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보기
-
-
[귀거래사] 가자, 흙내음 나는 전원으로..움켜쥔 손 활짝 펴면 인생이 즐겁다
-
-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남부럽잖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삶! 그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인간의 물욕(物慾)은 한도 끝도 없기에 손에 움켜쥘수록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고 정신은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여기 움켜쥔 손을 활짝 편 채 자연의 숨결을 보듬으며 유유자적(悠悠自適) 생활하는 이가 있다. 경남 하동군 하동읍 두곡리에서 30평 흙집을 짓고 차밭을 일구며 생활하는 신재남 씨다. 차밭이라야 비료는커녕 김도 제대로 매지 않는 600평이 전부다.
섬진강 변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이즈음, 녹차 중 최상급으로 꼽는다는 우전차(雨前茶 : 곡우 전후에 따는 잎으로 만든 차)를 출하하려는 손길이 여기저기 분주하다. 하지만 그는 아침상을 물린 후, 여유롭게 차를 음미(吟味)하고는 차밭이 아닌 지붕 위로 오른다. 마무리 공사만을 남겨 둔 30평 황토집 지붕에 너와를 얹기 위해서다. 몇 푼 때문에 인위적으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속내를 엿보게 한다. 철따라 나는 산채(山菜) 상차림에 매실과 녹차, 쑥차 그리고 약간의 노동을 즐길 수 있는데 여기서 더 바란다면 욕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여행을 좋아했다. 쉬는 주말이 돌아오는 금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서울을 벗어나곤 했다. 덕분에 우리나라 구석구석 꽤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처음엔 그저 잘 알려진 관광지 위주의 여행이었지만, 점차 관광에서 벗어나 짧으나마 여행지의 실제 모습을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엔 왠지 모를 아쉬움이 진하게 남곤 했다.
우연한 계기로 담배를 끊고, 차(茶)를 접하면서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육식보다는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고, 커피나 콜라보다는 차를 주로 마시게 됐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도시에서 사는 것밖에 모르던 사람이 여행을 통해 조금씩 바뀌더니, 이제는 생각까지도 ‘서울을 벗어나 살 수 있겠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누구나 한번은 꿈꿔 봄직한 먼 미래(적어도 나이가 쉰은 넘어 은퇴한 뒤)의 여유로운 전원생활이었지, 아직 열심히 일할 나이인 삼십 대엔 가당찮은 생각이었다. 그후, 많은 것을 가졌다 놓쳐도 보고,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며 몇 년을 보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사는가?’
불행히도 이유는 많지 않았다. 나름대로 명상을 하고 단전호흡도 하며 이 화두(話頭)에 매달렸지만 속 시원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한 권의 책을 접했는데, 바로 ≪조화로운 삶 Living the Good life≫이었다. 처음엔 미국인 부부가 썼다는 이 책에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지만 몇 장을 넘기지 않아 완전히 빠져들었고, 그날 밤을 그만 꼬박 새워 버렸다. 이 책엔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없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방향 제시가 있었다.
회사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정신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외쳐댔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골에 가서 어떻게 먹고살지?’ 라는 기초적인 의문은 물론이고, ‘어디서 살까, 살 집은, 병이 나면 어떻게 하지, 만약에 실패하면?’ 등등.
그때 아내와 어머니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아직 젊으니 인생에 한두 해 실패한다고 해도 그리 큰일은 아니다, 진정으로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자.’ 그때부터 살 곳을 찾는 여행이 다시 시작됐다. 그동안 여행을 하며 마음에 두었던 곳은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부근, 강원도 태백 또는 삼척 부근, 제주도 한라산 기슭, 지리산 부근(전라남도 구례, 광양, 경상남도 산청, 함양 그리고 하동) 이렇게 네 군데였다.
가족들과 토론을 한 결과는 이랬다. 가능한 한 도시화가 덜 된 곳, 겨울에 춥지 않은 곳, 이왕이면 산, 강, 바다가 모두 있는 곳 등.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하동’이다.
사실 앞의 것들은 모두 가족을 설득하기 위한 핑계 거리에 지나지 않았고, 오직 한 가지 ‘차에 대한 깊은 호감과 애정’이 이곳 하동을 선택하게 했다. 우리나라에 차를 만드는 곳이 어디 하동뿐이겠는가마는 특별히 마음에 감동으로 남은 것은 하동에서 만든 차였고, 그 인연을 못 잊어 하동으로 내려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 연고도 없는 하동에서 어떻게 땅을 사고 정착할 집을 구할지 참으로 막막했다. 몇 차례의 여행으로 알게 된 여관 아주머니와 식당 주인아저씨 등에게 부탁해 ‘알아보마’ 라는 막연한 대답을 받았지만, 그것으로는 미덥지 않아 직접 하동에 내려와 공인중개사무소를 찾아 나섰다.
서울과는 달리 눈에 잘 띄지도 않고, 낯선 하동 읍내를 한 시간쯤 뒤져 어렵게 찾은 두 곳 가운데 한 곳은 폐업, 다른 한 곳은 출장 중……. 이래서야 처음에 품은 생각은 고사하고 살 곳 마련도 힘들겠다는 생각에, 고심해서 찾은 곳은 하동군청 민원실이었다.
매우 의아해 하는 그 분들에게 한참 사정 얘기를 하고, 겨우 화개면의 공인중개사무소를 소개받아 찾아 갔다. 사실 서울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시골에 내려와 산다고 하면 환영 받을 줄 알았는데 실제는 매우 달랐다. 기특하다는 칭찬은 고사하고, 열심히 설득시켜야만 아주 조금씩 이해를 했다.
땅을 보러 다니면서도 어느 날은 같은 이야기(하동에 왜 내려오는지, 어떻게 살 건지 등)를 서너 차례 반복해야 할 때도 있었다. 나름대로는 알아듣도록 설명했다고 생각했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만나는 공인중개사마다 보여주는 땅들은 모두 전원주택지뿐이었다. 평당 40만 원에서부터 싼 땅은 평당 15만 원 정도 하는……. 이래서야 어디 농사짓고 살 수 있겠나 싶어 정말 암담했다. ‘아무래도 하동은 인연이 아닌가 보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을 알아 볼 수밖에 없음이 실망스러웠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러 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인터넷으로 몇 차례 차를 주문한 적이 있던 다원이었다. 일면식도 없이 단지 몇 차례 주문한 적 밖에 없는 사람을 어찌 그리도 반갑게 맞아주던지. 차를 대접받으며 그간의 사정 얘기를 했더니, 그 분들 경험담이며 여러 가지 충고로, 외지에 내려와 더해 가기만 하던 불안한 마음을 어느 정도는 가라앉히게 되었다. 그분들도 도시에서 살다 시골 내려와 터를 잡은, 어찌 보면 선배였던 거다.
이야기 도중 얼마 전에 차밭이 두 군데 매물로 나왔는데, 팔리지 않았을지 모르니 한번 알아보자고 차밭 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그 중 한 곳이 아직 팔리지 않았으니 저녁에라도 차밭 주인을 만나 보자고 해서, 아주 다행히 좋은 인연으로 비옥한 땅을 구하게 됐다. 이 자리를 빌려, 도움을 준 정 선생님 내외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한다.
빈집 찾아 서울에서 7번 왕복
농민이 아닌 사람이 농지를 취득하려면 ‘농지취득자격증명원’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해당 읍면의 농지위원 2명(보통 한 동리에 한 명)이 농사를 지을 사람이라는 점을 확인해 주고, 1년에 30일 이상 농사를 짓지 않으면 강제 매수를 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해야 농지취득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다. 이른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엔 농지는 약 303평(1000㎡) 이상을 취득해야 등기를 이전할 수 있었다. 또 토지거래허가구역에서는 도시인이 농지 303평(1000㎡) 이상, 임야 606평(2000㎡) 이상을 취득할 때는 일정한 서류를 갖추어 해당 시·군·구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신고구역에서는 농지 1,515평(5000㎡), 임야 3030평(10,000㎡) 이상을 취득할 경우 해당 관청에 신고를 해야 한다. 다행히 구한 땅이 위의 조건과는 무관하여 무사히 등기를 마쳤다.
이제 살 집이 문젠데……. 처음 계획으론, 시골엔 빈집이 많을 테니 그것을 구해 조금 허름하더라도 고쳐서, 낯선 곳에 적응하며 집을 지을 동안 살아보자는 거였다. 그러나 시골엔 빈집이 없었다. 사람만 살지 않는다 뿐이지 창고 등 갖가지 용도로 다양하게 쓰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외지인에게 선선히 들어가 살라고 빌려 주는 집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은 마을 입구의 한 집에 전세로 거처를 마련했다. 빈집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 처음엔 집을 살까도 생각했지만(전세 가격이면 구입 가능), 수리비용에다 나중에 집을 짓게 되면 매각이 가능할지 의문이어서 구입을 포기했다. 농지전용을 받는 데도 집을 갖지 않는 편이 훨씬 유리하단 걸 알게 되었고, 시골살이에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대부분의 것을 처분하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좋은 삶’에 대한 단상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지향점을 ‘조화로운 삶’이라 하기엔 너무나 거창해 그냥 ‘좋은 삶’이라 이름 붙여 보지만 낯간지럽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우리 가족이 살아가려는 ‘좋은 삶’에 대해 한번 얘기해 본다.
첫째, 깨끗한 공기, 맑은 물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
둘째, 육체를 건강하게 살찌우는 먹을거리를 먹고 마시고
셋째, 소중한 이웃들과 더불어 살며
넷째, 땀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육체적 노동의 신성함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와 만족을 느끼고
다섯째, 단순하지만 풍요롭고 여유로운 ‘나만의 인생’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려오기 전을 돌이켜보면 대다수의 도시 생활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는 것 자체가 말 그대로 괴로움[苦]이요, 아픔[痛]이었다. 누군가와 끊임없이 경쟁하고, 이기기 위해 부단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오직 그뿐인 줄 알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가치가 돈으로만 환산되어 ‘연봉 얼마짜리’ 인생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그 자괴감이란…….
