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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물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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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물이 무섭다
시골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얼까.
대부분 한적한 산속이나, 외진 곳에 살고 싶어 하면서도 도둑 걱정에 주저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면 도둑이란 것도 쥐처럼 숨을 구멍이 가까이 있어야 드나드는 모양입니다. 사람들 말로는 도둑은 외진 시골집보다는, 연립이나 아파트처럼 밀집된 공동주택에 많다더군요.
여태껏 몇 년을 살면서, 문도 안 닫고 다녔는데도(먼저 살던 농가는 아예 자물통이 고장나서 잠가지지도 않았지요) 없어진 물건 하나 없었지요. 뒷집 아줌마가 문앞에 오이나, 살구 같은 걸 놓고 간 일은 있지만.... 그런데 살면서 알게 되었는데, 정말 무서운 것은 물입니다.
서울이라고 홍수에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만, 어느 정도 예방 장치가 되어 있고 유사시에 대처할 만한 여건이 좋지만, 시골은 특히 외따로 떨어져 살면서 겪는 큰비는 정말 혼자서 치러야 하는 자연과의 대결이지요.
이태전 큰비가 내렸는데, 다행히 살던 곳이 좀 높은 지대라 침수 염려는 없었지만, 뒤곁에 쌓아 놓은 돌담이 사태가 나며 무너져 내려, 물길을 막아 자칫 낡은 벽을 무너뜨릴 뻔했지요.
중부지방을 강타했던 큰비는 며칠 사이에 일년치 강수량을 퍼붓는 바람에 의정부, 송추, 연천 일대에 큰 피해를 주었지요. 유난히 골짜기가 많은 수동지역도 큰 피해를 보았는데, 큰비의 시작이 새벽에 퍼부어서 더욱 피해가 많았지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곤히 자고나니, 바깥이 온통 폭격 맞은 전쟁터같았습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부러져 있고, 도로가 내려앉고, 다리마다 물에 떠내려 온 나무들이 걸려서 난간이 모두 부서져 있고, 전신주가 쓰러지고, 읍으로 나가는 유일한 도로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내려앉고, 벌건 물들은 이를 드러내듯 도로를 갉아대고 있었지요.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지난 밤에 집에 들어올 때도 마을 입구에 있던 낚시터에 캐미라이트가 여기저기 던져져 있어, 참 부럽다는 마음으로 들어왔는데, 하루 아침에 낚시터는 흔적도 없고, 난데없는 모래언덕이 쌓여 있더군요.
나중에 들으니, 새벽에 퍼부은 비로 낚시터 주인이 급히 가족을 데리고 피신하였는데, 막 불어난 물에 자동차가 떠밀려갈까 봐 그걸 건지러 들어갔다가 그만 물에 휩쓸려 자동차와 함께 떠내려갔다더군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큰물이 가시고 포크레인이 며칠째 파헤쳤지만 주인의 시신은 찾지도 못하고, 일주일쯤 지나서 대성리 쪽에서 찾았답니다. 이야기만 들어도 아찔한데, 마침 그 낚시터도 새로 인수한 지 며칠 되지 않아 겪은 일이라니, 사람의 운명이 참 묘하더군요.
그 바람에 없는 돈에 화재보험을 들었는데, 무슨 보험이 목조주택은 사정을 해야 겨우 들어주더군요. 친구의 권유로 풍수해까지 보험을 들었는데 일년에 십여 만원으로 일단 물과 불 걱정은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하루에 600밀리라는 초유의 비가 내린 탓도 있지만 피서철을 맞아 골짜기에 텐트를 쳤던 피서객들이 많이 피해를 보았지요. 물골에서만 7~8명이 사망했다니 큰 피해입니다.
나중에 마을 노인들에게 들으니, 임야를 마구 파헤치고 나무를 베어 그대로 둔 것이 탈이라더군요. 벌겋게 벗겨놓은 산들이 사태가 나고, 여기저기 베어 놓은 나무들이 떠내려와 다리마다 막아 버려 물들이 범람하였는데, 골짜기마다 물가로 행락시설을 늘이고, 흙을 메꿔 집을 짓는 바람에 큰물이 나면 자연히 물높이가 올라가는 거랍니다.
이런 걸 보아서도 가능한 전원주택은 높은 곳은 토목을 단단히 하고, 특히 물골을 잘 잡아 놓되, 베어 낸 자리에는 잔디나 대체 조림을 확실히 해 두어야 합니다. 또 물가처럼 낮은 곳은 충분히 흙을 쌓아 올려 물길을 피하고, 가능한 마을 사람들에게 큰물이 났을 때의 물높이를 알아두어야 하겠습니다.
대개 교량이나 하천 폭은 무한정 크게 할 수가 없어서 몇 십년의 평균 강우량에 대비한 것인데, 삼십년 하천이니, 20년 교량이니 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삼십 년에 한 번, 이십 년에 한 번꼴로 큰물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말이더군요. 우리나라 기후가 점차 아열대로 변하며, 여름철 장마가 집중호우의 성격으로 바뀌고 있으니, 물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만약 큰물이 날 경우, 조금의 미련도 없이 우선 몸부터 피해야 하겠습니다. 대개 목숨을 잃는 경우를 보면, 물건을 꺼내려고 다시 들어가다가 봉변을 당한 경우가 많더군요.
그리고 뒤에 가파른 산자락이나 깊은 골짜기를 끼고 있는 경우, 자연적인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 좋으며, 자연 구거(골짜기물)의 경우 관을 매립하는 것보다는 일단 열려진 골짜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안전하며, 주변의 흙이 깎여 나가는 경우만 막는 한편, 덤불이나 넝쿨 식물들을 베어내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사태의 경우는 낙엽이나 솔잎으로 두텁게 쌓여 있는 경우, 엄청난 비에도 스폰지처럼 물을 빨아 들이고 흙을 움켜쥐는 효과가 있는데, 그것을 인위적으로 벗겨낼 경우 아무리 작은 면적이라도 그 부분으로 빗물이 스며 들어가면서 단단했던 지반이 갈라지며 사태가 난답니다. 그러니 뒤편에 산자락을 두고 있는 집의 경우, 가능한 배후의 숲이나 나무, 땅은 그대로 유지하는 편이 좋습니다.
■ 물골안에서 이시백
글쓴이 이시백씨는 중학교 교사이며 소설가다.
서울서 생활하다 현재 남양주시 수동면 물골안이란 동네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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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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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의 詩로 쓰는 전원풍경] 고향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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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의 詩로 쓰는 전원풍경
고향의 봄
그때 쯤 그곳에 가면 늘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를 닮은 볕 따스한 계절이 뜨락에 걸터 앉아
밭에 나갈 씨앗을 고르고 있었다
눈이 녹는 양지에는 햇풀들이 실눈을 뜨고
얼음이 풀리면 이내 시냇물 소리가
아지랑이 날아가는
마을 어귀까지 나가 까치발을 하고
바람이 가득 담아 올 봄소식을
해질녘이 되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내 묵혀 두었던 기지개를 켜는 나른한 봄날
그때 쯤 그곳에 가면 늘
기다리는 것들이 있었고
기다림을 끝내고 눈을 뜨는
새순처럼 여린 생명들이 있었다
■글 김경래(본지 편집자문위원·(주)좋은집 개발사업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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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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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웅천의 시골체험기] 다시 시골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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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주년 기획Ⅲ
유웅천의 시골체험기
다시 시골로 돌아가기
이런 저런 시골생활의 체험이 담긴 글을 읽노라면 어느새 시골에 가 있는 기분이다. 시골생활의 재미와 이모저모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 외에도 이 같은 수기는 예비 전원생활자들에겐 적잖은 길잡이 역할도 하게 된다. 시골 생활의 경험이 없는 도시인이라면 설레임으로 다가올 것이고, 경험이 있는 사람에겐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올 것이다. 본지는 시골생활의 단면이 진솔하게 배어 있는 유웅천씨의 전원 체험기 ‘다시 시골로 돌아가기’를 창간 2주년 기획으로 싣는다. 유웅천씨는 40대 초반으로 현재 방송 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청주 근처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이 글은 본지 홈페이지(http://www.countryhome.co.kr) 게시판에 실린 것을 정리한 것으로 필자의 느낌을 최대한 전달하기 위해 내용은 물론 문장이나 문체의 손질없이 내용을 그대로 전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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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전원 주택을 짓고 시골행을 준비할 때부터 글을 썼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집을 짓는 과정이며 시골행에 대한 준비 과정 등을 모두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땐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2년을 산 뒤 시골생활을 청산하고 도시로 돌아오면서 그 기록을 하지 못한 것이 슬펐다. 안타깝기도 했다. 2년간의 시골생활에서 내게 남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시골에 사는 2년 동안 정말 농부처럼 일했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자랐지만 농사를 지어 본 적은 없었다. 이북에서 월남한 후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제대 후 장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집을 남겨놓고 다시 돌아오는 날,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에 못이 박힐 정도로 일해서 가꿔 놓은 집을 두고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억울했다. 이렇게 떠날 것을 .......
