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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산 홍송으로 핀란드인이 직접 지은 45평 통나무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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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 지은 통나무주택 핀란드산 홍송으로 핀란드인이 직접 지은 45평 통나무주택 건축은 통나무주택을 짓기로 했다. 자연을 찾아 이 곳까지 왔으니 주택 역시 가장 자연에 가깝게 짓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통나무는 핀란드산 홍송이 쓰였으며, 건축업자 역시 핀란드 현지 기술자 3명이 와서 직접 지었다. 바닥을 치고, 골조를 세우고 통나무를 쌓아올리면서 진행된 건축은 꼬박 석달이 걸려 98년 10월경 완료됐다. 연면적 45평 규모로 1층이 33평, 2층이 12평이다. 술과 담배에 찌들었던 도시생활. 사업상 피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 자주 술을 접했으나 무쇠가 아닌 이상, 이를 견뎌 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작심하고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자리를 잡은 곳이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두산리.98년 말에 입주를 했으니 이 곳에서의 생활도 2년이 지났다. 몇 년간의 생활에서 가장 먼저 감지된 변화는 건강. 예전에 비해 술을 접할 기회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가끔 술을 마셔도 그 다음날이 아주 가뿐하다. 모두 맑은 공기와 좋은 물, 그리고 서울처럼 사업상의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적적할 때도 있지만 몸이 좋아지는 것을 스스로 느낄 정도면 그 정도의 투자는 전혀 아까울 것이 없다. 게다가 무공해 채소를 직접 길러 먹을 수 있는 넓은 텃밭과 한여름에도 이불을 덮어야 잠을 잘 수 있을 만큼의 시원함 등 기대하지 않았던 두둑한 보너스까지 있다.조현상씨가 이 땅을 마련한 것은 지난 96년. 탈서울을 결심하고 땅을 보러 다닌 끝에 최종적으로 이 곳을 선택했다. 산비탈인데다가 다듬어지지 않은 야산이라는 점, 그리고 약간의 습지가 조성돼 있다는 점등 몇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한 번 쏠린 마음이 되돌아오기는 힘들었다.부동산에 문외한이다 보니 좋은 면들만 부각됐는데 산중턱 높직이 자리해 전망이 좋았고, 주변에 민가가 별로 없어 조용했다. 또 앞으로는 큰 개울이 흐르는 때묻지 않은 곳이라는 점 등이 긍정적인 면들로 작용했다. 결국 1천2백평 규모의 준농림전을 평당 5만원씩, 모두 6천만원에 계약을 마쳤다.건축은 그 이듬해 8월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건축에 앞서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필요했는데 계약 당시 우려했던 몇 가지 점들이 난제로 떠올랐다.집을 짓기 위해선 바닥을 평평하게 고르는 작업이 우선이었는데 그 곳이 습지였기 때문에 뻘을 모두 걷어내고 돌과 흙으로 되메워야 했다. 계약 당시 다소 우려가 됐지만 이 문제가 이렇게 큰 공사가 될지는 당시에 미처 깨닫지 못했다. 토목공사는 두달 정도가 소요됐고 여기에 소요된 공사비만도 대략 3천만원 이상이 들어갔다.건축은 통나무주택을 짓기로 했다. 자연을 찾아 이 곳까지 왔으니 주택 역시 가장 자연에 가깝게 짓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통나무는 핀란드산 홍송이 쓰였으며, 건축업자 역시 핀란드 현지 기술자 3명이 와서 직접 지었다.바닥을 치고, 골조를 세우고, 통나무를 쌓아올리면서 진행된 건축은 꼬박 석달이 걸려 98년 10월경 완료됐다. 연면적 45평 규모로 1층이 33평, 2층이 12평이다. 실내 구조는 1층의 경우 방 2개와 거실, 주방, 화장실, 그리고 거실 한쪽엔 섹스폰 연주를 위한 공간도 별도로 꾸몄다. 2층은 별도로 칸막이를 하지 않고 원룸식으로 꾸몄다. 이밖에 지붕은 아스팔트싱글이며, 난방은 기름보일러, 식수는 지하수를 사용한다.건축비는 평당 3백50만원 정도가 소요돼 순수 건축비만 1억5천만원 가량이 들었다. 조경에도 많은 신경을 써 여기에만 별도로 2~3천만원이 추가됐다.이 곳에선 아직 혼자만의 시간이 더 많다. 아이들의 학업문제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은 아직 서울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말이나 방학 때엔 모두들 내려온다. 처음엔 다소 적적했던 게 사실이나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만큼 이 곳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다.요즘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다시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하니 무엇인가를 찾아야 했는데 이젠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됐다. 2년을 보냈으니 몸도 어느 정도 추슬렀다.예정대로라면 가을쯤부터는 바빠질 것 같다. 새로운 사업 구상에 여름밤이 깊어만 간다.田 ■ 글·사진 류재청 ■ 건축정보 위치: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두산리 부지면적: 준농림전 1천2백평(이중 2백평 대지전용) 부지구입년도: 96년 부지구입금액: 평당 5만원 건축공사기간: 97년 8월~10월 건평: 45평(1층 33평, 2층 12평) 실내구조: 1층-방 2, 거실, 주방, 화장실, 음악실 2층-원룸 건축비: 평당 3백50만원 건물형태: 2층 통나무주택(핀란드산 홍송) 지붕마감: 아스팔트싱글 난방형태: 기름보일러 식수공급: 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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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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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보다 넓어 보이는 25평 황토벽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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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 오픈시켜
"실제보다 넓어 보이는 25평 황토벽돌집"
나무로 구조체를 세우고 황토벽돌로 벽체를 쌓고 내외부도 황토로 마감했다. 미장에 쓰인 황토는 순수황토에 ‘노리’라고 불리는 해초 끓인 물과 마의 일종인 ‘스사’를 풀고, 마사와 함께 개어 미장을 했다. 내외벽 모두를 흙벽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마감했는데 손으로 문질러도 손바닥에 흙이 묻어 나지 않는다. 지붕 마감은 적삼목 쉐이크라는 미국산 지붕재로 일종의 우리식 너와와 같은 느낌이다.
열두 가구 정도 모여 사는 자그마한 동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데다 가구수가 얼마안되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주변으로 장흥, 송추 등 유원지가 산재해 있지만 그 곳들과는 격리된 감춰진 동네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기산리에 속하며 이 곳 사람들 사이에선 ‘턱골’로 많이 불린다. 남궁걸 이이숙씨 부부가 이 곳에 부지를 마련한 것은 지난 96년.
