 있다. 지하에서 계속 물이 올라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둑을 만들어 아예 연못으로 만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근을 심었는데 번식력이 강해서 벌써 연못의 절반이 연잎으로 덮였다. 미꾸라지도 사다 넣었다. 집이 완공되자 가장 좋아한 사람은 아들이었다. 적적하고 불편할 텐데 어떻게 시골에서 살겠냐며 만류하던 아들도 이 곳에 와보고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특히 조카딸은 이 집이좋고 시골이 너무 좋다며 여기서 살다시피 한다.
김지운씨도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 온 뒤로는 소녀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많은 과정을 겪었지만 그래도 선배들의 도움으로 마음에 드는 곳에 큰 어려움 없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됐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먼저 내려와 자리를 잡고 이끌어 준 선배들과 이웃들에게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田
글·사진 류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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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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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너무 마음에 들어 북향집도 마다 않고 지은 하얀 목조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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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있는 집
마을이 너무 마음에 들어 북향집도 마다 않고 지은 하얀 목조주택
서울에 살 때에는 잠을 자고 나도 개운치가 않았는데 여기선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봄이되어 씨가 뿌려지고 싹이 돋아 무럭무럭 자라는 푸성귀들을 보노라면 새삼 신기하고 흐믓하다. 어느새 건강도 회복된 듯 하다.
중부고속도로 곤지암IC를 빠져나와 44번도로 양평방향으로 좌회전해 5km쯤가면 '만선리'라는데가 나온다. 여기서 다시 우회전해 4km쯤 가다보면 멀리 아늑한 야산 자락에 자리한 하얀색 사이딩의 목조주택이 한눈에 들어 온다. 이 곳은 윤일영 장수봉씨 부부가 사는 집으로 행정구역상 여주군 산북면에 속한다. 정북향 집으로 참하고 깔끔해보여 지나는 사람들이 카페나 가든이려니 생각하고 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윤일영씨는 기자출신으로 동아일보에서 33년간 근무 하다가 관제부장직을 끝으로 정년퇴직 했다. 평소 산을 좋아해 용문산, 설악산을 주로 다녔는데 경강국도가 막힐 때마다 이 곳 44번도로를 자주 이용하곤 했다.
그리고 이 곳을 지날 때마다 ‘넉넉한 동네’라고 되뇌이며 노후를 대비한 안식처로 눈여겨 두었다.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고 교통도 편리해 전원생활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정년퇴직 후 여기저기 알아 보았지만 처음 마음에 두었던 산북면 외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 오다가다 눈에 익은 이 곳에 이미 정이 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하얀 목조주택이 있는 있는 나즈막한 산밑을 새로운 둥지로 선택했다. 산을 등져야하는 만큼 북향집이 나올 수 밖에 없어 다소 아쉬웠지만 이미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사실, 대개의 사람들은 남향 집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으나 가격이 비싸거나 기타 환경이 나빠 전원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마음을 비우면 얼마든지 내게 어울리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게 윤일영씨의 설명이다.
결국 97년, 이 곳의 준농림전 8백평을 평당 15만원씩 주고 구입했다. 이중 3백75평에 대해 전용허가를 받았는데 대지가 3백평, 도로가 75평 이었다. 여기에 건평 60평의 목조 주택을 지었다.
지하와 1층이 각각 30평씩으로 1층에는 방이 2개있고, 거실, 주방, 다용도실로 꾸몄으며 밖을 시원하게 내다볼 수 있도록 거실을 널찍하게 설계했다.
건축비는 1억1천만원 정도 들었고 자금은 서울아파트를 처분해 마련했다. 사실 윤일영씨가 전원을 찾게된 가장 큰 동기는 당뇨증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텃밭도 가꾼다면 건강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주 초기에 텃밭 가꾸는 것이 생각보다 다소 힘에 부치기는 했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적응하게 됐다. 아침 저녁으로 운동삼아 텃밭을 일구고 낮에는 책도 보고 이웃 집에 다녀오기도 한다.