사랑스런 아내와 초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 역시 말이 없었다. 평소와 다른 아버지의 과묵함에 이사를 한다는 설렘조차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첫 시골생활은 끝이 났다.
도시로 돌아온 후 나는 시골생활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시골 생활을 화제로 삼는 것도 꺼렸다. 한번 실패한 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나보다 더 힘들어했던 아내와 아들 때문이었다. 시골 생활은 아픔으로만 남아 있었다.
한 두해가 지나면서 다시 시골 생활이 그리워졌다. 밤이면 시골집을 뛰어다니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다시 시골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감추려고 애썼는데.......
팔려고 내놓은 시골의 전원 주택은 아직 팔리지 않고 있었다. 처음 아내는 나의 이런 생활을 환영하지 않았다. 무모한 첫 번째의 시골행이 가져다 준 고통에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이번에도 내 편이 돼 주었다. 대신 첫번째와는 달리 아내가 원할 때까지 온 가족이 이사를 하지는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아이도 좀 더 커야 하고 시골 집 주변의 생활여건도 개선돼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분명히 했다.
다시 시골로 이사를 가려면 한 십여 년은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가족 모두가 다시 이사를 가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시골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기뻤다. 이제 주말이면 나는 다시 시골에 가 잔디를 깎고 페인트를 칠하고 마당을 쓴다.
이번에는 시골생활이 실패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에 가서 집짓고 2년을 살지 않았던가 말이 2년이지, 정말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모른다. 그때도 살았는데.......
시행 착오 경험도 있도 또 완전히 이사를 하지 않는 것이니 다소 여유도 있고. 다시 시골로 돌아 가겠단느 생각을 굳힌 후 난 전원 생활과 관련한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 잊기 전에 기록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자칫 허공으로 날아갈 뻔했던 2년을 되찾게 됐다는 기쁨도 그런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또 전원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어쩌면 다시 시작하려는 시골 생활에 새로운 기쁨이 되지 않을까
덮치기로 정말 새가 잡히네
아내와 아들 웅천이가 몸을 숨기고 거실 창을 통해 흰 눈이 하얗게 쌓인 집 앞 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덮치기에 새가 집힐 것인가를 반신반의하면서. 잠시후 ‘탁,소리와 함께 새들이 갑자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동시에 아내와 아들이 거실문을 박차고 신도 채 신지 않은 채 앞 논으로 튀어 나갔다.
덮치기에 잡혀 있는 새를 집어 든 아들의 두 손이 하늘로 힘차게 솟아올랐다. 개선 장군이 따로 없었다. 아내와 아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함께 덮치기로 새를 잡았다는 놀라움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아니 이런 덮치기로 새가 잡히다니. 그날 하루 우리는 열마리 가까운 새를 잡았다.
아내와 웅천이는 당초 덮치기로 새를 잡을 수 있다는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둘의 놀라움과 기쁨은 더 컸을 것이다. 그날은 정말 엄청나게 눈이 내렸다. 30센티미터 가까운 폭설이었다. 내가 본 것중에 가장 많은 눈이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는 아내와 아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새를 잡아주고 싶었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덮치기를 이용해 새를 잡는 것은 겨울철 가장 신나는 놀이였다. 덮치기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부러지지 않고 잘 휘는 물푸레나무나 싸리나무를 활처럼 구부린 다음 칡을 이용해 그물망을 뜬다. 나중에 새를 덮치는 그물망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예쁘게 뜨는 방법이 있지만 어떤 방법이든 나중에 새가 달아나지 못하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겨울이지만 집 뒷산에는 그물을 뜨기에 적합한 칡이 많았다.
다음은 볏짚을 이용해 매트를 만든다. 그물망이 덮쳤을 때 새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평평하게만 만들면 된다. 그런 다음 제법 굵은 나무로 튼튼한 활대를 만들고 이 활대에 탄력성이 있는 굵은 고무 밧줄을 묶는다. 고무 맛줄을 두 어 번 회전시킨 후 그물망을 끼우고 볏집을 연결하면 그물망은 펑펑 소리를 낼 정도로 볏집에 밀착이 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그물망에 벼이삭이나 수수 등을 매단 뒤 나무 걸쇠를 만들면 덮치기가 완성되는 것이다. 새가 벼이삭이나 수수를 부리로 쪼면 걸쇠가 풀리면서 그물망이 새를 덮치게 되는 것이다. 2십여 년만에 만들어 보는 데도 덮치기 만드는 방법은 모두 기억이 났다.
아내와 아들뿐만 아니라 나 역시 너무나 즐거운 하루였다. 아들 만한 나이였을 때 친구들과 새를 잡기 위해 들이고 산이고 뛰어 다니던 생각이 났다. 아들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를 하나 만든 표정이었다. 게다가 덮치기를 만들어 사실상 맨 손으로 새를 잡은 아빠에 대한 경외감에 빠져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들은 지금도 겨울에 눈만 내리면 덮치기 얘기를 하곤 한다. 정말 신기하고 놀라왔다고, 또 아빠가 덮치기를 만들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시골에 살면 아내와 아들에게 자랑스런 아빠, 그리고 큰소리칠 수 있는 아빠가 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번개
휴, 정말 번개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밤하늘을 가장 높은 곳에서 서쪽 하늘까지 반으로 쩍 가르면서 내리치는 섬광.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울부짖는 천둥소리...
피할 곳 하나 없는 벌판에 하늘을 보고 알몸으로 누워 그 번개와 천둥을 온 몸으로 받아 내야 하는 공포. 어린 시절 시골에 살아 많이 경험했지만 번개와 천둥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는 정말 알지 못했다.
아내와 아들은 나보다도 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곳을 벗어나서 시내 여관으로 달려가야 한단 말인가. 그럼 이 난리에 차를 타고 간다고? 혹시 자동차에 번개라도 내리치면....... 어떡할 것인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어쩐담.......
그때 갑자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불빛이 거실의 유치창을 내려치고 곧이어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꽈 꽝........ 도대체 이 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게다가 갑자기 온 동네가 정전이 돼 암흑으로 변하고 말았다.
정말로 기절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집 앞 전신주의 변압기가 번개에 맞은 것이었다. 아니 번개가 집 앞에 떨어지다니, 다음에는 어디로 떨어질 것인가........ 혹시 우리집에.....끔찍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날 밤과 새벽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다음날 아침 한전에서 나와 전신주의 변압기를 수리하고 그 곳에 피뢰침을 달았다. 지금도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그날의 공포를 잊을 수가 없다. 신기한 것은 그런데도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아무도 없는 허허 벌판에 알몸으로 하늘을 보고 누워 온 몸으로 번개를 맞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불쑥 찾아온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삼겹살과 돌부리
시골 생활의 큰 호사 가운데 한가지는 맛있는 삼겹살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참숯에 석쇠를 올려놓고 구워 먹는 삼겹살의 맛은 압권이다. 일반 후라이팬에 구운 삽겹살은 기름이 지글지글해 다소 느끼할 때가 있다. 그러나 참숯에 석쇠 등을 올려놓고 기름이 모두 빠지게 구운 삼겹살은 정말 고소하다.