남궁걸씨는 남들처럼 부지를 알아보느라 여기저기 다리품을 파는 일 없이 단박에 이 곳을 전원주택지로 택했다. 이 곳은 남궁걸씨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어려서부터 드나들던 낯익은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 안되는 주민들 중에는 아직까지 남궁걸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복잡한 마음의 갈등 없이 비교적 수월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또 주변으로 대단위 필지의 문중 땅이 많아 개발 가능성이 희박해 자연환경을 오래 보존할 수 있을 것이란 점도 긍정적인 면으로 평가됐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가까이 사격장이 위치한다는 점이었는데, 이 것 역시 크게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사격이 어쩌다 한 번 있는 정도고, 오히려 사격장 때문에 다른 오염시설이나 유흥시설이 들어설 수 없다는 점을 꼽으면 되레 장점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남궁걸씨가 전원주택을 생각하게 된 것은 순전히 아들 훤 때문이다.
96년 당시 훤이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생식에 관심을 갖게되었고, 나아가 자연환경과 전원생활에도 관심을 가지며 결국 지금의 집을 짓게 됐다.
이후 훤이는 이 집을 아주 좋아하게 됐고 주말이나 방학이면 이 곳에 머물며 즐겁게 뛰어 놀았고 그사이 건강도 회복하게 했다. 이 집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훤이가 완쾌됐으니 남궁걸씨 가족에겐 이 집의 존재가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다. 집은 지난 98년 5월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유형의 집들이 있었지만 남궁걸씨 자신이 어린시절 커다란 한옥에서 자랐던 기억이 있어 당초 염두에 두었던 황토집을 짓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황토집을 짓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아들 훤이의 건강을 생각해서였다.
최대한 자연소재를 이용해 집을 짓기로 했는데 황토나 미장의 경우도 가능한 화학적 첨가물질 대신 전통방식을 고수해 자연과 가깝도록 지었다. 건축 계획이 세워지면서 우선 토목공사에 들어갔다.
집 앞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어 석축을 쌓고 흙을 퍼다 부어 높이 돋우고 다졌다.
설계와 시공은 동방황토그린에 의뢰했다. 모두 25평 규모로 방 2개와 거실, 화장실, 주방, 데크 등으로 구성돼 있다. 당초 38평을 계획했으나 IMF체제로 들어서며 계획을 축소, 나머지 13평은 테라스로 전환했다.
그러나 25평의 작은 규모임에도 모든 천장을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오픈 처리해 공간감을 강조, 답답한 느낌이 없도록 설계했다. 나무로 구조체를 세우고 황토벽돌로 벽체를 쌓고 내외부 마감도 황토로 마감했다.
미장에 쓰인 황토는 순수황토에 ‘노리’라고 불리는 해초 끓인 물과 마의 일종인 ‘스사’를 풀고, 마사와 함께 개어 미장을 했다. 내외벽 모두를 흙벽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마감했는데 손으로 문질러도 손바닥에 흙이 묻어 나지 않는다.
지붕 마감은 적삼목 쉐이크라는 미국산 지붕재로 일종의 우리식 너와와 같은 느낌이다. 바닥은 거실의 경우 비닐 장판을 깔았고, 방에는 콩기름을 먹인 전통 종이장판지를 깔았다.
이밖에 난방은 기름보일러이며, 식수는 지하수를 사용한다.
98년 5월 시작된 공사는 3개월 만인 같은해 8월에 완공됐다. 소요된 순수 건축비는 평당 2백80만원. 이제 이 곳에 온 지도 벌써 2년이 가까워 간다.
집만 덩그러니 있던 이 곳도 이제는 담장이 둘러지고 마당도 생기고 곳곳에 나무도 심어져 제법 온기가 돈다. 특히 자연석을 쌓아 만든 야트막한 담장은 면면들이 반듯하게 아주 잘 맞아들어갔다.
아직 모든 기반이 서울에 있어 그동안 주말주택이나 아이들 방학때 이용하는 정도였지만 딸 ‘선’과 아들 ‘훤’이 대학에 진학하면 아예 이 곳으로 내려올 참이다. 대략 5~6년 후 쯤이다.
이제 4월로 접어들며 제법 봄기운이 완연해 지고 하루가 다르게 앞산의 색깔도 달라진다.
커다란 거실창을 통해 비치는 앞산의 아지랑이가 인상적인 봄날 오후다.田
글·사진 류재청
작은인터뷰/한봉수(동방황토그린 대표)
갈라지는 현상 기술적 보완 통해 예방 가능
많은 사람들이 황토집에 대해 몇 가지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수분이 함유된 황토는 건조되면서 수축하여 크랙이 생기고 구조체(목질부)와 벽체 사이에 틈이 발생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 현상은 몇 가지 기술적 보완을 통해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우선 크랙의 방지는 흙 속의 공극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하다. 흙의 점도와 구성을 파악한 뒤 그에 따라 일정량의 모래와 마사 그리고 섬유질 역할을 하는 짚이나 스사(마닐라삼), 갈대 등을 배합하면 좋다. 또 마감을 위한 흙 역시 노리(해초의 일종) 끓인 물에 흙을 개어 사용하면 점력과 내수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구조체와의 틈새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1년정도 경과한 뒤 한 번 보수해 주는 것이 좋다. 그러나 여기서 틈이 생기더라도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이를 대비해 미리 도리나 창방 등의 아랫부분과 흙벽이 닿는 기둥 중심부에 각재를 덧대어 벽체를 시공하면 된다. 이집도 이러한 전통방식과 기술적 보완을 바탕으로 지어진 집이다.
■ 건축정보
위치: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기산리
부지면적: 준농림전 3백50평(이중 2백50평 대지전용)
부지구입년도: 96년
건축공사기간: 98년 5월∼8월
건평: 25평
실내구조: 방2, 거실, 주방, 화장실
건축비: 평당 2백80만원
방위: 남서향
건물형태: 황토집
벽체구조: 황토벽돌
내외벽마감: 순수 황토+노리(해초 끓인 물)+스사(마의 일종)
지붕마감: 적삼목 쉐이크
바닥재: 장판, 전통종이장판
난방형태: 기름 보일러
식수공급: 지하수
마을 가구수: 12가구
■ 설계 및 시공: 동방황토그린(02-57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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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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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맛을 내는 자연마을 만들기 외길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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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리조트클럽 이종용 촌장
"내 맛을 내는 자연마을 만들기 외길 고집"
반듯하게 지어 놓은 서양식 집이 아니라면 고향의 흔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마당에는 고향집이 그랬듯 닭들이 무리 지어 먹이를 쪼고 있었다. 이 마을의 촌장 이종용 대표를 만났을 때 그는 고향의 동네 아저씨나 형님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밭일을 막 끝내고 돌아온 듯한 아니면 밭일을 나가는 듯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다. 봄볕 가득한 대낮 촌장의 얼굴은 아랫마을의 잔치에 불려가 막걸리 몇 잔 거들고 온 터라 조금 상기돼 있었다. 고집스레 ‘내 맛이 나는 마을’을 만들고 있는 ES리조트클럽의 이종용 대표를 만났다.