아내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애초부터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적 모순 속의 도시생활에서 아내 역시 ‘여성의 사회참여’ 내지는 ‘자아의 실현’을 위해 열심히 직장에 다녀야 했다.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아름다움[美]으로만 보려는 사회의 편견 속에, 아내는 더욱 예뻐지기 위해 무리하게 피부과 치료를 받던 중 부작용을 심하게 앓아야 했다. 육체의 고통은 정신의 허약을 불러와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우울해 하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어떻게든 결단은 필요했다.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당위는 인정했지만 그 ‘다름’이 주는 생경함과 낯설음은 우리 가족을 몇 년이고 주저하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낯선 두려움보다는 주류(主流)의 세상에서 낙오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해서 남보다 조금 더 갖고 물질적 여유가 생긴 뒤에, 여생은 시골에 내려와 무위도식하는 그러한 삶은 사는 자리만 바뀔 뿐 또 다른 형태의 도시 생활로,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으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좋은 삶’에서 주목하는 대목은 ‘좋은 먹을거리를 통한 육체의 건강’이다. 이만큼 떨어져 하동에 내려와 살며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된 후, 아직 도시에 살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육체가 얼마나 망가져 가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가족 역시 하동에 온 후, 거의 1년여는 앓고 살았다. 시골생활을 시작하면 바로 ‘짜잔-’ 하고 건강 체질로 바뀔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도시 독(毒)을 해독하느라 그랬는지 건강이 좋아지기는커녕 사소한 감기조차도 몇 달씩 앓으며 고생해야 했다. 아내는 온 몸에 두드러기 같은 것이 돋아나 괴로워했다. 어머니는 비만으로 인한 관절통과 노령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증상이 고루 괴롭혔다.
우리 가족에게 나타나는 모든 증상을 삼시 세끼 빠뜨릴 수 없는 음식으로 고치겠노라 결심했고, 그때마다 바로 나타나지 않는 효과에 조바심을 누르고, 서로를 격려하며 오늘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덕분에 벌써 상당 부분 좋아지기도 했다.
아직 치료 중이라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부분도 있으나 우리 스스로 완벽하게 건강해질 것이라는 믿음과 자신감은 점점 강해지기만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특별한 사고가 아닌 한 인간이 평생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확신한다.
도시의 인간관계는 경쟁과 경계 나누기, 철저한 무관심과 자기 방어 본능이 강하다. 그러기에 내 아이는 남의 아이와 달라야 하고, 우리 집은 남의 집보다 커야 하고, 우리 자가용은 옆집보다 좋아야 한다. 옆집에서 사람이 굶어 죽어도 알지 못하고, 옆집 아이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을 당해도 내 아이가 무사하면 곧 잊는다.
사람과 동물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 중요한 하나는 바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 생각한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고, 조금 불편한 사람을 도울 줄 알며, 호의 베풂을 고맙게 받을 줄 아는 사람 사이의 관계. ‘좋은 삶’을 살아가려는 우리 가족의 주요한 부분 중 하나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한 가지 더! 바로 ‘육체적 노동’이다. 언제부터인가 땀 흘리는 일은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천시되어 왔다. 많은 사람이 농촌에 사는 것을 기피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육체적 노동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의 처지와 한계에 맞는 적당한 육체노동은 운동 후에 느끼는 쾌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 가족의 힘만으로 집을 짓는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우려 반 비웃음 반이었다. 망치질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집을 짓는다니 개가 웃을 노릇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 빈집을 사서 살며 천천히 한 3∼4년 두고 지어 볼까, 하고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일 년여를 살며 육체노동에 몸이 조금씩 단련되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정신도 어려움을 극복하며 느끼는 쾌감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자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전 처음 해보는 우리 가족으로서는 정말이지 죽을 만큼 힘들다. 농사도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 그렇게 힘들기에 보람은 더 크다. ‘정말 하동에 잘 내려왔다’고 느낄 때가 있다. 온몸에 땀을 흠뻑 적시도록 일하고 황토집 짓는 현장을 떠나 집으로 내려가면서 섬진강 너머 저편 백운산을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볼 때다. 그 마지막 햇살이 구름과 어우러져 말로 형용 못할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 갈 때, 육체의 고단함은 벅차오르는 정신의 희열로 기분 좋은 나른함이 되어 버린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와 같지만 다른 새로운 오늘을 살 수 있음에 가슴 설렌다. 田
■ 글 신재남
■ 사진 윤홍로 기자
∵ 하동에 내려오기 전 질문들과 대답
Q. 생활비는 어떻게
가장 고민했던 부분임에 비하면 답은 의외로 쉬웠다. 도시에서 생활비를 100으로 본다면, 시골에서는 50 이하로 줄일 수도 있으리라 봤고 실제도 그렇다. 물론 쓰기 나름이지만. 그리고 추구하는 삶이 가능한 선에서 자급자족했기에 의외로 생활비에 대한 부담이 적게 들 것으로 생각한다(도시 생활비의 1/5 이하로도 가능). 적게 쓰면 그만큼 적게 벌어도 되겠지.
Q. 노후 대책은 어떻게
이 부분은 오히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더욱 걱정해야 할 사항이라고 본다. 시골에서는 70∼80대 어르신들이 정정하게 직접 밭을 돌본다. 오히려 시골서 사는 게 확실한 노후 대책이라 할 수 있겠다.
Q. 의료비는, 목돈이 들어갈 경우엔
다행히 20대 때 보장성 건강보험을 여러 개 들어 놓아, 70세까지는 암 등 큰 질병에 어느 정도 안심이다. 그리고 목돈이 들어갈 경우는? 글쎄. 별로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도시에서 목돈 들어가는 일 중 제일 큰 일이 집장만 하는 건데, 이곳에선 별로 그렇지가 않다.
Q. 자녀들 교육은
크게 걱정할 필요 없는 것이 공교육비가 아주 저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처럼 서로 비교를 해가며 사교육비 지출하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주변 산청이나 함양에는 대안학교들도 있다.
Q. 처음 해 보는 농사는 어떻게
처음엔 ‘이 씨를 뿌리면 진짜 싹이 날까?’ 하는 어이없는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콩 심은 덴 콩 나고 팥 심은 덴 팥이 나고 자랐다. 하하―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된다. 시골에선 모든 분이 선생님이다.
Q. 살 집은 어떻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의식주(衣食住)다. 이 부분만큼은 남의 손을 빌지 않고, 되도록이면 스스로 해보자는 것이 가족의 공통된 희망인 까닭에,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해 오고 있다.
-
2004-04-27
-
-
[부동산 컨설팅] 웰빙시대, 뜨는 전원주택
-
-
웰빙의 사전적 의미는 복지(Welfare) 또는 행복(Happiness)이지만,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살자는 것. 누구나 꿈꾸는 삶이기에 웰빙에 대한 기대도 생각도 표현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전원주택의 실질적 수요계층은 30~40세대로 바뀌고 있다. 전원주택은 부자들의 소유물이 아니라 출퇴근의 부담감이 줄어 든 이들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곳이 되고 있다. 2004년도에는 주5일 근무제의 여파로, 우선 주말형, 실속형의 작은 전원주택 수요가 늘어 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들은 앞으로 더욱 가속 될 전망이다.
웰빙이란, 말 그대로 ‘건강한(Well : 안락한, 만족한) 인생(Being)을 살자’는 의미다. 국내에서 웰빙 개념이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02년 말부터로 파악된다. 외국 라이센스 계열 여성 잡지들이 미국 등지에서 불고 있는 이 라이프스타일을 앞서 소개하면서 다른 언론 매체를 통해서도 퍼지기 시작했다.
웰빙의 사전적 의미는 행복, 안녕, 복지 등이다. 한마디로 ‘삶의 질’을 강조하는 용어다. 여기에서 파생한 신조어 ‘웰빙족’은 물질적 가치나 명예를 얻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보다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는 균형 있는 삶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의 ‘Well-being’이란 말의 유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60, 70년대 미국 히피이즘과 연관성이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웰빙의 대표적인 문화 코드인 요가붐이나 명상은 70년대 초 미국 히피들에 의해 크게 유행했다. 그리고 80년대 여피(Yuppie)족과 90년대 보보스(Bobos)족의 라이프스타일에도 웰빙은 중요한 요소였다.
웰빙의 사전적 의미는 복지(Welfare) 또는 행복(Happiness)이지만,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살자는 것. 누구나 꿈꾸는 삶이기에 웰빙에 대한 기대도 생각도 표현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웰빙 라이프
도심의 공해와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의 평화를 통해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웰빙족이 늘면서 라이프스타일까지 웰빙 바람을 타고 변화하고 있다.
분당에 사는 전업주부 이은숙(37세) 씨는 자타가 인정하는 웰빙족. 그는 새벽 다섯시면 어김없이 아침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단독주택에 살고 있으므로 작은 마당을 텃밭으로 만들어 상추, 치커리, 쑥갓, 무순 등을 직접 재배하여 식탁에 올린다. 그 스스로를 웰빙족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삶의 질을 재는 잣대를 자신에 대한 만족에 두기 때문이라 한다.
운동에서는 요가나 명상 등 움직임이 격하지 않으면서 몸과 마음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종목이 유행하고 있다. 웰빙족에겐 목욕문화도 남다르다. 최근 반신욕이 소개되면서 웰빙족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업계에서는 내적인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유기농식이나 휴식시간을 타깃으로 한 에스테틱, 스파 등의 확장이 눈에 띌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삶의 질, 건강, 여유를 중시하는 분위기 확대는 이 분야의 성장 원동력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웰빙시대의 화두 전원생활
지난 30년 간 우리나라는 양적인 성장에만 집중해 왔다. 대대로 이어 온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앞만 보고 달려 온 것이다. 고속성장의 끝에서 이제 웰빙이란 말로 압축되는 행복한 삶을 위한 추구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다시 불러오고 있다.
그동안의 양적인 성장은 주거 부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각한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거주자의 만족도와는 동떨어진 주택의 양적 공급에만 전력을 기울여 왔다. 특히 1980년대 이후 급속히 개발되기 시작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주택의 양적 공급에 크게 기여했다.
이제 전국 어디에서나 아파트 숲을 볼 수 있게 됐다. 지방 소도시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양적인 팽창으로 도시 환경이 점점 열악해지면서 공기 맑고 흙 냄새를 마음껏 맡을 수 있는 시골생활에 관심을 보이는 도시민이 많아졌다.