참숯에 굽는 삼겹살은 다소 두껍게 쓸어야 한다. 너무 얇게 쓸면 화력이 좋은 숯불에 모두 녹아버리거나 볼품없게 되기 쉽다. 숯불에 구워 먹는 삼겹살은 비갯살이 많은 것이 오히려 좋다. 그래야 더욱 쫄깃쫄깃하다.
아직도 시골에서는 동네사람들이 돈을 모아 돼지를 산 뒤 이를 잡아 집집마다 고기를 나눠 먹는 경우가 많다. 시골 사람들은 이를 돌부리라고 한다. 보통은 명절을 전후해서 많이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래도 과거보다는 시골사람들의 경제적인 사정이 좋아진데다 농민들은 일반 정육점에서 사먹는 고기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서너 사람이 뜻을 모아 돼지를 잡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돌부리로 잡는 돼지고기는 정육점 고기보다도 최소한 두세배는 맛이 있다. 그냥도 맛있는 돌부리 고기를 숯불로 구워 먹는 맛이란 .......
돼지 돌부리를 하는 날은 마을의 잔칫날이다. 돼지를 잡는데 돈을 내지 않았더라도 모든 동네 사람들이 총출동한다. 돼지 내장을 갈라 끓는 물에 먼저 데쳐 먹고 간이나 돼지 머리는 가마솥에 삶아 소금이나 된장을 찍어 막걸리나 소주 안주로 삼는다. 돌부리 생각만 하면 이웃 집 형의 일화를 잊을 수 없다.
옆집 전원 주택에 전세를 살던 그 형은 서울 출신이었는데 그동안 시골 생활 경험이 없었다. 하루는 이 형과 돼지를 잡는 돌부리 현장에 갔는데 여기서 일이 생긴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동네 사람이 이 형에게 돼지 생간을 날 것으로 먹기를 권한 것이다.
사람 좋은 이 형은 평소 안면이 별로 없는 동네 사람이 권하자 이를 단호히 뿌리치지 못하고 엉거주춤 돼지 생간을 받아 먹고 말았다.
옆집형은 한 번도 돼지 생간을 날 것으로 먹어 보지 못한 것은 물론 돼지고기를 날 것으로 먹는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돼지 생간을 받아먹는 그 형의 표정은 정말로 쳐다 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씹지도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어쩔 수 없이 꿀꺽 돼지 생간을 삼켜 버렸다. 안쓰럽다 못해 눈물이 날 정도였다. 나중에 그 형은 집을 돌아가 먹은 것을 모두 토했다고 했다.
시골 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별 일을 다 겪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어디 이뿐이랴 정말 식당이나 실내에서 구운 기름이 줄줄 흐르는 삼겹살은 삼겹살도 아니다. 참숯에 구워 기름이 모두 빠진 노릇노릇한 삼겹살을 잔디밭에 돗자리에 깔고 먹는 그 맛, 아 정말 잊을 수 가 없다.
겨울 나기
겨울 나기 시골 생활에서 가장 힘든 계절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겨울이다. 무엇보다도 시골의 겨울은 너무나 춥다.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겨울 바람은 정말이지 몸 깊숙이 추위를 느끼게 한다.
시골의 황량함도 도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푸른 잎이 모두 떨어진 들판은 보기만 해도 스산함이 느껴진다. 우리 가족도 마찬 가지였지만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시골 생활에서 가장 좌절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겨울 때문일 것이다.
벽난로에서 방금 꺼낸 군고구마를 먹으며 거실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풍경, 겨울 추위는 이런 낭만을 날려 버리기 일쑤다. 벽난로가 있어도 연통이 짧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실내에 연기가 차는 경우가 많고 일일이 나무를 챙겨 불을 지핀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또 전기 난로가 있고 보일러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해도 시골의 겨울은 언제나 춥기만 하다
다시 시골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지금도 사실 가장 두려운 것은 겨울 추위다 그만큼 겨울은 시골에서 상대하기 힘든 상대인 것이다. 겨울이 임박한 12월이면 나무도 월동준비가 필요하다. 가능하면 좀 다른 나무를 심고자 했던 내 욕심으로 우리 시골집 정원에는 추위에 약한 나무가 많았다. 석류나무와 단감나무, 매실 등등...
첫 겨울에는 앞 논에 있던 짚을 얻어다가 나무의 겨울옷을 입혀 주었다. 아마 나무들이 몹시 추웠을 것이다 숭숭 짚 사이로 나무들은 속살을 그대로 내보였다 겨울의 칼바람은 그 속을 헤집고 다녔다.
사실 짚으로 나무를 싸 주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나무가 곧고 가지가 없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꼼꼼히 나무를 싸 주기란 쉽지 않았다 보기도 솜씨 없는 엄마가 묶어준 여자아이의 뒷머리만큼이나 흉하다.....
시골 생활을 다시 결심한 올해는 나무들에게 짚으로 만든 새끼 옷을 입혀 줬다, 이제는 새끼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철물점에서 새끼 두루마리를 발견했을 때 너무나 기뻤다. 6천 원을 주고 산 새끼 한 두루마리는 십 여 그루 나무를 모두 매어 주고도 남았다. 새끼로 묶어 준 겨울 나무는 너무나 보기 좋았다.
스타킹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중학교 신입생 같았다. 또 바람이 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겨울 바람이 차다고 해도 두터운 겨울옷을 챙겨 입은 나무들이 든든해 보였다.
이제 나무들은 이 겨울을 잘 이겨낼 것이다. 내년 봄이면 다시 잎을 내고 꽃을 피우겠지 시골의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그래도 견딜 수 있는 것은 봄에 대한 이런 기대 때문이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무들은 푸른 옷으로 또 갈아입을 것이다. 시골의 봄이 더 좋은 것도 추운 겨울이 있어서 일게다.
진돗개
진돗개 나는 진돗개 매니아다. 하루가 멀다하고 인터넷의 진돗개 사이트를 검색한다. 특히 나는 백구가 좋다. 한 컴퓨터 광고에서 백구 진돗개가 등장한 후 백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백구가 주는 고귀한 느낌에 사람과의 친근감이 더해져 더욱 마음에 든다.
내가 처음 진돗개를 기른 것은 시골 생활에서 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보안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산과 경계를 이룬 집의 특성상 산짐승을 위협하기 위한 개가 필요했다.
첫 강아지는 황구였다. 청주 시내에 있는 한 애견 가게에서 20만원인가를 주고 샀지만 나와 별로 인연이 없었나 보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종류의 개여서 백구와 교환했다..
진돗개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정말 진돗개만큼 순종 시비가 뜨거운 동물도 없을 것이다. 한국 진돗개 협회와 한국 애견 협회 한국 애완동물 보호협회 거기다가 국견협회에 한국 진돗개 연구회까지, 협회와 동호회가 많아서 안될 것도 없지만, 문제는 각 협회별로 주장하는 진돗개 순종의 모습이 다르다는 데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진도산 진돗개에 대한 평가다. 일부 협회가 진도산 진돗개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반면 일부 협회는 잘 다듬어진 개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 진돗개 연구회와 애완동물 보호협회의 회원이다. 그렇지만 나는 어느 협회의 개보다는 진도산 진돗개를 좋아한다.
내가 진도산 진돗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육지와 비교적 왕래가 많지 않았던 그 옛날 진도가 가장 한국적인 개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결국 내가 좋아하는 개는 진도지역의 개가 아니라 한국 고유의 개인 셈이다.
사람들은 흔히 범띠는 개를 잘 기르지 못한다고 한다. 개가 잘 죽는다고도 하고, 어렸을 적 범띠인 나의 어머니도 종종 그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렇지만 범띠인 나는 진돗개가 너무나 좋다. 나는 처음 황구 진돗개를 기른 뒤 다음은 풍산개 그리고 다음은 황구와 백구를 한꺼번에 길렀다.