이 곳에선 동물 키우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애완견 몇마리와 거위, 오리, 기러기, 닭 등 여러 종류의 가축들이 함께 살고 있다. 처음 전원생활을 시작할 때엔 두려운 마음이 앞서기도 했지만 이제는 동물 식구도 늘어나고 주변 환경도 눈에 익어 이런 마음도 사라졌다.
어느새 건강도 회복된 듯 하다. 서울에 살때에는 잠을 자고 나도 개운치가 않았는데 여기선 잠은 자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잠을 푹자고 나니 머리가 개운하고, 무럭무럭 자라는 푸성귀들을 보노라면 흐믓할 따름이다.
봄이되어 씨가 뿌려지고 싹이 돋아 자라는 모습도 새삼 신기하고 새롭다. 이 제는 서울서 다시 살라면 못 살 지경이 됐다. 자가용을 이용하는 회수도 많이 줄었다. 우선은 자가용을 이용해야할 만큼 급한 용무가 별로 없으며 버스를 타고 읍내나 서울로 나가는데에도 재미를 붙였다. 그만큼 이 곳에서의 생활이 여유롭다는 얘기다.
버스를 타는 것도 처음엔 여간 불편하고 힘든게 아니었으나 마음을 비우니 기다리는 습관도 절로 생기고 나름대로 이 곳에서의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되고 있다. 윤일영씨는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인의 참된 모습을 하나씩 배우고 실천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田
글·사진 / 류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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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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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아름다운 ‘ㄷ’자형 스틸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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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은 전원주택
정원 아름다운 ‘ㄷ’자형 스틸 하우스
입주후 얼마되지 않아선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가 지나다 들러 야외 촬영을 하고 갈 정도로 정원이 잘 꾸며 졌다. 2층에도 안방에서 베란다로 이어지는 통로에 미니 정원을 꾸며 놓아 언제나 풀과 나무를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했다. 스틸로 지은 일산의 주택을 소개한다.
지난 6월 입주한 이후 그동안 시달렸던 두통이 씻은 듯이 나았다. 사당동에 살때까지만해도 매일 두통약을 복용해야할 만큼 증상이 심했는데 이 곳으로 이사한 뒤로는 한 번도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남귀순씨는 이러한 현상이 모두 집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원스런 집구조와 널찍한 실내 공간, 게다가 서울보다 공기까지 좋으니 두통이 말끔히 사라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연수 남귀순씨 부부는 이 곳으로 이사오기 전 사당동 단독주택에서 잠시 머문 것을 제외하면 줄곧 아파트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에겐 아파트 생활은 맞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한적한 양평 시골마을에서 보낸 이들 부부에게 아파트 생활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빽빽이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보면 가슴이 답답했고 높이 솟은 아파트 건물을 보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아파트에 살면서도 5층이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고 대부분이 지상과 가까운 저층에서 살았다. 다른 가정에 비해 다소 아파트 생활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던 편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올림픽선수촌 아파트에 살 때 였다. 이곳에서 2년6개월 정도 살았는데 가족들이 무기력하고 답답해하는 증상이 무척 심해 모두들 적응하는데 꽤나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아파트 생활에 대한 염증이 심해지면서 가족들은 탈 서울을 결심하게 됐다. 그러나 모든 생활이 기반이 있는 서울을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마련한 곳이 일산 장항동이었으며 95년 평당 1백60만원씩을 주고 대지 80평을 마련했다. (지금 이지역은 대략 3백50만원에 거래되고 있음)
당장 집을 지을 여건이 못되었던 터라 우선은 대지만 마련해 놓고 아파트를 벗어났다. 이 때 들어 간 곳이 사당동 단독주택이었다. 집 지을 때까지만 잠시 살겠다던 이 곳에서 꽤 오래 동안 생활하게 됐는데 다소 비좁아도 아파트보다 모두 낫다는 반응이었다.
집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대지를 마련하고부터 4년이 뒤인 올 초 였다. 처음엔 목조 주택을 지을 생각이었다. 우선은 건강에 좋은 것 같았고 보기에도 좋을 듯 싶었다. 그런데 막상 목조주택을 지으려고 보니 친구가 만류했다.