강남에 살고 있는 회사원 이모 부장(41세)의 경우 매달 50만 원씩 적금을 붓고 있다. 그는 퇴직하면 부어 놓은 적금과 국민연금으로 해외여행을 하고,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진학하면 공기 좋고 살기 복잡하지 않은 전원주택으로 거주지를 옮길 작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원생활에 대한 향수는 막연한 그리움일 뿐 실제 실행하기에는 어려움 점이 많다.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불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원생활에 실패해 다시 도시로 역 이사를 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고 있다. 지역마다 새로운 도로가 뚫리고, 대형 마트 등 생활 편의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속철도의 개통은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 → 천안 간 정기권 요금이 26만 원으로, 수도권에서 서울로 자가용 출퇴근을 할 경우에 드는 비용과 별반 차이가 없다. 때문인지 수도권의 집을 처분하고 천안 아산역 근처로 주거지를 옮기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제 전원주택의 실질적 수요계층은 30~40세대로 바뀌고 있다. 전원주택은 부자들의 소유물이 아니라 출퇴근의 부담감이 줄어 든 이들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곳이 되고 있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이 실행되면 서울과 수도권에만 집중해 있던 인구가 지방으로 분산돼 전 국토의 고른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본다. 최근 KDI 발표에 따르면 신 행정수도 건설로 충청권 인구는 65만1000명 정도 증가하고 땅값은 8.5%, 집값은 5.7% 상승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서울 땅값은 2.4%, 집값은 1.6% 하락하고, 경기도 땅값은 0.8%, 집값은 0.6%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2004년도에는 주5일 근무제의 여파로, 우선 주말형, 실속형의 작은 전원주택 수요가 늘어 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들은 앞으로 더욱 가속 될 전망이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대에서 삶의 질을 중시하는 웰빙시대, 남과 비교되지 않는 내 삶을 즐기며 사는 자연스러운 삶, 행복한 삶, 누구나 꿈꾸는 삶을 실천에 옮기려는 조용한 움직임들이 웰빙시대, 전원시대의 서막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田
■ 글 이은주
-
2004-04-27
-
-
[전원주택으로 가는길(2)] 전원에서 살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
-
-
시골 전원주택은 도시 아파트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도시 아파트는 살기 싫으면 팔고 이사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시골 전원주택은 짓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팔기도 어렵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전원주택을 비워 두고 도시로 다시 나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사서 고생하는 셈이 된다. 도시 아파트와 시골 전원주택을 섞어서 생각하는 것부터 머리 속에서 지워야 한다. 한꺼번에 두 가지 만족을 누릴 수 없는 일이기에…….
예산을 분명히 세워라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입지 선정’보다 먼저 선행돼야 할 것이, 예산을 잡고 구체적인 자금 조달 방안을 세우는 일이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많은 사람이라면 융통성이 있으니 큰 문제가 안 되겠지만, 겨우겨우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잘 짚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자금 계획은 좀 넉넉하게 세워야 하고, 만약 모자란다면 꿈을 줄이는 길밖에 없다는 점이다.
필자를 찾아 온 의뢰인들 중에는, 전원생활만 꿈꿨지 ‘얼마의 금액으로 어떤 규모의 부지를 선택하겠다’는 최소한의 계획도 세우지 않은 사람이 많다. 이런 의뢰인일수록 다른 여러 가지 말보다는 물건부터 먼저 보자고 재촉한다. 물건만 마음에 들면 자금은 얼마든지 있다는 제스처를 보이지만, 금새 잘못됐다는 것이 탄로 나고 만다. 제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그 전부를 전원주택에 투자할 수는 없다.
전원주택은 아파트를 한 채 구입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르다. 전원주택과 연관된 토지시장의 물건은 규모나 조건에 따라 천차만별(千差萬別)이기에 오랜 경험을 가진 공인중개사도 선뜻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 여러 의뢰인들을 접한 공인중개사의 눈은 반 관상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능청을 한번 떨어본다. 될 수 있는 대로 고가(高價)의 매물을 권하면서 의뢰인의 눈치를 살핀다. 그제서야 놀라며 “그건 너무 크고…” 하면서 말끝을 흐린다.
의뢰인이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찾을 때, 공인중개사는 깍듯한 예로 상담에 응하는 것은 더 말할 여지가 없다. 반대로 의뢰인도 의뢰인으로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분명한 자기 계획을 밝혀서 공인중개사가 성의껏 조건에 맞는 물건을 권하도록 하는 것이다. 분명한 계획이 서 있지 않다면, 상담을 시작할 때 그런 심중(心中)을 밝히고 앞으로의 계획을 서로 허심탄회하게 의논하는 것이 좋다. 서로간의 신뢰도 쌓으면서 상담에 임한다면 좋은 인연일 것이다.
발품을 팔면 팔수록 전원이 가까워진다
입지 선정이 끝나면 이제부터는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공인중개사 사무실 방문이 아니라 그 고장의 지형을 살피라는 뜻이다. 그래야만 그 지역의 정보를 많이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의뢰인은 이 시점에서 무작정 공인중개사를 찾는다. 그리고 권하는 것이면 무조건 구입하겠다는 식으로 상담해 오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언약에 불과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역의 여건이나 정서 등등 지역정보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공인중개사를 찾으면 지역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사전지식이 전혀 없다면 공인중개사의 말을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 말을 전적으로 믿어서도 안 된다. 약점이 많은 땅을 좋은 땅이라고 권하는 공인중개사가 있기 마련이고, 빨리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싶다는 조급증으로 부지 선택에서부터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공인중개사는 ‘죽일 놈’이 되고 만다. 그러나 여기엔 의뢰인들이 너무 모른다는 약점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주지해야 한다.
그렇기에 필자는 처음부터 공인중개사를 찾기보다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여기저기 다녀야만 후회 없는 전원주택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 고장 곳곳의 조건들을 나름대로 파악할 수 있고 다른 정보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이 살려는 고장과의 친숙함을 마련하는 장도 된다.
솔직히 공인중개사들은 의뢰인과의 상담 내용에 따라 상대방을 평가해 답사 유무를 결정한다. 토지시장은 넓고 물건도 광범위해서 한번 답사에 짧게는 한 시간, 거리만도 최소한 20㎞ 이상을 다녀야 한다. 그렇기에 의뢰인이 얼마나 진지한가에 따라 공인중개사들은 답사 유무를 결정한다. 왜냐면,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현실은 공인중개사가 상담료나 답사료 등을 요구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공인중개사의 입장에선 의뢰인의 상담 내용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상행위가 그렇듯이 결과가 없을 것 같은 상담이나 답사는 맥 빠지기 때문이다.
의뢰인이 여러 명일 때 더욱 그렇지만 의뢰인이 꼭 물건을 보아야겠다면 결국 답사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공인중개사의 현실이다.
그런데 또 다른 방해꾼이 있다. 의뢰인을 가장한 상담이다. 감정평가사 사무소의 임직원, 각 금융기관의 대출 담당자, 경매에 응찰할 사람이나 그 의뢰를 받은 사람이다. 바쁜 틈을 내어서 상담에 응하는데 불쑥 서류를 내밀며 감정을 요구할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바쁜 시간에 필자를 찾는 의뢰인에게는 얼마나 이 지역에 대해서 아는가를 먼저 물어본다. 그리고는 이 지역 지리에 어둡다면 부근의 약도를 하나씩 건네고 이곳저곳 표시해 둔 곳을 다녀오게 한다. 전원주택을 지을 만한 부지가 있는 곳이다. 그곳들은 대게 2차선 도로에서 조금은 떨어져 있다. 도시민이 보기에는 전혀 그런 길 안쪽에 전원주택마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는 곳인데, 사실 좋은 땅이 많다. 대부분의 의뢰인은 그 2차선 도로를 몇 번 지나쳐 본 것이 이 고장을 아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의뢰인은 약도대로 이 고장 구석구석을 돌아본 후 다시 찾는다. 반응은 예상외로 좋다.
“좋은 구경했습니다. 여기에 그런 곳이 있다니요.”
“저는 그 쪽이 좋던데요, 저 쪽은 나완 안 맞고요.”
얼마나 진지한 반응인가.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상담을 진행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전원주택 구입 의사가 확실하고 공인중개사를 자기 곁으로 한발 다가서게 한다. 발품을 많이 팔아 지역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면 알수록 공인중개사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식이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공인중개사를 잘 선택하자
위치와 면적 등 구체적인 것들과 집을 지을 때까지의 예산이 정해지면 그때부터 현지 공인중개사를 찾아야 한다. 반드시 현지 공인중개사여야 한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공인중개사에게 의뢰할 수도 있으나 그 지역 정보에 밝지 않기에 다시 해당지역 동업자들에게 의뢰하게 된다. 이 경우 서로의 말이 잘 전달되지 않아 헛걸음을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고 일이 성사될 확률도 낮다.
따라서 어느 정도 그 지역정보를 알고 가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예 공인중개사사무실을 찾지 않고, 지역의 유지를 수소문한다거나 조금 어리숙하게(?) 생긴 토박이 원주민들을 찾는다. 물론 조금이라도 싸게 물건을 구입하려는 의도에서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때인가? 시골사람이 서울사람 뺨친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는가? 이젠 그리 어리숙한 시골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점심 먹던 식당 주인에게, 하물며 동네 노인정에서 아니면 밭일하던 시골 아주머니한테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발상은 위험천만하다. 분명 그것은 큰 실수를 저지르는 전초전이다. 그들은 시세에 민감하지 않을 뿐더러 십중팔구는 웃돈을 많이 얹어서 얘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법률적 전문지식이 없어 계약하더라도 낭패를 보기 일쑤다. 그들에겐 이러나저러나 부업(?)꺼리기 때문이다. 계약이 성사되면 용돈이 생겨서 좋고 안 되더라도 손해 볼일은 없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공인중개사를 찾는 법
그렇다면 의뢰해도 좋은 공인중개사는 어떻게 찾을 것인가? 아주 간단하다. 공인중개사 사무소 간판에는 중개업법 조항에 의해 해당 공인중개사 이름과 허가번호를 적는 것이 의무화 돼 있다. 만약 간판에 이런 글이 없다면 불법영업을 하는 업소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정상적으로 영업하는 공인중개사 사무소에는 최소한 5개 정도의 액자가 걸려 있다.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꼭 비치해야 할 것들이다. 물론 사진액자나 그림액자를 말하는 건 아니다. 자격증, 허가증, 사업자등록증, 공제증서, 요율표 등이다. 이런 것이 제대로 부착돼 있다면 정상 영업을 하는 곳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물론 자격증 사진과 동일한 사람하고 상담하는 것이 금상첨화다. 그밖에 다른 액자들과 트로피, 수료증 등이 많이 부착된 곳은 그만큼 본인을 과시해서 의뢰인들을 현혹(?)시키려는 작전으로 간주하고 조심하길 바란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무허가업소나 자격증을 대여 받아 영업하는 곳에서는 그만큼 거래사고가 많기 마련이다. 현재 수도권에서 토지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업소들 중에는 자격증을 가지고 직접 영업하는 곳보다는 자격증을 대여 받아 영업을 하는 곳이 더 많은 실정이다. 하물며 무허가지만 당당히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하는 업소도 상당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성급한 마음은 금물이다
믿음직한 공인중개사까지 선정하고 본인이 원하는 물건을 자세히 의뢰했다면, 이젠 조용히 기다리면서 ‘내가 내린 결정들이 과연 옳은가?’ 다시 한번 짚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좋지 않다. 표현이 맞을지 모르지만 속담에 “우는 아이에게 젖 물린다”는 말대로 조금은 보채야 좋은 물건을 소개 받을 수 있다. 왜냐면 한 번 와서 몇 마디 상담하고 그냥 돌아가서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공인중개사들은 그냥 이것저것 궁금해서 왔던 사람이구나 하고 신경을 덜 쓰기 마련이다. 방문객 중 과반수 이상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자주 통화하면서 물건을 부탁한다면, 이 사람은 틀림없는 고객이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 또 자주 방문해 대화를 나누면 그만큼 인과관계가 정(情)으로 돈독해지고 서로에 대한 배려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이 업소를 방문하지만 전원생활이 절실해서보다는 막연한 동경심에서 나온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토지 가격 등을 알아보기 위해서 주로 찾는다. 의뢰인들에겐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한번 물건을 의뢰했다고 해서 공인중개사가 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접근성이 좋은 위치의 전원주택시장은 공급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선 다음에 언급하겠다.