2년의 시골 생활을 끝내고 도시로 다시 돌아와 사는 지금은 처갓집에 백두라는 이름의 진돗개 백구 한 마리를 위탁해 기르고 있다. 그러나 1년에 서너 번 밖에 처갓집을 가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백두와 거의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진돗개도 6개월 이상 묶어만 놓으면 이른바 똥개가 되는 법인데.....당분간 시골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형편 때문에 너무나 안따깝다.
내가 진돗개에 대해 관심을 가진 후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그동안 내가 알던 진돗개가 진도에 있는 진돗개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무섭기만 한 것으로 생각했던 진돗개, 머리가 크고 목이 굵은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진돗개, 당당한 어깨와 우람한 체격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진돗개,,,,,,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진돗개는 진짜 진돗개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진돗개는 개의 종류상 사냥개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너구리 사냥개인 것이다. 날렵한 들짐승을 잡아야 하는 사냥개가 어떻게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고 우람한 체격일수 있단 말인가. 무거운 몸으론 5분만 달리면 너구리를 잡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몸을 추단하기 조차 어려울 것이다.
퇴근길에서 돌아 왔을 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던 진돗개, 나는 진돗개가 너무나 좋다..
경이로운 작업, 페인트칠
페인트칠 페인트칠이 정말 재미있는 일이란 것을 알게 된 것도 시골 생활을 통해 얻은 큰 수확이다. 사실 기계나 도구를 다루는 데 숙맥인 내가 페인트칠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집을 처음 지을 때는 전문 업자가 페인트칠을 했다. 그러나 내가 지은 목조 주택에는 페인트칠이 필요한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내가 처음으로 페인트칠을 한 것은 나무로 만든 담이었다. 벌목업을 하는 이웃집 아저씨에게 낙엽송을 한 트럭 사서 만든 말목 모양의 나무담은 그냥 보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비에 젖어 썩는 것을 막기에는 페인트칠이 필요했다.
휘발성이 좋은 시너를 희석하면 페인트칠을 하기에 편했다. 그러나 자칫 페인트의 색깔이 지나치게 얇아져 방수효과가 떨어지고 보기도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페인트가 많이 들어가고 힘이 들어도 페인트를 희석시키지 않았다.
페인트의 위력을 실감한 것은 나무로 만든 데크 때문이다. 시골 생활을 처음 청산한 후 2년 동안 시골집은 비어 있었다. 난 그때 그 집을 잊기 위해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2년 동안 페인트가 벗겨진 데크는 망가져 있었다.
벗겨진 페인트 사이로 스며들어간 빗물은 나무 마루를 안쪽에서부터 썩게 만들었다. 손으로 누르기만 해도 나무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페인트만 제대로 칠해 놓았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목조 주택에는 목조용 페인트를 써야 한다. 스테인 계통의 페인트가 제 격이다. 일반 페인트 가게에서 목조 전용 페인트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행히 인터넷을 통해 전문업체를 찾아 페인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목조 전용 페인트는 일반 페인트보다 값이 다소 비쌌다. 나는 2년에 한 번씩 페인트칠을 했다.
전문 업자에게 맡긴 첫 번째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족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했다. 건설업과 인테리어 일을 했던 처남들은 정말 큰 도움이 됐다. 비용도 전문업자에게 맡길 경우 3십평 기준으로 족히 2-3백은 충분히 넘는다.
그러나 처남들의 도움으로 페인트 값만으로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일요일을 이용해 시골집을 찾아 온 처남들과 하루 온 종일을 일을 한 뒤에야 페인트칠을 끝낼 수 있었다.
고개며 다리며 팔이며 정말 안 아픈 곳이 하나도 없었다. 옷은 물론 얼굴과 안경알에도 페인트 자국이 뒤범벅이 돼 있었다. 얼굴에 묻은 페인트를 지우는 일은 고통스럽다. 특히 눈 윗 부분에 묻은 페인트를 지우기란......시너를 묻혀 지우기도 하고 집 식구의 매니큐어 지우는 약을 쓰기도 하지만 쉽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페인트칠만큼 경이로운 작업도 없다. 보기 흉하고 남루했던 것도 페인트칠 한 두 번이면 정말 새것으로 변한다. 그러나 나뭇결까지 보이는 스테인류의 페인트가 아닌 일반 페인트는 조심해야 한다. 꼼꼼히 살펴보지 않으면 페인트 색에 가려 나무가 썩어 가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쉽다.
페인트칠을 마친 뒤 담배 한 모금을 빠는 낭만 , 자기 집을 돌보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 좋은 여유이다.
벌에 쏘이다
벌에 쏘이다. 아내는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기 시골 출신이잖아. 덩치는 산만한 사람이 그까짓 벌에 쏘였다고 엄살은.......” 그러나 나는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땅이 흔들려 발을 디딜 수조차 없었다. 속도 메스꺼워 지는 것 같고 머리도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정말 왜 이러지. 전에 벌에 쏘였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뒤 좌석에 나를 태우고 차로 2십여 분쯤 걸리는 시내 병원으로 운전을 하면서 아내는 계속해서 괜찮으냐고 물었다. 이제는 온 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열도 오르고 있었다. 몸에 마비 증세도 나타나고 있었다. 갑자기 알콜 농도 50%이상의 독주를 먹은 것 같은 뜨거움이 두 눈으로 치밀어 올랐다.
그 순간, 나를 돌아보던 아내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변하고 있었다. 아내가 갑자기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중앙선을 넘어 달리는 가 하면 교차로에서도 서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 침착하고 신중하던 아내의 그런 모습을 보자 더 큰 불안감이 몰려 왔다. 게다가 호흡까지 가빠졌다.
‘내가 정말 벌에 물려 죽는단 말인가......’ 그렇게 도착한 병원에서 해독제 주사를 맞은 후 다행히 40도를 넘나들던 열이 내렸다. 의사는 장기에까지 붉은 반점이 생기면서 부어 호흡 곤란 증세가 일어났기 때문이라며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정말 40 가까이 살면서 링거를 맞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물린 벌은 침에 가장 독성이 강한 말벌이었다. 네 방을 쏘였는데도 일년 중 가장 독이 강한 때라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장마철동안 풀을 까지 않았더니 집과 인접한 뒷산에는 잡초가 너무나 우거져 있었다. 게다가 풀과 작은 나무들이 뿌리 채 죽어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가능하면 나는 제초제를 뿌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덕분에 뒷산에 심은 주목은 잡초에 포위돼 숨쉬기조차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일요일을 이용해 이 잡초를 제거하려다 벌에 쏘인 것이다. 아마도 말벌들은 자신들의 집을 낫으로 치고 들어오는 이방인의 침입에 온몸을 던져 저항한 것이리라.
설마 하고 아무런 대비 없이 풀베기 작업에 나선 나의 잘못도 컸다. 땅 속에 집을 만드는 말벌은 주로 여름을 전후해 나타나기 시작해 그 곳에 벌집이 있는 것을 모른 것도 한 원인이 됐다.
하기야 벌침은 일부러도 맞는다고도 하니 지금 생각하면 벌에 쏘인 것이 몸에 큰 보약이 됐을 지도 모르겠다. 그 일이 있은 후 이른봄이면 혹시 벌이 뒷산이나 집 벽체에 집을 짓지 않나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연례행사가 됐다.
마을 소풍
마을 어귀의 확성기가 이른 새벽부터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에, 에, 반장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마을 야유회를 가는 날입니다. 주민 여러분께서는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아침 8시까지 마을 앞 주차장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휴일이지만 출발 시간에 맞추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난 아내의 눈에는 졸음기가 다 가시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야유회였다.