이 사람은 농부다. 그을린 얼굴, 허름한 셔츠에 반쯤 비틀어 쓴 모자, 때로는 지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농담도 걸고… 좀 흐트러져 보이는 행동은 영락없는 촌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눈빛은 청년처럼 반짝이고 거리낌없는 말투에 논리는 정연했다.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막걸리 한잔의 자유
봄볕이 수채화처럼 번지던 날 충주호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ES리조트클럽을 찾았다. 산과 물들이 급한 곡선을 그리는 호반을 따라 정신없이 가다보면 어느 순간 산 중턱에 뾰족한 지붕을 한 집들이 눈에 띄는, 알프스의 전경을 닮은 마을이 하나 토막을 치듯 나타난다. 눈앞까지 와 찰랑이는 호수 건너편엔 때론 솟구치고 때론 물안개에 싸인 월악산이 성채가 되는 동네, 그곳에 ES리조트클럽이 있다. 반듯하게 지어 놓은 서양식 집이 아니라면 고향의 흔한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마당에는 고향집이 그랬듯 닭들이 무리 지어 먹이를 쪼고 있었다. 이 마을의 촌장 이종용 대표를 만났을 때 그는 고향집 동네 아저씨나 형님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밭일을 막 끝내고 돌아온 듯한 아니면 밭일을 나가는 듯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다. 봄볕 가득한 대낮 촌장의 얼굴은 아랫마을의 잔치에 불려가 막걸리 몇 잔 거들고 온 터라 조금 상기돼 있었다. 그런 거리낌 없는 자유로움이 좋아 그는 이곳 충주호 언저리에 마을을 만들었다.
시골 정취 가득한 자연마을
충북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에 있는 ES리조트클럽은 콘도형 자연부락이다. 콘도라 하여 관광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빌딩 모습을 한 것이 아니라 마당에는 닭과 거위가 먹이를 찾고 토끼가 뛰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종용 촌장은 이곳 ES리조트클럽의 대표다. 그가 이런 마을을 만들 생각을 한 것은 아파트와 콘도가 대단한 인기를 끌던 때였다. 휴양지마다 도심의 콘크리트 빌딩과 같은 모습의 콘도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때 그는 이곳에 시골정취가 물씬 풍기는 자연마을을 만들기로 했다. 그 당시 친구였던 잘 나가던 아파트 시공업체 사장이 그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콘도나 지어 분양하자”며 말렸을 때 그는 그것이 당장 돈을 버는데는 좋을지 몰라도 자신의 취향에는 전혀 맞지 않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돈보다는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마을을 만들어 자기만의 철학을 심어보고 싶었다. 서울의 사업체를 다른 이에게 맡기고 이곳 산동네로 들어왔다. 그리고 14만1천여 평의 부지를 가꿔 옛 시골정취가 물씬 풍기는 자연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다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개발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이렇게 하여 97년에 테마형 별장 콘도 6개동 62실이 완성되었으며 98년부터 전원주택 스타일의 단독형 콘도가 지어져 현재 13개 동이 완성되었다. 모든 건물은 부지의 자연상태를 그대로 이용해 앉혀 거실에 바위가 올라와 있기도 하고 데크를 뚫고 소나무가 자라기도 한다. 이곳의 모든 건축물은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목조로 지었으며 각각의 건물 구조와 내부인테리어는 나름대로 특징을 갖고 있다. 또 어느 집 어느 객실에서나 충주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것들 모두 이종용 대표가 직접 설계하고 시공도 직영으로 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속에 숨겨져 있는 ES리조트클럽만의 더 큰 정신과 사상이다. 현재 이종용 대표가 생각하는 것의 1/3밖에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지금도 이곳 마을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다. 앞으로 계속하여 이 대표의 철학으로 덧칠이 될 것이다.
내 맛을 내어 산다
‘콘크리트에 찌든 도시인들이 고향을 찾듯 편한 마음으로 찾아와 아주 편안하게 쉬다 갈 수 있는 곳’ ES리조트클럽의 테마는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촌장 이종용 대표나 직원들 모두 편안하다. 과잉하여 손님을 맞는 분주를 떨지도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좀 흐트러진 모습과 순박한 모습 그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손님을 맞는다. 이것이 바로 이종용 대표의 철학이다. 시골에 왔으면 시골 그대로의 분위기를 즐기다 가는 것이며 이런 분위기에 맞지 않는 고객은 굳이 불러 들일 마음도 없다. 설령 왔더라도 돌려 보낸다. 이것을 이 대표는 ‘내 맛을 낸다’ 혹은 ‘내 맛대로 산다’라고 표현한다. 그 맛에 어울리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고자 이종용 대표는 ES리조트클럽을 만들었다. 이 대표는 특히 네팔에 관심이 많다. 네팔에도 ES리조트클럽의 철학이 담긴 마을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네팔에 마을이 만들어 지면 회원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이런 점차적인 이 대표의 계획에 들어 있는 것 중 하나가 제대로 된 전원주택단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전원주택들은 수요자들의 생각과 너무 동떨어진, 수요자들의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특히 전원주택의 가장 큰 테마인 자연을 살려 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연을 훼손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넘어 분개함마저 느낀다. 그래서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내맛에 맞는’ 전원주택을 지을 생각도 갖고 있다. 그의 꿈과 철학이 담긴 전원주택 단지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된다.田
글 김경래 /사진 류재청
■ 건축정보
위치: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기산리
부지면적: 준농림전 3백50평(이중 2백50평 대지전용)
부지구입년도: 96년
건축공사기간: 98년 5월∼8월
건평: 25평
실내구조: 방2, 거실, 주방, 화장실
건축비: 평당 2백80만원
방위: 남서향
건물형태: 황토집
벽체구조: 황토벽돌
내외벽마감: 순수 황토+노리(해초 끓인 물)+스사(마의 일종)
지붕마감: 적삼목 쉐이크
바닥재: 장판, 전통종이장판
난방형태: 기름 보일러
식수공급: 지하수
마을 가구수: 12가구
■ 설계 및 시공: 동방황토그린(02-57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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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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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외부마감 돋보이는 흙벽돌 목조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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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외부마감 돋보이는 흙벽돌 목조주택
우선 사방 외벽으로 흙벽돌을 쌓았다. 흙벽돌의 외부로는 다시 나무 쫄대를 대고 단열재를 넣고, 그 위에 OSB합판을 댄 다음 타이벡을 붙였다. 그리고 정교하게 재단한 나무와 하프로그사이딩으로 최종 마감했다. 나무를 구해, 건조, 설계, 재단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계산에 의해 켜냈다. 결과는 한치의 오차도 없을 만큼 기둥과 바닥, 처마와 벽체 등 연결 부위와 각진 부분, 구석진 부분 등이 꼼꼼하게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이 사람은 농부다. 그을린 얼굴, 허름한 셔츠에 반쯤 비틀어 쓴 모자, 때로는 지나는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농담도 걸고… 좀 흐트러져 보이는 행동은 영락없는 촌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눈빛은 청년처럼 반짝이고 거리낌없는 말투에 논리는 정연했다.