좋은 터는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
좋은 땅, 내 마음에 드는 땅을 찾기란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믿을 만한 공인중개사가 권하는 땅이라면 믿고 사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물론 얼마나 믿을 만한가 하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모든 땅이 100% 마음에 들 수는 없다. 의뢰인 중에는 조금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다른 물건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 더 좋은 물건이 또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지만, 한참 다녀 보고 난 후엔 ‘그만한 물건도 없구나’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다시 그 물건을 사려고 했을 땐 벌써 다른 임자가 차지한 다음이다.
9년 전 필자가 개업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다니는 의뢰인이 몇 있다. 지금은 허심탄회한 친구처럼 사귀고 있지만……. 이젠 전원주택지라면 필자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해박하고 물건도 많이 알고 있다. 가끔 친구들한테도 권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베테랑들이다. 그런데 정작 자기 것은 못 산다. 너무나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70∼80%쯤 마음에 드는 물건을 100∼120%의 물건으로 만드는 그런 작업이 얼마나 보람 있는가. 다시 말하면 70∼80%정도 마음에 든다면 놓치지 말길 바란다.
땅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
많은 의뢰인이 부지가 팔리고 개발된 후, 구입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 “저 땅은 내가 사려던 것인데…….” “그 땐 저렇게 좋을 줄 몰랐는데….” 이렇듯 땅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노치고 만 셈이 된다. “조금만 그때 내가 땅을 보는 눈이 있었더라면……” 하고 후회해도 소용 없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런 후회가 나의 ‘땅을 보는 안목’을 높은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시킨다는 사실이 앞으로 부지 구입에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하지 않았던가.
시골 사는 연습부터 해라
막연한 동경심으로, 아니면 도시가 무조건 싫어졌다는 도시기피증으로 전원주택을 선택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실수를 했구나’ 하고 후회할 것이다. 특히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살던 사람이라면 아주 많은 변화를 감내할 각오가 충분히 서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원주택에 대한 부푼 꿈만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여기까지조차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 같다. 그것이 엄청난 사건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중대한 일인데도…….
시골 전원주택은 도시 아파트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도시 아파트는 살기 싫으면 팔고 이사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시골 전원주택은 짓기도 쉽지 않지만 팔기도 어렵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전원주택을 비워 두고 도시로 다시 나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사서 고생하는 셈이 된다. 도시 아파트와 시골 전원주택을 섞어서 생각하는 것부터 머리 속에서 지워야 한다. 한꺼번에 두 가지 만족을 누릴 수 없는 일이기에…….
그래서 시골에 사는 연습부터 하라고 권한다. 전원생활은 하고 싶은데 자신 없는 의뢰인에겐 시골집이나 다세대주택을 전세로 살라고 권유한다. 또 여럿이 그렇게 살고 있다. 그 중엔 벌써 좋은 부지를 택해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오순도순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 중엔 다시 도시로 올라간 사람도 있다. 만약 처음부터 전원주택을 짓거나 구입했다면 도시로 되돌아가는 데는 금전적, 정신적 그리고 시간적으로 엄청난 고생을 했을 것이다.
전원주택 수요가 늘면서 요즈음 전원주택의 전세 물량이 흔치 않은 점이 문제지만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요!” “구하라. 얻을 것이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분당 아파트에 살던 젊은 부부 몇 쌍은 아파트를 세 놓고 이곳에 와서 전원주택이나 다세대주택에서 전세 살면서 만족한 시골생활을 하고 있다. 많은 시세 차이로 전세보증금을 받은 걸로 이곳에서 전세를 얻고도 자동차도 한 대씩 더 사고, 가구도 더 장만했다. 그 나머지는 다른 곳에 투자했다고 한다. 얼마나 현명한 신세대 주부들인가.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가는 시점까지는 이렇게 여기서 살겠단다. 그러다 보면 아파트 값은 더 오를 것이고, 시골생활은 이러나저러나 생활비가 적게 들기 마련이기에 경제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전원주택을 짓기 전, 전원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익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다.
우선 전원생활에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수도권 지역에서 소유권이전등기(토지거래허가나 현지인으로서의 인정)나 농지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개발행위허가(전용허가)를 얻는 데도 벌써 한 단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 재테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얘기는 참고로 해라
타인의 경험은 그냥 참고할 뿐이다. 모든 상황은 사람마다 다르고 또 시시각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대개의 경우 다른 사람에게 들은 얘기는 그 사람의 판단 기준에 의한 것이기에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좋다던가’‘싫다던가’ ‘괜찮다던가’ ‘아니라던가’ 하는 이런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맞춰 피력할 따름이다. 다른 사람이 들려주는 충고나 경험담 등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거기에다 나를 꿰어 맞추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곳으로 오기 전, 새벽에 서울서 내려와 출근시간에 맞춰서 근무지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고 거리는 얼만지 몇 번에 걸쳐 시험했다. 그뿐 아니라 다른 것도 직접 체험해 보는 게 좋다. 예를 들면 나나 나의 가족이 필요로 하는 시설은 어디에 있으며 불편함은 참아 낼 수 있겠는지 등등. 그러면 막상 전원생활을 시작했을 때 후회하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데 도움을 준다.
환금성이 없다면 부동산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평탄한 길만을 걸으면서 살 순 없다. 지금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전원주택을 준비했으나, 언제 어느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처음엔 오래도록 여기서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부득이한 사정으로 팔지 않으면 안 되는 각박한 때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땐 처분이 순조로워야 하는데 전원주택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입지 조건을 말할 때, ‘멀리 있는 집은 내 집이 아니다’ 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서울과의 거리와 전원주택의 매매는 반비례한다. 그런데 애초부터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는 의뢰인도 있다.
같은 200평 토지에 35평 정도의 전원주택을 짓는다고 가정하자. 모든 조건이 조금 나은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의 가격차가 10만 원이라고 보면, 결국 2000만 원 싸게 전원주택을 소유한 것이 된다. 건축비는 지역과는 무관하게 비슷하기 마련이다. 여기까지는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전원주택은 2000만 원 정도 싸도 잘 안 팔리는 지역이 있고, 반대로 2000만 원 정도가 비싸도 잘 팔리는 지역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예산을 초과해 어쩔 수 없이 싼 땅을 찾는 의뢰인도 있지만, 대개 아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입지를 선정하는 것이 이 만큼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田
■ 글 양정일
-
2004-04-27
-
-
[황토집 따라 짓기] 전통방식 목구조 황토집 짓는 순서(5)
-
-
창호공사
난방공사가 끝나면 창호공사를 시작한다. 창호는 설계도면에 따라 출입문과 창문으로 구분하여 단다. 출입문과 창문은 실내와 바깥을 연결하는 통로, 채광과 환기를 위한 위생, 바깥 경치를 조망하는 경관, 여기에다 건물의 표정을 결정짓는 등 중요한 기능을 한다.
전통가옥인 흙집(황토집)의 출입문과 창문에는 전통 살문(살을 가로세로 넣어서 짠 문)을 만들어 달고 거기에 창호지를 발라야 고풍스런 분위기를 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전원주택(황토집)의 문들은 단순한 창호의 모습이어선 안 된다. 아름답게 펼쳐진 대자연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창문을 낮게 달아야 한다.
현대건축에서 추구하는 창문은, 단지 외관을 멋있게 꾸미고 뽐내기 위한 장식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전통가옥인 흙집 창호는 개념 자체부터 다르다. 옛 사람들이 생각했던 문과 창은 통행과 환기, 모양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나아가 실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대자연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열린 정신적 통로로 비중이 높게 생각했다. 이러한 옛 조상들의 숨은 생각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 전통가옥이 가진 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황토집에는 가능하면 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전통 창호를 달아야 한다. 이제는 다양한 형태의 창호를 주문 제작할 수 있기에, 굳이 소목장을 불러다 현장에서 어렵게 짜 맞추지 않아도 조선살창, 격자살창, 완자살창 등 원하는 살문을 구입해 달 수 있다.
부엌 및 욕실 공사
부엌 싱크대에서 물이 튈 수 있는 황토벽면과 바닥은 타일로 마감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부엌의 포인트는 뭐니뭐니해도 싱크대일 것이다. 주부들의 필수품목인 싱크대는 기성품을 구입해 설치하는 것이 가장 좋다. 욕실도 부엌과 마찬가지로 물기가 많은 곳인 만큼 흙벽돌을 보호하려면 바닥으로부터 3자까지 벽면에 황토색 타일을 붙여주어야 한다. 타일을 붙일 때는 타일용 시멘트나 생석회를 구입해 사용하면 된다. 아니면 액체 실리콘을 황토벽돌 위에 바르거나 보드라운 황토에다 목재용 본드를 섞어 발라줘도 무방하다.
장판 및 벽지 바르기
장판은 기름종이를 구입하여 바르거나 한지를 바른 뒤 콩기름이나 들깨기름을 3~5회 발라주면 된다. 그리고 벽에도 한지 또는 닥종이를 2번 정도 바르면 좋다. 아니면 삼베를 방바닥에서 3자 높이로 발라도 황토벽과 잘 어울린다. 참고로 황토집은 방바닥과 벽이 완전이 건조되기 전에 한지 또는 기름종이를 바르면 습기 때문에 곰팡이가 발생하므로 주의해야한다. 황토방바닥이 완전히 건조되려면 최소한 1년 이상이 소요된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장판지를 바르지 말고 좀 불편해도 임시로 대자리나 돗자리를 깔고 생활하는 것이 이중낭비를 막을 수 있다. 그리고 흙바닥에 비닐장판지를 까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한다.