친구 얘기로는 목조주택이 건강에 좋고 보기에 좋을지는 몰라도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라 관리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 친구는 한동안 뉴질랜드에 살았었다. 그 곳 사람들도 목조주택에 많이 짓고 사는데 이들의 경우는 집을 고치고 가꾸는 것 자체가 생활화돼 있어 오히려 이를 즐기는 편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은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이게 됐다.
벽돌집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고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정보를 수집한 끝에 내린 결론은 스틸하우스였다. 우선은 외관이 깔끔해 보였고 골조만 스틸로 세우면 나머지는 모두 목재로도 가능하다고 했다. 또 자유로운 공간연출이 가능해 건축주의 취향을 폭넓게 수용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 대상이 됐다.
시공업체인 포스홈과 충분한 논의를 거친 끝에 지난 4월 드디어 착공에 들어갔다. 그리고 약 두달간의 공사가 진행되고 6월초쯤 집이 완공됐다. 대지 80평에 연건평 60평의 1,2층 구조로 집 모양은 ㄷ자 형이다. 평당 5백만원 정도가 들어 건축비는 모두 3억원 가량이 소요됐다.
ㄷ자 모양의 안쪽에는 정원을 마련했는데 정원이 차지하는 면적은 약 20평 정도다. 그동안 빡빡한 도시생활을 해 왔던 터라 정원만큼은 잘 꾸미고 싶었다. 가운데 키가 큰 소나무를 한 그루 심고 이를 중심으로 둑을 만들어 꽃을 심고 잔디를 깔았으며 앞쪽에는 대나무를 심었다. 대나무는 남편 이연수씨가 좋아해 심었는데 바람이 불면 대나무 잎사귀들의 바스락거림이 인상적이란다.
입주후 얼마되지 않아선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가 지나다 들러 야외 촬영을 하고 갈 정도로 잘 꾸며 놓았다. 정원을 꾸미는데는 모두 3천만원 가량이 소요됐다. 또 2층에도 안방에서 베란다로 이어지는 통로에 미니 정원을 꾸며 놓아 언제나 풀과 나무를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다른 가정에 비해 다소 아파트 생활에 대해 거부감이 심했던 터라 자연미를 최대한 살리는 한편, 넉넉함을 느낄 수 있도록 주거공간과 정원을 절묘하게 연결 지었다.
이제 입주한지 한달 남짓 지났다. 남귀순씨는 입주후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며 좋아했다. 우선은 가족들의 표정이 달라지고 활기가 넘친다며 만족스러워 했다.
가족들은 거실에 누워 정원을 내다보고, 대나무 잎사귀의 바스락거림에 귀 기울이며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 여름을 지내고 있다. 田
시공 포인트
외벽마감 : 드라이비트로 처리했으며 마감 무늬의 터치를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 각기 다른 각도에서 보면 색다른 모양을 볼 수 있다.
거실 : 높은 천정고와 지붕선을 따라 간결하면서도 이색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데 단열에 신경을 많이 썼다.
정원 : 일산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작은 동산과 대나무로 조경했다.
주방 : 거실과 분리해 음식냄새와 지저분한 것을 보이지 않게 했으며 외부 창문 주위에 대나무를 심어 피로감을 덜 수 있도록 했다.
부부침실 : 바닥마감을 맥반석 세라믹 몰탈로 처리(한지 닥종이 장판 마감)해 주인의 예민한 건강에 신경을 썼으며 온실과 연결시켜 설계했다.
2층온실 : 집안 내부의 건조함을 해결하기 위해 초기 단계부터 온실 설치를 유도함으로써 쾌적한 내부 환경을 만들었다.
자녀방 : 높은 천정고를 최대한 활용해, 침대를 원목으로 구성해 공부방과 침실의 이중효과를 창출, 좁은 건축면적의 한계를 극복했다
복도 : 1, 2층 똑같이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시스템 창호를 선택해 탁트임과 외부에서 바라보는 색다름을 강조했다.