지난 시절을 생각하면 수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안성 시내까지 나갈 차비가 없어 걸어다닌 일이며, 서울의 좋은 대학을 나와 처음 돼지를 키운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의 수군거림. 그러나 이제는 어엿한 돼지농장의 주인이 됐다.
4마리로 시작한 돼지 사육이 이제는 3천여 마리로 늘었고 이 돼지들은 이제 박용범씨를 산본농장의 사장님으로 만들어 주었다. 박용범 권순녀씨 부부가 안성으로 내려 온 것은 지난 83년.
얼마간의 서울생활이 녹녹치 않았고 결국 마땅한 일거리를 찾지 못하면서 이 곳 안성군 보개면 풍정리로 쫓기듯 내려왔다. 믿는 거라곤 이 곳에 있던 약간의 임야.
그러나 돈 한푼 없이 내려온 이들 부부에겐 시골 생활 역시 녹녹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농사 경험도 전무했던 터라 처음 얼마간의 이 곳 생활은 고생 그 차체였다.
그러면서 시작한 것이 돼지 사육.
86년 4마리로 시작한 돼지는 이듬해 8마리로 늘었고 그 이듬해엔 16마리로 느는 등 해마다 배로 늘어났다.
90년대 들어선 사육수가 급격히 늘며 서서히 살림도 나아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3천여 마리가 넘는 대식구를 거느리게 됐다. 이제는 여러면에서 안정이 됐고 뒤를 돌아볼 만큼의 여유도 생겼다.
지난해엔 집도 새로 지었다. 돼지가 ‘복돼지’인지 집도 아주 잘 지어졌다. 만족스러웠다. 박용범씨는 집이 완성되던 날 일꾼들에게 별도의 보너스를 두둑이 챙겨주고 기르던 돼지도 한 마리 선사했다.
내부는 물론 특히 외부 마감에선 틈새를 찾기 어려울 만큼 섬세하게 시공됐다.
건축은 지난해 5월부터 시작됐었다. 단층 43평 규모의 목구조 주택을 짓되 외벽체는 황토벽돌로 쌓기로 했는데, 결국 황토주택과 목조주택의 장점이 혼합된 셈이다.
시공업체에 맡기지 않고 목수들과 함께 직접 집을 지었다.
주위의 소개로 만난 한림목재 정공선 사장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정사장이 목수 소개는 물론, 목재의 구입에서 가공, 재단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도맡아 해결해 주었다. 우선 구옥을 헐고 기초 공사에 들어갔다.
기초 공사를 할 때에는 바닥에 참숯을 깔았는데 무려 2톤 트럭으로 두 대분이나 들어갔다.
아무래도 목재나 황토벽돌이 습기에 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숯을 최대한 활용했다. 우선 사방 외벽으로 흙벽돌을 쌓았다.
흙벽돌의 외부로는 다시 나무 쫄대를 대고 단열재를 넣고, 그 위에 OSB합판을 댄 다음 타이벡을 붙였다. 그리고 정교하게 재단한 나무와 하프로그사이딩으로 최종 마감했다. 나무를 구해 건조, 설계, 재단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계산에 의해 켜냈다.
결과는 한치의 오차도 없을 만큼 기둥과 바닥, 처마와 벽체 등 연결 부위와 각진 부분, 구석진 부분 등이 꼼꼼하게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박용범씨는 물론 함께 일하던 사람들조차도 신기하다할 정도로 오차가 없었다.
내벽마감은 흙벽돌에 OSB를 댄 다음 석고보드나 합판으로 마감하고 최종적으로 한지벽지를 발랐다. 내부마감 목재는 주로 백송이 쓰였고 외부는 물에 강하고 잘 마르는 스기목이 이용됐다. 이밖에 바닥은 거실의 경우 온돌마루(오크)를 깔았고, 방바닥은 전통종이장판에 콩기름과 들기름을 섞어 칠했고 치자를 이용해 적당히 색깔도 냈다. 지붕 마감은 아스팔트싱글.
건축은 착공 5개월 만인 12월쯤 완공됐다. 건축비는 평당 5백만원.
모두 43평 규모로 방 4개와 거실, 주방, 다용도실, 화장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던 만큼 안방이나 거실 등 전체적인 배치도 이같은 풍수의 이치를 적용 했다. 안방을 동쪽에 배치하고 주방을 동남쪽, 대문을 남쪽에 배치한 것도 모두 풍수의 이치를 따른 것이다. 지난해 12월 완공됐으니 이제 4달째를 맞고 있다. 지난겨울이 따뜻했음은 더할 나위 없다. 몇몇 부분에 대해 ‘이건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했으면....’
구조나 배치상의 아쉬움 정도는 있지만 아직 하자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박용범씨는 이에 대해 건축주와 일하는 사람들간의 신뢰와 꼼꼼하게 잘 지으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글·사진 류재청
■ 건축정보
위치: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남풍리
부지면적: 5백평(대지 3백평, 준농림전 2백평)
건축공사기간 :99년 7월~12월
건평:43평
실내구조: 방4개, 거실, 주방, 다용도실, 화장실
방위 :남향.
건축비 :평당 5백만원.
구조체: 목조, 황토 겸용
벽체구조 : 황토벽돌, OSB합판
내부마감: 석고보드, 한지벽지
외부마감: 나무 사이딩
단열재: 아이 쇼핑카
바닥재 :온돌마루(오크)
창호: 페어 이중창
지붕: 아스팔트 싱글
난방형태 : 기름보일러
식수: 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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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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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 15년만에 1만평 배과수원 주인되고 45평 목조주택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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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하여 지은 집
"귀농 15년만에 1만평 배과수원 주인되고 45평 목조주택 마련"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이 50이 되면 밀려 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김팔용씨는 일찌감치 귀농을 선택했다.