축담 및 담장 쌓기
축담은 마당의 빗물이 집안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추녀 끝 부분으로 1자∼2자 높이로 기단을 쌓아 올린 것을 말한다. 축담은 호박돌 크기의 자연석을 구입해 쌓는 것이 좋다. 가능하면 축담을 쌓은 뒤, 돌 사이사이에 연산홍이나 사철꽃을 심는 것도 마당 조경의 한 방법이다.
담장은 집의 내부와 외부를 분리하는 중요한 경계 역할을 한다. 따라서 남의 땅이 포함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 담을 쌓아야 한다. 담장은 집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조경 역할까지 하므로 지붕과 담장이 서로 잘 어울리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지붕 소재가 흙기와일 경우, 흙돌담을 쌓은 후 그 위에 기와를 이어놓으면 고풍스런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또 지붕의 소재가 아스팔트슁글일 경우, 황토벽돌을 쌓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담장이다. 하지만 황토벽돌로 담장을 쌓을 때는 습기 방지를 위해 1자 가량 돌담으로 기초를 쌓은 후 황토벽돌을 쌓고 담장 위에 지붕과 같은 색상의 아스팔트슁글을 이어주면 견고한 담장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초가지붕이나 너와지붕일 경우에는 나무울타리가 적격이다. 나무울타리를 만들 때는 먼저 싸리나무나 대나무를 1.3m 높이로 가지런히 잘라 놓는다. 3m 간격으로 직경이 10㎝∼15㎝ 되는 나무기둥(지주대)을 깊이 박아 튼튼하게 고정시킨 뒤, 잘라놓은 싸리나무는 노끈으로 촘촘히 엮고 대나무는 아래위 끝 부분에서 30㎝ 위치에 구멍을 뚫어 강철 철사나 노끈으로 꿰어 지주대에 고정시키면 훌륭한 나무울타리가 완성된다.
특히 담장은 집안에서 바깥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이로 쌓아야 하는데 어른 가슴 높이 정도면 적당하다.
대문 달기 및 방범시설
담장이나 울타리가 완성되면 대문이나 사립문을 달아야 한다. 대문은 지붕과 담장 소재에 맞춰야 하는데 기와집일 때는 전통 문양과 장석이 달린 판문이 잘 어울린다. 또 황토벽돌 담장에는 방부목으로 제작한 나무문이 어울린다. 그리고 나무 울타리에는 싸리문이나 대나무를 엮어 만든 대문이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자연의 포근함을 안겨 준다. 대문을 달고 나면 방범시설을 해야 전원생활을 안심하고 편안하게 누릴 수 있다. 田
■ 글·윤원태
-
2004-04-27
-
-
[몸에 꼭 맞는 집짓기] 한국형 전원주택 설계도면 (3)
-
-
본 도면을 연재하다 보면 많은 문의전화를 받는다. 대부분의 문의는 ‘평당 얼마면 짓느냐’와 ‘공사기간은 어느 정도 걸리냐’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전원주택을 꿈꾸는 예비 건축주들의 경제적인 내집 마련에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주택을 설계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도면이 이러한 환경의 대지에 조화가 되겠냐’는 질문을 내심 기대하고 있다. 또하나 문의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비수도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고, 대부분 40평 이하의 소형 평형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지역적 여건상 양질의 전원주택을 체험할 여건이 못 되어 이러한 지면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한 반응들을 볼 때 여기에 연재하는 도면이 전원주택을 꿈꾸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연재는 20~40평형대의 소형 평형 위주로 연재하고자 한다.
30평형 단층 3실
■ 디자인 의도
- 3~4인의 가족 구성원이 생활할 수 있도록 계획된 거실이 넓은 주택.
- 전면을 좁은 폭으로 계획하여 가로 폭이 좁은 대지에 배치할 수 있는 주택.
- 개인영역과 공동영역을 구분한 독립적 구조.
- 경제적인 1실 욕실을 각 방에서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끔 근거리 배치함.
- 거실과 주방을 직선으로 배치해 시각적으로 넓은 시야 확보.
■ 면적표
·현관 : 1.1평
·거실 : 9.4평
·안방 : 5.0평
·방 1 : 4.0평
·방 2 : 3.5평
·주방 : 4.2평
·욕실 : 1.3평
·다용도실 : 1.6평
30평형 복층 3실
■ 디자인 의도
- 3~4인의 가족 구성원이 생활할 수 있도록 계획된 소형평형의 복층주택.
- 복층이 가지는 단위공간의 협소함을 극복하기 위해 이동 동선 최소화.
- 1층을 부부영역으로 2층을 자녀영역으로 구분한 독립적 구조.
- 각각의 욕실을 상·하층 일치된 구조로 설계해 효율적인 욕실 설비 관리.
■ 면적표
·현관 : 1.2평
·거실 : 6.3평
·안방 : 3.5평
·방 1 : 3.4평
·방 2 : 3.5평
·주방 : 3.3평
·1층 욕실 : 1.3평
·2층 욕실 : 1.3평
·다용도실 : 1.6평
·1층 면적 : 20.6평
·2층면적 : 9.9평
46평형 복층 4실
■ 디자인 의도
- 3~5인의 가족 구성원이 생활할 수 있도록 계획된 경제적인 주택.
- 전면부를 넓은 폭으로 계획해 남측 조망 좋은 방이 많은 구조.
- 1층 거실에서 2층 공간을 조망할 수 있는 구조로 시각적 개방감 확보.
- 방 1을 거실과 수직으로 배치하고, 미닫이문으로 처리해 다목적 공간으로 사용.
- 출입구 축을 중심으로 주방과 식당을 독립 배치해 거주 공간과 분리.
- 2층에 가족실을 배치하여 2세대 동거형의 거주 가능.
- 넓은 다용도실 및 수납공간 확보.
- 심야보일러도 수용 가능한 넓은 보일러실 및 외부창고.
■ 면적표
·현관 : 1.0평
·거실 : 7.1평
·안방 : 4.6평
·방 1 : 3.5평
·방 2 : 3.1평
·방 3 : 3.5평
·가족실 : 5.5평
·주방 : 6.8평
·1층 욕실 : 1.5평
·2층 욕실 : 1.3평
·드레스실 : 1.4평
·다용도실 : 2.2평
·1층 면적 : 32.9평
·2층 면적 : 13.4평
52평형 복층 4실
■ 디자인 의도
- 3~5인의 가족 구성원이 생활할 수 있도록 계획된 안정감 있는 외관이 장점인 주택.
- 1층 거실에서 2층 공간을 조망할 수 있는 구조.
- 2층 가족실에서 1층 현관을 조망할 수 있는 구조.
- 1층을 부부영역으로, 2층을 자녀영역으로 구분한 독립구조.
- 2층에 가족실을 배치하여 2세대 동거형의 거주 가능.
- 넓은 다용도실.
■ 면적표
·현관 : 1.3평
·거실 : 8.1평
·안방 : 4.7평
·방 1 : 4.0평
·방 2 : 4.7평
·방 3 : 4.5평
·가족실 : 4.2평
·주방 : 6.6평
·손님욕실 : 1.3평
·안방욕실 : 1.4평
·2층 욕실 : 1.6평
·드레스실 : 1.5평
·다용도실 : 2.3평
·1층 면적 : 36.3평
·2층 면적 : 15.1평
■ 자료제공 : 김낭현
-
2004-04-27
-
-
[한옥이야기] 달라진 우리생활, 달라진 집(1)
-
-
집에서 이뤄지는 생활 가운데서 중요한 부분은 의생활과 식생활 그리고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통틀어 ‘가사’라 부르기도 한다. 가사 활동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집의 구조가 많이 달라진다. 반대로 집의 구조에 따라 가사 활동이 변하기도 한다.
조선조나 근대까지는 가사 활동의 대부분이 여성의 몫이었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 70년대 이후의 급격한 경제 성장과 사회구조 변화로, 가사 활동이 예전하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이 늘어나고 생활 방식이 서구화된 것에 있다. 집은 생활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기 때문에 생활의 변화는 집 구조를 바뀌게 한다. 예를 들어 관혼상제에 관련된 의식을 모두 집에서 해야 한다면 집의 규모는 매우 커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러한 의식을 집 밖에서 한다면 집의 규모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정도면 족할 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의식주(衣食住)다. 단어의 순서로 볼 때 먹고 입는 것이 집보다 먼저임에도 불구하고, 두 분야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덜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먹고 입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기에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으므로 이를 통해 문화를 이해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자연환경에 종속된 음식 문화
음식 문화는 다른 문화하고 달리 주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고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심하게 변한다. 그래서 요사이 각 문화권 간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음식의 취향도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변화의 속도도 매우 빠르다. 음식의 특성이 그러하다 보니 자연환경 또는 문화 환경과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음식 역시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각 문화마다 고유한 음식 문화가 있다. 이것은 주거와 마찬가지로 자연환경에 따라 결정된다. 어쩌면 집보다 더 자연환경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교역이 발달하기 전에는 그 지역에서 나오지 않는 먹을거리로 음식을 만들 방법이 없다. 또한 지역의 기후에 따라 음식을 저장하는 방법도 천차만별(千差萬別)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전통 음식은 원칙적으로 자연환경에 철저하게 종속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가 금기로 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으나 일차적으로 기후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속담에도 “여름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돼지고기가 아랍인들이 사는 더운 사막기후에서는 쉽게 상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율법으로 규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은 최창모 저 《금기의 수수께끼》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 책에서는 돼지고기에 대한 금기의 원인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음식은 사회 환경과 관계가 깊다. 개인적으로 음식 문화는 고급문화라고 생각한다. 고급문화는 생활에 여유가 있어야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음식 문화는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있을 때만 발달할 수 있다.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식도락 문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제 우리의 생활에 여유가 생겼음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음식 문화를 관찰하면 문화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하고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 음식 문화의 특징으로 첫 번째는 젓가락 사용을 전제로 한 음식이고, 두 번째는 탕 문화의 발달이고, 세 번째는 발효(醱酵) 음식이 매우 발달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한·중·일의 젓가락과 음식
젓가락 문화에 대해 언급해 본다면 한국, 중국, 일본 등의 한자 문화권과 베트남이 같은 양상을 보인다. 젓가락은 3000여 년 전 중국에서 발명돼 1800여 년 전에 한국으로 전파됐고, 일본에는 1500여 년 전에 건너갔다고 한다.