그러나 말이 야유회지 사실은 횟집으로 생선회를 먹으로 가는 것이었다. 횟집에서 보내온 소형 버스는 동네 사람들을 모두 태운 뒤 대청호 인근의 이름난 매운탕 마을인 ‘어부동’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오늘의 메뉴는 송어와 향어 비빔회였다. 술 몇 순배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돌아갔다. 바닥을 드러낸 소주병들이 곳곳에서 널부러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바로, 술을 먹기 위한 어른들의 소풍날인 것이다. 평소 술을 크게 즐기지 않는 나는 물론 아내도 부담을 느끼는 눈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소풍 놀이는 그때부터였다. 술이 거나하게 오른 동네 어른들이 마침내 노래방 반주기를 부른 것이었다.
“사장님, 여기 노래방 좀 틀어 줘!” 우리는 마을 15가구 주민 가운데 유일한 30대 부부였다. 마을 지도자 아저씨부부가 50대일 거고, 반장님 부부가 60대.......나보다 3살 먹은 형이 있지만 노총각이라서 야유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날, 흘러간 옛 노래 정말 원없이 들었다. 추억의 ‘갑돌이와 갑순이.에 맞춰 어깨춤도 추고 아버지 나이 또래의 마을 어른들과 어깨를 마주 잡고 ‘미아리 눈물 고개,....... 로 시작되는 노래도 목이 터지라 합창을 하고, 재롱 떠느라고 아내와 듀엣으로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란 노래도 부르고........반장님이 시켜서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와 뽀뽀도 했다. 제일 젊으니까 대표로 해야 한다나,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평소 점잖키로 두번째 가라면 서러울 내가 아니었던가 아침부터 시작된 야유회는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술로 일심이 된 것이다.
술자리는 버스를 타고 마을로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가능하면 마을 주민들과 어울리고자 했던 나로서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집으로 돌아 온 우리 부부는 바로 잠에 골아 떨어졌다. 술도 채고 너무나 피곤했다. 그러나 순박한 마을 어른들이랑 보낸 하루가 싫지만은 않았다.
일주일쯤 지난 후 이어진 술자리에서 반장아저씨와 마을 어른들이 우리 부부를 칭찬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세대 차가 많이 나서 재미없었을 텐데, 젊은 부부가 잘 어울려 주어서 고맙다”고........
한달 간의 호텔 생활
공사가 계속해서 늦어지고 있었다. 이사 날짜가 이제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 건축이 마무리되는 시기를 두번 세번 확인하고 그리고도 미덥지 못해 한 달이나 이사 시기를 여유있게 잡았는데...... 어찌할 것인가.
공사비를 선 지급한 것이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고 이렇게 공사가 늦어지다니. 빠듯한 자금에 내 집 말고도 다른 집을 두 채 더 짓는다고 하더니 혹시 내가 지불한 공사비가 그 곳으로.......
당초 팔려고 하던 아파트도 매매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전세를 주지 않았던가. 초등학교 일 학년인 아들도 이미 시골 학교로 전학을 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걱정 속에서도 이삿날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말았다.
이삿짐 센터 보관 창고에 세간살이를 맡긴 후 필요한 옷가지 등을 챙기는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꼬박 한 달을 호텔에서 살았다. 값이 싼 여관에서 보낼 수도 있었지만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세상일 다 안다고 큰소리치고 살았는데 식구들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다니, 나는 헛똑똑이였다. 건축과 관련해서 아무런 경험도 없고 막상 일을 시작해 놓고 보니 집짓는 일이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라고, 아무리 변명을 하려 해도 내 자신이 용납이 되지 않았다.
저녁이면 세탁소에서 입을 옷을 챙기고 아침이면 아들을 차에 태워 학교로 등교시켰다. 그다음 아내를 집짓는 공사 현장에 데려다 주고 다시 차로 30분을 달려 출근해야 했다. 아내는 하루 종일 쉴 곳도 없는 그 곳에서, 공사 인부들과 지내면서 내가 퇴근 후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곳도 한 달 동안이나......
그때 팔지 못하고 전세를 주었던 아파트로 다시 돌아와 또 다시 시골로 돌아가기를 고대하고 있는 나도 정말 어지간한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어제는 퇴근길에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났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했다.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하던 아내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한 달간의 호텔 생활은 지금도 ,나에게 지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아있다.
또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집짓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경고로, 최악의 사태도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경험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어려웠던 그 시절, 나는, 아내와 아들이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정말 가슴 속 깊이 새겼다.
나는 팔방미인 집수리공?
나도 내가 집수리와 집가꾸기에 이렇게 재주(?)가 많은 줄은 정말 몰랐다. 또 집을 수리하고 가꾸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뉴질랜드를 여행하고 돌아오면서 비행기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김포공항의 그 우중충한 회색빛에 절망해 시골행을 감행하기로 결정은 했지만 내가 시골살이를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내심 걱정도 많았다.
언젠가 말했지만 나는 정말 기계나 도구를 다루는데 숙맥이나 다름없었다. 어렸을 적은 물론이고 결혼해서도 나는 전구하나도 제대로 갈아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하셨고 결혼후에는 아내가 대신했다. 어렸을 적 라디오도 내 손만 가면 고장이 나고 커서는 벽에 못하나만 박고 나도 잘못 휘둘러 손에 피멍이 맺히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자격증만 없을 뿐 자칭 전문 집수리공(?)이다.
전등을 갈아 끼우는 일은 이제 말하고 싶지도 않다. 정원의 가로등도 통나무를 이용해 내가 직접 만들었고 데크앞 마당에 위치한 수돗가도 내손으로 설치했다. 지붕위의 실리콘 작업은 물론이고 페인트칠도 자신있다. 발목굵기만 한 낙엽송을 사들여 말목처럼 만든 집 주변 나무담도 내손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온돌마루의 기름칠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수도관도 교체해보고 정원과 현관입구에 돌다리도 깔았다. 나무만 구입했을 뿐 업자를 사지 않고 정원 공사를 벌여 조경을 위해 심은 나무 하나 하나 내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다. 집 주변 광산에서 산 정원석도 동네 형들과 함께 경운기로 옮겨 마당 한켠에 세워 놓았다.
목재를 구하다가 진도개집도 두 채나 만들고 송판과 널판지를 이용해 문패도 만들어 아내와 아들과 함께 직접 이름을 써넣었다. 그러는사이 내 손 마디마디 굳은살이 보기 좋게 생겼다. 초등학교 시설 3년여간 배구 선수 생활을 해서 가뜩이나 투박했던 손이 그때 정말 볼만했었다.
정말 몰랐다. 내 손으로 내 집을 가꾸는 일이 이렇게 신나는 일인 줄은....... 목욕을 하듯 땀으로 흠뻑 젖은 작업복을 벗고 얼음물처럼 차가운 지하수로 샤워를 하면서 느끼는 상쾌함, 정말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어느덧 3월, 벌써부터 집을 가꾸며 땀으로 범벅이 될 모습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설렌다. 올 봄에는 집 입구에 이팝나무를 심고, 정원에는 쪽동백이나 떼죽나무를 심어야지.
잔디깍기도 새로 구입하고 집 뒤 작은 텃밭에는 비교적 재배가 쉬운 열무와 고추 그리고 옥수수를 심어야지. 또 4월쯤에는 처남들과 함께 집 안팎의 페인트칠을 해야지...... 다음에는 또 무엇을 할까?
마을 공동 작업
어렸을 적 고향 시골에서는 마을 공동 작업이 참으로 많았다. 그때는 이를 부역이라고 불렀는데,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하천이나 도로등을 정비하거나 하수도를 설치하곤 했다. 마음씨 좋은 둘째형이 “또 내가 나가야지”하며 작업복을 입고 새벽같이 집을 나서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80년대 이후 시골에 젊은 사람들이 줄면서 이 마을 공동 작업은 치로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또 유급화되었다. 시골에 집을 짓고 2년간의 시골 생활을 하는 동안 빼놓을 수 없는 기억 가운데 하나가 이 마을 공동 작업이다. 우리 마을의 공동 작업은 주로 마을 진입로 가꾸기였다.