86년 결혼과 동시에 고향인 순천 낙안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귀농 15년째인 지금은 1만여평의 배과수원에서 연 6천만원의 소득을 올리며 살고 있다. 올 초에는 배 과수원 옆에 아담한 목조주택을 지었다.
순천시 낙안면은 낙안읍성으로 유명한 곳이다. 전통 한옥마을이 잘 보존돼 있어 찾는 사람들이 많다.
낙안읍성을 곁에 두고 있는 낙안면 이곡리 노암마을에 이곳서 배농사를 짓는 김팔용, 유영순씨 부부가 집을 지었다.
농촌총각들이 흔히 그렇듯 김팔용씨도 서울에 와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젊어서는 그래도 괜찮은데 나이 50이 넘어가면 젊은 사람들에 밀려 회사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마땅히 제자리도 찾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그들이 밀려서 가는 곳은 고향이었다.
그런 현실을 접하면서 김씨는 일찌감치 귀농을 결심했다. 나이들어 밀려가느니 힘있을 때 내려가 농사를 지어 자리를 잡겠다는 생각이었다.
농사를 지으면 우선 자신이 노력한 것만큼은 거둘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마침 고향에 사둔 땅도 있고 해서 결혼과 동시인 86년도에 이곳 순천 낙안으로 내려왔다.
총각시절 고향에 논 2천평을 사두었던 것을 밑천삼아 농사를 지었다. 그러면서 밭 3천5백평을 구입해 배과수원을 일궜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어 배밭이 1만여평으로 늘었고 연출액이 1억원정도 된다. 이것저것 빼고도 순수한 연소득은 6천만원정도 된다.
이렇게 생활에 여유를 찾자 집을 짓기로 했다.
오래된 농가주택에 살면서 불편함을 많이 느꼈던 터라 좋은 집을 짓고 싶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슬라브집으로 계획했으나 이것저것 챙겨 보다보니 목조주택이 그래도 마음을 끌었다.
슬라브집보다 비싼 것이 좀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집을 지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목조주택을 택했다. 이렇게 목조주택으로 결정을 내리는 데는 시공회사인 신일우드홈 이길호 사장의 덕분이었다.
사실 작년 배농사는 수익이 없었다. 태풍으로 95%가 낙과하여 한해 농사를 망치고 나니 집지을 자금이 모자랐다.
그래서 집지을 계획을 한해 연기할 마음을 먹고 있던 차에 이길호 사장이 집을 먼저 짓고 건축비는 나중에 줘도 된다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목조주택을 지어 올 초에 입주했다.
이 집은 대지 1백90평에 지어진 2층 2×4 목조주택이다.
농가주택으로 허가를 받아 1층 30평, 2층 15평 등 45평으로 지었는데 농가주택의 평수에 다소 초과하여 애를 먹었다. 외벽은 LAP 사이딩으로 마감했으며 지붕은 아스팔트 싱글로 마감했다.
거실 내부는 노출 서까래 및 루바로 마감했다.
평면상의 특징은 계단공간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점이다. 거실 한쪽에 계단을 붙여 거실에서 계단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계단실 아래는 창고를 넣었다. 2층은 거실을 많이 내 활동공간을 넓게 했다.
글·사진 김경래
■ 건축정보
위치 : 순천시 낙안면 이곡리 노암마을
대지면적 : 1백90평
연면적 : 45평(1층 30평, 2층 15평)
구조 : 2×4 목구조
외부마감 : LAP 사이딩
내부마감 : 거실벽 및 천장(노출서까래 및 루바), 거실벽(루바),
바닥(온돌마루), 방 벽및 천장(벽지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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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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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편안한 전원쉼터로 탈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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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가꾼 험준한 야산,
"이제는 편안한 전원쉼터로 탈바꿈"
나는 지난 20여년 간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이 최악의 조건들을 물리치고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꿔 놓았다.
처음 이곳에 정착했을 때 어려웠던 몇 가지를 말한다면 계곡 1km지점까지 도로가 전혀 없어 모든 것을 지게에 의존해 운반했다는 점이다.
또 농사를 지으면 수확도 하기 전에 멧돼지가 먹어 치우기도하고, 부엌에 있는 음식은 다른 산짐승들이 가져가곤 했다. 사방에 인적이라고는 없고 오로지 야생동물들과 우거진 산림들만이 대화의 대상이었다.
내가 50여년의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자연 속에서 살겠다는 변신의 결단을 내리게된 동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평소 도시 생활을 통해 너무나 인공적인 틀에 얽매여 사는 것에 대한 자연발생적인 욕구에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많은 사람들과 피곤한 씨름을 매일같이 해야하는 도시의 직장생활 속에서 온갖 정신적 번뇌와 신체적 장애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도시인들이 그렇듯 나도 지난 50년간의 도시생활이 그야말로 풍상으로 얼룩진 영욕의 생활이었다고 줄여 말할 수 있겠다. 숨막히는 도시생활에서 정신적으로는 쇄잔해가고 육체적으로는 황폐해 가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도시에서는 어느 곳 하나 평안한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구도자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동안 가정, 사회, 직장 등에서 부여받은 책임을 다 한답시고 나의 삶 대부분을 주마등처럼 흘려보냈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를 맞게된 나를 돌이켜 볼 때 삶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에 대한 최후의 자각일 수도 있겠다. 셋째는 나의 인생에 새로운 도전을 통해 재창조의 길을 열어 보겠다는 점이다. 그동안 겪어온 경험과 모진 풍상이 여물어 원숙해진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고, 이를 밑천 삼아 나만의 열매를 거두어 보고자 하는 꿈의 실천이라고 하겠다. 대략 위와 같은 동기와 배경을 토대로 나는 우선 근무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흔히 말하는 산좋고 물 좋은 곳, 그리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땅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때가 1980년 무렵이다. 나는 우선 평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이 부합되는 땅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 조건이란
▲서울에서 거리가 먼 산간지역일 것
▲포장도로가 없을 것
▲전기, 전화가 없어도 무방한 곳
▲언제나 그냥 마셔도 좋은 시냇물이 있을 것
▲농사를 지을 땅이 있고 허름한 집이 있을 것
▲가급적 강원도 지역일 것 등이다.
대략 위와 같은 조건을 가지고 전국으로 땅을 찾아 나선지 2년여 만인 81년 지금의 정착지인 강원도 원주군 신림면 황둔2리 창골 마을 매봉산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해발 6백m가 넘는 고지대이다. 내가 이 땅을 찾는 일은 꿈의 실현을 위한 첫 번째 관문이자 시련이었다.
땅이 좋으면 물이 마땅치 않는 등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자리를 쉽게 만나지 못했었다.