설계 포인트
한정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한편, 건축물과 정원의 자연스런 조화에 초점을 맞췄다. 거실 창문을 열어 정원의 미풍이 실내에 전달할 수 있도록 했으며 외부 시선이 미치지 않도록 폐쇄적인 공간 연출을 구현했다.
중앙에 커다란 정원을 만들어 구심점으로 삼고, 대지를 삼등분해 전면은 차고로, 중앙은 계단과 복도로 설정하고, 후면은 공용공간으로 활용했다. 이렇게 구분된 3개의 구역은 각기 다른 모양의 지붕형태로 표현됐으며, 외부로부터의 방어적 기능과 동시에 외부를 향해 열려있는 공간이 되도록 표현했다.
각 공간의 독창성을 강조하기 위해 2층에는 침실공간을 비치해 안정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부부침실과 계단실 사이에 브리지를 형성해 프라이버시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꾸몄다. 또 거실과 식당사이에도 작은 데크를 갖추고 그 앞을 대나무가 심어진 소정원으로 꾸며 외부 공간과의 자연스런 연결을 이끌어 냈다. 도시속에서의 전원주택 역할을 강조했다.
■ 글·사진 / 류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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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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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일출이 한눈에 들어오는 성채를 닮은 벽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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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국도따라 전원주택따라 양양에 지은집
낙산사 일출이 한눈에 들어오는 성채를 닮은 벽돌집
낙산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양양의 언덕위에 성채를 닮은 웅장한 벽돌집이 하나 있다. 집주인 안석현씨는 이집을 꼬박 14개월이 걸려 완성했다. 애초 시공업자에게 공사를 맡겼으나 중도에 문제가 생겨 직영으로 처리했다. 내부는 목조로 마감했는데 목수를 구하지 못해 애를 많이 먹었다는 낙산해변의 벽돌집을 소개한다.
북쪽의 통일전망대에서 거진과 속초를 지나는 해안도로는 강릉-동해-삼척-울진-포항-울산으로 이어지는 긴 길이다. 동해안을 끼고 바다와 함께 달리는 이 도로는 급커브가 많아 험한데 그 경관이 아름다워 자칫 한눈을 팔게 되는 위험한 길이다. 그러나 여유를 갖고 이 길을 지난다면 쉼없이 따라오는 바다에 취하고 때론 산에 취하여 달릴 수 있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특히 이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약 65개의 해수욕장을 만날 수 있는데 일출로 유명한 낙산해수욕장을 비롯해 하조대, 경포대해수욕장 또 그 아래로 내려가면서 옥계, 망상, 맹방, 임원, 호산, 후진 등 유명한 해수욕장들이 많다. 게다가 모래시계란 TV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나서 뜨기 시작한 정동진도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다.
안석현씨 댁은 이 해안도로가에 있다. 속초에서 강릉 쪽으로 가다보면 대포항을 지나 낙산해수욕장이 나온다. 해안도로를 사이에 두고 낙산해수욕장을 빤히 내려다 보는 양양읍 포월리 언덕 위에 이 집이 있다. 성채를 닮은 듯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집은 벽돌의 모자이크 무늬가 선명해 도로에서 한눈에 들어온다.
양양에서 사업을 하는 건축주 안석현 씨가 이곳 준농림 임야를 구입한 후 형질변경하여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은 작년 4월부터다. 그후 꼬박 14개월이 걸려 올 6월 완공하여 입주를 했다.
집주인이 설계의뢰를 할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은 공간을 넓고 시원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1층 70평, 2층 30평 등 총 1백평의 큰 집이 되었다. 실내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거실이며 넓게 처리했다. 거실 크기만 22.5평이다. 골조는 조적으로 하고 외벽도 벽돌로 마감했다. 단 실내 마감은 건강을 생각해 목조로 했다.
이집을 짓는데 순수한 건축비만 평당 4백50만원정도 들었으며 토목공사와 내부 인테리어까지 포함한다면 건축비는 거의 평당 6백만원정도 치였다. 시공을 건축업자에게 맡겼는데 중간에 문제가 생겨 건축주가 직영 처리했다. 그 과정에서 실내마감공사에서 많은 애를 먹었다. 목재로 마감을 하다보니 제대로 된 기술자를 구하기 힘들었다.