요즘 같은 이른봄에는 지난해 자랐던 잡초를 제거하고 명절을 전후해서는 출향인사들을 맞기 위해 대청소를 하곤 했다. 그때 심은 왕자두나무가 아마 올해는 과실을 맺을텐데......
마을 15가구가 나무 7-8그루씩 왕자두를 수확해 갖기로 했는데 지금도 유효할까? 도시로 이사를 나왔지만 맘씨좋은 동네 어른들이 나도 인정해 줄 것 같긴 한데.......
시골출신이지만 농사를 짓지 않아 낫질이 서툴렀던 나는 동네 아저씨들이 깍은 잡초를 치우는 일을 주로 했었다. 낡은 와이셔츠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이른 새벽부터 땀을 흘린 뒤 동네 아저씨들이랑 마셨던 그 막걸리 맛, 술을 별로 즐기진 않지만 그 막걸리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2만원을 내놓으며 자기가 번 돈이라며 자랑을 했다. 이유를 물으니 그 날은 면사무소에서 돈이 조금 나와 마을 공동 작업에 나선 아줌마들과 함께 나눠 가졌단다.
다음달 면 소재지에 있는 닭집에서 토종닭을 사서 백숙을 끓여 먹었다. 남편 몸 보신시켜 주겠다는 아내의 배려 덕으로....... 도시로 이사를 한 후 내가 좋아하는 인순이형이 마을 반장이 되었다. 형이 부르면 올해는 나도 마을 공동 작업에 같이 나설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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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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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물골안 사람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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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물골안 사람들1
차로 달리면 서울에서 30분 거리고, 고개만 넘으면 차로 가득 찬 경춘국도가 있는 곳인데도 수동은 참 묘한 곳입니다. 마치터널을 넘어서면 맑던 저 편의 하늘이 금세 안개나 이슬비에 덮여 있기도 하고, 차창을 열면 대번에 바람 냄새가 다릅니다.
그런데 마석에서 가곡리 고개를 넘어 오면, 이것은 단지 눈에 뵈는 자연 풍경뿐만이 아니라 일시에 타임머신을 탄 듯, 나는 60년대 정도로 돌아가 있는 듯합니다.
800여 미터의 천마산, 철마산, 주금산, 축령산으로 둘러싸여 움푹 파여 들어간 분지형의 수동은 아직까지 불편한 도로와 교통사정으로 예전의 모습을 그런 대로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차가 다니는 도로변에는 노래방도 있고, 피자집도 있고, 카페도 있지만, 수동이란 곳이 워낙 물골이 많고, 그렇게 가지를 치고 들어선 수십 개의 숨겨진 골짜기들과 그곳에 대를 잇고 살아오는 사람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성격도 고개 넘어 마석과는 차이가 큽니다. 우선 사람들이 느릿느릿하고, 웬간한 일로는 변화가 없는 무표정한 얼굴. 처음에는 퉁명스럽고, 무례하게 느껴지던 이곳 사람들의 표정이 사실 오래 전 우리들이 지녔던 그 때의 표정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잠시만 늑장을 부려도 뒷사람에게 밀려나는 요즘의 도시생활에서 늘 시간에 쫓기듯 아둥바둥대던 사람들에게 이러한 물골 사람들의 표정은 낯설고,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가게에 들어가도 ‘어서 오라’는 말 한마디 없고, 물건을 사고 나와도 ‘잘 가라’는 말 역시 없다. 마주친 차에게 양보를 해 주어도 꾸벅 고개 숙이는 일없이 덤덤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지나친다.
처음에는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분개도 해보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이러한 무표정이 오히려 니꺼, 내꺼 살벌하게 따지지 않고, 얼굴 가득 화사한 웃음을 짓다가도 어쩌다 발등이라도 밟을라치면 대번에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도시사람들의 그 냉혹한 이해타산에서 한 발 비켜선 이들이 지닌 여유임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 급한 바람에 새치기를 해도, 여기 사람들은 불을 번쩍거리거나, 경적을 울려대지 않았다. 아마 무슨 바쁜 사정이 있나 보다 여기는 정도다.
고개 하나만 넘어도 용납되지 않을 일들이 이곳에서는 대체로 말 한 마디 없이 잘 넘어갔다. 돈이 모자란다고 하니 설계비도 깎아주는 사무소 사람들과, 세금도 싸게 감면해 주려고 이리저리 궁리를 해 주는 공무원들과,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고 지내는 철물점과 설비상회, 기름가게 주인들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도 우리와 담장을 붙이고 살던 바로 그 이웃들이었음에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이 되었으며, 그래서 낯설고 생경하게만 느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외지 사람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이 골짜기에서 그런 대로 중국집도 하고, 비디오가게도 하고, 슈퍼도 하고 해서 도대체 어떻게 장사가 되나 했더니, 이곳은 거의가 대를 이어 지내온 한집안 식구들이나 마찬가지이고 보니, 가게를 가도 오로지 그곳만 가고, 철물점은 중국집에서 짜장면 팔아주고, 중국집은 그 철물점에서 문고리를 살며, 살아오는 것입니다.
고개만 넘으면 대형 할인매장도 생기고, 시간마다 할인점 버스도 드나들지만 여전히 그런 가게들이 문을 닫지 않고 장사를 해 나가는 걸 보면 아직도 이곳 사람들은 몇 푼 돈의 무게보다 오랫동안 그들이 이어온 안면의 온기를 더 무겁게 여기는가 봅니다.
이런 안면의 무게는 사실 처음 들어선 외지인에게는 다소 무겁고, 차갑게 느껴지기 십상입니다. 더욱이 식당이나 가게를 처음 하려는 외지인들은 몇 달 안 가 기겁을 하고 문을 닫고 말지요. 목욕탕도 하나이고 보니, 이 골짜기 사람들은 죄다 거기서 만나게 됩니다.
언제 볼까 싶어 이 땅, 저 땅 구경만 잔뜩 하고,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헤어졌던 부동산 주인을 나는 거기서 만났고, 깜박이 켜지 않고 끼어 든다고 전조등을 번쩍이며 경적을 올렸던 중국집 배달원도 거기서 만났습니다.
적어도 이 골짜기에서는 언제 다시 보겠느냐는 배짱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서너 번 얼굴을 마주치게도 되고. 얼굴이라도 붉히며 말다툼을 했던 이도 목욕탕 안에서 서로 등을 밀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나는 요즘 절대 이 골짜기에서는 경적을 울리지 않습니다. 새치기를 해도 ‘아마 바쁜 일이 있나 보다’ ‘누가 갑자기 병이라도 난 걸까’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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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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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의 詩로 쓰는 전원풍경] 오월에 내리는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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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의 詩로 쓰는 전원풍경
오월에 내리는 봄비
귀신처럼 흰
목련이 피어 목련이 된 거리에
또 라일락이 피고 있었다
라일락처럼 보슬보슬 봄비가 내리고
목련의 머리든 라일락의 어깨든 봄비가 내려
모두 그 봄비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젖는 것은 마음이었다
봄비에 젖는 것 모두 빗물이 되고 있었다
꽃들은 빗물 소리를 내며
주룩주룩 흘러 내리고 있었다
꽃이 비로 내리는 거리의 비는
귀신처럼 흰 거리의 비는
마음을 촉촉이 적셔 내리고도
당분간 그치지 않을 것을 믿고 있었다
가슴살이 문드러져 또 새살이 돋도록 내릴 것을
그대와 나 모두 알고 있었다
■ 글 김경래(본지 편집자문위원·(주)좋은집 개발사업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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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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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물골안 사람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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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물골안 사람들2
배트맨이라고 아시지요?
그런데 물골에도 배트맨이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후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다는 분인데, 오가는 자동차들 교통정리도 하고, 아이들 훈계도 주고, 하루도 빠짐없이 운수리 일대 도로 순찰과 호구 방문을 하시는 아저씨입니다.