나는 당시 이 아름다운 골짜기의 뛰어난 산수를 벗삼아 나의 꿈이 성취될 때까지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이며, 변화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마음깊이 심었던 것이다.
당시 이 곳의 자연환경은 최고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인간 생활의 각종 편의시설면에선 최악의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지난 20여년 간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이 최악의 조건들을 물리치고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꿔 놓았다.
처음 이곳에 정착했을 때 어려웠던 몇 가지를 말한다면 계곡 1km지점까지 도로가 전혀 없어 모든 것을 지게에 의존해 운반했다는 점이다. 또 농사를 지으면 수확도 하기 전에 멧돼지가 먹어 치우기도하고, 부엌에 있는 음식은 다른 산짐승들이 가져가곤 했다.
사방에 인적이라고는 없고 오로지 야생동물들과 우거진 산림들만이 대화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이 험한 곳에서 아내는 나보다 먼저 와서 여자 홀몸으로 산짐승과 우거진 숲과 그리고 적막함과 싸우며 이 곳을 일구었다. 당시는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는데 그 기간이 무려 12년이나 되었다.
이제 나와 아내는 아직 달관한 단계는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되는지 정도의 농사지식을 갖게 됐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소득도 보장받는 위치에 서게 됐다. 농사는 자기 체험과 지역 특성에 알맞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그동안 경험에서 얻어낸 진리라 하겠다.
지금 내가 주력하고 있는 농사는 산채 중에서도 손꼽히는 두릅이다. 두릅은 독특한 향과 맛 그리고 높은 영양가를 지니고 있으며 각종 질병 예방에 효과가 뛰어난 건강 식품이다.
나는 또 오래전부터 수요가 증가될 것으로 예상되는 십여 가지의 조경수도 재배하고 있다.
어느덧 이 곳에 온 지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우연히 들리기도 하고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다녀갔다.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이나 등산객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이런 곳에서 적적해서 어떻게 사느냐’는 질문이다.
자못 측은해 하기도 하는 인상까지 풍기면서 하는 말에 나는 적잖이 저항감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런 질문들은 한마디로 내가 온몸으로 누리고 있는 대자연으로 부터의 벅찬 즐거움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에는 항상 무대답일 수밖에 없는데 설명하자면 대답이 길고 반문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마음속으로만 대답할 뿐이다.
보고 느끼는 것마다 감탄스럽고 손에 닿는 것마다 감사하며 아늑하고 편안하고, 내 인생 다하도록 다 깨달을 수 없을 만큼의 벅찬 것들이 대자연의 모습이다. 신이 내린 자연의 모습들을 어찌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다만 너무 엄청난 이 은혜를 혼자서 누린다는 것이 오히려 미안할 따름이다.
길이 있으되 눈먼 이는 보지 못해 못 가듯, 자연 속에서 살면서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안긴 것과 같은 행복감을 경험 없는 이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연 도시에서의 생활은 어떠한가.
어쩌다 서울에라도 갈라치면 몇 시간도 못되어 탈출 심리가 일어나곤 한다.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자니 우선 남을 밀어 부쳐서라도 내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자니 나 좋기 위해 남 기분 나빠야 한다. 소비할 것이 많으니 벌기 위해 다투어야 한다.
도시 공간 속에서는 고요히 생각하는데서 생기는 지혜가 없다.
물질 만능주의니 검소하게 살기 어렵고 그러니 겸양이나 덕이 있을리 없고, 욕심을 챙기다 근심을 얻게 되고, 참아내기 어려워 미워하게 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으니 생각이 그릇되고, 사람이 너무 많아 남을 공경할 수 가 없는 것이다.
그 뿐인가, 주변에서 대우받지 못하니 남을 원망해야하고 결국은 남을 해치고 앞서가려다 자기가 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헛된 것을 보고 허우적대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대자연의 모습은 그렇지가 않다. 특히 내가 정착한 이 곳은 신의 선물치고는 너무 과분하다.
아무 곳에서나 흐르는 물을 그냥 마신다. 요즘 세상에 아주 드문 일이다.
마루에 걸터앉으면 구름이 발밑으로 지나가 싸리재를 넘는다.
밤하늘에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 가슴속까지 씻어주는 시원한 공기, 언제나 반겨주는 푸른 초목들과 그 곳에서 노니는 이름 모를 새들. 진달래는 벌써 피어 만발하고 뒤뜰 복사꽃은 내일일지 모레일지 빨간 꽃망울이 터질 것만 같은데.....
너무 아름다워 넋을 일고 보노라면 험상궂은 인생의 시름이 멀리멀리 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적적할 시간이 있단 말인가.
글 김형태/사진 류재청
■ 건축정보
위치 : 순천시 낙안면 이곡리 노암마을
대지면적 : 1백90평
연면적 : 45평(1층 30평, 2층 15평)
구조 : 2×4 목구조
외부마감 : LAP 사이딩
내부마감 : 거실벽 및 천장(노출서까래 및 루바), 거실벽(루바),
바닥(온돌마루), 방 벽및 천장(벽지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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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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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없는 초당에는 봄볕만 가득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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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주인없는 초당에는 봄볕만 가득하고 … ”
목포나 해남 아니면 그보다 더욱 먼 섬 보길도, 소록도 등 남도여행의 백미는 섬이다. 그러나 강진 어디쯤에서 여장을 푼다면 다산초당은 남도여행의 또다른 즐거움이다. 남도의 해풍이 씻겨가는 아담한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는 다산초당은 울창한 수림 속에서 적막하고 고즈넉하다.
우리나라의 봄은 아름답다. 어느 강산 어떤 마을을 들러도 흐드러져 꽃이 있고 봄볕은 탐스럽다. 이런 봄날의 남도여행은 몸에 와 감기는 듯한 봄바람이 있어 더욱 정겹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의 만덕산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을 찾아가는 길도 꽃잎이 봄볕과 같이 흩날리고 있었다.
입구 표지판에서 부터 숨이 가빠질 정도의 경사를 이룬 진입로를 따라 초당에 들면 좋게 말해 아담한 어쩌면 좀 초라해 보이는 집이 하나 있다.
울창한 수림에 가려 있어 그 그림자로 더욱 작아 보이는 이 집은 유배지에서의 곤궁했던 다산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다산 초당은 말 그대로 애초에는 초가집이었다. 1936년 훼손돼 철거하였던 것은 1958년 5칸 도리 단층기와집으로 중건했다.
이때 다산이 우거했던 동암과 제자들이 유숙했던 서암을 같이 복원했다. 다산초당은 조선소나무로 지어졌다. 애초 다산초당은 굴원처사 ‘윤단’이 초가로 건립해 후손을 가르치던 서당이었다.