2002년 초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한국, 중국, 일본의 젓가락에 대한 비교를 보면 음식 때문에 젓가락 형태에 차이가 생겼다고 한다. 길고 끝이 뭉툭한 중국의 젓가락은 돼지고기 등의 육류 음식에 적합하고, 끝이 가늘고 뾰족한 일본의 젓가락은 생선을 먹기에 알맞고, 우리의 젓가락은 일본과 중국의 중간형으로 다양한 음식을 먹는 데 골고루 쓸 수 있다고 한다. 그 방송프로그램에서는 나라마다 젓가락 형태가 다른 것은 그 나라에서 주로 먹는 음식의 차이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서는 젓가락 구조의 차이보다는 젓가락을 이용해 먹는 음식의 특징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필자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음식 문화를 ‘먹는 사람을 배려한 음식 문화’로 정의한다. 포크나 나이프를 사용하는 서양의 음식은 먹는 사람의 노력이 필요한 음식이다. 이에 비해 젓가락을 사용하는 음식은 편하게 먹도록 조리된 것들이다. 만일 우리의 음식을 서양 음식처럼 조리한다면 젓가락만으로는 먹을 수 없다. 젓가락 문화권에서는 간단한 젓가락 동작만으로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의 크기를 적당하게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음식의 조리 과정에서부터 배려가 있어야 한다.
국물에 어울리는 우리의 숟가락
숟가락은 기원전 6∼7세기 청동기시대부터 유물이 발견되는 우리의 고유 도구라고 한다. 일본에는 아예 숟가락이 없어, 국물그릇째 들고 마신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탕류의 음식이 다양하게 발전할 수 없다. 중국의 숟가락은 형태만 보아도 국물을 떠먹는 용도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숟가락은 국자가 변형된 듯한 모습이다. 중국 숟가락은 자기 접시에 국물을 떠가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것으로 국물을 떠먹어 보면 불편하다.
우리의 숟가락은 다목적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데 국물을 쉽게 먹을 수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다만, 국물을 떠서 옮기는 데는 그리 편하지 않다. 삼국시대의 숟가락을 보면 깊게 파져 있고 크기도 커서 국물을 떠먹기에는 불편하다. 그 이후 숟가락의 형태가 변했다는 것은 음식에서 탕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음식도 처음에는 탕 종류가 많지 않았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점 다양해졌을 것이다. 탕 문화는 동양 삼국의 젓가락 문화권에서도 우리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안정된 사회에서 발전하는 발효 음식
우리나라 음식의 특징은 발효 음식이 발달했다는 점이다. 발효 음식으로 대표적인 것은 술이다. 모든 나라에서 술을 만들지만 발효 음식은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편차를 보인다. 중국의 전부를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내가 경험해 알고 있는 중국 음식에서 발효 음식은 자주 볼 수 없었다.
기껏해야 삭힌 오리알과 청국장하고 비슷한 ‘두시’ 정도이고, 일본의 경우는 된장, 간장과 청국장류인 낫토 등이 있으나, 된장의 경우도 우리의 것하고 발효 정도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있지만 본격적인 발효 음식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 정도다. 발효 음식으로 서양을 대표할 만한 것은 치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는 발효 음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로마 시대에는 우리나라 황새기젓과 비슷한 발효 젓갈이 있었으나 로마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여기에 비해 우리의 음식 문화는 발효 음식을 제외하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젓갈류, 된장, 간장, 고추장, 김치 등이 발효 과정을 거쳐 만든 음식이다. 보편적인 것은 아니지만 전라도에서 많이 먹는 홍어찜과 함경도에서 주로 먹는 가자미식해도 발효 음식이다. 발효 음식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만드는 과정에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전통 방식으로 장을 담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장을 담그는 과정도 오래 걸리지만 맛을 내고 보관하는 데도 꽤 까다로운 품을 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발효 문화가 발달하려면 무엇보다 사회구조가 안정돼야 한다. 사회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발효 음식이 발달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몽고와 같은 유목민족에게서 발효 음식이란 술과 요구르트 정도로, 그밖에는 발효 음식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이것은 그들의 생활이 이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발효 음식은 만드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지만 숙성(熟成)의 변화를 관찰할 만큼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으면 생겨 날 수 없는 음식이다.
그러므로 전쟁과 외침이 자주 있거나 사회가 전반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지역이라면 발효 음식이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발효 음식이 발달한 나라는 사회 안정을 유지하며 오랫동안 정착 문화가 형성된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음식 문화를 통해 본 우리나라를 말할 때, 흔히 수많은 외침을 받아온 나라로 이야기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상대적으로 안정을 유지했다고 생각한다. 발효 음식이 발달해 있는 나라가 그렇게 불안한 사회였는가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갖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음식 문화가 문화 발전의 최종단계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구조가 웬만큼 안정되지 않고는 음식 문화가 발전할 수 없다. 한국 음식의 조리 과정은 중국 음식이나 일본 음식 그리고 서양의 요리보다 상대적으로 손이 많이 간다. 그만큼 음식에 대한 정성이 깊다. 이러한 것을 보아도 발효 음식과 젓가락 문화로 대표되는 우리의 음식 문화는 담장과 함께 우리의 사회 문화 환경이 매우 안정되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발효음식의 발달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독문화를 만들어 냈다. 장독이라는 질그릇은 발효시키기에 딱 알맞은 도구다. 과거 모든 집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발효 음식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장독과 장독대도 없었을 것이다. 장독은 이동이 쉽지 않은 그릇이다. 이러한 그릇이 수십 개 있었다는 것도 사회의 안정성과 정착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田
■ 글 최성호
-
2004-04-27
-
-
웰빙시대 건강 전원주택
-
-
전원주택&생활, 30∼40대가 리드한다요즈음 건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의식주(衣食住) 전반에 걸쳐 '웰빙(Well-Being)' 바람이 일고 있다. 심지어 웰빙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어야만 상품이 잘 팔린다고 한다. 국내 유수 기업들도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웰빙 사업에 앞다퉈 진출하는 추세다. 웰빙이 생활 속에 새로운 코드로 자리잡은 것이다. '몸과 마음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건강하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자'는 새 라이프스타일, 웰빙. 그 열풍을 타고 각종 공해에 찌든 도시를 벗어나 공기 맑고 경관 좋은 전원에 집을 짓고 생활하려는 젊은 층이 부쩍 늘어났다. 수도권 전철과 도로망이 잘 갖춰져 교외에서 도심으로의 출퇴근이 용이해졌는데, 집 값 비싸고 삭막한 콘크리트 숲에서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건강하고 쾌적한 전원주택이 젊은 층들 사이에서 웰빙의 종착역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굳이 웰빙 열풍이 아니더라도 주5일 근무제의 본격 시행과 시중 여유자금의 유입, 신도시 개발로 인한 생활 편의시설 접근 가능성 상승으로 전원주택시장의 전망은 밝은 편이다.본지 창간 5주년을 맞아 전원주택 실수요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내용을 바탕으로 전원주택시장의 동향을 살펴본다.전원주택시장 활성화 무엇이 문제인가대형에서 소형으로, 고급에서 보급형으로건강과 환경이 중시되면서 전원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특히 유년기와 청년기를 시골에서 보내고 편리한 생활 여건을 갖춘 대도시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사람일수록 전원으로의 회귀 본능이 강한 편이다. 도시에서 20킬로미터 이상 거리에 자연환경이 풍부한 지역은 지난 10년 간 노후 정착용이나 주말 휴양용으로 개발돼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전원주택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JMK 컨설팅 진명기 사장은 전원주택시장이 50~60평형대 나 홀로 고급주택부터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라고 한다."아파트는 초기 소형에서 시작해 그 투자가치가 상승하면서 대형화 고급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전원주택은 일단 크게 지어야 폼이 난다며 별장 개념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목돈이 필요해 팔려고 내놓아도 아파트처럼 쉽게 팔리지 않았습니다. 투자가치는 물론 환금성도 떨어졌던 것입니다."전원주택시장이 가장 활성화 됐던 때가 I.M.F체제 이전인 1997년이다. 외환위기 이후엔 진 사장의 설명처럼 투자가치나 환금성이 떨어져 급속히 위축됐다. 대한건설협회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997년 말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5230여 개의 전원주택단지가 분양되거나 분양 예정으로 있었다. 그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그 가운데 50% 이상이 중도에 사업을 포기하거나 분양을 미룬 것으로 나타났다. 전원주택 개발 업체들 가운데 경영 부실로 공사를 할 수 없게 돼 허가가 취소됐기 때문이다.그러다가 1998년 고급 민박시설인 펜션(Pension)이 침체기를 겪던 전원주택시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에는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면서 대도시에 인접한 전원주택지를 중심으로 점차 회복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단적인 예가 남한강과 북한강을 낀 양평군의 지가(地價)가 30~40% 상승해 외환위기 이전의 시세를 회복한 것이다. 용인이나 광주, 남양주 등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에 자연 경관이 수려한 경기도권을 비롯해 강원도, 충청도, 제주도까지 펜션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심지어 외환위기 이전에 전원주택지로 분양하던 곳마저도 펜션단지로 간판을 바꿔 달 정도였다.