이 집은 동향으로 지어져 집에서 일출을 매일 볼 수 있다. 그것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낙산사의 일출을 집에서 볼 수 있도록 집의 위치를 높게했다. 거실은 바닷쪽으로 통창을 냈으며 2층 거실도 바다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도록 했다. 田
■ 글·사진 / 김경래
여행정보·낙산사
의상대 일출 아름다운 관동의 명소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바닷가에 위치한 낙산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년)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곳 해변의 굴 안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굴속에 들어가 예불을 했다. 그러자 관음보살이 수정으로 만든 염주를 주면서 절을 지을 곳을 알려주었다. 그곳에 절을 짓고 낙산사라 했다. 이후 낙산사는 몇차례의 중건을 거쳐 그 규모가 커졌다. 신라 헌안왕 2년(858년) 범일대사가 중창했으나 몽고란으로 소실됐다. 조선세조 13년(1467년)에 왕명으로 크게 중창하였으며 예종 원년(1469년)에도 왕명으로 다시 중건했다. 이후 인조·정조 때 또다시 중건했다. 6.25를 맞으면서 소실되어 1953년에 재건했다. 낙산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다.
의상대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의상대사의 좌선처였던 곳에 1925년 정자를 짓고 의상대라 했다. 육각정으로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위에 있어 전망이 좋아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장관이다.
홍련암
의상대사가 문무와 12년 입신도중 돌다리 위에 이상한 청초를 만나 쫓아가니 석굴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대사는 이상히 여겨 석굴앞 해중 반석위에 나체로 정좌해 7일 7야를 지성으로 기도를 드리니 깊은 바다속에 홍연이 솟아올라 그 홍연 속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심중소원을 간절히 기원하니 소원이 뜻대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홍연암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홍련암은 목조와가로 지어졌는데 전고가 7m50㎝, 폭 8m, 세로 6m나 된다.
홍예문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축조하였다고 전해지며 화강석 26개를 장방형으로 다듬어 홍예모양으로 쌓은 석문이다. 당시 강원도는 26개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을 따라 각 고을의 원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쌓았다고 전한다.
동종
조선 예종이 그의 부왕인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한 종이다. 종의 꼭대기에 꼬리를 튼 용 두마리가 뒤엉켜 종을 달아 매는 용뉴를 이루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동종의 하나다.
7층석탑
단층기단 위에 세워진 높이 6.2m의 이 탑은 부분적으로 손상된 곳이 있으나 상륜까지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 장의 돌로 되어 있다. 탑신보다 넓고 거의 같은 두께의 탑신 괴임돌이 있는 것이 이 탑의 특이한 양식으로 고려시대 이래 특이한 양식의 석탑이다. 창건당시에는 3층이었는데 세조 13년에 현재의 7층으로 조성했다.
벚꽃무늬담장
원통보전의 둘레를 방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이 담장은 조선 세조가 낙산사를 중수할 때 처음으로 축조했다고 전한다. 현재 대부분 터만 남아 있고 근래들어 전체적으로 연결 보수했다. 암키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상하 교차로 동일한 크기의 둥근 화강석을 반복해 박아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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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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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생활 청산하고 가리산 중턱에서 가꾸는 또다른 ‘전원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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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국도따라 전원주택따라 인제에 지은 집
경찰생활 청산하고 가리산 중턱에서 가꾸는 또다른 ‘전원인생’
6백평을 평당 10만원씩 모두 6천만원에 구입했는데 길을 내고 터를 닦는데 오히려 더 많은 돈이 들어갔다. 이 곳은 산중턱에 걸터앉은 천수답으로 바닥이 온통 진흙 밭이었다. 이 곳의 진흙을 모두 퍼내고 돌덩어리를 실어다 다시 메웠는데 모두 25차 분량의 돌들이 채워졌다.