1808년 다산이 강진 유배 중 이곳으로 옮겨와 제자들과 강학을 했던 곳으로 1818년까지 거의 10여년을 보냈다. 초당의 바로 옆 동쪽에는 동암이 있다. 일명 송풍암이라 불리는데 근처에 소나무가 무성해 솔바람이 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동암에서 다산은 저술을 하며 실학을 집대성했다.
‘다산동암’이란 현판글씨는 다산이 직접 쓴 친필이다. 다산초당과 동암의 사이에 연못이 하나 있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라 이름붙여진 이 연못은 다산초당에서 멀리 내려다 보이는 탐진강에서 돌을 주워 산처럼 쌓아 만들고 그 주변에 백일홍, 대나무 등을 심었다.
그리고 산 속에 있는 물을 나무로 만든 홈통을 거쳐 연못으로 흐르게 해 비류폭포라 부르고 연못에는 잉어를 길렀다. 다산초당에서 연못을 거쳐 동암을 지나면 천일각(天一閣)이란 정자가 하나 있다.
다산이 멀리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정약전을 그리워 하며 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산등성이에 세워졌다. 기거할 당시에는 없었으나 후손들이 나중에 지었다. 정자에서 내려다 보면 탐진강과 강진만이 훤히 보인다.田
글·사진 김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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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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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자연경사 효율적으로 이용해 지하층도 1층과 같은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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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색있는 집 짓기
"대지 자연경사 효율적으로 이용해 지하층도 1층과 같은 효과"
이집은 단지의 자연 경사도를 그대로 살려 지었다. 지하층이 집의 전면에서 보면 지하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뒤 쪽에서 보면 1층과 같은 효과가 있다. 이렇게 집의 후면이 트여 있어 지하층이지만 채광과 환기효과가 좋다. 또 지붕 경사도를 이용해 2층 8.2평 공간을 화실로 꾸몄다.
용인시 양지면 평창리 일대는 전원주택 단지들이 많다.
영동고속도로 양지나들목이 바로 앞에 있어 서울 진입이 쉽고
용인 시내를 거쳐 분당지역과의 연계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전원주택단지 좋은집마을의 대지 1백22평을
구입해 화가가 목조주택을 지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인 이 집은 지층 21평, 1층 31평, 2층 8평 등 총 60평이다.
이 주택은 건축상 2가지 특징이 있다.
첫번째 특징은 지붕 경사도를 이용해 2층 공간을 화실로 꾸몄다는 것이다. 이 집의 2층은 8.2평으로 화실로만 쓰이는데 지붕의 경사도를 이용하여 여유 공간을 만들었다. 두번째 특징은 단지의 자연 경사를 그대로 살려 집을 지어 지하층이 집의 전면에서 보면 지하에 묻혀 있어 보이지 않지만 뒤 쪽에서 보면 1층과 같은 효과가 있다.
이렇게 집의 후면이 트여 있어 지하층이지만 채광과 환기효과가 좋다. 이런 이점을 최대한 살려 2층은 화실로만 사용하는 대신 지층에 방 2개와 화장실을 넣어 자녀들의 공부방으로 꾸몄고 특히 지하 주차장을 통해 곧바로 실내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동선처리를 했다.
1층에는 방 3개, 거실, 주방 및 식당, 화장실 2개, 다용도실 등으로 꾸며 지하와 합쳐 집 전체에서 방이 5개나 된다. 거실벽의 경우 비닐페인트로 마감했으며 바닥은 온돌마루판이다.田
글·사진 김경래
■ 건축정보
위치 : 용인시 양지면 평창리 좋은집마을
대지면적 : 4백㎡(약 1백22평)
구조 : 목구조
건축면적 : 1백21.67㎡(60.32평)]
연면적 : 60.32평(지층 20.84평, 1층 31.27평, 2층 8.22평)
건폐율 : 30.42%
용적률 : 49.85%
외부마감 : 외벽(하디사이딩), 지붕(아스팔트싱글)
내부마감 : 방(바닥-고급장판지, 벽-실크벽지),
거실(바닥-온돌마루판, 벽-비닐페인트)
난방 : 심야전기보일러
급수 : 지하수
단지가구수 ; 14가구
■ 설계 및 시공 : (주)좋은집(0335-338-6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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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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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법산 그림자 물결이 되는 섬강 가에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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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은 전원주택
"호법산 그림자 물결이 되는 섬강 가에 지은 집"
논들로 평평한 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밋밋하고 조용한 마을이지만 그 평야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호법산을 끼고 섬강이 휘돌아 흘러가는 강변마을이 하나 있다. 이곳에 있는 집은 우선 외관의 다양함과 현란한 지붕선이 눈길을 끈다. 특히 현관은 주택의 후면에 두어 단지 내 도로에서 곧바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였고 강쪽으로 주택의 전면을 두어 창을 많이 내고 넓은 데크를 두었다.
영동고속도로 문막 나들목을 나가면 우측으로는 원주시내 방향이 되고 좌측으로 문막읍 소재지가 된다.
이곳 읍 소재지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부론, 귀래를 지나 충주로 가게 되는데 이 지역은 산세가 좋고 특히 남한강을 끼고 있어 경관이 좋아 전원주택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전원주택 단지도 몇 곳 있다.
보통 원주와 문막지역에서 전원주택지를 찾는 사람들은 이들 지역을 많이 둘러보게 된다.
그러나 문막에서 청주 쪽이 아닌 그 반대 방향의 안쪽 마을도 경관이 좋다. 언뜻 보기에 논들로 평평한 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밋밋하고 조용한 마을이지만 그 평야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호법산을 끼고 섬강이 휘돌아 흘러가는 강변마을을 하나 만날 수 있다.
호법산의 기암절벽을 따라 흘러가는 섬강은 남한강의 원류가 되는데 수질이 맑아 토종 민물고기들이 많이 살고 있다. 서울서 사업을 하는 건축주가 이곳에 집을 지은 것은 작년 말이다. 전원주택단지로 분양하는 부지 2백80평을 구입해 1층 32평, 2층 15평인 총 47평의 목조주택을 지었다. 현재 주말주택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아예 거처를 이곳으로 옮길 계획을 갖고 있다.