최근에는 웰빙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탈 도시화 바람을 타고 전원주택시장이 정점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선진국의 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개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 도달한 이후부터 전원으로의 이주가 활발했다. 미국의 경우, 도시 반경 30~40킬로미터 사이에 있는 주택 가운데 전원주택이 23%다. 일본도 17% 수준에 달하는데 우리나라는 2~3%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최근 정부에서 강력한 부동산 안정대책을 쏟아내자 시중 자금이 전원주택(지)로 쏠리면서 재테크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광역 도로망 건설과 주5일 근무제 시행, 그린벨트 해제, 웰빙 열기에 탄력을 받은 실수요자의 증가로 전원주택시장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건강을 염두에 둔 환경 중시 풍조로 상류층은 전원형으로 잘 조성된 신도시 고급 아파트로 이주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20~30대 젊은 층들은 주택가격과 직장, 주거환경을 고려해 신도시 주변의 전원을 선호하는 추세다. 이주 패턴을 보면 서울 서남북지역의 거주자는 고양과 김포로, 서남지역 거주자는 김포와 강화로, 동남지역 거주자는 분당과 용인으로 이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문제는 이들의 전원행을 가로막는 울타리다. 즉 초창기부터 문제시 됐던 50~60평형대의 고급 전원주택이다. 하지만 젊은 층들은 단지형보다는 20~30평형대의 나 홀로 전원주택을 선호한다. 그런데 전원주택 시공업체들 대부분이, 평형에 별반 차이 없이 공사기간이 똑같이 들기에 수익성이 떨어지는 소형 전원주택 건축을 꺼린다. 이는 전원주택시장 활성화를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다.이전까지만 해도 전원주택 수요층은 고소득 생활자였으나, 지금은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실수요자 중심으로 바뀌는 추세다. 이른바 20~40대들, '전원주택 2세대'가 그 중심에 나서고 있다. 더욱이 웰빙족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타인의 평가를 받기보다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라고 한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의 메시지를 실천한다.스콧 니어링은 웰빙의 표본으로 인식되는데, 교수직을 버리고 미국 버몬트에서 농사지으며 전원생활을 하다가 1983년 100살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의 전원생활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제 정신을 갖고 살게 하는 삶의 한 본보기"라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이데올로기를 차치하고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각박한 도시생활에 대한 염증이 그로 하여금 전원행을 택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자아실현(自我實現)과 본연지성(本然之性) 회복에 대한 목마름이 자연인으로의 회귀(回歸)로 표출됐는지도 모른다.한편 유럽에서는 금전 수입과 사회적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느긋하게 삶을 즐기려는 다운쉬프트(Down Shift)족이 늘고 있다고 한다. 웰빙하고 무관하지 않은데, 이들은 주거지를 도시의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먼 전원으로 옮겨 살고 싶어한다. 그러면 삶의 질에 대한 욕구와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우리는 어떠할까?《월간 전원주택라이프》에서는 전원주택과 전원생활에 대한 연령대별 관심도를 알아보기 위해 홈페이(www.countryhome.co.kr)를 이용해 설문조사를 한 바 있다. 총 2332명이 설문에 응했는데 30, 40대가 69%의 높은 관심을 보여 '전원생활=노후생활'이란 고정 관념을 깼다. 그 결과를 보면, 30∼39세가 41%(952명)로 가장 높았고 다음이 40∼49세 662명(28%), 20∼29세 436명(19%), 50∼59세 241표(10%), 60세 이상 41표(2%) 순으로 나타났다.설문에 응답한 사람들이 전원주택 실수요자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58%가 전원주택 관련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얻는다고 답했는데, 이는 인터넷 사용이 활발한 젊은 층이 전원주택시장 전면에 나섰음을 반증한다.그러면 이들이 전원생활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이 74%로 가장 많았으며 건강 문제(14%), 교육 문제(4%), 경제적 이유(4%), 주택문제(3%) 순으로 나타났다.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이 앞에서도 밝혔지만 '현재 대도시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유년기와 청년기를 시골에서 보낸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전원에 대한 회귀 본능이 강하다'는 점이다. 돈과 지위만을 좇아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삭막한 도시생활에 대한 환멸이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한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스콧 니어링의 예에서처럼 생명의 근원인 자연(전원)에 대한 그리움으로 일종의 자기반성일지도 모른다.다음으로 건강문제를 꼽았는데, 온 가족이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취재 차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무엇보다 건강이 좋아졌다" "이제야 사는 맛을 느낀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여기 아이의 건강을 위해 전원생활을 시작한 조원금 씨 가족을 보자. 충북 청원군 남이면 산세 좋고 양지바른 시골 마을 어귀에 25평 황토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하는 가족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청주시내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18개월 된 아들이 아토피성 피부 질환으로 고생하는 것이 못내 안쓰러워 전원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2003년 11월, 내부 평면을 현대식 아파트 구조로 설계한 전통 흙집을 짓고 이사했다. 아이 건강을 위해 전문가에게 의뢰해, 하인방 밑으로 소금과 참나무 숯을 10㎝ 두께로 깔아 벌레의 서식을 예방하고 항균과 항습 효과를 높였으며, 흙벽을 15㎝ 두께로 해 실내 공기 정화는 물론 수분 조절력이 뛰어 나도록 설계했다. 이주한 지 5개월이 지난 지금 아들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을 보면서 조원금 씨 부부는 행복해 한다. 사실 조원금 씨는 3월 초 내린 폭설로 길이 막혀 3일씩이나 직장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길이 뚫린 바로 그날 만났음에도 아들 건강을 위해 전원행을 잘 선택했다고 할 정도다.한편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은, 순수 주거 목적으로 전원주택을 짓고자 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전원주택의 유형을 묻는 질문에 64%가 순수 주거용 전원주택을 선호했다. 다음이 수익형 전원주택(펜션) 19%, 휴일·주말을 위한 휴식형 전원주택 17% 순으로 나타났다.전원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전원생활을 시작했다가 적응하지 못한 채 도시로 유턴하는 사례가 많았다. 광주군 퇴촌면 한국전원부동산 양정일 컨설턴트는 "요즘에는 전세로 나온 전원주택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일단 전원에서 살아 보고 전원주택을 지어 완전 이주할 것인지를 결정하겠다는 실속파들이다. 만약 이들이 처음부터 전원주택을 짓거나 구입했다면 다시 도시로 돌아가기까지 금전적, 정신적 그리고 시간적으로 엄청난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그렇다고 전원주택을 지으려는 사람들이 직업을 바꿔 완전 귀농(歸農)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도시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쾌적한 전원 속 보금자리에서 훌훌 떨쳐 버리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여기에는 수도권을 사통팔달로 가로지르는 광역 도로망의 개통으로 심리적 거리감이 짧아졌으며, 주5일 근무제 확산으로 출퇴근에 따른 부담감이 준 대신 온 가족과 함께 산책을 하거나 텃밭을 일굴 수 있는 여가 시간이 증가한 것도 한몫을 했다. 전원주택 입지 선택 기준으로 66%가 생활 편의시설보다는 공기 좋고 물 맑은 자연환경을 꼽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다. 또한 전원주택이 밀집한 단지보다는 부대낌 없는 나 홀로 전원주택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전원생활을 희망하는 젊은 층이 증가함에 따라 전원주택의 규모는 점점 작아지는 추세다. JMK 컨설팅 진명기 대표는 "예나 지금이나 부지 300평 이상에 연건평(延建坪) 60평 이상으로 지은 전원주택은 환금성이 떨어진다. 전원주택 2세대라 불리는 젊은 실수요자를 끌어들여 시장을 활성화시키려면 방갈로형 전원주택을 보급해야 한다. 한 곳에 60평짜리를 짓기보다는 15평짜리 네 채를 공급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전원주택은 부유층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별장 개념에서 출발했다. 그후 소득 수준의 향상에 따라 중·장년층을 중심으로시장이 형성됐고, 2000년대, 들어 '건강과 삶의 질'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젊은층, 이른바 전원주택 2세대를 중심으로 급속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제 당면한 문제는 작은 평형의 중저가 전원주택을 개발 보급하여 대중화시키는 것이다. 田■ 글 윤홍로 기자
-
2004-04-27
-
-
[전원주택 꾸미기] 공간을 채우는 오브제 한국고전가구 & 도자기
-
-
'한국고전가구'는 5000년 역사에 기초한 우리 민족의 생활을 담은 것으로 독특한 색채와 디자인, 디테일 구성을 보이고 있다. 최근 이러한 미학적 깊이에 관심을 갖고 한국 고전가구를 생활 가까이에서 느끼고자 하는 이들의 수요가 늘고 있다. 조상들의 자연주의적 성향과 지혜로움에 현대의 실용성과 심플함을 도입한 한국고전가구를 살펴본다.귀3면 유리진열장- 미송, 오동 - 밝은밤색 (73 x 38 x 132.5㎝)3면이 유리로 되어 있으며, 천판 귀가 올라가서 여성스럽게 느껴지는 진열장이다. 창살양주장- 미송, 오동 - 밝은밤색 (91 x 38 x 178.5㎝)크기가 커서 거실용 진열장으로 좋다. 창살문과 아래 수납공간이 이 제품의 특징이다.먹감경대- 먹감나무, 괴목 - 밝은밤색 (17.5 x 24.5 x 13㎝) 먹감나무로 만들어진 경대로 앉아서 사용할 수 있는 화장대이다. 죽문갑과 죽사방탁자- 미송, 죽 - 진밤색 (90 x 38 x 52㎝)- 죽2단사방탁자 사이즈(46 x 38 x 138㎝)전면을 죽으로 해서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죽으로 된 제품은 시중에서도 흔하게 볼 수 없는게 사실이다. 색상은 앤틱분위기를 내는 진밤색이다. 좌식화장대- 괴목, 오동나무 - 밤색 (66 x 39 x 148㎝)앉아서 사용할 수 있는 화장대. 외국에서는 전신거울용으로도 사용한다고 한다. 교자상- 괴목 - 밝은밤색손님접대용 테이블로, 상판은 괴목 무늬목을 사용하여 나무의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거실 테이블로 인기가 많은 제품이다. 평상- 미송, 홍송 - 밝은밤색 (225 x 162 x 67㎝)평상은 조선시대 마루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낮잠을 자기도 하고, 손님을 접대하기도 하고, 독서를 하기도 했던 곳이다. 사진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지며, 좌우는 의자로 가운데는 테이블로 사용한다. 이 평상은 침대로도 사용 가능하다. 오동함세트- 오동, 미송 - 진밤색(57 x 36 x 38㎝) 함은 예부터 우리 결혼 풍습 때 많이 사용되었던 제품이다. 지금도 그 내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현재는 소품용으로 인기가 좋다. 