배트맨은 그분이 스스로 붙인 별호인 셈인데, 아이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자신의 이미지를 심어 주기 위해, 이름 대신 배트맨이라고 부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러한 자신의 깊은 의도를 무시하고, 자신을 배트맨이라고 부르지 않는 아이들에게 군밤을 주기도 합니다.
머리에 군밤을 맞은 아이들은 눈물을 짜고난 뒤부터는 꼬박꼬박 배트맨이라고 부르는데, 그분이 얼핏 보기엔 약간 이상한 분 같기도 하지만, 어떤 때 보면 여간 영악한 게 아닙니다.
적어도 수동에서는 어디든 못 가는 곳이 없으니, 파출소건 면사무소건 제집처럼 드나들고, 지나가는 차들이 모두 자신의 자가용입니다.
예전의 파출소장을 일제 순사의 끄나풀이라며 혼내 주어야 한다고 식식거리고, 소장은 그를 가리켜 ‘영리한 바보’라고 서로 여간 견제하는 게 아닙니다.
선을 무려 100번 정도 보았지만 여전히 총각인 배트맨은 만화 가게, 슈퍼, 소방서, 카센터, 분식집을 일일이 순회 점검하며, 아이들의 등 뒤에서 갑자기 ‘배트맨!’하는 함성과 함께 나타나곤 합니다.
혹 외지에서 처음 들어와 가게를 하던 이들이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이 들어와, 정확치 못한 발음으로 이런 저런 간섭을 하며 장사하는데 걸리적거리게 하는 바람에 파출소에 신고 전화를 하면, 마치 자기집 자가용에 오르기라도 하듯 거드름을 피우며 올라타고 갔다가는, 어김없이 이튿날 안부라도 묻듯 찾아오는 배트맨.
이젠 사람들은 하루라도 그를 보지 못하면 제대로 일과가 열리지 않은 것처럼 하나의 친근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황향순이라는 화가분도 있지요.말로는 아마튜어라고 하지만 상당한 수준의 솜씨에 특히 고양이를 좋아하고, 잘 그리는 분이지요.
그분은 얼마나 고양이를 좋아하는지 댁에 가면 고양이들이 방안이나 층계마다 가족처럼 지나다니는데, 내가 보기엔 그놈이 그놈 같아 구별이 안되건만 그 하나마다 이름이 죄다 있고, 고양이가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구멍 문도 만들어 놓았지요.
고양이뿐만이 아니라 그분은 산 생명을 참 소중히 아끼는 분인데, 거리에 버려져서 피부병투성이가 된 토끼를 데려다가 살려, 지금은 개보다 더 슈퍼 토끼가 된 엘리스가 있고, 개도 있습니다.
그 분은 누구보다 총 든 사냥꾼들을 아주 싫어하는데, 그분의 눈에 띄면 곧바로 카메라를 들고 나가 찍힘을 당하거나, 고함을 들어야 합니다.
이제는 적어도 그분의 집 근처에는 총 든 이들이 뜸하고, 왔다가도 그분만 보면 얼굴을 가리고 달아나는 판이라니 살아 있는 수동의 환경 지킴이지요. 그림을 그리다가 잘 안되면 모두가 잠든 밤에 고양이를 앞에 앉혀 놓고 소주 몇 잔을 나눈다는 향순씨는 마치 살아 있는 동화의 인물 같지요.
겨울밤이면 얼어붙은 개울에 나가 새파란 달빛 아래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지요. 적어도 수동에서는 그것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참으로 꿈 같은 일이지요.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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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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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의 詩로 쓰는 전원풍경] 꿈속의 귀거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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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의 詩로 쓰는 전원풍경
꿈속의 귀거래사
밤이면 꿈을 꾼다
내 키가 풀처럼 자라 / 풀숲에서 사랑을 하고
풀숲에서 알을 슬고 / 풀숲에서 잠이 들고
머리 위로 이슬이 내리면 / 이슬처럼 피어나는 풀꽃들
바람에 쓸리는 풀숲 사이로 / 잃어버릴 듯 별이 보였다
나뭇가지에 걸려 / 새가 되는 별
걸어서는 다다를 수 없는 휘청거림이 / 아황산가스로 폐를 앓는 도시
시내와 시내만 겨우 잇는 시내버스가 / 힘겹게 숨통을 열고
대륙에서 건너온 영하의 바람에 / 도시는 언제나 목이 잠겨 있었다
내 폐는 얼마나 썩어 있을까?
기침이 날 때마다 / 떠나고 싶었다
내게로 왔던 것들 모두 / 돌려 보내고
풀숲으로 / 풀꽃이 되어 / 그렇게 살고 싶었다
■글 김경래(본지 편집자문위원(주)좋은집 개발사업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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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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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시골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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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시골교회 이야기
시골에 처음 들어와 겪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마을 분들과의 텃세라고도 합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텃세라기보다는 스스로 낯선 곳에 들어온 고립감과 하루 종일 이야기 나눌 이웃하나 얻지 못한 허전함 그것이라고 봅니다.
저도 처음 불당골에 들어와서 어제만 해도 소음과 가로등과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다가 하루만에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막막하기만한 어둠에 놓이고 나니 여간 썰렁한 게 아니더군요.
그런데 제일 먼저 제 집을 찾아 준 분이 바로 근처의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 부부였습니다. 이따금 나가던 교회이긴 했지만, 막상 누군가 내 집을 찾아 준 이웃을 처음 대하니 참으로 반갑기만 했지요.
또 우연찮게 시골 생활할 곳을 찾아다니다가 수년 전 산비탈에 오뚝하니 올라선 하얀 교회당을 보고는 너무 아름다운 정경이라 그 앞에 차를 세우고 사진까지 찍었는데, 바로 그 교회 집사님이 찾아 오셨으니 인연이라면 깊은 연이겠지요.
그런 연유로 저는 마을에서 차로 한 십 분쯤 되는, 수년 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언덕 위의 작은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이웃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들을 통해 많은 도움과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주민들이 개울에서 돌을 하나하나 주워다 스스로 지었다는 ‘보린 교회’는 자연스럽게 외지이주민과 원주민을 연결시켜주는 하나의 다리가 되는 셈이지요.
내가 어느 특정한 종교를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이든, 절이든, 외지 분들이 주민들과 갈등을 단기간에 줄이고 쉽게 그 틈으로 섞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의 하나로 제안하는 바입니다.
일주일 내내 밭이며, 논, 서로 다른 직장에 흩어져 살던 물골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노래 부르고, 머리를 조아리고, 두 손을 모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소중한 만남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올 봄에 뿌릴 씨앗과 아이들과, 지난 여름의 수해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들은 얼핏 시골로 홀로 들어와 부딪치게 되는 막막한 고립감과 외로움을 해결해 주는 좋은 방안이 될 것입니다.
아직은 생경한 철물점이 어디 있고, 어디가 벽돌이 싸고, 벽난로에 쓸 화목들은 누구네 간벌한 산에서 얻어 올 수 있고, 큰물을 만나면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등등 처음 들어와 사는 이로서는 요긴한 도움들을 그곳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시골 교회는 자칫 소홀하기 쉬운 자녀들의 교육환경과 문화적 체험, 믿을만한 사람들과의 친교를 한번에 채워 넣는 도움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신앙이라는 게 지금도 헐렁하니 가뭄에 콩 나듯 코끝이나 비치는 처지이지만 이곳에 교회가 설 때부터 삶과 신앙을 함께 해 온 주민들에겐 참으로 소중한 삶터일 것입니다.