에스엠하우징에서 시공한 이 집은 우선 외관의 다양함과 현란한 지붕선이 눈길을 끈다. 특히 현관은 주택의 후면에 두어 단지 내 도로에서 곧바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였고 강쪽으로 주택의 전면을 두어 조망감을 위해 창을 많이 내고 데크를 두었다. 외부에서 시각적으로 접촉이 거의 없는 강변 쪽을 향해 주택을 앉히다 보니 주택의 전면이 숨겨지게 되었고 주택의 후면이 더 많이 노출되는 집이 되었다. 시공사인 에스엠하우징의 한삼녕 사장은 이 집의 설계상 특징을 네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전면의 강을 조망하기 위해 넓고 격자무늬가 없는 거실창문을 설치했으며 강쪽의 시선을 가리는 데크의 난간도 없앴다. 거실과 모든 방에서 데크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둘째 층간 소음을 줄이기 위해 방음재료를 사용하는 등 방음 시공에 특히 신경을 썼다. 셋째 도로와 인접한 후면 출입구와 좌측면의 외관도 신경 써 입체적인 설계를 했다. 넷째 강이 있는 주택 전면으로 17평 정도의 데크를 설치했다.
이 집의 골조는 외부 2×6, 내부 2×4로 했고 외벽은 시다 사이딩으로 마감했다.
내부공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2층 홈바다. 2층이 15평으로 다소 협소하지만 복도의 한켠에 1층 거실을 내려다 보고 또 뻐꾸기창을 통해 전면의 호법산과 섬강을 바라볼 수 있는 홈바 공간을 두었다.
건축비는 평당 3백40만원이다.田
글·사진 김경래
■ 건축정보
위치 : 강원도 문막읍 호암전원주택단지
대지면적 : 2백80평
구조 : 외벽 2×6, 내벽 2×4(북미산 햄퍼 볼구조)
외부마감 : 웨스턴 레드 시다 사이딩
내부마감 : 벽(실크벽지), 계단(홍송), 몰딩 및 도어(홍송), 천장(미송루바)
지붕마감 : 아스팔트 싱글
바닥재 : 온돌마루(비취목)
데크 : 북미산 햄퍼
건평 : 47평(1층 32평, 2층 15평)
실내구조 : 1층(방2, 거실, 주방, 다용도실, 화장실, 창고),
2층(방1, 화장실, 거실, 데크2, 홈바)
난방 : 기름보일러, 벽난로
식수 : 지하수
건축비 : 평당 3백40만원
■ 시 공 : 에스엠하우징(0344-979-2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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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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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장교 경험 살려 직접 지은 30평 목조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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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손으로 집짓기
"공병장교 경험 살려 직접 지은 30평 목조주택"
나왕으로 구조체를 세웠고, 벽체 외벽은 12mm 합판을 댄 다음 베벨사이딩으로 마감했다. 내벽은 석고보드를 대고 벽지로 마감을 했으며 벽체 사이엔 100mm의 스티로폼을 넣었다. 난방은 기름보일러였던 것은 지난달 심야전기보일러로 교체했고, 식수는 마을 상수도를 이용한다.
군대에서 공병장교로 근무했던 경험이 집을 짓는데 큰 도움이 됐다.
군 복무 기간이 무려 12년이나 됐으니 제대 무렵엔 이미 토목이나 건축에 대해 전문가가 돼있었다. 95년 지어진 이 집도 당시의 경험을 살려 손수 지은 집이다. 시공업체에 맡기지 않고 토목공사와 설계는 물론 건축까지도 인부들을 고용해 직접 지었다.
이 집은 30평 규모의 단층 목조주택으로 95년 3월, 공사에 들어가 5월에 완공됐으며 실내 구조는 방 4개에 거실, 주방, 다용도실, 화장실 등이다. 집 뒤로는 12평정도의 별도 창고도 있다.
작은 평수임에도 짜임새 있고, 아기자기하게 구성돼 있는데 이 또한 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왕으로 구조체를 세웠고, 벽체 외벽은 12mm 합판을 댄 다음 베벨사이딩으로 마감했다. 내벽은 석고보드를 대고 벽지로 마감 했으며 벽체사이엔 100mm의 스티로폼을 넣었다. 난방은 기름보일러였던 것은 지난달 심야전기보일러로 교체했고, 식수는 마을 상수도를 이용한다.
지붕마감은 아스팔트 싱글. 한일호 윤봉남씨 부부가 이 곳 충북 제천시 봉양읍 옥전2리에 터를 잡은 것은 지난 95년.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으니 노년만큼은 한적한 시골에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처음엔 강원도가 고향이었기 때문에 강원도에 자리를 잡을 생각이었으나 강원도 여러 곳을 다녀보아도 좀처럼 마음에 드는 땅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 만난 곳이 지금의 땅인데 당시 신앙생활을 함께 하던 주위 분들의 소개로 이 곳을 와보고 큰 갈등 없이 계약을 마쳤다. 1천7백여평 규모의 준농림전으로 평당 1만1천원을 주었다. 당시 이 곳은 그야말로 산골이었다.
화전민이 살던 곳으로 주변 여건이나 도로 사정 등이 아주 열악했다. 이런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곳을 택했던 이유는 자연환경이 뛰어나다는 점 때문이다. 동네의 끝자락에 위치해 한적한데다 산골짜기를 타고 내린 물이 개울을 이뤄 집앞을 지난다. 모든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 굳이 아쉬움을 꼽는다면 지목상 전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논농사를 지었던 곳이라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불가피했다.
이를 매립하고 땅을 고르는데 적잖은 시간과 경비가 들었고 길도 좀 더 넓혀야 했다. 건축은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됐는데 평당 1백50만원 정도로 총 4천5백만원이 들었다. 한일호 윤봉남씨 부부는 완공과 동시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이 곳으로 내려왔다. 이제 이 곳에 온 지도 5년이 지났고 다섯 번째의 봄을 맞았다.
처음 생각대로 이 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 길이 조금 넓어지고, 서너 세대에 불과하던 주위의 집들이 10여호로 늘었다는 게 변화의 전부다. 이제 5월로 접어들며 앞산이며 뒷산의 숲이 녹음으로 우거질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초목의 변화만의 시간의 흐름을 말해줄 뿐이다.田.
글·사진 류재청
■ 건축정보
위치: 충북 제천시 봉양읍 옥천2리
부지면적: 준농림전 1천7백평
부지구입년도: 95년
건축공사기간: 95년 3월∼5월
건평: 30평(창고 12평 별도)
실내구조: 방4, 거실, 주방, 화장실, 다용도실
건축비: 4천5백만원(평당 1백50만원)
방위: 남향
건물형태: 목구조
벽체구조: 12mm 합판
내벽마감: 석고보드, 벽지
외벽마감: 베벨사이딩
단열재: 스티로폼 100mm
지붕마감:아스팔트싱글
난방형태: 기름 보일러(최근 심야전기보일러 대체)
식수공급: 마을 상수도
마을 가구수: 11가구
■ 설계 및 시공: 건축주 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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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8