강원도 인제 가리산줄기 중턱에 걸터앉은 명성산장. 아침이면 새들의 지저귐과 자욱한 안개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지난해 문을 연 이후 손님들의 감탄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정진돈 유금주씨 부부는 애초부터 이 곳 사람은 아니었다. 각각 수원과 서울에서 태어나 수도권을 벗어난 적이 없는 전형적인 도시사람들이다. 이 곳에 오기전까지만해도 줄곧 안양에서 살았다.
고향과 같은 도시를 벗어나 이 곳에 새 둥지를 튼 것은 96년 말, 남편 정진돈씨가 심장수술을 받고 직장을 그만두고 부터다. 안양경찰서 조직폭력반에 근무했던 정씨는 늘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고 급기야 심장수술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결국은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할 수 없게 됐고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만 했다. 정씨 부부는 많은 생각이 스쳐갔지만 그해 여름, 휴가차 들린 인제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속초에 묵었다가 따가운 햇살을 피해 계곡을 찾아 들었는데 그 곳이 바로 지금의 가리산 일대였다.
당시 이 근처 민박촌에 묵었는데 가족들은 자연의 넉넉함과 아름다움에 진한 감동을 받았고 그 곳에서의 며칠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었다. 특히 묵었던 민박집 주인이 도시에서 생활하다 이 곳에 혼자 내려와 민박을 경영하던 사람이었는데 주인의 모습이 무척이나 넉넉하고 평화로워 보였다고 한다.
도시에서 음식점도 경영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아무래도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번잡한 도시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리 재고 저리 재다 보면 오히려 진행이 더디게 된다는 생각에 ‘이거다’ 싶으면 결정을 내려 버렸다. 방향이 결정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씨 부부는 인제로 내려와 땅을 얻었고 그 곳이 바로 지금 명성 산장이 있는 인제읍 가리산리다.
이 일대 6백평을 평당 10만원씩 모두 6천만원에 구입했는데 길을 내고 터를 닦는데 오히려 더 많은 돈이 들어갔다. 이 곳은 산중턱에 걸터앉은 천수답으로 바닥이 온통 진흙 수렁이었다. 이 곳의 진흙을 모두 퍼내고 돌덩어리를 실어다 다시 메웠는데 모두 25차 분량의 돌들이 채워졌다. 토목공사비만 대략 8천만원 가량이 소요됐다.
기본적인 공사를 끝내고 본격적인 건축에 들어갔다. 별도의 설계도 없이 그동안 구상했던 계획들을 종이에 그려보고 이를 바탕으로 시공업자와 상의해 집을 지었다. 건축비도 만만치 않았다. 목조로 지었는데 서울에서 보다 자재값이 30%는 더 비쌌다.
우선 살 집을 먼저 지었고 이어 두 동의 숙소를 지었는데 97년 5월 착공에 들어가 그해 12월 모든 공사가 완료 됐다. 땅값과 토목공사비용, 건축비용 등 모두 5억4천만원가량이 들어가 당초 예상을 훨씬 앞질렀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 1월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첫해엔 서운하지 않을 만큼의 수입을 올렸다. 대략 3천여만원의 수익을 올렸는데 7월20일부터 8월10일까지 20일간 모두 2천2백여만원이 들어와 이 때 대부분의 수입이 집중됐다. 찾아오는 손님들은 기업체 연수나 대학생 MT, 래프팅을 즐기러온 사람들과 삼삼오오 찾아오는 개인 손님들이다.
정씨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아주 만족스럽다고 한다. 지난 2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빨리 지났다. 당시 이 곳에 들어올 때만해도 큰아이 수영이가 6살이었고, 작은애 수지가 4살이었는데 큰애는 벌써 초등학교 1학년생이 됐다.
사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일때만하더라도 애들이 학교에 들어가지 전 까지만 있다가 유금주씨와 아이들은 다시 도시로 나갈 작정이었다. 아무래도 시골보다는 도시에서 학교 교육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나 시간은 참으로 빨리지나갔고 이미 큰 아이는 인제초등학교 가리산분교 1학년 생이 됐다. 바쁘게 지내다 보니 시기를 놓쳐 도시로 다시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다.