주민들이 손수 주워 온 돌들로 한 켜 한 켜 쌓아 올려진 시골 교회의 앞마당에는 여전히 주민들이 산이나 들에서 한 뿌리씩 캐어다 심은 들꽃들이 갈아 피고, 철마다 거둬들인 푸성귀와 곡식들로 만든 음식을 함께 나누는 시골교회는 단순한 신앙의 의미를 넘어서 건강한 공동체의 삶을 잇고, 펼쳐나가는 두레 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울 밑에 봉선화가 소담스레 피고, 금낭화와 산나리가 소복이 들어앉은 교회당에 저녁이면 종이 울리고, 발그레한 노을 속에 민들레 꽃씨처럼 날아가는 그 소리를 듣고 골짜기마다 사는 이들이 한데 모여 풍금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그 아름다운 정경 또한 시골만이 지닌 아름다운 풍경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언제든 이 아름다운 전원 속의 시골교회를 몸소 눈으로 보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한 번 들러 보세요. 수동에서 수산리 가는 길가에 ‘보린 교회’라는 언덕바지까지 층계로 이어진 아름다운 시골교회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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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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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의 詩로 쓰는 전원풍경] 도시 떠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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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의 詩로 쓰는 전원풍경
도시 떠나기
언제 어디서 왔던가
기억들은 아득하고
부딛치며 산 상처들만
한쪽씩 허물어져 줄을 선다
지폐와 동전 몇 개로 바꾼
떠나는 자유
누군가 있어 잡을 것만 같아
돌아다 보면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분주한 도시
되도록 많이 남겨두고
알몸으로 떠날 것
■글 김경래(인터넷 웹진 ‘OK시골’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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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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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텃밭 일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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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골·안·에·서·온·편·지
텃밭 일구기
시골생활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텃밭이지요.
가족들이 먹을 푸성귀와 찬거리들을 몸소 길러 먹는다는 경제적 잇점 말고도, 집 가까운 곳에 무언가 흙을 만지며 길러낸다는 즐거움이 있지요.
도시에서 남의 눈치 보면서 아파트 놀이터 한 모퉁이를 일구는 노인분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의 잃어버린 흙의 향수가 물씬 풍겨나 가슴이 아려 오더군요.
심지어는 장미를 심어 놓은 베란다 밑의 자투리 땅을 놓고도, 이웃간에 서로 니꺼 내꺼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고층아파트의 베란다나 창가에 페트병을 잘라 만든 포트에 흙 한줌 담아 길러내는 고추와 가지, 상추를 볼 때마다 안타까움과 함께 유난히 흙을 사랑하는 우리네의 심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서양인과 달리, 평생을 흙 속에서 살아온 농경민족의 습성은 거의 초식동물을 닮았지요. 유순한 눈망울과 소를 닮은 심성들은 고기를 먹고사는 백인들의 공격적인 삶과는 참 다르지요.
특히 자연을 다루는 관점은 확연히 다르지요. 서양사람들이 자연을 극복하고, 물리쳐야 할 적대적인 대상으로 인식하는 반면에 동양인에게 그것은 마음의 고향이며, 어머니와 같은,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터전이지요. 그 이유로 서양인들은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문명을 발달시켰다는 말도 있긴 합니다.
새마을 운동 이후, 보릿고개를 넘었다고 안도의 숨을 쉬긴 하지만 소위 굴뚝산업이라는 제조업의 공장들이 도시에 지어지면서, 농촌의 많은 사람들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지요.
농촌은 비어져가고, 도시의 아파트에 살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 속에 흙을 담고 무엇인가 가슴 속에 씨를 부리곤 하지요. 가뭄이 들면 가물어서 어쩌나 서울사람들도 두고 온 고향을 걱정합니다.
홍수가 지면 두고 온 고향집의 흙담이며, 둑방의 아랫 배미 논 걱정에 잠을 설치곤 합니다. 아마 이런 마음이 도심의 한가운데서도, 옥상 위에 흙을 퍼담아 두고도, 무언가 씨를 뿌리게 하고, 꺼칠한 흙이나마 손에 묻히게 하는 가봅니다.
시골로 내려온 분들이 제일 먼저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마당 한가운데 푸성귀를 심고, 기르는 것인데, 상추나 고추, 쑥갓, 파, 마늘, 감자 등 여름 한 철, 집안의 반찬거리는 사실 적은 면적의 텃밭으로도 먹고 남을 만하니 ‘광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시골생활의 여유는 바로 그런 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산을 넘으면, 나이 드신 분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는데, 그분들이 짓는 농사를 곁에서 볼 때마다 참 건강하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겨울 바람이 가시기 무섭게 두엄을 내고, 밭을 갈고, 겨우내 꺼칠하니 버려져 있던 텃밭은 금세 탐스런 흙들로 채워지고, 단정하게 정리가 됩니다.
한 곁에 모종을 내는 비닐하우스까지 만들어 놓고, 여나무 분의 노인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동으로 길러내는 푸성귀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모습을 늘 부러움으로 바라보곤 했지요.
대개 시골에서 4인 한가족이 먹을 만한 텃밭은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어야 할까요.
생각보다 적은 땅이면 충분하지요. 2~3평 정도의 텃밭에 고추 4포기, 상추 2~3포기, 쑥갓 2~3포기, 대파 2~3포기, 가지 2~3포기면 충분합니다. 거기에 좀 넝쿨이 넓게 퍼지는 호박이나 오이, 참외 등은 산기슭이나 자투리 땅에 따로 심어두는 편이 좋습니다.
참외는 2~3포기면 충분히 먹는데, 의외로 잘 자라지요. 다만 순 따주기를 해야 맛도 달고, 크기도 실합니다. 그러나 수박만큼은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 거름을 충분히 주어야 하고, 꽃이 피면 사정없이 순을 따 주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기껏 어린애 주먹만한 것이 달릴 뿐이지요.
여름 푸성귀가 지나고 나면 재빨리 넝쿨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열무나 배추, 무우를 심지요. 열무는 잘 자라지만, 배추나 무우는 물을 잘 주어야 하고, 모종낼 때 솎아주기를 잘 해야 실해집니다.
무우도 잘못하면 무청만 수북하고, 밑이 들지 않는 경우가 있지요. 그밖에 감자나 고구마도 잘되는데, 감자의 생명력은 대단하지요.
거름이 잘된 밭에 모종을 내거나, 아니면 씨감자를 심으면 됩니다. 감자는 적당히 잘라서 나무 태운 재를 발라 심으면 좋다고 합니다.
시골생활의 초기에는 너무 서두르지 말고, 그저 집안 가족들의 반찬거리나 한여름 별미로 맛보는 과일거리들을 길러내는 데 만족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넓은 밭을 일구다 지치는 경우도 있고, 실패를 해서 주저앉게 되는 일도 있으니 적어도 10평 이내로 적은 밭에 오밀조밀 여러 가지 화초처럼 길러보고, 그 밭에서 특히 잘되는 품목을 골라 차차 규모를 넓혀 가는 게 좋지요.
가족이 먹고도 남는 것들은 도시에 사는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보내는 것도 뜻 있는 일이지요. 가능하면 농약이나 제초제 사용을 금하고, 벌레를 잡고, 풀을 뽑고 손으로 다룰 만한 적은 규모의 텃밭부터 시작하기를 권합니다.
거름은 가능한 풀을 베어 밭 모퉁이에 쌓은 후에 음식 찌꺼기, 오줌, 동물의 분변 등을 섞어 발효시키되, 가능하면 플라스틱 등 의 쓰레기 태운 재는 사용치 말기 바랍니다.
그러한 재는 거름도 되지 않고 오염 물질의 2차 중독을 일으킨다는군요.
나무나 풀을 태운 재만 있다면 좋지요. 그리고 정 썩힐 만한 거름이 없다면 풀이나 음식물에 톱밥을 넣고, 거기에 막걸리 먹다 남은 거를 뿌려 놓으면 발효가 된답니다.
요즘은 농약, 제초제는 물론이고, 자라는 잡초마저 내버려두고 작물의 자생력에 의지하는 농법이 나왔다는데, 이름하여 ‘태평농법’이라고 하는데 나 같은 게으름뱅이에게는 딱 맞는 농사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田
물골안에서 이시백
글쓴이 이시백씨는 중학교 교사이며 소설가다. 서울서 생활하다 현재 남양주시 수동면 물골안이란 동네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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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