나뭇결을 자연그대로 살려서 우리 선조들의 자연주의적 성향을 살리려 노력했으며, 색상은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도록 처리했다.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4면을 '사궤맞춤법'으로 하여 더욱 견고하게 제작했다. 큰 함 안에 작은 함 두 개가 차례로 들어가서 선물용으로도 아주 좋다. [중간박스 : 47 x 27 x 33, 위박스 : 39 x 20 x 27]도자기는 흙이 주는 안락한 공간의 감동을 나누며 조형적 활용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품으로 가치가 높다. 특히, 고덕우 도자기는 다양한 흙으로 도자기의 무한한 표현과 현대적 실용성, 순수작품으로 높게 평가된다. 최근 인테리어 소품으로 도예 제품의 인기가 최고조다. 단순한 장식이 아닌 생활자기로의 이용도 가능하기 때문. 형식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은 안주인의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전통적인 공간과 모던한 공간의 조화로 친근감이 느껴지는 한국적인 고덕우 도자기의 빛깔은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준다. 수반장식참나무재와 황토를 이용해 빚어낸 수방 장식은 물이 주는 편안한 느낌을 자연스럽게 담아 준다. 실내에 연못을 두는 편안함을 원한다면 우담 수반으로 충분히 대신할 수 있다. 닥분 청사발전 부분이 꽃잎처럼 자연스런 모양을 하고 있어 눈과 입이 편해지는 사발이다. 식탁에 놓아두면 고급스러움을 한층 더하는 소품으로 활용된다.황회 항아리천연재료로 자연스런 색상과 모양을 만들어 저장용기로써의 기능성뿐만 아니라, 장식성까지 겸비한 항아리.우담 쌀 항아리와 과반, 재유 꽃접시좋은 밥맛을 위해서는 쌀의 신선도를 유지하고 벌레가 생기지 않게 잘 보관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담 쌀 항아리는 참나무재를 주원료로 한 천연 유약을 발라 구워 통기성이 좋다. 따라서 쌀을 넣어두면 습기자 차지 않고 벌레가 생기지 않아 좋다. 두 가지의 과반은 과일이나 샐러드를 담으면 제격이다. 작은 물품이나 금붕어를 넣어 수반으로 활용할 수도 있으니 인테리어 소품으로서도 멋스럽다. 세 가지의 다른 크기로 구성된 재유 꽃접시 세트는 어떤 음식을 담아도 어울려 다양하게 쓸 수 있다. 물방울 도벽벽에 걸어 장식할 수 있는 물방울 도벽으로 일괄되지 않은 선이 세련미를 더한다. [좋은 도자기 고르는 방법]다년간 국내외 전시회를 통해 많은 고객과 접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물어 오시는 것은 "어떤 도자기가 좋은 거죠?"라는 질문입니다. 그것이 인테리어 소품이 되었던, 생활식기가 되었던 어디서나 듣는 질문입니다.답은 한가지입니다. 자신이 가진 안목에 확신을 가지세요. 안목의 높고 낮음을 재단하지 말고 자신에게 되물어 보세요. "난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지?" 라고 말입니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하지 말고, 가장 주관적으로 선택하세요.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게 얼마짜리이든 게의치 않고 구입해서 값어치를 높여 보세요. 도자기는 만드는 작가가 반의 값어치를 만들고 나머지 반은 사용자가 만드는 것입니다. 도자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사용하면서 사용자의 눈과 손, 마음까지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깨어진 부분이 있거나, 파편만으로도 좋으신 분은 거기서 아름다움을 느끼면 됩니다. 깨끗하고 완벽한 것을 좋아하시면 그렇게 선택하세요. 주변의 눈을 의식하면 정말 좋은 도자기를 만날 기회를 많이 놓치게 될 겁니다. 한가지 주의 할 사항은 도자기와 쇠그릇과는 함께 씻지 마세요. 이것만 염두 하신다면 처음 느낌을 좀더 오래두고 간직 할 수 있을 겁니다.- 글 이태근 실장 <우담 고덕우 도자기, 017-574-2627>■ 정리 김혜영 기자
-
2004-04-27
-
-
[업체탐방] 올바른 목조주택의 선두, ‘Great east’
-
-
목조주택 시공업체인 그레이트 이스트(Great east)는 현재 용인, 이천, 양지 중간에 위치한 덕평문화마을에 목조 주택 단지, ‘햇살 가득한 마을’을 개발하고 있다. 그레이트 이스트의 박근진 대표는 25년 동안 미국에서 쌓은 노하우를 기반으로 ‘선시공 후분양제’를 표방하고 나섰다. 이는 완벽한 설계와 시공, 엄선된 자재(Setzer) 선택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이다. 실 입주자가 직접 참여하는 인테리어, 집짓기와 확실한 A/S, 간단한 보수안내교육으로 올바른 목조주택문화를 위해 앞장서고 있는 그레이트 이스트와 ‘햇살 가득한 마을’을 찾아가 본다.
최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이지면서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이고 여행, 주택에도 웰빙(Well-being) 바람이 불고 있다. 이에 따라 친환경적인 목재의 사용으로 주거공간을 쾌적하게 가꿔주는 목조주택의 인기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흔히 목조주택에서 생활하면 평균 5년 이상 수명이 길어진다고 설명한다. 그에 비해 시멘트 독은 50년 이상이 되어도 해소되지 않아 ‘문명병’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 목조주택 시장을 바라보면 전문적인 기술이나 관리체계 없이 시공되는 사례가 많다. 낮은 단가를 우선해서 시공하다 보니 단순한 집의 기능 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로 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박근진 대표는 25년 동안 미국에서 쌓은 노하우의 선진 기법을 도입했다. 그는 1988년 8월 미국에서 목조주택 교육에 관한 라이센스를 취득했고, 완벽한 설계와 시공, 목조주택 전문 창호재(미국 Pella, Milgard 제품) 등 공인된 자재(Setzer) 사용으로 올바른 목조주택 문화를 위해 앞장섰다.
이러한 그레이트 이스트이기에 목조주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장 방문을 허용한다. 또한 실 입주자가 직접 참여하는 인테리어, 집짓기와 확실한 A/S, 간단한 보수안내교육도 실시할 계획이다.
사용자를 고려한 목조주택 단지
1800평 규모의 햇살 가득한 마을은 전체 대지를 16필지로 분할해 총 11동의 주택을 건설할 예정이다. 선시공 후분양을 표방한 이곳에서는 현재 4동의 목조주택이 시공 중에 있고, 중앙에 위치할 테니스장의 땅고르기 작업이 한창이다.
A동은 가장 익숙한 평면으로 30`~40대 층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B동은 50대 중점을 두고, 각 실의 공간을 넓게 확보했다. 또한 건축주의 특징에 맞는 설계와 웅장한 분위기를 강조해 손님이 오래 묵어도 부담이 없는 공간 구성에 중점을 두었다. C동은 입면이 가장 예쁜 집으로 1층 평면이 40~50평정도 되며 1층 위주의 생활에 중점을 두었다. 때문에 2층은 작은 편이지만, 일반인들의 문의가 가장 많이 들어오는 설계 중 하나다. D동은 베란다 문화에 익숙한 20대에 중점을 두어 전면 테라스를 넓게 뺐고, 후면 덱(Deck) 공간의 활용도를 높였다. 田
■ 그레이트 이스트
-
2004-04-27
-
-
[풍물시장] 황학동 벼룩시장의 재탄생, 동대문운동장 풍물시장
-
-
80년대 중반 잠실운동장 건설 이후 프로축구대회도 열리기 힘든 위치로 전락한 동대문운동장. 대형 쇼핑몰들이 들어서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바깥 풍경과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던 이곳이 요즘 사람들의 열기로 채워지고 있다. 황학동 벼룩시장과 청계천 일대 900여 개 노점들이 이곳으로 몰려온 탓이다.서울시가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설 자리를 잃었던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이 새로운 풍물 장터에는 휴일이면 10만여 명이 다녀간다. 사용법조차 알 수 없는 골동품부터, '대박 세일' 신품까지, 다양하고 개성 있는 물건들이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동대문운동장에 새 둥지 틀어동대문운동장 풍물시장이 가로 2m, 세로 1.2m의 좌판 크기를 일정하게 맞춘 새로운 모습으로 문을 연 지 3개월이 지났다. 작년 11월 청계천 일대 노점상을 철거한 지 두 달여 만에 장사를 재개하면서 이전보다 손님이 줄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가족단위로 찾아오는 손님들과 동대문 쇼핑몰을 찾은 외국 관광객들로 인해 그러한 걱정은 줄었다. "5개월 동안 창고에 쌓아놨던 물건입니다. 싸게 싸게 들여가세요. 아가씨도 사진만 찍지 말고, 얼른 싼 옷 골라서 입고 가요∼."점포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촬영을 하는 사람도 어느새 물건을 골라야 하는 손님의 범주 안에 들게 됐다. 신명난 목소리로 중고 모피류를 파는 상인의 목소리가 흥겨움을 더하고, 열심히 옷을 고르는 손님들의 손길도 바쁘다. 발걸음을 멈춘 한 손님은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 이리저리 옷을 뒤적이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는지 가격 흥정에 나섰다. 털모자가 달린 겨울 잠바가 2만 원인데 5000원만 깎아 달라는 손님과 그렇게는 못 판다는 상인의 실랑이가 한참. 여기저기 가격을 물어보는 다른 손님들 때문에 정신없이 바쁜 상인은 결국 5000원을 뺀 금액을 받고 빠른 손놀림으로 봉투 안에 옷을 담아 건넨다. 1만5000원을 지불하고 봄옷을 하나 장만한 손님은 뿌듯한 표정으로 다른 점포를 향해 돌아섰다. 이런 손님들과의 실랑이가 귀찮기도 할텐데, 상인은 밝은 표정으로 금새 다른 손님의 질문에 답하며, 옷 파는데 정신이 없다.있어야 할 것은 다 있구요...화개장터의 노랫말처럼 동대문 풍물시장에도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다. 서울의 명소였던 황학동 벼룩시장의 상인들이 그대로 자리를 옮겨온 만큼 탱크 빼고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물건들이 즐비하다. "**의 생일을 축하하며...84.2.19 인옥." 볼펜으로 꼭꼭 눌러 쓴 생일축하 메시지가 남긴 정태춘, 박은옥의 낡은 레코드표지. 친구 혹은 연인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선물한 것일텐데, 어떤 사연으로 20년이 지난 지금, 풍물시장의 한 구석에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상인은 2000원에 이 레코드판의 새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손님을 불러모으고 있지만, 턴테이블의 추억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낡은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다 돌아선다. 이처럼 풍물시장에 나온 물건들은 오랜 세월 누군가의 손때가 가득한 중고물품을 비롯, 헌 옷가지와 중고 휴대폰과 충전기, 리모컨과 오래된 카메라 등 그 종류도 정확히 꼽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고속도로 휴게소에서나 볼 수 있는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가 시장 구석구석 울려퍼지고, 옛 향수가 가득 담긴 골동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한창이어도 어김없이 뱃속의 시장기를 느끼게 된다.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단 돈 1000원짜리 장터국수로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던 한 아주머니도 이곳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풍물시장과 동대문운동장의 주차장 사이에는 이른바 먹자골목이 자리하고 있다. 2000원짜리 옛날자장부터 선짓국, 해장국, 김밥, 핫도그 등 다양한 종류의 먹거리가 있어 시장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준다.겨우내 묵은 먼지와 함께 새 봄을 단장할 준비를 한다면, 먹거리 많고, 볼거리 많은 동대문운동장 풍물시장을 한번 찾아보는 건 어떨까. 1960∼70년대의 향수가 밴 물건들을 새롭게 닦아 집안을 장식한다면, 요즘 유행하는 앤틱(Antique)풍의 인테리어 효과를 볼 수 있다.동대문운동장 풍물시장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11시 사이에 개장해, 해가 지는 저녁 시간까지 문을 연다. 田■ 글 ·사진 조영옥 기자
-
2004-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