이 곳에서의 교육에 대해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우선은 애들이 좋아하고 정원이 43명에 불과한 분교이니 만큼 시설이나 교육 환경이 좋고 특히 인성에 바탕은 둔 교육이 마음에 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수영이는 벌써 뒷산으로 달려간다. 유금주씨는 애들 아빠와 아이들을 볼 때면 절로 웃음이 머금어진다고 한다. 정진돈 유금주씨 가족의 꿈결같은 산중일기가 펼쳐지고 있다. 田
글·사진 / 류재청
“도심에선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일이 여기선 평범한 일상이 되고 있어요.
아이들을 볼 때면 ‘이 곳으로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뿐이죠”
우리의 하루는 온갖 새들의 지저귐으로 시작된다. 아침이면 자욱한 안개가 우리집을 감싸고 새털구름, 양떼구름 등 갖가지 모양의 구름들이 몰려왔다 사라지곤 한다.
인제 깊은 산골 산등성이에 위치한 우리집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색깔이 뚜렷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낯빛도 수시로 변한다.
이른봄엔 천연의 나물 축제가 열릴 만큼 갖가지 나물들과 이름모를 식물들이 집 주위로 지천이고 여름이면 우거진 나무 사이로 스며나는 싱그러운 풀 냄새가 우리의 정신을 깨워준다.
사실 처음 문을 열 당시만 해도 ‘이렇게 깊은 산속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올까’라는 생각으로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내심 걱정했던 것보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다녀갔다.
도심에서 살 때 보다 가족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몸도 더 건강해진 듯해 마냥 흐믓하다. 희귀한 벌레들을 잡아 곤충도감에 있는 것과 비교하며 신기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면 ‘이 곳으로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뿐이다.
도심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여기에선 아주 평범한 일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늘 똑같은 일상의 지루함임 반복됐던 도시생활에 비하면 이곳에서의 하루는 참으로 빨리도 지나간다. 아침인가 싶으면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그런가하면 이내 적막한 고요가 감도는 밤이 된다. 그러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처음에 가졌던 두려움이나 반신반의하던 생각은 모두 사라졌다. 고되기는 하지만 하루하루가 바쁘고 즐겁고 유쾌하다. 우리는 이 곳에서 매일매일 꿀맛 같은 단잠을 청한다.
글 정진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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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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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자락서산삼씨 뿌리며 사는 사람이 지은 황토집 돌너와 지붕은 생선비늘과 같이 파닥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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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사는 집
두타산자락서산삼씨 뿌리며 사는 사람이 지은 황토집
돌너와 지붕은 생선비늘과 같이 파닥이고…
백두대간의 가운데쯤에 해발 1천3백52m의 두타산이 있다. 이 심산유곡의 아랫동네에서 산삼씨를 뿌리며 사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신성하고 그만큼 예민해 기르기 힘든 약초인 산삼을 재배하며 사는 박재영씨가 두타산자락에 지은 황토집을 찾아보았다.
심마니가 아니라도 삼척에 가면 심을 볼 수 있고 운이 좋다면 싼값에 몸보신 하는 횡재도 할 수 있다. 몇날 며칠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히 하여 산신령에 빌고 산에 올라도 평생 한번 만날까 말까 한다는 산삼.
이렇듯 선택된 사람들의 눈에만 띄는 신이 내린 영약을 직접 대면하는 행운을 잡으려면 삼척의 외딴 산골로 가보라. 이곳에는 산삼 씨를 뿌리며 사는 사람들이 여럿 살고 있다. 삼척시 미로면 하건노리에서 황토집을 지어 살고 있는 박재영씨도 이런 사람중 하나다.
삼척시와 동해시, 정선군 등에 걸쳐 있는 두타산은 많은 전설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동해안의 명산이다. 해발 1천3백52m로 산수가 아름다워 사계절 등산객들이 끊이지 않고 찾는 곳이다. 두타산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동네가 삼척시 미로면이다. 이곳에서 두타산의 깎아지른 산자락을 뒤로하여 자리를 잡고 있는 박재영씨의 황토집은 돌너와 지붕의 기하학적 무늬가 멀리서 보았을 때 생선비늘과도 같이 파닥인다.
박재영씨는 삼척시 노곡면 여삼리 출신이다. 삼척에서도 오지인 여삼리는 장뇌삼(씨를 받아 재배하는 산삼)의 원산지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던 70년대 초반 여삼리 주민들은 산등성이를 넘어 꼬불꼬불 걸어들어 와야 하는 마을 진입로를 거의 맨손으로 닦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하였던지 이곳 마을의 새마을 사업은 서울의 ‘높은 사람’에게까지 보고가 들어가 ‘높은 사람’이 몸소 현장을 방문하는 야단법석이 벌어졌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서울서 높은 사람이 온다하니 선물을 준비해야 겠는데 너무 시골이라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고민끝에 생각해 낸 것이 산에다 몰래 심어놓은 장뇌삼이었다. 그것을 몇뿌리 캐 높은 사람의 손에 들려 보냈는데 장뇌삼이 출세를 하려고 그랬는지 청와대까지 들어가 대통령을 보신시켜 주었다. 그러자 소문이 났다. 대통령이 먹었다고 하니 돈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여삼리의 장뇌삼을 찾게 되었고 차츰 유명세를 탔다.
쉰을 훨씬 넘긴 박재영씨는 여삼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장뇌삼을 기르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직업이 되었다.
그의 명함을 보면 큰 글씨로 ‘산심촌’이라 되어 있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산삼·희귀약초재배’라 쓰여져 있다. 산삼을 재배하는 참으로 (희)귀한 사람이다.
그가 여삼리를 떠나 이곳 미로면 하건노리에 황토집을 지어 들어온 것도 순전히 산삼을 재배하기 위해서다. 집 바로 곁으로 두타산 험한 준령의 꼬리가 내려져 있어 산삼재배지로서는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 땅 1천여평을 구입해 1백80평정도 대지로 전용하여 서른두평의 집을 지었다. 평당 건축비는 정확하게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2백2십만원 정도 들었다.
시공은 농심마니회에서 같이 활동하는 회원에게 맡겼다. 농심마니회는 전국의 유명한 산을 찾아 다니며 산삼 모종을 심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박재영씨는 이 모임에 지금까지 13년동안이나 산삼의 종묘를 공급하고 있다.
집을 짓고 나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도 집의 시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쳐다보면 속상한 구석들이 많다. 가장 불만인 것은 황토집이면서도 그 벽체를 판넬로 하였다는 것이다. 판넬을 세우고 겉만 황토로 시공을 했다. 진짜 황토집을 짓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것은 돌너와로 올린 지붕이다. 철원에 있는 옛날집을 헐면서 버리는 것을 구해왔는데 운반비까지 1백60만원들었다. 박재영씨가 황토집을 고집한 것은 산삼과 같이 가장 자연과 가까운 집을 짓고 싶어서 였다. 산삼은 아주 예민한 식물이다. 환경이 조금만 달라져도 자라지 않는다.
집 주변으로 그는 산삼이 자랄 수 있는 자연환경을 만들 생각이다. 한마디로 깊은 산과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 산삼을 심어 수확을 하겠다는 것인데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처음으로 시도하는 일이다. 이런 환경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의 집 주변에는 깊은 산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들이 많다. 엄나무, 오가피나무, 가시오가피나무 등 모두 희귀한 약재들이다.
산삼 종묘를 산에 심은 후 그것을 수확할 수 있는 확률은 20%다. 열뿌리를 심으면 두뿌리만 수확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장뇌삼은 자라면서 이런 나무들의 뿌리와 엉켜야 제대로 된 모양을 낸다. 모양이 좋아야 제값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천연산삼과 비슷한 산삼일수록 비싼데 30년생을 기준으로 값은 30만~1백만원선으로 천차만별이다. 다른 농사와 달리 산삼을 재배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는 힘이 덜 든다. 그러나 한번 심고 나서 수확을 할 때까지는 수십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멀리보고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농사 산삼재배는 그래서 농사짓는 것보다도 덜 힘들면서 또 더 힘들다. 田
글·사진 / 김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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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